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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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민주자유당 전국구 제14대 국회의원인 이현수가 그의 사위이다.
2. 생애[편집]
1986년 7월 17일 KBS2 <11시에 만납시다> 인터뷰 영상.
2.1. 초년기[편집]
1916년 9월 11일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원주군 문막면 문막리로 이주하였다.# 1937년 경성법정학교[1] 를 졸업하고 일본 니혼대학 전문부 법과에 편입하여 1939년 졸업했다.
2.2. 해방 이전[편집]
1935년 8월 보통문관시험, 1938년 8월 조선변호사시험, 1939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와 사법과에 각각 합격했다. 1941년 3월 전라남도 강진군수, 1943년 10월 전라남도 무안군수로 재직했다. 1945년 2월부터 해방될 때까지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무관으로 종사했다.
2.3. 해방 이후[편집]
8.15 광복 후 국민대학교 교수(1946~1950)로 재직하며,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총무과장 겸 법률기초과장, 국회 법제조사국 국장, 법전편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강원도 원주군(지금의 강원도 원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강원도 원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함재훈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4. 정계 활동[편집]
1948년 6월 8일 헌법 제정 전문위원 10인에 뽑혔으며,[2] 국회법기초위원회 기초 전문위원 5인에도 뽑혔다.[3]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당선되었다. 제2대 국회에서 부의장이 된 조봉암과 가까워져,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조봉암의 선거사무장을 맡았고 1956년 진보당 창당에 참여하여 간사장을 맡았다. 1958년 1월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되었으나, 1959년 2월 대법원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
1960년 사회대중당 결성을 주도했다. 같은 해 7월 사회대중당 소속으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원도 원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혁신계 정치인들에 대한 탄압 과정에서 투옥되어 1968년 4월까지 7년간 복역했다. 출소 후 박정희 정권에 맞서 3선 개헌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1970년 신민당에 입당하였고, 1971년 7월 신민당 소속으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정 선거구에서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이 된 것을 계기로 여당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1980년 12월 민주정의당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81년부터 1992년까지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1, 12,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국회 부의장(1983.4~1985.4), 민주정의당 대표위원(1988.5~1989.1), 민주자유당 상임고문(1990.3) 등의 직책을 역임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여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를 지지하였다.
2001년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그 후 유족들이 혁명재판소 판결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여 무죄 판결을 받아 냈고, 이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하여 승소판결을 받았다.#
3. 선거 이력[편집]
4. 소속 정당[편집]
5. 기타[편집]
2009년 발간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 있다.
6. 둘러보기[편집]
[1] 1910년 설립되어 1946년 미군정에 의해 폐교되었다. 서울법대 전신인 경성법학전문학교와는 다른 학교다.[2] 유진오,고병국,임문환,권승렬,한근조,노진설,노용호,차윤홍,김용근,윤길중 [3] 전규홍,노용호,차윤홍,김용근,윤길중 [4] 원주군[5] 원주군[6] 원성군[7] 영등포구 정[8] 서대문구, 은평구[9] 제2~5대 국회의원 선거벽보는 확인 되지 않고 있다. 이는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벽보 보존의 필요성을 못 느껴 선거벽보를 보존하지 않은 것이 그 원인으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을 비롯한 1950년대 부터 정치를 시작한 원로 정치인들의 선거벽보 상당수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10] 3당 합당 합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