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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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현중핵시


나라시
奈良市
City of Nara





시청 소재지
니조오지미나미1초 1-1
도도부현
나라현
면적
276.94km²
인구
350,025명[1]
인구밀도
1,264명/km²
시장

[[무소속(정치)|
무소속
]]

나카가와 모토노부
(仲川元庸, 4선)
시의회
(37석)


[[자유민주당(일본)|
자민
]]

10석

[[공명당|
공명
]]

7석

[[일본공산당|
공산
]]

6석
'''
나라
'''

5석

[[일본 유신회(2016년)|
유신
]]

4석

[[무소속(정치)|
무소속
]]

6석
중의원
(2/465석)


[[입헌민주당(2020년)|
입헌
]]

1석

[[자유민주당(일본)|
자민
]]

1석
상징
시화
나라노야에벚꽃
시목
돌가시나무
시조
휘파람새
지역번호
0742
시정촌코드
29201-0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
2. 역사
3. 지리
4. 관광
5. 교통
6. 센토군
7. 출신 인물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나라현의 현청 소재지. 인구는 약 35만 명이다.

오사카시에서 동쪽, 교토시에서 남쪽으로 각각 30km 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주요 산업은 관광업이다. 나라 시대에 일본의 수도였고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중요한 도시로 남아 불교 예술을 비롯해 많은 문화유산이 남아있다. 한국인 관광객도 간사이 여행 중 많이 찾고, 일본 내에서도 수학여행 인기 목적지 중 하나다. 관광업 외엔 시내에 이렇다 할 산업이 발달하지 못하여 오사카와 교토 양쪽의 베드타운으로서도 기능하고 있다.

관광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내로라하는 대도시가 2개나 가까이 있기 때문에 숙박업이나 쇼핑 등 관광업종이 발달하지 못한 편이다. 더 관광수요가 큰 두 도시에서 당일치기하는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밥 한 끼 안 사먹고 나라공원 주변만 훌쩍 둘러보고 돌아가는 관광객도 많다. 명색이 일본의 역사 수도라는 명소가 숙박업 객실수로 전국 도도부현[2] 중 최하위다.

일본에서 흔히 돌아다니는 지역드립으로 오사카 사람들은 솔직하지만 거칠고, 교토 사람들은 친절하지만 교활한데 비해 나라 사람들은 겉도 속도 시크하다는 이야기가 있다.간사이 사람들의 특징을 불상에 비유한 짤방

'나라(奈良)'라는 지명은 뜻을 알기가 어렵다. 한자 뜻을 풀이하면 '어찌 좋다'는 이상한 의미가 된다. 이런 식의 지명은 한자가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차자 표기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알맞을 것이다. 실제로 문헌에는 奈良 이외에도 那良, 奈羅 등 '나라'라고 발음되는 여러 가지 한자 표기가 존재하며, '나라'가 무슨 뜻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2. 역사[편집]


이미 4세기와 5세기에 걸치는 거대한 고분군이 남아 있어 이전부터 야마토 조정의 중요한 거점으로 발전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필 또 음독으로 '나라'라고 읽다 보니 마찬가지로 한국어에서도 국가를 가리키는 말인 '나라'와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일찍이 제기되기도 했다.

710년 헤이조쿄(平城京)라는 도읍이 조성되어 784년 나가오카쿄로 천도할 때까지 74년 동안[3] 나라 시대 일본의 수도로서 번영을 누렸다. 당시 활발하게 당과 발해, 신라를 오가던 견당사 및 견신라사 등을 통해 전래된 당풍(唐風) 문화와 불교를 중심으로 한 문화가 크게 융성하였고 이 시기의 문화를 덴표 문화(天平文化)[4]라고 한다.

나라에 수도가 있었던 시대를 가리켜 일본사에서 나라 시대라고 부르는데, 줄곧 헤이죠쿄에만 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각주에서 상술했듯 740년에서 745년 사이에 쇼무 덴노(聖武天皇)가 구니노쿄(恭仁京)[5], 나니와노미야(難波京)[6], 시가라키노쿄(紫香楽宮)[7]로 옮겨다녔던 적이 있으며 이 시절들을 뭉뚱그려서 나라 시대라고 부른다. 나라의 헤이죠쿄로 수도를 옮기기 전의 수도인 후지와라쿄(藤原京)와 헤이죠쿄를 비교해보면 당풍 문화의 영향이 크게 두드러지는데, 바둑판 모양의 격자형 도로를 놓고 도시를 건설하면서 왕궁이 수도 한복판에 위치했던 후지와라쿄와 달리 헤이죠쿄는 격자형 도로로 이루어진 도시 북쪽에 왕궁이 위치해 당의 장안성과 더욱 비슷한 구조가 되었다. 이는 후지와라쿄를 지을 당시에는 일본이 당에 사신을 보내지 않아서[8] 당의 수도 장안성이 어떤 구조인지 제대로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주례(周禮) 고공기에 써진 고대 중국의 도시 구조에 대한 설명을 그대로 따라서 지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존재한다.

간무 덴노가 나가오카를 거쳐 헤이안쿄(교토)로 천도한 뒤에는 국도로서의 기능을 잃었기는 하지만 그 뒤로도 야쿠시지(藥師寺) · 가스가타이샤(春日大社) · 고후쿠지(興福寺) · 도다이지(東大寺) 등이 남아 문전도시로 번영하였다. 불교의 본산으로서 나라에는 여섯 개의 불교 종파가[9] 존재했고, 지리적으로 북쪽에 위치한 교토에 대칭되어 남도(南都)라 불렸다.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불교가 국교였으며[10] 한국의 호국불교 사상과 같은 진호국가(鎭護國家) 사상이 존재했기에 국가를 수호하는 종교로써 불교는 엄청난 위세와 권위를 누렸고[11] 이에 힘입어 불어난 장원과 재산을 지킬 목적으로 소헤이들이 발호하게 된다. 특히 고후쿠지 승병들은 헤이안 시대 나라호시(奈良法師)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야마호우시(山法師)라 불린 히에이 산 엔랴쿠지 승병들과 함께 악명을 떨쳤다. 쇼무 덴노가 직접 발원해 지은 도다이지와 함께, 고후쿠지의 경우 후지와라 가문의 우지데라(氏寺)로써 후지와라쿄에서 헤이죠쿄로 옮길 때 같이 옮겨지은 것으로 후지와라 셋칸케와도 연줄이 닿아 있어서 위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겐페이 전쟁이 벌어진 12세기 말 전국에서 겐지 세력이 타이라노 키요모리헤이케 정권에 반대하며 봉기하는 와중에 지쇼 4년(1181년) 음력 12월 나라의 승병들이 다시금 현지에서 겐지들의 거병을 도와 헤이케 정권에 도전하려다 다이라노 시게히라[12]에 의해 승병들의 거점이었던 동대사와 흥복사가 불타버린다.[13] 이 와중에 불길이 나라 전체로 번져서 시가지가 소실되었다. 일본사에서 말하는 남도 소각(南都焼き討ち, 난토 야키우치)이다. 다이라노 키요모리는 불타 잿더미가 된 나라의 사찰을 다시 짓지 못하게 했지만 국가를 수호한다는 불교를 건드린 것도 모자라 불교의 중심 사찰 대접을 받던 절들을 태워버린 것에 당연히 세간의 반발은 혹심했고[14] 키요모리가 3개월만에 병사한 뒤 헤이케를 이끌게 된 타이라노 무네모리는 불교 세력을 달래기 위해 나라의 절들을 다시 짓는 것을 허용했지만, 헤이케 정권은 결국 무너졌다.

13세기에 가마쿠라 막부가 세워지고 쇼군이 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자신이 헤이케와 달리 불교를 보호할 것임을 어필하고자, 나아가 불교계를 회유해 아군으로 끌어들이고자 적극적으로 나라의 사찰 재건을 지원했고 이때에 나라의 여러 사찰들이 재건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나라 부교(奈良奉行)가 설치되어 도쿠가와 막부가 직접지배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현청소재지가 되고 폐불훼석의 칼바람도 혹독하게 맞았는데, 고후쿠지 5중탑의 경우 25엔에 팔려서 하마터면 통째로 헐려 땔감이 될 뻔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는 비교적 개발이 덜 되었는데, 역설적으로 그 덕에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도시 대부분과 달리 간헐적인 폭격 정도를 제외하면 시내를 전소시키는 대공습을 면하였고 고대의 목조건축물이 지금까지 남을 수 있었다.

나라는 오늘날 국제적인 관광도시로 바뀌었으며, 서부는 오사카 도시권 안의 주택 위성도시로 변하고 있다. 나라공원에서는 꽃사슴을 1천 마리 이상 공원에 풀어놓아 기르며 시의 관광명소가 거의 공원 안에 산재해 있다. 나라에서는 사슴을 신의 사자로 여겨지는데, 고사기(古事記)에 오쿠니누시가 니니기에게 나라를 넘긴 신화에서 아마테라스가 오쿠니누시에게 나라를 넘기라고 요구하는데 보낼 사자로 아메노오하바리(アメノオハバリ)를 선택하고, 사슴신 아메노카쿠(天迦久)를 시켜서 아메노오하바리에게 사신으로 오쿠니누시에게 좀 갔다오라고 전하게 했는데 이때 아메노오하바리는 자신이 가지 않고 대신 아들인 타케미카즈치 신을 보내 오쿠니누시에게 "지상은 아마테라스의 후손이 다스려야 할 곳이니까 니가 알아서 내놓으라"고 선포해 오쿠니누시로부터 나라를 넘겨받게 된다. 타케미카즈치는 카스가 산으로 내려올 때 흰 사슴을 타고 있었다고 하며, 이때부터 사슴을 신의 사자로 모시게 되었다는 것.[15]


3. 지리[편집]


나라현의 북서쪽에 위치하여 교토부 경계와는 바로 인접하여 있다. 나라현 전체가 통으로 하나의 분지로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시 또한 동서로 산지가 펼쳐진다.

시가지는 가운데의 헤이조 유적을 중심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동쪽이 관광객이 많이 오가는 옛 나라에 해당하고, 서쪽의 야마토사이다이지역을 중심으로 한 니시노쿄(西ノ京) 일대는 1951~55년에 편입된 지역으로 원래의 나라시와는 군단위로 갈리던 지역이었다. 자연스럽게 서쪽 지역은 원래의 나라 도심 못지 않게 오사카 쪽에 교류가 잦은 지역이 되어 있다.

일본의 고도(古都)답게 일본 내에서 지진에서 안전한 지역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비교적 지진이 적은 간사이 내에서도 안전한 편인데 단층발 지진에 있어서는 간사이 일대에서 가장 활발한 단층군인 롯코-아와지섬 단층대 및 아리마-타카츠키 단층대[16]의 피해 범위에서 다소 벗어나 있어 지진이 적기로 유명한 교토보다도 더욱 안전하다. 이 단층대에서 다소 떨어진 오사카시와 비교해도 매립 평야가 많은 특성상 호에이 대지진 때와 같이 난카이 해곡 대지진 피해에서 위험한 오사카시보다 지반이 단단한 나라 분지에 위치해 있어 더욱 안전하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 내에서도 오카야마 다음으로 지진에서 안전한 지역 중 하나로 손꼽힌다.[17] 실제로 교토의 경우 니시혼간지, 도지와 같이 역사적으로 대지진의 피해를 입은 후 복구한 문화재가 꽤나 존재하는 반면 도다이지, 야쿠시지 등 나라의 문화재들은 지진으로 인한 재건 기록이 많지 않아 천 년이 넘은 목조 문화재가 다수 남아있다.[18]


4. 관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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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1993년

호류지 지역의 불교 기념물
法隆寺地域の仏教建造物

1993년

히메지 성
姫路城

1994년

고대 교토의 역사 기념물
古都京都の文化財(京都市、宇治市、大津市)

1995년

시라카와고고카야마
역사 마을
白川郷・五箇山の合掌造り集落

1996년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
(원폭 돔)

原爆ドーム

1996년

이쓰쿠시마 신사
厳島神社

1998년

고대 나라의 역사 기념물
古都奈良の文化財

1999년

닛코의 신사와 사찰
日光の社寺

2000년

류큐 왕국의
구스쿠 유적지와 관련 유산

琉球王国のグスク及び関連遺産群

2004년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
紀伊山地の霊場と参詣道

2007년

이와미 은광과 문화 경관
石見銀山遺跡とその文化的景観

2011년

히라이즈미
: 불교 정토 사상을 대표하는 사찰, 정원, 고고 유적군

平泉 - 仏国土(浄土)を表す
建築 ・ 庭園及び考古学的遺跡群


2013년

후지 산
: 성스러운 장소 그리고 예술적 영감의 원천

富士山 - 信仰の対象と芸術の源泉

2014년

토미오카 제사 공장과 관련 유적지
富岡製糸場と絹産業遺産群

2015년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 철강, 조선 및 탄광

明治日本の産業革命遺産: 製鉄・製鋼、造船、石炭産業

2016년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작품
: 모더니즘 운동에 관한 탁월한 기여

ル・コルビュジエの建築作品
- 近代建築運動への顕著な貢献


2017년

신이 사는 섬
무나카타 오키노시마와 관련 유산군

「神宿る島」宗像・沖ノ島と関連遺産群

2018년

나가사키 지역의
은둔 기독교 유산

長崎と天草地方の潜伏キリシタン関連遺産

2019년

모즈·후루이치 고분군
: 고대 일본의 무덤
百舌鳥・古市古墳群 - 古代日本の墳墓群

2021년

홋카이도 · 북도호쿠의 조몬 유적군
北海道・北東北の縄文遺跡群

자연유산

1993년

야쿠시마
屋久島

1993년

시라카미 산지
白神山地

2005년

시레토코
知床

2011년

오가사와라 제도
小笠原諸島

2021년

아마미 오시마, 도쿠노시마,
오키나와섬 북부와 이리오모테
奄美大島、徳之島、沖縄島北部及び西表島




동쪽 구릉지에는 나라 공원을 중심으로 도다이지, 고후쿠지, 가스가타이샤, 쇼소인 등이 있고, 서쪽 교외의 니시노쿄에는 사이다이지, 야쿠시지, 도쇼다이지, 헤이조 궁 등이 있다. 이 중 일부가 고대 나라의 역사 기념물이라는 유산군에 묶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예로부터 전승되고 있는 고전 행사가 많고, 칠기·먹·붓 등의 전통 공예품의 생산도 활발하다. 대한민국경상북도 경주시와 자매도시 결연을 맺고 있는데, 실제로 매체에서 로컬라이징되는 것과 달리 경주시는 천여년 전에 수도였던 점이나 도시에 널린 고분, 오늘날 30만 정도 되는 인구 등, 교토보다는 나라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19]

파일:attachment/narapark1.jpg

파일:attachment/narapark3.jpg

파일:attachment/narapark4.jpg

도다이지 등 세계유산이 있는 나라 공원 및 주변 도로에 꽃사슴들이 바글바글하다(2021년 기준으로 약 1,200마리). 한국에 흔한 고라니와 달리 덩치도 더 크고 수컷은 뿔도 크고 멋지게 자라는 종이라서 관광객들이 얘들과 기념사진을 많이 찍는다. 농장이 아니라 공원이라는 이름처럼 사슴공원 주위에는 방책 같은 게 전혀 없어서 사슴공원 주위에도 사슴들이 어슬렁거린다. 공원 내에 차로도 있어 인도의 소들 마냥 횡단보도를 건너는 일도 일상다반사이고, 사슴들이 신호를 무시하고 활보하는 일도 많아 간혹 로드킬이 일어나기도 한다.

다이카 개신 때 삼한의 사신들이 있을 때 친삼한파였던 소가노 이루카를 죽이고 소가노 마코와 소가노 이루카 둘의 이름을 합하여 바카(바보)라는 의미로 나라에 사슴을 풀어놓고 나라에서 다른 곳으로 천도하였고, 이후 나라현에 사슴이 많아지게 되었다. 참고로 다이카 개신때 왜국은 오오키미에서 천황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

파일:attachment/narapark2.jpg

가게와 노상에서 사슴에게 줄 사슴전용의 센베(전병)를 10장 당 150엔에 파는데, 시카센베(鹿せんべい/사슴과자)라고 부른다. 인간이 먹는 것과는 성분이 달라서 먹어보면 맛이 없고 텁텁하다. 이 센베는 사슴보호 기금조성 목적으로 상인과 코옵해서 파는 것이며 관광객이 한참 많았을땐 한해 수천만개씩 팔았다고 한다. 해외 관광객이 늘면서 돈이 아깝다고 공원에서 파는 것 이외의 먹을 것을 사슴에게 주거나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는 경범죄 행위가 늘어났다. 사슴들은 사람이 주는 것이면 먹어도 되는 줄 알고 다 먹는데 흘린 비닐봉투, 플라스틱등의 쓰레기도 먹이인 줄 알고 주워먹어서 죽는 사슴이 많다. 참고로 시카센베를 싸고 있는 종이와 인쇄 인크는 사슴이 먹어도 안전하게 만들었다.

이 센베를 들고 있으면 주변에 사슴들이 몰려든다. 슬슬 뿌리며 나눠주면서 사슴과 놀던 중 갑자기 들이대는 사슴들에게 놀라서 허둥지둥 뿌려본 경험있는 사람이 꽤 있을 것이다. 사실 노점에서 사자마자 사슴들이 달라붙는다. 옷과 여권을 질겅질겅 뜯어 먹기도 하며, # 센베로 약 올리면 물거나 머리를 박기도 한다. # 사슴이 가장 밀집한 곳은 도다이지 입구(난다이몬) 앞으로 여기서 센베를 들고 오랫동안 잘 도망다니면 과장없이 사슴을 백 단위로 끌고 다닐 수도 있다. 그나마 근처에 있는 카스가 신사나 도다이지에 있는 사슴은 덜 흉폭하긴 하지만 음식에 칼같이 반응하고 들이대는 건 마찬가지. 참고로 센베 줄 때 물릴 수도 있으니 손바닥 위에 얹어서 주지 말자. 과자 끝을 잡고 주어야 안전하다.

사슴이 워낙 많아 주변 길은 사슴 똥 천지고, 사슴들은 행인의 종이 가방이나 관광객이 들고 있는 지도까지 뜯어먹는다. 안내 책자나 종이 제품이 나무로 만든 거라 초식동물인 사슴이 일단 먹고 소화시킬 수는 있지만 당연히 화학처리된 종이를 먹으면 사슴 몸에는 좋지 않다. 과장 안보태고 길거리에 서서 사슴 구경을 하다보면 사슴들이 근처 사람들의 옷이고 모자고 다 뜯어먹는 걸 볼 수 있다. 2020년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산으로 관광객이 줄어들면서 사슴들의 영양상태가 악화되었다. 급기야 뼈만 남은 사슴까지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는 먹이의 부족이 아닌 극히 일부 사슴의 인간의존 경향 때문이다. 강한 무리에 속하는 인간 의존형 사슴과 달리 풀을 뜯어 먹는 자립형 사슴들은 여전히 건강하다. 나라의 사슴영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센베를 주면 받아 먹지만 곧바로 초지에서 풀을 뜯는 사슴과 하루종일 인도에 앉아서 센베만 받아먹는 사슴이 구분되어 있다는걸 알수 있다. 이 일부 마른 사슴들이 얼마나 인간의 손길에 길들여 졌냐면 상인들이 주는 콩 등의 곡식가루와 관광객이 주는 센베 외에는 먹지 않으며 관광객이 줄자 민가에 출몰하여 밥을 줄 인간을 찾아 다녔다.

2021년 기준 마른 사슴은 없어졌으며 민가 출현도 줄었다. 편식하는 어린이는 일단 굶기라는 옛말이 사슴에게 통용된 듯 게다가 전체적으로 코로나 이후 외국인 관광객이 줄자 공원 전체 사슴들의 건강상태가 좋아 졌다고 한다. 일부 외국인 관광객이 돈주고 사야 하는 센베 대신 주면 안되는 음식을 주거나 비닐 봉투 등의 쓰레기를 바닥에 마구 버려서 이걸 주워먹고 폐사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런 일이 줄었다는 것. 일례로 2019년 25마리의 원인불명 폐사 사슴 중 무려 16마리가 관광객이 버린 쓰레기를 먹고 죽었다. 그리고 센베만 받아 먹던 사슴들도 풀을 먹기 시작하면서 건강상태가 매우 개선되었다고 한다.

파일:224383655e8aa4648ede50fa793cd6045393b4f0.jpg

이 때문에, 위 처럼 영화 쥬라기 공원을 패러디한 짤도 돌아다닌다. 이쯤 되면 사슴센베 파는 가게가 습격당하지 않는게 신기할 정도.

이에 대해 공원에서 사슴이 들이 받거나 무는 등 놀라게 할수 있다고 대처 요령등을 안내하고 있으니 잘 읽어 볼것.

뭐 사슴이 진지하게 공격하는건 아니고 사람을 부르는 관계 행위로 사슴이 정말 공격할땐 뿔로 받거나 발굽으로 차니까 그 외의 행동엔 겁먹을 필요 없다. 게다가 나라공원의 사슴은 정말 얌전해서 사슴농장의 사슴들에게도 볼수 없는 가축화가 진행된 상태다. 농장이나 체험학습장에서 기르는 사슴들은 공격받으면 당연히 반격하고 화나거나 심지어 이유없이도 사육주를 공격하기도 한다. 다만 공원의 사슴이 센베달라며 장난으로 당겨도 옷같은게 찢어질수 있으니 이것엔 주의하자. 사슴에게 센베를 주고 싶다면 스커트나 치렁치렁 내려오는 옷, 종이처럼 보이는 옷감도 피하는게 좋다.

실제 사슴의 공격 빈도와 부상 통계는 한 해에 약 수십~백수십명 정도가 사슴에게 물리거나 받혀서 넘어저 부상을 당하지만 생체기 수준의 경상이다. 관광객이 폭증했던 코로나 이전엔 성수기에 한 달 만에 100건이 넘는 부상 기록을 내기도 했는데 부상자 79%가 외국인 이였고 이중 83%가 중국인이었다고 한다. 부상의 이유로는 거의 대부분이 사슴을 약올리거나 폭행하기 때문이다. 해당 국가의 동물원의 동물복지와 처우상태가 어떠한가를 생각하면 이 관광객들이 사슴들에게 뭘 했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덤으로 이때 사슴들의 사망률도 역대 최고를 기록했으며 코로나19 창궐이후 공격 사례와 사슴의 사망률이 줄고 건강이 기존수준으로 회복되었다.

왜 사슴들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사람에게 붙냐면 기본적으로 사람과 익숙해져 사람은 만만하게 보는데다 같은 사슴 무리에서도 실은 먹이 경쟁 관계에 있으며 사슴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서 무리차원의 경쟁도 심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의존형 사슴들이 생겨나 센베와 간식만 먹는 편식을 하며 그걸 못먹으면 그냥 굶어 버리기에 인간이 주는 센베에 집착하는것. 마치 편식하며 때쓰는 버릇없는 어린이와 행태가 똑같다. 센베로 약올리면 머리로 헤딩하거나 옷을 잡아 당긴다는 사슴이야기 대부분은 모두 이런 인간의존형 센베중독 사슴들이 범인이다.

따라서 이런 의존형 사슴은 피하고 집단보단 홀로 떨어져 있는 사슴에게 먹이를 주면 편하게 관광을 즐길 수 있다. 무리에 속하지 못한 외톨이 사슴은 관광객의 인적이 드믄 곳에 가면 쉽게 만날 수 있고 인간 의존형 사슴 구분 방법은 초지를 이동하며 끊임없이 풀을 뜯고 있으면 자립형, 아스팔트나 인도에서 관광객만 노리고 있으면 의존형이라고 보면 되며 센베를 줬을때 반응도 다르다. 자립형은 밥을주면 가만히 앉아서 입만 벌려 먹거나 다가와서 밥만 먹는데 의존형은 사람에게 알아서 달라붙어 엉기고 조르며 주머니까지 뒤지는 녀석도 있다. 이는 집단 먹이 경쟁하에서 어느 집단에서든 관찰되는 현상으로 고양이섬, 토끼섬 , 여우섬등 동물을 방목하고 관광객에게 먹이를 받아 먹을 수 있게 허용한 곳은 모두 똑같다.

사슴과 더욱 좋은 추억과 사진을 찍고 싶고 동물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다면 센베 대신 동물용 빗을 하나사서 가는걸 추천한다. 소형동물용 용 빗은 촘촘해서 털을 뽑아 놀라게 할수 있으니 이가 성근것을 사야하며 현지에서 사슴용 빗을 파니까 이쪽을 추천. 사슴이 스스로 긁기 힘든 등이나 머리 뒤쪽, 뿔 근처를 긁어주면 사슴의 닥돌을 겪지 않으면서도 사슴이 정말로 좋아해서 얌전하게 맴도는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으며 거의 대부분의 관광객도 공원측도 해주지 않는 서비스(?) 이므로 특히 수컷 사슴들이 환장한다. 그리고 나라 사슴은 인간과 친해서 어떻게 접근해도 상관안하지만, 되도록 얼굴쪽에서 접근해서 손을 뻣어 냄새를 맡게 한 뒤에 사슴도 나를 볼수 있는 상태에서 사슴의 목을 쓰다듬은 뒤에 빗질을 시작하면 놀라지 않는다.

사슴 발정기에는 먹이 경쟁과 관계없이 수컷에게는 접근하지 않는것이 좋다. 수컷도 암컷 경쟁으로 피곤한 상태인데 사람이 만저보고 싶다고 귀찮게 굴면 저리가라고 뒤에서 엉덩이에 박치기 해서 밀어낼수도 있기 때문. 수컷이 노리는 암컷에게 다가가도 구애를 방해 받기 때문에 수컷의 박치기가 올수 있다. 발정기 시작시기는 늦여름 부터며 가을은 모든 사슴이 지속 발정기이다.

반대로 봄에는 새끼를 키우고 있는 암컷들이 예민하므로 주의. 물론 모든 사슴이 다 똑같은게 아니라 동영상을 찾아보면 새끼를 만저도 가만히 있는 암컷이나 발정기임에도 센베에 더 관심많은 수컷도 많다.

사슴에 관심없고 사찰만 보고 싶다면 센베같은 사슴이 좋아하는 먹을것을 들고 있지 않으면 된다. 먹을게 없으면 사슴도 사람에게 관심없다..

늘어난 해외 관광객 중 일부는 귀찮게 따라 붙는 사슴을 쫓는다며 자국 동물원 마냥 따귀 정도는 때려도 알고 있는 줄 아는 부류가 있는데 실제론 처벌 받는다. 일본은 외국인 관광객 범죄를 엄하게 다스리니 사소한 경범죄라도 외국인은 주의해야 한다. 따귀 한 방에 20일 이상 구류당하고 추방 당할 수 있다는 소리. 외국 관광객의 사슴폭행 동영상 물론 죄를 인정하고 빨리 나오는 방법은 있는데 그럼에도 구류기간은 그대로다.

이에 반해 센베 상인에겐 사슴들이 공격은 커녕 구걸조차하지 않는데 보통 어린 새끼나 학습이 덜 된 사슴이 실수를 하지만 곧바로 상인의 제재를 받고 학습해 나간다. 이렇게 학습된 사슴의 새끼들도 어미를 따라 배우며 계속 이어지고 있는 나라 사슴들의 룰이며 지금도 센베 노점 상인들의 빗자루 제재를 통해 철권 통치되고 있다. 그래도 나라의 신수이기 때문에 때리지는 않는다. 만일 그랬다간 공원과 시에서 상인이 계속 장사하게끔 놔두지 않는다. 그래서 사슴들은 센베 노점상 대신 주위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열심히 센베 호객을 한다. 사슴이 센베 상인 앞에서 관광객에게 호객하면 관광객이 상인에게 센베를 사서 그 자리에서 주기 때문에 양자 모두 이득이며 이 관계를 사슴 구룹별로 힘의 우열 관계에 따라 돌아가며 행사하므로 모든 사슴이 잔뜩 몰려있지 않아 관광객도 부담이 덜하다. 그리고 센베를 팔지 않는 상인들도 사슴들이 주변에 머물거나 굶주리지 않게 하려고 주기적으로 간식이나 먹이를 주며 돌봐주며 가게 문앞에 죽치고 있어도 들어오지만 않으면 쫒아내지 않는다. 이들 모두가 공생관계이기 때문.

구걸로 유명한 사슴이라면 항상 차국수/우동 가게 문 앞에서 죽치고 있는 카스가찻집(かすが茶屋)사슴이 있다. 문을 열줄 아는 사슴이며 사람이 관심을 안보이면 문을 열고 시키지도 않은 인사를 끊임없이 하며 걸식 시위한다. 이를 찍은 영상도 많다. 문여는 걸식사슴,

2020년에도 잘지내고 있으며 문을 너무 자주 열어서 점주가 자동문 버튼을 쉽게 누르지 못하도록 위로 옮겨 설치했다고 한다. 그래도 힘겹게 눌어서 결국 열어 버리는걸 볼수 있다. 자동문 버튼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 이 사슴이 약 5살로 수년째 매일 이러고 있다는데 이쯤되면 짜증도 날법하지만 점원과의 관계가 좋은지 잘따른다. 2020년 여름 근황

나라 사슴들의 독특한 룰로는 횡단보도 이용과 인사 모방이 있는 데 횡단보도는 꽤 많은 그룹의 사슴이 횡단보도를 이용할 줄 알며 차의 위협도 인지하는 모습을 보이므로 한국도로의 고라니처럼 뛰어들지 않고 차가 없을때 천천히 걸어다닌다. 게중엔 사람과 함께 건너는 방법을 택하는 사슴도 있을 정도로 사슴간의 개체차이도 크다.. 횡단보도 사슴 이는 나라 사슴들이 횡단보도를 학습한 것도 있지만 공원의 설계가 사슴들이 되도록 횡단보도를 이용하도록 잘 유도한 것도 크다.

종종 횡단보도에서 건너지 않고 큰 무리가 버티고 있는 장면도 자주 볼수 있는데 이는 아스팔트를 핥음으로써 미네랄을 섭취하기 위한 행동이다. 차로에 서성이는 사슴은 길을 잃은게 아니라 중앙선에 조성한 화분의 풀을 먹기 위해서 종단하는 것이고 멀리가지 않고 다 먹으면 돌아온다. 공원을 가로 지르는 도로와 인근 도로의 사슴주의 경고판이 세워진 곳은 모두 사슴우선 도로이므로 빨간불이든 파란불이든 사유불문하고 사슴이 도로에서 꼼짝안한다고 위협하거나 물리력을 행사하면 처벌받을수 있으니 주의.

사슴이 인사하는 습관은 해외에도 매우 유명한 나라공원 사슴의 특징인데, 과거 누군지는 모르지만 사슴들에게 인사를 시키고 사슴이 인사를 하면 밥을 주는 보상훈련을 시킨 최초의 누군가로 인해 이런 인사 훈련이 관광객들 사이에 퍼졌고 사슴들도 인사를 하면 센베를 잘준다는 걸 학습해서 나라공원의 사슴들은 센베를 요구할때 인사하는 시늉을 한다. 해외에도 많이 퍼진 사실이라 지금도 관광객들은 나라 사슴에게 인사를 하고 사슴도 따라서 인사를 하면 센베를 주고 있기에 사슴과 관광객들의 이런 독특한 관계는 계속될 듯 하다.서로 인사하는 관광객과 사슴 덤으로 인사를 하면 보상받는 훈련 때문에 사슴들의 인내의 한계를 객관적 수치화 하는게 가능하다. 가장 참을성 없는 인간의존형 사슴들이라도 센베 1장당 최소 인사 2번정도는 얌전하게 하는걸 관찰할 수 있다. 참고해서 사슴에게 엉덩이를 받히지 말도록 하자.

여담으로 나라 공원에 놀러간 중국인들이 사슴을 붙잡고 뿔을 자른 사건이 있다.

중국 웨이보에 중국인들이 일본 공원에서 사슴뿔을 자르고 이게 녹용이라며 떠들어댔다란 글이 올라와 삽시간에 이슈가 되었는데 이어서 정말 사진도 올라와서 사건으로 커진것. 다음날 웨이보에 관련자로 보이는 사람이 유모차에 사슴뿔이 끼어서 빼주려고 사슴뿔을 잘랐다고 해명이 올라와 훈훈한 미담?이였다고 중국 뉴스매체가 일제히 재보도한 사례이다. 기사)기사)

사진을 보면 정말 무언가에 끼어 있는듯이 보이긴 하는데 관광객이 사슴뿔을 자를 낱붙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유머차인지 모르겠지만 금속물에 사슴뿔이 끼었다고 이미 금속물을 분리한 상황에서 관리자에게 넘기지 않고 굳이 관광객들이 직접 뿔을 잘랐다는게 타국의 사람들 입장에선 이해 못할 행동. 사진: 비위생에 절각면도 엉망이다 그후 이 중국 관광객들은 말이 통하지 않고 공원 관리자를 찾을 수가 없어서 사슴과 뿔을 현장에 내버려두고 그냥 비행기 타고 중국으로 왔다고 한다. 만약 신원이 조기에 알려졌다면 공항에서 연행되었겠지만 이미 중국으로 떠난데다 양국간의 미묘한 시기였으므로 유야무야 넘어갔다.


5. 교통[편집]


간사이 게이한신 광역권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오사카, 교토와는 나라선, 간사이 본선(야마토지선), 많은 근교철도 노선이 연결되어 있다. 주요 역은 JR 서일본나라역긴키 일본 철도(긴테쓰) 긴테쓰나라역야마토사이다이지역이 있다. 다만 지역간 노선은 JR그룹은 없고, 긴테쓰 특급열차가 미에현 이세시 방향으로 운행하는 정도이다. 2040년대에는 주오 신칸센 중간역이 나라시내에 들어설 예정이다.[20]

간선도로는 제2한나도로(E92), 게이나와자동차도(E24)와 함께 24번 국도, 169번 국도가 경유한다. 철도와 마찬가지로 장거리 간선도로를 타려면 대체로 오사카나 교토를 거쳐야 한다.


6. 센토군[편집]


파일:sentokun.jpg

나라를 대표하는 마스코트 캐릭터.동자승에 사슴뿔만 붙여둔 모양새인데 원안을 디자인한 야부우치 사토시(薮内佐斗司)[21]의 개인적인 취향이 들어가 상당히 기묘, 기괴한 모습이 되었고 왜 저런 사람한테 마스코트 디자인을 맡기냐는 항의가 빗발치기도 했다. 존 올리버는 "안드레 애거시순록을 합성한 것 같다."고 평했다(...).

파일:external/214b60b5d88e9830563550c886429ede8a6b6a0efdba9dc2dd36ddce66fd49cd.jpg
좌측부터 센토군, 망토군, 시카마로군

결국 보다못한 일부 시민들이 망토군(まんとくん), 나무군(ナームくん) 시카마로군 등을 만들어 홍보에 나서기도 했다.[22] 오히려 귀여운 시카마로군을 마스코트로 삼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런 논란과 기괴한 생김세 때문에 오히려 이 캐릭터의 인지도가 올라갔고 컬트적 인기가 생겨서 방송도 여러차례 나간덕분에 캐릭터 교체없이 지금은 넷 다 활발히 활동중이다. 사실 인기가 안올라갔어도 책임자 바뀌기 전까진 캐릭터 바꾸지 않았을 듯

위 사진들을 보면 센토군도 센세이션 했지만. 후속 디자인인 누나 로쿠보우의 디자인이 센토쿤을 압도하는 디자인이라 다시한번 주목을 받았다. 초기엔 생김세 때문에 형으로 알려졌는데 며칠 뒤 여자라고 설정이 밝혀져서 한번 더 놀람.
파일:센토군1.jpg
누나쪽은 대놓고 노린듯한 디자인.

센토군 디자인이 기존 동자승에 뿔만 박은데다가 표정은 이상하고 기괴한 리얼리티까지 있어서 징그럽다라는 의견이 초기 비판의 주류였는데 이런 비판들을 받아들여 수정하기 보다 더 극대화 시키는 과감한 선택을 했다. 디자이너의 고집이 느껴진다.

특징을 보자면 제질이 바뀌여서 더 이상 복슬복슬한 인형탈이 아니다. 디테일하게 만들어진 단단한 불상 하이바라서 얼굴만 클로즈업하면 동으로 만든 불상처럼 보일 정도.. 이 재질 변화는 후속 캐릭터에도 모두 적용된다. 몸도 솜을 다빼서 옷 입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라 걸어 다니는거 보면 그냥 탈만쓴 사람이다.

피부색이 매우 짙어졌는데 유독 눈 주위만 밝은 색조 메이크업을하고 볼터치도 넣어서 무슨 갸루 화장한 보살 같다.

눈은 압권이다. 센토군은 그래도 불상의 미소였지만. 누나쪽은 눈 때문에 놀라는건지 노려보는건지도 알수 없어서 묘하다. 게다가 눈에 고품질의 리얼리티한 렌즈를 박아 넣었는데 심지어 움직이는 쓸데없는 기믹을 넣어서. 이상한 표정으로 정면을 보다가 슥하고 눈만 움직여서 여기를 보면 호러영화 수준.. 이렇게 앞을 보다가 눈만 슥!

이외에 차례로 관련 캐릭터를 만들었는데 센토군 → 누나 로쿠보우 → 할아버지 로쿠이지 → 여친 렌카(蓮花)[23] 순서로 만들었다.
단란하면서도 기묘한 마스코트 가족사진..가족사진

여담으로 현지에 인간크기의 대형 조형들이 있는데 실제로 보면 묘한 느낌을 줘서 어린이들이 싫어한다.


7. 출신 인물[편집]




8. 둘러보기[편집]


파일:일본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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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추계인구 2023년 4월 1일 기준[2] 한국의 광역지자체 격[3] 다만 740~745년 동안 천황이 헤이조쿄를 떠난 적이 있으며 784년 나가오카쿄 천도 이후인 794년 헤이안쿄(교토)로 수도를 옮기는데, 일본사에서는 교토로 천도한 794년을 헤이안 시대의 시작으로 잡고 천황가가 나라를 잠시 떠난 740~745년과 나가오카쿄에 도읍이 있었던 784~794년의 시기도 편의상 나라 시대로 간주한다.[4] 덴표(天平) 연호는 729년에 처음 쓰이기 시작했는데, 767년에 진고게이운(神護景雲)으로 고칠 때까지 덴표간포(天平感寶, 749년), 덴표쇼호(天平勝寶, 749-757년), 덴표호지天平寶字(757-765년), 덴표진고(天平神護, 765-767년) 등으로 글자를 덧붙여가면서 '덴표' 연호를 계속 썼다.[5] 지금의 일본 교토 부 기츠가와 시(木津川市) 가모 지구.[6] 지금의 오사카. 오사카는 고토쿠 덴노 시절 잠시 수도였던 적이 있다.[7] 지금의 시가현(滋賀県) 코우가시(甲賀市) 신라쿠(信楽).[8] 663년 백강구 전투에서 백제를 도우러 왔던 왜의 수군이 나당 연합군 수군에 궤멸당했다.[9] 삼론종(三論宗), 성실종(成実宗), 법상종(法相宗), 구사종(倶舎宗), 화엄종(華厳宗), 율종(律宗). 이들을 난토 6종(南都六宗)이라고 하는데, 종교 종파라기보다는 학파로써의 성격이 강했고 따라서 한 절에서 혹은 한 승려가 두 개 이상의 종파의 교리를 겸해서 익히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10] 다만 기독교 등의 종교를 국교로 삼은 나라들과는 달리 일본은 불교를 국가의 기간 종교로 존숭했던 어떤 시절에도 불교 이외의 도교신토 같은 토속 종교를 탄압하거나 금지하는 정책은 시행하지 않았다.[11] 신토는 진작에 불교에 거의 흡수되어 버리다시피 했다.[12] 다이라노 키요모리의 다섯 번째 아들이다.[13] 다만 오다 노부나가가 승병 몰살을 위해 작정하고 히에이 산에 불을 질렀던 것과는 달리 시게히라는 일부러 작정하고 불을 지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동대사 대불전을 태워버린 악명이 전하는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경우 정말 그가 동대사 대불전을 태웠는지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설도 존재하고 있다. 도다이지 항목 참조.[14] 헤이케모노가타리에는 키요모리가 죽기 전에 꿈에 지옥에서 키요모리를 데리러 온 사자를 보았는데, 키요모리가 수레를 가리키며 거기에 적힌 '無'자의 뜻을 묻자 지옥 사자가 "나라의 비로자나불을 태워 없앤 죄로 너를 무간지옥으로 끌고 갈 수레라는 뜻이다"라고 일갈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15] 타케미카즈치 신은 카스가 다이샤에서 모시는 신인 동시에 후지와라 씨의 수호신으로 섬겨졌다.[16] 효고현 아와지 섬에서 시작해 고베시오사카부 북부를 지나 교토시 서부까지 분포하는 이 두 단층대는 1596년 교토 일대에서 큰 피해를 입힌 게이초 후시미 지진과 1995년 한신 아와지 대지진, 그리고 지난 2018년에 발생한 오사카 지진의 진원이다.[17] 참고로 오카야마는 난카이 해곡의 직접적 피해 범위에서 벗어나 있는 데다 단층도 덜 발달해 나라보다도 지진 피해가 역사적으로 훨씬 적고 일본 내에서도 압도적으로 안전한 현으로 유명하다.[18] 다만 여느 목조 문화재들이 그렇듯 지진에 의해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문화재가 적은 것이지 다른 이유로 발생한 화재나 태풍 등으로 인한 피해는 줄곧 있어왔으며 역사적으로 지진 피해가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다. 참고로 교토보다 나라가 대체로 지진이 더 적은 것은 맞지만 난카이 해곡과 더 가깝기 때문에 난카이 대지진의 피해는 일반적으로 나라 쪽이 더 크다.[19] 오히려 한국에서 교토와 비슷한 곳은 서울 종로구가회동, 삼청동, 사직동 등에 가깝다.[20] 2020년 현재 미정이나, 나라야마역으로 예상되고 있다.[21] 오사카 출신의 조형가로 불상 복원에 많이 관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센토군과 비슷한 스타일의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도쿄예술대학 대학원 교수이기도 하다.[22] 야마토 초인 나라이가 같은 특촬물도 있다.[23] 나라현 카츠라기시의 마스코트라고 하며 주조히메(中将姫)라는 비구니가 모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