문제(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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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전한의 5대 황제. 시호는 문황제(文皇帝). 휘는 항(恆). 한고조 유방의 넷째 아들이자 혜제의 이복동생이다. 어머니는 고황후 박씨.[2]
문경지치라는 태평성대를 실현했던 중국사의 대표적인 명군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2. 생애[편집]
2.1. 황제가 되기 전[편집]
유항(= 문제)은 황제가 되기 전인 어린 시절, 한나라의 제후국 중 하나인 대나라의 왕을 자칭한 진희의 난이 진압된 후, 6살의 나이(기원전 196년)에 대나라의 제후왕으로 책봉되었는데, 부친인 한 고조가 죽고 여후 통치기에는 어머니 고황후 박씨가 살아생전 유방의 총애를 많이 받지 못했고 황태자 교체 사건 때도 후계자 싸움에 뛰어들지 않은 덕에 여후의 눈 밖에 나지 않아 아이러니하게도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 오히려 여후가 자결한 이복동생 조공왕(趙共王) 유회(劉恢)를 대신해 유항을 조나라의 왕으로 삼으려고도 했던걸 보면 유항 일족이 밉보이진 않은 모양.[3] 이후 여후가 죽자 여씨 일가를 몰아낸 중신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사실 이것도 속사정을 보면 재미있는 것이, 원래 황제 자리는 관영 등과 함께 여씨 일가를 몰아내는데 공을 세운 제애왕(齊哀王) 유양(劉襄)[4] 이 처음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반정 도중 유양이 유씨 종친을 협박해서 군사를 뜯어낸 일로 원망을 가진 해당 종친이 황제 즉위 단계에서 유양의 성격을 걸고 넘어지면서 반대하는 바람에 조정에서도 의견이 갈리게 된다. 반대 측은 대외적으론 제애왕 유양의 어머니의 친정인 사(駟)씨 가문의 평판이 좋지 않아 제2의 여씨 꼴이 날지도 모른다는 구실을 내세웠다. 이에 여씨를 몰아내는데 일조한 진평과 주발 등의 공신들도 편승하자 유양의 즉위는 불가하다는 쪽에 힘이 모였고, 이렇게 되고 보니 마찬가지 이유로 성질이 포악하기로 유명했던 한 고조의 7남 회남왕 유장도 제외되어버렸다.
이렇게 유력 후보들이 차례차례 목록에서 빠지고 보니 당사자로서도 당황스럽게 외가가 큰 탈이 없고 성격도 모나지 않았던 유항이 황제로 추대되어버린 것이다. 오죽하면 유항이 "날 죽이려고 함정을 판 거 아닐까?"라고 잠시나마 의심했을 정도였지만, 결국 장안에 온 그는 황제가 된다. 이에 제애왕 유양은 제나라로 돌아갔고, 1년 후 사망한다. 제왕(齊王)은 아들 유칙이 이어받았고, 문제는 여씨를 몰아내는데 공은 세운 유양의 동생 유장에게도 부친 유비가 과거 여후의 딸 노원공주에게 사실상 반강제로 헌납한 성양군을 돌려주고, 왕에 봉하는 것으로 보상을 끝낸다.
2.2. 문경지치: 피폐해진 나라를 일으키다.[편집]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황제가 된 문제는 당시 끝난지 얼마 안 된 초한전쟁과 현재진행형이던 흉노와의 대립 등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한나라를 복구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사실 전한의 번영은 문제의 통치 없이는 설명하기 힘들 정도이다. 문제는 철저할 정도로 검소하게 살며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이고, 나라의 경제력을 발전시키며 힘을 키웠다.
전반적으로 백성들에게 고단한 사업을 자제하고, 도가적인 무위지치의 정치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행하였다.[5] 흉노와는 비교적 원만하게 지내면서 수비 위주의 전술로 나가 굳이 큰 전쟁을 벌이지 않았고, 그러는 동안 아들인 경제와 더불어 이른바 문경지치라 불리는 정치로 한나라의 힘을 크게 키웠다. 국제관계에서 저자세이긴 해도 싸움을 피하는 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음을 몸소 보여준 셈이다.
본인 스스로도 대단히 검소하였다. 큰 건물을 지으려다 그리하려면 황금이 많이 필요함을 알고는 포기하였다. 옷도 장식이 없는 검은색 옷을 주로 입었고 자신의 부인들에게도 사치를 줄일 것을 당부하였다. 봄이 되면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백성들에게 농업과 누에치기에 힘쓸 것을 권장하였다.
또한 각 관청에 명해 백성들이 농사 지을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지시하고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씨앗과 식량을 대여해주었다. 당시에는 혁신적이게도 국가나 왕의 재산을 필요에 따라 개방하였으며, 상공업을 발달시켜 경제 발전으로 세금이 많이 걷히자 조세를 고제가 정한 15분의 1에서 30분의 1로 절반이나 줄였다.
3. 평가[편집]
12월에 조서를 내렸다.
"법이라는 것은 다스리는 올바른 기준이다. 이제 법을 범하여 이미 판결이 난 후에 죄 없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까지 이에 연좌시켜서 처자를 잡아들이기에 이르니 짐은 아예 채택하지 않겠다. 그 자식을 잡아들이고, 여러 사람이 연좌되는 율령을 없앤다."
《자치통감》 13권
정월, 담당 관원들이 진언해 말했다.
"태자를 일찍 세우는 것은 종묘를 받들어 모시려는 까닭입니다. 청컨대 태자를 세우십시오."
(중략)
황제가 대답했다.
"초왕은 [짐의] 막내 작은아버지로 연세가 높아 천하의 이치를 보고 들은 게 많으며, 국가의 대체적 강령에도 밝소. 또한 오왕은 [짐의] 형으로 은혜롭고 어질며 덕스러운 것을 좋아하오. 회남왕은 [짐의] 동생으로 덕을 겸비해 짐을 보좌하고 있소. 이들이 어찌 미리 세운 후계자가 아니겠소! 제후왕, 종실, 형제 및 공신 중에 현명한 데다 덕과 의리를 갖춘 자가 많으니, 만약 덕을 갖춘 자를 선발해 짐이 끝마칠 수 없는 일을 돕게 한다면, 이는 사직의 은총이며 천하의 복이라 할 수 있소. 지금 그들을 선발해 등용하지 않고 기어코 내 아들이어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짐이 어질고 덕 있는 자들을 잊고서 제 자식에게만 마음을 두고 천하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오. 짐은 정말 이렇게 하고 싶지 않소."
대체로 듣건대 유우씨(有虞氏) 때에는 죄를 지으면 의관에 그림을 그리고 특이한 복장을 입게 해 치욕으로 삼게 했을 뿐인데도 백성들은 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들었다. 무슨 까닭에서 그랬겠는가? 지극하게 잘 다스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법은 육형(肉形)이 셋이나 있어도 간악함이 멈추지 않으니, 그 잘못은 어디에 있는가? 짐의 덕이 각박하고 밝지 못해서가 아니겠는가? 짐은 참으로 스스로 부끄럽다. 교화의 방법이 순수하지 못해 어리석은 백성들이 죄로 빠져드는구나. 『시경』에 이르기를 "다정하고 자상한 군자여, 백성의 부모로다."라고 했다. 지금 사람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교화를 베풀지도 않고 형벌을 먼저 가하니, 간혹 잘못을 고쳐 선을 실천하려 해도 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짐은 이 점을 참으로 가련하게 생각하노라. 무릇 형벌이란 사지를 잘라 버리고 피부와 근육을 도려내 죽을 때까지 고통이 그치지 않으니 얼마나 대단히 아프고 괴로우면서도 부덕한 것인가. 어찌 이것이 백성의 부모 된 자의 뜻에 걸맞은 것이겠는가. 육형을 없애도록 하라!
《사기》 효문본기
찬하여 말했다.
"효문황제는 자리에 나아간 지 23년인데 궁실이나 정원, 거기(車騎)나 복식 등에서 더 늘린 바가 없었다. 백성에게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없애 백성들을 이롭게 해주었다. (중략) 몸에 검은색의 두꺼운 명주옷을 입었고, 총애하는 신부인은 옷에 땅을 끌지 않게 했으며, 휘장에는 무늬와 수를 그려넣지 않아 도타움과 소박함을 보임으로써 천하에 솔선수범했다. 패릉을 조성할 때는 모두 와기(瓦器)만 쓰고 금,은,동이나 주석으로 꾸미지 않았으며, 기존의 산을 이용했으므로 별도의 무덤을 만들지 않았다.
남월왕 위타가 스스로 자리에 올라 황제가 됐으나 귀하게 대우하고, 덕으로써 그를 껴안으니 타가 드디어 (스스로를) 신하라 칭했다. (중략) 오로지 덕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데 힘쓰니, 이 때문에 해내(海內)가 크게 부유해지며 예와 의로움이 크게 일어나고 옥사를 처단한 경우가 (1년에) 수백 건에 머무니 거의 형벌을 쓰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아아! 어질도다!"
《한서》 문제기
아들인 경제와 더불어 한나라의 국력을 대폭 키운 장본인으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 중 한 명으로 평가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과서 같은 책에서 언급되는 빈도는 손자인 무제에 비해 적은 편인데, 이는 문제가 극단적으로 대외사업을 자제하여 후세에 자랑할 만한 눈에 띄는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한 탓이 크다.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러한 큰 대외사업은 결국 백성들만 죽어나가는 일이다. 무제가 멋있고 폼나는 흉노와의 전쟁에 장장 40년간 매달려, 나중에는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수준까지 이어져나가 엄청난 수준의 물자와 인적 자원을 소비한 것과 대조된다.[6]
그렇다고 군사 문제에 깜깜하기만 한 것도 아니라서, 흉노와 전쟁을 벌일 때면 적을 쫓아내는 건 허락하되 역으로 쳐들어가 전쟁을 확대시키는 것은 막았는데, 이 때문에 여러 장군들은 공을 세울 기회가 없다고 아쉬워하기도 했으나, 세류영이란 말을 만들어내기도 한 장본인인 장군 주아부를 크게 보았고, 그때는 파릇파릇한 애송이던 이광을 칭찬하여 재능을 발휘하게 하였다.
문제는 도가식 무위지치를 추구했다지만 유가식 도덕 이상주의의 정점인《맹자》역시 숭상해서, 국정 토론 중 줄기차게 책 속의 구절을 인용하며 도덕 정치를 이끌었고, 요순의 선양 설화를 굳게 신뢰하여 "왕위는 마땅히, 내 아들이 아니라 천하에서 가장 덕 있는 이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니, 경들은 지금부터 전국을 수소문해 그런 사람을 찾아내주오."라고 선언했다가 신하들이 거듭 뜯어 말린 뒤에야 "에이..."하면서 포기하였고, 덕이 있는 자로 세력 있는 제후왕들을 제시했을 정도로 황제의 자격에서 덕을 중요시 하였다.[7]
최후의 유언도 검소함이 그대로 드러나보이는 말이다.
"나의 장례는 소박하게 치르라. 묘지를 크게 만들지 마라. 금은보화를 함께 매장하지 마라. 장례 기간을 너무 길게 하지 마라. 전국의 백성들과 관리들의 복상은 단 3일만 허락한다. 간소하게 처리하라."
허나 이러한 문제의 치세에도 비판할 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우선 경제 복구 와중 호족과 대상인 세력들이 불법과 탈법을 통해 자라나는 것에 대해 정책적인 감시와 제재를 하지 않은 채 "너무 무위지치적 태도를 보인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또 말년에는 뱃사공 출신인 등통이라는 자를 총애해 등통이 굶어 죽을 운명이란 점쟁이의 말을 듣고 절대 굶어죽지 않게 하겠다며 등통에게 화폐 주조권을 사사로이 내려주는 실책도 범했다.[8][9]
결론적으로 한 문제는 모든 군주들이 꿈꾸는 태평성대를 실현한 인물로 지금도 평가받고 있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말로 과장은 좀 있겠지만 "이 시기의 백성들은 모두가 부유해져서 땅바닥에 돈이 떨어져도 줍지 않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왕조 초기의 기틀을 다지고 태평성대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당대에는 주나라의 성왕에 비견되기도 하였다.
4. 여담[편집]
- 《서경잡기(西京雜記)》에 따르면 한 문제는 준마 아홉 필을 얻었는데, 모두 세상에서 제일가는 명마들이었다고 한다. 말의 이름은 각각 부운(浮雲)ㆍ적전(赤電)ㆍ절군(絶群)ㆍ일표(逸驃)ㆍ자연(紫燕)ㆍ녹이총(錄離驄)ㆍ용자(龍子)ㆍ인구(鱗驅)ㆍ절진(絶塵)이었다. 문제는 자기가 얻은 아홉 필 명마를 구일(九逸), 말을 모는 사람은 왕량(王良)이라고 불렀다.
- 황제라는 직위에 있음에도 동생만을 걱정했던 평범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문제에게는 회남왕 유장이라는 이복동생이 있었는데, 유장은 자신이 문제와 친밀한 황족임을 바탕으로 교만해져 황실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한 문제는 유장이 어머니 조씨가 사망하는데 일조한 심이기를 죽였을때도 그를 이해한다는 식으로 딱히 벌하지 않았으나, 유장은 오히려 더욱 교만해지더니 급기야 반란을 획책하다가 발각되었다. 이에 문제는 사형에 해당된다는 문초 결과에도 불구하고 유장을 살려주되 봉국을 빼앗고 촉군으로 유배시키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는데, 유장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도중에 굶어죽었다. 그리고 뒤늦게 이를 보고받자 문제는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며 동생 유장의 시신을 껴안고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 조선의 사도세자가 가장 존경했던 황제이기도 하다. 사도세자는 고조와 무제보다 문제와 경제의 치세가 더욱 아름다웠다고 평했다. 무조건적으로 고조와 무제가 문제보다 못했다는 건 아니고 각 황제들의 공과 과를 나누어 인정했는데, 사실상 전쟁의 시대나 다름없던 고조의 시대와 거듭된 원정으로 나라가 흔들렸던 무제의 시대보다 평화와 국가의 성장이 주를 이루었던 문제와 경제의 성세가 더 아름다운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이다.
- 2021년 12월 섬서성에서 문제릉이 발견되었다. #
- 후궁 중 신부인을 총애했는데, 신부인은 궁중에 있을때도 항상 황후와 같은 자리에 앉았다. 당연히 이는 격식에 어긋났지만 문제가 신부인을 총애해서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문제가 상림원(上林苑)에 행차하자 원앙(전한)은 신부인의 자리를 일부러 황후 두씨보다 좌석을 뒤로 끌어내어 버렸다. 당연히 신부인과 문제는 크게 화를 내고 궁으로 돌아갔다. 이에 원앙은 문제를 쫒아가서 간언했는데, 이게 당시 사람들에겐 매우 살벌한 내용이었다.
"신은 듣기에 존귀함과 비천함은 그 서열이 분명해야 상하가 서로 화합한다고 했습니다. 금일 폐하께서 이미 황후를 세우셨으니 신부인은 즉 첩실입니다. 첩실과 정부인을 어찌 동열에 같이 앉힐 수 있습니까? 폐하께서 첩실을 사랑하신다면 후하게 상을 내리십시오. 폐하께서 신부인을 대하시는 바는 후에 신부인에게 필시 화가 미치게 됩니다. 폐하께서는 옛날 사람돼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