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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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해주는 수양산 남쪽에 있으며 그 경치가 제법 유람할 만하다. 황해도에서 해주는 문장과 예의, 과거 급제가 으뜸이었다.
海州牧
황해도의 중심이자 해서에서 가장 큰 고을. 황해도 행정과 군사의 거점이자 중심역할을 하였으며, 남쪽으로는 황해를 끼고 있었던 덕분에 다양한 상공업이 발달하였다. 예로부터 조선시대 황해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고을들 중 하나로 꼽혔다. 지금의 황해도 해주시의 대부분 지역이 바로 해주목의 관할이었다.[4]
2. 상세[편집]
황해도 남쪽의 해주만에 위치하였던 고을이다. 예부터 그 지리적, 환경적 특성 덕분에 고려시대부터 조선초기까지 황해도의 계수관이 바로 이곳에 설치되어 있었으며, 세조 즉위 2년인 1456년에 폐지될 때도 황해도의 중심지였다. 계수관 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황해감영과 해서의 중심지로 꼽혔다.
이곳 해주목에 파견된 수령은 목사였으며, 황해감영에 파견된 감사와 목사가 한 읍치 내에 같이 있었다.[5] 하지만 이곳 해주목에는 목사를 별개로 파견하지 않고 이곳 황해도 관찰사가 수령을 함께 겸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생겼을 때에는 황해도 해주목 판관을 별도로 선정하였으며, 수령(관찰사)를 보좌하는 역할을 겸하였다. 이곳 해주목에는 황해도(해서) 지역의 군사들을 총괄하는 황해병영의 군영이 읍내에 함깨 존재하였다.
이처럼 조선왕조 500년 동안 황해도 행정과 군사의 거점이자 중심역할을 하였으며, 조선시대 황해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고을로 꼽혔다. 전략적, 경제적으로도 황해도 일대에서 막대한 부를 쌓았던 지역이기도 하다. 특히 서쪽과 동쪽에는 각각 풍요로운 재령평야와 연백평야가 있어, 황해도에서 제일가는 양반고을이었다. 또한 남쪽으로는 황해가 위치하고 있으며, 어업이 발달하였다.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지역 중 하나인데, 대표적으로 김구와 안중근이 바로 이곳 해주목 출신이다. 이처럼 해주목은 독립운동과 그 연관성이 상당히 깊었고, 활발히 일어났던 지역이다.
3. 역사[편집]
본래 고조선의 관할권에 들어왔던 통치 영역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에는 한사군의 진번군이 설치되었으며, 진번군이 대방군으로 바뀐 이후에도 한사군의 통치 영역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던 백제가 삼국 최초로 이 일대 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후 남하정책을 펼치던 고구려가 이 지역을 백제와의 전쟁을 통해 병합하면서 이 지역에 내미홀군(內米忽郡)이라는 행정구역을 만들었다.
통일전쟁이 끝난 후이자 신라 경덕왕 재위 7년째 였던 748년, 그 이름을 내미홀군에서 폭지군(瀑池郡)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신라 효공왕이 즉위하고 있을 때였던 905년. 마침내 이 지역은 '해주'라는 이름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통일신라가 멸망하고 나서도 이 지역은 고려 성종이 즉위 2년이었던 983년에 목으로 승격되어 부사가 다스리게 되었고, 성종이 즉위한지 15년이 지난 995년에는 절도사가 파견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현종 즉위 3년째 였던 1012년에 절도사가 해주목에서 폐지되고, 현종 즉위 9년째인 1018년에 마침내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라는 이름으로 그 명칭을 부여받았다.
1122년에 서해안 방위의 중심도시이자 개경을 지키는 수도 방위부로서의 역할로 인하여 마침내 도호부 중에서 가장 군사적 거점에만 지정되던 '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그러다가 고려 고종 1247년에 다시 해주목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서해도안찰사(西海道按察使)가 다스리는 '군영'의 소재지로서의 성격까지였으며, 특히 1389년 이후 관찰사영의 소재지가 되어 서해도의 여러 군사적, 행정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조선 건국 2년이 지난 1393년, 황해도 제2의 도시로 꼽혔던 황주와 함께 황해도의 계수관으로 정해졌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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