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당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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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구당서》(舊唐書)는 당나라(唐)의 사서로 24사(二十四史) 중에 하나다. 940년에 편찬을 시작해 945년에 완성되었다고 전해지나 신당서에서만 전해져오는 사서이며 현재는 북송 시대에 신당서를 제작하기 이전 1033년에 당나라의 권위를 높히기 위해 각색되어 제작된 것으로 본다. 원본이 존재하지만 원본은 청나라 때 제작된 사본이다.
945년, 《구당서》 200권이 완성되었다고 전해진다. 618년 당 고조가 당나라를 건국한 후부터 906년 당 소종까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 멸망 직후의 사료 부족으로 후반부는 부실하고, 전반부도 선행의 여러 사료에서 발췌한 것이기 때문에 일관성이 부족하나 처음에는 《당서》라 했으나, 송대(宋代) 인종 치세에 《당서》를 다시 편찬했기 때문에 《구당서》라 부르게 되었다.
2. 상세[편집]
장소원이 <본기>를 담당했고, 가위가 당 무종 회창 연간 이전까지의 <본기>와 <열전>을 보충했으며, 조희는 <윤문>을 담당했다. 많은 사람들은 유구(劉昫)가 《구당서》 편찬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무근이다. 단지 감수국사의 직분으로 이를 소제에게 헌상했을 뿐 직접적으로 간여한 바는 없다. 원래 이름은 《당서》(唐書)였으나, 송나라의 학자 구양수가 편찬한 《당서》와 구별하기 위해 《구당서》, 《신당서》로 나누었다. 송나라 때 《신당서》가 많이 보급되자 비교적 《구당서》는 소외되었다. 명나라 세종 가정제 때 복간되었지만 널리 유통시키지 못했다. 청나라 고종 건륭제 때 다시 복간되었지만 역시 《신당서》와 차이가 나는 부분이 많아서 이용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사림(羅士琳)의 《구당서교감기》 66권이 간행되자 많은 문제가 해소되었다. 이외에도 장도(張道)의 《구당서의의》 등이 있다.
《구당서》가 신속하게 편찬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바로 당나라 때 사서 편찬 체제가 확립되었기 때문이었다. 당나라 이전까지만 해도 사서는 한 개인의 의지와 역량을 통해서 집필되거나, 사서 편찬이 이루어질 때 일시적으로 사관을 형성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런데, 당나라 때부터는 사관이 영구적으로 존재하게 되어 따로 사서를 편찬하는 시기가 아니어도 평상시에 사관이 자료 수집과 정리 작업을 했다. 이미 당 고조 때 기거랑과 기거사인을 두어 황제의 언행을 기록하도록 하는 《기거주》(起居注)가 있었고[1] , 무측천은 매월마다 재상이 전반적인 국정의 상황을 기록하여 이를 사관에 보내는 《시정기》(時政記)를 만들었다. 사관에서는 《시정기》와 《기거주》외에도 각 관청에서 올라오는 사료들을 수집하며 보관했다.[2] 이러한 각 사료들을 기반으로 삼아 사관내에서 사서를 편찬하기도 했는데, 《국사》(國史)와 《실록》(實錄)이다.
《국사》는 《실록》을 바탕으로 기전체(紀傳體)로 쓰여진 정사로 당나라 초기부터 진행되어 왔다. 《사통》(史通) <정사고금>에 따르면, 당 태종 때 요사렴(姚思廉)이 30권의 《기전》을 편찬하기 시작하여 당 고종 때는 장손무기와 허경종(許敬宗) 등이 증보하여 100권을 편찬했다. 무측천 때는 우봉급(牛鳳及)이 고조 무덕 연간부터 고종 홍도 연간까지의 《기전》을 재정리했으나 냉소적이고 괴이하며 허망한 발언을 기록했고, 사건을 서술함에 왜곡된 자료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여, 무측천의 명령에 의해 유지기(劉知幾)와 오긍(吳兢) 등이 다시 《기전》을 뜯어 개수, 보완했다.
《실록》은 황제 재위 기간 동안 있었던 일련의 사건, 사고들을 모아 편년체로 정리한 것인데[3] , 당 고조부터 당 무종까지 이르는 《실록》 25부 785권을 갖추었다.[4][5]
완성 및 주상(奏上)은 후진 개운(開運) 2년(945) 6월로, 그 이듬해에 후진이 멸망하는 바람에 편찬책임자가 도중에 교체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고, 덕분에 한 인물이 두 개의 <열전>으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거나 초당(初唐) 시기에 비해 만당(晩唐) 시기에 대한 기술이 다소 빈약하다는 등의 문제점이 제기되기도 한다. 때문에 후세의 평판은 좋지 않았고, 북송(北宋) 시대에 다시 《당서》(唐書)가 편찬되기에 이르렀다(《신당서》). 그러나 거꾸로 당대 《실록》 등의 1차 사료의 원문들이 고스란히 인용되어 있어, 사료적인 가치에 있어서는 오히려 《구당서》가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발해사의 해석 문제에서 《구당서》와 《신당서》는 각기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고려의 별종이다."
라고 기술해, 발해의 건국 시조인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혹은 속말말갈계 고구려인)이냐 말갈인이냐에 대해 한국 학계와 중국, 일본 학계의 해석이 다르다."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속민이던 족속인데 성은 대씨였다."
참고로 《구당서》에서는 고구려에 대해서 부여의 별종이라고 평하기도 했다("高麗者 出者夫餘地別種也")
또한 당시 일본 열도에 대해 <왜국전>(倭國傳)과 <일본국전>(日本國傳) 등 두 열전이 입전되어 있는데,
고 되어 있다. 또한 《구당서》에는일본국은 왜국의 별종이다. 그 나라가 해 뜨는 변두리에 있으므로 나라 이름을 '일본'이라고 했다. 또는 왜국이 스스로 그 이름이 아름답지 않음을 꺼려서 일본이라고 고쳤다고도 하고, 일본은 예로부터 소국이었는데 왜국의 땅을 병합했다고도 한다.(日本國者, 倭國之別種也. 以其國在日邊, 故以日本爲名. 或曰: 倭國自惡其名不雅, 改爲日本. 或云: 日本舊小國, 倂倭國之地.)
고 기재되어 있는데, 당시 일본 정치의 중심이 교토임을 고려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산은 오늘날 일본 알프스라 불리는 히다 산맥(飛騨山脈), 키소 산맥(木曽山脈), 아카이시 산맥(赤石山脈)을 말하는 것이며 그 너머의 모인(毛人)은 아이누족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6] .일본국의 남쪽과 서쪽은 큰 바다를 접하고, 동쪽과 북쪽은 큰 산으로 막혀있으며, 큰 산 너머에는 모인(毛人)의 나라가 있다.(西界南界咸至大海東界北界有大山爲限山外即毛人之國)
이 기록은 송대 초기의 《태평어람》에도 인용되었는데 이 기록에 대해서는 편찬 과정에서 존재했던 일본의 존재에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설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일본의 모리 기미유키(森公章)는 일본이라는 국호 성립 이후에 최초의 견당사(遣唐使)가 파견되었던 702년 이후에도 국호 변경 사유를 일본측에서 특별히 밝히지 않았을 가능성을 지적했고, 오오바 오사무(大庭脩)는 이를 간단히 편찬 과정에서의 실수라기보다는 <왜국전>과 <일본국전>의 왜국(일본) 관련 기사의 중절된 시간대에는 백강구 전투 및 임신의 난이 있었으며, 당시의 중국측에는 임신의 난에 의해 '왜국'(덴지 덴노의 정권)이 무너지고 '일본국'(덴무 덴노의 정권)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존재했기에 이에 대해 확실하게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이설로써 모두 병기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3. 구성[편집]
<본기>(本紀) 20권, <지>(志) 30권, <열전>(列傳) 150권으로, 합계 20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3.1. <본기>[편집]
3.2. <지>[편집]
3.3. <열전>[편집]
4. 의의와 평가[편집]
《구당서》는 5대 10국이라는 분열된 시기에 빠르게 찬술되었기 때문에 체계적인 정리와 균형적인 사료 해석을 갖추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신당서》가 새로이 편찬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청나라의 고증학자 조익은 《이십이사차기》에서 당 무종 이전까지의 역사는 기존의 편년체《실록》과 기전체《국사》를 필사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도 지적했듯이 <순종기>(順宗紀)와 <헌종기>(憲宗紀)는 각각 한유(韓愈)와 장계(蔣系)가 쓴 글이라고 밝혔다. 물론, 무종 이전의 역사는 간결한 문장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무종 이후의 역사는 따로 사관에 의한 사서가 없기 때문에 글의 통일성이 없고, 비판적인 검토를 제대로 하지 않아 문장이 잡다했다. 그런 이유로 당대 원시적인 문장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세부적이며 장황하게 내용이 보존되어 있어 사료적인 가치가 크다.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을 저술할 때 기초 자료를 《신당서》가 아닌 《구당서》에서 참고한 것은 《구당서》가 가지고 있는 매력 덕분이었다.
《구당서》의 편찬자들은 이민족인 거란족의 도움을 받았던 후진의 지식인으로서, 이민족에 대한 편견이나 멸시보다는 독자적인 민족이나 국가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서술 과정에서 이민족에 대해 비하하는 내용이 없고, 비교적 사실 중심이자 중립적으로 서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당나라와 직접적인 전투를 진행하여 적대적인 감정이 강하였을 돌궐(괵튀르크)이나 회흘(위구르), 토번(티베트) 등에 대해서도 단순히 당제국과의 사신 교환과 책봉 그리고 전쟁 관계를 기술하고, 첫머리에 민족의 형성과정, 풍속, 제도, 지도자 등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구당서》는 당나라 멸망 직후의 사료 부족으로 후반부는 부족하고, 전반부는 선행 사료에서 발췌했다는 점이 있으나, 당대 원시적인 문장이 그대로 남아있어 사료적인 가치가 크다.
5. 관련 고사성어[편집]
- 나작굴서(羅雀堀鼠)
- 묘서동처(猫鼠同處)
- 반식재상(伴食宰相)
- 양각야호(兩脚野狐)
6. 참고자료[편집]
구당서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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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제의 언행을 기록한 것은 이미 남북조시대와 수나라때 제도적으로 상설화된 바가 있어 체계적인 사관 시스템은 이미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기도 한다.[2] 중서성, 태사, 홍려시, 태상시, 종정시, 예부, 호부, 병부 등의 중앙 관서와 지방의 자사, 현령, 도독, 도호, 행군대총관에 이르는 모든 관부에서는 활동 상황과 수집된 정보를 매월 보고토록 규정하고 있다.[3] 남조의 주흥사가 편찬한 양 무제에 관한 《양황제실록》(梁皇帝實錄)이 기원이어서 맹아는 이미 남북조시대부터 있었다고 본다.[4] 송나라 때 송민(宋敏)이 당 선종 이후 5대 황제의 기록을 보충했다.[5] 한유의 개인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순종실록》 다섯 권을 제외한 나머지 《당실록》은 유실되어 현전하지 않는다.[6] 487년에 편찬된 《송서》에 따르면 왜국은 당시에도 남조 송나라에 표를 올려 동쪽의 모인(毛人) 55개국을 정벌했다("東征毛人五十五國")고 보고하는 등 동쪽에 존재하는 모인(毛人)의 국가를 언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구당서》에서 언급된 모인(毛人) 역시 아이누족이라는 점은 정설로 취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