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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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북서》<열전>)風俗·刑政·衣服略與<高麗>·<百濟>同

풍속·형벌·정치·의복은 <고려>·<백제>와 같다.


(《북서》<열전>)婚嫁禮唯酒食而已, 輕重隨貧富. 新婦之夕, 女先拜舅姑, 次卽拜大兄·夫./$《隋書》無[大兄]二字,《通志》卷一九四《新羅傳》作[次拜大兄, 次拜夫]./ 死有棺 , 葬送起墳陵. 王及父母妻子喪, 居服一年

결혼의 예는 술과 음식으로 하고, 빈부로써 경중을 따른다. 신부는 저녁에 가서, 여자가 먼저 시아비와 시어미에게 절하고 다음으로 대형과 지아비에게 절한다. 죽은 자에게는 관이 있고, 장사 지냄에 봉분을 쌓는다. 왕에서부터 부모, 처자의 상까지 1년간 복을 입는다.



2. 문학[편집]


한자가 주 문자 생활에 사용되었고 설총, 강수, 최치원 등의 유학자들이 활동하였으나 이들의 문학이 현재까지 전해지는건 그리 많지가 않다. 또 한자가 어렵고 고대 한국어와는 맞지 않는 부분도 많았기 때문에 이두(吏讀) 또는 향찰(鄕札), 방점, 서기체 등 한자를 중국과 다르게 사용해 한국어를 좀 더 정확하게 표기하려는 시도가 생겨나고, 그에 따른 문학도 발생한다. 또한 신라 하면 향가를 빼놓을 수 없다. 향가를 기록하기 위해 사용한 향찰은 해석이 복잡하지만 고대 한국어의 성분을 완벽하게 표기할 수 있었다. 진성 여왕 때 편찬된 《삼대목》(三代目)에 향가를 모았으나 전해지지 않고 《삼국유사》 등 몇몇 책에 향가의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그 외에 통일 신라 대에는 중국한시도 유행하여, 중국 본토에서도 필력에 대한 평가가 높았던 최치원이 자신이 지은 시들을 고국에 소개하기 위해 요약 정리한 《계원필경》 등이 지금까지 전한다.


3. 미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고구려나 백제 고분 같은 횡혈식보단 도굴이 어려운 구조 덕에 다양한 고분 출토 유물이 남아있으며, 황금 왕관을 비롯해서 다양한 공예품들이 출토되고 있다. 일부 유물들로 미루어보아 기초적인 수준의 유리 공예를 통해 장식품을 제조한 흔적이 발견되었으며[1] 한반도에서 나지 않는 코발트 유리를 재가공한 흔적으로 보아 페르시아동로마 제국 문명과 교역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경주 등 옛 신라 지역에는 봉황대, 금척리 고분군과 같은 미발굴 유적들이 매우 많고, 계속 발굴 중이므로 앞으로도 신라의 미술품은 더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신라 금관은 전반적으로는 스키타이 양식을 상당히 많이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과 같이 유리 제품이나 일부 금으로 만들어진 유물의 양식이 로마 제국, 레반트페르시아 지역의 것과 동일한 것도 있는데, 이는 무역을 통해 얻은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 사례로 불가리아에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 경주 계림로 보검이 있다. 그러나 고구려나 백제식과 달리 무덤의 양식이 달라서, 고분 벽화가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전해지는 신라 회화의 수는 오히려 고구려나 백제보다 적은 편이다. 천마총에서 나왔던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대표적인 신라 회화다. 천마총에서 나온 다른 두 그림(또 다른 천마도, 기마 인물상)이 발굴 이후 2014년 처음으로 공개되기도 했다. 천마총 백화수피제 채화판, 백화수피제 천마도 말다래 문서 참조.








  • 그 외에 현존하는 통일신라 시대 그림으로,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 전인 7세기~8세기 당시의 신라인들이 손톱만한 3cm 크기의 금박에 머리카락보다 얇은 크기로 새겨넣은 '선각단화쌍조문금박'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맷비둘기로 추정되는 새 두 마리와 단화(團華)를 그린 것으로, 고대 신라의 고유 장식문양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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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과 월지 출토 선각단화쌍조문금박 사진 출처: 문화재청 SNS

  • 서예 역시 발달해, 김생[2], 영업, 요극일, 최치원[3] 등이 신라 대의 대표적 명필이었다.

  • 공예로는 굽다리(고배)양식의 신라토기가 유명하며 토우 역시 예술성이 높다.

  • 신라의 불교미술은 한국사 불교예술의 정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 말기의 83호 반가사유상이라던가[4] 통일신라대에 조성된 석굴암 본존불을 비롯한 작품들은 매우 정교하고 균형미가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한국 고대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들로 손꼽힌다.


4. 음악[편집]


신라 대의 작곡가로 우륵, 백결선생이 유명하다.

김부식은 가야금, 거문고, 비파신라삼현(新羅三絃)으로 소개했다. 가야금은 이름대로 원래 가야(대가야, 반파국) 지역의 악기인데, 가야를 정복한 진흥왕이 가야인 악사 우륵을 우대한 계기로 신라에 전해져 발달했다. 우륵은 고향 가야 지방의 지명들을 딴 12개 곡을 지었다.

파일:신라 가야금.jpg
사진의 출처는 histopia, 사진의 원출처는 일본 정창원 홈페이지

현대의 가야금의 원류가 되는 신라 시대의 가야금이 일본정창원에 한 기가 보존되어 있는데, 일본에서는 이 악기를 신라금(新羅琴, 시라기고토)라고 부른다. 850년 11월에 이 시라기고토를 일본 궁중에서 연주하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5]

거문고는 원래 고구려 지역의 악기였는데, 삼국 통일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에 들어오면서 도입되었다. 경덕왕 때 거문고의 대가 옥보고(玉寶高)가 거문고를 위한 새로운 노래 30곡을 짓고 신라 땅에 거문고를 보급했고, 이후에도 속명득(續命得)과 귀금선생(貴金先生)이 거문고의 대가로 활동했다.

비파당나라를 거쳐 들여온 악기이지만 현을 바이올린과 비슷하게 철현을 쓰는 중국 비파와 다르게 독자적으로 발전시켰고 이후 시대에서도 한국의 대표적인 악기들 중 하나로 전승됐다. 비파라는 악기 자체는 원래 서역중앙아시아에서 유래한 악기이다.

수나라 궁중에서 신라 음악을 연주했는데 이를 신라기(新羅技)라 했다. 당나라진평왕이 여악(女樂) 두 명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서 당나라 궁중에서도 신라 음악 연주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에서도 신라 음악을 종종 공연했는데 453년에 80명이 연주한 것이 최초고 561년, 684년에도 관련 기록이 있다. 《대보율령》(大宝律令), 《일본후기》(日本後紀)에 따르면 통일신라 때도 신라 악사들이 소수 파견되어 악기 연주와 춤을 일본에서 가르쳤다고 한다.


고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음악들인 고려악(高麗樂, 코마가쿠)[6]에서 신라악 계통 음악을 재편한 것으로 보이는 헤이안 시대 말기 고악보를 복원하여 연주한 영상이다. 제목은 '탁목(啄木, 딱따구리)'이며 연주 중간중간 딱따구리를 표현한 듯한 퍼포먼스가 인상적이다.


5. 건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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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470년 경에 축조된 신라 삼년산성의 모습. 신라의 성문화

파일:불국사1.jpg
파일:불국사2.jpg
물이 흘렀던 중건 당시의 모습을 현재 불국사의 모습으로 고증한 사진. 다만 실제 신라시대의 불국사는 총 2,000여칸으로, 현재 불국사의 8배 크기였다. #

목조 건축 문화권이었던 한국에서 고대의 건축물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나마 신라의 경우 안압지에서 온전한 건축 자재가 대량 발굴되기도 했고 문헌 기록도 그나마 더 많아서 알 수 있는 것이 많다. 국왕이 사는 궁전경주 월성이었으며, 문무왕삼국통일 이후 동쪽으로 궁전을 확장한 것이 동궁과 월지(구 안압지)이다. 이외에 일제강점기 이전 전근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황룡사 9층 목탑이 유명하다.

첨성대황룡사 금당 치미, 남한산성 행궁지 대형 숫기와, 경주 성건동 신라 창고 유적 등의 유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신라시대의 건축물들은 전체적으로 후대 왕조의 것에 비해서 상당히 컸다. 이러한 대형 유물들은 당시 신라의 건축 기법이 상당히 발전되어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6. 여성[편집]





지금으로부터 1,500~2,000여년 전 고대인들의 여성관을 현대의 의식과 연결해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다만 그것을 제하더라도 신라의 여성관은 동시기의 한반도 국가(고구려, 백제)나 후대 왕조(고려, 조선)와는 분명히 다른, 굉장히 특이한 점이 많았다.

일단 역대 한반도 왕조 중 유일하게 여왕이 나온 국가다. 그것도 셋이나. 수많은 세월 동안 무수한 왕조가 오고간 중국 대륙 내에서도 공식적으로 여왕 직위를 단 사람은 측천무후 단 한 명 뿐이었다는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지역은 여자가 왕이 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매우 적대적으로 보는 환경이 구축되어 있었다. 때문에 신라의 여왕 배출은 한국사에서 굉장히 특이하게 받아들여진다. 단순히 여왕만 나왔다고 특이하다는 것이 아니라 상단 카테고리에서도 설명되었듯이 박·석·김 혈통의 신라 왕실은 기본적으로 모계를 우선적으로 깔고 갔다.

왕실 뿐만 아니라 민간 집단 또한 모계 계승 의식을 보이는데 당장 경주 호장인 거천의 가계를 밝히면서 그 어머니는 아지녀(阿之女), 아지녀의 어머니는 명주녀(明珠女), 그 어머니는 적리녀(積利女)라고 하여 어머니쪽 가계로 거슬러올라가고 있다. 그 외에도 재매정댁, 자초랑댁 등 한 집안의 택호를 여성의 이름으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신라는 건국 당시부터 박혁거세알영(閼英)의 탄생설화를 동등하게 두고 제사를 지내며 숭배했다. 건국 시조의 신성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만들어지는 탄생 설화가 여성에게 부여된 유일한 사례다. 알영은 혁거세와 함께 신라 멸망 때까지 이성(二聖)으로 존숭되었는데, 이는 그저 남성 군주의 배우자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이성(二聖)의 한축을 담당하는 독자적인 정치적 의미를 가진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후 신라에서 최초로 시조 제사를 지낼 때 남해왕의 여동생인 아로(阿老)가 사제직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무녀들이 왕조 내내 신궁을 이어나갔고, 후대에 다양한 여성들이 성인으로 지정되어 정치력을 행사하였으며 사망한 뒤에는 국가의 제사로 모셔졌다. 선도산 성모를 시작으로 박제상의 아내인 치술성모, 석탈해가 성군이 될 것임을 알고 바닷가에서 끌어 올리는 노구(老軀) 등의 여성들이 신라인들에게 성인으로 추숭되었다. 화랑제도 또한 초창기 진흥왕의 원래 계획으로는 원화가 화랑들을 이끄는 형태였다. 온갖 병크가 생기며 취소되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다른 왕조의 경우 가끔 가다 큰 힘을 취한 여성들이 나타난다 하더라도(ex. 인수대비) 어디까지나 비정상적인 기형적 형태의 권력을 얻었을 뿐 관작질서(官爵秩序) 시스템 하에서의 공적인 직책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었던 것과는 달리 신라는 여성들이 공적인 분야에서도 진출이 가능했다. 먼저 신라에서는 남성 관리들이 임지로 부임할 때, 부인이 같이 임관하여 관직을 제수받고 임지로 나가는 규정이 있었는데, 수로부인이 강릉으로 가다가 노인으로부터 꽃을 받은 때가 바로 이 임지로 가는 도중이었고, 관련 유물로는 울주 천전리 각석에 당시 남편과 공동으로 부임받고 임지로 향하던 신라여성이 가던 도중 귀족들과 들놀이하고 자신의 이름을 남긴 모습을 볼 수 있다. 단양 신라 적성비에도 공을 세우고 죽은 여성과 그의 자식들에게 남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은전과 함께 관작을 내렸다는 기록 등이 남아있어 신라시대 여성이 남성과 동일하게 관작질서 속에 편입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적으로 신라에서 최초로 선산 모례(毛禮)의 누이 사씨라는 여성이 불가에 귀의한 후 다양한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불교가 공인되자 공식 중앙관직으로 신라 전체의 불교 교단을 영도하는 국통과 함께 도유나랑(都唯那娘)이라고 하는 직책을 같이 두었는데, 이 도유나랑에는 오직 여성만이 임명되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유일의 여성 불상으로 추정되는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 또한 신라시대의 작품이다.

경제적으로는 중국측 사료에서 ‘신라 시장에서는 모두 부녀자가 사고 판다’라고 하여 여성들의 활발한 경제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정창원 신라 양탄자, 황룡사 활석 남근석, 황남대총 남분 도기줄무늬 유병, 경주 황남동 1호분 금귀걸이, 쪽샘 44호 고분 비단벌레 금동 장식품 등의 다양한 유물들을 통해 이러한 신라 여성들의 경제권이 확인되고 있다.

신라의 이러한 진취적 여성관은 후대인들, 특히 유학자들에게는 실로 참혹한 일이었다. 당장 바로 다음 왕조인 고려에서 나온 《삼국사기》에서부터 "하늘의 이치로 말하면 양(陽)은 굳세고 음(陰)은 부드러우며, 사람으로 말하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 것인데 어찌하여 늙은 여인으로 하여금 규방에서 나와 국가 정사를 휘두르게 하는가.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처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로다. "《서경》"에 이르되 암탉이 새벽을 알림이요, "주역"에 이른바 암퇘지가 껑충껑충 뜀과 같으니 이 어찌 경계할 일이 아닌가." 라고 논했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 네이버 삼국사기

하지만 이걸 토대로 신라를 현대의 남녀평등론에 입각해 바라보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어디까지나 여성의 활동이 동시대 다른 아시아국가들에 비해 비교적 훨씬 자유롭고 지위가 높았다는 뜻일 뿐, 신라인들이라고 꼭 남녀를 동등하게 바라본 것은 아니다. 당장 선덕여왕 즉위 전까지만 해도 공주보다 부마의 계승 순위가 더 높았고, 비담의 난 때 반정군이 내세운 명분도 "여주를 섬길 수 없다"는 지극히 전근대적인 내용이었다. 관작 질서에 편입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여성이 독자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으며, 다만 남성중심적인 시스템에 편승해 제한적으로 권한을 허용받았다고 보는 편이 맞다. 고려 초에도 여성이 가계를 계승하고 집안을 대표하며 남성과 동일하게 가산을 물려받는 등 여권이 높았으나, 그렇다고 고려가 남녀평등사회는 아니었음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7. 황금[편집]



KBS: 황금기사의 성, 천년전 세계지도에 등장한 신라의 정체는?



YTN 뉴스: 3cm 금박에 그린 통일신라 '초정밀 화조도'
JTBC: 머리카락보다 가는 '1300년 전 통일신라'의 세공기술

일반적으로 대중들이 삼국의 문화적 특징을 이야기할 경우, 고구려는 강력한 군사와 대규모 전쟁 등으로 묘사되는 숭무 문화, 백제는 유려하고 세련된 문화라는 특징을 떠올리는 한편, 신라는 금관으로 대표되는 황금 문화를 꼽는 경우가 많다.

중세 아랍의 사학자인 알 마크디시는 <창세와 역사서>(Kitabu'l Badi Wa'd Tarikh)에서 "신라인들은 집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한다. 밥을 먹을 때도 황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하고 묘사하였고, 아랍의 지리학자이자 여행가인 알 이드리시는 <천애횡단 갈망자의 산책>(Nuzhatu'l Mushtaq fi Ikhtiraqi'l Afaq, 일명 로제르의 서)에서 신라(Al-Silla)를 섬으로 그려놓은 후 “신라에서는 황금이 너무 흔해서 심지어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까지도 황금으로 만든다”라고 기록하였다. 그 외에도 페르시아의 지리학자인 알 카즈위니(Zakariya al-Qazwini)는 <제국유적과 인류소식>에서 "신라의 공기가 순수하고 물이 맑고 토질이 비옥하니 불구자를 볼 수 없다. 만약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의 향기가 풍긴다. 전염병과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병이 걸린 사람은 그곳에 가면 곧 완치된다. 신라는 살기 좋고 이점이 많으며, 무엇보다 금이 풍부하기 때문에 무슬림들이 일단 그곳에 들어가면 정착해서 떠나지 않는다."라고 서술하는 등 아랍의 학자들은 한결같이 신라를 '황금의 나라'로 표현했다. 일본서기 또한 '눈부신 금은채색이 신라에 넘쳐난다'라고 표현했다.[7]

나무위키에 문서가 생성된 신라시대 주요 금 관련 유물들은 아래와 같다. 이 외에도 수많은 금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지금도 출토되는 중이다.



8. 기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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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고기

기타 실전(失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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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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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년통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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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록
금경록

위서(僞書)
환단고기
규원사화
단기고사
부도지
화랑세기 박창화 필사본
격암유록
†: 실전(失傳)되어 현재는 존재하지 않음.

번외: 현대 역사서
한국사




545년 진흥왕거칠부를 시켜 《국사》(國史)라는 역사책을 편찬했다. 《삼국유사》에도 《신라》(國史) 《고려본기》(高麗本紀)에서 인용한 글들로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국사》는 신라뿐 아니라 고구려나 백제를 포함해 주변 다양한 국가의 역사를 기록한 내용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아 《삼국유사》가 작성된 고려 시대 후반 원 간섭기까지는 《국사》의 원본이 존재했으나 이후에 실전되어 현전하지는 않는다. 삼국통일 후에도 정사를 편찬했을 법 한데 관련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는 없고, 8세기경 김대문이 《계림잡전》, 《고승전》, 《한산기》, 《악본》, 《화랑세기》 등을, 9세기에는 최치원이 《제왕연대력》이라는 역사서를 편찬했으며 이 책들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8] 많은 내용이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쓰는 데 인용되었다.


9. 종교[편집]


한국을 대표하는 종교 공예품으로 손 꼽히는 신라 석굴암성덕대왕신종, 반가사유상의 모습


9.1. 고유 토착신앙[편집]


신라의 조상 숭배신앙을 찾을 수 있는 자료는 '시조묘'에 대한 기록이다. 신라의 시조묘는 박혁거세의 묘로써 1년에 4시로 이를 제사했다. 지배자는 여러 신들 중에서 천신에 대한 제사의례를 통하여 지배권을 확립하려 하였다. 국가형성이 본격화하면서 지배자는 하늘의 아들 또는 손자라는 의식을 강조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시조묘를 세우고 제사를 통하여 왕권의 강화를 꾀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제의를 통하여 내적인 지배이데올로기로서 활용하고 주변의 세력을 정복할 수 있는 배타적 지배이데올로기를 확립한 것이다.

삼국 및 남북국 시대의 지신 신앙은 땅과 하늘에 대한 신앙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는 땅과 산천에 대한 신앙으로 나타나며 신라는 특히 산악 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가뭄이나 홍수가 나면 산천에 제사를 지냈고 풍년이 들었을 때에도 행하였다. 지신에 대한 숭배는 하늘에 대한 신앙과 함께 이루어졌다. 이것은 농경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재래의 토착신앙이 지배적인 이념으로 자리잡고 천지신을 그 정점으로 하여 대중화되어 있는 가운데 외래신앙인 불교가 전래되었다. 따라서 재래신앙인 토착신앙과 외래신앙인 불교는 갈등을 벌이게 된다.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불교 전래가 늦은 것은 고구려나 백제는 이미 중국 문화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을 통해 들어온 불교에 대해 거부감이 적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라는 중국 문화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적어 불교를 수용하는 데 많은 사상적 갈등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신라가 토착신앙에 의해 사상적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신라는 천지신을 모신 신궁을 설치하여 사상적 통일을 하였으므로 외래신앙인 불교에 대하여 대립과 갈등이 심하였던 것이다. 불교가 처음 전래되어 수용되는 단계에는 토착신앙과 불교가 대립과 갈등을 겪었으나 일단 그 과정을 거치면서 융화되어 가는 문화 접변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토착신앙과 불교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자료는 토착신앙의 성역과 불교 사찰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불교 도입 이전 신라 토착신앙의 성지로는 신성한 숲 천경림을 비롯해서 삼천기, 용궁남, 용궁북, 사천미, 신유림 및 서청전이라는 곳들이 있었다.

사원 건립 이전부터 토착신앙의 종교적 공간이었던 여기에 불교 공인 이후 중요 국가사찰을 만들었다. 토착신앙의 신성 지역에 불교사찰이 들어섰지만 불 보살에 대한 숭배와 의례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토착신에 대한 숭배와 의례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토착신앙의 성소는 산신각과 장승의 형태로 불사와 융화하거나 민간에서는 계속 신성 지역으로 숭배되어 산신당, 서낭당, 장승과 솟대의 형태로 남아 있다. 산신각과 장승은 단순히 토착신앙의 잔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토착신앙 성역의 구조 안에 불단을 받아들이는 특유한 복합형태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신라는 불교의 원조 인도나 중간 경유지 중국에서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백제고구려에 비해 불교의 도입 시기는 비교적 늦은 편이었고, 그전에는 박혁거세알영부인, 김알지 설화 등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하늘의 신이 내려왔다는 천신 탄강을 골자로 하는 토착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특정 지역을 신성한 성지로 숭상하는 문화가 있었으며[9] 골품제의 근간이 되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어 외래 종교인 불교가 처음 전해졌을 때도 반대가 컸다.

신라의 자체적인 국가 신앙 시설로 신궁(神宮)이 있었다. 신라 김씨 왕조 조상들을 기리는 유교적 종묘 체계인 5묘와는 별개로 운영됐다. 신라 왕이 새로 즉위하면 즉위 초기에 신궁에서 크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신라의 관례였으며, 신궁에서 제사지낸 주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은데, 김씨 왕계 시조를 기리는 시설은 따로 있었기 때문에 신궁은 박혁거세설이 좀 더 일반적이다.


9.2. 불교[편집]


불교는 초기 미추 이사금, 눌지 마립간, 소지 마립간묵호자, 아도 등의 외국 승려를 통해 일단 전해졌으며, 이 때 불교를 법흥왕 공인 이전에 전래된 불교라는 뜻에서 초전불교(初傳佛敎)라고 한다.[10] 이 때 흥륜사 같은 절이 왕의 허가로 겨우 초가집 수준으로 지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외래 신앙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박해 속에 끝났고, 비로소 법흥왕이차돈순교와 불교의 공인 이후 급속도로 불교 국가화되었다. 신라 불교의 특징은 개개인의 구제보다는 국가의 발전을 비는 호국 불교의 성격이 매우 강했고, 《인왕경》이나 《법화경》 같은 호국경을 중요시했다. 임전무퇴를 제시한 원광 법사 역시 승려였다. 이후에는 불교가 융성하여 국가의 주도하에 많은 사찰 건축물이 창건되고 불교 미술품들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신라 중대 ~ 통일 신라 대에 들어서면서 불교는 이전의 정치 이념으로서의 귀족 불교, 왕즉불 사상을 벗어나 대안, 혜숙, 혜공, 그리고 원효의상 등 여러 승려의 노력에 힘입어 거리의 불교, 신분을 초월한 불교 대중화로 나아갔다. 신라 불교계의 대체적 흐름은 9세기경을 경계로 해서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눠볼 수 있는데 전반기는 형식과 교리, 경전을 중시하는 교종, 후반기는 실천적 불교인 선종(불교)이 유행했다.[11]

통일 신라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이 된 불교 덕택에 신라 시기 사찰은 백제나 고구려에 비하면 그 명맥이 유지된 곳이 상당히 많다. 현재의 경주시 지역엔 신라에서 가장 중시되는 거대 사찰이었던 황룡사를 비롯해 사천왕사(四天王寺)·불국사(佛國寺)·분황사(芬皇寺)·흥륜사(興輪寺)·영흥사(永興寺)·봉덕사(奉德寺) 등 대사찰이 세워졌으며, 지방에는 부석사(浮石寺)·통도사(通度寺)·화엄사(華嚴寺)·범어사(梵魚寺)·법주사(法住寺) 등의 대사찰이 세워졌다. 그리고 이때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지금도 신라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상도는 전국에서 상대적으로 타 종교들에 비하여 불교가 초강세이다. 그러나 사찰의 창건 연대가 그러하다는 것이지 역시 목조 건축물 자체가 남은 것은 하나도 없으며, 대부분의 사찰들은 전부 고려 & 조선시대에 중건된 경우다. 현재까지 남은 신라의 건축물들은 석탑이거나 유허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석조 건축은 유명한 경주시의 석굴암, 그 외에 군위군 아미타 여래 삼존 석굴(소위 제2 석굴암) 등 신라 당대의 것이 남아있는 경우가 몇 있다.


9.3. 유교[편집]


유교의 경우 화랑 문화와 접목되어, 신라에서는 특히 신(信)과 충(忠)을 중요시하는 풍조가 강해서 세속오계임신서기석 등에서 이런 문화를 찾아볼 수 있다. 신문왕은 유교 교육 기관 국학을 설치하고, 거기서 《오경》을 가르치고 독서삼품과와 같은 제도를 실시해 유교를 보급했다. 내성에서는 대부전(大傅典)이란 전담 관청을 설치해 왕실 자녀에게 유교적 제왕학을 가르쳤다.

또한 고유 조상 숭배 사상이 아닌 유교식으로 체계화된 종묘를 한국 역사상 처음 도입한 것도 신라였으며, 이는 고려조선의 종묘로 이어진다. 신라의 종묘 체계에 관해서는 종묘 문서 참조.

지방 교육기관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없지만, 통일신라 하대에 이르러서는 토산군최응, 광해주(춘천시)의 박유, 영암군최지몽 등 지방 출신 지식인이 증가하고, 5대 소경 중 하나인 서원경(청주시)에는 학교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다. 신라 하대는 이렇게 유교적 교육이 전국에 보편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10. 과학[편집]


자연 과학 분야, 특히 농업천문학 분야에서도 통일 신라 시기에 발전하여 7세기에는 첨성대(瞻星臺)가 축조되고[12], 수학이 발달하였다. 통일 신라 대에는 당나라와의 기술 교류가 활발해, 덕복(德福)은 당나라에서 가져온 기술을 이용해 역법을 만들었고, 김암(金巖) 등이 당나라에 유학해 천문학을 배워 신라에 보급하고, 그리고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서 전수하기도 했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기록상으로는 718년(성덕왕 17년)에 물시계를 만들고 이것을 관리하는 관청을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이 만든 최초의 물시계가 671년 백제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삼국사기》에 기록된 718년 훨씬 이전부터 물시계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학도 크게 발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석굴암의 평면 구성이나 천장의 돔, 불국사 석가탑, 다보탑 등 여러 건축물의 균형 잡힌 비례 구성에는 모두 정밀한 수학적 지식이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고 학부인 국학에서는 수학 교육도 이뤄졌고, 717년에는 산박사(算博士) 제도를 시행했다.

또 기포가 거의 없이 완성도가 높은 성덕대왕신종을 제조하는 등 금속 공학 등의 측면에도 발전된 부분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쇄 제지술이 발달해, 신라산 한지인 저지(楮紙, 닥나무 종이)는 색이 희고 질겨 중국인들의 찬사를 받았다. 보존성이 뛰어나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현재 남아있는 것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이며, 전란이 적었던 일본 땅에서 <민정문서> 등 신라 당대의 인쇄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의학 관련으로는 공봉의사(供奉醫師), 약전(藥典) 등의 관청을 설치해 의술과 제약을 관리했음이 확인된다. 한편 의과대학격인 의학(醫學)이란 관청을 설치해 《본초경》, 《갑을경》, 《소문경》, 《침경》, 《맥경》, 《명당경》, 《난경》 등의 한의학 과목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11. 명절[편집]



11.1. 정월 대보름[편집]


한국의 정월 대보름의 기원과 관련된 전설 중에 <사금갑(射琴匣)>이 있다. 원전은 《삼국유사》 <기이> 제1편 소지왕 이야기다.

소지왕이 정월 대보름에 천천정으로 행차하기 위해 궁을 나섰는데 갑자기 까마귀가 시끄럽게 울었다. 그리고는 쥐가 사람의 말로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옵소서."


그러자 임금은 신하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게 했다. 신하가 까마귀를 어느 정도 따라가다가 어느 연못에 다다랐을 때, 돼지 두 마리가 싸움을 하고 있었다. 신하는 돼지 싸움을 보다가 그만 까마귀를 놓쳐 버렸다. 잠시 후에 연못에서 노인이 나와서 신하에게 편지 봉투를 주고는 "그 봉투 안의 글을 읽으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읽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신하는 궁에 돌아와 임금에게 편지 봉투를 주면서 연못의 노인이 한 말을 전했다.

임금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단 한 사람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 편지를 읽지 않으려 했는데 옆에 있던 일관이 말하였다.

"전하, 두 사람이라 함은 보통 사람을 말하고, 한 사람이라 함은 전하를 말하는 것이니, 편지의 글을 읽으시옵소서."


일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임금은 편지를 꺼내서 읽어 보았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射琴匣(사금갑: 거문고 갑을 쏘시오)'


임금은 곧 거문고 갑을 활로 쏜 다음 열어 보니 두 사람이 활에 맞아 숨져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왕비와 어떤 중이었는데, 중이 왕비와 한통속이 되어[13] 임금을 해치려 했던 것이다. 그 뒤 정월 대보름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해서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이후 이 찰밥이 발전해 약밥이 되었다. 왜 소지왕을 도와준 동물 중 까마귀만 챙겨주냐면 쥐, 돼지는 십이지신에 들어가서 따로 기리는 일이 있었으나 까마귀는 그렇지 않기 때문.


11.2. 행사 및 풍속[편집]


其官有十七等: 一曰伊罰干, 貴如相國, 次伊尺干, 次迎干, 次破彌干, 次大阿尺干, 次阿尺干, 次乙吉干, 次沙 干, 次及伏干, 次大奈摩干,《通典》[干] 作[于], 未知孰是. 又《梁書》云:[其官名有子賁旱支·齊旱支·謁旱支·壹告支·奇目旱支.] 與此不同. 次奈摩, 次大舍, 次小舍, 次吉士, 次大烏, 次小烏, 次造位. 外有郡縣. 其文字·甲兵, 同於中國. 選人壯健者悉入軍, 烽·戌·邏俱有屯營部伍.諸本及《隋書》[營]作[管].《通典》作[營], 是, 今據改. 風俗·刑政·衣服略與<高麗>·<百濟>同. 每月旦相賀, 王設宴會, 班賚 官. 其日, 拜日月神主. 八月十五日設樂, 令官人射, 賞以馬·布.《隋書》[每]下有[正]字, [主]字作[至]. 按《隋書》是說正月元旦相賀, 拜日月神; 至八月十五日, 又設樂競射.《北史》疑是脫訛. 其有大事, 則聚官詳議定之. 服色尙 素.《隋書》無[ ]字. 按 則不素, 疑是衍文. 婦人 髮繞頸,《隋書》[頸]作[頭], 是. 此形似致誤. 以雜綵及珠爲飾. 婚嫁禮唯酒食而已, 輕重隨貧富. 新婦之夕, 女先拜舅姑, 次卽拜大兄·夫.《隋書》無[大兄]二字,《通志》卷一九四《新羅傳》作[次拜大兄, 次拜夫] 死有棺 , 葬送起墳陵. 王及父母妻子喪, 居服一年. 田甚良沃, 水陸兼種. 其五穀·果菜·鳥獸·物産, 略與華同.

관직은 17품으로, 일은 이벌간으로 중국의 귀와 같고, 다음은 이척간 다음은 영간, 다음은 파미간, 대아척간, 아척간, 을길간, 사돌간, 급복간, 대나마간, 나마, 대사, 소사, 길사, 대오, 소오, 조위 순이다. 밖으로 군현이 있고, 문자와 갑병은 중국과 같다. 건장한 사람을 가리고 군사로 뽑는데, 봉, 술, 라로 함께 영, 부, 오로 진을 친다. 풍속과 형벌, 정치, 의복은 '고려', '백제'와 같다. 매달 아침마다 하례하며 왕이 연회를 배풀면서 무리에 관직을 하사한다. 그날에 태양과 달의 신에게 절한다. 8월 15일은 풍류를 베푸는데, 관인이 활을 쏘아 상으로 말과 포를 내린다. 큰 일이 있으면, 벼슬아치들이 모여 의논하여 정한다. 옷색깔로 흰색을 숭상하고, 부인들은 머리를 땋아 목에 두르며, 비단과 구슬을 섞어 꾸민다. 결혼의 예는 술과 음식으로 하고, 빈부로써 경중을 따른다. 신부는 저녁에 가서, 여자가 먼저 시아비와 시어미에게 절하고 다음으로 대형과 지아비에게 절한다. 죽은 자에게는 관이 있고, 장사 지냄에 봉분을 쌓는다. 왕에서부터 부모, 처자의 상까지 1년간 복을 입는다. 밭은 물대기가 좋아서 물과 육지의 씨를 겸할수 있다. 오곡과 과채, 조수과 물산은 중국과 같다.



11.3. 추석[편집]


《삼국사기》 <유리 이사금> 조에서는 왕이 나라 사람들을 두 팀으로 갈라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6부 각각의 여자를 거느리고 무리를 나누게 했다.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일찍 큰 부(部)의 뜰에 모여 길쌈하고 밤 10시에 파했다.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의 많고 적음을 가려서 패배한 편이 이긴 편에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고 한다. 이 길쌈놀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통해 조선시대까지 지속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노래하고 춤추며 온갖 놀이를 즐겼으니 이를 가배(嘉俳)라 불렀는데 이 가배가 한가위의 '가위'의 기원이라고 한다.

절에서 박탁(餺飩, 밀떡 종류의 음식)과 병식(餠食, 쌀, 보리, 떡 종류의 음식) 등을 마련하여 8월 15일 명절을 지냈다. 이 명절은 여러 다른 나라에는 없고 오직 신라국에만 유독 이 명절이 있다. 노승 등이 말하기를 "신라국이 발해국과 서로 싸웠을 때 이날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이 날을 명절로 삼아서 음악과 춤을 추며 즐겼다. 이 행사는 오래도록 이어져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온갖 음식을 마련하고 가무와 음악을 연주하며 밤낮으로 이어져 3일 만에 끝이 난다. 지금 이 산원에서도 고국을 그리워하며 오늘 명절을 지냈다. 그 발해는 신라에 토벌되어 겨우 1,000명이 북쪽으로 도망갔다가 후에 되돌아와 옛날대로 나라를 세웠다. 지금 발해국이라 부르는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

입당구법순례행기》 2권 개성 4년 8월 15일


한편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도 신라인의 추석 풍습을 전하고 있다. 현대처럼 3일간 놀았다고 한다.

한편 저 말대로면 음력 8월 15일이 신라의 전승기념일이 되기도 하는데, 원문은 당시 시대상 발해로 돼있지만 발해와 신라가 8월 15일에 싸워 신라가 이긴 사건을 특정하기 어렵고[14] 말미에 멸망 이후 발해국으로 부활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발해의 전신인 고구려와의 어떤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한 날을 기념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 당시에 유리 구슬은 일종의 보석 취급을 받았다.[2] 낭공대사비, 전유암산가서에 그의 글씨가 남아있다.[3] 지리산 쌍계사의 <진감선사비문>이 대표적.[4] 다만 신라의 작품으로 의견이 거의 모아진 83호와 달리 78호의 경우 여전히 국적 논란이 많다.[5] 일본 《몬토쿠 덴노 실록》 권2[6] 일본 궁중 음악인 '아악(雅楽, 가가쿠)' 중에서 한반도 계통 음악들을 가리킨다. 명칭 자체는 고(구)려악이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에서 전해진 음악들을 통합한 분류이다.[7] 日本書紀』卷八 「仲哀紀」[8]화랑세기》와 《제왕연대력》은 필사본이라 주장하는 책이 지금도 존재하지만 위서로 추정되고 있다. 진위논란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조.[9] 화백회의를 개최하는 장소이기도 했던 사령지, 그리고 천경림과 문잉림처럼 신성 구역으로 정해놓았던 등. 사실 신라의 성지순례 문화는 불교 공인 이후에도 화랑의 풍습으로 계승되기도 했으며 화랑 순례의 흔적이 남은 곳으로는 울주 천전리 암각화, 울진 성류굴 동굴, 제천 점말동굴 등이 그 예시다.[10] 아도가 숨어서 불교 전파 활동을 한 지금의 구미시에 있는 모례의 집에는 현재 신라 불교 초전지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11] 하지만 선종의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교리는 신라 말의 혼란기에 여러 지방 호족에 의해 악용되었고, 특히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자처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궁예가 타락하고 멸망하게 되자 고려 초기에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호국 불교 교종을 국가 이념으로 삼아 선종을 박해했다.[12] 하지만 첨성대가 정말 천문대인지는 논란이 있다. 일단 형태적으로도 별을 관측하기 불편하고 관련 기록도 많지 않기 때문.[13] 혹은 중과 왕비가 간통을 하고 있었다고도 한다.[14] 발해와 신라는 싸운 적이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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