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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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1957–62: 결성, 함부르크, 영국 정복
2.1. 쿼리멘
2.2. 함부르크 시절
2.3. 캐번 클럽
2.4. 메이저 데뷔
3. 1963–66: 비틀매니아, 투어 기간들
4. 1966-67: 투어 중단, 스튜디오 활동
5. 1968-1969: 애플 설립, 불화와 분열
6. 1970–현재: 해체, 그리고 그 이후
6.1. 비틀즈 앤솔로지


1. 개요[편집]


이 문서는 영국의 전설적인 밴드 비틀즈의 역사를 설명하는 항목이다.

비록 1957년 결성 이후 13년, 1962년 데뷔 이후 8년, 1964년 미국에서 인기를 얻고 난 뒤 6년 활동하고 해체했지만 이 기간동안 비틀즈는 로큰롤에서 록 음악을 정립하고, 대중음악을 바꿔놓았으며, 세계화, 1960년대 반문화(Counterculture), 포스트 모더니즘, 평화주의를 비롯한 사상, 신좌파를 비롯한 정치적 자유, 젠더 혁명, 패션, 종교, 문학, 영화, 예술 등, 그리고 기성 가치관관습의 타파, 공산주의의 몰락에도 큰 역할을 하면서 역사를 새로 썼다.

비틀즈 자체가 자유주의의 상징으로 쓰였다.


2. 1957–62: 결성, 함부르크, 영국 정복[편집]



2.1. 쿼리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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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쿼리멘 시절의 모습.[1]
1957년 6월 6일 울튼 교회에서 공연하던 존 레논


1958년 7월 12일에 녹음된 "In Spite of All the Danger".[2]

1956년, 존 레논비틀즈의 전신이 되는 쿼리멘[3]이라는 밴드를 결성하였다.[4](자세한 밴드 결성 이야기는 존 레논 문서 참고) 존은 에릭 그리프스와 같은 친구들을 대여섯명 모아 동네 공연을 다녔다.

1957년 7월 6일, 이들은 리버풀 울튼 근교의 성 베드로 교회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바로 여기서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 이뤄진다.

폴은 공연이 끝난 후 존을 만나 "Twenty FLight Rock"과 "Be-Bop-A-Lula", 그리고 리틀 리처드의 노래들을 연주하며 자신의 실력을 보여줬고, 며칠 후에 폴은 정식으로 쿼리멘에 가입하게 된다. 폴 매카트니의 정식 데뷔는 1957년 10월 18일이다.

투어를 다니는 중에 폴 매카트니는 "I've Lost My Little Girl"을 작곡하여 존에게 들려주었고, 존은 여기에 자극을 받아 "Hello Little Girl"이라는 곡을 작곡했다.

이듬해 폴은 자신의 학교 친구였던 조지 해리슨을 존에게 추천해주었다. 당시 조지 해리슨은 14살이었고, 존 레논은 17살이었기 때문에 조지 해리슨이 어리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그의 실력을 보고 조지도 가입시켰다.

이후, 쿼리멘의 멤버는 자주 바뀌었는데, 이 중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존 레논과 함께 끝까지 남으며 밴드 활동을 하였다. 쿼리멘이라는 이름은 존, 폴, 조지가 다녔었던 쿼리뱅크 고등학교에서 따온 것이었기 때문에 존이 미술대학에 진학하면서 이름을 바꾸고 비정기적으로 공연을 하게 된다.

존 레논, 조지 해리슨, 폴 매카트니[5]는 캐럴 레비스의 스타 찾기라는 프로그램에 조니 앤 문독스(Johnny and the Moondogs)[6]라는 이름으로 나가서 꽤 환호를 받았지만 당시 캐럴 레비스의 스타 찾기는 마지막에 모든 밴드가 나와 노래를 몇 마디 연주하고 관중의 박수소리로 우승자를 결정하는 시스템이었는데, 마지막까지 있었으면 리버풀행 기차를 놓쳤기 때문에 중간에 나와야 했다.

이후, 존은 미술 대학교에서 화가를 꿈꾸던 스튜어트 서트클리프라는 친구를 사귀었는데, 그가 마침 존 무어스 전시회에 입선하여 60파운드를 얻자 베이스를 사게 꼬드겨서 밴드에 끌어들인다. 하지만 서트클리프 본인은 "이게 내 적성에 맞나?"라며 활동 내내 회의감에 젖었다고. 일설에 의하면 존한테 속았다고 불평했다.(…) 스튜어트의 여자친구는 사진작가였는데, 그녀가 스튜어트를 따라다니며 찍은 사진들은 몇 남지 않은 비틀즈 초기 사진이 되었다.

1959년 후반, 존 레논은 당시 잘나가던 밴드 The Crickets(귀뚜라미)[7] 같은 이름을 생각하다가 서트클리프가 제안한 Beetles(딱정벌레)라는 단어에서 드럼루프를 뜻하는 음악용어 비트(Beat)를 집어넣어 Beatles라는 이름으로 썼고, 이것이 비틀즈의 이름의 유래가 된다.

그 이름을 들은 친구는 키다리 존과 실버 비틀즈(The Long John and the Silver Beatles)[8]가 어떠냐고 하고 당시에는 그냥 넘겨버렸다. 이들은 래리 판스의 오디션에서 약속했던 드러머가 오지 않아서 이름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래리 판스의 조수가 이름을 묻자 '실버 비틀즈'(The Silver Beatles)라는 이름을 댔고 이 이름은 1959년 남은 기간동안 그들의 이름으로 굳어졌다.

래리 판스의 오디션에서는 오디션에 왔던 다른 밴드의 조니 허치(Jonny Hutch)가 대신 드럼을 연주해주었다. 실버 비틀즈는 결국 오디션의 원래 목적이었던 빌리 퓨어리의 반주를 맡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래리 판스가 그가 거느리고 있던 가수 중 가장 무명이었던 조니 젠틀의 반주를 2주간의 스코틀랜드 연주 여행을 제안했다. 실버 비틀즈는 이를 받아들이고, 토마스 무어(Thomas Moore)라는 드러머를 찾아내 연주 여행을 떠났다.

이 실버 비틀즈 시절, 멤버들은 스테이지에 호명될 가명을 썼다. 존 레논은 조니 레논(Johnny Lennon)으로, 조지 해리슨은 자신이 좋아하던 칼 퍼킨스를 따라 칼 해리슨(Carl Harrison)이라고 지었으며, 폴 매카트니는 프랑스식 억양이 멋있어 보여 폴 라몬(Paul Ramon)으로 지었다고.[9]


2.2. 함부르크 시절[편집]


파일:external/dackel.files.wordpress.com/heiligengeistfeld2.jpg
함부르크 시절 비틀즈의 초기 멤버.
왼쪽부터 피트 베스트, 조지 해리슨,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스튜어트 서트클리프

연주 여행을 끝내마치고 어퍼 팔러먼트 스트리트의 스트립 클럽에서 몇 번 출연하고 매튜 스트리트의 캐번 클럽에서도 출연한다. 하지만 재즈가 인기였던 캐번 클럽에서는 비트곡을 연주하는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서로의 집을 돌아다니거나 돈이 있으면 클럽에서 시간을 보내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러다 매니저 앨런 윌리엄스의 함부르크 투어 제안으로 그들은 평소 알고 지내던 카스바 클럽의 주인의 아들 피트 베스트(Pete Best)와 같이 1960년 8월 함부르크로 떠나게 된다.

함부르크 투어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 때를 두고 존 레논은 "난 리버풀에서 태어났지만 함부르크에서 자랐다"라고 한 바 있다. 당시 이들은 쉬는 시간도 충분치 않아서 거의 12시간 동안이나 연주를 해야 했고[10] 각성제와 맥주로 살인적인 공연 스케줄을 버텼다고 한다. 특히 서트클리프는 자신이 음악적 재능이 있는가에 대해 회의감이 더해져서 더욱 고초를 겪었다. 사실 그는 미술학도가 되고 싶었는데 위에서 말한 대로 존에게 낚여서 끌려온 셈이나 다름없었고, 당시 여자친구였던 아스트리드 키르헤(Astrid Kirchherr. 이에 대해선 맨 아래 스튜어트 서트클리프 문단에서 묶어서 설명)의 충고도 있고 하여 많이 방황했다.

도 많이 늘었지만 1962년 12월 조지는 당시 미성년자였던 것이 독일 당국에 적발되어 추방당하고 나머지 멤버들도 확실하지 못한 이유로 다시 리버풀로 돌아가게 되었다. 비틀즈 평전의 저자 헌터 데이비스는 클럽 간의 분쟁으로 인한 결과라는 추측을 냈다. 레이 코널리의 존 레논 전기에 따르면, 폴 매카트니와 피트 베스트가 방화사건을 일으켜서 추방당했다고 한다.[11] 비틀즈가 카이저 켈러 클럽에서 탑텐 클럽으로 이적하자 카이저 켈러 클럽 주인 코르슈미트가 조지 해리슨이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독일 경찰에 신고해 버렸고, 조지 해리슨이 추방당한 데에 앙심을 품은 폴 매카트니와 피트 베스트는 클럽 극장 벽에다 방화를 하고 The Beatles라고 글씨를 남겼다. 이것 때문에 두 사람도 역시 독일에서 방화범 혐의로 추방당했고 뒤에 남은 존 레논과 스튜어트 서트클리프도 어쩔 수 없이 리버풀로 돌아가게 되었다.


2.3. 캐번 클럽[편집]



1962년 8월 22일, 캐번 클럽에서 연주한 "Some Other Guy".[12]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ennon_Statue%2C_Liverpool.jpg
캐번 펍 앞에 세워진 존 레논의 동상.[13]

리버풀로 돌아온 비틀즈는 카스바 클럽에서부터 공연을 시작하며 1960년 12월 27일, 그들의 가장 중요했던 첫 공연인 리더랜드 회관에서 공연을 했다. 1961년부터 리더랜드의 대성공을 이어 나가는 연주 계약이 계속 이루어지며 비틀즈는 리버풀 최고의 밴드였던 로리 스톰 앤 허리케인즈(Rory Storm and the Hurricanes)를 따라잡고 있었지만 그들 자신은 그들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비틀즈는 1961년 1월부터 캐번에 정기적으로 출연하기 시작하며 처음에는 스윙잉 블루진스(Swinging Bluejeans)라는 세미 재즈 밴드과 번갈아 공연했다. 이 당시 즉흥 연주로도 유명해진 비틀즈는 캐번에서 대성공을 거둔다. 이 덕분에 캐번 클럽은 비틀즈의 본무대 비슷한 곳이 되었다(물론 그 외의 다른 유명 밴드들도 이 곳을 거쳐갔다.). 이후 1961년 4월, 두 번째 함부르크 여행을 시작하며 탑텐 클럽에서 매일 밤 7시부터 새벽 2시까지(토요일은 새벽3시까지였다.) 공연을 했고 밤을 세우는 연주를 버티기 위해 피트 베스트를 제외한 멤버들은 각성제에까지 손을 댔다.

이 여행에서 스튜어트 서트클리프는 함부르크에 남아 아스트리드와 결혼해서 다시 미술 공부를 하려고 마음먹고 에두아르도 파올로치(Eduardo Paolozzi)라는 스코틀랜드 태생의 유명한 조각가 출신 객원 교수의 도움으로 미술대학에 등록하고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는다. 그의 탈퇴로 베이스는 폴 매카트니가 맡게 된다. 그가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 백비트(1994)에서 병들어 있다는 이유로 탈퇴하는 걸로 나오는데, 실제로 그는 1962년 겨우 22살에 뇌출혈로 병사했다. 피트 베스트와 더불어 비틀즈의 또다른 멤버로 거론되는 것 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90년대 중순에서야 그가 초창기에 참여한 앨범들이 발매되면서 유족들이 그 수익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함부르크에서 그들의 첫 음반[14]으로 토니 셰리던이라는 탑텐 클럽 출연 가수의 반주를 맡아 녹음하게 됐다. 그게 바로 My Bonnie.이 앨범에서 비틀즈는 비트 브라더스(The Beat Brothers)[15]라는 이름으로 참여했으며 몇 곡같은 경우는 비틀즈의 곡이었다.

비틀즈의 탄탄한 연주 기본기는 이 때의 하드 트레이닝에 가까운 나날들로 인해 다져졌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쌓아올린 기본기 위에 대중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멜로디를 써냈으며, 드디어 그들의 재능이 만개하는 날이 다가왔다.


2.4. 메이저 데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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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고 스타를 영입하며 드디어 완성된 비틀즈.


그들의 메이저 데뷔 곡 "Love Me Do"[16].

이후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만나게 되면서 그와 계약을 체결한다. 본래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가, "비틀즈? 완전 미친 X들이야"라는 지인의 평가에 궁금증이 생겨 그들의 공연장을 방문했고, 그들의 열정에 선뜻 매니저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죽을 때까지 비틀즈를 지원했다.[17] 그러나 그의 노력에 비해 대가는...엡스타인과 관련 인물들에 대해선 맨 아래에 문단 참고.

엡스타인은 비틀즈의 매니저가 된 이후 그들의 열정을 보고 음반을 내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엡스타인은 몇 번이고 런던으로 날아가서 레코드 회사들[18]과 수 차례 면담을 가졌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그러던 중 엡스타인은 "데카 레코드 사(Decca Records)"에서 오디션을 한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도 신청을 넣는다. 1961년 12월 31일에 비틀즈는 닐 애스피놀(Neil Aspinall)과 함께 런던으로 여행을 떠났지만, 애스피놀이 길을 잃는 바람에 가는 데 10시간이 걸렸다. 결국 저녁 10시에나 도착했고, 존 레논은 "트라팔가 광장에서 술주정뱅이들이 뛰어댕기는 시간대"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그 다음날인 1962년 1월 1일, 그들은 데카 레코드 사에서 오디션을 보며 15곡[19]을 1시간 동안 연주하게 된다. 게다가 비틀즈는 나중에야 엡스타인이 스튜디오에서의 녹음을 위해 데카 레코드 사의 프로듀서인 토니 미한(Tony Meehan)에게 돈을 줬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데카 측에선 비틀즈를 탈락시켰다. 이유인 즉 "기타 그룹은 쇠퇴할 것이며, 비틀즈는 공연 사업에서 미래가 없다"는 것.[20] 어쨌든 미한은 비틀즈와 같은 날에 오디션을 보고, 현지 그룹인 "트레몰로스"를 선택했다. 이 일은 흔히 대중음악 역사상 최악의 오판으로 꼽히며 데카 레코드 사는 이로 인해 지금까지도 계속 까이고 있다.[21]

엡스타인은 데카 말고도 EMI 레코드 사와도 접촉을 취하고 있었는데, (프로듀서가 아니었던) 마케팅 총괄담당자 론 화이트(Ron White)가 엡스타인과 만난 뒤 프로듀서들을 설득했다. 여기서 좋은 반응이 나오자 함부르크로 연주 여행을 다니고 있던 비틀즈는 런던으로 돌아와 EMI의 산하 레이블인 파를로폰(Parlophone)과 계약을 맺고, 거기서 '코미디 앨범'을 만든 조지 마틴과 만나 앨범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된다.

1962년 6월 6일, 런던의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마틴의 지휘 하에 첫 레코딩 세션을 가졌다. 마틴은 드러머 피트 베스트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아 불평했고, 결국 8월 중순 링고 스타가 피트 베스트를 대신하여 영입되었다. 뒷이야기에 따르면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핑계였을 뿐, 그 실질적인 이유는 오리지널 멤버들(존, 폴, 조지)과의 불화였다고 한다. 학창시절부터 함께해왔던 이들 세 명과 피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리감이 있었고 이를 계속 불편하게 생각했던 오리지널 멤버들은 메이저 데뷔 직전 마틴에게 피트의 탈퇴를 부탁했고 그것을 받아들인 마틴이 연주를 핑계로 피트를 링고로 교체시킨 것이다.

1962년 10월 5일에 발표된 첫 싱글 "Love Me Do"가 리버풀 팬들의 성원으로 차트 17위에까지 진입하며 성공적으로 데뷔했다[22]. 다음 해 1월에 발표된 두 번째 싱글 "Please Please Me"는 마틴의 예상대로 그들의 첫 차트 1위 곡이 되었다.[23]


3. 1963–66: 비틀매니아, 투어 기간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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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FK 공항에서의 비틀즈. Touring Years의 시작.
당시 유명 사진잡지였던 라이프지의 커버.

3.1. Please Please Me, With the Beatles[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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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에 환호하다 기절하는 여성 팬들이 속출하기 시작. 이는 1년 후 미국으로 이어진다.


비틀즈를 스타덤에 오르게 한 싱글 "Please Please Me"[24]
두 싱글의 성공에 이어 1963년 1월, 9시간 45분 동안 10곡을 녹음하여 발표된 그들의 첫 정규 앨범 Please Please Me도 각종 차트에서 1위에 등극한다. 7주간 1위를 차지한 세 번째 싱글 "From Me to You"에 이어 8월에 발표된 네 번째 싱글이자 그들의 첫 밀리언 셀러인 "She Loves You"는 6주간 1위를 차지한 것은 물론 당시 영국에서 가장 빨리 팔린 음반이자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이 되었다.

첫 전국 투어가 시작되었을 때 이미 그들의 인기는 영국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수천 명의 여성팬들이 그들을 따라다니며 비명을 질러댔는데, 바로 비틀매니아의 시작이었다. 당시 영국 최고의 TV 프로그램이었던 'Sunday Night at the London Palladium'에서의 공연은 약 1,500만 명이 시청했고 그동안 그들을 애써 무시하던 보수 언론과 기성세대들마저 굴복시키며 비틀매니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비틀즈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되었고 각종 신문과 잡지, 방송에서 그들이 헤드라인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With the Beatles"에 수록된 "All My Loving"
30주 동안 영국 차트 1위를 고수하던 데뷔 앨범 Please Please Me는 그들의 두 번째 앨범 With the Beatles에게 1위 자리를 내준다. With the Beatles는 영국 차트 역사상 두 번째로 100만 장 이상 판매한 앨범이 되었다.


3.2. 브리티시 인베이전[편집]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촉매가 된 I Want To Hold Your Hand. 1964년 2월 9일 에드 설리번 쇼.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미국 진출을 위해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4만 달러를 들여 마케팅 캠페인을 벌였고, '에드 설리번 쇼' 출연 계약을 체결한다. 라디오 전파를 탄 "I Want To Hold Your Hand"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그들의 빌보드 차트 첫 1위 곡이 되었고 미국에서만 5백만 장이 판매되었다. 그동안 영국 음악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던 미국 시장의 문이 열리는 순간.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시작이었다.



1964년 2월 7일, JFK 공항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 영상에서 보이듯 수 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

많은 사람들이 설리반 쇼가 미국 역사와 세계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이었던 이유를 이해하지 못 합니다. 미국은 매우 고통스러운 애도의 시간을 겪었습니다. … 엄청난 양의 절망, 비탄, 실망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여전히 한 국가로서 슬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은 것 같습니다. 비틀즈는 미국에 음악 이상의 무언가를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가져왔습니다.

마이크 허커비, 전 아칸소 주지사 및 미국 대통령 후보 #


일부는 20세기 후반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밤이라고 한다.[25]

CBS #


1964년 2월 7일, 비틀즈가 존 F. 케네디 공항에 도착했을 때 수천 명의 팬들이 그들을 맞이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들이 출연한 '에드 설리번 쇼'는 무려 2,300만 가구, 7,300만 명 이상(당시 미국 인구의 약 40퍼센트, 그리고 텔레비전 시청자의 60%였다.)이 시청했는데 당시 닐슨에 따르면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시청한 미국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되었다.[26] 비틀매니아로 뒤덮힌 워싱턴 콜리세움과 카네기 홀에서의 공연 이후 두 번째로 출연한 '에드 설리번 쇼'도 또 한 번 7,000만 명의 시청자를 불러 모았다. 컬러 복원된 비틀즈의 에드 설리번 쇼 출연 또한, LP가 주류 매체이던 당시에 비틀즈의 음반이 광풍적으로 팔리며 기존 대중음악 시장에 유례없는 대호황이 오면서, 음악 시장은 폭발적인 성장을 맞이하게 된다.[27]

비틀즈가 처음 미국을 방문했을 때는 지난 1963년 11월 일어난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에 대한 애도가 나라에서 아직 가시지 않은 때였다. 논평가들은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이 날의 비틀즈 공연은 암살 이후 잠시 동안 사라졌던 흥분감과 가능성을 재점화시켜주었으며,# 또한 다음 십년대에 올 혁명적인 사회 변화에 길을 터주는 데 기여하였다고 말한다. 암울했던 미국 사회는 비틀즈의 로큰롤 침공으로 다시 사회적인 활기를 되찾는다.#

그러나,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기성 기득권의 대대적인 반발을 받았는데, 사회적으로 기득권들에게 숱한 질타는 기본이고, 정치계는 물론, 종교계에서도 난리가 아니었다. 어느정도였나면 정부 기관이 나섰을 정도였다. 미국 노동부가 문화적 보수주의에 동기를 부여하고, 로비를 받은 미국 음악가 연맹과 미국 이민귀화국이 비틀즈의 미국 공연을 금지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실패로 돌아갔고, 모두 이겨내고 기존 기성 세대의 가치관을 타파한다. 참고로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로널드 레이건 주지사는 이 시기의 비틀즈를 비판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는다.#

인종차별과도 맞닥드리는데, 바로 1964년, 잭슨빌 게이터볼 공연 에피소드로 이때 비틀즈는 역사상 대중 음악계 최초로 관중석 인종 분리를 부셨다. 공연장에 인종 분리가 있을 거라 들은 비틀즈는 공연을 거부하였고, 격렬한 대치 끝에 결과를 받아냈다. 당시 존 레논은 이러한 말을 하며 완강히 거부했다고 한다 "인종이 분리된 상태로는 절대 공연치 않을 것이며 지금 시작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 차라리 출연료를 날리고 말지요." 시 공무원은 결국 비틀즈의 손을 들어주고 인종을 분리치 않고 공연을 진행시켰다. 비틀즈는 잭슨빌의 호텔 조지 워싱턴의 백인 전용실에 대한 예약도 취소하였고, 이후로 1965년과 1966년의 마지막 공연에서도 비틀즈는 계약서류 조항에 인종차별이 없을 것을 명기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렇게 민권법 운동을 공식적으로 지지하며 파란을 불러온다.

미국 전역이 비틀즈의 폭발적인 인기로 초토화되었는데, '오빠 부대'가 항상 그들을 따라다녔다. 그들이 덮고 잤던 담요가 조각으로 나뉘어 팔리기도 했으며[28] 그들이 목욕할 때 사용한 물을 병에 담아 팔자는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 그만큼 그들의 인기는 전대미문의 사회 현상이었다. 이토록 적극적이고 열성적으로 집착하는 여성팬들은 이후 영국, 미국 록 음악계의 독특한 팬덤 문화로 자리잡게 되는 그루피족 문화의 시발점이 된다. 이는 자유로운 성문화를 조성했으며, 성 개방화의 큰 영향을 주었다.

패션 아이콘으로서, 당대부터 지금도 패션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 어떤 뮤지션보다 스타일이나 의류를 가장 크게 보편화한 뮤지션으로 뽑혔으며, 개별 멤버로도 존 레논은 여전히 스타일 아이콘으로 언급되고, 그의 스타일 아이템 등은 재생산되며 소비된다. '비틀즈 룩'으로도 불리는 '모즈 룩'은 기존 청교도 문화와 짙은 마초적인 시대상이었던 미국인들의 기존 관념에서 비틀즈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모즈(mods)’란 ‘모던즈(moderns)’의 약칭으로 런던 카나비 스트리트의 젊은 세대를 모즈라 불렀는데, 이들이 공유하는 스타일을 모즈 룩이라고 불렀다. 모즈 룩은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기존의 관습이나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옷차림이란 의미인데, 1960년대 초반 비틀즈가 크게 유행시켰다. 그들의 슬림한 상의핏과 넥타이(or노타이), 이전보다 슬림한 바지핏, 발목 길이의 밑단 등은 현대의 정장 스타일의 기준이 됐다. 지금도 패션업계에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비틀즈는 스티브 맥퀸과 함께 터틀넥 니트를 유행시킨 장본인들이며, 캐주얼 패션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또한, 비틀즈와 그들을 중심으로 성장한 1960년대 반문화의 영향으로 10대-20대 중심의 패션 서브컬처의 발달한다. 일상 패션에서는 정장, 특히 중절모 착용이 쇠퇴했고, 미니 스커트의 발명과 대중화, 남녀 모두에게 청바지가 베이스가 된 스타일링이 대중화됐다.

세계화의 첫 시작점으로도 평가된다. 수십 년 동안 미국은 할리우드 영화, 재즈, 브로드 웨이 와 틴 팬 ​​앨리 음악을 통해 전 세계의 대중 엔터테인먼트 문화를 리드했었다. 그러나 1964년 초, 라이프 매거진은 "영국은 미국 식민지를 잃었었지만, 비틀즈가 식민지를 되찾았습니다."라고 선언한다.# 미국이 리드하던 엔터테인먼트 문화가 비틀즈에 의해, 영국의 색으로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영국에서 시작된 로큰롤의 재탄생이 비틀즈를 계기로 다시 미국에 전파되었고, 많은 인적 자원을 가진 미국을 거치며 더욱 거대한 태풍으로 확대되어 전 세계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이런 파장은 단순히 음악이나 문화계 내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적인 영향으로도 뻗어 나갔는데, 68혁명, 히피, 문화적 자유주의 등 세상을 뒤흔들었던 근간이 되었으며, 영국을 세계적인 문화의 상징으로서 크게 진화시키는[29] 경제로서의 효자 노릇을 맡아주기도 했다.[30]

특히 자유주의를 상징했던 비틀즈의 영향력은 전 세계로 뻗쳐나가는데 소련같은 공산권도 절대 예외가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소련을 뒤집어 놨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소련을 비롯한 양측 동맹국 사이에서 긴장, 경쟁 상태가 이어진 냉전 시기, 소련 진영에 속하는 국가들의 ‘철의 장막’에 침투한 비틀즈코드(비틀즈의 음악·패션 등)는 이념 대립과는 별개의 문제로 공산권 국가를 흔들어 놓았다. 1960년대를 지배하던 비틀즈는 생활과 밀접한 이야기나 개인의 감정을 음악이나 옷차림으로 자유롭게 표현했고, 그 키워드이자 ‘비틀즈코드’는 ‘자유분방함’으로 이 신드롬은 철의장막 속의 소련이나 키예프 등의 공산권 국가에도 침투했다. 하지만 공산권 국가에서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개인의 개성이나 자유 등의 민주적이고 자유주의 문화를 인정하지 않았고 소련 정부 측에서는 체제선전용 연극과 노래공연 등을 이용해 ‘건전한 체제·문화를 이룩하자’는 구호아래 선전활동에 힘을 쏟았다. 암시장에서 당시 노동자 월급 이상의 액수에 비틀즈 앨범이 비밀리에 활발히 거래되었는데, 그 풍경은 가히 007 작전을 연상케 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엑스레이 사진을 병원에서 저렴하게 사거나 폐기된 엑스레이 사진에다 음악을 입히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이렇게 만든 앨범은 '뼈에 와 닿는 음악(on the bones)'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이 방법은 1950년대부터 이용되던 방법이었지만, 비틀즈의 광팬들로 인해 대중화되었다.

비틀즈 문화를 막기 위해 정부가 민병대를 조직하여 단속했고, 음반을 가지고 다니다 적발되면 바로 대학교에서 제적당하는 등의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자유를 맛본 젊은이들은 녹음기를 이용해 서로 다른 음반을 사서 따로 녹음해 나눠 갖거나 '해적판'을 이용해 꾸준히 음반을 접한다. 결국 소련도 경제적 실리도 취할겸 젊은이들의 열망에 항복했고, 후에 소련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등장(1990~)했을 때, 고르바초프는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어떤 종교보다, 베트남전이나 어느 전쟁이나 핵폭탄보다 냉전 확산의 가장 중요한 단일 원인은 비틀즈였다."라는 말을 남기며,# “비틀즈로 소통했고, 개혁했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였다.# 프라하의 봄 당시 시민들이 Hey Jude를 시위대의 상징 곡으로 사용하는 등, 레논 벽민주화의 상징이다. 비틀즈는 공산권에서 "자유주의 문화"의 위대한 사례로 알려져 공산권의 반서구적이고 폐쇄적인 체제를 무너트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비틀즈공산주의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2021년 USA 투데이의 켄 반즈(Ken Barnes)의 분석 기사에 의하면 당대 미국 음악 신의 약 34%가 브리티시 인베이전으로 인해 몰락했으며, 나머지 음악가들은 어느 정도 타격을 입었으나 살아남았고 그 중 24%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꾸준히 인기를 유지했다. 미국 음악계의 약 1/3이 무너진 셈이니 가히 '침략'이라 부를 만 했다.


3.3. A Hard Day's Night[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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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인기의 최절정

세 번째로 빌보드 1위를 차지하며 많은 기록을 만들어 낸 "Can't Buy Me Love"의 라이브 영상.

1964년 3월, 비틀즈는 6주간 그들의 첫 영화인 A Hard Day's Night 촬영에 돌입하는데, 이 영화는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다. 이 영화는 작가가 비틀즈의 순회공연을 동행하며 일거수일투족을 직접 관찰하면서 각 멤버들의 재미난 개성을 파악한 후 시나리오에 그대로 반영하였는데, 이로 인해 실제 비틀즈 멤버들의 성격이 생생하게 잘 반영되면서 사실성과 재미를 살려낸 영화가 되는데 기여한다.

비틀즈 멤버들도 작위적으로 '연기한다'는 생각보단 그냥 평소처럼 즐기듯이 촬영에 임했는데, 그래서 영화다큐멘터리가 결합된 듯이 살아숨쉬는 독특한 작품이 되었다. 영화예술의 생명력을 주장하는 기념비라는 찬사부터, 실제로 이 영화로 대중음악 영화의 기본 형식이 만들어졌고 주크박스 뮤지컬의 시민 케인이라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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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ard Day's Night의 앨범은 앨범 커버로도 파장을 몰고 온 작품이었다. 제일 초반에는 다른 뮤지션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뮤지션 사진만 들어간 단순한 커버에서 시작했지만, 1964년 A Hard Day's Night에서 마치 영화 필름의 연속 스틸을 늘어놓은 듯한 사진 이미지를 커버에 배열하는 신선한 아이디어를 선보였고, 이러한 시도는 후에 혁신적인 앨범 아트들로 이어진다.

동명의 사운드트랙 앨범도 음악적으로 빼어난 수작이었다. 특히 조지 해리슨의 찰랑거리는 리켄배커 기타 연주는 '쟁글 팝'이라는 장르의 효시가 된다. 커버곡 없이 그들의 자작곡으로만 구성된 첫 앨범이기도 하다. 상업적으로도 성공해서 영국 UK 차트에서 21주간,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 14주간 1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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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4월 4일, 빌보드 핫 100.
빌보드 역사상 유이한 1~5위 석권[31]

비틀즈 열풍으로 인해 빌보드 차트 정상을 차지한 비틀즈의 곡을 비틀즈의 다른 곡이 밀어내고 1위에 등극하는 사태까지 벌어지면서 그들의 노래 셋이 연속으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는데[32], "Can't Buy Me Love"가 1위에 올랐던 4월 4일에는 싱글 차트에서 1위부터 5위까지 독식하며 100위 안에 모두 12곡을 포함시켰으며 앨범 차트에서도 1, 2위를 독점한 것. 싱글차트 1~5위 싹쓸이는 2021년 드레이크가 다시 달성할 때까지 57년이나 걸렸다. 충격과 공포[33][34]

세계 어디서든 비틀즈가 연주하는 곳마다 열광의 행태가 반복되었다. 그룹이 1964년 6월 호주를 여행했을 때, 호주인들은 비틀즈의 방문을 국가 행사의 지위로 만들었다. 30만 명의 군중이 애들레이드에 도착한 비틀즈를 환영한 것이었다. 이 기록은 호주인들이 한 장소에 모인 가장 큰 기록 중 하나라고 한다.[35]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의 헤어스타일과 복장, 태도를 반항의 상징으로 여기며 따라했다. 이러한 영향을 받으며 당시 혼란스러운 미국, 세계 정세에 반체제적인 정서가 성립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1960년대 반문화가 정립됐다. 비틀즈는 의도했던 그렇지 않던, 반문화의 리더로 인식받았다. 반문화는 서구 세계로 확산된 반체제 문화 현상으로, 개인에 대한 존중, 인간의 성, 여성의 권리, 전통적인 권위 방식에 대항, 같은 사회인으로 평등, 비백인들의 권리, 인종차별의 종식, 향정신성의약품에 대한 실험,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다른 해석 등에 따라 흘러갔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된 많은 주요 운동들은 1960년대 반문화권 내에서 시작되거나 발전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반문화의 영향으로 환경에 대한 의식이 증가하고, 환경운동이 크게 시작된다.

그 반문화 중 하나로 히피 문화가 등장했고, 히피는 도덕이나 이성보다 감성, 즐거움, 자유로움과 개인주의적 사상을 추구했다. 히피 문화는 평화, 반전주의 등을 이끌다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이전의 낡은 근대적인 시대와 함께 종말을 맞는다. 비틀즈의 엄청난 성공에 힘입어 롤링 스톤즈, 더 후를 비롯한 영국 록밴드들도 미국에 성공적으로 데뷔하게 되었고 그 후로도 수년간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미국 전역을 휩쓸었다.

8월, 저널리스트 알 아로노비츠의 주선으로 밥 딜런과의 만남이 성사된다. 기존 포크 음악만으론 음악적 표현력의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던 밥 딜런은 10대 시절 당시 음악시장의 변화로 인해 접었던 로큰롤 음악에 대한 열정을 비틀즈를 통해 다시 한번 일깨우게 되었고, 비틀즈와의 만남까지 원하고 있었다. 반면, 영국인이었던 비틀즈는 미국 포크음악인인 딜런에 대해서 잘 몰랐기 때문에 만남 요청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이었다.[36] 이에 딜런은 비틀즈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마리화나를 선물로 준비한다.[37] 이 만남은 이후 비틀즈와 딜런 상호간에 음악적인 영향을 주고 받는 큰 계기가 되었다.[38] 특히 조지 해리슨과 딜런은 사적으로도 친한 친구 사이가 된다.

3.4. Beatles for Sale, Help![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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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10월 26일, 버킹엄 궁전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MBE 훈장을 수여받을 때.


1965년 첫 빌보드 1위 곡이 된 "Eight Days a Week".[39]

네 번째 앨범인 Beatles for Sale은 상업적 압력과 창작욕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혹독한 스케줄과 피로로 인해 모든 곡을 자작곡으로 채우지는 못했으나 A Hard Day's Night를 차트 1위에서 끌어내리며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다.

1965년 6월 11일,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비틀즈를 MBE로 임명하자 논란이 일었다. 그 전까지 MBE 훈장은 군 베테랑과 시 지도자에게만 수여되었던 것으로 뮤지션에게 훈장이, 그것도 젊은 로큰롤 가수가 받은 것은 처음 있던 일이었다. 이 여파로 이때 몇몇 보수 MBE 서훈자들이 훈장을 반납하는 일이 벌어졌다. 훈장은 가장 낮은 등급이었지만 당시 보수적이던 영국 사회에는 하나의 큰 파장이었다. 1960년대 당시 영국 상류계층 사회는 굉장히 보수적이었다. 얼마나 보수적이었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면 당시 엘리자베스 2세가 가나를 방문하여 외교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폐하께서 어찌 감히 흑인하고 손을 잡고 춤을 춘다는 것인가?'라며 반발하거나 부왕 필립 공이 BBC를 활용하여 왕실의 일상을 보여주고자 했을 때도 신성함이 없어진다!라며 내각의 극렬한 반대를 받았다. 특히나 당시 영국 사회에서 훈장을 받는 다는 것은 군사적, 외교적 공을 세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양복을 입고 노동자계층에서나 즐기는 시끄러운 음악을 연주하며 귀족들이 지키던 예절은 밥말아 먹은 듯한 비틀즈에게 그저 돈 많이 벌었다고 훈장을 주는 것은 상류층 사회에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1965년 8월 1일 블랙풀, Yesterday가 세상에 최초로 공개되던 순간.

7월에 개봉한 비틀즈의 두 번째 영화 Help!는 상반된 반응을 얻었으나, 사운드트랙 앨범이자 다섯 번째 앨범인 Help!는 음악적으로 진일보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그들의 일대 변신을 예고했다. 특히 현악 사중주가 도입된 "Yesterday"는 역사상 가장 많은 커버 버전을 가진 곡이 된다.(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팝송 100선 같은 데에 절대로 빠지지 않는 곡 중 하나다.) 이 앨범에 수록된 "You've Got to Hide Your Love Away"에서 플루트는 존 스코트라는 음악인이 연주했는데, 이는 비틀즈 최초로 세션맨이 참여한 사례가 되었다. 비틀즈는 Help! 영화 촬영을 위해 바하마로 촬영을 갔었는데, 조지 해리슨이 여기서 시타르를 접하게 된다.


역사적인 셰이 스타디움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Twist and Shout".

8월 15일, 뉴욕 셰이 스타디움(Shea Stadium)에서의 공연은 역사상 최초로 대형 스타디움에서 펼쳐진 공연이었다. 또한 55,600명의 관중으로 세계 기록을 경신했다.[40] 투어는 연일 성황을 이루었다. 이 시기, 그들의 아이돌이었던 엘비스 프레슬리가 베벌리힐스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 여기서 전체를 들어볼 수 있다.

1965년, 비틀즈는 Ticket to RideDay Tripper를 통해 음악적 변화를 알렸다.


3.5. Rubber Soul[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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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ber Soul의 앨범 커버. 처음으로 그들의 이름이 커버에 쓰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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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 직후인 1965년 12월의 비틀즈.

10월, 비틀즈는 처음으로 아무런 방해 없이 앨범 제작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투어도 잠시 쉬는 시간이었지만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을 노려 앨범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거의 한 달 만에 앨범을 만들었다. 이 앨범이 Rubber Soul이다. 종래의 대중 음악계[41] 관행과는 달리 한 곡도 싱글컷팅을 안 해서 앨범 전체 단위로의 감상이 요구되었고, 곡들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주제 등이 통일성 있게 어우러졌졌기 때문에 앨범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든 현대 대중음악 역사상 최초의 사례로 평가받게 된다. 그리고 이전의 히트곡만 듣거나, 레코드를 구매하더라도 앞뒷면에 한 곡만 들어있는 '싱글' 레코드를 사서 그 한 두곡만 듣는게 거의 전부였던 기존의 대중음악계에서 앨범시대를 일으킨 역사적인 기념비다.[42] 앨범 아트도 혁신적이었는데, 아티스트의 이름은 없고 제목만 적힌 커버로 Rubber Soul이라는 제목 글자 디자인과 사진 구도가 "물렁물렁한 고무 영혼"이라는 제목이 주는 느낌에 딱 어울리도록 묘하게 구부러져 있는 디자인이다. 앨범 아트의 예술화는 Revolver에서 절정을 맞는다.

팬들은 시적인 노랫말의 의미를 파헤치려고 애썼고, 문학계에서도 비틀즈의 가사를 주목하면서 분석을 하기 시작한다. 해리슨이 시타르를 도입한 "Norwegian Wood (This Bird Has Flown)"은 동서양 퓨전으로 인한 이국적인 느낌을 풍기며 대중음악의 경계를 넘은 새로운 시도가 되었다. 이 앨범은 당시의 록 뮤지션들에게 앨범을 마구잽이로 곡들을 집어넣어 채운 모음집이 아니라 '모든 수록곡이 뛰어난 완성도를 가지고 전체로서 감상 단위가 되는 앨범'이라는 가능성과 매력을 인식시킨 계기가 됐다. 특히 비치 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은 이 앨범에 큰 감명과 영향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명반 Pet Sounds를 만들게 된다.

4. 1966-67: 투어 중단, 스튜디오 활동[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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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의 모습
1967년의 모습


4.1. 마지막 투어까지의 사건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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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의 음반을 불태우는 바이블 벨트의 기독교 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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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칸에서 진행된 일본 투어[43]

1966년 6월, Yesterday and Today[44]로 인해 대소동이 일어났다. 그들의 앨범을 "도살하던[45]" Capitol에 대한 비틀즈의 항의가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지만, 사실 사진작가 로버트 위태커의 의도였다. 앨범은 전량 회수되어 새로운 커버로 교체되었고, 원래 버전은 2005년 12월, 경매에서 10,500달러에 낙찰되었다. 한편 영국에서는 해리슨이 시타르의 거장 라비 샹카르에게 시타르 연주를 지도받는다.

비틀즈의 일본 콘서트가 계획되기도 했다.[46] 일본 정부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하라고 요구했으나[47] 정치와 연계되는 것을 꺼린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방침으로 인해 성사되지는 않았다.[48] 비틀즈의 공연 중단 직전인 1966년 일본 무도관에서 공연을 가졌는데 그 당시 부도칸은 천황이나 높으신 분들이 연설을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비틀즈 팬을 제외한 보수적 기성세대 일본인들은(특히 극우 인사들) '비틀즈가 천황과 일본인을 욕보였다'며 비틀즈를 일본도로 썰어버리겠다니 하며 위협했다느니 하는 말도 있다.

한 달 후의 필리핀 투어는 비틀즈가 겪은 최악의 경험이 되었다. 비틀즈가 의도치 않게 퍼스트 레이디 이멜다 마르코스를 모욕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참사가 일어난 것. 공적인 자리는 피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던 엡스타인이 비틀즈를 대신하여 대통령궁에서의 아침식사 초대를 정중하게 거절하자 이멜다가 빡쳤고, 모든 경찰들이 보호를 거부하면서 그들은 성난 국민들에게서 살아남아 필리핀을 탈출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필리핀을 빠져나가는 데에 성공했고[49], 이 일은 이미 공연에 대한 회의를 느끼던 그들이 마음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필리핀에서 돌아온 그들에게는 KKK를 포함한 미국의 종교, 사회 보수주의자들의 격렬한 반발이 기다리고 있었다. 3월, 모린 클리브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예수보다 인기가 많다"고 한 레논의 발언이, 영국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다섯 달 후인 8월, 미국의 청소년 잡지인 데이트북(Datebook)에 의해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바이블 벨트의 기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논란이 일어난 것. 바티칸이 항의 성명을 발표했고,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라디오, 남아프리카의 국영 방송에서 비틀즈의 음악이 금지되었다. 엡스타인은 의도적으로 편집한 데이트북을 고소했고, 레논은 기자 회견에서 해명을 해야 했다. 비틀즈/예수 발언 참조. 후일 링고 스타의 회고에 따르면, 그 때 앨범 불태웠던 사람들한테 나중에 다시 사줬다고 땡큐.

공연을 보러 온 팬들은 그들의 음악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들은 비틀즈를 직접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흥분했고,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는 팬들로 인해 비틀즈는 자신들의 음악 소리조차 듣기 힘들어졌다. 점점 공연에 흥미를 잃어가던 비틀즈는 그토록 중시해왔던 공연의 중단을 고려하게 되었고, 위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그들의 결심에 박차를 가했다. 결국 8월의 미국 투어가 비틀즈의 마지막 순회공연이 되었다.


4.2. Revolver[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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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Paperback Writer"의 프로모셔널 필름(지금의 뮤직 비디오)을 촬영할 당시.


Paperback Writer, 세계 최초의 뮤직비디오.

실험적인 독특한 매력과 연주력이 빛나는 싱글 "Paperback Writer/Rain"을 발표할 때 그들은 짧은 프로모셔널 필름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역사상 최초의 뮤직 비디오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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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 부어만이 작업한 Revolver의 커버 아트.
1966년 그래미에서 최고의 앨범 커버 상을 받았다.
기존 앨범 아트의 예술화를 이끈 혁신적인 기념비이기도 하다.

1966년 8월, 마지막 투어 한 주 전에 발매된 Revolver에서는 Rubber Soul에 이어 또 한 번의 중대한 발전을 이루었다. 혁신적인 클래시컬 현악 편곡에서부터 사이키델릭 록에 이르기까지 더욱 다양해진 레퍼토리와 복잡하고 정교한 노랫말과 함께 실험 정신이 첨예하게 드러난 Revolver대중음악의 영역을 새로이 정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백마스킹 기법을 비롯하여, 당시 대중음악계에선 쓴다는 것을 상상도 못한 스튜디오 녹음기법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대중음악과 실험음악의 경계를 허물어 버렸다. 앨범에서 가장 실험적인 곡 중의 하나인 "Tomorrow Never Knows"는 사이키델릭 록의 선구자격인 걸작이자, 드론 사운드 및 음원의 루핑과 배치, 고속 재생 기법은 이후의 전자음악힙합의 방법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현악 팔중주와 보컬만으로 이루어진 "Eleanor Rigby"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진짜 하이브리드"라는 평을 받았으며, 해리슨은 자신의 곡을 셋이나 포함시키며 존재감을 부각했다.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에서 3위를 차지했다.

미국 투어 중 Revolver의 곡은 하나도 연주되지 않았는데, 크리스 잉엄의 말에 따르면 "라이브의 비틀즈와 스튜디오의 비틀즈가 완전히 다른 짐승이 되면서" 그러한 스튜디오에서의 작품을 라이브로 (계속 소리만 질러대는 팬들 앞에서는 더욱) 제대로 해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결국 8월 29일, 샌 프란시스코의 캔들스틱 파크에서의 공연을 끝으로 4년간 무려 1,400회 이상의 공연을 해왔던 비틀즈의 공연 역사는 막을 내렸다.[50]


4.3.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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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커버.[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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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월 페퍼 상사 세션 중 찍은 사진

1967년 5월 26일은 서양 문명사의 결정적인 순간이다.

케네스 타이넌, 타임즈

투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비틀즈는 1966년 11월 말부터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중요한 앨범 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이하 Sgt. Pepper)의 녹음을 시작하면서 보다 더 실험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엔지니어였던 제프 에머릭에 따르면, 앨범을 녹음하는 데에 700시간이 넘게 걸렸는데, 그들이 "Sgt. Pepper는 모든 것이 달라야 한다"고 고집하며 파격적인 실험을 계속했기 때문. 1967년 2월에 발매된 "Strawberry Fields Forever"/"Penny Lane"과[52] 5월에 발표된 Sgt. Pepper는 동시대의 음악인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비치 보이스의 리더 브라이언 윌슨SMiLE을 작업하던 도중 "Strawberry Fields Forever"를 듣고 비틀즈와의 경쟁을 포기해 버렸고, "서양 문명사의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논평한 타임즈의 케네스 타이넌을 비롯하여 평론가들은 당대의 히피 문화와 결부하여 Sgt. Pepper에 거의 일방적인 지지를 보냈다. "She's Leaving Home"은 레너드 번스타인을 비롯한 클래시컬 음악계의 찬사를 받았고, 40인조 오케스트라가 기용된 레논과 매카트니의 합작품 "A Day in the Life"는 수많은 비틀즈 팬들에게 그들의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에서 1위를 차지했다.

Sgt. Pepper는 당시까지 일종의 유행이던 록 음악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으며, 록이 다른 음악들과 만나고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또한, 20세기 중반은 대중음악클래식 음악의 분리가 심화되던 시기였는데, 페퍼 상사는 20세기까지의 서양음악의 성과를 수용하면서, 분리와 고립이라는 현상을 넘어 서양음악이 나아가야 할 한 방향을 제시했다. 그리고 당시 록 음악으로 대표되던 대중음악을 이전까지 비틀즈가 확보했던 대중성에 기초해 위대한 예술이 갖추어야 하는 중요한 덕목인 '보편성'을 획득한 첫번째 록 음반이었다. Sgt. Pepper를 시작으로 모든 연령층에 록 음악으로 대표됐던 "대중음악의 인식"을 끌어올렸고,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의 현대 대중음악 역사에서 성별, 세대를 구분하지 않고 같은 장르의 음악을 보편적으로 즐기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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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페퍼 상사 코스튬을 입고서

Sgt. Pepper앨범 커버에 전곡의 노랫말이 수록된 최초의 앨범이었고, 그 노랫말들은 문학 비평가 리처드 포이리에를 비롯한 학자들에게 연구 대상이 되곤 했다. 당시에는 물론 훗날에도 문학계에 영향을 주면서, 비틀즈는 의 저수지를 만들었다는 평가도 받게 된다. 그외에도 비틀즈의 노래는 문구(文句)의 광산이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각 분야의 유명인사들과 그들 자신이 그려진 Sgt. Pepper앨범 커버가 화제가 되어 앨범 커버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으며 수많은 모방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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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You Need Is Love
ЛЮВOV?[53]

6월 25일, 24개국, 4억 명~7억 명 이상이 시청한 것으로 추산되는 세계 최초의 위성 생중계 방송 'Our World'에 출연하여 "All You Need Is Love"를 연주했다. 이 당시는 베트남전에 대한 환멸과 반전주의가 일어날 때 였는데, 마침 세계적으로 생중계된 비틀즈의 이 노래는 세계에 인류애, 평화주의적 사상을 넓게 퍼뜨리는데 일조하며, 근대 인류 문화가 약진하는 것에 기여했다. 이 곡은 사랑의 여름에서 플라워 파워(히피 문화)의 찬가로 선정되었다.

이때부터 존 레논은 사회 참여적인 성격을 강하게 띄기 시작한다. 모두가 사회 참여적인 성격을 띄었지만, 특히 존 레논조지 해리슨의 활동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4.4.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사망과 Magical Mystery Tour[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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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Goodbye/I Am the Walrus 싱글[54]
영화 Magical Mystery Tour에서 "I Am the Walrus"를 연주할 때. #

그러나 두달 뒤, 비틀즈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그동안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그들을 조율하며 함께 비틀즈 신화를 창조했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카비톨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것.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비틀즈와 달리 매니저인 자신은 알려지지도 않았고 비틀즈가 자신을 팽개칠까봐 걱정했다고 한다. 결국 술과 약물로 찌들어간 끝에 겨우 33살로 급사했다. 그의 죽음으로 멤버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고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레논은 "우리는 음악을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두려웠다"고 했다.

1967년 12월, 사운드트랙 앨범 Magical Mystery Tour가 영국에서는 EP로, 미국에서는 LP로 발매되었다. 언터버거는 "Sgt. Pepper와 맥을 같이하는 사이키델릭 사운드"이지만 "I Am the Walrus"와 같은 일부는 "더욱 몽롱하게 느껴지며" 싱글로 발표되었던 5곡은 "아름답고 혁신적"이라고 평가했다. 첫 3주 만에 가장 빨리 판매된 Capitol의 LP가 되었고, 후에 비틀즈의 정규앨범으로 채택된 유일한 Capitol의 컴필레이션이 되었다. 매카트니의 주도로 제작되어 복싱 데이에 처음 방송된 동명의 TV 영화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그들의 첫 작품이 되었다. 물론 유일한 실패작은 아니다. 다만 좋은 평가가 주를 이루었던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정말 대부분이 혹평이다.(...) Daily Express는 "완전한 쓰레기"라고 일축했고 Daily Mail은 "엄청난 자만"이라며 비난했으나 The Guardian은 "조악함과 따뜻함 그리고 청중의 어리석음에 대한 판타지 도덕극"이라고 평가했다. 제법 괜찮은 실적을 거두기는 했으나 언론의 혹평으로 인해 미국에서까지 방송되지는 못했다. 그리나 현대에 와서는 전위 예술의 모든 것을 배웠다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의견과 같은 평가가 많이 보인다. 팝-전위 예술 영화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5. 1968-1969: 애플 설립, 불화와 분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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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5월 30일,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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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bey Road가 발매될 무렵인 1969년의 비틀즈.

5.1. The Beatles, Yellow Submarine[편집]


1968년 1월, 비틀즈는 자신들을 포함해 재능 있는 뮤지션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음악 활동을 돕겠다는 취지로 애플사를 설립한다. 취지는 좋았지만, 경영 경험이 전무한 비틀즈 멤버들이 수익 모델을 고민하지 않고 사업에 뛰어들면서 애플은 금방 경영난에 허덕이게 되고, 이는 비틀즈 멤버들 사이의 불화와 갈등을 더욱 촉진하게 된다.


비틀즈가 출연한 영화 Yellow Submarine의 오리지널 트레일러 영상

같은 달인 1968년 1월, 비틀즈는 멤버들이 만화 캐릭터로 그려져 있는 애니메이션 영화 Yellow Submarine에 출연한다. 영화는 6월에 개봉하여 평론가들로부터 음악과 유머[55], 혁신적인 비주얼[56]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영화를 통해 네 개의 신곡이 공개되었는데 이 곡들이 포함된 사운드트랙 앨범은 이듬해가 되어서야 발매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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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앉아있는 사람이 마하리시 마헤쉬 요기.

그러나, Magical Mystery Tour 영화의 실패,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사망 등으로 방항하며 약물에 대한 의존도가 커진 비틀즈 멤버들은 정신적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시기를 겪던 존 레논은 조지 해리슨의 충고에 따라 당시 영국에 머무르고 있던 마하리시 마헤시 요기의 강연을 찾았다. 약물의 도움 없이, 초월 명상만으로 마음을 안정시키고 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는 마하라시의 사상에 큰 관심이 생겼고, 1968년 2월, 멤버 모두 비밀리에 초월 명상 캠프에 참가할 목적으로 인도로 출국한다. 이러한 점을 포함해서, 존 레논의 예수 발언과 함께 조지 해리슨힌두교로 개종한 사실과 존 레논, 폴 매카트니무신론자였던 점이 서구 기독교 사회에는 파급적으로 다가온다. 종교적으로 미국, 서구권을 비롯한 세계적으로 세속주의화에 큰 영향을 미친다.

창작에 대한 새로운 자극을 얻게 된 이들은 인도에서 머문 세 달 동안, 초월 명상과 더불어 다음 앨범에 수록할 18곡을 비롯하여 수많은 곡들을 작곡한다.[57] 그러나 링고는 께림칙함을 느끼고 10일 만에 떠났고, 지루함을 참지 못한 매카트니도 한 달 후에 영국으로 돌아갔으며 남아 있던 레논과 해리슨도 마하리시가 그들을 이용해 먹으려 한다는 말을 듣고 의문을 품게 되었다. 마하리시가 여성 참가자들에게 성적인 접근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레논도 결국 두 달 만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되었고 확신이 서지 않았던 해리슨과 나머지 일행들도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분노한 레논은 법적인 문제를 피하기 위해 "Sexy Sadie"로 이름을 바꾸어 마하리시를 까는 곡을 만들었고 매카트니는 "우리의 착각이었다. 그에게 무언가가 더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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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The Beatles 미니멀리스트 커버.

그리고 몇달 뒤, 아무것도 없다시피 한 커버로 유명한, 흔히 '화이트 앨범'으로 알려진 셀프 타이틀 더블 앨범 The Beatles가 발표되었다.

앨범의 레코딩 세션이 5월부터 10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동안 비틀즈의 분열이 가속화되었다. 링고가 2주 동안 밴드를 떠나 버리는 바람에 "Back in the U.S.S.R."과 "Dear Prudence"를 녹음할 때에는 매카트니가 드럼스틱을 잡아야 했고[58] 매카트니와의 협업에 흥미를 잃은 레논은 매카트니가 만든 곡들을 할매들용 똥음악(granny music shit) 이라며 멸시했다는 일화도 있다. 설상가상으로, 애인은 스튜디오에 데리고 오지 않는다는 그들의 암묵적인 합의를 무시하고 전위 예술가 오노 요코와 사랑에 빠져 있었던 레논이 그녀를 세션에 데려올 것을 고집하면서 긴장감이 더욱 심화되었다. 레논은 "모든 트랙이 개개인의 트랙이고 비틀즈의 음악은 없다. 존과 그의 밴드, 폴과 그의 밴드, 조지와 그의 밴드"링고는? ㅠㅠ라며 앨범에 대한 생각을 밝혔고 매카트니는 "앨범을 만드는 일은 즐겁지 않았다" 라고 회상했다. 그와 레논 모두 이 레코딩 세션이 비틀즈 해체의 시작이었다는 점에 동의했다.

앨범은 11월에 발표되었는데 그들이 설립한 애플 레코드의 첫 앨범 발매였다. 200만 장 이상의 선주문을 기록했는데 발매 후 한 달 만에 400만 장 가까이를 팔아 치웠고 수록곡들이 미국의 라디오 방송국들을 휩쓸었다. 하지만 발매 직후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Sgt. Pepper와 달리, "최고의 능력, 최악의 성향"이라며 훌륭하지만 목적이 없다고 깐 타임을 비롯하여 당시 평론가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분위기가 반전되면서 오히려 "개개인의 역량이 돋보이는 점"이 새롭게 조명되었고 시간이 흐르며 역대 최고의 더블 앨범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이른다. 현재는 록 음악의 선구자적 면모들이 재발굴되어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에서 10위를 차지하는 등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음반으로 평가받는다.

동명의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범이자 그들의 열 번째 정규 앨범인 Yellow Submarine은 이듬해 1월에 발매되었다. 비틀즈의 신곡은 넷뿐이었고 마틴이 작곡한 기악곡 일곱이 포함된 앨범이었기에[59] "불필요한" 음반이라는 평도 있었지만 해리슨의 "It's All Too Much"와 레논의 Hey Bulldog은 "신곡들 중 보석"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5.2. Abbey Road, Let It Be[편집]



1969년 1월 30일, 전설이 된 비틀즈의 애플 사옥의 옥상 공연 중 연주된 "Don't Let Me Down".

비록 발매 시점으로 따지면 Let It Be가 그들의 마지막 앨범이었지만 이미 Abbey Road를 발표하기 전에 거의 다 만들어진 상태였다. 프로젝트는 "기본으로 돌아가" 스튜디오 기술과 오버더빙이 없는 새로운 앨범을 만들고 와해되어 가는 밴드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라이브 공연을 재개하자는 매카트니의 제안으로 추진되었다. 최초의 계획은 1969년 1월부터 트위크넘 스튜디오에서 마이클 린제이-호그가 촬영한 리허설 장면들로 대부분이 구성된, "Beatles at Work"라는 제목의 한 시간 분량의 TV 프로그램이었다. 마틴은 "멤버들 사이의 관계가 최악이었던 시기라 전혀 즐겁지 않은" 프로젝트였다고 말했고, 당시의 즉흥적인 세션에 대해 레논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해리슨은 "내 평생 최악의" 세션이었다고 설명했다. 레논과 매카트니 모두에게 짜증이 난 해리슨은 5일 동안 밴드를 떠났고, 돌아오자마자 라이브 공연에 대한 논의를 중단하고 TV 프로그램에 쓰일 곡들로 채워진 새 앨범 Get Back[60]에 대한 작업에 집중하지 않으면 완전히 떠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또한 트위크넘 스튜디오에서의 작업을 중단하고 새로 지어진 애플 스튜디오로 옮길 것을 요구했다. 이에 나머지 멤버들도 동의했고 TV 프로그램용으로 제작된 영상들은 극장용 영화로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다.

키보드 라이브 연주가 필요한 곡들이 있어서 해리슨이 키보디스트 빌리 프레스턴을 데려와 세션의 마지막 9일 동안 함께했다. 프레스턴은 "Get Back" 싱글에 참여함으로써 비틀즈의 공식 음반에 이름을 올린 유일한 인물[61]이 되었다. 리허설을 마무리한 후 공연을 촬영할 장소를 선정해야 했는데, 바다의 배 위, 정신병원(...), 튀니지 사막, 콜로세움 등 많은 아이디어가 나왔으나 끝내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1월 30일, 결국 그들은 런던 새블 로우에 위치한 애플 사옥의 옥상에서 라이브 공연을 하여 촬영을 마쳤는데,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공연으로 남게 되었다. 5주 후, 그들은 프로젝트에서 손을 뗐고 앨범에 관한 작업은 엔지니어 글린 존스에게 모두 맡겨졌다.

엡스타인을 대신할 재정 고문을 임명하는 과정에서 멤버들 사이에 또다시 긴장감이 감돌았다. 레논, 해리슨, 링고는 롤링 스톤즈샘 쿡과 일했었던 앨런 클라인을 선호한 반면 매카트니는 아내 린다 이스트먼[62]의 형제인 변호사 존 이스트먼을 원했고,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하여 일시적으로 두 명이 동시에 기용되면서 더 많은 분쟁을 초래하게 되었다. 결국 5월 8일, 클라인이 단독으로 비틀즈의 매니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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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해 낸 Abbey Road의 앨범 커버.

Get Back 세션이 "비참한 경험"이었기에 "그들에게 끝이 다가왔다"는 것을 느꼈던 마틴은 앨범을 하나 더 만들자는 매카트니의 요청에 놀랐다. 이것이 사실상 그들의 마지막 앨범이 된 Abbey Road였고 주 레코딩 세션은 7월 2일에 시작되었다. 레논은 그와 매카트니의 곡이 서로 다른 면을 차지하기를 원했고 결국 매카트니의 제안대로 첫 면은 각자가 작곡한 곡으로, 다음 면은 메들리로 구성하는 방식으로 타협하게 되었다. 7월 4일, 레논이 플라스틱 오노 밴드 명의로 발표한 "Give Peace a Chance"는 비틀즈 멤버의 첫 솔로 싱글이었고, "I Want You (She's So Heavy)"에 대한 작업이 이루어진 1969년 8월 20일은 비틀즈 네 명 모두가 한 스튜디오에서 함께한 마지막 날이 되었다.[63] 9월 20일, 레논은 나머지 멤버들에게 밴드를 떠날 것을 알렸지만 다가올 앨범의 판매량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기 위해 발표를 하지 않는 것에 동의했다.[64]

6일 후 발매된 Abbey Road는 3달이 안 되어 4백만 장이 팔렸고 17주 동안 영국 차트 정상을 지켰다. 프랭크 시나트라"지난 50년 혹은 100년 간 최고의 러브 송"이라고 극찬한[65] 두 번째 트랙 "Something"은 싱글 A면을 차지한 해리슨의 유일한 곡이 되었다. 전년의 The Beatles처럼 당시의 평론가들은 앨범에 대해 엇갈린 반응을 보였지만 메들리에 대해서는 일방적인 찬사를 보냈고, 시간이 흐르며 "그들다운 백조의 노래", "록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하모니 중의 하나"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 마틴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비틀즈 앨범으로 꼽았지만 레논은 "만족할 만하지만 생명력이 없다"고 깠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1960년대 대중음악의 표본으로 여겨지는 앨범 중 하나다.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에서 5위를 차지했으며 2009년의 독자 투표에서는 가장 위대한 비틀즈 앨범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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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7년 전만 해도 이들 모두 단정한 옷차림 단정한 헤어스타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던걸까... 그나마 폴이 거의 안 변했다

1970년 1월 3일, 그들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Get Back 앨범을 위해 녹음해야 할 하나 남은 곡, 해리슨의 "I Me Mine"을 위해 모였지만 덴마크에 있었던 레논은 참여하지 못했다. 3월, 앨범의 타이틀은 Let It Be로 바뀌었지만 매니저 클라인은 글린 존스가 작업해 놓은 앨범을 거부하고 세션 테이프를 레논의 솔로 싱글 "Instant Karma!"를 프로듀싱했던 필 스펙터에게 넘겼다. 스펙터는, 원래의 의도였던 "살아 있는" 음원과 상관없이 자르고 편집하고 오버더빙하는 작업을 시도했고, 이에 매카트니는 불만을 감추지 못했는데, 특히 14인 합창과 36인 합주를 비롯한 호화로운 오케스트레이션이 동원된 The Long and Winding Road를 듣고 분노했다. 그러나 자신의 곡을 원래대로 돌리려는 요구는 무시되었고, 본래 의도는 약 30년 후인 2003년Let It Be... Naked를 통해서야 가능했다.


영화 Let It Be에서 연주된, 그들의 마지막 싱글 "The Long and Winding Road".

5월 8일, 스펙터가 프로듀싱한 Let It Be가 발매되었고, 사실상 그들의 마지막 싱글인 "The Long and Winding Road"는 그들의 스무 번째 빌보드 1위 곡[66]이 되었다. 앨범은 미국과 영국 차트를 정복했으나 평론가들 사이에는 평이 엇갈렸고, 롤링 스톤은 앨범을 윤색한 스펙터의 오버프로듀싱을 깠다.[68] 한 달 후 공개된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해서 초기에는 부정적인 평이 주를 이루었으나 점점 우호적인 평이 많아졌고, 몇몇 곡들은 앨범에서보다 더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 등 사운드트랙은 일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으며 이듬해 아카데미그래미에서 '최고의 주제가' 상을 수상했다.


6. 1970–현재: 해체, 그리고 그 이후[편집]




1969년 10월 20일 발매된 플라스틱 오노 밴드의 싱글 'Cold Turkey'
1970년 2월 6일 발표된 존 레논의 솔로 싱글 'Instant Karma!'
작곡가 란에 레논-매카트니 대신 존 레논 단독 명의가 올라가 있어 밴드의 해체를 예감케 한다.[69]

비틀즈의 실질적 해체는 존 레논이 나머지 멤버들에게 자신이 밴드를 떠날 것임을 밝힌 1969년 9월 20일이었다. # 그러나 Let It Be 음반과 영화에 미칠 상업적 악영향을 우려한 밴드의 매니저 앨런 클라인의 만류로 공식 발표는 하지 않았다. 대신 이때부터 존은 비틀즈 활동보다는 오노 요코와 함께한 플라스틱 오노 밴드(Plastic Ono Band) 활동에 집중하게 된다. 이후 플라스틱 오노 밴드의 명의로 싱글 'Cold Turkey'와 'Instant Karma!'를 발표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나머지 멤버들도 밴드의 해체 사실을 받아들이고 각자 솔로 음반을 제작하게 된다.

이 시기 멤버들의 활동을 보면 이미 멤버들 각자가 제 갈길을 가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는데, 폴은 1969년 11월부터 솔로 앨범 제작에 착수했고 링고 스타는 1970년 3월, 자신의 첫 솔로 앨범 Sentimental Journey를 발표했다. 즉 4월의 공식 발표 이전에 이미 솔로 뮤지션으로서의 행보를 걷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링고의 경우는 부모님을 위해 컨트리 곡을 커버한 음반을 녹음한 것에 가깝지만, 폴은 1969년 9월 레논이 밴드를 떠난다는 의견을 전해들은 다음 밴드로서의 활동이 사실상 끝나가고 있음을 체감하며 솔로 음반 제작에 들어갔다. 존이 탈퇴 의사를 밝힌 1969년 9월 이후 이미 각자 밴드의 해체 사실을 받아들이고 솔로 음반을 제작하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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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 해체를 공식화한 데일리 미러의 기사 표지. 1970년 4월 10일

Let It Be 음반 발매가 필 스펙터의 오버 더빙으로 지연되어 1970년 5월로 잡히고, 이는 폴 매카트니가 제작하던 솔로 앨범 McCartney의 발매일 4월 17일과 매우 근접하게 된다. 상업적 악영향을 우려한 나머지 멤버 및 애플 레코드의 의견에 따라 링고가 솔로 앨범 발매를 6월로 미루자는 내용의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폴 매카트니의 집을 찾았지만 이미 멘탈이 나가 있던 폴은 편지를 읽자마자 링고에게 고함을 지르고 집밖으로 내쫓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때를 계기로 1970년대에도 비틀즈가 지속될 수 있다고 믿었던 폴은 비틀즈를 끝내기로 마음을 굳히게 된다. 결국 폴의 솔로 앨범 발매를 일주일 앞둔 1970년 4월 9일, 폴 매카트니는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솔로 앨범 공식 보도 자료에 애플사의 직원 피터 브라운과의 서면 인터뷰를 실어 내보냄으로써 비틀즈 활동을 지속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게 된다.

Q: 다른 비틀즈 멤버나 조지 마틴이 그립지는 않았나요? '이렇게 쉴 때 링고가 있으면 좋을 텐데' 생각이 든 적은 없었나요?
폴: 없었어요.[70]


Q: 비틀즈 이름으로 새 앨범이나 싱글을 낼 계획이 있나요?
폴: 없어요.
Q: 이 앨범이 비틀즈를 잠시 쉬는 작품인가요, 아니면 솔로로서의 출발인가요?
폴: 시간이 지나면 알겠죠. 솔로 앨범이라는 의미는 그게 솔로 가수로서의 출발이라는 것이고, 비틀즈와 함께 만든 게 아니라는 것은 이 앨범이 휴식이라는 의미예요. 그렇게 두 가지 의미가 다 있어요.
Q: 비틀즈와 잠정적으로 갈라섰나요, 아니면 아주 갈라선 건가요? 이유는 개성차이인가요, 아니면 음악적 차이 때문인가요?
폴: 개성 차이, 비즈니스 차이, 음악차이죠.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는 제 가족과 함께 있는 게 더 좋기 때문이에요.
Q: 레논-매카트니 관계가 회복되어 다시 활발하게 작곡하게 될 때가 올 것이라고 보나요?
폴: 아니요.[71]

이 인터뷰가 기자들에게 공개되고, 다음날인 4월 10일 데일리 미러가 "폴이 비틀즈를 그만둔다.(Paul is quitting the Beatles)"는 헤드라인으로 보도하면서 비틀즈의 해체 사실이 7개월 만에 공식화된다. 폴 매카트니는 기자들의 질문 세례와 대중들의 분노에 대해 '직접적으로 해체를 밝힌 적은 없다'며 항변했으나 이미 배는 떠나간 상황이었고... 대중들 또한 점차 와해되던 밴드 활동에 완전히 쐐기를 박은 발표 정도로 여겼다. 존 레논은 비틀즈의 해체 사실이 언론에 의해 공식적으로 보도된 것을 보며 비틀즈라는 이름으로부터 독립했다는 데에서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으나, 자신이 했어야 할 공식 발표를 폴이 가져간 것에 대해 분노하기도 하였다. 비틀즈 후기에 주도권이 폴에게로 넘어간 것은 본인도 아는 사실이었지만, 밴드의 결성을 이끈 것은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에 결자해지의 원칙을 어긴 폴의 이러한 조치를 달가워하지 않은 것이다. 훗날 존은 "걔가 그만둔 게 아니라, 내가 해고한 거야![72]"라며 정신승리를 시전하기도 했다. 1970년 12월 31일, 매카트니는 비틀즈의 계약 파트너십을 해소하기 위한 소송을 제기했다. 비틀즈 해체 후에도 오랫동안 법적인 분쟁이 계속되었고 존 레논이 합의안에 서명한 1974년 12월 29일이 되어서야 그들의 계약이 해소되었다. 그 전까지 비틀즈 멤버들의 솔로 앨범은 애플 레코드에 계약이 묶여 있어서 1974년까지의 음반들은 전부 애플 레코드 명의로 발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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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멤버 각자의 명의로 발매된 솔로 앨범들.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Sentimental Journey, McCartney, John Lennon/Plastic Ono Band, All Things Must Pass
이후 비틀즈 멤버 4인 모두 1970년 각자 자신의 단독 명의로 된 솔로 음반들을 발표하고,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길을 걷는다. 존 레논은 이전에 플라스틱 오노 밴드 명의로 싱글을 발표한 바 있으니, 본격적인 정규음반 제작에 착수해 1970년에는 John Lennon/Plastic Ono Band를, 1971년에는 Imagine을 내놓는다. 조지 해리슨은 비틀즈 시절 작곡했으나 레논-매카트니 넘버에 밀려 수록되지 못했던 곡들을 대거 포함시켜 All Things Must Pass를 발표한다. 해당 음반의 리드 싱글 My Sweet Lord가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하며 조지는 비틀즈 멤버 중 가장 먼저 솔로 커리어 1위를 차지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폴 매카트니는 두 장의 솔로 앨범(McCartney, Ram)을 발표한뒤 1971년부터 자신의 아내 린다 매카트니와 기타리스트 데니 래인을 주축으로 하는 윙스를 결성하여 활동한다. 각 멤버들의 솔로 활동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존 레논/음반 목록, 폴 매카트니/음반 목록, 조지 해리슨/음반 목록, 링고 스타/음반 목록 문서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국과 미국의 싱글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27곡이 수록된 컴필레이션 앨범 1이 2000년 11월 13일에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평단으로부터 일방적인 찬사를 받은 것은 물론 세계적으로 3,100만 장 이상이 팔려 나갔고, 미국에서 21세기에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다.

2006년에는 태양의 서커스 시리즈의 일환으로 비틀즈 노래들을 리믹스한 Love라는 앨범이 나왔다. 여러 곡들을 뒤섞어 팬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좀 갈리는 편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완성도가 괜찮은 편이라는 의견이 많다. 태양의 서커스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어 현재 라스베가스에서 공연 중에 있다.

2015년 1 리마스터링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노래만 리마스터된 것이 아니라 영상까지 복웜이 진행되었다. 비틀즈 VEVO에 동시다발적으로 복원된 프로모비디오가 업로드됐다.

2017년부터는 거의 매해에 한 앨범씩 리믹스 앨범을 발매하고 있다. 2017년애는 Sgt. Pepper가, 2018년에는 White Album이, 2019년에는 Abbey Road, 2021년에는 Let It Be 2022년에는 Revolver가 리믹스를 거쳐 재탄생하였다. 조지 마틴의 아들 자일스 마틴이 주도했으며, 사운드를 현대화시킨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6.1. 비틀즈 앤솔로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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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조지, 링고. 일명 '쓰리틀즈(Threetles)'.

1980년 존 레논이 피살된 후, 비틀즈의 재결합은 영원히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나머지 세 멤버가 모인적은 있었다. 1981년 존 레논을 추모하는 곡인 All Those Years Ago를 녹음하기 위해 조지, 폴, 링고 세 사람이 모인 바 있다. 이후 1994년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3명이 모여 비틀즈의 미공개 음원들과 자료들을 정리해 "The Beatles Anthology 1"의 작업을 함께 했다. 여기서 나온 음원들과 멤버들의 인터뷰 등을 엮어 동명의 다큐멘터리가 나왔는데, 이 다큐멘터리는 비틀즈 팬들에게 있어서 꼭 한 번쯤은 봐야 하는 교과서 정도의 위치에 있다.

사실 이러한 기획은 1985년 경부터 "Sessions"라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EMI는 비틀즈의 미공개곡을 묶어서 LP 한 장 분량으로 발매하려고 기획하였으나 죽은 존 레논을 제외한 나머지 세 멤버들이 퇴짜를 놓는 바람에 한 차례 취소된 바가 있었다. 게다가 이 당시에는 비틀즈 저작권 로열티 배분 문제로 나머지 멤버 셋이(존 레논의 경우는 유족 오노 요코) 폴 매카트니를 고소하는 해프닝도 있어서 기획이 제대로 추진되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1994년에 "Live at the BBC"를 시작으로 이 기획이 오히려더 확대되어 부활한 것이다.

또한 존 레논이 남긴 카세트 테이프에 세 멤버의 연주를 입혀 "Free as a Bird"와 "Real Love"를 싱글로 발표했다. "Free as a Bird"의 경우 미완성 부분이 많아서 나머지 멤버들이 일부를 새로 만들었다. 그래서 작곡자 표시에 네 멤버가 모두 적혀있다. 반면 "Real Love"는 존 레논이 거의 작곡을 다 한 상태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중간의 조지 해리슨 기타 솔로를 제외하고는 크게 바뀐 점은 없다. 따라서 이 곡은 존 레논 단독으로만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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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해리슨 생전 마지막으로 폴, 링고, 조지 셋이서 함께 찍은 사진. 2000년으로 추정.

앤솔로지 작업이 끝난 뒤에는 다시 각자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2001년 조지 해리슨이 폐암으로 사망했다. 남은 두 멤버인 폴 매카트니와 링고 스타, 그리고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의 유족들은 비틀즈 관련 행사에 간간히 만난다. 특히 폴 매카트니와 링고 스타는 자주 만나는 편.



2014년 1월 27일, 페퍼상사 메들리를 선 보이는 폴과 링고
2015년 I Wanna Be Your Man을 함께 부르는 폴과 링고
2014년 비틀즈의 첫 미국 방문시 이루어졌던 에드 설리번 쇼 출연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무대에 폴과 링고가 함께 서 페퍼 상사 메들리를 나눠 부르기도 했다. 객석에 오노 요코션 레논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2015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서 링고를 소개하는 폴
2015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서 링고 스타가 헌액된 것을 기념해 밴드메이트였던 폴이 공식 석상에 올라 축사를 전하기도 했다.
[1]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의 매우 앳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저 당시 저들은 한국으로 치자면 중고등학생 나이였다. 특히, 키가 177cm로 알려진 조지 해리슨의 체구가 사진상 매우 작은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당시의 조지는 아직 중학생 나이였기 때문이다.[2] 버디 홀리의 "That'll Be the Day"의 커버 버전과 함께, 그들이 최초로 녹음한 곡으로 알려져 있다. 작곡은 (비틀즈 유일의) McCartney-Harrison.[3] 쿼리'맨'이 아니라 '멘'인 이유는 영문 표기가 Quarry'man'이 아니라 복수형 Quarry'men'이기 때문.[4] 나중에 쿼리멘 멤버였지만, 비틀즈에는 들어가지 못했던 사람들이 쿼리멘이란 이름으로 재결성해서 투어를 다니고 있다.[5] 정확히는 존 레논이 쿼리멘의 리더를 맡고 있었는데, 폴 매카트니가 합류했고, 공동 리더 체제가 되었다가 폴의 추천으로 조지 해리슨이 합류하게 되었다.[6] 당시에는 밴드 이름 앞에 꼭 리더 이름이 나와 존의 이름을 단 것이다.[7] 귀뚜라미와 스포츠 크리켓의 중의적인 의미가 있어서 그도 이렇게 중의적인 의미가 있는 밴드 이름을 짓고자 했던것. 그런데 훗날 존 레논이 The crickets 멤버들을 만났을 때, 정작 이들은 크리켓이라는 스포츠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8] 소설 '보물섬'에 나오는 악당 "키다리 존 실버(Long John Silver)"에 착안한 듯 하다.[9] 훗날, 비틀즈의 팬이었던 펑크록 밴드 라몬즈의 멤버들은 밴드 결성시에 폴 매카트니가 썼던 이 가명 Ramon을 멤버들의 공통성으로 차용하고 밴드 이름도 라몬즈로 짓게 된다.[10] 일설에 의하면 노예계약 수준이었다는 말도 있다. 아래에서 보듯이 당시 계약 상대가 카이저 켈러 클럽이었고, 그 대우가...[11] 그 이유에 대해서는 신현준의 저서 Imagine에서 잘 나와 있다.[12] 현존하는 유일한 캐번 클럽에서의 공연 영상. 비틀즈가 데뷔하기 전, 방송국에서 취재를 나왔는데 그때 찍은 영상이다. 잘 보면 남아있는 사진과 다르게 공연할때 자주 입었던 가죽 자켓이 아닌 방송을 의식한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13] 1997년 1월 16일에 만들어졌다. 캐번 클럽은 캐번 펍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고 그나마도 과거의 위치가 아닌 원래있던 자리의 옆에 재현되어 있다. 캐번 클럽에서는 매주 목요일 현지가수의 비틀즈 커버 공연이 진행된다. 팬이라면 필견. 가끔 무료로 커버밴드들의 CD를 얻을수도 있다. 공연시 입장료는 1파운드.[14] 비틀즈가 처음 함부르크에 갔을 당시 앨런 윌리엄스가 만든 데모 음반이 있긴 했지만, 그 음반은 5장만 제작되었고 아무도 알지 못한 채 사라졌다.[15] 비틀즈는 독일에서 성기를 뜻하는 피들스와 비슷하게 들리기 때문이다.[16] 해당 버전은 앤디 화이트라는 대타 드러머가 드럼을 친, 일명 '9월 11일 믹스'라고 불리는 미국 싱글/Please Please Me 앨범 버전이다. 영국에서 처음 싱글로 나온 버전은 '9월 4일 믹스'라고 불리는 링고가 드럼을 친 버전이며, 지금은 Past Masters에서만 들을 수 있다.[17] 일설에 의하면 레코드 가게 주인인데다가 각종 음악 잡지들을 다꿰고 있던 그가 비틀즈를 몰랐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오히려 비틀즈를 만나기도 전에 아주 잘 알고있었다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18] 컬럼비아, 파이, 필립스, 오리올 등등.[19] 엡스타인은 비틀즈가 수 차례 클럽들을 다니며 공연을 했다는 걸 숨겼고, 이 15곡들 사이에 레논과 매카트니가 공동 작업한 3곡(Like Dreamers Do, Hello Little Girl, Love of the Loved. 이 중 Love of the Loved는 미발표곡이다.)을 몰래 끼워넣었다.[20] 누가 비틀즈를 탈락시켰나에 대해선 데카의 A&R 담당자였던 딕 로(Dick Rowe), 프로듀서 마이크 스미스(Mike Smith), 토니 미한 셋 중 한 명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21] 하지만, 브리티시 인베이전 문서 초반을 읽어보면 데카 레코드사의 결정이 이해가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 그 정도로 로큰롤의 본고장 미국의 로큰롤은 거의 사망 직전의 상태에 몰려있었고 보수적인 미국 음악계의 로큰롤에 대한 천대가 극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설마 그 청년들이 미국에 상륙하자마자 다 죽어가던 로큰롤을 부활시킬 줄 누가 알았으랴.[22]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10000장을 사재기해서 17위에 오른것이라는 루머가 있었다.[23] "Please Please Me"의 녹음을 마쳤을 때 마틴은 "방금 자네들의 첫 1위 곡이 만들어졌다"고 성공을 예견했다. 레코드 리테일러에서만 2위를 했을 뿐, 나머지 차트에서 전부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그 후 레코드 리테일러가 영국의 공식 싱글 차트가 되면서 이 곡의 기록은 2위로 남게 되었다.[24] 해당 곡은 모노 버전이다. 스테레오 버전은 정규 앨범 Please Please Me의 초판 스테레오 버전과 2009년 스테레오 리마스터판에만 실렸으며 싱글로는 나오지 않았다.[25] 비틀즈의 에드 설리반 쇼를 지칭한다.[26] 물론 이 기록은 시간이 흐르며 계속 경신되었다. 참고로 현재 미국 텔레비전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로 기네스 기록을 갖고 있는, 1983년 2월 28일에 방영된 M*A*S*H의 마지막회는 대략 1억 2500만 명의 시청자를 불러모았다.[27] 1970년대에 가서야 카세트 테이프가 대중적으로 보급되었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CD가 발명된 것을 고려하면, 상상을 뛰어넘는 판매량을 보인다. LP 자체의 가격도 카세트 테이프와 CD에 비해 2-3배 수준이지만, 재생 기기인 턴테이블의 가격은 보급기 기준으로도 CD플레이어나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의 몇 갑절이나 된다.[28] 덴버 공연 때 비틀즈가 묵었던 호텔 객실의 침대 시트를 한 업체가 3인치 크기로 잘라 한 조각에 10달러로 판매하여 돈을 벌었다.(...) 영상도 있다[29] 비틀즈의 출신지였던 리버풀만 해도 산업 도시로서의 역할이 저물게되며 영국판 디트로이트로 전락하는 전철을 밟았으나, 비틀즈의 성공 이후 이들이 공연을 하던 캐번 클럽 등이 음악계의 성지로서 각광을 받아 관광 도시로 탈바꿈하며 가까스로 회생하게 되었다. 실제로도 리버풀은 비틀즈를 은인으로 여기며 비틀즈 관련 사업이나 기념관을 개최하곤 한다.[30] 당시 영국은 96%~97%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세율을 비틀즈에게 부과했는데, 그럼에도 폴 매카트니의 재산은 1조 5천억 + 알파라고 알려져있으니 그 거의 전부를 떼어가고 멤버끼리 분배하고도 저정도면 얼마나 어마어마한 세수를 확보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족으로 이런 기괴한 세율은 당연히 영국 뮤지션들에게도 불만이었던지라 이를 풍자하는 Taxman이란 노래도 존재하고 롤링 스톤즈레드 제플린 등 당대 밴드들도 영국으로부터 벗어나 미국이나 유럽권을 전전하며 활동했다고 한다. Exile on Main St.가 이렇게 미국과 프랑스로 망명 중 생겨난 일환이다.[31] 이것도 2022년까지는 유일무이한 기록이었다. 그 만큼 비틀즈가 엄청났다는 것.[32] 그 뒤를 이어 자신의 곡 둘이 연달아 1위를 차지한 사례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있다.[33] 이 기록은 2021년 9월 빌보드 1,2,3,4,5위를 전부 독점하고 top 10에 무려 9곡, top 50에 30곡이나 넣은 드레이크가 깼다가 2022년 11월 빌보드 핫 100 차트에 테일러 스위프트가 Midnight의 수록곡들을 Top 10에 넣음으로써 신기록을 세웠다.[34] 그러나 이 기록이 대단한 점은 1960년대는 빌보드 차트가 실물 싱글을 발매해야지만 싱글 차트인을 허용한 시기였을 뿐더러 저때는 새로운 음반을 냈을 때 판매량과 라디오로만 순위가 집계되던 시기라 롱런의 개념 자체가 없었다. 즉 저렇게 1-5위 곡들을 전부 자기 곡으로 채우려면 말 그대로 대중음악계 전체를 석권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기를 끌어야 하는데, 비틀즈는 그걸 해냈을 뿐더러 스스로 블루오션이던 음반시장을 레드오션으로 탈바꿈했다는 점에서 차원이 다르다. 즉, 이후에 스트리밍 시대에 앨범 전체를 스트리밍해서 앨범의 곡들이 줄세우기를 해서 만들어진 기록들과는 그 질 자체가 다르다. 그나마 대한민국의 NewJeans가 데뷔 직후 신드롬을 일으키며 2022년 8월 발매된 Hype Boy를 포함하여 2022년 12월 발매된 Ditto와 2023년 1월 발매된 OMG가 10주 가까이 각종 차트의 탑 3를 석권했으나, 2020년대는 이미 스트리밍 시대였을 뿐더러 코로나19로 인해 대중음악계가 심각한 블루오션이던 시기이다.[35] Gould 2007, pp. 338-339[36] 퀸시 존스가 제작한 로큰롤의 역사에는 다른 증언이 있다. 존 레논은 밥 딜런에 대해 경외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언론인 알 아로노위치에게 만남을 주선한다. 버즈 로저 맥귄은 딥런의 추종자였던 레논이 그 만남에 압도당하며 자신들의 노래 가사에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는 딜런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나온다. 물론 딜런도 그들의 공연을 보고 자극을 받았는지 다음달 바로 알의 아내에게 부탁하여 전자 기타를 구매했다고 한다.[37] 밥 딜런은 'I Want to Hold Your Hand'의 가사 중 'I can't hide' 부분을 'I get high(속어로 마약해서 기분이 들뜨다)'로 잘못들어 비틀즈가 마리화나를 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38] 밥 딜런은 비틀즈를 통해 음악 사운드적으로 더욱 다채로우면서 화려한 발전을 이뤘으며 비틀즈는 밥 딜런을 통해 가사에 담긴 메시지와 철학을 중시하며 뮤지션으로서 더 큰 발전을 이뤄냈다.[39] 1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한 아티스트가 일곱 곡을 1위에 올린 것도 역대 최다 기록. 미국에서 크게 히트했으나 정작 그들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공연에서 한 번도 연주하지 않았다.(50여 년 후에 폴 매카트니의 단독공연에서야 처음으로 연주되었다.) 아니 애초에 영국에서는 싱글로 발매조차 안 됐던 곡이다. 미국 음반사였던 캐피톨 사가 멋대로 낸 싱글들 중에 하나였는데, 이것이 얻어걸려 1위를 한 것. 이런 예가 몇 번 더 있는데, Yesterday 역시 그런 경우 중 하나였으며, 비틀즈의 마지막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곡인 The Long and Winding Road도 캐피톨 사가 독단적으로 낸 싱글이었다. 게다가 1966년까지는 싱글 뿐만 아니라 정규 앨범까지 멋대로 바꾸어 발매를 하는데, 영국에서 7장의 정규 앨범이 나오는 사이에 미국 캐피톨 사는 무려 12장의 앨범을 냈다. 이는 당시까지 미국 캐피톨 사가 비틀즈보다 갑의 위치에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는데, 나중에는 비틀즈가 역으로 갑의 위치가 되자 "Soul이면 캐피톨에서 더 이상 발매 못하게 할 거임"이라고 나왔고, 결국 캐피톨 사가 데꿀멍하여 1967년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부터는 영국과 동일하게 발매한다.(1967년 말에 영국에서는 6곡 EP로 발매된 Magical Mystery Tour를 멋대로 싱글 5곡까지 끼워넣어 LP로 발매하기는 했지만 이는 미국에서 EP가 사장된 포맷이었던 점 때문이다. 더욱이 이 앨범은 1976년 영국에서도 이 형식으로 발매되었으며, CD 시절로 넘어온 이후부터는 아예 비틀즈의 공식 카달로그에 포함되기까지 한다.) 다만 비틀즈가 해체에 다다른 1970년에는 그 버릇을 못 버리고 Hey Jude를 발매한다.[40] 이 기록은 물론 레드 제플린, 마이클 잭슨에 이어 계속해서 경신되고 있다.[41] 재즈와 영화 사운드트랙 음반을 제외한 음악.[42] Rubber Soul로 싱글이 아닌 앨범 위주의 감상 풍토가 시작되었고, 자극받은 각종 아티스트들이 명반을 만들기 시작한다.[43] 비틀즈는 16분부터.[44] Capitol이 발매한 미국 정규 앨범. 수록곡이 완전히 엉망이다. Help!의 남은 두 곡인 "Yesterday"와 "Act Naturally", Rubber Soul의 나머지 트랙, 그리고 영국에선 아직 발매도 안하고 8월 발매되는 Revolver에나 실리는 "I'm Only Sleeping", "Doctor Robert", "And Your Bird Can Sing"이 뒤섞여 있다. Capitol 발매 앨범이 얼마나 막장인지 보여주는 앨범이다.[45] Capitol이 영국 버전의 앨범을 갈기갈기 찢어서 거의 두 배나 많은 미국 버전을 발매하여 많은 비난을 받아왔다.[46] 서포트 밴드는 더 드리프터즈(!!!), 우치다 유야, 비토 이사오, 더 블루 코메츠, 모치즈키 히로시와 블루 진즈.[47] 이 말은 일본 소설인 아빠는 가출 중에도 소개되어있다. 가출한 '아빠'가 청소년 시절 비틀즈가 일본에 오기로 했다 취소되었단 소식을 듣자 "이 죽일놈들!" 하면서 몇날며칠을 길길이 날뛰는 내용이다.[48] 다만 비틀즈 해체 이후인 1971년 존 레논은 아내 오노 요코와 함께 도쿄를 여행하던 중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하게 된다.[49] 레논은 "필리핀에 다시 가게 된다면 수소 폭탄을 갖고 갈 것"이라고 했다.[50] 상업적인 공연으로서는 마지막. 몇 년 후에 루프탑 콘서트를 한 회 하였다.[51] 여담으로 커버 페이지에 히틀러도 넣을까 고민했었다고...[52] 반 년 가까이 음반이 발표되지 않자 엡스타인이 신곡을 요청했고 마틴이 이 두 곡을 추천한 것. 훗날 마틴은 "비틀즈의 최고의 싱글"로 평가하면서도 이를 두고 "끔찍한 실수"라고 했는데, 싱글로 발표한 곡은 앨범에 수록하지 않는 비틀즈의 원칙에 따라 이 명곡들이 Sgt. Pepper에서 제외되었기 때문.[53] 러시아어로 '사랑'을 의미하는 'Любовь(Lyubov')'를 쓰려 한 것 같은데...[54] B사이드인 'I am the Walrus'가 크게 찍힌 것으로 보아, 싱글 뒷면을 찍은 것이다.[55] school of whales(고래들의 학교)라고 했다가 "너무 큰 거 아니야?"라고 해서 "그럼 대학인 거지."라든지, Saturday와 Sitar의 발음의 유사성을 이용한 개그를 친다든지...[56]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장면과 같은 부분에서 확인이 가능하다.[57] 이 시기에 원형이 잡힌 곡들은 화이트 앨범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비틀즈 앨범, 더 나아가 각자의 솔로 앨범에도 쓰이게 된다. 대표적으로 Mean Mr. Mustard, Jealous Guy 등이 있다.[58] 전자는 매카트니, 레논, 해리슨이 모두 드럼을 쳤다.[59] 이러한 점들 때문에 이 LP를 그들의 정규 앨범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존재한다.[60] Let It Be의 원형[61] 싱글 앨범 "Get Back"의 아티스트가 'The Beatles with Billy Preston'으로 기록됨.[62] 3월 12일에 결혼함.[63] 비틀즈 네명 모두가 마지막으로 같이 녹음한 곡은 "The End"이다. 1969년 8월 18일에 녹음.[64] 공식 해체 이후인 1971년에 존 레논이 폴 매카트니의 부인인 린다 매카트니에게 보낸 편지에 언급된 바로는 당시에 폴 매카트니와 앨런 클라인이 아무 말 없이 밴드를 떠나는게 좋을 것이라고 하루 종일 설득했다고 한다. 관련기사[65] 시나트라의 1971년 라이브 영상. 이전에 "레논-매카트니(...)가 만든, 지난 50년 간 최고의 러브 송"이라고 잘못 소개했던 것이 유명한(?)데 그 후로는 영상에서처럼 "조지 해리슨"으로 고쳐 말했다.[66] 역대 최다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기록. Come TogetherSomething을 별개의 곡으로 보는 관점에 따른다면 21곡. 단, 이는 비틀즈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67] Get Back 앨범 버전의 마지막 부분에 '이걸로 오디션에 통과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라는 레논의 농담이 나오는데, 이에 대한 재치있는 답변을 보인다.[68] "친구들, 음악적으로 자네들은 오디션을 통과했네.[67] 허나 스스로 오버프로듀싱을 피하거나 가장 악명 높은 오버프로듀서에게 "Get-Back"의 운명을 던지지 않을 수 있는 판단력이 있는가에 대해서라면 아니야."[69] 존과 폴이 작곡자 표기를 서로 달리하게 된 계기는 1969년 7월 4일 발매된 'Give Peace a Chance'에서였다. 이 당시에는 비틀즈 해체가 내부에서도 공식화되지 않았던 때라 존은 레논-매카트니 명의로 발매했으나, 이후 정치색이 강한 노래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가는 것을 꺼린 폴의 의견을 반영해 존 레논 단독 명의로 수정된다.[70] 앞서 언급했듯, 링고는 앨범 발매를 미루라는 의견을 전하려다가 폴에게 문전박대를 당할 지경이었다.[71] 원문은 여기서 확인 가능하다.[72] 'He didn't quit, I sacked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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