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길/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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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유년기 ~ 변호사 시절
3. 정계 입문
5. 제20대 국회의원
6. 제21대 국회의원
7. 더불어민주당 대표
8. 사퇴 이후
9. 서울특별시장 선거 출마, 그리고 낙선
10. 서울특별시장 낙선 이후



1. 개요[편집]


송영길의 생애를 다룬 문서.


2. 유년기 ~ 변호사 시절[편집]


1963년 3월 21일, 전라남도 고흥군 대서면 화산리 출생. 이후 1981년 광주대동고등학교(6회)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파일:김영춘-송영길 총학생회장.jpg

연세대 총학생회장 재임 시절[1]

1984년 총학생회장을 역임하며 학생운동을 하던 도중 투옥된다. 호남 출신의 학생운동가였기 때문에 출소 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동교동계로부터[2] 자연스럽게 정치 입문 제의를 받는다. 그러나 DJ 측의 정치 입문 제의를 거절하고 1987년 대선에서 야권 후보 단일화 운동에 나서지만 실패했다.

대학 졸업 직후인 1986년부터 인천직할시 북구에서 거주하게 되는데 이 당시부터 계양구에 살았다고 한다. 당시 인천지역에서 노회찬과 함께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에서 활동하며 택시 노동운동에 가담한다. 노동운동에 뛰어들던 시기에 후배 운동권 세대 내에서 주체사상파들이 활동하자 강하게 저항하기도 한다.

소련 공산주의권이 붕괴되자 노동운동가들은 혼란을 겪게 되는데, 이를 지켜본 송영길은 1991년 소련과 동유럽으로 한 달간 배낭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다녀온 송영길은 노동운동 활동보다 변호사 자격이 노동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제도내 개혁에 뛰어들기로 결심, 1992년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택시노련에서는 송영길의 결심에 대한 찬반표결을 결정할 정도로 그의 당시 영향력은 컸다고 전해진다.

1994년, 송영길은 2년간 사법시험을 준비한 끝에 36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마친 1997년에는 다시 인천으로 내려가 인권변호사로서 지역 운동에 다시 투신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 가입한 것을 비롯, 전국민주택시노련 고문변호사, 인천 계양구 건축분쟁조정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3. 정계 입문[편집]


386 정치인들의 등장 무렵에 첫 주자로 나서게 되었다. 바로 1999년 재보궐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의 공천을 받아 인천 강화-계양 갑 지역에 출마한 것이었다.

당시 옷로비 사건 등으로 여론이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안상수에게 석패했다. 하지만 16대 총선에서는 강화군이 서구와 합구되면서 계양구 지역구에 재도전하여 안상수를 상대로 설욕에 성공하며 국회에 입성했다.[3] 그 뒤 17대와 18대 선거에서 모두 승리했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의 인기가 떨어지고 수행하는 현역의원이 없자 본인이 대선기간 동안 수행실장을 자원했다. 마지막 대선 유세에서 정몽준의 지지철회#라는 돌발사태가 터지자 집으로 돌아가는 노무현에게 정몽준과의 만남을 설득한다. 납득할만한 이유없이[4] 지지철회 의사를 표명한 장면이 TV로 방영되자 노무현 지지층이 결집하면서 대선을 승리할 수 있었다.

참여정부에서 대북송금 특검과 대연정을 반대하는 일반적인 민주당 계열 정치인이었으나 한미 FTA에 찬성하는 등 소신파 정치인의 모습도 보였다.#

미국의 이라크 선제 공격 위기가 일어나자 이라크 침략을 강하게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침공 반대성명에 감동한 이라크 의회가 초대장을 보내자 수락한다.#




열린우리당 창당시기, 대통합민주신당 창당 시기마다 일관성있는 통합주의자 노선을 유지했다. 새천년민주당내 분당 갈등이 일어나자 송영길은 한화갑, 박상천 등 민주당 잔류파들이 대부분 가담한 후단협 노선을 비판했다. 민주당 잔류파를 배제하고 신당을 창당하자고 주장한 정동영, 천정배, 신기남, 유시민과도 다른 의견이었는데, 민주당 주도로 개혁당을 받아들이자는 의견이다. 비슷한 주장을 한 정치인으로는 송영길 외에 우상호, 임종석이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이 레임덕에 들어서자 노무현을 내쫓는데 선봉장의 역할을 맡았다.#

4. 인천광역시장[편집]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인천 지역에 마땅히 내세울 후보가 없던 당시 민주당은 현직 시장인 안상수 후보를 상대하기 위해 3선의 중진이었던 송영길의 출마를 권유했고, 한때 서울시장[5], 광주시장 출마도 고려하던 송영길은 인천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인천시의 부채 문제를 공격하면서 인천시장으로 당선되었다. 전임 안상수 시장의 시정을 비판하며 재정건전화를 공약했었고, 적자규모가 해마다 감소하여 2013년에는 886억 원 흑자를 기록했다. 다만, 이는 순세계잉여금으로 절대적 부채는 아래 부가 설명되는 이유로 인해 계속 증가하였다. #

재정 정상화 대책은 증가하는 부채를 막지 못했다. 아시안게임에 따른 지방채 발행액은 2010년 3850억 원에서 2013년 8500억 원으로 4650억 원 늘었다. 시는 2014년에도 아시안게임을 위해 지방채 2446억 추가발행 하였다. 인천도시공사 부채 또한 대부분 전임 시장이 벌여 놓은 영종하늘도시와 검단신도시, 도화지구 사업 등 부동산 개발 사업의 부메랑 효과에 기인한다. 막대한 보상비가 나간 반면, 부동산 경기 침체에 따라 개발이익 환수가 늦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천도시공사 부채(영업부채 포함)는 2010년 말 5조 6352억 원에서 2013년 말 7조 8188억 원으로 2조 1836억 원 늘었다. 이중 금융부채가 1조 7677억 원, 영업부채는 4159억 원 늘었다. #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주경기장 재검토도 취소하여 부채증가는 더욱 누적되었다.

인천종합터미널 매각 시도로 논란을 빚기도 하였지만, 다행히 대법원 판단에 따라 웃돈을 받고 판매한 성공적인 거래가 되었다.#

젊은 층의 높은 민주당계 정당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호평을 받지 못했다. 다만 삼성바이오로직스 공장 설립을 놓고서 삼성 신사업추진단장이 송영길 시장에게 인천은 가능성이 없으니 포기하시라고 했었으나 여러 지자체들의 각축전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천 송도에 유치하여 삼성 바이오 산업의 터전을 인천에 자리잡게 한 것은 그의 공으로 평가된다.

임기 말인 2014년 연초의 평가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경합을 이루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여론조사 결과 4년 전 자신이 꺾은 안상수 전 인천시장에게도 초박빙 접전으로 조사되었다.

재선을 노리고 출마했던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유정복 후보에게 밀려 석패하고 말았다. 선거 기간 초기에 유정복 후보와 박빙의 지지율을 보이다가 세월호 사고 이후에는 여당 반감 때문에 12% 가량 상당 부분 앞서 나갔다.해당 기사 그러나 막판에 다시 따라잡히면서 역전패를 당하게 된 것. 개표를 해보니 유정복 후보 50.0% vs 송영길 후보가 48.2%로 재선에 실패하고 만다.

일단 본인이 서울시장, 광주시장 선거 출마를 고려할 정도로 인천에 뿌리내리지 못했고 인천 내 호남 이주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시장에 당선되었으나 호남 출신이 많고 서울 통근자 비중이 높은 계양구, 부평구 일부 지역 등을 제외한 지역, 특히 중구, 동구 등 원도심 지역에서 민심이 떠나 인천 출신, 친 대통령 성향을 내세운 유정복 시장에 밀려 낙선했다.


5. 제20대 국회의원[편집]


한동안 휴식기를 보내던 송영길은 한 때 고향인 호남권 출마설도 있었고, 특히 천정배의 저격수로 투입된다는 설도 있었지만, 인천 지역에서 국민의당으로 이탈하는 현역 의원이 나오고 특히 본인의 지역구였던 계양 을의 최원식 의원이 탈당하자 이를 제압하기 위해 원래 지역구에 공천되면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다.

그리고 야권 분열에도 불구하고 현역의원인 국민의당 최원식 후보와 새누리당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 원내에 진출하며, 4선 의원 고지에 올랐다. 참고로 최원식 후보와는 오랜 친구 사이라서 송영길이 출마한다고 할 때 최원식 후보 측에서 배신이라고 비판하였지만[6][7] 민주당계 정당의 텃밭인 계양 을인데다 워낙 강력하게 이 지역에서 입지를 굳힌 터라 송영길의 당선은 가볍게 이뤄지고 말았다.

국회의원 출마 전부터 당선된다면 더불어민주당의 당 대표로 출마한다고 공언했고, 당선 이후에도 당 대표 출마의사를 밝히고 있다. 2016년 7월 24일, 그는 8.27 전당대회 당 대표 출마를 선언했고 추미애 후보와 함께 '2강'으로 분류되었으나 8월 5일 당 대표 예비경선에서 탈락하였다.

그리고 제19대 대선 문재인 캠프에 합류했고 캠프를 총괄하는 선대본부장으로 선거 승리에 기여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주변국으로 파견하는 특사 중 러시아 특사로 거명되었다. 송영길은 인천 시장 시절, 러일전쟁 때 제물포 앞바다에서 침몰한 러시아 함선 바랴그의 깃발을 러시아 측에게 임대 형태로 반환하고 기념 시설을 건립하는 등 러시아와의 접점이 제법 있는 편. 이 관계 개선을 인정받아서 러시아에게 드루쥐비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것도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직접! # 이후에도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아 러시아와 관련된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들[8]을 많이 추진했다.

2018년 7월 24일 북방경제협력위원장을 사임하고 더불어민주당 2018년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했다.

2018년 7월 26일, 과거의 예상치 못한 컷오프의 아픔을 딛고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당대표 예비경선 컷오프를 통과했다.

송영길은 이해찬김진표에 밀려 3위가 될 거라는 온라인 상에서의 추측과는 다르게 모든 부문에서 김진표를 이겼지만 인지도와 강한 민주당을 내세운 이해찬에 밀려 2위로 떨어졌다.

2019년 1월, 문재인 정부탈원전에 동의한다면서도 "신한울 3, 4호기 공사를 재개해야 한다"고 주장해 당내 반발을 샀다. 송영길은 "원전 1기(의 경제적 효과)는 약 50억 달러에 달해 수출 시 중형차 25만대나 스마트폰 500만대를 판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며 "노후 원전과 화력발전소는 (건설을) 중단하되 신한울 3·4호기 공사는 재개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 이에 대해 우원식[9]은 "시대의 변화를 잘못 읽은 적절치 못한 발언",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에너지 전환은 전혀 급진적이지 않다"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조선일보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 또한 "공론화위원회의 논의를 거쳐서 정리됐다"며 추가 논의가 필요한 시점은 아니라는 입장을 드러냈고, 이해찬 대표도 공론화 과정을 거쳐 결정된 사안인 만큼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반면 비문재인계인 최운열은 "좋은 화두를 던졌다. 이번 일을 계기로 공론의 장이 마련되면 좋겠다"고 응원 문자를 보냈다고 한다. 중앙일보1 일단 보수야권 및 일부 여권 비주류에서는 소신 발언으로 평가하는 반면, 여권 주류에서는 발언 내용 자체는 물론이고 여당 의원이 정부 정책&당론에 반하는 이야기를 (내부 논의를 넘어) 외부에서 공개적으로 했다는 것 자체가 문재인 정부와 거리를 두고 자기 정치를 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곱게 보지 않는 듯.

당내에서 자신을 향한 비판이 일자, 송영길은 "산지가 70%인 국토에서 산허리를 깎아 태양광을 설치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재생에너지는 날씨에 따라 태양광·풍력이 변화가 크기 때문에 안정적이지 않다"고 반격에 나섰다. 중앙일보2


6. 제21대 국회의원[편집]


2020년 21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의 공동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으며, 인천광역시 지역 선거를 총괄하는 역할을 맡아 진두 지휘했다.

자신은 2020년 21대 총선에서 득표율 51,821표(58.67%)를 기록했으며, 미래통합당 윤형선 후보를 18,000표 차로 여유있게 따돌리며 당선되었다. 참고로 1981년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된 후 한 지역구에서 5선 이상 성공한 의원은 송영길뿐이다.[10]

제21대 국회 전반기에는 외교통일위원회 상임위원장 자리를 맡게 되었다.

2021년 4월 15일, 더불어민주당 2021년 임시전당대회에 당대표 후보로 출마선언했다. 예상외의 결과로 2위를 했던 2018년 전당대회에 이어 두 번째 당대표 후보 출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번에는 홍영표, 우원식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7. 더불어민주당 대표[편집]


2021년 5월 2일, 전임 이낙연 당대표의 대선 경선 출마를 위한 조기 사퇴로 발생한 더불어민주당 2021년 임시 전당대회에서 홍영표, 우원식 후보를 누르고 제5대 더불어민주당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2016년 더불어민주당 제2차 전당대회, 2018년 더불어민주당 제3차 전당대회에 이은 3수만의 당대표 당선이다.

이 전당대회에서는 민주당 당대표 선거 사상 최고의 박빙 승부가 펼쳐졌는데, 종합 득표율에서 2위를 차지한 홍영표 후보와 득표율 차는 0.59%p이다.[11] 송 당대표는 당선 소감에서 “승리를 향한 변화를 위해 주저없이 전진할 때”라며 “열정과 헌신 지혜를 가진 분을 모두 모아 원팀을 만들겠다”고 했다.# 특히 보궐선거 완패로 다시 화두에 오른 부동산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당정 협의를 통해 정부의 2·4 부동산 대책을 뒷받침하고 실수요자 대책과 세제 문제를 보완하겠다”고 밝혔다.

2021년 5월 3일 국립현충원을 방문해 전직 대통령들의 묘역을 참배했다.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묘역도 참배를 하면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3.1독립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하신 분이라고 평가했고, 대통령님의 애국독립 정신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주국방 공업입국, 국가 발전을 위한 대통령님의 헌신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손원일 제독과 김종오 장군의 묘역을 찾아 참배를 하였다.

2021년 5월 12일, 부동산 보유세와 관련해 "부자들한테 세금 때린다는 게 감정적으로 무슨 정서적 만족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집주인이 전가해서 임차인이 어려워지는 이런 악순환이 되고 있다"며 종합부동산세 인하 가능성을 언급했다. #

2021년 6월 2일, '조국 사태'와 관련한 더불어민주당의 대응을 두고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면서 공정과 정의를 누구보다 크게 외치고 남을 단죄했던 우리가 과연 자기와 자녀들의 문제에 원칙을 지켜왔는지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라며 공식 사과했다. #

2021년 6월 8일, 국민권익위 전수조사에서 부동산 불법거래 등 비위 의혹이 제기된 김주영·김회재·문진석·윤미향(이상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 김한정·서영석·임종성(이상 업무상 비밀 이용 의혹), 양이원영·오영훈·윤재갑·김수흥·우상호(이상 농지법 위반 의혹) 등 12명의 의원들에게 자진탈당 권유를 하는 한편, 특별히 윤미향과 양이원영 의원은 출당조치를 내렸으며 22일 의총을 통해 이를 의결했다.#

남북통신선이 복원되면서 여당 내에서 한미연합훈련 연기론이 확산되자 송영길은 예정대로 진행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한미연합훈련이 북한이 주장하는 침략 훈련이 아니라 한반도 평화를 지키는 방어적 성격의 훈련이라고 설명했다. # 그러면서 훈련 연기를 촉구하는 성명문을 낸 범여권 74인에 대해서는 "김여정이 한마디 했다고 연기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비판했다.#

9월 16일 MBC 백분토론에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토론했다.

2021년 11월 20일, 윤석열 후보가 돌잔치에서 원화가 아닌 엔화를 집었다며 토착왜구가 아니냐는 비판을 가했다. 이후 해당 지폐가 한국의 옛 돈단위인 환임이 밝혀지자 사과했다. #

2021년 11월 21일부터는 1일 1 이재명 공부하기 운동을 벌이며 제21대 국회의원들과 당원들에게 소셜미디어에 이 후보 관련 책을 읽은 뒤 독후감과 이 후보의 일정이나 공약 자료 등을 올리게 촉구하였다. 본인도 "무슨 기적처럼 살아온 한 사내를 우리는 바라보고 있다. 사법고시에 합격해 윤석열 후보처럼 검사로 출세할 수도 있었지만 인권변호사로 광주의 진실을 참회하며 서민의 입장에서 투쟁해왔다. 울산 가는 기차 안에서도 이재명 공부를 계속한다."고 밝히며 이재명 후보를 찬양하였다.

2021년 12월 23일, 이재명 후보의 4개 전과는 공익적 활동을 하며 생긴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2022년 1월 25일, 정치적 쇄신의 의미로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또한 민주당의 귀책사유로 발생한 재보궐선거 구역인 종로구, 청주 상당구, 안성시 선거구에는 2022년 3월 재보궐선거에 공천을 하지 않을 것이며, 우상호를 비롯한 동료 86세대들의 용퇴 및 동일 지역구 3선 초과 금지를 공식화했다. 나아가서 윤미향, 이상직, 그리고 국민의힘 박덕흠에 대한 국회의원 제명 절차를 위해 국민의힘에 협조를 요구했다.[12]

2022년 3월 7일 낮에 이재명 후보 지원을 위해 선거유세 도중 피습을 당했다. 자세한 내용은 송영길 피습 사건 참조.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 봉합 수술을 하였다.

2022년 3월 8일에는 붕대를 맨 상태로 계속 이재명 지원 유세를 이어갔다. 그런데 피습 후유증인지 말이 꼬였는데도 정정 없이 넘어가거나 '경제대통령 이재명'을 '경제대통령 이명박'이라고 언급하는 말실수로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13]# 하필 경제대통령 슬로건의 원조가 이명박이었다 보니 이명박 관련 드립이 흥했다.



<4분 35초부터> 그들은 그렇게 대장동 가짜뉴스를 뿌리고 있지만, 우리 이재명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서민 경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반도 평화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5월달에 바이든 대통령과 맞서, 어떻게 우리 조국의 평화를 지킬 지 연구 않는 이재명에게 기회를 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후략)

(전략)

<6분 44초부터> 모든 국민을 통합시켜서, 이 코로나 위기와, 기후변화의 위기와, 남북군사적 위기를 뚫고 나가는 위기극복의 총사령관 유능한 경제대통령 이명박과 함께 앞으로 제대로 나갑시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재명!


대망의 대선 당일인 2022년 3월 9일 오후 7시 30분, 지상파 3사와 Jtbc의 출구조사가 이재명-윤석열 두 후보의 초박빙 승부를 나타내자 송 대표는 환호하며 눈물을 쏟기도 했다. 심지어는 오마이tv에서의 인터뷰에서 밝히길, 이재명 후보에게 우리가 이겼으니 푹 주무시고 당선 소감 적어서 오시라(...)고 말했다고한다. 출구조사 직후 소감을 이야기할 때도 누가봐도 당선확정인 것 마냥 행복하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국힘측에 훈수를 두었다. 실제로 여론조사 공표가 금지되는 '깜깜이' 기간 중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두 후보간 격차가 6%p까지 벌어졌다는 조사도 있던 상황[14]이었기 때문에 막판 극적인 이 후보의 상승세로 접전까지 좁혀진 데 대해 감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개표 초반 이재명 후보가 5%p 차이로 리드를 유지하면서[15] 이변의 가능성이 점쳐졌다. 그러나 눈물이 무색하게도 개표가 계속 진행되면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조금씩 추격하여 역전에 성공, 개표 99% 시점에 20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결국 송영길 대표는 선거 패배에 대해 책임지고 윤호중 원내대표를 제외한[16] 다른 당지도부와 함께 더불어민주당 대표직에서 사퇴했다.#


8. 사퇴 이후[편집]


사퇴 이후 여러 사찰을 돌며 칩거 중에 있다. 특히 민주당 대선 패배의 원흉으로 꼽히는 부동산 정책과 관련하여 다시 한번 복기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알려졌다.

이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오세훈 시장에 대항하여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나설 후보군이 마땅찮은 상황이 되자, '중량급 인사 차출론' 대상으로 언급되더니 이윽고 당 안팎에서 출마해달라는 요청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이재명 상임고문마저 송영길 전 대표의 출마를 요구하는 SNS 글에 좋아요를 누를 정도.

문제는 서울시장의 경우 오세훈의 승리 가능성이 높게 여겨지는,[17] 민주당 입장에서는 사실상 험지이기 때문에 굉장히 난처해진 상황이다. 송영길은 현역 국회의원이기 때문에 출마 시 의원직을 사퇴해야 하는 리스크를 동반해야 하기 때문. 게다가 선거 패인으로 지목된 당내 고위급 인사가 별다른 잠적 없이 곧바로 중요한 선거에 투입된 것은 더불어민주당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기에 이에 대해 반감을 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18]

또한 그간 인천광역시에서 5선 국회의원에 광역시장을 지낸 누가봐도 인천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정치인임에도 뜬금없이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나오는 것은 명분이 부족하다는 시각이 당내외에 존재하는 것도 악재다. 하지만 국민의힘 경기도지사 후보인 유승민도 대경권이 정치적 고향이기 때문에 체급을 높이기 위해서 출마한 거라면 이상할 것은 없다.[19]

유승민 전 의원이 2030초 남성층 및 범 청년층에 지지 기반이 있다는 점과, 송영길 의원은 송 의원의 동년배에 해당하는 50플러스 세대 남성층에 지지 기반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점도 각자의 장점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두 정치인 모두 수도권에서도 각 진영의 험지에 출마를 한 터라 이들의 추후 성과와 향방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셈이다.[20]

무엇보다도 서울특별시장은 가장 강력한 독이 든 성배와도 같기 때문에, 낙선할 시 정치 생명이 거의 끊기거나 아예 정계 은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21]

3월 29일 송영길이 머무는 경북 영천 은해사에 김남국 의원과 정성호 의원이 찾아가 선당후사의 마음으로 헌신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두 의원이 이재명계 중 최측근에 속하는지라 이러한 행보에 이재명 상임고문의 의중이 반영된 게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22] #

9. 서울특별시장 선거 출마, 그리고 낙선[편집]




유능한시장 믿는다 송영길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서울특별시장 후보 TV광고



파일:믿는다송영길광고.jpg

유능한 시장
믿는다 송영길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슬로건


4월 1일, 페이스북을 통해 공식적으로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서울특별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규정상 지방선거에 출마하려면 선거 2개월 전까지 해당 지역으로 주소를 옮겨야 하기 때문에 인천을 떠나 송파구 거여동으로 주소를 이전했다고 한다. 이 글에서 송 전 대표는 "우리 당에는 훌륭한 분들이 많이 계신다. 저도 그분들과 함께 당의 결정에 충실히 따를 것"이라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대나 전략공천은 제 머릿 속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를 두고 김민석, 우상호, 박주민 의원 등 당 내 인사들이 대놓고 반발하면서 민주당의 대선 패배 이후 내홍은 여전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도 그럴 것이 송영길은 단순히 자신만 차기 총선에 불출마하겠다고 말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서 586 운동권 세대 전체가 세대 교체와 정치 혁신을 위해 함께 그러한 행동을 해야 된다고 말했던 만큼, 논란이 불거질 수 밖에 없다.

4월 7일, 박주민 의원 등과 함께 후보 등록을 마치면서 당내 비판에도 불구 출마를 강행하기로 했다. 송 전 대표는 10일에 간담회를 열고 논란을 정면돌파하기로 했다.#


4월 17일에는 홍익대학교 앞에서 공식 출마 선언 자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이 가장 앞에서 싸워서 13척만으로도 승리를 이끈 것처럼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는 오세훈 시장과의 싸움이 아니라 윤석열 정부와 가장 최전선에서 싸우며 승리를 이끌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4월 19일, 당 전략공관위로부터 박주민 의원과 함께 컷오프되었다. 송 전 대표 측에서는 전략공관위 측에서 “컷오프를 시키는 이유는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있는 전임 당 지도부가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이어 "6·1 지방선거를 사실상 포기하고, 민주당을 파괴하는 자해 행위가 될 것"이라며 "이번 서울시장 공천에 대해 비대위가 현명한 결정을 하기 바란다"고 강력 반발했다.#

민주당 비대위는 격론 끝에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다가 4월 21일, 송 전 대표와 박 의원에 대한 컷오프를 취소하고 결선투표제를 도입한 100% 국민 경선을 치르기로 했다.#

4월 22일, 비대위에서 송 전 대표, 박주민 의원, 김진애 전 의원 3명을 우선 경선대상자로 지정한 후 박영선 전 장관의 출마 의사를 확인하고 있다. 박 전 장관까지 출마할 경우 4인 경선, 출마하지 않을 경우 3인 경선이 진행될 예정이다.#

4월 23일, 박영선 전 장관이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3인 경선이 확정되었다. 현재 예정된 일정대로라면 오는 26 ~ 30일 사이 1차 투표를 진행하고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결선 투표를 거쳐 후보가 선정된다.#

4월 27일, 전날 경선 후보에서 사퇴한 박주민 의원을 제외하고 김진애 후보와 양자 토론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상대 김 후보의 강점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도시전문가"라는 점을 꼽으면서도 "구체적인 행정 경험이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오세훈 서울시장을 비판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4월 29일 발표된 경선 결과, 김진애 전 의원을 누르고 민주당의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서울특별시장 후보가 되었다. 이번 선거에서 국민의힘 홍준표 대구광역시장 후보와 함께 1995년 지방선거 재도입 이후[23]에 서로 다른 2개의 광역자치단체에서 단체장을 지낸[24] 정치인에 도전한다.#

5월 20일,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와 양자 토론회를 가졌다.[25] 이 자리에선 역시나 부동산 문제를 가지고 후보간 공격이 오고갔는데 송영길 후보는 오 후보가 1년전 보궐선거 당시 1주일 안에 집값을 잡겠다고 공약해놓고 집값 상승을 방치했다고 비판했고, 오세훈 후보는 송 후보의 '누구나 집' 공약이 서울의 지가를 생각했을때 현실성이 없고 역차별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에게 19.82%p 격차로 낙선하였다. 39.23%의 득표율로 마감했는데 이는 제20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재명 대선후보가 서울에서 얻은 득표율보다 무려 6.5%p나 떨어진 결과였다. LH 사태 직후 민심을 완전히 잃은 상태로 치른 2021년 재보궐선거 당시 박영선 후보가 얻은 득표율(39.18%)이랑 거의 같다.[26] 패배를 예감하면서도 막판의 지지층 결집을 통해 여론조사보다 줄어든 격차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으나, 여론조사와 별반 다름 없는 차이로 대패했다.[27] 인터뷰를 통해 서울에 대한 비전을 알리는 데 최선을 다했으나 모든 시민의 마음을 얻기에 부족하다며 아쉬움을 드러내며, 선거 결과에 승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로써 단순한 문제가 아닌 정치생명에 엄청난 타격이 가게 되었다. 아무리 서울이 최근 부동산 민심으로 인해 PK못지 않는 보수화가 되었다고 하나 아직은 경합열세에 가깝고,[28] 재보궐과 비슷한 악조건도 없었고,[29] 5선 국회의원에 광역자치단체장에 여당대표[30]까지 지냈던 중진급 인사가 40%에도 못 미치는 득표율[31]을 거뒀다는 것은 강성 지지층을 제외하면 정치인으로서의 확장성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밖에는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32]

나는 택시와 은마아파트를 용적률 500%의 반구 아파트로 재개발한다는 발언, 김포공항 이전 공약 논란 등 무리수에 가까운 공약이 유권자들에게 어필이 되지 못한 것[33][34],그리고 지역맞춤 공약이 아닌 민영화 반대 등 정권 견제 이슈만 언급한 것이 참패의 요인으로 꼽힌다.[35] 실제로 오세훈인 경우는 시정 평가도 괜찮았을 뿐더러 지역의 숙원 사업 위주로 공약을 내걸었음을 감안하면 왜 참패했는지 알 수 있다.[36] 차라리 오세훈처럼 지역맞춤 공약으로 승부를 봤다면 패했을 지라도 이정도로 굴욕을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37]

10. 서울특별시장 낙선 이후[편집]


정계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더불어민주당 전당 대회에 출마하여 다시 당권을 잡거나, 2024년에 있을 22대 총선 불출마 선언을 번복하고 출마할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명분이 희박하여 현재로서는 휴식기를 가질 가능성이 높다.[38]

본인이 20대 대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도부 자리를 노리는 것도 모순되며, 다시 한번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는 것도 본인이 주장했던 정치개혁 의제와 선언들을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2022년 전당대회에는 따로 출마하지 않았다.

한편 7월 21일, 본인의 SNS에 “여의도를 벗어나 광야에 선 저에게 많은 분이 ‘모든 것을 내려놓은 이제부터가 송영길 정치 시즌2’라고 말씀해주신다”며 “그 말씀들을 깊이 새긴다. 백팩 하나 둘러매고 길을 걸으며 ‘시즌2’를 열어가고 있다”고 밝히면서 정치활동 재개 가능성을 열었다.#

2022년 11월 21일,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는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송 전 대표의 허위사실유포 혐의에 대하여 검찰에 불구속 송치했다. 다만 검찰이 다음날 해당 사건에 대해 경찰에 보완수사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11월 30일,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2부에서 해당 혐의에 대하여 무혐의 처분을 하면서 사건이 종결되었다. 검찰 관계자는 “송 전 대표가 직접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8개월과 1년 사이 큰 차이가 없어 법리상으로 허위사실 공표로 보기 어렵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12월 1일, 그랑제콜 방문연구교수 직을 수행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2023년 설 명절에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초청으로 엘리제궁을 방문했다. 대통령 부인인 브리짓 마크롱 여사가 김정숙 여사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2023년 4월 22일, 현지 파리 시간대로 오후 4시경에 돈봉투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본인이 이에 대한 책임으로 더불어민주당 탈당과 상임고문직을 사퇴했다. 현지시간 파리로 23일 오후 8시경, 비행기를 탑승하고 한국에는 24일 오후 3시에 귀국할 예정이다.#

5월 2일 오전, 민주당 전당대회 '돈 봉투 의혹'과 관련해 검찰에 자진 출석했다.#

6월 28일, 청주에서 최순실 게이트를 입증한 태블릿 PC 증거가 무효라는 주장을 펼쳐오던 변희재와 같이 윤석열 퇴진 시위에 참가했다.

원래는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불출마를 선언했었으나 탈당 후 현재는 비례 신당을 창당하여 출마할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어 불출마를 번복하고 비례 신당의 비례대표로 6선에 도전할 의향을 보이고 있다.

[1] 검정색 양복을 입은 오른쪽 청년이 송영길이고 검정색 두루마기를 입은 왼쪽 청년은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을 맡았던 김영춘.[2] 설훈의 권유가 있었다고 알려진다. 단, 설훈은 동교동계가 아니라 민평련 김근태의 계파로 보는 시각도 큰 정치인이다.[3] DJ(김대중)의 최측근이었던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은 송영길 前대표와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특히 눈여겨봤다고 한다. DJ에게 송 전 대표를 추천하며 “늘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어려운 사람이 있는 현장으로 달려간다”고 인물평을 했다고.[4] 훗날 김민석(당시 정몽준 선거본부 핵심간부 중 한명)이 밝힌 썰에 의하면 정몽준의 감정이 폭발한 것이라고 하는데, 마지막 유세날 마지막 유세장에서는 정몽준과 노무현 단 둘만 무대에서 유세를 하기로 약속했다가 당일날 노무현이 이를 무시하고 정몽준이 아닌 다른 정치인들을 다 무대에 오르게 하자 분노한 정몽준이 유세 직후 김흥국을 포함한 측근들과 논의 후(냉면집에서 식사를 하며 대화했다고 한다.) 지지철회를 한 것이라고 한다. 물론 그 한가지 이유만은 아니겠고 그전에 단일화 후 유세과정에서도 (양보한 정몽준을 같이 최대한 돋보이도록 해주기로 한) 약속과 애매하게 다르게 진행한 노무현측의 유세가 꾸준히 있었던 걸로 정몽준의 속상한 감정이 쌓였다고 이야기가 좀 있긴 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통령선거라는게 워낙 바쁜만큼 마지막 날만큼만 약속을 지켜주면 다 잊겠다는 입장이었는데, 그날마저 무시하자 분노가 폭발한 것이라고 한다. 이때 정치계에서 단일화를 할때 저러면 안된다고 본보기로 소문이 났었고, 20년이나 지난 먼훗날 윤석열안철수가 대통령후보 단일화를 했을때, 이후 윤석열측에서 유세장 내 안철수를 확실하게 같이 돋보이게 해주는 모습을 여러번 보인 것이 이때 노무현-정몽준 사건의 여파를 의식하여 윤석열캠프측에서 논의하여 결정한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5]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다.[6] 하지만 최원식도 할 말이 별로 없다. 송영길은 끝까지 탈당을 만류했고 최원식이 남는다면 본인이 남구 을로 출마해 윤상현과 붙을 용의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당을 위해 험지에 출마해 희생할 것도 각오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 송영길의 남구 을 출마에 관한 안귀옥 국민의당 후보의 입장 한편 안상수 전 인천시장의 출마가 예상되던 서구 을에 출마한다는 말도 있었다. # [7] 사실 배신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다. 송영길 친구로 기반이 잘닦인 지역구를 물려받아 당선된 입장인데 탈당을 했으니, 민주당 입장에선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게다가 본인이 지역구 관리를 잘했으면 아무리 인천시장을 지낸 거물이라도 붙어 볼만 했을텐데, 압도적으로 질꺼라는 예상이 많았다.[8] 시베리아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추진 프로젝트, 유라시아 철도 사업 추진 프로젝트, 개성공단과 나진 하산 프로젝트[9] 더불어민주당 내 기후변화 대응 및 에너지 전환산업 육성 특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10] 인천지역 정치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인천에서 5선 이상 당선된 의원은 6선의 김은하 전 국회부의장과 5선의 황우여 전 새누리당 대표 밖에 없다. 그마저도 황우여 전 대표는 전국구 의원으로 의정 생활을 시작했고 인천 지역구에서 당선된 것은 16~19대까지 4번이다.[11] 만약 친문으로 분류되는 홍영표와 범친문으로 분류되는 우원식이 단일화를 했다면 송영길은 또 떨어졌을 것이다.[12] 의원 제명은 200석이 필요하므로 양당 합의 없이는 불가능한 상황이다.[13] 생명에야 지장이 없다지만 망치로 머리를 직격당했고, 이 경우 뇌진탕이 올 수도 있다. 실제로 송영길이 보인 발언의 혼동은 뇌진탕 환자들에게 종종 나타나는 증세이기도 하다.[14] 3사 개표 방송 도중 한국갤럽의 여론조사가 공개되었다.[15] 다만 이는 개표 초기에는 사전투표함이 주로 먼저 열리고, 특히 호남 지역의 개표 속도가 전국 평균보다 더 앞서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16] 비대위 구성을 위해 잔류했다.[17] 당장 20대 대선에서 서울 지지율은 윤석열이 5%p 가량 앞섰으며, 오세훈은 중도층 이미지와 행정 능력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에 오세훈의 무난한 4선이 예상되고 있다. 게다가 여당이든 야당이든 현직 지자체장이 갖는 프리미엄은 생각 이상으로 크다.[18] 한때 민주당 내 서울시장 후보군이었던 우상호 의원 역시 대선 패배 후 본인도 불출마를 선언하며 선거 패배 이후 바로 나서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차출설을 부정했다.[19] 이와 유사한 사례는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가 있다. 비록 영천시 출생에 대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TK 출신이지만 부천 3선 의원에, 재선 경기도지사로 사실상 경기도를 정치적 기반으로 두고 있는 사람인데 20대 총선에서 뜬금없이 대구 수성구 갑에 출마했다가 무려 24.6%p 차이로 김부겸에게 완패당했다. 이후 7회 지선에서는 다시 자리를 옮겨 서울시장에 도전한 적이 있지만 여기서도 22%의 득표율로 박원순에게 완패당하며 정치 생명이 거의 끊겼다. 다만 이건 연고의 문제보다도 본인이 경기도지사 시절 소방서에 관등성명 대라고 갑질을 했던 사건, 그리고 2017년 이후 태극기 집회에 참석하는 등 극우 친박 행세를 해서 이미지가 급격히 나빠진 것도 컸다.[20] 어떻게 보면 유 전 의원이 서울시장에 출마하거나, 송 의원이 경기도에 출마할 경우 각 지지기반의 시너지 효과를 더욱 얻을 수 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21] 김민석(3회 지선)은 낙선 이후 무려 18년을 야인으로 보냈고, 한명숙(5회 지선)은 이후 민주당 대표도 맡았으나 당대표 시절 총선에서 패하며 입지가 더욱 좁아졌고 결정적으로 불법 정치자금 수수로 실형을 선고받으며 정치 생명이 끝났다. 나경원(11년 재보궐)은 그나마 2014년 재보궐선거를 통해 3년만에 국회 재입성에 성공했지만 이마저도 야권 단일화 실패로 표가 분산되는 바람에 어부지리로 당선된 것이며, 2020년 21대 총선 낙선, 2021년 재보궐선거 서울시장 경선 탈락, 국민의힘 제1차 전당대회 낙선 등 수난들을 겪으며 정치적 입지가 많이 좁아진 상황이다. 정몽준(6회 지선) 역시 낙선 후 정계 은퇴로 내몰렸고, 김문수(7회 지선)도 서울시장 낙선 후 더 이상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전광훈 세력과 어울리다가 극우 유튜버로 전락하는 등 사실상 정치 생명이 끊겼다. 박영선(21년 재보궐) 역시 중기부장관을 사퇴하고 선거에 뛰어들었으나 완패하는 바람에 애꿎은 장관직만 날리고 정치적 입지가 상당히 좁아졌다. 그나마 김민석은 서울시장 낙선 당시 불과 30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18년 후에 재기할 수 있었지만, 송영길은 환갑을 눈앞에 두고 있다.[22] 가장 유력한 찌라시로는, 현재 이재명의 대장동/성남 FC 등 다양한 혐의에 따라 수사가 들어갔는데, 이에 대응하기 위한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을 얻기 위해서로 추측된다. 게다가 송영길의 지역구인 인천 계양구 을은 전통적으로 민주당이 강세를 보여온 지역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재보궐에 나서면 당선될 가능성도 높다.[23] 경기지사 출신의 김문수이인제가 2018년 7회 지선에 각각 서울시장과 충남지사 후보로 출마하여 낙선한 적이 있기에, 최초는 아니다.[24] 대구시장 후보로 나선 홍준표는 경남지사를 지낸 적이 있다. 결국 송영길의 낙선으로 이 타이틀은 홍준표만이 가져가게 되었다.[25] 5월 13일 KBS 토론회에서는 오세훈 후보가 토론에 불참하면서 정의당 권수정 후보와만 토론을 진행했다.#[26] 그나마 박영선은 모든 자치구에서 밀렸어도 행정동 중 5곳(창신2동, 구로3동, 항동, 화곡8동, 성산1동)에서는 앞섰지만, 송영길은 아예 모든 행정동에서 밀렸다.[27] 여론조사가 매우 많다 보니 최소 10%p, 최대 30%p 차까지 날 만큼 다양한 조사들이 난무했는데 최종 19%p 차이는 여론조사 평균치 정도의 차이가 난 것이다.[28] 애초에 지방선거 직전에 치뤄진 대선만 보더라도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후보의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29] 2021년 재보궐선거박원순 성폭력 사건 + LH 사태 +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방역 실패란 대형 악재가 있었다.[30] 농담이 아니라 이 정도 스펙이면 대선 후보도 충분히 가능한 수준이다. 당장 홍준표가 5선 의원(송파구 갑 1선, 동대문구 을 3선, 수성구 을 1선)에 광역자치단체장(경상남도지사 2선)에 여당대표를 지냈던 인물이다. 즉 홍준표에 견줘도 전혀 뒤지지 않을 스펙인 것이다. 비록 입각 경험은 없지만 지금까지 오세훈 시장과 겨뤘던 강금실(0선, 법무부장관), 한명숙(출마 당시 재선, 국무총리), 박영선(4선, 중기부장관)보다도 선수(選數)가 높아 스펙상으로는 역대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들(조순, 고건, 김민석, 강금실, 박주선, 한명숙, 박원순, 박영선) 중 가장 압도적으로 강력한 후보였다. 그런 송영길이 영남 수준의 보수 텃밭도 아닌 서울에서 오세훈에게 전 행정동 올킬을 당했다는 것은 변명할 수 없다.[31] 8회 지선 광역단체장에 출마한 민주당 후보들 중 非영남 지역 최저 득표율이고, 심지어 논란 많던 송철호 울산시장 후보보다도 득표율이 낮다.[32] 송영길보다 낮은 득표율을 받으며 전 행정동에서 패한 변성완, 서재헌인 경우는 적어도 참작할 요소가 있었다. 둘 다 보수 우위 지역인 영남권인데다 변성완은 오거돈 성추행 사건과 상대 후보인 박형준과 체급 차이가 컸고, 서재헌은 민주당에게 험지를 넘어 사지(死地)인 대구에서 상대 후보가 홍준표로 체급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변성완보다 더 낮은 지지율로 낙선한 임미애 경북지사 후보와 양문석 경남지사 후보조차도 영남권에 출마 + 엄청난 체급 격차 + 적어도 한 행정동에선 이겼다는 점이 있었다. 그나마 임미애는 17명의 광역단체장 후보 중 가장 늦게 전략공천되었고, 양문석은 전임자 김경수드루킹 사건이라는 악재가 있었다. 하다못해 엇비슷한 득표율로 낙선한 송철호 울산시장 후보조차도 영남권에서 김두겸을 상대로 유일하게 40%를 받았다는 참작할 사유라도 있었고, 여담으로 서울보다 보수세가 강한 충청남도에서 양승조가 얻은 46.12%, 강원도에서 이광재가 얻은 45.92%, 충청북도에서 노영민이 얻은 41.80%보다도 낮은 수치이다.[33] 또한 선거 당선도 낙관하기 힘든 시점에 바로 한강 프로젝트 발표 당시 재선 임기까지 추진할 정책이라고 소개하는 모습을 보여줬다(...)[34] 친민주당 성향인 비디오머그조차 상상더하기 곡을 bgm으로 깔면서 깠을 정도. 당시 토론 하이라이트 영상[35] 심지어 지역 공약 역시 대부분 20대 대선 당시 이재명 후보의 지역 공약으로 사용하였다.[36] 해당 선거의 리버스 버전이 바로 성동구청장 선거인데, 정원오 후보는 구정 평가도 꽤 좋았고 지역맞춤 공약을 내건 반면, 상대편인 강맹훈 후보는 구글과 협의없이 구글 R&D을 이전하는 공약을 내거는 등 지역과 동떨어진 공약을 했다. 이로 인해 성동구윤석열 후보가 이긴 서울 지역구 중 유일하게 민주당 소속 후보가 기초단체장으로 당선되었고, 정원오 후보는 차기 서울특별시장 민주당 후보로 부상했다. 무엇보다 정원오가 구청장 3선에 성공한 성동구오세훈의 고향이었고, 서울 강북지역에서 용산구 다음으로 보수세가 만만치 않은 곳이다. 지방으로 비유하자면 민주당 후보가 박정희의 고향 구미시에서 보수정당 후보와 1:1로 붙어 3선에 성공한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37] 다르게 말하자면 서울이 그나마 경합열세여서 39.18%로 끝난 거지, 하다못해 충청도나 강원도에서 저런 행보를 보였다면 잘해봐야 30%대 중반, 최악이면 30%대 초반 스코어로 끝날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38] 총선에 출마한다면 서울시장 출마 경력을 되살려 종로구에 출마하거나 현재 주소지 지역구인 송파구 병에 도전장을 낼 가능성이 있다. 특히 송파구 병 지역구가 그나마 강남3구에서 더불어민주당이 힘을 쓸 수 있는 곳인데다 현역 의원인 남인순이 최근 반이재명 행보를 보이고 있다 보니 차기 총선에서 공천 배제될 가능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본인의 원래 정치적 기반인 인천으로 다시 선회할 가능성도 있는데 인천 출마가 가시화되면 원래 지역구이자 당대표의 지역구인 계양구 을 대신 윤상현의 지역구인 동구·미추홀구 을이 유력하다. 다만 본인이 애초에 인천을 떠나 서울로 옮겨온 상황이라 인천으로 또 돌아간다면 반복된 말 바꾸기 논란에 휘말릴 수 있다. 더구나 상대 후보인 윤상현이 개인적 논란과는 별개로 막강한 지역구 관리 능력을 앞세워 미추홀구에서 연전 연승을 거둬온 만큼 텃밭인 계양에서만 당선된 송영길의 커리어를 고려한다면 한계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인천에서 출마한다고 하더라도 실제 당선은 꽤나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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