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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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대한민국의 남성 정치인
- 대한민국의 군인
- 1936년 출생
- 2000년 은퇴
- 제11대 국회의원
- 제12대 국회의원
- 제13대 국회의원
- 제14대 국회의원
-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 민주정의당 국회의원
- 민주자유당 국회의원
- 새한국당 국회의원
- 민주당(1991년) 국회의원
- 새정치국민회의 국회의원
- 새한국당 총재
- 원내대표
- 상하이시 출신 인물
- 경주 이씨 백사공파
- 경기고등학교 출신
- 육군사관학교 출신
- 서울대학교 출신
- 군인 출신 정치인
- 대한민국의 특임장관
- 국가안전기획부장
- 국가정보원장
- 독립유공자 후손
- 대한민국의 장로회 신자
- 국민의 정부/인사
- 노태우 정부/인사
- 전두환 정부/인사
- 박정희 정부/인사
- 이회영 가문
- 대통령직인수위원장
- 대한민국 국가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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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군인. 정치인.
대한민국 제5공화국 당시 민주정의당 원내총무를 지냈으며,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안기부장, 국정원장 등을 지냈다.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의 손자[4] 로 유명하다. 전 국회의원(5선) 겸 변호사인 이종걸의 사촌 형이 된다.[5]
2. 생애[편집]
1935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에서 출생하였다. 1945년 임정 요인들이 귀국할 때 함께 귀국하여 그 뒤부터는 서울에서 살았다. 서울 창신초등학교, 경기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6] , 육군사관학교 제16기로 임관하여 장교로 복무하였다.[7]
5.16 군사정변 이후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했다. 1971년 소령으로 예편하여 민간인 신분으로 계속 중정에서 근무했다. 중앙정보부에 있을 때에는 정권을 보위하는 조직에 속해 있으면서도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끌려온 이들을 나름대로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김지하와 가까운 사이여서 '오적 필화 사건'으로 정권의 어그로를 잔뜩 끌었던 김지하가 1972년에 '비어 필화 사건'을 일으켜 중정의 분위기가 심히 험악해지자 김지하에게 빨리 도망치라고 연락을 하였다.[8] 중정 수사관들로부터 조영래의 인품을 전해 들은 뒤, 1980년 서울의 봄으로 조영래에 대한 수배가 풀리자 “인재를 살려야 한다”며 법원행정처장을 직접 찾아가 조영래를 사법연수원에 다시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1980년 5월 17일 밤에 전두환이 5.17 내란으로 김대중을 잡아갈 당시 중앙정보부 총무국장이었다.[9] 다만 이 자체가 신군부의 플랜이었고, 기사에서 보듯이 수사 결과와는 별도로 신군부의 극본은 이미 짜여있었다. 그 후 기획조정실장을 끝으로 중앙정보부를 떠나 국보위 활동과 민주정의당 창당에 깊이 관여했다.
이후 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민주정의당 원내총무와 사무총장을 지냈는데, 민정당 국회의원들 가운데서는 드물게 이미지가 좋은 편에 속했다. 심지어는 진보진영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우당 이회영의 손자라는 점에서 플러스 점수를 받았던 것도 있지만, 성향 자체가 학구적이고 논리적인 데다, 정치적 뚝심과 사람됨, 업무능력 등에서도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1987년 10월 26일 사료의수집및보존등에관한법률안[10] 을 대표발의하였으며, 이 법안은 같은 달 30일에 수정가결되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때에는 민주자유당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김영삼에게 도전하였으나, 불공정 경선을 인정할 수 없다면서 경선을 보이콧한 후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여 새한국당을 창당하였다. 새한국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하였으나 지지율이 정체되자 선거 직전 정주영 후보 지지를 선언하면서 사퇴하였다.
1995년, 새한국당이 민주당에 흡수합당되면서 민주당 소속이 되었고, 같은 해에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 및 동교동계 정치인들과 더불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여[11] 부총재 직을 맡았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지역구였던 종로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후보에게 패하여 낙선하였다. 당시 당선된 신한국당 후보가 이명박이었다.[12]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때에는 국민회의 대선기획본부장을 맡아 대선 전략을 총괄했다.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안기부장에 임명되었고, 안기부의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하여 1999년 1월 안기부를 국가정보원으로 개편하였다.# 이후 김대중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위한 홍보 기획을 하기도 했다. 다만, 김대중이 노벨상을 수상했을 때 수행원에 포함되지 못한 게 아쉬웠던 듯하다. 동아일보에 연재 중인 이종찬 회고록 중.
국가정보원 언론문건 파문 당시 거짓말을 한 것이 드러나면서 국가정보원장 자리에서 경질되었다. 그 후 2000년 총선에서 종로구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면서 사실상 정치적 생명이 끝나고 말았다.
정계 은퇴 이후 비교적 조용하고 깨끗하게 처신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종로구의 자택 1층에서 할아버지 이회영을 기리는 우당기념관을 운영하면서,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장학사업과 대학생들의 사회활동을 후원하고 있다. 임시정부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기도 한데, 최근 벌어지는 이른바 '역사전쟁'을 의식한 듯 "김구, 이승만이 화해하고, 좌우가 구분되지 않는 기념관을 건립할 것"이라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19대 대선때는 문재인 후보의 선대위에 고문으로 위촉되어 합류하였다. #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이 충칭의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하였을 때 다른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함께 동행하였다. #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윤석열 후보를 지지하는 시국선언에 참여했다.[13][14]#
2023년 5월 25일, 광복회장에 당선되었다. #
2023년 3월, 할아버지가 일본의 손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고초를 당하는 등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일본에 본능적인 적대감 같은 것이 있다면서도, 한국과 일본이 견원지간을 풀지 않으면 동북아의 지속적 불안 요소가 된다며 한일 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후임자들이 발전시켰어야 했는데 다 헝클어 놓았다고 말했다. 또한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사과에 대해서는 "우리는 계속 사과를 하라고 한다. 그러니 일본에선 '불가역적인 사과', '이번이 마지막 사과' 이런 얘기가 나온다. 이런 사과는 안 받는 게 낫지 않나. 옆구리 찔러 자꾸 받으면 뭐하나. 가해자의 사과도 중요하지만 피해자의 용서도 중요하다고 본다.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박물관엔 '용서한다, 그러나 결코 잊지는 않는다(forgive but never forget)'라고 쓰여 있다. 가장 무서운 말이다. 그 말을 일본에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
2023년 8월, 육군사관학교 및 국방부 앞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으로 논란이 이어지자 당시 이종찬 광복회장은 회장 명의 공식 성명을 내어 국방부의 철거 시도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종찬 회장은 상기했듯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을 지지했고 멘토였음에도 이를 비판한 것. 이 회장은 "국방부가 합당한 이유 없이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를 시도한 것은 일제가 민족정기를 들어내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라고 말하며 책임자를 엄중 문책할 것을 요구하였다.# 거기에 더해 "민족적 양심을 져버린 귀하는 어느 나라 국방장관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으면 국방장관자리에서 퇴진하는 것이 조국 대한민국을 위한 길"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하며 이종섭 국방부장관의 행보를 질타했다.#
3. 여담[편집]
- 아내인 윤장순과는 상하이에서 막 귀국했을 당시 서울 창신초등학교 3학년 때 만나서[16] 꾸준히 연애하다가 육사 졸업 후에 결혼하였다. 아들은 이철우 연세대학교 로스쿨 교수[17] 이다.
- 육군사관학교 입학 당시 독립운동가인 김관오 장군, 민영구 제독의 추천서를 받았다. 당시 일본군 지원군 출신인 생도대장 이용[18] 이 추천서를 보더니 "소위 독립운동가 집안이란 건가"란 비하성 질문을 하였고, 고민 끝에 민영구 제독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자 민영구 제독이 동명이인인 이종찬 장군[19] 에게 항의했다고 한다. 이미 이 사실과 별개로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했다.
- 유사역사학 관련 비판을 받는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의 후원자로 알려져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언행으로 국내외 주류사학자들 사이에서 평이 좋진 않은지 일부는 환빠 아니냐는 의심도 제기한다.
- 2018년 11월에 그동안 모아온 의정활동 기록을 국회도서관에 기증했다. 총 기록은 6,500여점.이종찬 전 국회의원, 평생의 의정 기록물 6,500점 국회도서관에 기증[21]
4. 소속 정당[편집]
5. 선거 이력[편집]
6. 둘러보기[편집]
[1] 現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2] 상서공후 백사공파. 백사 이항복의 12대손, 중시조 37세 종(鍾)○ 항렬.[3] 원래 중앙정보부장과 안전기획부장은 부총리급이었으나 국민의 정부에서 국가정보원으로 개편하기 직전에 장관급으로 격하하였고, 이종찬 부장도 그대로 국정원장에 유임되었다.[4] 우당의 둘째 아들인 이규학의 4남.[5] 다만 두 사람의 부친은 어머니가 다르다. 본처인 달성 서씨가 1907년에 사망하면서 우당이 이듬해 한산 이씨 이은숙과 재혼했기 때문. 이종걸은 우당의 다섯번째 아들인 이규동의 아들이다.[6] 대우그룹 회장인 김우중과 경기고 52회 동기로서 매우 친했다고 한다. 둘 다 경기고 내에서 주먹패로 날렸다고 한다. 동기생으로 신구, 고건, 이준용, 박용오, 조양래가 있다.[7] 원래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사학과에 가려고 하였으나, 집안 형편 때문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8] 이외에 김지하 본인의 주장으로는 이종찬에게 쿠데타 제의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종찬은 이 주장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했다.[9] 이종찬의 부하로서 김대중을 연행한 이기동이 신동아 1999년 7월호에 기고한 "남산 지하실에서 만난 김대중·김홍일·한화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10] 국사편찬위원회의 법률상 근거를 마련한 법률. 사료의 수집·편찬 및 한국사의 보급 등에 관한 법률의 전신[11] 김대중의 오랜 참모들은 신당 창당에 회의적이었으나 이종찬이 강력하게 주장한 덕분에 결국 신당을 창당하게 되었다고 한다.[12] 통합민주당(1995년) 후보가 함께 출마하면서 야권 표가 분산된 영향이 컸는데, 당시 통합민주당 후보가 노무현이었다. 그래서 이 선거는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하게 미래의 대통령들이 동반 출마한 진귀한 선거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당시 노무현은 이종찬을 '민정당 출신이 신분세탁했다'고 비판했지만, 이종찬 본인은 이 때의 일에 대해 악감정을 갖지 않고 1998년 재보궐선거(이명박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다가 자진사퇴하여 발생했다.) 때 노무현에게 지역구를 넘겨주었다. 대의를 위해서 과거의 악연을 넘어가 준 이종찬의 모습에 노무현 본인도 감사를 표했다.[13] 아들 이철우가 윤석열과 초등학교, 대학교 동기동창이라는 인연이 있다.[14] 반면 사촌동생인 이종걸은 이재명 전 경기지사의 대표적인 측근이며 사이가 가까우며 상대후보였던 이재명 후보를 지지선언 하였다.[15] 누이의 자녀이므로 정확하게는 '생질(甥姪)'이라고 한다.[16] 그 당시 이종찬은 한국말도 잘 못하고 중국말을 섞어 쓰고 하여 '짱꼴라'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17] 서울법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런던정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성균관대 법대 교수를 거쳐 연세대 로스쿨 교수가 되었다. 전공은 법사회학이다. 김선수, 윤석열과 같은 서울법대 동기로 대학교 다닐 때 서로 알고 지냈다고 한다.[18] 6.25 전쟁 당시 연대장을 맡았는데 광복군 출신인 전임 연대장이 80%의 병력을 잃는 현리전투 버금가는 실책을 저질렀고, 남은 병력을 이끌고 후퇴하느라 고생하였다. 그런 일본군 출신이란 정체성이 더 컸을 것이다.[19] 허정 내각에서 국방부장관을 지냈다. 본 문서의 이종찬 광복회장과는 먼 친척으로, 친일 귀족 이하영의 손자다. 일본군 출신의 친일 군인이었으나 조부와 부친의 귀족 작위 습작을 거부하였고, 해방 후 다른 친일파들과 달리 친일 이력을 참회하고 부끄럽게 여겼으며 이승만 정부의 독재에 항의하기도 하는 등 참군인의 면모를 보였다.[20] 독립운동가 후손 이종찬 "태극기 오염은 제발 그만", 2018년 3월 1일, 노컷뉴스 김현정 기자[21] 2018년 11월 9일, 의회신문 박성용 기자.[22]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23] 대선 경선 불복으로 인한 탈당.[24] 민주당에 흡수 합당.[25]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을 위한 탈당.[26] 안기부장 취임으로 인한 자동 탈당.[27]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28] 문재인 대통령 후보 지지 선언.[29] 종로구·중구[30] 민주한국당 김판술 후보와 동반 당선[31] 신한민주당 이민우 후보와 동반 당선[32] 이 선거의 당선자는 이명박, 3위 낙선자는 노무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