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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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법조인이자 정치인.
2. 생애[편집]
1944년 11월 13일 경상남도 진양군 대평면 신풍리에서 목사였던 아버지 황성욱의 10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순천 매산여자중학교, 경기여자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재학 당시 같은 학번 중 유일한 여학생이었다고 한다.
1970년 제1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1979년 초까지 판사로 근무하다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같은 해 한국여성법률연구소 회장을 지냈다. 판사로 근무하던 시절 아이들은 커가는데 판사 월급으로는 도저히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변호사 개업했다고 방송에서 밝힌 바 있다.
1981년 민주한국당 인권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치러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83년 새문안교회 김동익 목사와 결혼하였다. 1985년부터 변호사로 복귀하였다. 1986년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인 권인숙 양을 변호하는 변호인단에 속하였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MBC 생방송 여론광장의 진행을 담당하였다. 이 당시 왕성한 인권변호사 활동과 방송 활동으로 1993년 대한민국 인기스타 38위를 기록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
1993년 초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자 환경처장관에 임명되어 같은 해 12월까지 역임하였으며,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쓰레기 종량제, 분리수거의 기틀을 마련하고 입안하였다. 장관 재임 중 대한민국 국회 보건사회위원회에 출석해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답변하여 물의를 빚었다. 장관 임명 당시에는 자신은 서울특별시장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3] 환경처 장관이 됐다고 하는 등의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나섰으나 2.1%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4위로 낙선했다.
1994년 존속 살해범인 박한상 사건의 변호인을 자처했으나 3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원래는 갱생을 목표로 변호를 시작했으나 반성의 기미가 없어 포기했다고. 훗날 이은석 사건의 변호인을 맡게 된다.
2000년 자유민주연합 부총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치러진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전국구 국회의원 제8번으로 출마하였으나 당선되지 못하였다. 또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기독당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하였으나 당선되지 못하였다.
3. 선거이력[편집]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4. 기타[편집]
여성 이름치고는 특이한데, 부친이 출생신고를 하러 가다가 "여호와는 …… 나의 산성이시로다" 라는 시편 18편 2절의 성경 구절이 생각나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한참 인기 있었을 때에는 이 이름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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