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군이 되어보세!/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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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현대인
2.1. 이재석[1]
2.3. 기타 현대 인물
3. 천녀
6. 1, 2부 사이
6.1. 경성군 이윤(빙의 전)
8. 2, 3부 사이
8.1. 성친왕 이현(빙의 전)
10. 3, 4부 사이
10.1. 황태손 이진(李昣)[2] (빙의 전)
10.2. 대한
10.2.1. 심왕부
10.2.2. 조홀국
10.2.3. 술루국
10.2.4. 하와국
10.3. 대아주
10.3.1. 서
10.3.2. 후송
10.3.3. 후금
10.3.4. 청
10.3.5. 일본
10.3.6. 안남
10.3.7. 유구
10.3.8. 무굴 제국
10.3.9. 벵골칸국
10.4. 대유주
10.4.1. 프랑스
10.4.2. 러시아
10.4.3. 폴란드
10.4.4. 프로이센
10.4.5. 오스트리아
10.4.6. 스웨덴
10.4.7. 이탈리아
10.4.8. 서반아
10.4.9. 교황청
10.4.10. 잉글국
10.5. 대미주



1. 개요[편집]


슈타인호프 작가의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의 등장인물들을 소개하는 문서.
실존 인물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한 가상인물



2. 현대인[편집]



2.1. 이재석[3][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재석(명군이 되어보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2. 김상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상희(명군이 되어보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3. 기타 현대 인물[편집]


  • 이재석의 할아버지
한학자 겸 농사꾼. 작품 시작 시점보다 조금 전에 병사했다. 천녀가 깃들었다고 알려진 연적을 재석에게 유품으로 남겨줘 재석이 천녀와 만나 왕이 되도록 하는 계기를 제공한 인물. 재석이에게 한문, 성리학, 농사를 가르쳐줘 조선에서 적응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줬으며 이에 주인공도 자주 할아버지에게 감사해한다. 유학자라면 자기 입에 들어가는 건 스스로 지을 줄 알아야 한다는 실학적인 생각을 지녔기 때문에, 재석의 아버지와 특히 재석은 밭에서 살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 재석의 큰아버지를 키울 때는 잠깐 생각을 바꿔먹었기에 큰아버지와 그 자식들은 농사를 지을 줄 몰랐는데 이에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 진성, 현승, 현수
이재석의 고시생 선배와 대학 동기들. 공무원 시험에서 떨어진 것에 대한 속풀이로 같이 술을 마시다 이들이 문득 꺼낸 조선 시대 이야기를 시작으로 왕에 대한 생각까지 대화가 이어지고, 이것이 머릿속에 남은 상태로 술에 취해 돌아온 이재석이 술김에 천녀가 깃든 연적에다 왕이 되고 싶다는 소원을 비는 계기가 된다.

  • 상희의 친구
상희가 중학생 때부터 사귀던 10년지기 절친이었다. 의사인데, 한의사인 친구 앞에서 대놓고 한의학을 팩트폭력을 섞어 유사과학 취급해 대판 싸우고[4] 절교했으며 상희가 만취해서 교수의 사무실에 쳐들어가는 원인을 제공한다. 이것 때문에 2부에서 상희가 동의보감에서 쓸데 없는 처방을 덜어내는데 악에 받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역사가 바뀐 만큼 태어날진 알수 없지만 만일 태어난다면 이세계에선 한의학을 칭송하는 모습으로 나오거나 위처럼 말하고 한의학계에 처맞아 사회적으로 매장되버릴 가능성이 있다.

  • 상희의 학과 교수들과 지도교수
학부생들 앞에서는 교양 있는 척하면서 레지던트가 된 상희를 막 대하며 욕설, 폭행, 금전 거출, 논문 대필, 성추행 등을 일삼은 위선적이고 못돼먹은 인간 말종들. 상희가 조선에 보내지기 1년 전에는 오키나와로마로 외유성 학술대회에 가서 여비로 흥청망청 놀기까지 했다.[5] 이중 학과장이 정작 서예는 하지도 않으면서 교양 있어 보이려고 골동품 상점에서 천녀가 깃든 벼루를 구입해 소장하고 있었는데 울분에 찬 상희가 홧김에 그걸 깨 먹으며 천녀와 만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얼마나 악질들이었는지 당시 상희가 "내 위에 있는 빌어먹을 새끼들이 모두 사라진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소원을 빌 정도였고, 2부 시점에 와서도 한이 깊이 사무쳐 있어 상희는 이 작자들을 생각만 해도 욕이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하지만 3번이나 환생한 3부 시점에 와서는 이 세계에서는 태어나지도 않을 사람들에게 원한을 가져서 뭐하냐며 앙금을 풀어버린 듯한 모습을 보인다.[6]

  • 이재석의 군대시절 중대장
이재석이 군대 시절 경계에 실패한 보초는 용서해도 배식 실패하는 취사병은 용서 못한다고 짬탱이를 갈구었던 인물. 그래서 재석이 역사를 바꾼 뒤에 이 양반은 어떻게 될 지 혹은 태어나긴 할지 궁금해한다. 관련 커뮤니티에는 이 인물을 김조윤으로 엮는 세계관 통합 밈이 존재했다.


3. 천녀[편집]


재석의 가보인 육각 연적과, 상희네 교수 연구실에 있던 벼루에 깃들어 있는 존재. 재석의 조부 말로는, 재석의 조상의 효심에 감동한 옥황상제가 내린 연적이며 연적에 소원을 빌면 천녀가 나타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지만 재석은 우물 속 귀신이 주고 간 거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주인공과 상희가 재밌는 소원을 빌었기에[7] 이를 이루어주는데 아주 뭐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 주었다.[8]

새롭게 빙의할 때 빼고는 본편 내에서 등장은 없다. 1부에선 재석이 또 다시 왕으로 환생할거란 생각을 미처 못해서 천녀 생각도 잘 안 하지만, 1부 끝 2부 시작 때 천녀와 다시 만나고 수십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재환생 시켜주자 두고두고 천녀 욕을 하게 된다. 1부에서 호되게 엿을 먹은 재석과 상희 입장에서는 성질 고약한 천녀라고 욕을 하지만, 의외로 이것저것 서비스(?)를 많이 붙여줬다. 이 둘의 기억력에 버프를 걸어줘 현대에서 익힌 지식들을 아무리 오래 지나도 절대 잊지 않도록 해줬고[9] 중세 한국어도 구사하도록 해줬다.[10]

어찌 보면 상당히 무시무시한 존재인데 주인공이 빙의하는 왕들의 영혼을 거두고 거기 주인공의 영혼을 대신 집어넣는 식으로 빙의가 된다고 한다[11]. 다만, 주인공이 빙의되는 왕들이 막장 폭군, 암군이라서 전혀 불쌍하다는 생각은 안 든다.[12] 반면 상희가 빙의하는 인물들은 큰 병이나 부상으로 다 죽어가다 갑자기 회복했다는 묘사로 볼 때 원래 수명이 그날까지인 사람들의 영혼을 거두고 몸에 상희의 영혼을 집어넣는 것으로 보인다. 하계의 일에 물리적인 개입은 전혀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13] 재석과 상희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지켜보고 있는 것은 물론 머릿속의 생각 내용까지 들여다보는 것으로 보인다.

본래는 1부에서 주인공이 종성순에게 죽은 것이 ‘실제 연산군의 생애가 거기까지여서’라는 수명드립을 쳐서[14] 독자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2019년 7월 초 작가가 이 부분을 수정하여 수명드립을 삭제하고, 주인공이 1부에서 쌓은 업보 때문에 죽게 된 것으로 수정하였다.[15]

2부 종료 이후 역시 주인공과 재회했으며, 빙의 초마다 바보가 되는 건 싫으니 이미 알던 사람의 얼굴을 보면 누구인지 떠오르는 능력을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여 재석은 빙의 전 인물의 기억 일부를 물려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대신 또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식의 소원성취를 해준다. 왕은 왕이되 황제국이 된 대한의 황위계승권자, 즉 친왕의 몸에 빙의시켜준다. 작호는 왕 맞잖아?덕분에 1,2부와는 달리 3부에서는 재석은 처음부터 군주로 시작하지는 않았다.

3부에서 건복제가 붕어하기 전 재석이 마지막으로 한 대화에서 자신의 비밀을 고백하는데,[16] 건복제는 '그 후손의 13대 조가 얼토당토않은 소원을 빌어서 천계를 모욕했는데 당연히 상부에 알려서 징벌하고 연적을 회수했어야 했던거 아니냐'며 천녀를 두고 태만한 관리라고 디스했다.

3부 종료 이후 다시 재석과 재회하였고, 원본 성친왕의 행적들로 고생했던 재석에게 다음 생애에서는 남의 잘못으로 인한 죄를 덮어쓰는 일 없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스스로 이뤄나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 먼저 제안하였고 이에 재석이 응하자 바로 들어주는데... 역시나 전번의 사례들처럼 또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식의 소원성취였고 이번에는 마차 사고로 눈 앞에서 어머니를 잃은 어린 소년 황태손의 몸에 재석을 빙의시킨다.

주인공이 2부 당시 미래지식을 둘러대느라 팔아먹은 적이 있다.[17]

얼굴이 잘 안보이고 묘하게 밀당하는 걸 두고 일부 독자들 사이에서 상희 천녀설이 나오고 있다(...). <고종, 군밤의 왕>작가이기도 한 '까다로프스키' 작가가 쓴 상희 천녀설 팬픽 근데 이건 천녀 상희설 아닌가 재석이네 13대조 할아버지가 소원으로 한번 하자고 했다는 걸 봐서 보통 미인이 아닌 것 같긴 한데, 얼굴이 안 보이니 다들 얼굴을 궁금해하고 있다.

독자들 사이에선 만악의 근원으로 꼽히고 있으며, 일부에선 반 농담삼아 카오스 신코른(Warhammer)이라는 드립이 나오기도 한다. 주인공인 재석이 군주로 활동하면서 잔혹한 형벌과 대외 정벌을 행하면서 등장한 드립.

4. 사후세계[편집]


조선이 대한으로 칭제건원하면서 고황제로 추존되었다. 그 불같은 성격은 저승에서도 여전해서 단종을 죽인 세조를 죽도록 패며, 지옥에까지 찾아가서 몽둥이찜질을 해댄다. 3부 외전에서 자신의 후손들인 이융, 경성군, 성친왕 등이 정체모를 잡귀에게 몸을 빼앗기고 자신이 건국한 조선이 사실상 그 잡귀의 나라가 되어버린 현실에 분노하고 있다.[18][19] 무종(1부 재석)의 자손인 인조, 명조는 피가 이어졌어도 영혼이 다르다며 속으로는 후손으로 여기지 않지만 외부의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후손 취급은 해주고 있으며, 경조와 그 자손들의 경우 경성군이 몸을 빼앗기기 전에 낳은 자식이니 후손으로 대충 인정은 해주고 있다. 하지만 성친왕의 몸에 재석이 빙의하여 건흥제로 즉위하였고, 이후의 대한 임금들이 모두 건흥제의 자손들이 되면서 또 골머릴 앓게 생겼다.

혈육을 죽이고 나라를 망친 죄지옥에 떨어졌다. 지옥에 도착하기 전부터 분노한 태조에게 폭행을 당했으며, 이후에도 태조가 지옥까지 쫓아 내려와 매타작을 해댄다. 어지간히도 때려놓는지 최대 피해자인 단종, 문종, 세종도 세조에게 더는 뭐라고 안 할 정도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조선 임금 모임 때에는 지옥을 벗어나서 천당으로 올 수 있지만 증조할아버지가 무서워서 오히려 빨리 지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20]

재석이 빙의하기 이전의 원래 이융으로 우리에겐 폭군 연산군으로 알려진 사람. 즉위하고 몇 달만에 재석에게 몸과 왕좌를 탈취당했기에 태조에게 잡귀에게 몸이나 뺏기는 놈이라며 구박받고 있다. 그나마 원 역사와 같은 폭군이 되기 전에 재석에게 몸을 빼앗기고 죽은 것으로 처리되어 영혼이 극락으로 보내졌고, 공식적으로 몇 달이라도 임금 노릇을 해보기는 해서 성친왕과 달리 임금 모임에는 낄 수는 있지만, 제대로 임금 노릇도 못 해봤기에 업적이 없는지라 없을 무 자를 써서 무종(宗)이라는 별명으로 놀림받는다. 생전에 공식적으로 지은 죄만 없을 뿐이지 저승서도 성격은 그대로여서 그가 재석인 줄 알고 찾아온 왕비 신씨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어 쫓아내고, 후손들이 무종에게 올리는 제삿밥은 뻔뻔하게 받아먹고 있다.

직접 등장은 없다. 저승에서도 사대부들은 공부를 계속하고 있는데[21], 필요하면 진짜로 공자, 맹자를 만나 질문을 할 수도 있기에 공자, 맹자와 만나려는 사대부들이 줄을 서서 대기순번이 수백 년치가 꽉 차있다.

  • 최판관
직접 등장은 없다. 저승의 판관 중 가장 높은 사람으로 사자의 생전 행적에 따라 천당으로 보낼지 지옥으로 보낼지를 결정한다.

5. 1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명군이 되어보세!/등장인물/1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1, 2부 사이[편집]


원역사 연산군이 폐위되지 않음에 따라 중전 신씨도 폐비되지 않았다. 남편 사후 유복자로 딸을 낳았으나 안타깝게도 생후 5개월만에 요절했다. 이후 성렬왕대비(원 역사 문정왕후 존호)가 되어 아들 효도받으면서 대접받으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능은 남편과 같이 무릉에 있다. 저승에 오자마자 생전에 그리워하던 남편을 찾았으나 진짜 연산군의 영혼이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하자 재석이 아닌 것을 알고 크게 상심했으며, 같은 처지이자 증손자며느리인 장조 비 의인황후 김씨와 자주 만나 서로를 위로하면서 진짜 재석의 영혼을 찾고 있다.

원역사와 달리 왕위에 오르지 않못하고, 대군으로 생을 마감한다.[22] 대신 종친의 웃어른인데다가 왕위를 양보한 것 때문에 후한 대접을 받아서 인조 - 명조에게 받은 집안 재산도 상당하고 순풍순풍 낳은 자손들도 왕실과 매우 우호적으로 지낸다. 주인공은 원역사를 알아 껄끄러워하면서도 얌전한 개념인인 데다가 원역사의 중종이 고생을 많이 한 왕임을 생각해서인지 유일하게 진짜 동생으로 생각하고 제법 친하게 지냈다. 아들 창녕군을 낳았다.
원역사에선 중종반정 주도세력에 의해 폐비되지만,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않게 되면서 이혼당하지 않고 아들을 낳았으니, 원역사보다는 행복하게 생을 마감했을듯하다. 진성대군과의 사이에서 아들 창녕군을 낳았다.
  • 창녕군
진성대군의 아들. 은성군의 아버지.
  • 은성군 → 은성대원군 → 은성대원왕
창녕군의 아들. 재석이 빙의하게 되는 경성군(장조)의 아버지. 아들이 없던 명종에게 아들 경성군을 입양보낸다. 재석이 빙의하는 2부 시작 시점에는 이미 고인이어서 등장은 없다.
진성대군의 서자로 성격이 개차반이라 숙부를 우대하던 인조와 명조가 덕흥군만은 싫어하여 왕위계승에서 덕흥군 가계만은 아예 배제하였다.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아버지 빽에 기대어 놀고먹고 살았고 그 덕에 하성군은 왕이 아닌 종친으로 놀고먹게 되었다.


대한 황실 4대조
인조 | 仁祖


조선 제11대 국왕
인종 | 仁宗

인종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
仁宗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
[A]
인조헌문의무장숙흠효태황
仁祖獻文懿武章肅欽孝太皇
[A]
묘호
인종(仁宗) → 인조(仁祖)
시호
조선
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
(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A]
대한
헌문의무장숙흠효태황
(獻文懿武章肅欽孝太皇)[A]

영정(榮靖)[A][B]
출생
1501년
조선 한성부 경복궁 교태전
즉위
1506년 11월 (음력 11월)
조선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사망
1553년
조선 한성부 경복궁 청연루[A]
능묘
효릉(孝陵)[23]
재위
조선 국왕
1506년 11월 ~ 1553년
(음력 1506년 11월 ~ 15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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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全州)

황(𩔇)
전호
영모전(永慕殿)[A]
부모
부왕 무종, 모후 성렬왕대비
부인
황후 유씨[1]

  • 인종 → 인조 이황[24][25]
주인공이 연산군(무종) 시절 중전 신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세자. 1501년생. 무종이 비명횡사한 후 자순대비의 도움으로 만 5세의 나이에 즉위했다. 주인공과 신씨가 사랑으로 애지중지하며 키워 성품이 선했다고 하며 철권통치를 펼친 무종과 달리 무종 대에 귀양간 이들을 많이 사면해주는 등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렇다고 성종처럼 사림이 날뛰도록 용인한 것은 아니어서 수렴청정이 끝나자마자 삼사의 특권이자 폐단인 풍문거핵과 불문언근을 폐지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성리학 교조화를 막는 업적도 세운다. 주인공은 이황이 자신과 달리 성군이 되기를 바랐으니 부모의 바람대로 잘 큰 것. 그러나 기술 유출이 우려된다며 기껏 아버지가 개발한 강선조총의 사용을 금지하고 다시 활강조총만 사용하게 한 실책도 저질렀다.[26][27] 1553년 53세의 나이로 사망. 아버지가 미래에서 준 정보[28] 등도 없었음을 감안하면 나라를 잘 다스렸다볼 수 있다. 아버지를 닮아서 첩을 별로 들이지 않았고 아들 복이 없었다고 한다. 유일한 아들 명종 이환이 태어났을 때 대대적인 사면을 한다.
정철의 큰 누나. 인조의 후궁이었다.

  • 양평군 이인
주인공이 무종 시절 숙의 이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둘째 아들, 서자. 주인공이 원자인 이황만큼 이뻐해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었다고 한다.

무종 시절 무오사화에 걸린 사림들을 유배 보낸 무릉도(울릉도)에 밀항을 해서 김굉필 아래에서 공부를 한 뒤 관직에 오른다.[29] 인조에게 무묘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이장곤에게 처발린 뒤[30][31] 부여주로 유배를 가서 야인 아이들을 가르치며 지낸다. 부여주에서 돌아온 뒤로는 현실을 겪어보고 좀 깨달은 것이 있는지 별로 나대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실제 역사에서 소격소 문제로 중종에게 찍혀 사약 먹고 죽은 것을 생각하면 이쪽도 수혜자.

1부 구주 정벌전 시기에 과거 수석합격자로 짧게 언급되었다. 무종 사후 인의 통치가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원역사와 달리 그냥 평범한 대신으로 이조판서를 지냈으나 개고기 매니아였고 결국 개고기를 뇌물로 받은 것 때문에[32] 정승까지 오르지는 못했다. 퇴직한 후 개고기 요리책을 썼는데 140년이 지난 3부 시점에서도 개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김안로 같은 사람이라고 놀릴 정도다.

우리에게 문정왕후로 알려진 사람. 해서정벌이 끝나고 주인공에 의해 뒤늦게 언급이 된다. 어떻게 되었을까 행보가 궁금해서 알아보니, 역사가 바뀌어 진성대군과 맺어지지 못하니 그냥 적당히 명망 있는 집안 며느리가 되었다고. 그 때문에 실제 역사에서 누이버프로 권세를 누린 윤원형이나 정난정도 패악을 부리지 못한 채 평범하게 살았을 듯. 아니면 땅 모으고 재산 불리는 능력을 상공업이 발달한 세계에서 십분 발휘하여 떵떵 거리며 살았거나.[33]


대한 황실 3대조
명조 | 明祖


조선 제12대 국왕
명종 | 明宗

명종공헌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
明宗恭憲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
[C]
명조헌의소문광숙경효태황
明祖獻毅昭文光肅敬孝太皇
[C]
묘호
명종(明宗) → 명조(明祖)
시호
조선
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
(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C]
대한
헌의소문광숙경효태황
(獻毅昭文光肅敬孝太皇)[C]

공헌(恭憲)[C][B]
출생
1528년
조선 한성부 경복궁 교태전[D]
즉위
1553년
조선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C]
사망
1567년
조선 한성부 경복궁 양심당[C]
능묘
강릉(康陵)[34]
재위
조선 왕세자
?? ~ 1553년
조선 국왕
1553년 ~ 156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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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全州)

환(酄)
전호
모의전(慕義殿)[C]
부모
부황 인조, 모후 유씨[1]
부인
인순황후 등

  • 명종 → 명조 이환[35]
인조의 유일한 아들이자 무종의 손자. 1528년생. 몽골인들에게 판매하기 위해 전라도 일대에 대규모의 차밭을 조성해서 중국보다는 못하지만 차 무역을 활성화시켰고 일본의 류조지가에서 원군을 요청하자 일본에 여진기병 2000명을 파병을 해서 쇼니 가 멸망에 일조하기도 했다. 집권 말기 서양인들의 존재를 알게 되어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던 중 1567년 40세의 나이로 사망. 유일한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고 1년 후 8세의 어린 나이에 죽고 말았는데 이후 낳은 자식들이 모조리 딸로만 태어나고 더 이상 아들을 보지 못하자 경성군을 양자로 들인다. 인조와 유사하게 큰 실정 없이 무난한 통치를 펼쳤지만 재위 말년에 조선 입장에서는 암군 그 자체였던 경성군을 후계자로 지목한 큰 실수를 했다. 경성군을 세자로 책봉한 후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하며 경성군이 일찍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는데 어릴 적의 경성군은 얌전히 책만 읽는 녀석이었기에 명조가 본성을 파악할 시간이 없었다. 다행히 할아버지인 무종이 경성군에 빙의하는 기적이 일어나면서 최악을 피하게 되었지만 만약 무종의 재림이 아니었다면 본인은 나라를 잘 다스렸음에도 후계자를 잘못 골라 나라를 망하게 만든 원흉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 □□세자 → □□태자
명조의 고명아들이자 적자. 명조가 보위에 오르고 2년후에 인순황후에게서 얻은 아들로 7세에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년 후 병으로 8세에 죽는다. 이로서 무종과 성렬왕후의 직계 남자 후손은 끊기고 여자 후손만 남는다.

  • 정일한의 아버지
무종과 상희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상희가 사망한 뒤 정호찬이 입양해 키워주었다. 공식적으로는 자신의 얼자로 위장했는데, 얼자이지만 무종이 서얼금고법을 폐지했기에 벼슬을 지낼 수 있었다. 명조 대에 승지를 지냈으며 경성군 집권 초기에 사망했다. 주인공과 상희는 아들의 얼굴도 못 본 것을 슬퍼한다. 주인공은 상희의 마음에 상처가 될 것을 우려해 상희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 고니시의 스승
무릉도 출신의 선비로 고니시에게 유학을 가르친 인물. 자기도 모르게 일본사를 바꾼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인간 덕분에 고니시가 원역사보다 훨씬 유능한 인물이 되어 조선 입장에서 성가신 적장이 되었기에 주인공은 누군지 알면 당장 연해주 서당에 쳐 박아버릴 생각을 하며 이를 갈고 있다.[36]

죽기 전 오이치에게 쿠노이치 유키를 맡겼다. 이후 유키는 오이치의 명령으로 차차를 따라 조선으로 가게 된다.

오우치 요시오키의 아들. 반란을 일으킨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오우치 세력은 망했다. 이후 오우치 세력은 류조지에 합류했다.


6.1. 경성군 이윤(빙의 전)[편집]


2부에서 주인공이 빙의하게 된 인물. 진성대군과 부인 신씨[37]의 증손자로 1551년생이며 아들을 보지 못한 명종 이환의 양자가 되어 원역사의 선조와 비슷하게 1567년 즉위한다. 빙의 시점은 즉위 15년째인 1582년. 무종, 인종, 명종과 다르게 전형적인 성리학적인 조선 임금...인 정도가 아니라 이후 언급되는 행적들을 보면 전형적인 걸 넘어 그냥 무능하고 무식한 암군임이었음이 드러나고 있으며 무능한 암군이라는 것은 작가 공인이다.[38] 주인공은 경성군이 통치하는 채로 이후 한 대만 더 지났으면 무종 시절 자신이 해놓은 개혁이 다 사라지고 조선은 다시 유교가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현재 전개를 보면 주인공이 빙의하지 않은 상태로 경성군이 계속 왕위에 있었다면 조선의 유교 국가화는 물론이고 충분히 조선이라는 나라를 멸망시키고도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39] 이는 작중 주인공도, 경성군을 어려서부터 지켜본 세자도 마지막에 인정한 것이다.

요약하면 그냥 성격 나쁘고 무능한 암군이다. 작중 밝혀진 무능한 면모와 악행들만 봐도,

  • 무종 대에 얻은 영토의 개척과 관리 소홀.
  • 예산 절감한답시고 돈이 들어가는 정책들은 죄다 취소, 축소. 국방도 소홀히 하여 대일, 대여진족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음.
  • 그나마 남아있던 재정 관리도 소홀히 해 내수사 관리들의 횡령과 부패가 만연하게 만듬.
  • 그렇게 돈을 아낀다면서 정작 여색은 밝혀 전국의 미녀들을 뽑는 일에는 돈을 쏟아붓고 그렇게 생긴 후궁과 자녀들에게는 가장 노릇 한 번도 안 함.
  • 과도하게 권력에 집착하여 후계자인 세자까지 견제하고 의심함.
  • 성리학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상공업을 억누르고 농업을 장려해 조선의 경제 발전을 강제로 틀어막음.
  • 성리학밖에 모르는 골수 사림파들을 중용하여 가까이 하고, 서원 특혜와 같은 사림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 조선을 성리학이 지배하는 나라로 만들려고 함.
  • 외국인 선교사들이 일본에게 무기를 팔았다는 이유로 입국을 막고 쇄국으로 일관.
  • 소수민족인 백정들을 관노로 만들고 북방으로 강제 이주시키며 탄압.
  • 임해군이 온갖 악행을 저지를 때 친한 종친이란 이유로 처벌하지 않고 묵인.
  • 성리학 타령을 하면서 선대왕인 무종을 모욕하는 패륜 발언을 하는 위선적인 행보.[40]

그나마 현실의 대표 폭군인 연산군과 비교하면 주도적으로 커다란 전횡과 패악질을 저질렀다거나 무익한 토목공사나 전쟁을 일으키는 짓은 하는 등의 폭정을 대놓고 하지는 않았지만, 15년 동안 재위하면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적폐들을 서서히 쌓아가며 조선을 내부에서부터 병들게 만들고 있었다는 점에서 연산군 못지않은 암군이다. 무엇보다 명군이 되어보세 세계관에서는 폭군 연산군은 존재하지 않고 상당한 업적이 있는 무종이라는 군주만 있으며 무종의 뒤를 이어 조선을 발전시킨 인종과 명종이 있다 보니 이쪽 세계관의 조선 왕 중에서는 최고의 암군 스타일. 원 역사의 선조와 비교해서도 여러모로 왕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이 뒤떨어져 주인공이 빙의하지 않았으면 최악의 암군으로 기록되었을 인물이다.[41]

원래 경성군의 영혼은 본래의 경성군이 저지른 악행과 적폐들이 표면상으로 드러나고 터지기 전 주인공이 빙의하면서 그가 본격적으로 죄를 짓기도 전에 죽은 것이 되어 극락으로 보내졌다는 것이 천녀를 통해 밝혀졌다. 재위 초기 15년간의 경성군과 그 이후의 성향, 개인적 품행 등이 너무나 다르기에 후대 역사학자들에게 미스터리로 남을 듯하다.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어 방향을 바꿨다거나 원래 이중인격자였다거나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듯. 3부에서 나오기로는 황실 내에서도 '무종대왕께서 장조대제에게 빙의했다.'라는 전설이 전해진다고 하니 주류 학계에서 인정받지는 못하겠지만 서프라이즈에 단골 소재로 무종 빙의설 같은 것이 자주 언급될 듯.

1, 3부의 이융과 성친왕이 당대 기준으로 키도 크고 외모 하나는 준수했던 반면, 경성군은 키도 작고 외모도 볼품없었다고 한다.

후대에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왕이 될 것이다. 북로남왜라는 한반도의 고질적인 병폐를 뿌리 뽑고, 외교관계의 세계적 확장과 경제력의 성장, 학문과 사상을 다양화시키고 국난을 훌륭하게 극복하여 자국의 군사력을 당대 세계 최강급으로 끌어올렸고,[42] 최후까지도 아픈 몸을 이끌고 몸소 한겨울 칼바람을 맞아가며 기우제를 지내 비를 내리게 하고 죽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후세에는 '광개토대왕, 세종대왕과 함께 한민족 3대 성군'으로 뽑힐 만한 업적을 남겼다.[43]

첫 15년의 무능도 초장왕과 마찬가지로 장조의 큰그림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다. 애시당초 묘호도 초장왕의 시호에서 따왔고, 결국 장조의 각성과 위업은 북방전쟁에서 첫승리와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북방의 빠른 안정화를 위한 여진족 정리와 왕권강화 및 군사력 강화와 총신의 승진을 위한 당위성을 획득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전쟁이 벌어지도록 계획했다고 여겨질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딸 둘을 각각 청나라의 황후와 후금의 대복진으로 만들기까지 했으니 16세기와 17세기 대아주의 판도를 계획하고 실현시킨 지략가로 묘사될 가능성도 있다.

저승의 상황을 다룬 3부 외전에 묘사된 것을 보면 진짜 그의 영혼은 원래 아내였던 의인황후 김씨가 죽어 저승에서 만나자 처음에는 '이 노파는 누구냐?' 하고 짜증을 내고, 나중에는 '다른 남자랑 어울린 화냥년'이라고 욕설을 퍼붓는 등 죽은 후에도 더러운 성격은 여전하다. 그러나 정작 본인도 이융의 영혼과 마찬가지로 태조 이성계에게 잡귀에게 몸 뺏기고 왕노릇도 못한 한심한 놈이라고 폭언과 구박을 듣고 신하, 가족, 조상에게 삼중으로 임금 대접을 못 받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이융과 달리 15년동안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해봤다는 하찮은 우월감을 느끼고 있으며, 몸을 뺏어간 재석에게 분노하면서도 장조의 이름으로 올라오는 공물은 또 잘 챙겨먹고 있다.


7. 2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명군이 되어보세!/등장인물/2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2, 3부 사이[편집]


  • 의성왕대비 김씨 (의인왕후 → 의인황후) (생몰년도: 1554~1619) (조선 왕비 1567~1608) (조선 왕대비 1608~1619)
아들의 재위를 보며 평화롭게 살다가 만 65세에 자연사한다. 시대를 생각하면 꽤나 장수했다. 가장 오래 재위한 남편을 따라 장장 41년이나 중전으로 재위했으며 이후 아들의 치세 11년 동안 왕대비로 재위한다. 사후 의인왕후의 시호를 받았고 후일 장손 선조가 칭제건원하면서 황후로 추존되었다.
3부에서 저승의 상황을 다룬 외전에 따르면 저승에 오자마자 사랑하던 남편을 찾았으나 저승에서 만난 경성군의 영혼이 재석이 아니라 성질 고약한 원래 경성군임을 알고 크게 상심했으며, 재석이 임종 때 한 말이 사실이었음을 그제야 깨닫는다. 같은 처지인 무종 비 성렬대비 신씨와 자주 만나 서로를 위로하면서 진짜 재석의 영혼을 찾고 있다.[44]

광해군은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고 한다. 말년에 루벤스에게 의뢰하여 도포를 입은 모습을 초상화로 남겼고 이 그림이 한복 입은 남자가 된다.[45] 죽을 때까지 유럽에서 살았으며 사망한 후 로마에 묻혔다. 대한에서는 여전히 광해군의 출가를 나쁘게 보고 있으며 법왕 바로 아래의 추기경이 되었음에도 그래봤자 교회 벼슬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보고 있다.


대한 황실 1대조
경조 | 景祖


조선 제14대 국왕
경종 | 景宗

경종□□□□□□□□□효대왕
景宗□□□□□□□□□孝大王

경조□□□□□□□효태황
景祖□□□□□□□孝太皇

묘호
경종(景宗) → 경조(景祖)
시호
조선
□□□□□□□효대왕
(□□□□□□□孝大王)
대한
□□□□□□□효태황
(□□□□□□□孝太皇)

□□(□□)[B]
출생
1572년
조선 한성부 경복궁 교태전
즉위
1608년 12월 22일 (음력 11월 16일)
조선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사망
1626년
조선 한성부 경복궁 강녕전[D]
능묘
□릉(□陵)
재위
조선 왕세자
??[46] ~ 1608년 12월 22일
(음력 ?? ~ 1608년 11월 16일)
조선 국왕 대리청정
1588년, 1590년, 1608년
조선 국왕
1608년 12월 22일 ~ 1626년
(음력 1608년 11월 16일 ~ 16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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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全州)

성(𤁑)
전호
□□전(□□殿)
부모
부황 장조, 모후 의인황후
부인
인열황후 김씨(仁烈皇后 金氏),[1] 소훈 박씨 등

  • 경종 → 경조 이성[47]
세자였던 이성은 외전에서 즉위 후 싫은 소리라도 일단 참고 듣던 부왕과 달리 거슬리는 소리를 하면 삼족을 멸할 기세를 뿜어낸다는 세간의 평을 받았다. 건주가 밀약을 안 지킨다면 부왕의 유지와 달리 산동을 차지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던 것과 달리 평화로운 시기에 무난하게 재위하다가 1626년 54세로 사망했다. 7년 주기 견서사 파견을 유지하고 증기기관 사용을 철저히 비밀로 하는 등 전반적으로 장조의 유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정책을 유지하며, 장조 대에 확장된 영토들의 내실을 다지고 행정권력과 사법권력의 분리조치를 더 체계화하여 전문 법률가인 율관과 대송인 제도를 창설하고, 노비 소유주에게 노비세를 물리는 등 작지만 의미있는 개혁 조치들을 지속했다.
그렇지만 혼자서 영토를 2배 가까이 뻥튀기한 장조, 칭제건원을 한 선조에 비해 화끈한 업적은 없어서 후대에는 일반인들에겐 명군 아버지와 명군 아들 사이의 범군으로 여겨지고, 역사학자들에게는 높은 평가를 받는 군주가 될 가능성이 높다.[48] 특이한 점은, 학질의 원인에 대한 논란에 관심을 갖고 죄수들로 실험을 해서 모기가 원인임을 밝혀냈다는 것이다.
양응룡의 난 때 진안군이 사기당해 사온 가짜 장팔사모와 짝을 맞추기 위해 성절사를 통해 가짜 청룡언월도를 구해서 탕춘대성에 장팔사모와 함께 잘 걸어놓는다. 그 후 4부에서 김좌근이 청나라에서 사기를 당해 쌍고검을 사오면서 삼국지 세트가 완성된다.

  • 진안군 → 진왕 이욱
조용히 책을 쓰다 1652년 67세로 사망. 경조의 동생들 중 유일하게 선조의 칭제건원 시점까지 살았고 칭제건원 후 군왕에 봉해져 진왕이 된다.[49] 평생 집필한 소설이 40권이나 된다고 한다.[50]
못생긴 정실 부인은 한양 본가에 내버려두고 중국인 첩과 함께 지방 별장들을 떠돌아 어머니 상빈이 일부러 정실부인을 더 챙겨주었다고 한다. 중국인 첩 외에도 첩을 여럿 두었고 서자도 많이 낳았는데, 어찌나 많이 들였는지 어머니인 상빈도 첩의 숫자를 모를 정도. 하지만 재산은 유일한 적자인 성도공 이창에게만 물려주었다고 한다.
  • 군부인 → 진왕비 심씨
진안군(진왕)의 정실부인. 청송 심씨 심영권의 딸. 못생겨서 사실상 소박을 맞은거나 다름없었다. 남편은 정월과 제사지내는 달에만 돌아오고 다른 달은 중국인 첩을 끼고 밖으로 싸돌아다녀서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어머니 눈치를 본 진안군이 본가에 있을 때에는 부부관계를 가져서 외동아들이자 유일한 적자 성도공 이창을 낳는다.
  • 성도공 이창
진왕 이욱이 정실에게서 낳은 적자. 정실 부인을 내팽개치고 거들떠도 보지 않던 진왕이었지만 반대로 자식들 중에는 정실 소생의 이창을 가장 총애했으며, 재산도 모두 이창에게만 물려주고 서자들은 키워만 주었다. 정실에 대한 애정 여부와 별개로 가문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사고방식 때문이었던 듯.

1621년에 76세로 사망했다. 당연히 사망 직후 무묘에 배향되었고 1632년 선조가 칭제건원한 직후 충무대왕에 봉해져 이 세계에선 김유신에 이어 2번째로 신하에서 왕으로 추존되었다. 또한 장남 이회의 손녀가 열조의 황후가 되는 등 신하로써 최고의 영광을 받았다. 이순신 가문은 현재도 대한 최고의 무가라고 한다. 왜란에서의 엄청난 활약으로 일본에서 해신으로 추양될 정도로 이순신의 위상은 동시대의 무인들을 뛰어넘을 정도라고 한다. 3부의 언급을 보면 원 역사처럼 난중일기도 남겼다.

6차 견서사의 정사. 1625년 대유주에 도착한다.[51]

미주에서 저지른 학살에 대한 문책으로 북방에 처박혔다가 도적을 상대로 공을 세워 복권되고 경조의 눈에 들어 6차 견서사에 발탁되었다. 당시 진행중이던 유주대란에 관전무관으로 부하 3명[52]과 함께 참전 없이 참관만 한 뒤 8년 후 귀국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실은 북독일에서 신나게 약탈을 벌여 한 탕 챙기고 왔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진다. 그러나 귀국 후에는 유럽에서 배워온 군사기술을 충실하게 전수하고, 김자점과 함께 요동을 대한령으로 편입하는 임무를 잘 해내어 명주백 봉작을 받았다. 현실역사를 반영해서인지 미주와 유럽에서는 군관이라기 보다는 도적 같은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조국을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아넣은 반역자가 되기는 커녕 나라에 공을 세우고 봉작까지 받았으니 대체역사의 수혜자.

장조 사후 조선의 2세대 장수로써 도원수까지 올라 유럽에서 배운 전술을 전파하여 조선군을 발전시켰다.

을미동정 후에도 계속 일본 우에스기령에 남아 제자들을 양성해 일본 성리학의 시조가 되었으며 일본 땅에 죽은 후 유골만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순신과 유이한 신으로 추양받는 조선인이 되는 대체역사의 수혜자가 되었다.

  • 롤리타 히메네스 (1577?~?)
조선에 온 유럽인들 중 가장 신분이 높은 사람이 되었다. 원래부터 카디스의 백작 영애였고 이덕형의 아내로 장조 시절 백작부인급 정3품 숙부인을 받았고, 경조 때 종2품 정부인으로 올랐다. 마지막 건원제 시기에는 정2품으로 올랐다. 이덕형이 한원부원군 작위를 받았고, 본처 이산해의 딸 정경부인 이씨가 공작부인으로 취급받았던 걸 보면 바로 아래 단계인 정부인이면 후작부인 정도는 되는 지위를 가진 셈이다.
  • 이여수
이덕형과 롤리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선조 대에 문관으로 조정에서 많은 공로를 세워 유주후에 봉해지고 새로 유주 이씨라는 본을 창설해 시조가 되었다. 같은 스페인계인 2부에서 조선에 정착한 스페인 군사고문 로드리고의 딸과 결혼했다. 2부에서 장조가 상상만 했던 백인계 명문가가 실제로 이뤄진 셈이다. 스페인계이지만 대한의 사대부인지라 천주교는 믿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 제15대 국왕
선조 | 宣祖


대한 초대 태황
선조 건원제 | 宣祖 建元帝

선조□□□□□□□□□□□□□□□효태황
宣祖□□□□□□□□□□□□□□□孝太皇

묘호
선조(宣祖)
존호
□□□□□□□□(□□□□□□□□)
시호
□□□□□□□효태황
(□□□□□□□孝太皇)
출생
1595년
조선 한성부 경복궁 자선당
즉위
1626년
조선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D]
사망
1650년
대한 한성부 경복궁 강녕전[D]
능묘
□릉(□陵)
절일
□□절(□□節)
재위
조선 왕세손
??[53] ~ 1608년
(음력 ?? ~ 1608년 11월 16일)
조선 왕세자
1608년 ~ 1626년
(음력 1608년 11월 17일 ~ 1626년)
조선 국왕
1626년 ~ 1632년
대한 태황
1632년 ~ 1650년
연호
건원(建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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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全州)

연(瑌)
전호
□□전(□□殿)
부모
부황 경조, 모후 김씨
부인
정후, 계후, 원빈 등

  • 선조 건원제 이연
원손이었던 이연은 명이 망해가는 시절에 즉위하여 경조의 사망과 가뭄을 핑계로 명을 돕기 위해 출병하지 않았고 명이 망하도록 방치했다. 그리고 명이 멸망한 후 1632년 국명을 '대한(大韓)'으로, 황제의 칭호는 태황으로 칭제건원했다. 처음 제정한 연호는 건원(建元).[54]
내달인 후궁 원빈을 들였으나 사이에서 자식을 보지는 않았다고 한다. 쓸 수 있는 기술이라면 뭐든지 써서 돈을 벌어들여 백성들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애민정신을 바탕으로 증기기관 사용을 활성화하고 수출주도형 경제를 만들고 노비제를 축소하는 등 대한의 경제를 크게 발전시킨 업적이 있다.
옥좌에 흑백곰 가죽을 깔고 앉았다고 한다. 1650년 55세로 사망했다. 작중 이재석이 빙의하지 않은 왕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그 행보 또한 꽤나 파격적이다.[55]
명을 구하지 않았고, 노비제를 유명무실한 수준으로 축소시켰고, 견서사 파견을 중단하고 증기기관 비밀유지 원칙을 깨고, 노산군을 단종으로 복권시켰으며, 무종이 배향한 박지, 안우, 김득배, 이방실을 무묘에서 제외하고 박위, 이지란,[56] 배극렴, 최무선을 배향했다. 태자비도 세종대왕께서 남기신 국시로 인한 불문율을 깨고 본관은 다르지만 같은 이씨인 이순신의 증손녀를 간택했다.[57]
두 명의 중전에게서 3명의 적자를 보았으나, 정비 소생 장남과 차남은 요절하고 칭제 직후 첫 황후가 요절하면서 들인 계후에게 3남 연가제 이전을 얻었다.
사후 저승세계를 다룬 외전에서 자신의 조부였던 장조가 자기 손자에게 빙의했단 사실을 알고 많이 당혹스러워한다.
  • 태황태후
건원제의 계후. 작중에선 이미 고인으로, 3부 20화의 언급으로 보아 1682년 시점에서 10여년 전인 1670년대 초반에 붕어한 것으로 보인다.
  • 원빈
선조가 들였던 내달인 후궁. 낳은 자식은 없다. 원빈을 위해 궁궐 내 최초의 내달식 주택인 양화당이 지어진다.

명이 멸망한 후 주씨 황족들이 몰살당하는 와중에 혼자 살아남아 조선으로 탈출하여 대구에 살던 명 유민(2부에서 유정과 진양옥 휘하 명나라 패잔병들의 후손) 5천호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 조선이 대한으로 칭제건원한 후 대명공이라는 봉작을 받고 직접 목수 일을 해가며 대명묘를 짓는다. 명 유민 5천 호를 식읍으로 받았으며, 3부 시점에서 그 후손이 3대 대명공으로 재위하고 있다. 원역사에서 목수 일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 분수에 안 맞는 황제에 올라 암군이 되었던 것과 달리 적성에 맞는 목수 일을 원없이 하게 되었고 후손들도 잘 살게 된 대체역사의 수혜자.

명이 멸망하고 건주가 입관하는 혼란기에 요동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하는 어려운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이후 의주후 작위를 받았다. 원역사의 김자점이 유능했음에도 권력욕에 집착하다가 몰락한 것과 달리 제 능력을 잘 펼쳐서 사후에도 명신으로 평가받았으며 손자인 김세룡은 내각승상이 되는 등 가문도 번창[58]한다.

선조 대에 호부대신, 열조 대에는 좌승상을 지냈다고 한다.

장조 때 벼슬길에 올랐으며, 이 세계관에서는 병자호란은 커녕 대한이 건주와 혈맹을 맺고 형님 나라로 군림하고 있어 실제 역사보다 훨씬 순탄하게 관직 생활을 했고 더 오래 살았으며 명신으로 칭송받았다, 숙조 건복제까지 다섯 임금을 모시고 1660년 75세로 사망했으며 문충후 작위를 받았다.

이괄의 부하로 유럽에 따라가 8년동안 30년 전쟁을 겪고 귀국하여 정충신의 휘하로 들어갔으나, 명나라가 멸망할 때 천조의 은혜를 갚겠다며 몇몇 사대부들과 함께 의용군을 조직하여 청나라 다이샨 군과 합류하여 고영상 반군과 싸웠으나 명나라 재건의 꿈이 무너지자 3년만에 귀국한다. 사전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조정의 중론에도 불구하고 김자점과 심기원이 변호하고 선조 건원제가 용서하여 처벌은 면했지만 한직을 떠돌다 사망했다. 하지만 유생들 사이에서는 의사(義士)로 추앙받았으며, 150년 후 태황인 영종이 충민공이라는 시호와 사당을 내려주어 명예 회복도 이뤄진다.

  • 정영훈
정준석의 장남.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2대 대남도 대중성주가 되었다. 선조 이연이 대남도의 호족으로 위세가 지나치게 강력해진 정준석을 견제하기 위해 대중성주 직책을 회수하자 재산과 토지는 보장해 준다 하기에 순순히 받아들이고 권세가 정도로 남기로 한다. 동생 정종훈이 이에 반발해서 자기 세력을 이끌고 뛰쳐나가 이름을 정지룡으로 바꾸고 동남아를 휩쓰는 해적왕이 되었지만 정씨 가문이 대남도에 가진 세력이 워낙 커서 연좌제를 걸면 반란이 일어날까봐 조정에서 처벌하지 않아, 정씨가는 여전히 대남도의 대 토호 가문으로 남아있다.


조선 제16대 국왕


대한 제2대 태황
열조 연가제 | 烈祖 延嘉帝

열조□□□□□□□효태황
烈祖□□□□□□□孝太皇

묘호
열조(烈祖)
시호
□□□□□□□효태황
(□□□□□□□孝太皇)
출생
1634년
대한 한성부 경복궁 교태전[D]
즉위
1650년
대한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D]
사망
1678년
대한 한성부 경복궁 강녕전[D]
능묘
정릉(□陵)
절일
□□절(□□節)
재위
대한 황태자
?? ~ 1650년
대한 태황
1650년 ~ 1678년
연호
연가(延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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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壥)
전호
□□전(□□殿)
부모
부황 선조, 모후
부인
진성황후, 혜비 진씨 등

  • 열조 연가제 이전
3부의 건복제 태황과 성친왕 이현의 아버지로 연호는 연가(延嘉).[59] 1634년생, 선조 이연의 삼남. 선조 때부터 북변을 침범하던 루스국에 7차 견서사를 보내 바이칼 호레나 강으로 양국의 국경을 확정지었다고 한다. 재위했던 28년간 40만명이 아사한 경신대기근을 포함하여 거의 내내 지속된 가뭄과만 싸우다가 1678년 44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경신대기근을 이겨낸 공으로 열조 묘호를 받았다. 연호는 연가. 황후는 이순신의 증손녀다. 선조가 쓰던 흑백곰 가죽은 낡았고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창고로 보냈다. 건물의 다층화에 찬성하며 '3층으로 집을 지으면, 토지가 3배로 넓어지는 셈'이라는 말을 남겼다. 본인은 부황의 하나뿐인 적자였는데 그 자신은 황후 이씨에게서 4명의 적자를 얻었다. 태자를 두 번이나 새로 봉했다는 언급을 보면 장남과 차남 둘 다 태자가 된 후 요절한 듯하고 3남이 건복제 이윤, 4남이 성친왕 이현이다. 사후세계를 다룬 외전에서 자신이 자식들을 잘못 키워 서자인 예왕은 권력을 탐하다가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고, 막내아들 성친왕은 여전히 죽어서까지 망나니고, 그런 동생들 때문에 후계자인 숙조를 고통받게 만들었다며 자책하고 있다.

  • 김인황
세계 최초의 미생물 발견자. 인천에서 의원을 하던 인물로 원래 천리경으로 멀리 있는 배를 보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가 스스로 광학과 렌즈 제작술을 배워(갈릴레이의 책까지 구해서 배웠다고 한다.) 1656년 내달국제 유리로 세치경(현미경)을 발명하여 적혈구 관찰에 성공한다. 이후 1663년 건강한 사람과 달리 역리 환자의 변에서만 병균(시겔라)이 발견된다는 것과 이 균을 먹으면 역리에 걸린다는 것을 발견하여 병균의 존재를 입증한다. 그러나 모든 병에서 균이 발견되지는 않기에 병균학에 반대하는 의원들도 있다. 하지만 병균 논쟁을 통해 최초의 학술정기간행물인 대한의보가 창간되어 대한의 의학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등 무척이나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60]

  • 김의진
열조 시기의 의원. 골초 흡연자 6명과 담배를 피워본 적 없는 사람 6명의 시신을 부검해본 뒤 흡연자들의 폐가 검은 것을 발견하고 담배가 폐에 좋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담뱃진이 병균을 죽이는 효과가 있어 병균학 지지자들은 약제로 사용했는데, 그런 담배 자체가 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병균학 반대자들의 주요 근거 중 하나가 된다.

명의 14대 황제. 2부 외전 시점에 주상락이 의문사한 후[61] 만력제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올라 만력제와 똑같은 암군의 행보를 이어간다. 원역사에서 형 주상락의 연호였던 태창제를 여기서는 주상순이 썼다. 고영상의 반란군이 모문룡을 통해 뇌물을 바치려 하자 웅정필이 모문룡을 처형했고 고영상의 뇌물을 탐내던 중에 뇌물을 받을 길이 막혔다고 웅정필을 냅다 처형해버린다. 그 결과로 명군이 붕괴하였고 주상순은 조선으로 탈출하려다가 고영상에게 붙잡힌다. [62] 잡힌 뒤 산 채로 살이 저며졌고, 부황 만력제의 무덤인 장제전을 땔감 삼아 고깃국이 되어 반란군들에게 먹혀죽으면서 명은 멸망한다. 이때가 1630년. 묘호인 '영종'도 시법에서 암군들에게 주는 영(靈)자를 써서 영종이다. 어느 세계에서나 잡아먹히는 황제..

명말에 산해관 수비대장으로 있었는데, 태창제가 고영상에게 살해당하며 명이 멸망하고 건주군이 남하할 때는 반란 진압 때문에 수비군도 약체화되었고 근황을 명분으로 내세운 건주에 저항할 이유도 없어서 귀순한다. 이후 건주의 신하가 되어 명군 패잔병들을 건주로 흡수하고 건주가 화북을 장악하도록 도왔으니, 원역사와 180도 다르게 오삼계 포지션이 되어버렸다. 명을 지키지 못한 자괴감에 일찍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인 광동은 다른 나라가 되어버려서 못 가고 산동에서 은거했다고 한다.

명나라가 원역사보다 훨씬 빨리 무너져서인지 산해관 수비대장이었던 원숭환 밑의 하급 군관으로 있었다. 한군팔기에 편입되어서 건주의 입관 과정에서 막대한 전공을 세우고 그 대가로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 원역사보다 후손들이 훨씬 잘 풀렸다.

농민반군 지도자 고영상에게서 태창제에게 바치겠다는 뇌물을 받아 태창제에게 상납하는데, 웅정필이 이를 알고 적과 내통했다며 처형한다.

망해가던 명의 마지막 희망으로, 섬서성의 농민반란을 진압하고 지도자 왕가윤을 붙잡아 처형한다. 그리고 모문룡이 왕가윤의 후계자 고영상에게 뇌물을 받는 것을 알고 모문룡을 처형한다. 그러나 태창제는 고영상의 뇌물을 모문룡을 통해 상납받고 있었고 나라의 운명보다 뇌물이 더 탐났던 태창제에게 처형당해 원역사보다 훨씬 어이없는 최후를 맞는다. 웅정필이 사망하자 그나마 남아있던 명군은 붕괴하고 명은 순식간에 멸망한다.

명이 멸망한 후 강남에 건국된 후송의 초대 황제[63]로 연호는 천개(天開). 생몰년도는 1589~1668, 재위기간은 1633~1668. 본인은 송 공종의 후손이라 주장한다.[64][65] 젊을 적에는 소금장수[66] 일을 했다. 건주군이 화북에서 고영상 계열 반군들을 토벌하는 사이 강남의 농민반군 세력을 모두 규합하여 후송을 건국한다. 3면에 적국을 두고 여러차례 패전했지만 기적적으로 세력을 회복해 후송을 반석 위에 다져놓고 80세인 1668년 사망한다. 송의 후계임을 주장하면서도 이미 조광윤의 묘호로 사용된 태조(太祖)를 다시 사용했는데, 이를 해명하는 명분으로 북위에서 이미 같은 묘호를 중복해서 사용한 적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내세웠다. 하지만 대한 측에서는 조승복이 무식한 소금장수 출신이라서 그런다고 비난한다.[67] 70명이 넘는 비빈을 두었고 아들만 해도 30명이 넘었다. 조승복은 적자, 서자 관계없이 아들들을 13세만 되면 최전선에 나가 싸우도록 했고 많은 아들들이 전사했으며 일부는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암투 과정에서 서로를 암살하기도 한다.
  • 조인걸
조승복의 적장자로 건주와의 전투 중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 조인승
조승복의 적차자으로 동정호에서 수전 중 익사한다.

  • 후송 정종 홍광제 조인선
조승복의 적삼자, 후송의 2대 황제로 연호는 홍광(弘光).[68] 재위 기간은 1668~1680. 형제들이 줄줄이 전사하는 와중에 살아남아 전공을 많이 세웠고 이로 인해 군 내 기반도 확실했으며, 암살 시도도 있었으나 막아내고 역관광을 한다. 살아남은 황자 중 혈통과 실력 모두에서 가장 뛰어났기에 자연스럽게 조승복의 후계자가 되었다. 조승복과 달리 형제와 자식들을 전선으로 내모는 대신 학문에 정진하도록 한다. 후송 건국 후 시간이 지나며 황자들까지 전선에 내보낼 필요는 없을만큼 나라가 안정되었고, 오히려 황족들이 군공을 세우며 군 내 기반을 다져 반란을 일으킬 위험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30명의 비빈과 13~14명의 아들을 두었다.

  • 후송 영종(榮宗)[69] 융무제 조광훈
후송의 3대 황제로 연호는 융무(隆武).[70] 재위 기간은 1680~1684. 조인선이 태자가 되기 전 시골 향신의 딸에게서 얻은 서장자. 조인선의 적자 두 명은 열병에 걸려 하나는 죽고 하나는 천치가 되었으며 남은 황자들 중 조광훈의 학업 성적이 가장 뛰어났기에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 10여명의 비빈을 두었고 아들딸 합쳐 8명의 자식이 있었다. 즉위한지 4년만에 31세 나이로 총애하던 후궁 장씨와 관계 중 복상사한다.

명의 충신으로 명말 혼란기에 반군으로부터 복건을 지켜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위치가 멀어 태창제가 고영상에게 살해당하고 명이 멸망할 때는 손쓰지 못한다. 백성들에 의해 주씨 황족이 대부분 몰살당했고 조승복군의 세력이 너무 강했기에 어쩔 수 없이 조승복의 휘하로 들어간다. 이후 청과 서를 상대로 큰 공을 세워서 세습 가능한 위국[71]에 봉해진다. 이후로 홍씨 가문은 후송 제일의 무가이다.

  • 사가법
조승복에게 투항하며 양주도통부 세습을 인정받는다.

  • 고영상[72]
섬서에서 일어난 왕가윤의 농민반군 장수였다가 왕가윤이 웅정필에게 처형당하자 그 세력을 물려받는다. 모문룡을 통해 태창제에게 뇌물을 바치려 하는 이간계가 대성공하여 웅정필이 태창제에게 처형당하며 명군이 와해되었고 이 틈을 타 부장 장헌충, 이자성과 함께 북경을 함락시킨다. 이후 만력제의 무덤을 파헤쳐 도굴하고, 조선으로 도망치려던 태창제 주상순을 잡아 산채로 살을 발라내 고깃국으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나눠준다.[73] 그러나 근황을 명분으로 건주군이 내려오자 평원에서 결전을 벌여[74] 패배하자 자결했고 고영상의 세력은 장헌충과 이자성이 물려받는다. 건주군을 격파한 후 칭제할 생각이었기에 자금성을 불태우지 않았다.

서의 초대 황제로 연호는 대순(大順).[75] 생몰년도는 1606~1656, 재위기간은 1635~1656. 농민반군 지도자 고영상의 부장으로 고영상과 함께 북경을 함락해 명을 멸망시킨다. 이후 고영상이 건주군에게 토벌당해 자결하자 다른 부장 이자성과 함께 세력을 나눠서 물려받고 파촉으로 가서 1635년 서나라를 건국한다. 원역사와 달리 궁지에 몰려 살인마가 되지 않았고 정상적인 황제 노릇을 했다. 강남일통과 강남일통을 기반으로 한 중원일통을 꿈꾸며 후송과 여러 차례 싸웠으며, 1656년 친정에 나서 동정호 전투에서 대승했으나 그 직후 급병으로 사망한다. 50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라서 후계 구도를 준비해두지 않았고 때문에 장헌충의 4황자 장형운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태조라는 묘호를 받은 것을 보면 작중의 장헌충은 현실에서와 다르게 장아자를 서 태조로 추존하지 않은 듯 하다.

고영상의 부장으로 고영상이 자결한 뒤 그 잔당 세력을 장헌충과 나눠받고 강남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강남을 장악한 조승복과 결전을 벌였으나 패배해 사망한다.

오이라트와 협력하여 할하부를 공격하여 무너뜨린다. 그리고 할하부가 무너진 직후에 오이라트와 싸움을 벌이지는 않는데, 그 이유가 64세의 나이로 누르하치가 사망했기 때문. 생전에 흡연을 즐겼고 구토와 객혈이 동반되었다는 말로 볼 때 폐암으로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원역사보다 1년 덜 살고 죽었으니 수명이 크게 줄어든 것은 아니다. 손자 요토와 호오거가 각각 칭제를 하면서 청과 후금 모두에서 초대 황제/대칸 태조로 추존했다.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건주국왕이 되며 연호는 천명(天命).[76] 명나라가 반란군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명나라의 원군 요청을 무시하고 고영상이 태창제를 살해하고 명을 멸망시킨 뒤에야 근황을 명분으로 화북의 고영상 반군을 공격하여 2년에 걸쳐 화북을 장악한다. 그 뒤 여력이 없어 강남의 후송과 서는 토벌하지 않았다. 화북 장악 과정에서 저항하는 4개 도시의 거주민 2백만명을 학살한다.[77] 1635년 대한에게 2부에서의 밀약대로 요동을 할양했고 건주를 분할하여 홍타이지에게 몽골 지역을 넘긴다. 아들 요토가 칭제한 후 청 2대 황제 태종으로 추존된다.
여담이지만 아무리 건주의 인구가 적어서 화북을 지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지만, 그가 만든 청나라는 실제나 작중 역사에서나 오래 가지 못한 원나라와 비슷한 국가가 된 것을 보면, 2부에서 다이샨은 조선에 있는 동안 조선의 군사와 군략에 대한 것은 많이 배웠지만, 그 외의 것에서는 별로 배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78]

청의 3대 황제로 연호는 숭덕(崇德).[79] 다이샨과 희정옹주 사이의 아들. 다이샨 사후 화북을 물려받고 1648년 국호를 청으로 하여 칭제한다. 치세 내내 중원일통을 위해 후송, 서와 피터지게 싸웠다. 1663년 사망했고 그 뒤 청은 요토 시절의 확장 정책을 중단한다.
인권을 존중하는 현대인의 감성을 여전히 간직한 상희의 손자임에도, 사촌인 대한의 건원제가 뛰어난 업적을 많이 이뤘고, 유럽 선교사들에게 교육받은 영향으로 노비들에 대해서도 전향적인 정책을 펼친 것으로 추정되는 것과 다르게, 청나라의 한족 억압 정책을 그대로 계승했고 남정을 지속하기 위해 백성들을 쥐어짠게 이채롭다.

  • 청 정종 만방제 애신각라 낙명(愛新覺羅 落明)
청의 4대 황제로 연호는 만방(滿邦). 요토의 장남으로 재위한지 8년만에 사망하여 아들 나락혼이 제위를 물려받는다. 전쟁으로 인해 소모된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내실을 다지는 정책을 세웠고 아들 나락혼이 23년간 재위하며 그 정책을 이어받아 청을 안정시켰다.

  • 정헌친왕 애신각라 제이합랑(愛新覺羅 濟爾哈朗, 아이신기오로 지르갈랑)
슈르하치의 6남으로 전공이 커 세습 가능한 철모자왕 정헌친왕에 봉해지고 정람기 기주 작위까지 받았다.

다이샨과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지 않고 건주과 입관할 때까지는 기다린 듯 하다. 명이 멸망하고 건주가 화북과 몽골을 모두 장악한 후 형 다이샨에게 몽골을 분봉받아 몽골의 칸으로 통치한다.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공식적으론 희연옹주 외의 첩은 없었지만 비공식적 정부와 사생아는 여럿 두었다고 하며, 2부의 냉혹해 보이는 인상과 다르게 아내인 희연옹주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척도 하는 애처가였다고 한다. 아들 호오거가 대칸이 된 후 후금 2대 대칸 성종으로 추존되었으며 연호는 천총(天聰).[80] 작중 '성종'이라는 묘호의 한자 표기는 나온 적이 없지만 시법상 成 또는 聖 둘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중에서도 시법상 더 높은 묘호인 聖자일 확률이 일단 높은것으로 보인다. 시법의 등급상 태(太)에 버금가는 한자가 바로 聖이기 때문. 그러나 4부 댓글을 통해 成종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고, 聖종은 후손 부수가 받았다.

  • 후금 무종 명창제 애신각라 호격(愛新覺羅 豪格, 아이신기오로 호오거)
후금의 3대 대칸으로 연호는 명창(明昌).[81] 홍타이지와 희연옹주 사이의 아들. 홍타이지 사후 몽골 지역을 물려받고 1648년 국호를 후금으로 하여 대칸을 칭한다.

  • 후금 현종 천권제 애신각라 석새
후금의 4대 대칸으로 연호는 천권(天眷).[82] 대복진은 경효의황후 패아지근씨(敬孝義皇后 孛兒只斤氏)로 첫번째로 몽골 보르지긴 출신 황후를 들였다. 호오거의 아들로 육촌인 청 황제 낙명과 서로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는 혼인동맹을 맺었다. 아들 일곱을 두었으나 둘은 병사, 하나는 사고사했고 대패륵에 봉한 아들을 그 바로 아랫동생이 암살하고 처형당하여 아들 둘만 남았다.

원 역사와 같은 건주의 명장으로, 화북 정복 때 활약하다가 작은 형 황태극이 몽골을 분봉받을 때 따라가 활약, 세습친왕이 된다.

  • 희정옹주 이혜원, 희연옹주 이혜연
1632년 조카의 칭제건원 시점까지 생존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현대인의 감수성을 강하게 갖고 있던 부모와 다르게 청과 후금의 첫 황후인 딸들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희정옹주의 아들은 입관 후 한족에 대한 철저한 차별 정책과 후송 정벌의 유지를 그대로 받들었으며, 희연옹주는 본인이 서녀였음에도 불구하고 후금 황실에서 적서차별을 철저하게 하게 만들었고 이는 창업군주가 만든 제도라 3부 시점이 되어서도 철통같이 유지되었다.

  • 도쿠가와 이에미츠[83]
도쿠가와 막부의 3대 정이대장군. 차차와 함께 형 도쿠가와 나가마루가 쫓겨나 승려가 된 후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후계자가 되었고 아버지의 뒤를 잇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친손자이자 노부나가의 외손자라는 최고의 정통성을 무기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1644년 대한이 불안한 중원 정세와 가뭄으로 개입할 여력이 없는 틈을 타서 진서대장군부를 압박해 귀부하게 하여 대한 직할령을 제외한 일본 전역을 통일한다. 이후 천주교도를 박해하여 대학살을 벌이고 천주교도 다이묘들의 영지를 뺏었으며 규슈의 개항장들을 폐쇄하고 오사카를 개항하여 유럽과 교역한다.

  • 도쿠가와 이에츠나
도쿠가와 막부 4대 정이대장군.

  • 아소 고레유키
진서대장군 아소 고레미츠의 아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일본국왕이자 진서대장군이 된다. 고레유키 사후 그의 아들이 진서대장군부를 스스로 폐위한다.

마포 대성당 공사 노역 중 벽돌이 쌓인 지게를 메고 올라가다 발을 헛디뎌 공사장에 떨어져 죽고 만다.

을미동정 이후로도 꾸준히 무역업에 힘을 쏟아 자체적으로 갈레온을 건조하여 해외 무역에 나선다. 다테 가문의 첫 갈레온이 대미주 조선 식민지에 나타났을때 조선인들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도쿠가와 막부의 눈치를 보느라 무역선 소유권은 막부에 바쳤지만 실질적인 운영은 다테 가문이 독점하고 있다.
  • 다테 타다무네
마사무네의 차남.
  • 다테 무네후사
타다무네의 8남.

  • 다테 쓰나무네
센다이번의 3대 번주. 고코묘천황, 고사이천황과 이종사촌.

  • 다테 쓰나무라
센다이번의 4대 번주. 쫒겨난 쓰나무네 대신 2살에 번주가 된다.

  • 도쿠가와 요리후사
초대 미토 번주.
  • 마쓰다이라 요시시게
요리후사의 장남. 초대 타카마쓰 번주.
  • 도쿠가와 미쓰쿠니
요리후사의 차남. 2대 미토 번주.
  • 도쿠가와 쓰나에다
미쓰쿠니의 양자, 3대 미토 번주. 친부는 마쓰다이라 요시시게.[84]

  • 상풍(尙豐)
유구국왕. 명나라가 멸망하고 칭제한 대한이 신속을 요구하자 사실상의 조공을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바치면서 시간끌기를 하여 명목상의 독립은 유지한다.

선조가 칭제건원을 하자 축하선물로 코끼리를 선물했다고 언급되었다.

  • 바셴카의 아버지
보로네시 지방의 보야르. 모스크바에 14살의 고명딸 바셴카를 데려갔다가 34살의 견서사 말단 서기 이형준이 바셴카와 동침 중인 것을 목격해버린다. 이형준에게 바셴카를 정처로 삼고 자식들을 세례하라고 요구했으나 이형준이 대답하지 않자 4대 두들겨 패고 쫓아낸다. 이후 1676년 사망한다.


8.1. 성친왕 이현(빙의 전)[편집]


주인공 이재석이 3부에서 빙의한 인물. 1665년생으로 3부 시작인 1682년 시점에 만 17세. 선황 열조 연가제의 적차자이자 숙조 건복제의 동복동생, 충무대왕 이순신의 외현손으로 '성친왕'이며 대유주에서는 대공으로 대우받고 있다. 3부 시작 시점에는 대한을 떠난 지 2년째로 15살 때 견서사 정사라는 명목으로 대한을 떠나서 서반아, 법왕청 등을 방문한 뒤 불랑국에 막 도착한 상태, 정확히는 도착 후 폴수국 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사생아 올렝카를 꼬셔서 동침한 직후였다.

처음에는 나잇값 못하는 철부지 황자 정도인 줄 알았으나, 3부가 진행되면서 드러난 바로는 양녕대군, 임해군의 재림이라 불릴 정도의 무개념 막장 황자였다.

성친왕이 만 17년의 인생동안 저지른 한심한 짓거리들은 아래와 같다.
  • 10살 때부터 궁궐 밖으로 나가 낄 곳 안 낄 곳 구분 못하고 난동을 부려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침.
  • 서자라 서열이 낮다고는 해도 엄연히 형이자 연장자인 3살, 12살 위의 이복형들에게 반말을 하며 막 대함.
  • 이형준, 정호찬을 비롯해 누구에게나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음.[85]
  • 공부와 어찌나 담을 쌓았는지 17살이나 되었는데 겨우 동몽선습을 떼었을 뿐 소학은 손도 대지 않았음. 오죽하면 스승들도 이형준 한 명만 빼고 모두 그를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86]
  • 사냥을 연습한답시고 황실 동물원인 응방에 활을 가져가서 전시 중이던 사슴과 여우들에게 화살 수십 발을 쏴서 고통스럽게 죽임[87]
  • 물 길으러 온 아낙네들이 머리에 인 항아리를 로 쏴서 깨뜨림. 그것도 한두 개도 아니고 십여 개나!(...) 성친왕의 활 솜씨가 그렇게 좋은 평을 듣지 못했던거 보면 이건 정말 천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88]
  • 견서사 추방 소식을 듣고 한달 내내 술독에만 절어 사느라 다른 날도 아니고 자기 혼인하는 날 초례청 앞에서 술에 꽐라가 된 채 추태를 부려 결혼식 분위기를 아주 제대로 망치고, 아내와 동침은 커녕 대화도 안하고 술만 퍼마심. 보다못한 형 건복제가 술독에 빠져죽으라고 폭언했다.. 성친왕이 후사도 못 남기고 출국한 것에 재석은 예왕이 수작을 부렸나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냥 성친왕이 멘탈붕괴했던 것이었다.
  • 다른 일행들은 대유주에 도착한 뒤 모두 편지를 보냈는데 반년 동안이나 가족에게 소식 한 장을 안 보냄.
  • 7살 때 2부에서 이항복이 바쳤던 3잔밖에 없는 베네치아 유리잔 하나를 깨버림.
  • 현왕의 서자들인 조카들(이라지만 나이는 큰 차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 명천후, 은산후 등을 서자의 서자라는 이유로 심하게 구박함. 결국 세 후작들은 성친왕(사실 이재석)이 귀국하자 두려움에 지방으로 도망가서 장장 20년 가까이 상경하지 않다가 겨우 돌아왔다.

그나마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살인, 강간은 안 했다고 한다만, 이따위 식으로 사는데도 모후 이씨가 오냐오냐하며 감싸고돌아서 연가제 시절에는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예전부터 성친왕의 만행에 분노해 단단히 벼르고 있던 형 건복제가 재위 2년 만에 형식적으로 강씨와 혼인만 시켜서[89] 견서사라는 명목으로 대유주로 영구 추방해버린다. 추방당한 뒤엔 실의에 빠져서 배 타고 가는 동안에는 술과 노름에만 빠져 지내며 소일하고, 유럽에 상륙한 뒤엔 처음 만난 처자와 동침한 뒤 보석 한 알 던져주고 모른척하는 난봉질까지 시작했다. 신분을 숨기고 유곽에 들르거나 숙소로 고급 창부를 들이는 것은 약과고, 귀족 딸이나 무려 일국의 왕의 딸(그나마 정식 왕녀는 아니고 사생아)을 건드리기에 이르는 판. 본인은 몰랐으나 그 과정에서 사생아 디에고가 태어났으며, 그 이상 알려지질 않아서 그렇지 정황상 사생아는 디에고 하나뿐만이 아닐 듯하다.

외모가 볼품없었던 2부의 경성군과 달리 키 175cm, 체중 72kg의 균형잡힌 몸에 얼굴도 잘생긴 편이다. 머리카락이 검은 것만 빼면 거의 유럽인처럼 생겼다고 하며 때문에 조선인 백인설을 낳거나 폴란드가 내세운 가짜 왕자라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덕분에 올렝카를 비롯한 유주 처자들을 꼬실 수 있었고 남색가인 오를레앙 공작의 묘한 시선을 받기도 한다.

1, 2부에서 재석에게 몸을 뺏긴 싸이코 살인마 암군 연산군, 원역사의 선조를 뛰어넘는 찌질이 유교 광신자 암군 경성군과 다르게 성친왕은 군주가 되진 않았지만, 태황이 되었으면 저 둘보다 못하지 않은 막장 암군이 되었을 듯 하다. 하지만 임금이 된 다음에 몸을 뺏겨서 재석의 빙의 덕에 조선을 말아먹는 일을 피한 저 둘과 달리, 성친왕은 재석이 빙의하지 않았으면 태황은커녕 귀국조차 못하고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왕이 심어둔 두 암살자가 성친왕을 죽이려 하고 있었으며 대유주에서 패악질을 계속 부리다가 외교적 문제를 일으켰다면[90] 참다 못한 건복제가 사약을 내릴 수도 있었다.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예왕의 바람대로 양매창에 걸렸다면 거세 크리를 맞고 이후 건복제의 후계자 경쟁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3부가 시작되며 재석이 빙의하고 개과천선한지 오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성친왕이던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받거나 성친왕의 만행에 피해를 본 이들에게 재석이 대신 사과를 하는 등 그 악명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성친왕의 예전 성품만 생각하던 예왕 일파가 오판했다가 자멸하는 등 정치적으로 이득이 되기도 한다. 재석이 태황에 즉위한 후에야 간신히 성친왕 시절 행적이 잊혀지는 듯 싶었으나, 성친왕이 싸질러둔 사생아 디에고가 대한 땅에 나타나며 다시 한 번 재석이 뒷목을 잡게 만든다. 그래도 디에고를 자식으로 인정한다고 선언하고 백작위를 주면서 좋게 끝나...나 했더니 유럽에 이 소식이 와전되어 디에고가 유리명왕 설화처럼 황태자가 됐다는 식의 헛소문이 퍼진 모양. 여기에 혹해서 사생아를 자칭하는 사기꾼도 찾아온다. 그나마 이 가짜를 잡아 처형한 덕분인지 대한 본토에 직접 오는 놈은 거의 없고 나타난다 해도 저 소식을 듣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내빼지만, 유럽 현지에서는 '자칭 기사왕의 사생아'들이 후원받은 뒤 잠적하는 사기 사건이 많다고 한다. 재석의 빙의로 3부가 시작하자마자 사라졌는데 잊을 만하면 과거의 만행이 튀어나와 재석의 발목을 잡는 것이 거의 3부의 메인 악당 수준이다.

사후세계에서는 최소한 몇 달이라도 임금 노릇을 해본 이융과 달리 아예 즉위하기도 전에 재석에게 몸을 탈취당했기에 조선 임금 모임에도 끼지 못하며, 여전히 개념이 없어 아버지에게 혼만 나고 있다. 독자들은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으니 지옥으로 갔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의외로 생전에 저지른 업보가 지옥에 떨어질 정도의 중죄는 아니라는 판결을 받아 용케 지옥행은 면했다.[91]

9. 3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명군이 되어보세!/등장인물/3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3, 4부 사이[편집]



10.1. 황태손 이진(李昣)[92] (빙의 전)[편집]


4부 재석이 빙의한 몸의 주인. 빙의 시작 당시 7세였다. 태자의 차남으로 태어났지만 형이 만 2살에 요절하며 태손이 되었다. 마차 사고로 어머니와 함께 죽을 운명이었던 듯하지만 그 몸에 재석이 들어갔다. 어린아이였던지라 생애에 대해 딱히 특기할 건 없다. 나이에 걸맞게 장난을 좋아하는 평범한 어린이였으며, 머리가 나쁘진 않았는지 만 6세 때 공부 진도는 한글, 숫자, 알파벳을 모두 익히고 천자문을 시작하는 단계였으니 상당히 영특했던 셈.

다만 이전까지 재석이 암군의 재목에만 빙의한 것을 근거로 이진 역시 재석의 빙의가 없었다면 암군이 될 운명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근거로는 어머니를 죽게 한 부친 이순과 상대적으로 사이가 좋은 조부 원평제의 존재. 아내를 죽게 만들고도 별다른 죄책감 없는 이순과 거리를 둘수록 자연스레 자신에게 애착을 주는 조부 원평제로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조부 사후에는 군주로서 무책임하고 입헌군주제에 관심많은 부친에 대한 반감과 혐오가 작용하여 보위에 올랐으면 시대에 맞지 않는 반동주의자가 되어 대한을 쇠퇴시켰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10.2. 대한[편집]



조선 제19대 국왕


대한 제5대 태황
현종 원강제 | 顯宗 元康帝

현종소휴연경돈덕수성순문숙무경인창효태황
顯宗昭休衍慶敦德綏成純文肅武敬仁彰孝太皇
[E]
출생
1717년
대한 한성부 경복궁 자선당
즉위
1740년
대한 황도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사망
1775년
대한 한성부
재위
대한 황태손
1717년 ~ 1740년
대한 태황 대리청정
1739년 ~ 1740년
대한 태황
1740년 3월 8일 ~ 1775년
(음력 1740년 2월 10일 ~ 음력 1775년)
연호
원강(元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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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全州)

영(璟)
부모
부황 원종(사도태자), 모후 인목태후
부인
황후 유씨

  • 현종 원강제 이영
1740년 3월 건흥제가 승하하자 태황으로 즉위하고 중종 묘호를 올리고, 아버지 사도태자에게도 원종이라는 묘호를 추존한다. 조부 중종이 시작한 초등 의무교육 제도를 단계적으로 확대하여 원강 34년에는 전국 각 현 소재지에 소학당을 세웠으며, 재석이 주력 수출품인 인삼을 확보하기 위해서 방치한 송방의 인삼 독점을 깨고 그 관리를 재무부 인삼국에서 하게 하고, 철도망을 전국으로 확충한 등의 업적을 남겼다. 신흥국인 벵골 준가르 칸국과 동맹을 맺고, 1775년 58세에 사망한다. 서양에서는 철도망 확충이 인상적이었는지 '철도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정호찬
건흥제가 사망하고 반년쯤 후 향년 90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4부 시점에서 재석이 그가 생전에 저술했다는 회고록을 찾아보려 했으나 세간에 출간되지 않았고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는지조차 확인할 수가 없어 재석은 이홍 때문에 급사하지만 않았다면 정호찬보다 오래 살아 태황 권한으로 회고록을 볼 수도 있었을 것라며 많이 아쉬워한다.

  • 웅천공 이헌
정친왕 이권의 둘째아들, 부친의 뒤를 이어 화학자가 되며, 부친이 발명한 뇌홍을 이용해 퍼커션 캡을 발명한다.

  • 권경
권훤의 장남으로 4부 태손빈의 고조부이다.

  • 권창
권훤의 차남.

  • 이재경
현종 재위기 때의 유구첨사. 복곡왕 상철이 조카이자 황제인 상목을 치기 위해 반역에 동참하자는 밀서를 받으나 무시하고 현종이 유구 황제에게 반역 사실을 알리고 보호하라는 명을 받자 충실히 이행했다.

  • 유봉성★
북한 지역의 병마사 중 한명으로 현종 시절 지방관과 짜고 대대적으로 횡령을 하다가 발각당하자 자신 휘하의 2만명의 정예병들을 들고 원 역사의 이괄의 난과 비슷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작중 정치장교인 향도들이 군사를 단속해서 반란군은 전투 한번 없이 와해되었으며, 유봉성은 측근 수십명만 데리고 러시아로 도망치다가 왜인여진에게 붙들려 수급만 한양으로 보내졌다. 인지도가 매우 낮지만 실존인물인데, 서당계사건의 주동자였으며 이후 처형되었다. 원역사에서는 생계가 어려워 훈장 노릇이나 하던 사람이지만 작중에서는 병마사에 오르는 등 결국 처형된 것은 똑같지만 훨씬 출세했다.


조선 제20대 국왕


대한 제6대 태황
목종 영태제 | 穆宗 永泰帝

목종□□□□□□□□□태황
穆宗 □□□□□□□□□太皇

출생
1735년 10월 9일
대한 한성부 경희궁 태손궁
즉위
1775년
대한 황도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사망
1782년
대한 한성부
재위
대한 황태증손
1735년 ~ 1740년
대한 황태자
1740년 ~ 1775년
대한 태황
1776년 ~ 1782년
(음력 1776년 ~ 음력 1782년)
연호
영태(永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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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全州)

선(鍌)
부모
부황 현종, 모후 태후 유씨
부인
황후 남양 홍씨

  • 목종 영태제 이선
재위기간 1776년 ~ 1782년. 임금의 적장자의 적장자의 적장자로 태어나 정통성은 대단하지만, 바로 그 너무 대단한 정통성으로 인해 스스로 폭군이 될까봐 너무 지나치게 두려워한 까닭에 결국 우유부단함이 지나쳐 통 쉽게 결정을 못 내리는 크나큰 성격적 결함을 갖게 되었다. 그나마 결정을 내려도 그때는 이미 늦어서 상황 종료된 뒤인 일이 허다해서 그의 재위기에 국가적 위기가 터졌다면 큰일날 뻔했다. 더욱이 재위기간 내내 크고 작은 기근들을 겪으며 수습하느라 고생하다가 47세의 나이에 일찍 사망했다. 미국 독립전쟁, 서나라 패망, 서나라 패망 후 대서관 귀속 문제를 두고 벌어진 청과 후송의 갈등, 하와국 왕실에서의 피바람 등 여러 문제들에 대해 통 결단을 못 내리고 방관하다가 저 모든 사건들에 대해 모조리 때를 놓쳤다는 것을 보면 명이 짧아서 암군이 되지 못한 암군이란 평가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93] 유일하게 결단력 있게 대처한 것이 함대를 보내 거북섬의 해적들을 쓸어버리고 대한령(실제로는 하와국에게 위탁)으로 편입한 것. 이런 행적으로 인해 묘호도 적당히 주는 시호 취급을 받는 '목종'이 되었다.
  • 폐귀비 오씨
목종의 후궁으로, 보위에 오른 원평제 이금이 장남과 차남이 병으로 요절하여 슬하 아들이 없는 틈을 타 자기 아들인 숙왕 이정의 아들을 제위로 앉히려는 독살음모를 벌이다가 발각되어 누손주로 종신 유배를 갔다.
  • 폐왕 이정
목종과 귀비 오씨의 아들로 원평제의 이복형. 어머니의 음모가 발각되어 일가족 모두 북변으로 귀양가서 15년 후 죽었다고 한다.

4부에서 서경 요양부윤을 지냈다고 언급되며, 손녀가 효비 김씨 사후 태자빈이 되었는데 그 손녀의 아비인 넷째아들이 벼슬을 하지 않은 탓에 한미한 가문이 되어서라고 한다. 4부에서 국상 정약용의 언급을 보면 명신이자 충신이긴 했지만 작중 조선은 자발적으로 개혁개방을 통해 대제국을 이뤘으니 '실학의 효시'가 아닌 그냥 명신 중 한명으로 인식되고 있다. 내용은 원 역사와 달라진 것으로 보이지만 허생전은 인기가 많아서 만화책으로도 잘 팔리며, 열하일기는 북경의 건주 양국의 별궁을 본 기행문이 되었다. 그 외에도 저작들을 많이 남겼는지 셋째 아들은 부친의 저작들을 관리하며 살고 있다.

  • 주홍걸
8대 대명공으로 대명관을 받았다.


10.2.1. 심왕부[편집]


  • 이성균
2대 심왕으로 숙조의 처가인 양씨 가문에서 왕비를 맞았다.

  • 이계선
이성균의 차남, 3대 심왕으로 후금 공주를 왕비로 맞았다.

  • 이인호
이계선의 장남, 4대 심왕으로 풍양 조씨 가문에서 왕비를 맞았다.


10.2.2. 조홀국[편집]


  • 광현왕 정주신
이복형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말레이인들과 화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하고 대신 인도인을 수입하여 육체노동자 역할을 맡긴다. 말레이반도의 소국들을 통합하고, 원래 적대관계였던 아체국도 전면전을 서로 피하면서 냉전 상태로 안정시킨다. 27년간 재위하고 만 45세에 사망한다.

  • 홍제왕(弘制王) 정재원
조홀국 3대 국왕. 정주신의 3남으로 왕위를 계승한다.

  • 정재신
정재원의 동생, 정재원이 요절하여 4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10.2.3. 술루국[편집]


  • 이홍일(펠리페 1세)
4대 술루국왕, 처음으로 스페인계 왕비를 두었다. 대한에 반기를 들고 독립할 음모를 꾸몄으나 마침 나폴레옹 전쟁이 터지고 대한군이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돕기 위해 파병되는 상황을 보고 독립할 생각을 버렸다.
  • 산티아고
이홍일의 차남으로 요절했다.


10.2.4. 하와국[편집]


  • 진성왕 하원식(카울라나)
하상운의 아들로 하와국 4대 국왕. 3부에서 대한에 입조했다가 호랑이를 맨손으로 잡은 업적을 명분삼아 32년간 장기 집권하며 왕권을 강화하고, 어머니가 강녕왕의 딸 의순공주여서 대한의 문화에 심취. 함흥본궁을 본떠 왕조의 고향인 와가촌에 거대한 하씨본궁을 짓고 용비어천가를 본떠 학무대신 이종에게 '하와본사'라는 역사책과 '교주어해가'라는 왕조 선전책을 쓰게 하는 등 왕조의 격을 높이는 데 노력했다.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장자 하정응이 죽자 본격적으로 남은 자식들과 그 어미들을 경쟁붙이다가 결국 다 상어밥으로 만들고 가장 총애하는 왕비 울라오칼라니의 소생인 어린 하정일을 세자로 책봉한 후 63세로 사망하며, 하정일이 요절한 직후인 1778년 무술년 하와이판 왕자의 난인 하와무술지변이 터진다. 이후 진성왕(眞成王)시호를 받는다.
  • 울라오칼라니
하원식의 13번째 왕비로 외할머니가 강녕왕의 딸이어서 신분도 높은데다 한인처럼 피부가 흰 미인이다. 머리도 교활하여 다른 왕비들과 그 자식들을 충동질해 서로 싸움을 붙인 후 하원식에게 참소하여 모두 상어밥으로 만들고 자신의 소생인 어린 하정일을 세자로 삼게 한다. 하정일이 즉위 후 대비로서 하정일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이복형들을 모두 상어밥으로 만들고 경쟁자였던 왕비들을 순장하는 등 엄청난 피를 뿌렸으며, 하정일이 3년만에 홍역으로 죽어버리자 어디서 갓난아기를 데려와서 그의 소생이라고 주장해서 권력을 이어나가려고 했지만 복수의 칼날을 갈았던 하현생이 앞장서서 하와무술지변으로 그녀를 끌어내렸고, 그때까지 무수히 해왔던대로 사지가 잘려서 바다에 던져져 상어밥이 되었다.
  • 하진수(케일라니)
울라오칼리니가 내세운 하정일의 가짜 자식. 하현생이 관용을 베풀어 친부모에게 돌아가 평범하게 살았다.

  • 하정응
가와공의 딸과 하원식 사이에서 태어난 적장자. 애초부터 하원식이 안 좋아한데다가 남양에서 잡아온 노예를 아내로 삼아서 더 눈 밖에 나서 세자 책봉이 미뤄지고 있었는데, 이 상황을 타개하겠다며 부친처럼 호랑이를 잡으러 대한 본국에 갔는데 조언도 무시하고 악호가 설치는 산 속에 들어갔다가 호랑이밥이 되어버렸다.
  • 아울리
노예 출신 하현생의 친모. 남편이 죽은 후 외지에서 아들 하현생을 홀로 키웠다. 노예 출신이라는 배경때문에 대비가 되었음에도 소극적인 모습만 보였다.

  • 민애왕 하정일
하와국 5대 국왕, 울라오칼리니의 아들로 8세에 세자로 책봉되어 즉위했으나 홍역으로 3년 만에 죽어버렸다. 대한 목종이 어미가 죄인이지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냐며 왕으로 인정해 민애왕(閔哀王) 시호를 내렸고, 하현생도 같은 의견이어서 그 후로도 왕으로 인정받고 있다.

  • 위강왕 하현생(카메하메하)
하정응의 아들로 하정일에게 의절을 당한 후 자신의 이름을 '외로운 자'를 뜻하는 카메하메하로 짓고 모친 아울리의 마음을 찢는 일임에도 몇 안되는 실전 부대인 노예사냥 부대에 들어사서 복수의 칼날을 갈다 하와무술지변을 일으켜 하와국 왕이 된다. 울라오칼라니가 왕이라고 내세운 갓난아기도 죽이지 않을 정도로 자비를 베풀며 나락으로 떨어졌던 본인의 경험을 살려 나라를 잘 다스린 명군으로 25년간 즉위하고 60세에 사망했다. 이후 위강왕(威剛王) 시호를 받는다.
  • 카우아케아
하현생의 왕비로 본래 어부의 딸이어서 억척스러운 성격이었으며, 왕비가 된 후에도 자신이나 시어머니가 하층민 출신이라 귀족들에게 무시당한다고 생각하면 직접 손찌검을 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 하원호
하현생의 차남으로 23년간 재위.

  • 이종
80세의 나이로 장수했으며 죽을 때까지 하와국의 학무대신을 맡았고, 3부 외전에서 카우이의 50만자 구술을 엮어서 '하와국사'를 썼고 여기에 하와국 왕실의 요구로 하와이 창세 신화를 덧붙여서 공식 사서 '하와본사'를 썼다. 무인지변 때 자신의 경험을 떠올려서 하원식에게 적장자인 하정응의 아들을 책봉해야 한다는 충언을 했지만 무시당했다.


10.3. 대아주[편집]



10.3.1. 서[편집]


  • 정종 광안제(定宗 廣安帝) 장효준
서나라 5대 황제, 장장현의 태자. 제위를 계승한 후 양광내란의 피해를 수습하고 황권을 강화하려는 부황의 노력을 받들었으나 41세로 요절하면서 서나라는 망조가 든다.

  • 민종(愍宗) 함녕제 장시원
서나라 6대 황제, 1759년 17세에 즉위한다. 조부 장장현과 부황 장효준의 뜻을 어기고 후송과 청이 피터지게 싸우며 살아남기 위해 전력을 다하던 20년간을 사치와 향락으로 허송세월하고, 안남국에서 떠이선 농민 봉기가 일어나 후 레 왕조가 구원을 요청하자 서나라 사정도 생각지 못하고 광동군 20만 대군을 파병했으나, 무능하고 아부만 잘하는 장수를 대장군으로 삼았다가 안남군에게 대패한다. 이 틈을 노린 후송이 양광을 공격할 때는 원군을 보내지 않다가 양광이 항복하자 그제서야 응징한다며 사천군을 모두 양광으로 파병했지만 청의 기습공격을 받고도 이를 믿지 않고 사자를 처형하는 막장짓을 했다가 결국 수도 성도가 함락되고 청 황제 계정제 앞에서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며 서나라의 모든 국권을 청나라에 바친다는 굴욕을 당한 후 청나라에 끌려가 개봉과 북경 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하고 황후와 단 둘이서 거지처럼 살다가 45세에 죽었다. 청나라에서는 말종(末宗)이라는 굴욕적인 묘호를 주고 성도의 서나라 황제 묘역에 매장했으며, 운남성에서 간신히 명맥을 이은 서나라에서는 민종(愍宗)이라는 묘호를 따로 올렸다.
여담으로 그의 재위 도중 한양에 주재관을 지을때 서나라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한양 서대문 바깥에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을 짓고 '대서관'으로 명명했는데, 그 허가를 받기 위해서 대한에 은 천만냥을 선물했다고.


10.3.2. 후송[편집]


  • 명종 태안제 조호덕
북곡왕 상철이 쿠데타 지원을 요청하자 유구를 손에 넣으려고 출병을 계획했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대한이 함대를 증파해 백지화시켰다. 을미조약에 따라 유구는 중립국이 되었는데 이를 건드려서 한일과 전쟁이 벌어지고 이를 틈타 건주 양국이 다시 쳐들어올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 혜종 태녕제 조경소
후송의 6대 황제. 과거 황자들 간에 제위를 두고 경쟁이 치열했던 것이 느슨해지면서 조호덕의 장자로 무난하게 제위에 올랐다. 19세에 즉위해서 12년 동안 재위하면서 흥청 3만명을 두는 등 사치와 향락에만 몰두하다 31세에 복상사로 사망한 암군으로, 작중에선 연산군을 대신해서 '흥청망청'이란 표현을 만들어냈다. 암군을 한번 겪고 아예 망해버린 서나라와 달리[94] 중앙과 지방 도통사의 재정이 분리된 후송은 지방군은 건재했기 때문에 망하기는커녕 다음 황제인 조승번이 양광 지방을 점령하는 위업을 세웠지만, 중앙 재정을 낭비해서 중앙의 지방 장악력을 악화시켰다는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피해를 남겼다.

  • 익종 소태제(翼宗 紹泰帝) 조승번
후송의 7대 황제, 연호는 소태(紹泰)로 1777년 겨우 16세의 어린 나이이지만 부황 조경소가 벌인 재정 낭비를 수습하고 홍사옥의 양광 원정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양광을 정복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여세를 몰아 청나라를 북벌하려다가 괜히 덕성도를 반역도당이라고 의심해 1796년 학살 탄압하는 바람에 덕성도의 난이 일어나 5년동안 큰 난리를 치루고 기껏 모은 군대며 재정까지 죄다 엉망이 되어 북벌도 포기하게 된다. 자신의 계획이 뜻대로 안 되자 길길이 날뛰다가 홧병으로 쓰러져 1804년 44세밖에 안 된 이른 나이에 사망한다.
  • 조형연
소태제의 장남. 부황보다 1년 먼저 요절했다.

  • 홍사옥
정주도통사로 3부에서는 애송이 도련님 이미지였지만 대패를 겪은 후 사람이 달라져 절치부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1777년 75세의 노구이지만 서나라의 혼란을 틈타 양광 정복전에 나서서 항복을 받아내고도 양광총독 임호관에게 인간적으로 대하여 그가 후송으로 투항하여 서나라에 칼을 겨누도록 회유한다.

  • 임호관
본래 서나라의 양광총독으로 3부에 나온 임용완의 아들. 유능한 장수로 후송 홍사옥군과 팽팽히 싸웠으나 함녕제가 원군을 보내주지 않아 중과부적으로 항복했는데, 안 그래도 함녕제의 막강 행각에 치를 떨다가 홍사옥의 요청으로 양광총독에 유임되자 후송의 신하가 되기로 한다. 이를 응징하겠다고 함녕제가 군사를 보내자 홍사옥과 손을 잡고 함녕제 군과 싸워 물리쳤다. 원래 소태제는 황제에게 충성하는 인사를 총독으로 임명하고 임호관도 살려둘 생각이 없었지만 선황 혜종의 암군 짓 때문에 내부적으로 많이 힘들어진 상황이어서 홍사옥의 요청을 거부하지 못하고 그를 양광총독 직에 유임시켰으며 그 후손이 다른 도통사들처럼 양광총독직을 세습한다.


10.3.3. 후금[편집]


  • 성종 천정제 애신각라 부수(聖宗 天正帝 愛新覺羅 富綬)
후금 7대 대칸. 3부 종결 이후에도 평생을 독실하게 살았다고 한다. 중종의 조문을 하러 찾아간 덕에 외조카 현종으로부터 감사의 표시로 증기기관 기술을 받았고, 최신예 증기기관차까지 맨 먼저 도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상도와 한양을 잇는 국제선 열차를 개통하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겼다. 개인의 성품이 워낙 뛰어난지라 전에도 평가가 좋았는데, 내치까지 잘 하고 포교에 앞장선 덕에 성종이라는 격 높은 묘호를 받았다.

  • 중종 장락제 애신각라 파이도(中宗 長樂帝 愛新覺羅 巴爾圖)
후금 8대 대칸, 부수의 아들. 장자인 전라탑이 차자 특이호를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발각되자 전라탑의 두 눈을 뽑고 수도원에 유폐시켰다.
  • 애신각라 전라탑(愛新覺羅 傳喇塔)
파이도의 장남.

  • 원종 함녕제 애신각라 특이호(元宗 咸寧帝 愛新覺羅 特爾互)
후금 9대 대칸, 부수의 손자.

  • 대종 승광제 애신각라 파아라(代宗 承光帝 愛新覺羅 巴雅喇, 아이신기오로 바야라)
후금 10대 대칸, 부수의 증손자. 형 둘을 수도원에 유폐시키고 대칸이 되었다. 보르지긴씨 황후를 얻어 적자 넷을 두었다.


10.3.4. 청[편집]


  • 문종 건강제 애신각라 소포도(建康帝 愛新覺羅 蘇布圖, 아이신기오로 수부투)
청의 8대 황제, 홍화제 박화탁의 장남.

  • 명종 강희제 애신각라 홍신
청의 9대 황제, 소포도의 아들. 후궁을 20명이나 거느린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10.3.5. 일본[편집]


도쿠가와 막부 10대 쇼군.

도쿠가와 막부 11대 쇼군, 이에모치의 요절한 형의 아들이다.

도쿠가와 막부 12대 쇼군.

4부 시점 전대 번주로 뛰어난 수완으로 번을 개발하여 부채를 청산했다.


10.3.6. 안남[편집]


떠이선 왕조가 일어나 찐씨 정권응우옌씨 정권을 모두 멸망시켰지만 농장과 상관 이권을 지키려는 대한의 지원을 받아 원역사처럼 역전승을 거두어 떠이선 왕조를 멸망시키고 응우옌 왕조를 세우고 대한에 칭신한다. 대한에 매년 조공을 바치고 대한 육해군의 주둔을 허용하여 안남국왕으로 대한의 책봉을 받으나, 후송도 무시할 수 없어 후송에도 명목상의 칭신을 하고 남월국왕 책봉을 받는다.


10.3.7. 유구[편집]


  • 북곡왕(北谷王) 상철(쇼테쯔)
친형인 유구 2대 황제 상경 사후 조카인 상목이 보위에 오르자 명나라 영락제와 조선 세조처럼 조카를 치고 황제에 오르기 위한 반역을 계획하는데 이 과정에서 유구 첨사와 에도 막부와 후송에게 동시에 외부개입을 요청하는 미친 짓을 저지른다. 유구 첨사가 바로 대한 조정에 보고하고 막부가 대한에게 상철의 밀서를 보내고 후송 수군의 수상한 움직임까지 보고되자 상황을 파악한 대한 현종이 유구 첨사 이재경에게 즉각 유구 황제의 구원을 명하자 계획이 틀어진 것을 안 상철은 그대로 배를 타고 도망쳐 행방불명된다.[95]

  • 영원제 상목(永元帝 尙穆)
유구 3대 황제. 유구의 목을 죄는 존재인 대한 해군을 철수시키려고 했으나 대한 원평제의 거부로 무산된다.

  • 상성(尙成)
유구 5대 황제, 4세로 요절했다.


10.3.8. 무굴 제국[편집]


영국 동인도 회사와 프랑스 사이의 전쟁에 속수무책으로 지내다가, 원역사처럼 굴람 카디르의 반란으로 눈이 뽑히게 되고 갖은 굴욕을 당하다가 영국 동인도 회사의 지원으로 겨우 제위를 유지하는 치욕적인 삶을 산다.

10.3.9. 벵골칸국[편집]


  • 로브 산쇼노
3부 끝무렵에 처음 등장했던 준가르의 왕자로 왕위 다툼에서 형인 갈단 체렝에게 밀려난 후[96] 나디르 샤의 용병이 되어 인도 정벌에 참여했다가 벵골의 풍요함을 보고 벵골을 정복해 나디르 샤의 봉신 자격으로 '벵골 칸국'을 세우고 스스로 구르칸[97]을 칭한다. 이때 벵골 총독부와 관계가 틀어진 대한의 골가타 상관의 은밀한 지원을 받는다. 나디르 샤가 죽은 후에는 공식적으로 독립국을 칭하고, 마라타 동맹 등 다른 인도 국가들과 싸우면서 대한과 다시 외교관계를 맺어 지원을 받고, 티베트 달라이 라마의 내정간섭을 차단하기 위해 국교를 준가르 시절 믿던 티베트 불교에서 일본 승려들이 포교한 정토진종으로 바꾸고 벵골 주민들에게 개종을 강요한다.


10.4. 대유주[편집]



10.4.1. 프랑스[편집]


  • 루이 16세[98]
증조부 루이 14세의 영광을 재현하려던 망상이 7년 전쟁 패배로 무너지자 큰 충격을 받고 쓰러져 56세에 사망한다.
원역사의 루이 15세는 이 역사에서 폴란드 왕 루드비크 2세가 되었지만, 이 역사에서도 프랑스 궁중에 들어가 로얄 미스트리스가 된다. 여기서는 루이 16세가 국정을 직접 주도하는 인물이었기에 정치 방면에서는 조언자 정도로만 머물고 대신 학문과 예술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계몽주의자들을 후원한 것이 프랑스 대혁명의 씨앗이 된다.

  • 루이 17세
루이 16세의 아들. 7년 전쟁의 복수를 위해 원역사처럼 미국 독립전쟁에 독립군 편으로 참전해 막대한 전비를 써버려 결국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도화선에 기름을 바르는 원인을 제공했다. 1780년 사망한다.

  • 샤를 10세
루이 17세의 아들. 왕권신수설을 신봉하여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을 탄압한다. 미국 독립전쟁에 몽캄 후작 휘하 육군을 대규모로 파병하고, 증기기관에 관심이 많아 왕세자 시절 직접 증기자동차를 만들었고 국왕이 되자 국영 철도회사를 통해 프랑스 전국에 철도망을 깔겠다는 계획을 급하게 추진하면서 재정 적자가 커지자 삼부회를 소집했다가 프랑스 대혁명이 터지게 된다. 매우 권위적인 성격이어서 전면적인 무력 탄압을 시작했다가 역풍을 맞아 4년간의 프랑스 내전으로 악화된다. 결국 나폴레옹에게 포로로 잡히고 분노한 혁명파와 민중들 손에 의해 공개처형 당한다. 하지만 왕세자 루이와 두 공주는 나폴레옹이 자비를 베풀어 영국으로 보내주면서 멸문은 면했다.
샤를 10세의 왕비. 원 역사에서는 위의 언니가 천연두로 사망해 본래 언니의 결혼상대였던 나폴리 왕에게 시집가게 되면서 동생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시집가게 되었는데, 여기서는 종두법 도입으로 언니가 사망하지 않게 되면서 본래 계획대로 프랑스 왕실로 시집오게 되었다. 원 역사처럼 여장부여서 남편의 반동정치와 무력 탄압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한다. 이러한 행동들로 민중의 분노를 사 붙잡힌 뒤 남편과 같이 공개처형 당한다.

혁명파 편에서 왕위를 노렸으나 왕당파에게 암살당한다.

3부 후반부에 막 누벨프랑스에 부임한 젊은 장교로 등장했는데, 7년 전쟁 중 누벨프랑스 총사령관이 되어 영국군과 싸웠으나 원역사처럼 패배하여 퀘벡을 잃고 루이지애나만을 지켜내게 된다. 하지만 원역사처럼 전사하지는 않아서 그 후 미국 독립전쟁에 프랑스 지원군 총사령관으로 참전하여 영국군을 쳐바르고 7년 전쟁의 복수를 한다.

샤를 10세가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을 막지 못했다고 원래의 근위대장을 해임하고 새로 임명한 근위대장. 즉각적으로 엄청난 과잉진압을 시작하는 바람에 참혹한 유혈사태가 터졌고, 이로 인해 프랑스의 여론을 크게 악화시켜 프랑스 내전이 터지게 된다.


10.4.2. 러시아[편집]


7년 전쟁에 오스트리아, 폴란드, 프랑스와 동맹하여 참전하지만 원래 프리드리히 2세의 능력을 보고 화친할 마음이 있었던 데다 폴란드가 여동생 카타지나에게 넘어가는 것도 참을 수 없다고 판단, 모후 루시아가 사망하자마자 동맹에서 탈퇴하여 이 세계에서도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이 일어난다. 그 후 두 차례의 폴란드 분할을 통해 동폴란드를 영유한다.

표트르 2세의 후계자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장남과 약혼하려다가 장남이 요절해 동생인 표트르 3세와 약혼시킨다.
  •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알렉산드로 1세의 장남, 12세에 요절했다.

알렉산드르 1세의 차남. 즉위한 지 6년만에 2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0.4.3. 폴란드[편집]


아내가 죽은 뒤에도 세임에서 생활비와 유흥비를 대주어 이전과 똑같이 계속 방탕하게 살다가 1774년 사망한다.
  • 폴란드 왕비 카타지나(예카테리나 로마노바)
외할아버지 중종(3부의 재석)이 죽은 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에 오스트리아와 동맹하여 참전하나 프리드리히 2세에게 거듭 패전하고 만다. 4부에서 깨어난 재석은 자기가 살아있었다면 참전을 기어코 말렸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시 태황 이영은 유럽에 대한 관심이 적어 참전을 방관했다. 게다가 7년 전쟁의 결과 친오빠 표트르 2세에게 배신을 당하고 폴란드 귀족들의 비협조로 폴란드 분할을 당한 후 충격으로 쓰러졌다가 1765년 사망한다.
  • 샤를
카타지나의 장남, 7년 전쟁 중 병사한다.
  • 루이 페르디낭
카타지나의 차남.

루드비크 2세 사망 후 새 국왕으로 선출되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패배하고 퇴위한다.


10.4.4. 프로이센[편집]


카를 6세 사후 슐레지엔을 넘기는 대신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권을 인정하겠다는 제안을 거절당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나자 슐레지엔을 빠르게 점령했다. 실전 경험은 없으나 강인한 훈련법과 뛰어난 지휘역량으로 폴란드 정예군을 대파시켜 슐레지엔의 지배를 확고히 만들었다. 그 후 7년 전쟁에서는 '네 여인 동맹'(오스트리아-러시아-폴란드-프랑스)의 공격을 받지만 스웨덴의 도움과 러시아의 동맹 탈퇴로 역전의 기회를 잡아 승리하고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와 러시아의 표트르 2세와 같이 폴란드를 분할해버린다.


10.4.5. 오스트리아[편집]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사후 제위에 올라 폴란드를 분할하는데 끼어든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동생 마리아 카롤리나가 원군을 청하자 파병했으나 나폴레옹에게 패배한다.


10.4.6. 스웨덴[편집]


원역사의 러시아 표트르 3세가 되었을 홀슈타인-고토로프 공작 카를 페터 울리히. 여기서는 러시아 황실이 굳건하여 스웨덴 국왕이 되었다. 원역사처럼 프리드리히 2세 숭배자로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 편으로 참전한다. 하지만 순수한 덕질이 목표였기에 아무 대가도 받지 않았다. 이에 반발한 귀족들과 아내에 의해 축출된다. 그나마 원역사처럼 살해되지는 않았다.
러시아 알렉세이 2세의 중매로 원역사처럼 칼 13세의 왕비가 되고,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을 도왔지만 대가도 못받은 것에 불만을 품은 스웨덴 귀족들을 포섭해 쿠데타를 일으켜 남편을 강제 퇴위, 연금시키고 어린 아들 파울 1세를 국왕으로 옹립한 다음 스스로 섭정태후가 되어(원역사와는 달리 스스로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다) 의회를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고 스웨덴의 국력을 회복시키는 업적을 쌓는다.

원 역사와 다르게 스웨덴의 왕이 된다.

10.4.7. 이탈리아[편집]


말년에 이탈리아를 떠나 오스트리아로 갔다가 망했어요가 되고 폴란드 카타지나 왕비의 후원을 받아 폴란드에서 여생을 마친다. 그의 마지막 오페라 작품 '동방에서 온 빈의 기사왕'은 중종이 성친왕 시절 빈 포위전에 출정하여 승리하고 올렝카와 결혼하는 내용을 다룬 작품이지만 성친왕과 올렝카가 맺어지는 결말로 인해 유럽 각국에서는 현재의 대한 황실이 올렝카의 후손인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었고, 대한에서는 상연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이 작품 덕에 대한에서 가장 지명도 있는 서양 음악가가 되었다.


10.4.8. 서반아[편집]


  • 페르난도 6세
호세 페르난도 1세의 증손자.

10.4.9. 교황청[편집]


1773년 예수회 해산조치를 한다. 원역사에서는 후임 교황 클레멘스 14세가 했는데, 아마도 클레멘스 13세의 수명이 연장된 듯하다. 대한 목종과 후금 대칸은 예수회를 도우려 했지만 교황청에서 내정 간섭이라며 거부했고, 그 보복으로 대한 원평제는 그동안 금하던 개신교를 허용한다. 예수회는 원역사처럼 1814년 재건되었지만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10.4.10. 잉글국[편집]


영태제에게 친서를 보낸다.

북서항로를 찾기 위한 3차 항해에서 베링 해협 통과에 실패한 후 대한을 거쳐 귀국했는데, 하와이가 대한의 번국이 되면서 원 역사처럼 원주민에게 살해당하지 않았다.[99] 그 과정에서 스텔러바다소를 서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목격하여 유럽에선 '쿡 바다소'리고 알려졌는데, 북태평양 연안의 대한 항구들에서 보급을 충실히 받은 데다가 미국 독립전쟁 중에 적을 늘리고 싶지 않은 영국 정부의 의도로 대한에서 보호하는 이 생물을 사냥하지 않아서 멸종하지 않았다. 영태 4년(1779년) 한성에 들려 목종을 알현하고 친서를 봉정하면서 신형 육분의크로노미터를 진상했다. 여담으로 괴혈병 예방을 위해 실어둔 자우어크라우트가 떨어져서 김치를 실어갔다고 한다.[100] 그 후 4차 항해에서 다시 북서항로를 탐험하러 갔다가 조난당해 실종된다.

10.5. 대미주[편집]


원 역사와 같은 양상으로 벌어진 미국 독립전쟁에서 독립군 지도자로 추대되어 새로 건국된 미주합중국 초대 총통이 된다.

합중국 3대 총통. 대한과의 육로를 통한 직접 교역을 위해 1803년 루이지애나를 통과하는 탐험대 겸 사절단을 보낸다.

합중국 상인들이 자체적으로 대한을 방문해 민간 교역을 시작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국무장관으로 있을 때 본격적인 국가간의 교역을 지시했다. 이후 원 역사대로 에런 버와의 결투로 사망한다.


11. 4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명군이 되어보세!/등장인물/4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1부 1장 5화에 이재석이라고 풀네임이 처음 언급된다. 상희도 본명을 알지만 더 이상 연산군이 아닌 2부 이후에도 연산이라고 부른다. 이는 '재석'이란 이름은 이 세상에 동명이인이 있을 수도 있지만 연산군이라는 명칭은 이 세상에서 무종이라는 묘호를 받은 이융이 반정으로 폐위된 뒤 붙은 군호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주인공과 상희 단 둘만 아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에게는 1부 진행중에는 '빙의된 연산'이라는 뜻으로 빙산이라고 불렸으나 연산군이 아니게 된 2부부터는 한동안 빙성군(빙의 경성군)이라고 부르다가 주로 재석이(변형으로 재서기, 재슥이, 재스기 등이 있다.)라고 부르는 것으로 정착되었다.[2] 임해군의 휘와 음은 같지만 한자가 다르다.[3] 1부 1장 5화에 이재석이라고 풀네임이 처음 언급된다. 상희도 본명을 알지만 더 이상 연산군이 아닌 2부 이후에도 연산이라고 부른다. 이는 '재석'이란 이름은 이 세상에 동명이인이 있을 수도 있지만 연산군이라는 명칭은 이 세상에서 무종이라는 묘호를 받은 이융이 반정으로 폐위된 뒤 붙은 군호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주인공과 상희 단 둘만 아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에게는 1부 진행중에는 '빙의된 연산'이라는 뜻으로 빙산이라고 불렸으나 연산군이 아니게 된 2부부터는 한동안 빙성군(빙의 경성군)이라고 부르다가 주로 재석이(변형으로 재서기, 재슥이, 재스기 등이 있다.)라고 부르는 것으로 정착되었다.[4] 상희도 딱히 사명감을 가지고 한의대에 간 것이 아니라 재수를 뒷바라지 해 줄 수 없는 집안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의대에 진학한 것이기 때문에 한의학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5] 상희가 이 일을 언급하며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 질색하는 묘사가 나왔고, 상희가 현대에서 성 경험은 있지만 연애 경험은 없다고 언급해서 상희가 외국에서 지도교수에게 강간당했다는 추측이 있었으나, 작가가 직접 강간까지는 당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6] 물론 역사가 바뀌었다해도 일부 인물들은 그대로 태어나는 걸 생각하면 이 인물들도 그대로 태어날 가능성은 존재하며 만일 이들과 상희가 다시 만난다면 벌어질 사이다 복수극도 독자들은 주목하고 있다.[7] 그동안 소원을 빌던 놈들은 다들 같잖은 소원만 빌어서 무시했지만 왕이 되겠다는 놈은 처음이었다고 한다. 상희는 천녀가 깃든 담당교수의 벼루를 부숴버렸기에 천녀가 '대체 어떤 놈이 벼루를 부쉈는지 한 번 보자'하고 소원을 들어줬고 '마침 방금 재밌는 소원을 빈 놈이 있는데 너도 같이 보내면 되겠네'하고 조선으로 보내버린다.[8] 재석과 상희가 각각 '왕이 되고 싶다'와 '날 괴롭히는 인간들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막연한 소원을 빌었는데 둘 다 수백년 전 조선시대로 보내버렸다. 결과적으로 군주제 국가의 왕이며 현대사회의 인물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세상이었으니 정말 거짓말은 하지 않은 셈.[9] 타임슬립 대체역사물에서 항상 지적되는 몇 년이나 복습을 못 했으면서 어떻게 현대 지식들을 잊지 않느냐는 문제에 대한 해명. 단 현대에서 빙의하던 시점에 알던 지식에만 한정하며 조선으로 온 뒤의 기억들은 시간에 따라 정상적으로 잊는다. 또한 원래부터 부정확하게 알거나 잘못 알던 부분도 그대로 유지된다. 상희는 1부 시점에는 자기가 머릿 속으로 열심히 복습한 덕이라고 생각했으나 2부에선 천녀 말을 듣고 실망했다는 볼멘소리를 하기도 한다.[10] 이는 원래 할 줄 알던 언어라면 모두 해당되는 버프인 듯. 현대에 일본어를 할 줄 알던 상희는 중세 일본어까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중에 영국인과 접촉했을 때엔 영어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11] 작가는 처음에는 연산군과 경성군의 영혼은 삭제되었다고 말했으나, 2부 종료 시점 작중에서 천녀가 직접 밝힌 바로는 연산군과 경성군의 영혼은 극락에서 즐겁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이후 3부가 꽤 진행된 시점에서 저승을 다룬 외전이 나와 그들의 사후세계 근황이 다뤄진다.[12] 일부러 당장 죽여도 미안하지 않을 암군이 나올 때마다 빙의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작중 재석도 3부 기준으로 3번 연속 암군에만 빙의하자 자신이 폭탄 처리 전담이냐 푸념할 정도.[13] 2부 엔딩에서 주인공이 진짜 기우제를 들어준 것이냐고 질문하자 그냥 비는 내릴 때가 되면 내리는 것이고 하계의 기우제 따위 들어줄만큼 한가하지 않다고 밝혔다.[14] 원래 폭군이어야 할 연산군이 너무 대단한 명군이니 하늘의 뜻을 어겼다는 이유로 뭔가 그 전부터 시름시름 앓아가는 전개였다면 대충 납득이라도 했겠으나, 갑자기 비명횡사를 해버렸으니...[15] 하계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는 천녀의 말대로면 종성순의 기분을 좀 더 신경쓰거나 호위라도 제대로 갖췄으면 그날 죽을 운명이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독자들은 아직도 수명드립을 잊지 않았다[16] 현대인처럼 합리적이고 회의적인 성격의 건복제는 이를 아우가 자신을 편하게 해주게 하기 위한 재담으로 받아들였다.[17] 여담으로 천녀에 대한 이야기를 이덕형에게 전해 들은, 이 세계에서는 신부가 된 광해군은 천녀를 천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18] 일단은 원래 세계의 이재석도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로 명목상 이성계의 직계자손이기는 하다. 하지만 재석이 전주 이씨라는 건 할아버지에게 들은 게 전부고, 현대 대한민국에 전주 이씨의 숫자는 무려 260만명이 넘지만 그 중 대다수가 조선 말기에 족보를 위조했기 때문에 이재석이 진짜 이성계의 자손일지는 불명이고 본인도 이러한 배경 탓인지 확신하지 못한다.[19] 독자들은 이러한 태조의 태도를 두고서 '원 역사의 조선이 어떻 되었는지 알고 나서도 그런 소리 할 수 있을까?', '그 잡귀 덕에 황제로 추존돼서 제사상이랑 공물 받고 있으면서 배부른 투정이나 한다' 정도로 여기거나 아예 더 나아가 '원래 역사를 생각하면 솔직히 태조가 주인공 이재석에게 큰절올려야 하는 입장이다'며 한심해하고 있다.[20] 그래도 할아버지에게까지 갈굼 당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기껏 욕먹어가며 기틀을 다지고 왕권을 강화했는데, 그걸 손자놈이 자기 따라한답시고 죄다 망쳐버렸으니......물론 태종 역시 세조를 보면 분통이 터지겠지만 본인도 업보가 있어 눈치가 보이니 적극적으로 나서진 않는 것으로 보인다.[21] 공부를 진짜로 좋아해서 계속하는 경우도 있지만, 슬슬 지쳐서 그만하고 싶어도 수십대조의 조상들이 단체로 갈구기 때문에 사대부 집안 출신인 이상 공부를 영원히 고통받으며 계속할 수밖에 없다.[22] 진성대군이 이황 대신 왕위에 올랐다면, 눈이 돌아간 무종의 총신들과 군부에 의해 어머니 자순대비와 함께 초고속으로 역적으로 몰려 능지형으로 생을 마감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왕위를 양보한건 자순대비가 내란을 막고자 적당히 배려한것[A] A B C D E F 작중 묘사 없음. 원 역사 인종에 대응해서 추정.[B] A B C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 추정.[23] 원 역사 인종의 능호.[24] 연산군의 실제 아들인 이황(폐세자)와는 이름은 같지만 출생 연도가 다르고 행적도 다르기에 실존인물이 아닌 동명의 가상인물로 봐야한다. 유전적으로 동일할지는 모르겠지만...[25] 2, 3부 사이에 선조 이연이 칭제건원하면서 4대조인 인종 이황을 태황으로 추존하며 묘호를 '조'로 올림.[26] 하지만 2부 시점에서 이미 군에서 쓰던 활강조총이 유출된 뒤 복제되어 민간에 활강조총이 10만 정이나 돌아다니고 있던 걸 생각하면 강선조총을 76년간 계속 사용했을 경우 실제로 강선이 명이나 일본으로 유출되었을 가능성도 상당하다. 그리고 제조기술은 실전되지 않은 걸 보면 정말로 기밀유출 방지가 목적이고, 중요성은 잘 알고 있었으니 만약에 통치 중 큰 전쟁이 있었다면 다시 사용했을 것 같다. 거기다 당시는 활강조총만으로도 여진, 일본보다 조선의 군사력이 우위에 총기제조기술도 명보다 한수 앞서있는 상태였다. 북방개척을 계속하고 남한산성을 완공하는 등 군사력 발전을 게을리 한 인물은 아니다. 결국 기술유출은 막긴 했으니 재평가나 반박의 여지는 있긴하다.[27] 조선은 실제로 애기살의 유출을 우려해 국경에서의 사용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28] 주인공은 죽기 전에 이황에게 자신이 미래인이라는 것과 미래 정보들을 알려줄 생각을 했었으나, 예상치 못하게 원역사대로 요절하는 바람에 실행하지 못했다.[29] 1부에서 주인공이 조광조는 이제 김굉필 제자가 될 수 없을 텐데 뭘 하고 있을까 생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진짜 제자가 되어버렸다. 2부에서 주인공은 내가 알았으면 참수했을 거라 생각하지만 인조는 품계를 두 단계 깎는 약한 처벌을 한다.[30] 아이러니한 건 원 역사에서 이 때 이장곤과 조광조는 사이가 좋았다. 이 세계에서는 본인을 좋게 대우해주고 사랑하는 아내도 만나게 해 준 선왕의 업적 대다수를 비난, 축소하려했을 조광조는 이장곤에게 친구는커녕 최악의 정적이었을 것이다. 이는 남곤 역시 마찬가지.[31] 사실 무묘는 인조의 부왕이 만들었고, 처조부인 유순정이 배향된 곳이다. 그걸 폐지하자고 주장한 것은 보기에 따라선 제대로 왕의 심기를 건드려 이 세계에서도 기묘사화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다. 인조가 정말 인자한 왕이라서 부여주에서 야인 자제를 교육하는 정도로 끝난 것이다.[32] 실제 역사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33] 다만 윤원형은 정난정과 짜고 조강지처 김씨를 살해한 적이 있는데, 바뀐 역사에서도 그 악행을 저질렀다면 용서 받지 못하고 처벌 받았을 것이다. 무종 시절 초반에 전 초계군수 유인홍의 첩이 본처의 딸을 죽인 일이 있는데, 이를 은폐한 유인홍과 첩이 모두 처벌당했기 때문(실제 역사에서도 연산군 때 벌어진 실제 사건이다).[C] A B C D E F G 작중 묘사 없음. 원 역사 명종에 대응해서 추정.[D] A B C D E F G 작중 묘사 없음. 추정.[34] 원 역사 명종의 능호.[35] 2, 3부 사이에 선조 이연이 칭제건원하면서 3대조인 명종 이환을 태황으로 추존하며 묘호를 '조'로 올림.[36] 가상인물로 작가는 이 인물을 직접 등장시킬 생각이 없다 하며 작중 고니시도 스승이 누구인지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37] 원역사의 단경왕후[38] 원역사의 성리학적인 조선에서도 뛰어난 명군들은 분명 존재했다. 당장, 한국사 최고의 명군인 세종대왕만 해도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였다.[39] 만약 주인공이 빙의하지 않았더라면, 군사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은 경성군 특성상 니탕개의 난과 무자호란으로 부여주와 연해주 통솔력을 잃어버리고 명나라에 반환해야 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조선의 대외 이미지는 추락할 수 밖에 없고, 유럽의 국가들도 조선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경성군을 비롯한 당대의 인물들은 금위사도 축소된 형편이라 일본의 침략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보다 더 유능한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일어난 임진왜란을 아득히 능가하는 규모의 전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경성군은 선조처럼 피란을 갔거나 조선은 정말로 멸망했을 수도 있다.[40] 이 발언을 자기 측근들하고만 있는 사석에서 했으니 망정이지, 공론화되었다면 제대로 된 성리학자들이 볼 때 당장 끌어내려야 할 수준이었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무종의 증손자로 입적되어서 왕이 된 것이고, 무종 쪽의 종통을 계승했으니 경성군의 법적 조상은 진성대군이 아니라 무종이 된다. 당장 작중에서도 무종의 종통을 계승해서 왕이 되어놓고 정작 선대의 유산만 누리려 하고 무종을 부정하는 미친 짓거리를 한다며 비판한다.[41] 그나마 경성군이 선조보다 나은 점은 세자를 포함한 자녀들이 정상인에 개념인들이란 점 정도인데, 이것도 다지의 외손녀인 중전을 비롯해 모친 쪽 혈통을 강하게 물려받은 덕이라고 작가가 밝힌 바 있다.[42] 스페인과 비교해 설령 이웃국가여도 전투력은 약간 떨어질지 몰라도 전쟁에선 이길 수 있고, 중국과 비교해서 정복은 무리일지라도 방어전은 충분히 해내고도 남는다고 자신할 만한 수준이다. 스페인과 비교하면 군재개혁된 조선 창병들의 숙련도가 원본인 스페인 테르시오에 밀리기는 하지만, 화력과 기병은 스페인보다 우월하므로 전반적으로는 오히려 우세하다고 할 수 있으며, 떨어지는 창병들의 능력도 말기에는 임꺽정의 검술에서 비롯된 신형 검술을 도입해 모든 병사들이 근접전에 돌입할 수 있게 만들어서 역전했다. 즉 명과 오스만이라는 대국들을 제외하면 당대에 군사적으로 열세에 처할 만한 나라가 없다.[43] 단순히 정치만 잘한 게 아니라 기술 개발에도 뛰어남을 보여줬다. 기중기, 지뢰, 열기구를 개발하고 거북선과 유귀차 석조다리의 설계까지 스스로 해냈다.[44] 다만 아직 상빈 이씨와 인현황후 민씨가 같은 상희라는 것과 재석과 상희가 미래인이고 이 두 사람의 윤회가 끝나려면 멀었다는 사실까지는 모르고 있다.[45] 실존 그림 한복 입은 남자는 네덜란드를 방문한 흥포라는 명나라 상인이 한푸를 입은 모습을 루벤스가 그린 그림을 현대에 와서 조선 한복으로 오해하여 그런 제목이 붙은 것인데, 작중의 한복 입은 남자는 진짜로 한복 입은 남자 그림이 되었다.[46] 재석 빙의 시점인 1582년 이전.[47] 2, 3부 사이에 선조 이연이 칭제건원하면서 부왕인 경종 이성을 태황으로 추존하며 묘호를 '조'로 올림.[48] 장조 시절에 이미 당장 확장할만한 곳은 다 차지한 상황이고, 지나치게 빠른 확장을 했기에 경조 시기는 추가 확장보다는 새로 확보한 영토의 내실을 다지는 것에 주력할 시기였다. 장조에게서 물려받은 아시아 역사상 최강의 군대를 손에 쥐고 있었기에 무리한 영토확장 욕심을 냈을 법도 한데 그걸 참고 내치에 집중했다는 것이 오히려 대단한 부분이다.[49] 의도한 복선인지는 알 수 없으나, 2부에서 만력제가 진안군에게 '왕이 되보지 않겠냐'는 망언을 해서 진안군의 입장이 곤란해진 적이 있는데 결국 진안군은 진짜로 왕이 되었다.[50] 이 때문에 독자들 사이에서는 수학을 가르쳐 이과생들의 원수가 될 모친 상빈이씨(=상희), 국어 문학 영역에서 문과생들의 원수가 될 정철과 함께 수험생들의 원수가 될 거 같다는 드립이 많다(...)[51] 원역사에서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처형당했는데 인조는 커녕 광해군조차 왕이 되지 못한 세상이라서 수명이 연장되었다.[52] 이 부하들 중 하나는 대유주에서 병사했다고 알려졌는데 실은 전사한 것이었거나 이괄의 성품을 생각해보면 용병일이나 약탈행위에 반대하다가 이괄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도 높다. 또 다른 부하 한 명이 바로 임경업이었다고 한다.[53] 1605년 이전.[54] 신라 법흥왕~진흥왕 재위 초반의 연호로 작중 연호들은 삼국시대 연호에서 따왔다. 연가제는 고구려, 건복제는 신라.[55] 물론 그중 몇개는 장조의 유훈을 따른 거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꽤 된다.[56] 그런데 태조의 측근 이지란이 별다른 이유 언급도 없이 무종이 처음 무묘를 만들었을 때 배향되지 않은 것은 매우 어색하다. 작가가 실수로 넣지 않았다가 뒤늦게 이지란을 떠올린 듯 하다. 아니면 이미 종묘에 태조의 배향공신으로 배향되어 있어 무묘 초기에는 중복해서 배향하지 않았다고 설정했을 수도 있다.[57] 원 역사 조선은 세자빈으로 10~14세의 소녀를 간택했으므로 열조와 진성태황태후의 연배를 보면 진성태황태후는 열조 즉위 이전에 태자비로 간택된 것으로 추정된다.[58] 김세룡이 예왕파에 붙으면서 시기만 미뤄졌을 뿐 결국 가문이 몰살당할 뻔 했지만, 김세룡이 빠른 판단으로 예왕을 손절하면서 가문은 살아남고 오히려 평난공신이 되었다.[59] 고구려의 연호. 안원왕 때 쓰인 연호로 추정되고 있다.[60] 의사이자 과학자로써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의원들의 연합세력과 병균학 토론을 벌이는 등 이야깃거리가 많은 삶이어서 후대에 창작물의 단골 소잿거리가 될 만한 인물이다. 이 세계에선 동의보감이 유럽에도 전파되어 허준의 명성이 실제보다 국제적으로도 알려졌지만, 김인황은 병리학의 시조격으로 훗날 그의 이름을 딴 의대나 상이 만들어져도 이상할 게 없어 허준보다 더 높은 위상을 차지할만하다.[61] 정황상 주상순 일당에게 독살당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62] 만약 조선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면 조선 입장에서 엄청난 민폐가 되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뇌물이 바쳐지는 것을 막았다고 웅정필을 처형시킬 정도이니 조선을 상대로도 뇌물을 요구하는 건 기본에 황제라는 신분을 앞세워 오만방자하게 굴었을 것이고, 대국의 황제라는 명분 때문에 조선 사람들은 절대로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영상군한테 잡혀 죽은 것이 조선에게는 다행인 셈.[63] 어지간해서는 가상인물 대신 실존인물을 활약시키는 슈타인호프 작가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자성이 아닌 가상인물을 등장시킨 이유는, 후송이 처한 조건이 너무 열악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방어하기도 좋지 않은 강남 땅을 기반으로 했고 주변에 우호국이 단 하나도 없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나라를 세우고, 지키고, 반격까지 하려면 주원장 이상의 능력자가 필요한데, 역사를 통해 그 능력이 어떤 수준인지 알려져있는 이자성을 시조로 내세워서는 답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64] 작가의 설정은 알 수 없지만 실제 역사에서 송 공종의 유일한 아들인 조완보는 출가하여 승려가 된 후 사사되었고 송 공종의 직계 후손은 단절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조승복이 진짜 송 공종의 후손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65] 원역사에서는 1721년에 대만에서 자신이 남명 영력제의 후손이라며 농민반란을 일으켰던 주일귀의 사례가 있다. 물론 결과는 실패해 다음해에 사망. [66] 중국에서는 소금은 한나라 때부터 국가에서 전매했기 때문에 개인이 소금장수를 한다는 얘기는 곧 잠상=밀수꾼이라는 뜻이고 관에 걸리면 작살나는 불법행위이므로 당연히 무력을 동반하게 된다. 대략 조폭 두목이나 중소 군벌이었다고 봐도 무방.[67] 시법에 맞추어서 올바르게 묘호를 받았다면 망해버린 왕조를 새로 되살려서 다시 세웠다는 의미로 세조(世祖) 또는 송나라에서 사용된 적 없으면서도 건국 시조에게 주로 추존되던 고조(高祖) 그것도 아니면 태조와 고조에 버금가는 묘호인 성조(聖祖)가 가장 적절했다.[68] 실제로는 남명 안종의 연호.[69] 북송-남송에서 英宗, 寧宗이라는 묘호를 쓰는 황제가 둘이나 있었으니, 북송, 남송과 후송을 같은 나라로 본다면 송나라에는 영종만 3명이 된다. 물론 한자는 모두 다르다.[70] 실제 남명 소종의 연호.[71] 대한에서는 화북을 영지로 내린 것은 후송이 절대 중원일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상징으로 보고 있다.[72] 원역사에서 이자성은 본래 고영상의 부관이었다가 고영상의 세력을 물려받는다.[73] 땔감으로 만력제의 무덤인 장제전을 허물어 나온 목재를 썼다.[74] 수성이 아닌 야전을 택한 이유는 주상순을 죽여서 사기가 최고조에 달한 상황에서 전투를 미루면 사기가 감소한다는 점, 민심을 얻기 위해 북경의 창고를 개방해서 농성을 벌일 군량이 없었다는 점, 건주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해서 질적인 차이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는 점 등이다.[75] 실제 장헌충이 사용한 연호와 같다.[76] 실제로는 누르하치의 연호이다.[77] 강남 없이 화북의 인구를 먹여살릴 방법이 없기에 의도적으로 인구수를 줄이기 위해 벌인 짓으로 추정된다.[78] 사실 배우지 못했다기 보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현실 역사나 작중이나 한인들은 만주족보다 인구수가 훨씬 많고, 오랜 역사와 문화를 지녔으니 아무리 민족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해도 한족에게 휩쓸려갈 수 밖에 없고, 이는 실제 역사에서도 증명되었다. 어차피 배후를 지켜줄 형제국 후금과, 큰형님 나라 조선이 있으니 한족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채택해도 버틸 수 있을거란 계산으로 이런 정책을 택했을 수도 있다.[79] 실제로는 청태종 홍타이지의 연호이다.[80] 실제 홍타이지가 후금 때 쓴 연호와 같다.[81] 금장종의 연호와 같다.[82] 금희종의 연호와 같다.[83] 원역사의 도쿠가와 이에미츠와는 다른 인물이다.[84] 요시시게와 미쓰쿠니가 서로 후계자를 교환했다. 즉 2대 타카마쓰 번주의 친부가 미쓰쿠니이다.[85] 다만 의외로 친형인 건복제에게는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때문에 건복제는 재석이 빙의한 성친왕이 개과천선했지만 자신에게도 숨기는 사실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자 통치자에 어울리는 성품이 되었다고 여기면서도 안타까워한다.[86] 다만 빙의 전에도 천방지축일 뿐이지 멍청하다는 평은 안 받았는데, 이는 예왕 측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무식한 이미지를 쌓아놓은 덕에(?) 재석이 2, 3부 사이의 74년간의 역사에 대해 잘 몰라서 헛소리를 엄청 했음에도 사람들에게 의심받지 않았다.[87] 어린 시절 잔혹한 동물 학대를 하는 것은 많은 연쇄살인범에게서 나타나는 전조 증상이다.[88] 항아리를 깰 정도면 촉이 달린 화살일 텐데 이게 빗나가 사람에게 맞았다면... 태후가 감싸고 말고 할 게 없다. 사람 상대로 이 짓을 했으니 30대가 된 뒤까지도 사람들이 진절머리 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89] 건복제는 성친왕이 늙어 죽을 때까지 귀국을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죄를 짓지도 않은 동생을 타향에서 노총각으로 늙어죽게 한다면 자신이 욕을 먹을 것이므로 명목상으로만 혼인시킨 것이다. 성친왕이 외국에서 죽는다면 적당한 아무 종친이나 하나 양자로 들여서 제사는 지낼 수 있도록. 그래서 하객도 별로 없이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치러졌다고 한다.[90] 실제로 재석의 빙의가 단 하루만 늦었으면 일어날 뻔 했다. 올렝카가 성친왕에게 먹버를 당했다면 사생아지만 올렝카를 아끼던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자기 딸의 첫 상대인데 큰 상처를 준 성친왕에게 앙심을 품고 대한에게 악감정을 품었을 것이다. 스페인에서도 명장 빌라다리아스 후작의 딸을 건드리고 나몰라라 해서 사생아 디에고가 생겼는데 연락도 못 받는다.[91] 당시 성친왕의 영혼을 심사한 판관이 "애가 그럴수도 있지" 하면서 극락행으로 판결을 내렸다고. 성친왕의 만행들 때문에 고생했던 재석은 천녀에게 이 사실을 듣고 저승에도 무슨 촉법소년 개념 같은 게 있냐, 재판이 그런 식이면 대다수가 극락에 쉽게 가겠다며 기가 막혀했고 저승 시스템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 혹평했다.[92] 임해군의 휘와 음은 같지만 한자가 다르다.[E] 원 역사 조선 현종과 동일 추정.[93] 다만 미국 독립전쟁은 거리도 멀 뿐만이 아니라 대한으로서는 딱히 개입할 실익이 없었고, 서나라 패망에는 후송 뿐만 아니라 형제국인 청나라도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개입하기 어려운 감이 있었다. 애초에 서나라 패망은 암군이 국력을 갉아먹고 안남에 양광군을 파병해서 원정을 말아먹은게 크기 때문에 이 시점에선 개입할 수 없었고, 복건군이 양광을 침공했을 때 사천군 투입 전에 남경 일대를 강습해서 군을 돌리게 하는 방법이 유일했을텐데 그래봤자 암군의 치세 동안 약화된 사천군이 청군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미지수고 기근 와중에 최소 수만명의 병력을 투입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또한 하와국 문제는 하와국의 내정에 간섭한다는 반발을 불러올수도 있었다. 그래서 후세엔 결과는 좋았다로 재평가의 여지는 있을 수 있다.[94] 사실 서나라는 운이 없는 편이기도 했지만 제국을 망하게 한 대부분의 원인을 따지고 보면 이질적인 운남, 사천, 양광을 포괄하는 다민족국가라는 것에서 기인한 것이 크다.[95] 후송으로 도망친 것으로 추정된다지만 진실은 불명.[96] 여기까지는 실제 역사와 같다.[97] 원래 자무카가 칭했던 왕호였다.[98] 원역사와 다른, 브르타뉴 공작이다.[99] 다만 하와이에 정박했을때 화와이인들이 술과 여자를 미끼로 바가지를 씌웠다고 한다.[100] 사실 고춧가루를 넣지 않은 김치는 자우어크라우트와 큰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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