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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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한민주당 흰색 로고.svg 사무총장
초대
류제연
제2대
박해충
제3대
류갑종

대한민국 제5·8-10·12대 국회의원
박해충
朴海充 | Park Hae-chung
파일:-박해충.jpg
출생1928년 12월 12일
경상북도 안동군
(現 안동시 남후면 개곡리)
사망2005년 2월 21일 (향년 76세)
서울특별시
본관밀양 박씨
배우자최혜숙
자녀슬하 1남 1녀
학력대구공립공업학교 (졸업)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중퇴)
병역대한민국 공군 상사 예편
종교무종교
의원 선수5
의원 대수5, 8, 9, 10, 12
경력민주당 기획위원
제5대 국회의원 (경북 제15선거구 / 민주당)
민중당 조직국장
제8대 국회의원 (경북 제13선거구 / 신민당)
제9대 국회의원 (경북 제9선거구 / 신민당)
신민당 정무위원
제10대 국회의원 (경북 제9선거구 / 신민당)
신민당 안동시지구당위원장
신민당 경북도당위원장
신민당 사무총장
제12대 국회의원 (전국구 2번 / 민주한국당)
민주한국당 중앙당 당무위원
한일의원연맹 부회장
독립공업 사장
삼천리교재사 사장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본관은 밀양(密陽)#.

2. 생애[편집]


1928년 경상북도 안동군(현 안동시) 남후면 개곡리[1]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공업학교을 졸업했고,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6.25 전쟁 발발 직전 공군으로 자원입대하다가 전쟁 중 육군으로 편입되었다. 편입 뒤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을 방어하다가 수류탄 폭발사고로 심한 부상을 입었다. 이 부상 때문에 공군으로 복귀해 상사로 예편했다. 6.25 전쟁이 끝난 뒤 안동에 살던 가족을 모두 데리고 대구시 대봉동으로 이사해 살았다고 한다.

1950년대 초반 유진산, 신도환 등이 결성한 청년단체에 가입하며 청년운동[2]을 시작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54년 당시 25세의 나이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안동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낙선하였다. 낙선 후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익희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선거운동을 도우면서 정치적 행보를 본격화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안동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자유당 김익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여담으로 당시 박해충이 낙선한 이유 중 하나가 당시 안동시에서는 안동 권씨안동 김씨가 독특한 방식의 연대를 통해 선거 때마다 타 성씨의 진입을 합동으로 견제하는 바람에 밀양 박씨인 박해충은 당선되지 못했다. 실제로 제헌 국회부터 제4대 국회까지 안동김씨·안동권씨 두 문중이 당시 안동군 갑·을 선거구의석 두 자리를 거의 나눠 가지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총선에서 박해충의 선거구호는 "잡성도 좀 해보자"였다.

1960년 당시 31세의 나이에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안동군 을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으로 임기를 1년도 채우지 못하고 국회의원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다. 이 당시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하다가 11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안동시-안동군 지역구에 출마하였다가 낙선하였다. 이 당시 낙선의 여파로 가산을 탕진하면서 동대문구에서 솜 장사와 배달 일을 하며 힘들게 살았다고 한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다시 경상북도 안동시-안동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민주공화당 김대진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우홍구와 복수공천을 받아 경상북도 안동시-안동군-의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우홍구는 낙선하고 본인과 민주공화당 김상년 후보가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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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10월 28일 안동다목적댐 준공식 기념행사. (왼쪽부터) 김재규 건설교통부장관, 박정희 대통령, 안경모 한국수자원공사 사장, 박해충 국회의원

국회의원 재직 당시 안동다목적댐을 조성하기 위해 여당과 야당을 넘어 두 팔 걷고 협조하는 등 댐 조정에 큰 역할을 하였다. 덕분에 야당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이랑 같이 준공식에 참여하였다. 다만 이 때문에 "박정희와 박해충이 같은 박씨라 친분이 두텁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사쿠라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실제 본인 역시 특정한 계보에 소속되지 않은 채 박정희 정권에서 대규모 국가사업을 추진할 때마다, 본인의 소속 정당인 야당의 입장과는 반대로 매우 협조적인 자세를 보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단수 공천을 받아 해당 지역구에 출마하여 역시 민주공화당 김상년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그러나 1980년 5.17 내란 직후 모처에 끌려가 고문당하고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이후 수년간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다가 1984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었다.

정치규제가 해금된 뒤인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87년 김영삼통일민주당을 창당할 때 바로 따라가지 않았고 신한민주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임박하자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의 공천에서 탈락하자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안동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류돈우 후보에 밀려 낙선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이후 독립공업 사장, 삼천리교재사 사장을 지냈으며 2005년 간 손상으로 인한 식도 정맥류 파열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6세.

3. 선거 이력[편집]


연도선거종류선거구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선여부비고
1954제3대 국회의원 선거경북 11[3]
[[무소속|
무소속
]]
9,412 (27.57%)낙선 (2위)
1958제4대 국회의원 선거경북 15[4]
14,280 (36.97%)
1960제5대 국회의원 선거15,413 (39.12%)당선 (1위)초선
1963제6대 국회의원 선거경북 11[5]
파일:민주당(1963년) 흰색 로고타입.svg
17,691 (24.27%)낙선 (2위)
1967제7대 국회의원 선거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벽보글씨.svg
]]
33,181 (36.88%)낙선 (2위)
1971제8대 국회의원 선거경북 13[6]42,863 (47.79%)당선 (1위)재선
1973제9대 국회의원 선거경북 6[7]44,914 (27.84%)당선 (2위)3선[8]
1978제10대 국회의원 선거47,776 (27.58%)4선[9]
1985제12대 국회의원 선거전국구
[[민주한국당|
파일:민주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3,931,300 (19.68%)당선 (2번)5선
1988제13대 국회의원 선거경북 안동
[[무소속|
무소속
]]
8,544 (15.10%)낙선 (3위)

4. 둘러보기[편집]












[1] 독립유공자 박해옥도 이 마을 출신이다.[2] 이 시기의 청년운동은 백의사를 포함한 정치깡패 활동을 의미한다. 이 당시에는 좌우익 모두가 청년단체로 대표되는 정치깡패 집단을 동원해 서로에 대한 테러와 공격, 요인 암살 등을 일삼던 시기였다.[3] 안동군 을[4] 안동군 을[5] 안동시, 안동군[6] 안동시, 안동군[7] 안동시, 의성군, 안동군[8] 민주공화당 김상년 후보와 동반 당선[9] 민주공화당 김상년 후보와 동반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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