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시 아마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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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경주마.
부마 시어트리컬[6] 은 미국으로 이적한 후 1987년 브리더스컵 터프 등 G1 6승을 올린 경주마로 종마 성적도 좋아 일본에는 100여 마리의 자마가 수입되었는데 일본에서의 GI 우승마는 히시 아마존 뿐이다.
어머니 케이티스는 아일랜드 1000기니를 비롯하여 중상 2승을 한 말로, 히시 관명을 쓰는 마주 아베 마사이치로가 번식암말로 구입했다. 이후 미국에서 번식하며 자마를 일본으로 보냈다. 자손으로 어드마이어 문, 에프포리아, 슬립리스 나이트 등 여럿 G1마들을 배출했다.
반형제 히시 나일은 1996년 페어리 스테이크스(GIII)를, 전형제 히시 피너클은 1999년 로즈 스테이크스(GII)를 우승했다.
미국에서 수입된 외국산마다. 데뷔 시즌인 1993년 한신 3세 암말S에서 코스 레코드를 갈아치우며 5마신차 압승으로 강호 암말로 주목을 받았으나 미국산이라 당시 규정상 클래식 경주에는 나설수 없었다. 그리하여 출전 제한이 없는 다른 중상[7] 에 출전, 엘리자베스 여왕배까지 파죽의 6연승을 기록한다.[8] , 그리고 연말 그랑프리인 아리마 기념에 참가, 당대의 난다긴다하는 수말들은 모조리 눌렀으나 단 한마리, 절정기의 나리타 브라이언만은 따라잡지 못하고 3마신 차의 2착을 기록한다. 비록 지긴 했지만 2-3착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어 암말인 히시 아마존만이 나리타 브라이언과 경쟁다운 경쟁을 했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9]
1995년에는 상반기에는 부진했으나 하반기에 회복, 재팬 컵에서 독일의 경주마 란도에 1마신 반차로 2착. 아리마 기념에서 부진에 빠진 나리타 브라이언을 누르고 당당 인기 1위에 추대되었으나 실제 결과는 5착에 머물렀다. 1996년에도 현역을 지속했지만 부진이 이어졌으며, 1997년에도 현역 속행을 표명했으나 굴건염이 발생해 은퇴했다.
1993년 6월, 당시 호쿠토 베가가 있던 나카노 타카오[10] 의 마사에 들어갔다. 나카노 조교사는 원래 데뷔 전 기수로 시바타 마사토나 마토바 히토시를 생각했지만 둘 다 하코다테 경기에 나가있었고 그 때 미호 트레이닝 센터 안에서 나카다테 에이지를 우연히 만났다. 나카다테가 나카노 조교사에게 탈 말이 있냐고 묻자 반사적으로 "가끔은 이기는 말에 태워줄게" 라 답했고 나카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한번 기수를 정하면 잘 바꾸지 않고 마주 아베 마사이치는 일체 입을 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게 나카다테가 히시 아마존의 주전 기수가 되어 통산 20경기 중 18경기에 기승하게 된다,
관골 골막염으로 다리에 부담이 적은 더트 경기에서 데뷔해 첫 경기 승리, 두번째 경기 2착을 기록하고 다리 상태가 호전되며 잔디 경주로 전환한다. 잔디, 중상 첫 경주였던 케이세이배 3세 스테이크스에서 3/4마신 차 2착을 기록하고 나카다테는 더트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첫 G1 도전인 한신 3세 암말 스테이크스에서 평소처럼 앞쪽에 위치하고 직선에서 선두를 잡으며 2착에 5마신 차 레코드 승리를 거두며 첫 G1 제패를 달성했고 나카다테 기수에게도 데뷔 10년만의 첫 G1 승리였다.
이전까지 경주는 모두 선행으로 나왔지만 1994년 부터는 주로 후방에서 대기하는 추입으로 경주 스타일을 바꾸었고 수말과의 첫 중상이었던 케이세이배에서 비코 페가수스에 2마신 차 2착을 기록했다. 이어진 퀸 컵에서는 다른 출주 암말 보다 2kg 많은 55kg 부담중량을 받고 머리 차로 신승했다.
크리스탈컵에서는 결승점을 100m 앞둔 지점에서 4마신 차이를 쫓아 오히려 1마신 차로 벌리는 뛰어난 라스트 스퍼트로 명경기를 선보였다.
이어지는 중상 경주에서도 연승을 이어가고 엘리자베스 여왕배에서는 그 해 오크스 우승마 초카이 캐럴에 3cm 차이로 승리하며 중상 6연승을 달성하고 당대 최강의 암말로 자리잡았다.
암말이 아리마 기념에서 오랫동안 부진했기에 6번 인기를 받았으나 동기 삼관마 나리타 브라이언에 직선 주로에서 1.5마신 까지 접근하며 선전, 결국 3마신 차 2착이긴 했으나 3착 라이스 샤워와는 2.5마신 차를 내며 1978년 아리마 기념에서 2착을 기록한 인터 글로리아[11] (インターグロリア) 이 후 16년만에 연대에 들어온 암말이 되었다.
1995년 진영은 미국 원정을 발표하고 3월 4일에 LA의 할리우트 파크 경마장으로 이동했으나 48시간 넘는 검역 동안 정신 불안을 일으켰다. 조교에서는 미국의 더트에 적응하지 못하며 왼쪽 앞다리 구절 염좌가 발증해 결국 산타 아니타 핸디캡 경기를 포기하고 귀국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에는 엠프레스컵에 호쿠토 베가와 같이 등록 신청을 했지만 취소하고 타카마츠노미야배에서 복귀했으나 게이트 안에서 부터 진정되지 않았고 스타트 후 관중들[12] 의 함성에 더욱 흥분해 추입이 아닌 도주로 나오다 실속, 5착을 기록했다. 데뷔 이 후 12경기 연속으로 이어지던 연대 기록도 끊겼고 나카다테 기수는 이 패배로 강판되리라 여겼지만 나카노 조교사는 "어쩔 수 없구나, 다음엔 노력하자" 라 말해주었다고 한다.
이어진 올커머에서는 태풍의 영향으로 전반 1000m 65.2 초의 초슬로우 페이스였고 흥분한 히시 아마존에 의해 이른 스퍼트가 걸렸다. 그래도 아이리시 댄스[13] 의 추격을 버텨내며 10달만에 승리하게 되었다. 교토대상전에서는 평소의 추입을 보여주며 2.5마신 차 승리, 2연승을 이어갔다.
재팬 컵에서는 복귀 2경기 째인 나리타 브라이언에 이은 2번 인기로 출주, 1000m 61.0초 슬로우 페이스에서 결승점을 500m 앞둔 구간에서 바깥으로 나온 히시 아마존은 라스트 스퍼트를 걸었지만 끝까지 버틴 란도에 1.5마신 차 2착을 기록했다. 재팬 컵의 선전으로 아리마 기념에서는 팬투표 1위, 배당 인기 1위로 나왔지만 마야노 탑건의 슬로우 페이스 도주에 휘말리며 5착에 머물렀다.
1996년 부터는 발굽의 상태가 나빠져 이전만큼의 실력은 물론 경주에도 나오지 못하는 기간이 많아졌다. 2년만에 1800m 이하 거리에 나온 야스다 기념에서는 10착을 기록하고 봄에는 더 경주에 나오지 못했다. 가을의 엘리자베스 여왕배에서는 선행으로 나서며 2번째로 들어왔지만 사행으로 7착으로 강착되었다. 이 후 나카다테 기수가 강판되며 아리마 기념에서는 카와치 히로시가 기승해 5착을 기록했다.
1997년에도 현역을 이어가기로 결정하고 5월 케이오배 스프링 컵을 목표로 조정 중이었으나 굴건염이 발생해 5월 1일 은퇴를 발표했다.
마주 아베 마사이치로의 아버지인 아베 마사노부(阿部 雅信)가 히시 관명을 쓰며 경주마 사업에 뛰어들었고 초대 히시 마사루[14] - 히시 마사히데[15] - 히시 스피드[16] 부계 직계로 중상 우승을 하면서 명맥이 이어졌다. 그러나 히시 스피드의 자마들은 오픈 클래스를 넘지 못했고 아버지의 사망 후 마주 사업을 이어 받은 마사이치로는 200여마리가 넘었던 말들을 정리하고 대신 외국 혈통의 경주마[17] 를 들여오기로 했다. 아버지가 이어온 히시 마사루의 직계를 끊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대략 32만 5천 달러에 사들인 세크리테리엇의 1989년 산 자마의 이름을 히시 마사루[18] 로 지었다. 히시 아마존이 활약하자 후손을 잇고 싶다는 생각에 히시 아마존의 첫번째 교배 상대를 히시 마사루로 정했다.
히시 마사루의 자마인 첫째를 배고 자신이 태어난 농장인 미국 켄터키 주 소재 테일러 메이드 팜(Taylor Made Farm)으로 돌아갔다.[22] 이곳에서 번식용 암말로 활동하며 일본 경마계에 자마들을 보내왔지만 일본에서 성공한 자마는 등장하지 않았으며 2019년 노환으로 숨을 거뒀다.
첫 자마인 히시 안데스[23] 는 경주마 은퇴 후 일본의 수필가이자 경마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던 안자이 미호코(安西美穂子)가 마주였으나, 일련의 사건으로 지금은 하루 우라라와 함께 마사 팜으로 소유권이 넘어가 그 곳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2023년 1월 17일, 25살에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24]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
[각주]
1. 개요[편집]
'네스'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싸움이 끝난 후의 민얼굴은, 빛나도록 상냥했다.
그 아름다움의 어디에 억센 숫말들과 경쟁하고 승리하려 했던 투지가 숨어있던 것일까.
엘리자베스 여왕배를 비롯해,
20전 10승 중 중상 9승.
최강 암말의 기억은, 누군가의 마음 깊숙히.
JRA 히어로 열전
그러므로 여걸
전과의 숫자가 아니라
내용을 봐주길 바란다
정확히 겨냥한 일격과
적을 굴복 시키는 기백
병사들을 거느리고 달려가
왕에게 정면으로 도전한다
격전을 거듭하며
흥분과 감탄을 흩뿌렸다
그 장렬하고 용기 있는 모습이야말로
여걸이라 불리는 이유이다
JRA 명마의 초상
일본의 경주마.
2. 혈통[편집]
부마 시어트리컬[6] 은 미국으로 이적한 후 1987년 브리더스컵 터프 등 G1 6승을 올린 경주마로 종마 성적도 좋아 일본에는 100여 마리의 자마가 수입되었는데 일본에서의 GI 우승마는 히시 아마존 뿐이다.
어머니 케이티스는 아일랜드 1000기니를 비롯하여 중상 2승을 한 말로, 히시 관명을 쓰는 마주 아베 마사이치로가 번식암말로 구입했다. 이후 미국에서 번식하며 자마를 일본으로 보냈다. 자손으로 어드마이어 문, 에프포리아, 슬립리스 나이트 등 여럿 G1마들을 배출했다.
반형제 히시 나일은 1996년 페어리 스테이크스(GIII)를, 전형제 히시 피너클은 1999년 로즈 스테이크스(GII)를 우승했다.
3. 생애[편집]
미국에서 수입된 외국산마다. 데뷔 시즌인 1993년 한신 3세 암말S에서 코스 레코드를 갈아치우며 5마신차 압승으로 강호 암말로 주목을 받았으나 미국산이라 당시 규정상 클래식 경주에는 나설수 없었다. 그리하여 출전 제한이 없는 다른 중상[7] 에 출전, 엘리자베스 여왕배까지 파죽의 6연승을 기록한다.[8] , 그리고 연말 그랑프리인 아리마 기념에 참가, 당대의 난다긴다하는 수말들은 모조리 눌렀으나 단 한마리, 절정기의 나리타 브라이언만은 따라잡지 못하고 3마신 차의 2착을 기록한다. 비록 지긴 했지만 2-3착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어 암말인 히시 아마존만이 나리타 브라이언과 경쟁다운 경쟁을 했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9]
1995년에는 상반기에는 부진했으나 하반기에 회복, 재팬 컵에서 독일의 경주마 란도에 1마신 반차로 2착. 아리마 기념에서 부진에 빠진 나리타 브라이언을 누르고 당당 인기 1위에 추대되었으나 실제 결과는 5착에 머물렀다. 1996년에도 현역을 지속했지만 부진이 이어졌으며, 1997년에도 현역 속행을 표명했으나 굴건염이 발생해 은퇴했다.
3.1. 1993년[편집]
1993년 6월, 당시 호쿠토 베가가 있던 나카노 타카오[10] 의 마사에 들어갔다. 나카노 조교사는 원래 데뷔 전 기수로 시바타 마사토나 마토바 히토시를 생각했지만 둘 다 하코다테 경기에 나가있었고 그 때 미호 트레이닝 센터 안에서 나카다테 에이지를 우연히 만났다. 나카다테가 나카노 조교사에게 탈 말이 있냐고 묻자 반사적으로 "가끔은 이기는 말에 태워줄게" 라 답했고 나카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한번 기수를 정하면 잘 바꾸지 않고 마주 아베 마사이치는 일체 입을 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게 나카다테가 히시 아마존의 주전 기수가 되어 통산 20경기 중 18경기에 기승하게 된다,
관골 골막염으로 다리에 부담이 적은 더트 경기에서 데뷔해 첫 경기 승리, 두번째 경기 2착을 기록하고 다리 상태가 호전되며 잔디 경주로 전환한다. 잔디, 중상 첫 경주였던 케이세이배 3세 스테이크스에서 3/4마신 차 2착을 기록하고 나카다테는 더트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첫 G1 도전인 한신 3세 암말 스테이크스에서 평소처럼 앞쪽에 위치하고 직선에서 선두를 잡으며 2착에 5마신 차 레코드 승리를 거두며 첫 G1 제패를 달성했고 나카다테 기수에게도 데뷔 10년만의 첫 G1 승리였다.
3.2. 1994년[편집]
이전까지 경주는 모두 선행으로 나왔지만 1994년 부터는 주로 후방에서 대기하는 추입으로 경주 스타일을 바꾸었고 수말과의 첫 중상이었던 케이세이배에서 비코 페가수스에 2마신 차 2착을 기록했다. 이어진 퀸 컵에서는 다른 출주 암말 보다 2kg 많은 55kg 부담중량을 받고 머리 차로 신승했다.
크리스탈컵에서는 결승점을 100m 앞둔 지점에서 4마신 차이를 쫓아 오히려 1마신 차로 벌리는 뛰어난 라스트 스퍼트로 명경기를 선보였다.
이어지는 중상 경주에서도 연승을 이어가고 엘리자베스 여왕배에서는 그 해 오크스 우승마 초카이 캐럴에 3cm 차이로 승리하며 중상 6연승을 달성하고 당대 최강의 암말로 자리잡았다.
암말이 아리마 기념에서 오랫동안 부진했기에 6번 인기를 받았으나 동기 삼관마 나리타 브라이언에 직선 주로에서 1.5마신 까지 접근하며 선전, 결국 3마신 차 2착이긴 했으나 3착 라이스 샤워와는 2.5마신 차를 내며 1978년 아리마 기념에서 2착을 기록한 인터 글로리아[11] (インターグロリア) 이 후 16년만에 연대에 들어온 암말이 되었다.
3.3. 1995년[편집]
1995년 진영은 미국 원정을 발표하고 3월 4일에 LA의 할리우트 파크 경마장으로 이동했으나 48시간 넘는 검역 동안 정신 불안을 일으켰다. 조교에서는 미국의 더트에 적응하지 못하며 왼쪽 앞다리 구절 염좌가 발증해 결국 산타 아니타 핸디캡 경기를 포기하고 귀국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에는 엠프레스컵에 호쿠토 베가와 같이 등록 신청을 했지만 취소하고 타카마츠노미야배에서 복귀했으나 게이트 안에서 부터 진정되지 않았고 스타트 후 관중들[12] 의 함성에 더욱 흥분해 추입이 아닌 도주로 나오다 실속, 5착을 기록했다. 데뷔 이 후 12경기 연속으로 이어지던 연대 기록도 끊겼고 나카다테 기수는 이 패배로 강판되리라 여겼지만 나카노 조교사는 "어쩔 수 없구나, 다음엔 노력하자" 라 말해주었다고 한다.
이어진 올커머에서는 태풍의 영향으로 전반 1000m 65.2 초의 초슬로우 페이스였고 흥분한 히시 아마존에 의해 이른 스퍼트가 걸렸다. 그래도 아이리시 댄스[13] 의 추격을 버텨내며 10달만에 승리하게 되었다. 교토대상전에서는 평소의 추입을 보여주며 2.5마신 차 승리, 2연승을 이어갔다.
재팬 컵에서는 복귀 2경기 째인 나리타 브라이언에 이은 2번 인기로 출주, 1000m 61.0초 슬로우 페이스에서 결승점을 500m 앞둔 구간에서 바깥으로 나온 히시 아마존은 라스트 스퍼트를 걸었지만 끝까지 버틴 란도에 1.5마신 차 2착을 기록했다. 재팬 컵의 선전으로 아리마 기념에서는 팬투표 1위, 배당 인기 1위로 나왔지만 마야노 탑건의 슬로우 페이스 도주에 휘말리며 5착에 머물렀다.
3.4. 1996년 이 후 [편집]
1996년 부터는 발굽의 상태가 나빠져 이전만큼의 실력은 물론 경주에도 나오지 못하는 기간이 많아졌다. 2년만에 1800m 이하 거리에 나온 야스다 기념에서는 10착을 기록하고 봄에는 더 경주에 나오지 못했다. 가을의 엘리자베스 여왕배에서는 선행으로 나서며 2번째로 들어왔지만 사행으로 7착으로 강착되었다. 이 후 나카다테 기수가 강판되며 아리마 기념에서는 카와치 히로시가 기승해 5착을 기록했다.
1997년에도 현역을 이어가기로 결정하고 5월 케이오배 스프링 컵을 목표로 조정 중이었으나 굴건염이 발생해 5월 1일 은퇴를 발표했다.
4. 번식마 생활[편집]
마주 아베 마사이치로의 아버지인 아베 마사노부(阿部 雅信)가 히시 관명을 쓰며 경주마 사업에 뛰어들었고 초대 히시 마사루[14] - 히시 마사히데[15] - 히시 스피드[16] 부계 직계로 중상 우승을 하면서 명맥이 이어졌다. 그러나 히시 스피드의 자마들은 오픈 클래스를 넘지 못했고 아버지의 사망 후 마주 사업을 이어 받은 마사이치로는 200여마리가 넘었던 말들을 정리하고 대신 외국 혈통의 경주마[17] 를 들여오기로 했다. 아버지가 이어온 히시 마사루의 직계를 끊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대략 32만 5천 달러에 사들인 세크리테리엇의 1989년 산 자마의 이름을 히시 마사루[18] 로 지었다. 히시 아마존이 활약하자 후손을 잇고 싶다는 생각에 히시 아마존의 첫번째 교배 상대를 히시 마사루로 정했다.
[1] 1991년 아리마 기념 우승마 다이유우사쿠의 아비이기도 하다.[2] 생산 목장은 테일러 메이드 팜(Taylor Made Farm).[A] 이때 엘리자베스 여왕배는 4세(현 기준 3세) 암말만 참여 가능한 암말 클래식 대회였다.[B] 2005년을 마지막으로 폐지, 2006년부터 오션 스테이크스로 대체[3] 현 JRA상 최우수 2세 암말.[4] 현 JRA상 최우수 3세 암말.[5] 현 JRA상 최우수 4세 이상 암말.[C] A B 중상마만 서술.[6] 타이키 블리자드의 반형제이기도 하다.[7] 重賞. 한국의 대상경주. Group 또는 Grade 경주라 불리는 G1~G3의 경주를 뜻한다.[8] 물론 이때의 엘리자베스 여왕배는 암말 클래식 레이스에 속한 레이스였으므로 클래식 1관은 따낸셈.[9] 1994년 아리마 기념 당시, 나리타 브라이언과 히시 아마존의 명승부로 인해 많은 팬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는데 거리의 차이는 있지만 2착을 한 히시 아마존에 이어 3착을 한 말은 바로 골절상을 입은 후 9개월 만에 복귀했던 라이스 샤워였다.[10] 주요 조교마로 그린 그래스, 쿠시로 킹, 호쿠토 헬리오스 등이 있다.[11] 21전 9승(중상 6승). 1977년 오카상, 엘리자베스 여왕배 우승마.[12] 당시 히시 아마존 덕분에 6만5850명의 관중이 몰려들어 주쿄경마장 역사상 2번째 관중 기록을 달성했다. 1위는 1974년 하이세이코가 같은 대회에서 나왔을 때 기록한 6만 8469명.[13] 20전 9승. 1995년 니가타대상전, 니가타 기념 우승마. 하츠 크라이의 모마다.[14] 1955년생, 27전 13승. 1958년 마이니치 왕관, 세인트 라이트 기념, 1959년 야스다 기념, 닛케이상 우승마.[15] 1962년생, 44전 14승. 1966년 야스다 기념, 올커머, 1967년 케이오배 스프링 핸디캡 우승마.[16] 1974년생, 15전 5승. 1976년 홋카이도 3세 스테이크스, 1977년 케이세이배, 도쿄 4세 스테이크스 우승마.[17] 히시 스피드가 동기 지입마인 마루젠스키에 완패하는 걸 보고 외국 혈통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18] 당시 중상 우승마나 종마와 같은 이름을 지을 수 없지만 아베 마사이치로는 미국에서 먼저 혈통 등록을 실시한 후에 들여오는 편법을 이용했다. Hishi Masaru로 알파벳 표기 등록을 한 후 이걸 그대로 일본어로 바꾼 거라고 해서 등록한 방식이었다. 혈통표에는 Hishi Masaru II로 표기된다. 아베 마시이치로의 아들인 아베 마사히데 소유 경주마 중에도 히시 마사루(2014년생, 父 룰러쉽)가 있는데 이 경우는 등록명 기준이 완화되어 G2, G3 우승마는 말소 후 10년이 지나면 쓸 수 있다는 규정에 의거해 다시 이름을 붙인 경우다. 3대 히시 마사루는 10전 3승으로 은퇴했다.[1989년생] [19] 지방 7전 4승[20] 아베 마사이치로의 장남. 아버지가 사망한 후 마주 사업을 물려받아 활동하고 있다.[21] 지방 11전 1승
히시 마사루의 자마인 첫째를 배고 자신이 태어난 농장인 미국 켄터키 주 소재 테일러 메이드 팜(Taylor Made Farm)으로 돌아갔다.[22] 이곳에서 번식용 암말로 활동하며 일본 경마계에 자마들을 보내왔지만 일본에서 성공한 자마는 등장하지 않았으며 2019년 노환으로 숨을 거뒀다.
첫 자마인 히시 안데스[23] 는 경주마 은퇴 후 일본의 수필가이자 경마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던 안자이 미호코(安西美穂子)가 마주였으나, 일련의 사건으로 지금은 하루 우라라와 함께 마사 팜으로 소유권이 넘어가 그 곳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2023년 1월 17일, 25살에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24]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
5. 기타[편집]
- 원래 경주마명은 히시 아마조네스로 하려했으나 JRA에 의해 반려되어 뒤의 네스를 빼고 히시 아마존이 되었다. 마굿간에서는 "네스" 를 애칭으로 불렀다고 한다.
- 비록 암수 혼합 G1 레이스에서 우승한 적은 없었지만, 1971년 천황상 가을, 아리마 기념 우승으로 최초의 암말 연도대표마를 수상한 토메이, 최초의 암말 3관이지만 암말 경주에서만 우승한 메지로 라모누 등 전세대 암말들을 능가하는 최강의 암말로 평가받았다. 일반적으로 숫말보다 경주 능력이 떨어지는 암말의 몸으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인 삼관마와 대등한 레이스를 펼쳤단 점에서 '여걸'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실제로 암수 혼합 G1 레이스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에어 그루브 → 보드카 & 다이와 스칼렛 → 부에나 비스타 → 젠틸돈나 → 리스 그라슈 & 아몬드 아이로 이어지는 최강 암말 계보를 잇는 암말로 평가받는다. 외산마 제한이 덜 풀린 시기라 암수 혼합 G1에 도전할 기회 자체가 적었다는 점도 아쉬운 요소.
- 여담으로 엄청 어리광이 심한 말이라서 담당 스탭들은 "이런 어리광쟁이가 무슨 여걸이야."라고 웃어댔다고 한다. 같은 마방의 암말인 호쿠토 베가와는 단짝으로 무척 친했는데 히시 아마존이 1살 위의 언니[25] 인 호쿠토 베가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사이였다고. 실제로 호쿠토 베가가 성적이 부진하던 시절에도 마방에서 끝까지 녀석을 데리고 있었던 이유도 갑자기 호쿠토 베가가 사라지면 한창 활약 중이던 히시 아마존에게 안좋은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해서였다고 한다.
6. 경주 성적[편집]
[22] 한국마사회의 소유 말인 닉스고가 은퇴 후 종마 생활을 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23] 경주 성적은 좋지 않지만, 혈통만은 대단한 말로, 미국의 명마 세크리테리엇의 친손자다. 농장인 마사 팜 홈페이지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인식해서 안데스에 대한 소개를 "모마는 초유명마. 자신의 경쟁 성적은... 그렇지만, 무척 신사적인(젠틀맨) 말입니다(母馬は超有名馬。自身の競争成績は…ながら、とってもジェントルマンな馬です)." 라고 썼다.[24] G1 등의 중상에서 우승해도 마주를 잘못 만나 비참한 말로를 보내는 말들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짧은 경주마 활동과 부진한 성적을 가졌던 히시 안데스는 하루 우라라 못지않게 상당히 복받은 마생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25] 혈연 관계는 없지만 생일이 3월 26일로 똑같아서 호쿠토 베가가 개화한 뒤론 둘의 대결도 팬들의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참고로 당시 마방의 스텝들은 이 둘에 대해 '잔디에선 히시 아마존이 압승하겠지만 더트라면 호쿠토 베가의 압승일 것이다'고 평가했다.[레코드] [B] [A] [26] 독일의 경주마. 1994, 1995년 독일 연도대표마다.[27] 이 해부터 엘리자베스 여왕배가 5세(현 기준 4세) 이상 암말도 참여 가능한 시니어 암말 대회로 바뀌었다. 기존의 가을 암말 클래식 대회는 새로 창설된 슈카상이 이어받았다.[강착] 2위로 입선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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