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주

덤프버전 :


조선>
행정구역



[ 경국대전(1485년) ]
경관직京官職
한성부漢城府
개성부開城府
외관직外官職

경기
京畿
충청도
忠淸道
경상도
慶尙道
전라도
全羅道
황해도
黃海道
강원도
江原道
영안도[1\]
永安道
평안도
平安道

도 이하 행정구역



경주慶州
전주全州


영흥永興[2\]
평양平壤
대도호부


안동安東


강릉江陵
안변安邊
영변寧邊

광주廣洲
여주驪洲
파주坡洲
양주楊洲
충주忠州
청주淸州
공주公州
홍주洪州
상주尙州
진주晉州
성주星州
나주羅州
제주濟州
광주光州
황주黃州
해주海州
원주原州

안주安州
정주定州
의주義州
도호부
수원水原
강화江華
부평富平
남양南陽
이천利川
인천仁川
장단長湍

창원昌原
김해金海
영해寧海
밀양密陽
선산善山
청송靑松
대구大丘
남원南原
장흥長興
순천順天
담양潭陽
연안延安
평산平山
서흥瑞興
풍천豐川
회양淮陽
양양襄陽
춘천春川
철원鐵原
삼척三陟
경성鏡城
경원慶源
회령會寧
종성鍾城
온성穩城
경흥慶興
부령富寧
북청北靑
덕원德源
정평定平
갑산甲山
강계江界
창성昌城
성천成川
삭주朔州
숙천肅川
구성龜城

양근楊根
풍덕豊德
안산安山
삭녕朔寧
안성安城
마전麻田
고양高陽
임천林川
단양丹陽
청풍淸風
태안泰安
한산韓山
서천舒川
면천沔川
천안天安
서산瑞山
괴산槐山
옥천沃川
온양溫陽
합천陜川
함양咸陽
초계草溪
청도淸道
영천永川
예천醴泉
영천榮川
흥해興海
울산蔚山
양산梁山
함안咸安
금산金山
풍기豐基
곤양昆陽
보성寶城
익산益山
고부古阜
영암靈巖
영광靈光
진도珍島
낙안樂安
순창淳昌
금산錦山
진산珍山
김제金堤
여산礪山
곡산谷山
봉산鳳山
안악安岳
재령載寧
수안遂安
배천白川
신천信川
평해平海
통천通川
정선旌善
고성高城
간성杆城
영월寧越
평창平昌
삼수三水
문천文川
고원高原
단천端川
함흥咸興[3\]
중화中和
상원祥原
덕천德川
개천价川
자산慈山
가산嘉山
선천宣川
곽산郭山
철산鐵山
용천龍川
순천順川
희천熙川
이산理山
벽동碧潼
운산雲山
박천博川
위원渭原
영원寧遠

현령(縣令, 종5품) 파견
용인龍仁
진위振威
영평永平
양천陽川
김포金浦
문의文義
영덕盈德
경산慶山
동래東萊
고성固城
거제巨濟
의성義城
남해南海
창평昌平
용담龍潭
임피臨陂
만경萬頃
금구金溝
능성綾城
신계新溪
옹진瓮津
문화文化
우봉牛峯
금성金城
울진蔚珍
흡곡歙谷

용강龍岡
삼화三和
함종咸從
영유永柔
증산甑山
삼등三登
순안順安
강서江西

현감(縣監, 종6품) 파견
지평砥平
포천抱川
적성積城
과천果川
금천衿川
교동喬桐
통진通津
교하交河
연천漣川
음죽陰竹
양성陽城
양지陽智
가평加平
죽산竹山
홍산鴻山
제천堤川
덕산德山
평택平澤
직산稷山
회인懷仁
정산定山
청양靑陽
연풍延豐
음성陰城
청안淸安
은진恩津
회덕懷德
진잠鎭岑
연산連山
이산尼山
대흥大興
부여扶餘
석성石城
비인庇仁
남포藍浦
진천鎭川
결성結城
보령保寧
해미海美
당진唐津
신창新昌
예산禮山
목천木川
전의全義
연기燕岐
영춘永春
보은報恩
영동永同
황간黃澗
청산靑山
아산牙山
개령開寧
거창居昌
삼가三嘉
의령宜寧
하양河陽
용궁龍宮
봉화奉化
청하淸河
언양彦陽
칠원漆原
진해鎭海
하동河東
인동仁同
진보眞寶
문경聞慶
함창咸昌
지례知禮
안음安陰
고령高靈
현풍玄風
산음山陰
단성丹城
군위軍威
비안比安
의흥義興
신녕新寧
예안禮安
연일延日
장기長鬐
영산靈山
창녕昌寧
사천泗川
기장機張
웅천熊川
광양光陽
용안龍安
함열咸悅
부안扶安
함평咸平
강진康津
옥과玉果
고산高山
태인泰仁
옥구沃溝
남평南平
흥덕興德
정읍井邑
고창高敞
무장茂長
무안務安
구례求禮
곡성谷城
장성長城
진원珍原
운봉雲峯
임실任實
장수長水
진안鎭安
무주茂朱
동복同福
화순和順
흥양興陽
해남海南
대정大靜
정의旌義
장련長連
송화松禾
장연長淵
강령康翎
은률殷栗
강음江陰
토산兔山
이천伊川
평강平康
김화金化
낭천狼川
홍천洪川
양구楊口
인제麟蹄
횡성橫城
안협安峽
홍원洪原
이성利城
길성吉城
명천明川
양덕陽德
맹산孟山
태천泰川
강동江東
은산殷山

대마對馬[4\]
[1\] 1470년(성종 1) 함경도에서 개칭, 1498년(연산군 4) 함경도로 개칭.
[2\] 1470년(성종 1) 대도호부에서 승격, 1498년(연산군 4) 대도호부로 강등.
[3\] 1470년(성종 1) 부에서 강등, 1498년(연산군 4) 부로 승격.
[4\] 1592년 기점으로 속주로서의 지위 상실.



[ 23부제(1895년) ]

한성부(漢城府)
한성, 고양, 파주, 교하, 적성, 양주, 포천, 영평, 연천, 광주(廣州), 가평
인천부(仁川府)
인천, 부평, 강화, 교동, 김포, 통진, 양천, 시흥, 과천, 안산, 수원, 남양
충주부(忠州府)
충주, 제천, 청풍, 단양, 영춘, 음성, 진천, 괴산, 연풍, 청안, 여주, 이천(利川), 음죽, 용인, 양지, 죽산, 원주, 평창, 정선, 영월
홍주부(洪州府)
홍주, 결성, 예산, 덕산, 대흥, 서산, 해미, 태안, 청양, 정산, 아산, 온양, 신창, 당진, 면천, 보령, 남포, 서천, 비인, 한산, 임천, 홍산
공주부(公州府)
공주, 천안, 목천, 직산, 진위, 평택, 안성, 양성, 회덕, 진잠, 연기, 전의, 은진, 연산, 노성, 부여, 석성, 청주, 문의, 보은, 회인, 옥천, 청산, 영동, 황간, 금산(錦山), 진산
전주부(全州府)
전주, 고산, 익산, 함열, 여산, 용안, 옥구, 임피, 김제, 금구, 만경, 정읍, 고부, 태인, 부안, 고창, 흥덕, 무장, 장성, 영광, 지도
남원부(南原府)
남원, 운봉, 장수, 무주, 진안, 용담, 임실, 순창, 담양, 창평, 곡성, 옥과, 구례, 순천(順天), 광양, 돌산
나주부(羅州府)
나주, 남평, 광주(光州), 능주, 화순, 동복, 낙안, 흥양, 보성, 장흥, 강진, 해남, 영암, 함평, 무안, 진도, 완도
제주부(濟州府)
제주, 정의, 대정
진주부(晉州府)
진주, 산청, 단성, 함양, 안의, 하동, 거창, 사천, 곤양, 남해, 합천, 초계, 삼가, 고성(固城), 의령, 함안, 칠원, 창원, 진해, 웅천, 김해
동래부(東萊府)
동래, 기장, 양산, 거제, 울산, 언양, 경주, 연일, 장기, 흥해
대구부(大邱府)
대구, 현풍, 경산, 하양, 자인, 인동, 칠곡, 선산, 금산(金山), 지례, 개령, 성주, 고령, 청도, 영천(永川), 신녕, 의성, 비안, 군위, 의흥, 밀양, 창녕, 영산
안동부(安東府)
안동, 예안, 청송, 진보, 영양, 청하, 영천(榮川), 순흥, 풍기, 상주, 함창, 문경, 예천, 용궁, 영덕, 영해, 봉화
강릉부(江陵府)
강릉, 울진, 평해, 삼척, 양양, 고성(高城), 간성, 통천, 흡곡
춘천부(春川府)
춘천, 홍천, 낭천, 횡성, 양구, 인제, 철원, 김화, 금성, 평강, 회양, 양근, 지평
개성부(開城府)
개성, 풍덕, 장단, 삭녕, 마전, 이천(伊川), 안협, 금천, 토산, 평산, 수안, 신계, 곡산
해주부(海州府)
해주, 연안, 배천, 옹진, 강령, 장연, 송화, 풍천, 안악, 은률, 장련, 재령, 신천, 문화, 서흥, 봉산
평양부(平壤府)
평양, 삼화, 용강, 강서, 증산, 함종, 중화, 상원, 황주, 강동, 삼등, 성천, 양덕, 안주, 영유, 숙천, 순안, 순천(順川), 은산, 자산, 맹산, 영원, 개천, 덕천, 영변, 운산, 희천
의주부(義州府)
의주, 용천, 선천, 철산, 정주, 곽산, 박천, 가산, 태천, 구성, 삭주, 창성, 벽동
강계부(江界府)
강계, 후창, 자성, 초산, 위원, 장진
함흥부(咸興府)
함흥, 덕원, 정평, 영흥, 고원, 문천, 안변, 단천, 이원, 북청, 홍원
경성부(鏡城府)
경성, 부령, 길주, 명천, 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
갑산부(甲山府)
갑산, 삼수


[ 13도제(1896년) ]


경기도
광주(廣州), 개성, 강화, 인천, 수원, 여주, 양주, 장단, 통진, 파주, 이천(利川), 부평, 남양, 풍덕, 포천, 죽산, 양근, 안산, 삭녕, 안성, 고양, 김포, 영평, 마전, 교하, 가평, 용인, 음죽, 진위, 양천, 시흥, 지평, 적성, 과천, 연천, 양지, 양성, 교동
충청북도
충주, 청주, 옥천, 진천, 청풍, 괴산, 보은, 단양, 제천, 회인, 청안, 영춘, 영동, 황간, 청산, 연풍, 음성
충청남도
공주, 홍주, 한산, 서천, 면천, 서산, 덕산, 임천, 홍산, 은진, 태안, 온양, 대흥, 평택, 정산, 청양, 회덕, 진잠, 연산, 노성, 부여, 석성, 비인, 남포, 결성, 보령, 해미, 당진, 신창, 예산, 전의, 연기, 아산, 직산, 천안, 문의, 목천
전라북도
전주, 남원, 고부, 김제, 태인, 여산, 금산(錦山), 익산, 임피, 금구, 함열, 부안, 무주, 순창, 임실, 진안, 진산, 만경, 용안, 고산, 옥구, 정읍, 용담, 운봉, 장수, 구례
전라남도
광주(光州), 나주, 영암, 영광, 순천(順天), 제주, 보성, 흥양, 장흥, 함평, 강진, 해남, 무장, 담양, 능주, 낙안, 무안, 남평, 진도, 흥덕, 장성, 창평, 광양, 동복, 화순, 고창, 옥과, 곡성, 완도, 지도, 돌산, 대정, 정의
경상북도
상주, 경주, 대구, 성주, 의성, 영천(永川), 안동, 예천, 금산(金山), 선산, 청도, 청송, 인동, 영해, 순흥, 칠곡, 풍기, 영덕, 용궁, 하양, 영천(榮川), 봉화, 청하, 진보, 군위, 의흥, 신녕, 연일, 예안, 개령, 문경, 지례, 함창, 영양, 흥해, 경산, 자인, 비안, 현풍, 고령, 장기
경상남도
동래, 진주, 김해, 밀양, 울산, 의령, 창녕, 창원, 거창, 하동, 합천, 함안, 함양, 고성(固城), 양산, 언양, 영산, 기장, 거제, 초계, 곤양, 삼가, 칠원, 진해, 안의, 산청, 단성, 남해, 사천, 웅천
황해도
황주, 안악, 해주, 평산, 봉산, 연안, 곡산, 서흥, 장연, 재령, 수안, 배천, 신천, 금천, 문화, 풍천, 신계, 장련, 송화, 은률, 토산, 옹진, 강령
평안남도
평양, 중화, 용강, 성천, 함종, 삼화, 순천(順川), 상원, 영유, 강서, 안주, 자산, 숙천, 개천, 덕천, 영원, 은산, 양덕, 강동, 맹산, 삼등, 증산, 순안
평안북도
의주, 강계, 정주, 영변, 선천, 초산, 창성, 구성, 용천, 철산, 삭주, 위원, 벽동, 가산, 곽산, 희천, 운산, 박천, 태천, 자성, 후창
강원도
춘천, 원주, 강릉, 회양, 양양, 철원, 이천(伊川), 삼척, 영월, 평해, 통천, 정선, 고성(高城), 간성, 평창, 금성, 울진, 흡곡, 평강, 김화, 낭천, 홍천, 양구, 인제, 횡성, 안협
함경남도
덕원, 함흥, 단천, 영흥, 북청, 안변, 정평, 삼수, 갑산, 장진, 이원, 문천, 고원, 홍원
함경북도
경흥, 길주, 회령, 종성, 경성, 경원, 온성, 부령, 명천, 무산



대마주
對馬州
조선의 속주 (1420~1592)
조선의 대일외교거점 (1609~1869?)

파일:조선 대마주 지도.png
세종 대의 쓰시마섬 정벌로
이즈하라(嚴原) 일대
1420년 ~ 1592년(1869년)
성립 이전
교류 단절 후
무로마치 막부
(남북조시대)

에도 막부 (쓰시마-후추번)
파일:대동여지도 속 대마주.jpg}}}
▲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대마주
이칭
방진(芳津) • 마대(馬臺) • 대양(對陽)
관아 소재지
쓰시마섬 이즈하라정(嚴原町)
이즈하라히가시자토(嚴原東里)
→이즈하라니시자토(嚴原西里)[1]

대마도주(對馬島主)
대마도체찰사
이예(李藝)
하위 행정구역
8군 42포구
면적
708.25km²
인구
불명
최후 대마도주
소 요시아키라(宗義達, 종의달)[2]

위치
파일:대마여지도.jpg
1756년 제작, 대마여지도[3]
파일:각국도-대마도.jpg
각국도




"本隸新羅水路四百七十里在東萊府之東南海中至實聖王七年戊申倭置營於此島"

본예신라수로470리재동래부지동남해중지실성왕7년무신왜치영어차도

(쓰시마섬은)본래 신라에 예속되어 있고 실성왕 7년까지 동래부에 속한 섬으로 470리 거리 동남쪽 바다에 있다. 무신년에 왜가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청구도 동래부 기장현 中



1. 개요[편집]


파일:대마도 세이잔지.jpg
파일:대마도 고려문.jpg
조선통신사가 묵었던 숙소인 세이잔사(西山寺)
대마도주가 조선통신사를 맞이했던 고려문
파일:대마도 오후나에 선착장.jpg
파일:조선통신사 행렬도 중 일부.jpg
조선통신사 전용 선착장이었던 후나쓰키바(船着場)[4]
쓰시마섬에 행차한 조선통신사의 모습

조선 세종 대에 대마도 정벌을 통해 복속된 쓰시마섬의 행정구역명으로, 조공 책봉 형태의 상징적 행정구역이다.

당시 대마도주는 조선과 일본 양쪽 모두에게 관직을 받았다.[5] 관아 소재지는 이즈하라정(嚴原町) 이즈하라히가시자토(嚴原東里)였다가 대화재로 이즈하라니시자토(嚴原西里)로 옮겼다. 이즈하라정은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주변의 작은 지자체와 함께 모두 쓰시마시(對馬市)로 통합되었으며 옛 이즈하라정의 구역에 쓰시마진흥국(對馬振興局)이 설치되었다.[6]


2. 역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쓰시마섬/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본 문서에서는 대마주 관련 기록이 있는 15세기 쓰시마섬의 역사에 대해 다루며, 이전 또는 이후의 쓰시마섬의 개괄적인 역사에 대해서는 쓰시마섬/역사 문서를 참조.

예조에서 계하기를,

"대마도의 도도웅와(都都熊瓦, 소 사다모리의 아명)의 부하 시응계도(時應界都)가 와서 웅와(熊瓦)의 말을 전달하기를,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하고 생활이 곤란하오니, 바라옵건대, 섬 사람들을 가라산(加羅山) 등 섬에 보내어 주둔하게 하여, 밖에서 귀국을 호위하며, 백성으로는 섬에 들어가서 안심하고 농업에 종사하게 하고, 그 땅에서 조세를 받아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어 쓰게 하옵소서. 나는 일가 사람들이 수호하는 자리를 빼앗으려고 엿보는 것이 두려워 나갈 수가 없사오니, 만일 우리 섬으로 하여금 귀국 영토 안의 주·군(州郡)의 예에 따라 주(州)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인신(印信)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지키어 시키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도두음곶[都豆音串]에 침입한 해적의 배 30척 중에서 싸우다가 없어진 것이 16척이며, 나머지 14척은 돌아왔습니다. 개중 7척은 곧 일기주(一岐州)의 사람인데 벌써 그 본주로 돌아갔고, 7척은 곧 우리 섬의 사람인데 그 배 임자는 전쟁에서 죽고 다만 격인(格人)들만 돌아왔습니다. 이제 이미 각 배의 두목 되는 자 한 사람씩을 잡아들여 그 처자까지 잡아 가두고 그들의 집안 재산과 배를 몰수하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사오니, 빨리 관원을 보내어 처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세종실록》 7권, 세종 2년 윤1월 10일 기묘 6번째기사

'예조에서 대마도의 도도웅와가 귀속하기를 청한다고 아뢰다.'


쓰시마섬은 일본에서 율령제가 실시되었을 때 이미 일본에 속주로 편입되어 있었다.[7] 적어도 7세기경부터는 확실히 한반도계 국가보다는 일본 열도의 세력이 쓰시마섬을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이곳은 한반도의 여러 국가들과 일본이 외교사절단을 교환할 때 꼭 거쳐야 하는 중요한 지점이었으며, 중간 무역지점의 역할도 하였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그 중립성과 독립성을 어느 정도 보장해 주었다. 그러다 쓰시마섬은 세종 때 벌어진 대마도 정벌을 계기로 하여 대마도주가 조선의 신하가 되었다. 쓰시마섬은 당시 조선의 경상도에 속하게 돼 '대마주'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또한 세종 25년, 계속되는 밀항과 도항자를 막기 위해서 조선과 대마도주는 계해약조를 체결하게 되었다. 이 약조를 맺음으로써 쓰시마섬은 일본 및 조선 사이에서 안정적인 중개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덕분에 쓰시마섬의 호족이었던 소(宗)씨 가문은 쓰시마섬에 대한 지배를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쓰시마섬은 삼포왜란 등으로 조선과의 관계가 어려워졌으며, 임진왜란을 기점으로는 사실상 조선의 종주권은 유명무실해졌다. 그 후로는 일본 메이지 정부가 폐번치현을 실시하면서 쓰시마 후추번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던 쓰시마섬은 완전히 나가사키현에 편입되었고 그 후 현재까지 일본의 영토로 남아 있다.

쓰시마섬은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의하면 3세기부터 왜인의 영역으로 분류되었고 늦어도 6세기에는 일본 본토의 정권에 귀속된 것으로 보인다. 가령 8세기 신라구의 쓰시마섬 공격을 방어할 때 일본 본토에서 부임한 장수 훈야노 요시토모(文室善友)가 이를 방어했다. 특히 철저한 중앙집권제 국가였던 조선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쓰시마가 한국 땅이라 부를 만한 근거가 없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를 증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제주도. 고려조까지만 해도 제주는 탐라성주가 별도로 다스리는 반독립지역 탐라국이었지만, 조선은 개국하자마자 쿨하게 탐라성주직을 폐지해버리고 제주도를 전라도에 편입시킨 뒤 제주목사를 파견했다. 울릉도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직접 관할하고 있었다. 11세기 도이의 입구 때문에 우산국이 쑥대밭이 되고 그 주민들이 육지부로 피난해 오면서 나라가 멸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쓰시마섬 영유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조선이 쓰시마섬에 왜 정식으로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답을 전혀 하지 못한다. 특히 쓰시마섬이 조선의 영토를 그린 고지도에 등장하고 대마도주가 조선에게 조공을 바치고 관직 책봉을 받았으니 한국땅이라는 논조는 역으로 조선은 명, 청의 조공국이었으니 한반도는 중국의 땅이라는 논리에 악용될 수 있다.[8]

다음은 1421년 쓰시마 도주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조선예조판서에게 보낸 글이다. 다만 이 글은 예조에서 내용이 공손하지 않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공(崔公)이 금년 정월(1월)에 보낸 서계(書契)를 받자오니, ‘쓰시마섬이 경상도에 예속되었다.’ 했는데, 역사 서적을 조사하여 보고 노인들에게 물어보아도 사실 근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대왕께서 훌륭한 덕을 닦고 두터운 은혜를 베푸신다면, 누가 감히 귀의하지 않겠습니까. 옛날 주(紂)가 무도한 까닭에 억조의 무리가 모두 창을 거꾸로 잡고 대항하였으며, 주공(周公)이 정치를 잘한 까닭에 월상씨(越裳氏)가 아홉 번이나 통역을 거쳐서 이르렀으니[9]

, 반드시 옛날대로 일본 소속으로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덕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10]

세종실록 세종 3년(1421년) 4월 6일 무술 3번째 기사



3. 현대 한국의 영유권 주장 관련[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쓰시마섬/한국의 영유권 주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2 02:26:08에 나무위키 대마주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대화재로 인해 이전했다.[2] 요시아키로 읽기도 한다. 1869년 12월 13일조선왕조실록에서 기록한, 폐번치현으로 나가사키현에 포함되어지기 전에 조선과 마지막 교류를 한 대마도주. 나중에는 소 시게마사(宗 重正)로 개명했다.[3] 1756년 6월 일본 지리학자인 모리고안이 에도 막부의 명을 받고 제작[4] 지명이 아예 나루(津)란 뜻.[5] 이는 당시 쓰시마섬의 지정학적, 외교적 위치를 잘 나타내주는 사례 중 하나로, 쓰시마섬은 일본 막부의 세력권과 조선의 세력권 사이에서 두 국가 모두에게 속주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았거나 부여받기를 청했다.[6] 지금의 호텔 쓰시마(ホテル対馬) 옆이자 토요코인 호텔 뒤에 위치한 이케신사(池神社)가 있는 위치로, 본래는 이곳에 대마도주의 관아가 있었다. 그런데 14대 대마도주 소 마사모리(宗將盛)에게 불만을 품은 그의 형제 소 모리하루(宗盛治)가 반란을 일으키는 중 관아에 불을 질러 이때 본래의 대마도주 관아는 완전히 불타버렸으며, 거기다 이즈하라정내까지 불이 옮겨 붙어버리면서 큰 화재가 일어났다. 이후 1669년에 가네이시강(金石川) 북쪽에 가네이시성(金石城)을 쌓고, 그곳으로 관아를 옮겼다.[7] 그 전에 신라의 지배를 받았다는 기록도 청구도를 비롯해 여럿 있으나(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 참조), 정작 삼국사기일본서기 같은 양국의 정사에는 그런 내용이 실려있지 않다.[8] 조선과 청 사이의 조공책봉 관계가 이전과 달리 강압성을 수반한 실질적 관계였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며, 황여전람도와 같이 한반도가 청의 영토처럼 그려진 청대 지도도 존재한다. 조공책봉 관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조공 문서 참고.[9] 월상씨는 과거 베트남, 라오스 일대에 살던 동남아시아 가문인데, 외국인이 언어의 장벽을 감수하면서까지 주나라에 귀화했음을 의미한다.[10] 전체적으로 해석하면, 쓰시마섬이 경상도에 속해 있다는 것은 거짓이고, 본디 쓰시마섬은 애초에 조선의 영토가 아니다. 하지만 과거 중국사를 보면 폭군이 집권할 때에는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성군이 집권할 때에는 반대로 외국인이 귀화해 들어왔던 사례가 있으니, 세종이 하는 거 봐서 맘에 들면 과거 월상씨의 사례처럼 쓰시마섬이 일본에서 독립해서 조선에 복속해 줄 의사가 있으니 알아서 처신 잘 하라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