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선/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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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선은 수도 서울한반도의 관문인 부산을 잇는 우리나라 최초의 간선 철도다. 1905년 1월 1일 영등포 - 초량 간 단선으로 개통됐고, 수송량이 늘어나자 1940년 복선화됐다. 경부선은 경인선, 경의선, 경원선 등과 이어지며, 전국의 크고 작은 도시와 주요 경제지역을 연결하는 중추적 기능을 맡고 있다. 특히 2004년에는 경부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대한민국 육상교통의 혁명을 가져왔다.

한국철도공사 공식 소개문


1. 연표
2. 상세
2.1. 노선 계획과 공사
2.2. 대한제국기
2.4. 해방 이후 - 고속철도 개통 이전까지
2.5. 전철화 시대
2.5.1. 전철화가 늦은 이유?


1. 연표[편집]


경부선 단선철도 시대
1901년
6월 경부철도주식회사 설립
8월 20일 서울 영등포에서 북부기공식
8월 21일 착공
9월 21일 부산 초량에서 남부기공식
1905년
경성 - 초량 구간 개통[1]
1906년
경부철도주식회사가 통감부 철도관리국으로 합병되며 국유화
상동역 개업
1908년
부산(초창기 위치)까지 개통
경의선과 직통운행이 이루어져 신의주 - 부산 간 특급열차 '융희호'가 운행
시흥, 부산 개업
진위역 폐지
1909년
부강역 개업
1910년
증약역 폐지
1911년
11월 1일부터 만주까지 직통 급행 운행, 일본 - 조선 - 만주를 잇는 국제선 기능을 하게 됨
1916년
대신, 아포, 구미 개업
금오산 폐지
1918년
약목, 신동 개업
1919년
서대문에서 남대문으로 기점 변경, 경의선과 연결됨
남성현 개업
1921년
지천역, 삼성역, 사상역 개업
1922년
내판역, 세천역 개업
1925년
직지사역, 고모역 개업
1929년
전동역 개업
1930년
회덕역 개업
1934년
직산역 개업
1937년
신암역 개업
1938년
미륵역 개업
경부선 복선철도 시대
1939년 6월
영등포 - 대전 구간 복선화
1940년 4월
삼랑진 - 부산진 구간 복선화
1944년 8월 1일
경성 - 영등포 간 복복선화[2]
부곡 개업
1945년 3월 1일
대전 -삼랑진 간 복선화, 전 구간 복선화 완료
1945년 6월 16일
대성역 개업
1946년
매포역 개업
1950년
대성역 폐지[3]
1952년
송탄역 개업
1954년
세류역 개업
1956년
증약역 개업
1964년
각계역 개업
1965년
사곡역 개업
1966년
안양풀장역, 지탄역, 연화역 개업
1967년
가풍역, 신거역 개업
1968년
박람회역 개업 및 폐지[4]
1969년
구로역, 동대구역 개업
안양풀장역 폐지
경부선 복선전철 시대
1974년
서울 - 수원 구간 전철화[5]
증약역, 가풍역 폐지
1978년
서창역, 대전조차장역 개업
1979년
율전역, 두정역 개업
1981년
구로 - 수원 구간 복복선화
1982년
석수역 개업
1984년
신도림역 개업
1988년
금정역 개업
1991년
영등포 - 구로 구간 3복선화
1992년
미륵역 폐지
1996년
용산 - 영등포 구간 3복선화
신길역 개업
1998년
독산역 개업
1999년
화명역 개업
2000년 7월 20일
병점 - 오산 구간 상행선 이설
2000년 12월 6일
병점 - 오산 구간 하행선 이설
2003년
수원 - 병점 구간 전철 · 복복선화
2004년
KTX 운행 개시
대전조차장 - 옥천 구간, 신동 - 부산 구간 전철화
2005년
병점 - 천안 구간 전철·복복선화, 천안 - 조치원 구간 전철화
세마역, 오산대역, 가천역 개업
경부선 준고속전철 시대
2006년
조치원역 - 대전조차장, 옥천 - 신동 구간 전철화
부설 101년 만에 전 구간 전철화
진위역, 평택지제역 개업
2010년
당정역 개업
2013년
서울 - 부산 전구간 ATP(Level 1) 사용 개시
2022년
서대구역 개업


2. 상세[편집]



2.1. 노선 계획과 공사[편집]


경인선에서 분기하도록 결정되었는데, 이 때문에 수도권 서남부를 크게 우회하게 되었다. 이는 지금의 서울 - 오산 구간이다.

구로 - 안양 구간은 원래의 시흥로를 비껴서 안양천을 따라 지었다. 안양시와 수원시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화산 능행길로 놓아져 정조대왕이 능행차 및 융건릉을 참배하러 가며 왕래하던 통로였고,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 현재의 수원시 정조로와 이외 경수대로와 겹친다. 오산시 구간은 복복선화로 이설되기 전까지 병점기지선을 지나 죽미령을 피했다. 지금 노선이 만들어진 건 2005년이다.

경유지 확정을 시간 순서에 따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1894년 추풍령 횡단지점 확정
  • 1899년 경인선에서 분기하는 노선으로 결정[6]
  • 1901년 전의 - 영동 구간을 전의 - 공주 - 노성 - 진산 - 금산 - 영동으로, 대구 - 삼랑진 구간을 대구 - 현풍 - 창녕 - 영산 - 삼랑진으로 확정
  • 1903년 전의 - 영동 구간을 전의 - 조치원 - 회덕 - 영동으로, 대구 - 삼랑진 구간을 대구 - 경산 - 청도 - 밀양 - 삼랑진으로 변경

지도를 보면 공주 경유는 한반도 남부를 반 바퀴 도는 노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호남을 경부선의 직접 영향권에 두는 것과 동시에 당시 한국 정부에서 추진하던 서울 - 목포 간 철도(호남선)나 추가 건설되는 철도가 경부지선 형태가 되도록 강요할 목적이 있었다. 일단 경부선을 지어놓고 논산에서 분기하는 호남선까지 일본이 빠르게 선점해 자체 부설 움직임을 원천 차단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건설 전 수 차례 탐사 루트는 부침이 심했다.[7]

청주, 상주는 추풍령이 최적 횡단지점으로 결론나면서 완전히 묻혔다. 청주 - 증약 - 추풍령 안도 검토했지만 이러면 현재 대청댐에 수몰된 지역을 관통해 지나간다. 한국 쪽 요인으로 인해 변경된 것은 대한제국 황실이 엮여있던 금정 - 수원 구간밖에 없다. 원래는 최단거리 지지대고개를 관통할 예정이었지만 융건릉 지세에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가 돌아 왕송호수공원 인근을 경유하게 되었다.

전의 - 영동 구간이 변경된 것을 두고 공주에서 부설을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그럴싸하게 돌았으나, 대둔산 줄기 한복판을 돌파해야 해서 당대에는 불가능했던 것뿐이다.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러일전쟁을 앞둔 일본 군부의 압력으로, 당시 일본군만주까지 병력을 실어날라야 했다. 결국 충청도를 우회하는 공주 경유도, 백두대간을 관통하는 청주 경유도 모두 무산되었고, 최대한 장애물을 피해 가는 전의 - 조치원 - 회덕 - 영동으로 급하게 변경되었다. 마찬가지로 대구 - 삼랑진 구간도 소하천이 많아 교량 건설을 많이 해야 하는 노선 대신 밀양강을 따라가도록 바뀌었다.

1905년 5월 1일 서울 영등포에서 부산 초량까지 개통된 경부선 운행 소요시간은 14시간이었다. 융희호 증기 기관차로 평균속도는 시속 31㎞였고 최고속도는 51㎞였다.


2.2. 대한제국기[편집]


경부철도주식회사의 공식 설립일은 광무 5년(1901년) 6월로 알려져있으나 그 설립 준비는 이미 년초부터 있었고, 출발은 황실 소유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는 경부철도주식회사의 주식을 고종황제는 2천주, 황태자 순종은 1천주, 영친왕은 5백주를 매수한다면서 그 일을 저리할 전권 대리할 관리로 민영철을 임명한다는 황제칙명서가 각각 보관되어 있다.

고종황제 경부철도주식매수 칙명의 유물 청구기호는 RD00068이다. 그런데 이 주식매수의 칙명 작성일은 광무 5년 2월로 되어 있어서 경부선 건설 계획은 최소한 경부철도주식회사 설립 이전인 1901년 초나 1900년 말부터 고종은 준비했다고 봐야 맞는 것이 된다는 걸 증명하는 유물이다.


2.3. 일제강점기[편집]


한일합방 이후 조선총독부 철도국 산하 일본의 국유철도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내지인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중심지 서울을 잇는 역할을 하였다. 도쿄에서 도카이도 본선산요 본선을 탄 다음, 시모노세키역에서 부관연락선을 통해 부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경부선을 따라 서울(경성)까지 가는 식이다. 이 당시에는 도쿄 기준으로 서울행이 하행이고 부산행이 상행이었다. 또한 일본 정부와 일본 자본은 이미 부설된 경부선을 따라 조선 각지를 잇는 지선 철도들을 건설했고, 이에 따라 한반도의 중심 간선으로 굳어졌다. 이러한 철도들은 조선 물산을 일본으로 이출하고 일본 상품들을 조선으로 실어나르는 역할을 하였다.

한반도 교통망이 경부선 철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따라서 전통 주요 도시들 가운데 충주, 상주같은 데에 철도가 들어가지 않게 되어 한반도 국토 구조가 변했다. 충주와 상주는 쇠퇴했고, 후에 호남선이 분기하면서 시골이었던 대전대도시로 성장했다.

한편 경의선남만주철도 개통으로 일본과 조선을 넘어 만주 및 중국 대륙을 잇는 역할도 하였다. 최우등열차 아카츠키(KTX 서대동부 열차의 전신)를 비롯하여 히카리, 코아(흥아) 등이 편성되고 화물열차도 증편되는 등 트래픽이 갈수록 증가했고, 이를 감당해내기 위해 1939년 한반도 주요 간선 철도 중 최초로 복선화되었다.


2.4. 해방 이후 - 고속철도 개통 이전까지[편집]


해방 이후에도 한국 철도의 제1간선 역할을 해냈다. 6.25 전쟁 때 큰 피해를 입었지만, 당시 도로 인프라가 안 좋던 상태의 경부선 단절은 부산항에서 올라오는 외국 지원품을 못 받는다는 것을 뜻했고, 그렇기에 전쟁 중에도 어떻게든 복구하여 운행을 지속할 수 있었다.

정전 후에는 미국으로부터 EMD SD9, EMD GT26CW 같은 디젤 기관차를 투입하여 증기 기관차를 퇴역시키고 수송력을 증강하며 한반도의 수송 대동맥 역할을 수행했지만, 1960년대 이후 한국 정부가 경부고속도로로 대표되는 도로 확충 정책을 펼치며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럼에도 경제가 경부연선을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성장하면서 화물 수요와 여객 수요가 모두 빠르게 증가했다. 정부 역시 수송량이 많은 경부선 인프라 개선에는 무심하지는 않아서 초특급열차 관광호를 신설했고, 서울 - 부산 간 소요시간을 4시간 10분까지 줄이는 등 한국 철도의 혁신의 중심에는 경부선이 있었다. 1986년에는 이미 새마을호로 이름을 바꾼 관광호에 최고 시속 150km인 DHC 디젤동차를 투입했다.

과포화된 경부선 및 경부고속도로, 경부축 항공 노선의 트래픽을 분산하고자 1990년대에 경부고속철도 계획이 입안되었고 이에 따라 경부고속선이 2004년 개통하면서 서울 - 부산 간 장거리 수요가 KTX에 흡수되었다. 이때부터 경부선 일반열차는 점차 단편성화되었고, KTX와의 환승 제도를 도입함과 같은 조금씩 중단거리 위주의 운송 체계를 갖춰 나갔다.


2.5. 전철화 시대[편집]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과의 직결을 위해 수원역까지 전철화되었다. 수원 - 병점은 수원역 장내 충돌사고로 인해 2003년 4월 30일 전철화를 완료한 후 개통하였다. KTX 운행을 위해 2004년 신동 - 부산 간을 전철화하였고, 수도권 및 충청남도 승객 수송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2005년 1월 20일 병점 - 천안 간을 이설 및 복선 전철화했다.

태백선 입석리 구간과 쌍룡역, 중앙선 핵심 화물역인 도담역의 시멘트 수송, 경기도 의왕 시멘트 공장단지 그리고 호남선, 전라선 연선 시멘트 공장과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 2005년 7월 1일 천안 - 조치원 - 대전 구간이 완료됐다. 이후 부산진(부산 북항)부터 의왕ICD까지 원활한 컨테이너 수송을 위해 2006년 12월 8일 대전 - 동대구 구간을 전철화하면서 1905년 영업시작 이래 101년 만에 441.7㎞의 경부선 전 구간 전철화가 완료됐다.

2007년 전기 기관차 견인 무궁화호가 투입되고 2010년 오봉 - 부산진 간 전기 기관차 견인 컨테이너 화물열차가 투입되었다.


2.5.1. 전철화가 늦은 이유?[편집]


철도청 시절에는 디젤기관차와 DHC 디젤동차로만 다니는 비효율의 연속이었다. 8000호대 전기기관차가 있었지만 시멘트, 석탄 등을 가득 싣고 태백산맥을 넘나드는 태백선, 영동선을 위해 산 것이다. 힘 좋게 하려고 속도가 느리게 조정되다 보니 여객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2004년 KTX 운행을 위해 전철화를 시작하였는데, 전기기관차가 속도도 빠르고 지연회복도 잘 하고 전기료도 저렴하여 이제는 한국철도공사 대표 기관차가 되었다.

중앙선석탄시멘트경상북도, 강원도에서 수도권으로 실어나르는 중요한 경로이다. 태백선, 영동선, 문경선으로 수송하여 제천이나 영주에서 집결해 실어나르는 구조인데, 이 물동량은 경제 부흥 초창기부터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초과하기 시작하였다. 겨울철이면 석탄이 제때 공급되지 못하여 연탄이 모자라 난방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게 다반사였다.

이 때문에 중앙선을 복선화하려 하였지만, 험준한 지형을 따라 지어졌기 때문에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들 것으로 예상되어 중지되었다. 봉양 - 제천구둔 - 양동 구간 등 극히 일부에 한해 시도되었다. 대신, 청량리 - 제천 간에 신호장, 교행역을 설치하고 가능한 한 많은 화차를 연결하기 위하여 전철화를 진행하게 된다. 당시 국내 평균 출력은 증기기관차는 1000 - 1500마력, 디젤기관차는 1500 - 3000마력, 당시 최신이었던 8000호대 전기기관차는 5300마력이었다. 1973년 6월 중앙선이 전철화되어 선로 용량 및 수송력이 증가하자 그제서야 동절기 연탄 파동 문제가 사라진다.

한편, 중앙선의 폭증하던 물동량을 복선으로써 어느 정도 여유있던 경부선으로 우회시켰으면 되지 않았겠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사이를 잇는 충북선 상태가 좋지 않았다. 충주 - 제천 간 인등산 고갯길은 상당한 경사 때문에 열차도 힘에 부쳐 사람 걸음걸이 속도로 운행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문경선, 가은선 석탄 수송을 담당했던 경북선태백선 등지에서 발차하는 열차들을 접속시키기에는 너무 우회한다. 또한 경북선 어등 - 김천에 위치한 여남재 고개도 한몫하는데, 25퍼밀이라는 구배를 가지고 있어 당시 디젤기관차들로는 운행에 무리가 있었다.

즉, 단선에서 수송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중앙선이 먼저 이루어진 것이다. 북한 철도가 한국에 비해 전철화율이 높은(약 80%)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한국이 처한 군사적 상황도 있는데, 철도는 귀중한 전시 물자 및 인력 운송 수단이다. 그렇기에 적의 제1 공격 목표이기도 하다. 이때 전기기관차는 전력 공급이 중단되면 아무 역할도 못하고 고철덩어리가 된다. 전쟁시 주요 타격 대상은 활주로, 석유탱크, 변전소인데 그만큼 전기기관차가 취약하다. 그래서 한국은 거의 모든 철도가 전철화됐음에도 의무로 일정 수량 이상 디젤 기관차를 구비해 놓아야 한다.

종합하면 분단이라는 특수상황과 도로 위주 교통 체계로 굳이 할 생각을 하지 않다가 기존선 전철화로 가닥을 잡으며 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1] 안양역, 군포역, 수원역, 병점역, 오산역, 진위역, 서정리역, 평택역, 성환역, 천안역, 소정리역, 전의역, 조치원역, 신탄진역, 대전역, 증약역, 옥천역, 이원역, 심천역, 영동역, 황간역, 추풍령역, 김천역, 금오산역, 왜관역, 대구역, 경산역, 청도역, 밀양역, 삼랑진역, 원동역, 물금역, 구포역, 부산진역, 초량역 개업[2] 당시에는 구로역신도림역이 없었으며, 영등포 - 구로역 구간은 경인선과 병주했을 뿐이었다.[3] 정보가 상당히 미비하여 실제로는 시기 불명이지만 그나마 폐지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연도로 추정하였다.[4] 한국무역박람회의 접근성 개선을 위해 개업한 임시승강장이기에 박람회 폐장일인 동년 10월 20일에 폐역되었다.[5] 남영역, 대방역, 가리봉역, 관악역, 명학역, 화서역 개업[6] 경부철도주식회사는 경인선 부설권을 매입한 자본이 주축이었다. 이후 경인철도주식회사는 경부철도에 흡수된다.[7] 「일제, 이미 128년 전 진천·보은 경부선 철도노선 답사」, 뉴시스, 2020-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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