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건우

덤프버전 :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동명이인인 대한제국의 황족이자 친일파에 대한 내용은 이완용(1872) 문서
이완용(1872)번 문단을
이완용(1872)#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이완용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제2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대한제국 제22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李完用[1] | Ye Wan-yong


파일:이완용 초상화.jpg

출생
1858년 7월 17일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 백현리
(現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226-1)[2]
사망
1926년 2월 11일[3] (향년 67세)
경기도 경성부 옥인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4]
묘소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본관
우봉 이씨 (牛峰 李氏)[5]

경덕(敬德)

일당(一堂)
재임기간
제22대 내각총리대신
1907년 6월 24일 ~ 1910년 8월 29일[6]
제2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1912년 8월 9일 ~ 1926년 2월 12일

[ 펼치기 · 접기 ]
부모
아버지 이석준 (생부)[1] · 이호준(李鎬俊) (양부)
어머니 신씨 (생모) · 민씨 (양모)
형제자매
이윤용
배우자
양주 조씨
자녀
장남 이승구(李升九)[2]
차남 이항구
손자 이병길[3]
종교
불교[4]
소속 단체
(제명)[5]
작위
조선귀족 후작
약력
학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의정부 참정대신, 내각총리대신
조선귀족 백작, 중추원 고문
조선귀족 후작, 중추원 부의장
비고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친일인명사전 등재



파일:이완용 67세.jpg

노년의 이완용

파일:20190419_56_10157.png

1907년 이완용 내각 출범 기념 사진. 가운데 아이는 영친왕. 영친왕 바로 왼쪽 뒤에 있는 인물이 이완용 이다.

1. 개요
3. 평가
4. 가족
5. 여담
6. 대중매체에서
7. 관련 문서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구한말관료이자 외교관, 친일반민족행위자.

일본 제국을미사변을 일으켜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늘린 후 김홍집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이 정권을 장악하자 춘생문 사건아관파천을 일으켰다. 이후에 독립협회에 합류했지만 친러파였다는 이유로 제명당했고, 양부인 이호준이 사망하는 등의 악재가 겹치자 몇년간 은둔해 있었다. 1904년 복귀해 친일파로 전향했다. 친일파로서 을사조약을 적극적으로 체결하고 고종의 강제 퇴위를 주도했으며, 정미 7조약, 기유각서,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여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유일하게 모두 포함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후대에도 친일파, 매국노의 대명사격으로 일컬어지곤 한다.[7]

정식으로 창씨개명한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李家 完用).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이가 완용'. 사실 이완용 뿐만 아니라 창씨개명을 쓰던 동시대 대부분의 인물들이 자신의 한국명과 똑같거나 비슷하게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았다.

2.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완용/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평가[편집]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관료로서의 능력은 출중하나, 그것을 매국에 악용해 아무리 명석한 사람이라도 돌이킬 수 없는 악행들을 저지르면 어떤 평가를 받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완용은 생전에도 주위에서 총명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고 판단이 명확했으며 처세술에 능한, 흔히 말하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데 최적화된 사람이었다. 이완용과 비슷한 시기에 같이 매국 행위를 해 조선귀족 직위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이후 처신을 잘못하거나 재산 관리에 실패하여 일제강점기 중에 몰락하거나 패가망신한 사람도 많았다. 매국도 능력이 없으면 못 한다. 하지만 명석한 두뇌를 매국 행위와 개인의 이득을 위해 타인에게 크나큰 피해를 가하는 일에 사용했으니 두고두고 비판을 받는 것.

관료로서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많이 받았지만, 의외로 능력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그가 광무개혁 중반에는 부친상 때문에 등용되는 것이 불가능하였으나, 초반에는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대신직이 아닌 관찰사직에 머물렀다. 당시 대신직에는 서자였던 김가진도 등용되었는데, (적어도 신분적으로는) 이완용이 안 될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관찰사로서의 문제 해결 능력은 높이 평가 할 수 있다.[8] 이러한 능력을 가진 다른 관료는 윤영렬 정도로 볼 수 있다.[9]

을사조약 체결, 고종의 강제 퇴위 주도, 정미 7조약, 기유각서, 한일병합조약 체결 등 악질적인 친일 행각으로 인하여 국내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라 하면 바로 이완용이 연상될 정도로 매국노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을 확고히 했다. 그가 사망한 지 98년이 된 현재까지도 국가와 민족을 배신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비판받고 있다.[10]

이완용과 동시기에 똑같이 매국노 짓을 한 송병준[11], 윤덕영 같은 경우도 이 정도로 악명을 지속적으로 얻는 않았다는 것을 보면 이완용이 얼마나 대표적이고 악랄한 매국노였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심지어 그의 후손들도 국가를 상대로 환수된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하고, 승소까지 한 다음 외국으로 도망가는 악행을 저질러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있다.

현대에 와서조차 대한민국 국민들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을사오적 중 나머지 넷은 몰라도 이완용 만큼은 대부분 알고 있으며, 북한의 김일성과 함께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인물이자 한민족의 반역자로 평가받고 있다.[12] 대한민국에서 누군가를 이완용에 비유하는 것은 거의 서양 국가에서 누군가를 유다 이스카리옷, 아돌프 히틀러에 비유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모욕으로 통한다. 이완용의 유명세 때문에 이완용을 제외한 을사오적들은 이름 정도만 알려져 있고,[13] 비을사오적 매국노들은 여러 자극적인 에피소드들을 남긴 송병준, 윤덕영을 제외하면 직접적으로 국권 피탈에 관여하지 않은 민영휘보다도 인지도가 떨어지는 상황이다. 심지어 중국에서도 우페이푸량스이를 비판할 때 모욕적 표현으로 쓰는 사례가 있었다.

이완용? 그는 한마디로 기계 같은 사람이다.

호러스 뉴턴 알렌

이완용은 처세술에 뛰어나고 영민했던 인물이었다. 이완용과 교류했던 미국인 선교사 알렌은 그를 한마디로 요약하면서 머리가 잘 돌아가고 영민하지만, 영혼이 없는 것 같은 기계 같은 사람이라는 평을 내렸다. 다만 의외로 검소한 습관을 지향했다고 한다. 낭비가 심하기로 유명한 궁중식단[14]의 병폐를 비판하고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가져왔던 사람이 이완용. 당시 궁중식단의 경우, 거하게 상을 차린 후 윗사람이 다 먹지 못한 음식들은 그대로 아랫사람에게 주었다. 먹다 남긴 거나 먹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덕을 나눠준다는 의미였다.[15] 그래서 반찬을 집을 때에는 결코 남이 먹다 남긴 것처럼 헤집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다만 그러다 보니 식사시간이 한없이 길어지고, 임금부터 다 먹고 나면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곤 했다. 그래서 이러한 비효율성을 타파하고 덤으로 음식물 쓰레기도 줄이고자 했다.[16]

아이러니하게도 이완용은 생전에 일본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고 한다. 한문이라면 눈 감고도 한시 몇 편 줄줄 쓸 만큼 통달했을 사대부 입장에선 어지간한 단어는 다 한자어인지라 문법 몇 개만 익히면 되는 일본어는 전혀 배우지 않고, 완전 이질적인 영어는 원어민 수준으로 배워 익힌 걸 감안하면 굳이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걸로 보인다. 영어는 처음엔 육영공원에서 배웠지만, 서툴러서 미국에 파견되었을 때는 큰 활약을 못했다. 하지만 오랜 미국 생활로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나중에는 조선총독부 관료들보다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테라우치 마사타케 같은 일본인들과 대화할 때는 영어를 사용하거나 통역사와 함께 다녔으며, 정사를 맡을 때도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 영어를 할 줄 아는 일본인과 했다. 여건이 충분함에도 일본어를 배우지 않은 데서 알 수 있듯 일본인 인맥을 넓히려 하지도 않아서 그가 공직에 있을 때 아는 일본 정치인들은 이토나 테라우치 총독 정도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1906년 학부대신[17] 재임 시절 공교육에 일본어 수업 시간 도입을 추진하고, 가장 수업시수가 많은 과목으로 만들어 일본에서는 "이완용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4. 가족[편집]


  • 친부 이호석 / 친모 신씨
    • 이완용(1858 ~ 1926) / 妻 양주 조씨
      • 장남 이승구 (1879 ~ 1905) / 임건구
        • 손자(양자) 이병길(1905 ~ 1950) 이항구의 친자
          • 증손자 이윤형 (1935 ~)
      • 차남 이항구 (1881 ~ 1945)
        • 손자 이병길(1905 ~ 1950) 이승구의 양자로 입적
        • 손자 이병희
        • 손자 이병주 (1913 ~ ?) 1962년 일본 국적 취득
        • 손자 이병철
        • 손녀 이병오
  • 양부 이호준(1821 ~ 1901)
    • 의붓형 이윤용(1855 ~ 1938)
      • 의붓조카 이명구
본인의 평판이 워낙 나빴던 탓에, 그의 아들 이승구[18]가 26세로 요절하자 이완용이 며느리와 간통을 해서 아들이 자살한 것이라는 조롱성 루머가 돌았다. 이 내용은 매천야록에도 기재되어 있어서 흔히 이 에피소드를 사실로 아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본래부터 몸이 허약해서 을사조약 이전인 1905년 음력 7월에 이미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였다. 해당 기사.

제 양부에게는 의외로 효자였다고 한다. 공무로 바빴음에도 10리가 넘는 길을 하루도 빠짐없이 다니며 양아버지 이호준을 문안하였고, 양 이복형[19]인 의붓형 이윤용이 서자였음에도 서로 우애가 돈독했다고. 가문 시조묘를 찾아 복원하기도 했다.


5. 여담[편집]


파일:낙서.jpg

  • 일제강점기화장실낙서에는 이완용에 대한 엄청난 욕과 성드립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고 한다. 당시 화장실 낙서들. 이완용의 식당/요리옥/요리점이라는 낙서가 꽤 많이 보이는데, 변소가 이완용의 식당이라는 의미인 듯 하다.[20]

  • 순종 때인 1908년, 이완용은 조선시대에 간신으로 취급받은 사람들의 복권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졌다. 그 중에는 윤원형 같은 진짜배기 간신도 있지만 붕당정쟁에 휘말려 역적 취급된 소론, 남인, 북인계 인사들도 있었고,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사람들, 여기에 고종을 시해하려 한 사람들, 세조 때의 이징옥, 광해군북인(대북)의 영수로 인조반정 때 처형된 정인홍 등도 있었다. 상당수가 현대에 재평가되고 있는 인물. 순종의 즉위 기념 대사면령의 일환인데, 고종 친정 직후부터 명예회복 운동이 불었으나 최익현 등이 결사 반대했었다. 이후에도 이완용은 박지원, 정약용, 남이 등 그동안 신원받지 못했거나 재야의 명성에 비해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인사들을 신원하고 시호를 수여하는 작업을 행했다. 이완용의 이러한 복권 사업은 그가 매국노라서 그동안의 간신들을 복권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차피 나라가 망해가니 명목상의 신원이나 해주자는 정리 작업에 가깝다. 일부 노론 음모론자들은 이완용이 친일 노론의 수괴라서 조선에 해악을 끼친 간신들을 복원시켰다고 우기기도 하는데 간신, 역적으로 낙인찍힌 것 말고는 아래 명단에 공통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작 그 노론에게 당했던 소론, 남인계 등의 인사들도 적지 않다. 아래는 그 명단과 당파 및 기타 설명.
- 좌의정(左議政) 서흥 부원군(西興府院君) 한효순(韓孝純, 대북)
- 영의정(領議政) 정인홍(鄭仁弘, 대북)
- 좌의정 목내선(睦來善, 탁남)
- 이조 판서(吏曹判書) 문경공(文敬公) 이현일(李玄逸, 영남 남인)
-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이광좌(李光佐, 소론)
- 영의정 문정공(文貞公) 조태구(趙泰耉, 소론)
- 좌의정 문충공(文忠公) 조태억(趙泰億, 소론)
- 좌의정 충간공(忠簡公) 최석항(崔錫恒, 소론)
- 좌의정 충정공(忠靖公) 유봉휘(柳鳳輝, 소론)
-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 소론 준론)
- 병조 참판(兵曹參判) 김중기(金重器)
- 회인 현감(懷仁縣監) 김도응(金道應)
- 예조 참판(禮曹參判) 정후겸(鄭厚謙, 영조 때의 외척)
-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하재(金夏材, 정조를 모독한 노론)
- 좌승지(左承旨) 안기영(安驥泳)
- 우부승지(右副承旨) 권정호(權鼎鎬)
- 부호군(副護軍) 조중호(趙中鎬)
- 선천 부사(宣川府使) 김익순(金益淳, 김삿갓의 할아버지)
-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 이희화(李喜和)
- 우의정(右議政) 민암(閔黯, 남인)
-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의징(李義徵)
- 대사헌(大司憲) 한세량(韓世良)
- 승지(承旨) 신치운(申致雲)
- 절도사(節度使) 이징옥(李澄玉, 계유정난에 반대한 장군)
- 사옹원 판관(司饔院判官) 원용성(元用星)
- 감역(監役) 허욱(許煜)
- 군부 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
- 이조 참판 이진유(李眞儒)
- 승지 정해(鄭楷)
- 예조 참의(禮曹參議) 서종하(徐宗廈)
- 이조 참의(吏曹參議) 윤성시(尹聖時)
- 대사헌 박필몽(朴弼夢,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소론 준론)
- 대사간(大司諫) 이명의(李明誼, 소론 준론)
- 형조 판서 이사상(李師尙)
- 이조 참의 윤연(尹㝚)
- 훈련 대장(訓練大將) 윤취상(尹就商, 소론 준론)
- 부제학(副提學) 이명언(李明彦)
- 보덕(輔德) 김중희(金重熙)
- 함경 감사(咸鏡監司) 권익관(權益寬)
- 교리(校理) 윤상백(尹尙白)
- 지평(持平) 윤지(尹志, 나주 괘서사건의 주모자로 소론)
- 목사(牧使) 이하징(李夏徵, 소론 준론)
- 동부승지(同副承旨) 유수원(柳壽垣)
- 대사헌 심악(沈䥃)
- 판윤(判尹) 박찬신(朴讚新)
- 포도 대장(捕盜大將) 조동정(趙東鼎)
- 교리(校理) 이거원(李巨源)
- 정언(正言) 이명조(李明祚)
- 경무사(警務使) 권형진(權瀅鎭)
- 이조 판서 윤휴(尹鑴, 청남)
- 영의정 윤원형(尹元衡)
- 지평 이동양(李東讓)
- 정언(正言) 이범제(李範濟)
- 현감(縣監) 이공윤(李公胤)
- 승지 이중술(李重述)
- 진사(進士) 이하택(李夏宅)
- 승지 이보욱(李普昱)
- 승지 김호(金浩)
- 현감 박필현(朴弼顯, 소론 준론)
- 병사(兵使) 박태신(朴泰新)
- 감역(監役) 정권(鄭權)
- 부수(副率) 조현빈(趙顯彬)
- 부사(府使) 심유현(沈維賢)
- 감사(監司) 권첨(權詹,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노론)
-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사로(李師魯)
-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垣)
- 승지 이재화(李在華)
- 정언 이우화(李宇和)
- 주서(注書) 권숭(權崇)
- 이조 참판 김정관(金正觀)
- 동부승지 김정리(金正履)
- 감사 정사효(鄭思孝,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소론)
- 정언 권집(權䌖)
- 부사(府使) 김주태(金柱泰)
- 통제사(統制使) 김윤(金潤)
- 좌부승지(左副承旨) 채동술(蔡東述)
- 좌의정 박홍구(朴弘耉)
- 승지 박홍도(朴弘道)



6. 대중매체에서[편집]


행적의 질이 매우 나쁜 인물이다 보니 대중매체에서도 매우 안 좋은 꼴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7. 관련 문서[편집]




8. 둘러보기[편집]






고종의 경복궁 탈출 계획

[ 펼치기 · 접기 ]
배경
을미사변 · 삼국간섭 · 을미개혁
전개
1차 시도 (춘생문 사건) · 2차 시도 (아관파천)
관련 인물
정동파
이범진 · 이완용 · 이재순 · 이윤용 · 안경수 · 윤웅렬 · 윤치호 · 이하영 · 민상호 · 김홍륙 · 임최수 · 이도철 · 남만리 · 이규홍
친일 내각
김홍집 · 유길준 · 어윤중 · 김윤식 · 조희연 · 장석주 · 정병하 · 서광범 · 김종한
기타 인물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 ·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 이진호
관련 장소
아라사 공사관 (서울 구 러시아 공사관) · 미국 공사관 (서울 구 미국 공사관) · 경복궁
기타
한러관계 · 조선 · 대한제국 · 러시아 제국 · 미국 · 일본 제국 · 독립협회





경술국치
庚戌國恥


[ 펼치기 · 접기 ]
배경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병합 과정
전개
운요호 사건 · 강화도 조약 · 시모노세키 조약 · 영일동맹 · 한일의정서 · 가쓰라-태프트 밀약 · 포츠머스 조약 · 을사조약 · 정미 7조약 · 대한제국군 해산 · 기유각서 · 경술국치
관련 인물
을사조약
관련자

이지용 · 박제순 · 권중현 · 이완용 · 이근택 · 이하영 · 민영기 · 이재극 · 이토 히로부미 · 하야시 곤스케
정미7조약
관련자

이완용 · 임선준 · 조중응 · 고영희 · 송병준 · 이재곤 · 이병무 · 이토 히로부미
경술국치
관련자

이완용 · 윤덕영 · 민병석 · 박제순 · 고영희 · 조중응 · 이병무 · 조민희 · 데라우치 마사타케
기타 인물
조선 총독 · 왕공족 · 이왕 · 조선귀족
영향
순국 지사
민영환 · 박승환 · 이한응 · 이범진 · 조병세 · 황현 · 홍만식 · 홍범식
저항
을미의병 · 을사의병 · 정미의병 (최익현 · 신돌석 · 민종식 · 임병찬 · 이범윤 · 이인영 · 허위 · 이강년 · 홍범도) · 13도 창의군 · 헤이그 특사 (이상설 · 이위종 · 이준) ·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안중근) · 오적 암살단 (나철 · 오기호 · 기산도) · 황제 대리 의식 집행 거부 & 관료 암살 시도 (남정철 · 박영효 · 이도재)[a] ·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
기타
한일병합 (일제강점기 · 한국통감부 · 조선총독부 · 무단 통치 · 친일반민족행위자 · 토지 조사 사업) · 일본어 잔재설 · 식민사관 · 식민지 근대화론 · 한일 무역 분쟁
관련 문서
식민지 · 강점기 · 병합
[a] 박영효 등이 고종의 퇴위에 협조한 대신들을 암살하려다 처벌된 사건은 이완용이 고종 퇴위를 반대하던 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음.




김홍집 내각
(갑오개혁을미개혁)


[ 펼치기 · 접기 ]
차수
제1차
제2차
제3차
제4차
내부대신
군국기무처를 통한 개혁
박영효
박정양
유길준
농상공부대신
엄세영
김가진
정병하
신기선
이범진
군부대신
조희연
안경수
조희연
법부대신
서광범
서광범
장석주
탁지부대신
어윤중
심상훈
어윤중
외부대신
김윤식
김윤식
김윤식
학부대신
박정양
이완용
서광범
※ 2차 내각은 출범당시 3차 내각은 특정기간을 기준으로 함.
을미사변 이후 친일성향으로 조각되어 을미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아관파천 이후 고종에게 을미사적으로 불리고 처형 명령이 떨어지면서 실각한다.




조선귀족
朝鮮貴族


【 펼치기 ・ 접기 】
수작
후작
백작
완순군 · 의양군 · 창산군 · 청풍군 · 박영효 · 윤택영
민영린 · 이완용 · 이지용[1]
자작
고영희 · 권중현 · 김성근 · 김윤식 · 민병석 · 민영규 · 민영소 · 민영휘 · 박제순 · 송병준 · 윤덕영 · 이근명 · 이근택 ·이기용 · 이병무 · 이완용[2] · 이용직 · 이재곤 · 이하영 · 임선준 · 조민희[3] · 조중응
남작
김가진[4] · 김병익 · 김사철 · 김사준 · 김영철 · 김종한 · 김춘희 · 김학진 · 남정철 · 민상호 · 민영기 · 민종묵 · 민형식 · 박기양 · 박용대 · 박제빈 · 성기운 · 윤웅렬 · 이건하 · 이근상 · 이근호 · 이봉의 · 이용원 · 이용태 · 이윤용 · 이재극 · 이정로 · 이종건 · 이주영 · 이항구 · 장석주 · 정낙용 · 정한조 · 조동윤 · 조동희[5] · 최석민 · 한창수
습작
후작
백작
이달용 · 이덕용 · 이덕주 · 윤의섭 · 박찬범 · 이병길
고중덕 · 고흥겸 · 송종헌 · 이영주
자작
고희경 · 권태환 · 김호규 · 민병삼 · 민충식 · 민형식 · 민홍기 · 박부양 · 윤강로 · 이규원 · 이종승 · 이창훈 · 이충세 · 이택주 · 이해국 · 이홍묵 · 임낙호 · 임선재 · 조대호 · 조용호 · 조원흥 · 조중수[3]
남작
김교신 · 김덕한 · 김세현 · 김석기 · 김영수 · 김정록 · 남장희 · 민건식 · 민영욱 · 민철훈 · 민태곤 · 민태윤 · 박경원 · 박서양 · 박승원 · 성주경 · 윤치호 · 이규환 · 이기원 · 이능세 · 이동훈 · 이범팔 · 이병옥 · 이원호 · 이인용 · 이장훈 · 이중환 · 이풍한 · 장인원 · 정주영 · 정천모 · 조중구 · 조중헌 · 최정원 · 한상기
승작
후작
백작
이완용
고희경 · 송병준
반납
김석진 · 민영달 · 유길준 · 윤용구 · 이용구 · 조경호 · 조정구 · 조희연 · 한규설 · 홍순형
[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2] 1872년생 이완용(李完鎔)으로 1858년생 이완용(李完用)과 동명이인임. [3] 1927년 파산자로 선고되어 조선귀족령 제8조 1항에 따라 1928년 2월 29일부로 자작의 예우가 정지되었지만 자식이었던 조중수에게 자작 작위가 승작됨.[4] 1919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협조해 습작 불능 처리됨.[5] 재산 분쟁으로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오등작일제강점기 조선귀족에 공작은 없었으며, 그에 준하는 작위와 관련한 정보는 왕공족 문서 참고.※ 취소선 표시는 작위를 박탈당한 인물을 뜻함.
작위 박탈 사유 [ 펼치기 · 접기 ]
  • 윤치호 : 1913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됨에 따라 작위 박탈
  • 김사준 : 1915년, 조선보안법 위반 사건에 연루되어 작위 박탈. 신한혁명당의 간부 중 하나인 성낙형이 고종을 망명시키고자 했는데, 김사준이 이를 수락하고 실행에 옮기려다 일제에 발각되어 김사준을 비롯한 고종 망명 사건 관련자들 다수가 검거
  • 김윤식 : 1919년, 독립 청원서 제출로 인해 작위 박탈
  • 이용직 : 1919년, 독립 청원서 제출로 인해 작위 박탈
  • 민영린 : 1919년, 아편 흡입죄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 김병익 : 1919년, 아편 흡입죄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 민태곤 : 1941년 12월, 도쿄에서 조선민족독립운동 사건으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wiki style="margin:0 -10px -5px"
[ 펼치기 · 접기 ]
직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단군
동명성왕
온조왕


이사부
백결선생
의자왕
계백
김관창
김유신
문무왕
원효
혜초
장보고
고왕
강감찬
서희
정중부
최무선
죽림고회
김부식
지눌
의천
이종무
정몽주
문익점
최충
일연
최영
황희
맹사성
장영실
신숙주
한명회
이이
이황
신사임당
곽재우
조헌
김시민
이순신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사육신
생육신
논개
권율
홍길동
임꺽정
삼학사
박문수
한석봉
김홍도
김병연
김정호
영조
정조
정약용
전봉준

황진이
홍경래
김옥균
안중근
이완용
윤동주
지석영
손병희
유관순
안창호
방정환
김두한
이상
이중섭
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민족대표 33인
김좌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취소선은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4-03-13 23:22:57에 나무위키 문건우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창씨개명으로 등록한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李家完用). 성인 '이(李)'를 리노이에(李家)로 바꾸었다. 또 이름인 '완용(完用)'을 일본 한자음으로 읽었다.[2] 원주민의 구증을 토대로 밝혀진 주소다. 이 지역에 판교신도시가 지어졌는데, 이 와중에 이완용 생가 터가 아파트랑 학교파묻혔다. 집 터에는 중학교가 들어선다는 내용으로 보아 백현마을8단지아파트와 신백현중학교 사이로 추정된다. 과거 푯돌을 세우려고 추진하기도 했다. 2023년에 실제로 푯돌을 세웠다가 며칠만에 다시 철거했다. [3] 13시 20분[4] 1909년 이재명 의사의 암살 미수 이후 폐에 상처를 입어 매년 겨울철만 되면 폐렴천식 등으로 고통스러워 했다. 1926년에는 호전되는 듯이 보여 1월 12일 총독부 중추원 신년 제1회 회의에서 다소 무리를 했었고 부축을 받으면서 귀가했다. 이후 며칠간 고열에 시달리다 혼수상태에 빠졌고 결국 1926년 2월 11일 이완용은 그의 의붓형 이윤용과 차남 이항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폐렴으로 인해 사망했다.[5] 23세 용(用) 항렬. 본래 참판공파(參判公派)였으나 감찰공파(監察公派) 집안으로 양자를 갔다. 2002년판 우봉이씨세보 중에 인권(仁卷, 1권) 821(八二一)쪽에 이름이 있다.[6] 임기 중 이재명의 암살시도로 부상을 입게 되었다. 당시 내부대신이었던 박제순이 임시로 내각총리대신을 맡게 되었고, 이완용은 치료를 받은 후 다시 내각총리대신으로 복귀했다.[7] 대부분 을사오적이 누군지 물어보면 다른 인물들은 몰라도 직접 국새를 가져다 찍은 박제순과 이완용은 아는 경우가 많다.[8] 1898년 부안군 줄포면에 해일이 들이닥쳐서 수많은 이재민과 재산 피해가 발생했는데, 이 당시 이완용은 전북 관찰사로서 직접 부안을 방문해 참상 현장을 시찰하고, 제방을 중수하도록 지시하는 등 수습과 구호 사업에 힘썼다. 이에 군수와 주민들은 이완용의 구호 사업을 기리기 위해 휼민선정비(恤民善政碑)라는 이름의 공덕비를 세웠다. 그러나 현재 이 공덕비를 놓고 "보존하자 vs 없애버리자" 등 갑론을박이 일어나고 있다.[9] 윤영렬은 안성군수로 재직 중에 마장수라는 도적떼를 토벌하고, 만주에서 경기도까지 남하한 만주족 마적단을 소탕했다. 그리고 흉년과 질병이라는 난감한 상황 속에서 이전의 군수들이 해결하지 못 한 역둔토(驛屯土)의 밀린 세금을 거두어 납부하는 한편, 안성군 호포(戶布)의 절반을 탕감받고, "의병들이 관청 서류를 모두 불에 태워 밀린 세금의 납부가 어렵다."고 하소연해서 세금 탕감을 받아내어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줬다. 지나친 명성을 부담스러워한 윤영렬은 안성군 주민들에게 자신의 선정비를 세우지 말 것을 권고했으나 주민들은 오히려 선정비를 4개나 세웠다.[10] 구글매국노 이미지 검색을 하면 대부분의 사진이 이완용 관련사진일 정도이다(...). (캡쳐 이미지)[11]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어전 회의에서 고종 황제의 면전에 대고 "덴노께 사죄해야 한다.", "자결을 하라!"는 등의 망발을 퍼부었으며 이후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 황제가 즉위하여 이완용 내각이 들어선 후엔 농상공부대신 · 내부대신을 역임하며 국권피탈을 위한 상주문 ·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행적만 보면 이완용과 맞먹는 수준의 매국노다. 하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는 이완용만 못한데, 왜냐하면 그 독한 친일파 종자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의 악질이라 일제 입장에서도 전면에 내세우기 어려웠던 작자여서 은근슬쩍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본래 신분도 천해서 배운 것 없는 무식쟁이라 말 그대로 똥오줌 못 가리고 양아치 짓을 서슴지 않고 다녔고, 그래서 꼴에 먹물 좀 먹었다고 말귀는 알아듣고 최소한의 눈치가 있는 이완용이 더 부리기 쉬워 이 쪽을 더 이용해 먹었다. 더구나 이쪽은 무려 강화도 조약 때부터 친일이였기에 더욱 지독한 셈이다.[12] 그도 그럴 것이, 이완용은 '국권피탈 3조약에 모두 찬성한 것을 넘어 체결에 직접적으로 참여 + 강제병합 후에도 일제의 학정에 아이디어를 제공 + 35년(을사조약 직후까지 포함한 40년) 동안 동포들을 지옥에 집어넣었음 + 그럼에도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죗값과 비교하면 매우 편하게 죽음' 때문에 영원히 한국인들의 지탄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13] 그나마 박제순이 어느 정도 악명이 있긴 하다.[14] 상다리가 부러져라 차린다는 표현이 여기서 시작되었다.[15] 아무나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임금을 비롯한 중전, 대비급의 인물들이나 할 수 있었고, 실제 선조 때 서인 정철의 경우, 후궁이 이런 짓을 한다고 대놓고 깠다가 역관광당한 예가 있다.[16] 이런 문화는 일본에도 존재해서 덴노의 점심 저녁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식사가 차려졌다고 한다. 특히 메이지덴노는 점심 때 양식을 즐겨서 시종들이 가장 기대하는 시간이었다고.[17] 오늘날의 교육부 장관에 비유할 수 있다.[18] 협성회 등 구한말 계몽운동에 참여했으나 1905년 26세에 사망했다.[19] 이완용의 양아버지 이호준의 아들.[20] 출처: 변은진. (2011). 일제 전시파시즘기(1937~45) 조선민중의 '불온낙서' 연구. Han'guk Munhwa (Seoul, Korea), (55), 309-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