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부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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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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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항목 중 범죄 혐의로 사법적 판단을 받았거나 판단 중인 사안은 ★로 별도 표시.
1. 개요
2. 이명박 정부에 관한 부정적 평가
2.1. 정치
2.1.1. 인사 실패
2.1.2. 부정부패
2.1.3. 대보그룹 뇌물 수수 의혹 ★
2.1.4. 공천 헌금 수수 의혹 ★
2.1.4.1. ABC상사 뇌물 수수 의혹 ★
2.1.4.2. 지광 스님 뇌물 수수 의혹 ★
2.1.5. 정부 비대화
2.1.6.1. 북한디도스 사이버공격 대응 혼선
2.1.6.2. ICT 경쟁력 약화와 미래성장동력 대비 부족
2.1.7. 대통령기록물 유출 ★
2.2. 정적 탄압
2.2.1. 국정원의 노벨평화상 취소 공작
2.2.2. 데이비드슨 프로젝트
2.2.3. 연어 프로젝트
2.4. 안보·국방
2.4.1. 구제역으로 인한 피해
2.4.2. 학군사관 정원 폭증으로 인한 차후 인사적체 악화 야기
2.4.3. 북한의 군사도발 대처 미흡
2.4.4. 기강해이
2.4.5. 방산비리
2.5. 외교
2.6. 경제
2.6.1. 외환보유고 낭비와 환율 정책 실패
2.6.1.1. 키코 사태
2.6.2. 막대한 정부부채
2.6.2.1. 공기업 부실화 초래
2.6.3. 막대한 가계부채
2.6.4. 물가 불안정
2.6.5. 노동탄압과 친재벌 정책
2.6.5.1. 노조 파괴 공작
2.6.5.2. 부자 감세
2.6.6. 보편적 복지 축소
3. 이명박 개인에 관한 평가 및 논란
3.1. 각종 막말
3.1.1. 금속 노조 대학교수 비하 발언
3.1.2. 서울 봉헌 발언
3.1.3. 여성 비하 발언
3.1.4. 장애아 낙태 발언
3.1.5. 민주화세력 비하 발언
3.1.6. 그 외 문제가 된 언행들
3.2. 현대건설 부실 경영
3.3. 선거법 위반과 범인 도피 ★
3.4. 상습적인 거짓말 논란
3.5. 가족 위장 전입·취업과 탈세·횡령 ★
3.6. 출생지 표기 논란
3.7. 내곡동 사저 매입 사건
3.10. 무료 테니스 논란
3.11. 히딩크 사진 촬영 사건
3.12. 취임식 엠블럼 관련 논란
3.13. 노무현에 대한 표적수사
3.14. 리더로서는 낙제점인 용인술
3.16. 그 외 논란


1. 개요[편집]









이런 위대한 국가 대한민국 국민을 가지고 왜 우리나라가 이렇게 어려워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단지 지도자를 잘못 만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대통령 후보로 지지자들에게 연설 중


지금 매일매일 새롭게 드러나는 지난 정권의 적폐는 아주 중요한 한 사람을 향하고 있습니다, 책임자의 위치에 있었지만 지금껏 한 번도 책임을 지지도 책임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도 않은 한 사람. 국정원, 대한민국 법원, 대한민국 검찰청, 대한민국 경찰청, 군대까지 마음만 먹으면 움직일 수 있는 단 한 사람, 늦더라도 진실은 반드시 떠오르고 강요된 침묵은 반드시 깨어진다는 사실을 몰랐던 바로 그 한 사람 말입니다.

그것이 알고싶다 1094회 중


왜 국민들을 둘로 갈라 싸우게 했는지? 국가 권력을 동원해 여론을 조작하고 개인의 삶을 파괴하면서까지 얻으려고 했던 것은 무엇인지? 반대하는 목소리를 탄압하고 사찰하는 것이 과연 당신들이 믿는 민주주의인지? 이제 당신께서 국민들의 이 물음에 답할 차례입니다.

그것이 알고싶다 1094회 클로징 멘트


이명박은 대통령 재임 시절 국민들에게 재임기간 내내 사기꾼이라는 오명을 들었으며, 한나라당 경선후보 시절 당시 한 "온갖 음해에 시달렸습니다.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 발언과 더불어 두고두고 회자된다. 이명박에 대한 비판으로는 대통령 집권 기간 동안 추진한 사자방[1] 비리와 언론 탄압, 기업자금 횡령과 탈세, 배임 혐의를 저지른 재벌 총수들에 대한 사면복권 혜택 남발 등의 비판[2]이 있다.

또한 일각에서는 박근혜 정부에게 내려지는 평가경제 부분이 이명박에게서 비롯되었을 뿐 박근혜는 단지 대통령에 취임했을 뿐이라는 평가까지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이유로 후임 대통령인 박근혜와 묶어 이명박근혜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게다가 2017년에 계속해서 나오는 보도들을 보면 이명박 정부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주도하고, 공영방송에 대한 낙하산 인사와 언론인 탄압으로 언론환경을 초토화시키고,[3] 여기에 국가정보원, 사이버작전사령부, 국군기무사령부를 동원하여 조직적으로 댓글 조작을 일삼았으며, 보수 단체들을 동원하여 관제데모를 실시하면서 야권 인사들에 대한 흑색선전과 사찰을 일삼았던 데다가 대선에 개입했다는 반헌법적인 행태가 이명박 정부 내에서 끊이지 않았다는 보도가 연일 쏟아져 나오고 있어서 이명박에 대한 비판 여론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또한 이러한 반헌법적 문제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친인척 비리와 퇴임 후 벌어지고 있는 다스 실소유주 논란, BBK 주가조작 사건, 캐나다 농협 사기대출 사건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비리 문제가 계속 제기되고 있다. 더군다나 이 비리와 헌정 유린 사태들은 하나하나가 대한민국 사상 최악의 정치사태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의 사건으로 확장될 수 있는 뇌관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명박 정부는 박근혜 정부처럼 거의 범죄조직 수준의 조직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나올 정도로 여론이 험악한 상황이다.[4] 거기다가 2018년 1월에는 UAE 원전 수주와 연관된 비공개 군사개입 협정 의혹이 드러났으며,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을 조사하던 도중에는 이 특수활동비를 이명박 정부의 핵심 측근들이 유용했다는 정황이 나와 검찰이 수사에 들어가기까지 함으로써 이명박에 대한 여론은 더욱 악화되고 일부 세간에서는 범죄조직을 넘은 그 이상의 적폐세력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러한 보도와 대중들의 비판에 대해 이명박과 그의 지지자들은 제대로 된 해명 없이 이러한 보도들을 문재인 정부의 정치보복이라는 궤변을 펴고 있지만, 이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싸늘하기 짝이 없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 집권 말기인 2012년에는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거세개탁[5]이 뽑혔다.[6]# 이렇게 중국과 같은 독재국가의 지도자들처럼 끝도 없이 비리가 터져 나오는 판국이라 진정한 적폐청산은 이명박을 처단해야 끝이 난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다. 결국 자신을 향한 검찰의 칼이 턱밑까지 올라오자 이명박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정치보복이라는 의견을 내세웠으나, 이 의견은 국민들을 설득하기는커녕 더 큰 분노를 불렀고, 검찰의 수사강도는 오히려 훨씬 더 강해지고 있다.

2018년 3월 현재는 위에 언급된 비리 문제들을 제외하고도 삼성 다스 소송비 대납사건, 이팔성 전 우리금융회장 인사청탁 논란, 대보그룹 청탁 논란, 각종 차명재산 의혹, 공천 헌금 불법 수수, 청와대 문건 불법 반출 등 문제들이 정말 끝도 없이 터지고 있다. 이 때문에 검찰의 수사 범위가 자꾸 늘어나면서 이명박 소환 시기 마저 늦춰지고 있다. 물론 박근혜처럼 소환 혹은 재판 개시 이후에 또다른 의혹이 터지란 법은 없다. 당장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이 록히드마틴 등 미국 방산업체의 이권을 담당한 로비회사 직원으로부터 억대의 금품을 전달받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명박 정부의 초대형 뇌관인 군납비리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2. 이명박 정부에 관한 부정적 평가[편집]




2.1. 정치[편집]




2.1.1. 인사 실패[편집]


회전문 인사[7], 강부자(강남 땅부자), 고소영(고려대 + 소망교회 + 영남출신) 등의 코드인사를 한다는 비판이 크게 일었다.

이 대통령이 임명한 이들 중에는 드라마에서 자기를 모델로 한 캐릭터를 맡았다고 뽑고나니 정작 기자들을 향해 찍지 마, XX, 성질이 뻗쳐서.라고 말하거나 학부모에게 종북주의자들에게 선동을 당했다는 발언을 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747 공약을 기획하고 고환율 정책으로 경제난을 초래한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 은진수# 감사위원[8] 등이 유명하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에서 MBC 사장이 된 김재철의 경우 문화방송을 정권의 나팔로 전락시키며 암흑기의 시작을 열었고, 보도국과 시사제작국 등에 압력을 넣어 정권에 불리한 보도나 시사프로그램의 방영을 막았다. 정귄이 바뀌었음에도 김재철의 유산은 사장이 세 번이나 바뀌는 와중에도 유지되었다. 이 김재철 밑에서 보도국장이나 보도본부장을 지냈던 인물로는 전영배, 권재홍이 있었고, 김재철이 물러난 이후에 보도국장 자리에 오른 김장겸, 이진숙은 더욱 이 기조를 강화시켰으며, 김장겸은 아예 사장직에 오르기까지 했다. 이들은 MBC 뉴스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보도본부를 망친 만악의 근원으로 유명하다. 같은 시기에 한국방송공사의 사장을 지낸 김인규도 악명은 높았지만 김재철에 비하면 그나마 덜 악랄했다.

또한 양승태대법원장 시절 권위주의적 운영과 사법행정권 남용으로 국민들의 사법불신에 매우 큰 기여를 했으며 임기 막판에 홍역을 치렀다.

국정원장 원세훈은 턱에 염증이 생겼다는 이유로 군대를 면제받았고, 정보기관에서 단 한 번도 근무한 적이 없는 사람인데도 국정원장으로 임명되었다.[9] 그리고 그는 국정원 여론조작 사건을 일으키며 재판을 받았고,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된 것을 제외하면 1심, 2심, 재2심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끝내 징역 4년이 확정되어 현재 복역 중에 있다.

최시중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은 어처구니없는 심사 기준으로 국민들의 반감을 사는 현재의 방통위를 만든 원흉으로 지목받는다. 최시중 위원장 시절 성인 사이트 차단이 크게 증가하여 국민들 사이에서 성인이 성인 사이트를 볼 수 없다는 비판과, 국가가 개인의 행복과 자유권을 제한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논란이 일었다.

이명박이 임명한 조현오 전 경찰청장은 노무현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로 징역형을 살았고 천안함 희생자 유족들에게 짐승처럼 울부짖는다는 막말을 했다.#[10] 하지만 이명박은 자신의 측근이라는 이유로 사퇴 요구에도 그를 감쌌고, 이후 조현오는 경찰의 무능한 대응으로 유명한 수원 토막 살인 사건이 터지면서 결국 사퇴하게 된다.

이때 보수 성향의 언론인 조선일보조차 이명박 정부의 인사 행태를 "인사를 잘못해도 어떻게 이토록 잘못할 수 있느냐.", "감탄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사람에게 주는 노벨인사상이 있다면 이명박 대통령이 받아야 한다.", "이 대통령의 인사가 사람들을 어이없게 만들고, 화나게 하고, 짜증나게 만드는 데 있어서 거의 '예술'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고 보기 때문." 이라고 지적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근거로 "첫째, 이 대통령은 인사로 만들어지는 전체 그림을 볼 줄 모른다면서 첫 비서진을 단 두 개 지역 출신만으로 구성한 것이 그 사례", "둘째, 왜 하필 그 사람을 골랐느냐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이 대통령이 헌법기관인 감사원장에 자신의 비서 출신을 앉히려 했던 것은 명분을 짓밟는 것이었다고 했다", "셋째, 이 대통령은 사람을 볼 줄 모른다는 것이다. 예컨대 딴 사람은 몰라도 그 사람만은 안 된다는 바로 그 사람을 고른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명박은 '인사를 잘못한다', '할 줄 모른다'라는 평가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고 혹평했다.#[11]

후술하겠지만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민간과 공직을 막론하고 불법, 비리 행위가 급증했다는 비판이 있는데 그 이유로는 이명박 정부가 고위 공직자들의 불법과 탈법 전력에 유난히 관대했던 영향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우선, 이명박 정부 들어서 고위 공직자의 도덕성 수준이 하락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예를 들면, 위장전입·병역면제·투기·탈세가 이명박 정부 고위 공직자들의 4대 필수과목이라는 말이 있다는 사실이 많은 언론에서 공통적으로 거론되었다. 야당 역시 이명박 정부의 부패 실태를 집중 공격하였다.#####[12]

2011년 1월 27일에는 박지원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가 박한철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두고 4대 필수과목 미이수자, 군필자라며 칭찬하는 등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다.#[13] 참고로 총리/장관 후보자 청문회는 노무현 정부 때리기 위한 목적으로 한나라당이 참여정부 시절에 도입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대통령 본인부터 장관에 이르기까지 위장 전입, 악성 부동산 투기, 석연찮은 병역면제와 관련이 없는 경우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는데도 불구하고 집권층 고위인사들이 보란 듯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현실이 한국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끼쳐서 불법행위 급증으로 나타났다는 분석이 있다. 이전 정부였던 노무현 정부는 위장 전입 문제 하나로 떨어지는 후보자들이 꽤 많았는데, 이명박 정부는 아예 위장 전입은 기본으로 깔고 가더니, 군부지를 사놓거나 전관예우, 정경유착, 병역비리도 모자라 군납비리까지 줄줄이 사탕으로 나옴에도 불구하고 임명 직전까지 갔다가 탈락하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2.1.2. 부정부패[편집]




"우리 정부는 도덕적으로 가장 완벽한 정권이다." -2011년 9월 한 말[14]


이명박을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부정부패에 대해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이명박 정부는 역대 정부 중 민간과 공직사회에서의 비리가 급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4대강 정비 사업자원외교 과정에서의 측근, 실세, 기업 비리였다. 이명박 정부의 핵심 국정 사업들은 임기 종료 이후 시민사회에서 '국고를 낭비한 실패작'으로 비판받았으며 대한민국의 부패한 관행이 나아지기는커녕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특히 2011년 국정감사 기간 중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민주당 최규식 의원이 행정안전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주민등록법 위반자는 2006년 180명에서 2010년 422명으로 2.5배 늘었으며, 위장전입으로 적발된 경우는 2006년 29명에서 2010년 101명으로 3.5배 증가하였다. 병역기피도 급증한 것으로 나와 병무청이 민주당 안규백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를 보면 징병검사 또는 입영을 기피한 ‘무단기피’가 2008년 231명에서 2010년 426명으로 84.4% 증가한 것으로 돼 있다. 또 국적 변경을 통해 병역이 면제된 경우도 2008년 2750명에서 2010년 4174명으로 51.7% 늘었다.[15]

공무원들의 비리 또한 급증하였는데, 국민권익위원회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공무원 행동강령 위반건수는 2008년 764명에서 2009년 1천 89명, 2010년 1천 436명으로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면서 3년간 모두 3천 289건을 기록했다. 참여정부 때인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년간 총 2천 294명보다 43.4%가 늘어난 셈이다. 위반 내용도 금품·향응 수수가 43.3%를 차지했다. 게다가 행정안전부가 중앙공무원을 제외하고 집계한 2010년 뇌물수수와 공금횡령 등의 부패로 파면·해임 등의 징계를 받은 자치단체 공무원만 2천 960명이었다는 점을 보면 드러나지 않은 강령위반 사례는 위의 3천 289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16][17]

2.1.2.1. 친인척·측근 비리[편집]

파일:2013010434201796.jpg

파일:infogra_mb.gif

저 사진 속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비리로 인해 구속되거나 집행유예,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가회동 아주머니’ 소환… 檢, 김윤옥 여사 정조준
검찰, ‘국정원 특활비 수수’ 김윤옥 여사 소환 가능성
MB 친형 이상득, 구급차 타고 檢출석… 김윤옥 여사도 조사받나

이명박 정부의 친인척 비리는 다른 정부들과 비교를 해보아도 가히 심각하다. 이명박이 대선후보 시절 정치자금 조달과 대통령 당선 이후 자원외교를 지휘한 이상득은 보좌관이 돈 세탁을 했단 의혹을 사며 뇌물 혐의로 보좌진이 대거 구속된 가운데 불출마 선언으로 상황을 무마하려 했지만, 솔로몬·미래저축은행 등으로부터 7억 6000만 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면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 친형으로서 구속되고, 포스코 비리와도 연관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상득 의원은 선산이 있는 남이천 IC에 특혜 허가를 줬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총리실 민간인 사찰의 최종 배후라는 의혹도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한편 이상득 의원의 아들인 이지형은 골드만삭스자산운용의 한국 대표를 맡아, 자원외교 과정에서 1조 8천억의 나랏돈을 메릴린치에 투자해 막대한 손실을 일으킨 혐의를 받고 있으며, 인천공항 민간 매각설의 핵심으로 불리며 각종 논란에 휩싸였고, 결국 2012년 "조세회피지역"인 싱가포르로 이민을 떠났다. 이 외에 이명박 대통령의 사촌형이 4대강 건설 사업권을 미끼로 건설업자로부터 3억 원을 챙겼다고 사기 혐의로 피소되었으며, 조카인 정모 씨는 위조 계약서로 분양권을 주겠다며 2억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다. 또한 이명박 형제들 중 장남인 이상은 다스 회장의 사위인 씨모텍의 경영지배인 정종화 대표는 주가조직 및 수백억 원대 횡령 혐의를 받았다.[18]

게다가 이명박 대통령의 부인인 김윤옥의 형부인 황태섭은 금융 비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제일저축은행의 고문으로 재직하며 고액의 고문료를 받았는데 그가 고문으로 있던 제일저축은행은 각종 로비 의혹을 받았으며, 끝내는 불법 대출로 영업이 정지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김윤옥의 형부인 신기옥 대한적십자 경북지사 회장은 한상률 전 국세청장 인사 로비 자리에서 이른바 ‘충성주’를 마셨다는 의혹을 받았으며, 김경준 기획 입국설의 근거로 지목된 BBK 가짜 편지의 실제 배후라는 의혹도 있다.

이 외에도 김윤옥의 사촌오빠인 김재홍 전 서일대학 이사는 청와대, 대한민국 경찰청, 교육과학기술부가 개입됐다는 이른바 "서일대 홍차 사건"으로 유명하며, 제일저축은행 유동천 회장에게 4억 원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거기다가 김윤옥]의 사촌언니인 김옥희는 한나라당 비례대표 공천을 미끼로 김종원 서울시버스운송조합 이사장[19]에게 30억 원을 수수한 혐의로 역시 구속됐고,(#) 18대 총선비례대표 공천 사기를 친 혐의로 기소돼 실형을 살았다. 이외에도 김윤옥의 사돈인 조성래 효성그룹 회장도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재임시절 검찰 수사를 받았다. #2

이러한 친인척 비리 뿐만 아니라 측근 비리도 심각하여, 왕차관으로 불리던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20]이 민간인 불법사찰과 파이시티 관련 비리 혐의로 인해 징역 2년에 추징금 1억 9500만 원을 선고받아 구속됐고, [21] 47억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은 2012년 11월 30일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 추징금 30억 9400여만 원을 선고받았다. 또한 신재민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은 SLS 중공업 이국철 회장에게 뇌물을 받았고, 2012년 6월 1심 선고에서 징역 3년 6개월 및 벌금 5300만 원,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벌금 100만 원, 추징금 1억 1093만 8036원을 선고받았다.#

최시중 前 방통위 위원장은 2009년 총선 후에 친이계 3명에게 3500만 원의 금품을 준 것으로 밝혀졌으며[22] 최시중의 아들은 뇌물수수 비리 혐의가 드러났는데, 수사결과에 따르면 최시중의 아들은 자신의 측근인 김학인으로부터 김학인을 EBS 이사에 선임해주는 대가로 2억 원을 받았다고 드러났다. 결국 최시중 위원장은 파이시티 인허가 로비 관련 8억원을 받은 혐의와 "3년간 돈을 받아 MB 대선 때 썼다"면서 2007년 대선 당시에 금품수수를 받았다는 사실을 시인하여 구속되었다. 한편 MB의 측근인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은 CJ 이재현 회장에게 여자연예인 룸살롱을 접대받았고 이 사실은 청와대에도 보고되었지만, 청와대에서도 이 사건을 은폐하여 맹비난을 받기도 했다. #

2008~2009년에 한나라당 대표를 지냈고, 2010~2012년에 18대 국회 후반기 의장을 지낸 친이계 핵심 박희태 의원은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 의혹으로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며, 은진수 전 감사원 감사위원은 부산 저축은행 로비 대가로 1억 7천만 원을 받아 징역 1년 6월에 추징금 7천만 원을 선고받았다. 또한 최영 강원랜드 사장은 일명 "함바 비리" 수수 혐의로 항소심에서 징역 3년 추징금 4천 5백만 원을 선고받았다. 강경호 전 코레일 사장[23] 은 강원랜드 인사청탁 대가로 5천만 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5천만 원을 선고받았다. 이명박의 최측근 김희중 청와대 1부속실장도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전력이 있다.

또한 이국철 게이트로 유명한 SLS조선의 이국철 회장은 2007년 11월까지만 하더라도 무역보험공사로부터 지원이 거절당했는데 정권이 바뀌자 로비를 벌여 2008년 1월에 6억 달러의 선수금 지급을 보증받고 이어 11월에는 보증한도를 12억 달러로 올리는 등 특혜를 받았다. 그러나 이국철 회장의 사업이 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이국철은 이명박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이명박 정부의 핵심인사들은 이를 거부하였고 격분한 이국철 회장은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박영준 지식경제부차관,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 임재현 청와대 정책홍보비서관 등이 자신의 로비를 받았다고 폭로하였다. 한편 친이계였던 이은재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이상득 의원이 SLS비리의 몸통으로 거론된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2013년 자신의 임기가 끝나기 직전에 측근들을 대거 특별사면했다. 이는 당연히 많은 비난을 받았다.#


2.1.2.2.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편집]

“MB, 국정원 특활비 받았다” 검찰 정황 포착
檢 "MB가 국정원 뇌물 주범"…김백준은 방조범 구속기소

박근혜 정부에서 벌어진 국정원의 특수활동비 상납사건이 이명박 정부에서도 벌어진 일이었다는 구체적인 정황들이 나왔다. 일단 당시 원세훈 국정원장이 특수활동비를 빼돌려서 강남 한복판의 안전가옥을 호화롭게 꾸미고 퇴임 후에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노후생활을 보내기 위한 자금을 마련한 정황[24]이 드러나면서 검찰이 이명박 정부 인사들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되기 시작했고, 이명박 정부 청와대 소속 인사들이 국정원으로부터 불법적으로 자금을 수수한 정황을 포착해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 김진모 전 민정 2 비서관[25]김희중 전 대통령 제1부속실장의 자택 등을 전격 압수수색했으며 또한 당시 핵심 측근들이 국정원 특활비 5억여 원을 수수한 정황이 드러났다. 결국 이명박 정부 당시 민정2비서관을 지냈던 김진모가 구속되었고 1월 17일 자정에 이명박의 최측근인 김백준까지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후 계속된 검찰 조사에서 이명박이 대통령 시절 국정원의 특활비 1억 원을 김희중 전 부속실장을 통해 받았다는 진술을 검찰이 확보하기에 이르렀으며 국정원 특활비의 일부가 달러로 환전돼 이명박의 미국 순방 직전 청와대 쪽에 전달된 정황이 확인됐다. 거기에 검찰 조사과정에서 국정원 특활비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수석 및 장관에게 전달됐다는 김백준 전 기획관의 진술이 나왔다. 이로 인해 이명박이 사건의 공범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또한 SBS 단독보도에 따르면, 국정원이 이명박 정부에 상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돈 가운데 일부가 당시 민간인 사찰 사건을 폭로했던 사람에게 입막음용으로 건네진 정황이 포착되었고, 사건 관련자들의 입막음용으로 의심되는 돈의 일부가 국정원 특활비에서 빠져나간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에 검찰은 이러한 특활비가 흘러간 과정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의 개입 여부에 대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


2.1.2.3. 국가정보원 대북공작금 유용 사건[편집]

국가정보원 대북공작금 유용 사건 참고


2.1.2.4. 이팔성 뇌물 사건 ★[편집]

이팔성우리금융회장이 연임, 민원 대리 청탁, 선거 자금 지원을 위해 이명박 대통령 측에 22억 원을 뇌물로 보낸 사건이다. # 사실이라면 매관매직을 저지른 사례라서 파문이 커지고 있다. 참고로 매관매직은 비리 중의 비리다.

이 전 회장이 건넨 22억 원 가운데 일부가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 흘러간 정황이 포착됐다. ## 당시 금호그룹이 무리한 인수를 하다가 자금난을 겪자, 이 전 대통령 측에 대출 관련 청탁을 하면서 돈을 건넸을 것이란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게다가 금호그룹 측의 주거래 은행이 우리은행이었기에 이 전 회장이 연루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게다가 이 전 대통령의 큰 사위인 이상주 변호사가 이 돈의 일부는 김윤옥 여사에게 흘러갔다는 진술을 하면서, 김 여사까지 비리에 연루된 의혹이 생겼다. ##2



2.1.3. 대보그룹 뇌물 수수 의혹 ★[편집]


이 전 대통령 측이 대보그룹으로부터 5억 원의 뇌물을 받고 4대강 사업 공사에 끼워준 정황이 보도됐다. #

허나 1심 재판부는 "검찰이 주장하는 청탁의 내용이 지나치게 막연하고 추상적이고, 돈을 직접 받았던 김백준도 '돈을 받을 즈음에 그런 대화는 없었으며 어떤 이야기가 오고갔는지는 모른다'고 진술했다"며 뇌물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2.1.4. 공천 헌금 수수 의혹 ★[편집]


김소남 전 한나라당 의원이 지난 2008년 18대 총선 무렵 이 전 대통령 측에 5억 원 상당의 금품을 전달한 것으로 밝혀졌다. # 만일 이 전 대통령이 여기에 직접 개입했다면 뇌물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 제19대 총선을 앞두고 이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명단에 친박 인사를 얼마나 넣을지에 대해 “4명은 너무 많고 2명만 포함하라”는 식으로 ‘깨알’ 관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26]#

1심 재판부는 뇌물죄와 정치자금법 위반죄가 모두 성립한다며 유죄로 판결했다.

2.1.4.1. ABC상사 뇌물 수수 의혹 ★[편집]

검찰이 이 전 대통령 측이 제17대 대선 전후로 뉴욕제과로 알려진 ABC상사 손병문 회장으로부터 2억 원을 받은 정황을 포착했다. 특히 이명박 정부 당시 손 씨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서울시 부의장에 임명됐는데, 이 전 대통령에게 뒷돈을 바친 대가로 부의장에 임명됐다는 의혹이 커지고 있다. #

하지만 1심 재판부는 "김백준에게 선거자금 명목으로 2억 원이 전달된 사실 자체는 인정되지만, 손 회장이 "사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에서 선거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고 진술한 점, 그리고 검찰이 주장하는 청탁의 내용이 너무나 막연하며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이를 들어주기로 공모했다는 근거도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KBS


2.1.4.2. 지광 스님 뇌물 수수 의혹 ★[편집]

제17대 대선을 앞둔 2007년 말 이 전 대통령 측이 지광 스님의 "불교대학 설립에 편의를 제공해 달라"는 청탁과 함께 2억여 원을 받았다는 의혹이 보도됐다. # 이명박의 최심복이었던 김백준 전 기획관이 이 사실을 진술했고, 지광 스님도 돈을 건넨 사실을 시인했는데 후에 지광 스님은 전달한 금액이 3억이라고 말을 바꿨다. #

하지만 1심 재판부는 "김백준이 돈을 받았다는 사실은 인정되나 그 사실을 이상득 전 의원에게만 보고했을 뿐, 지광 스님으로부터 어떠한 부탁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상득 전 의원이나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전달하지 않았고, 지광 스님 또한 '불교 발전을 위해 힘써달라'는 취지로만 부탁했기 때문에, 청탁에 구체성이 없어 뇌물죄가 성립되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KBS


2.1.5. 정부 비대화[편집]


대선시절과 정권 교체 초기에 이 대통령은 작은 정부를 강조하였다. 공무원 수를 1/3 정도 줄이고, 세수를 줄여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취지였다. 인수위원회에서 정부 부처를 줄이긴 하였으나, 정작 줄이기로 한 공무원 숫자는 오히려 8만 1219명 늘리기로 하였으며, 예산도 전년 대비 5.3%나 책정하여 자유지상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았다.[27][28]

다만 이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던 대통령 당선 초기의 시시각각 급변하는 상황에서 결국 임기내내 관철 할 수 없는 비전이었다. 이는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있었던 일인데, 둘 다 신자유주의 이념을 내세워서 정부 규모를 줄이고자 했으나 내적으로도 반발이 강하고 외적으로도 공무원이 부족하면 부족했지 결코 많지 않은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보니 점차 정책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행정학적 용어로 설명하면, 신공공관리론에 입각해서 작은 정부를 만들고자 하였으나 경로의존성 때문에 원상복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1.6. 정보통신부과학기술부 해체의 여파[편집]


이명박 정부는 출범시 작은 정부을 지향하며 과학기술부와 정보통신부를 해체했다. 과학기술과 정보통신기술(ICT)을 각 산업에 스며들게 해 모든 산업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몇가지 문제점이 대두되었다. 뒤이은 박근혜 정부는 ICT와 과학기술 업무를 일원화 하기 위해 미래창조과학부로 부활시켰다.


2.1.6.1. 북한디도스 사이버공격 대응 혼선[편집]

이명박 정부 당시 정부기관, 금융기관, 포털사이트 등에 대한 북한의 사이버 공격이 여러 차례 있었는데 정부 대처에 대해 여러 차례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정부 출범시 정보통신부를 해체하면서 정보보호·사이버 안보 관련 기능도 각 부처로 분산된바 있는데, 위기상황 대응시 부처간 혼란이 야기되면서 해체된 정보통신부가 담당하던 컨트롤타워 기능의 부재가 문제점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 # # #

2009년 7월 7일부터 9일까지 3차에 걸쳐 청와대, 국방부 등의 정부기관과 은행, 언론사, 정당, 포털사이트 등을 대상으로 한 사이버공격('7.7 디도스 공격')이 있었다. 7월 10일부터는 악성코드로 인한 하드디스크 포맷도 진행되었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디도스 공격에 사용된 인터넷 주소가 북한 체신청이 사용해온 것‘이라며 북한을 공격의 배후로 추정했다.# 공격 대응시 유관 기관들간에 혼선을 빚으며 과거 정보통신부가 담당했던 컨트롤타워의 부재가 문제로 지적되었다.# 또한 정보 보안 위험수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의 정보보호 관리 인력과 예산의 삭감이 지적되기도 했다. 사이버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인력은 과거 정통부 때 1국 3과 33명이었으나, 1과(방송통신위원회 네트워크안전기획과) 9명으로 축소된 뒤, 다시 1팀(방통위 네트워크정보보호팀) 7명으로 줄었다는 것과, 정보보호 인프라 강화를 위한 예산은 63억원(2005년)에서 29억원(2009년)으로 절반 이상 축소됐다는 것이다. 대응기관 중 하나인 방통위 관계자도 “인터넷 이용량이 많아지면서 보안 위험수위가 높아진 반면 이에 따른 대응수준은 약화된 측면이 있다”고 평가한바 있으며#, 각 부처 담당자들 또한 기관 간 정보공유가 이뤄지지 않아 대응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보안 컨트롤타워를 어느 부처에서 운용하느냐를 두고서는 서로 입장이 달라 갈등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 측근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컨트롤 타워의 필요성에 공감한다. 현재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한바 있으며#, 여당 소속이었던 김문수 전 의원도 "이명박 정부 들어 정보통신부가 해체되면서 위기 상황을 관리할 헤드쿼터가 없어졌다. 정통부를 부활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는 것에 정부는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2011년에도 3월 3일부터 사흘 동안 사이버공격('3.3 디도스 공격')이 있었는데, 정부가 공격을 파악하고도 제때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사태를 키웠다는 지적이 나왔다. 당시 국가 사이버위협 대응체계가 삼원화(국가정보원, 방송통신위원회, 행정안전부)되어 대응하도록 분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 민간보안업체들이 공격을 예상하고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정부에 종용했음에도 3개 조직의 입장이 하나로 모이지 않는 바람에 더 지체됐다고 한다. 심지어 민간 보안업체들이 보도자료를 배포하려는 것을 정부가 말린 사실도 뒤늦게 드러났다. 보안업계 한 관계자는 "국정원 조직의 특성상 보수적으로 대응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지난 정부에서는 한국정보보호진흥원(현 한국인터넷진흥원)과 국정원에 신고가 접수되면 정보통신부가 이 정보를 취합해 즉각 대응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신속했다"고 말했다.#

또한 이어서 2011년 4월 12일에는 '농협 전산망 마비 사태'가 있었다. 18일 만인 4월 30일에 정상화되었지만 공격으로 많은 데이터 파일이 삭제되었고 일부 거래내역은 복구에 실패하였다. 이 때는 디도스 공격이 아닌 북한 정찰총국이 만든 악성코드에 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2011년 현대캐피탈 해킹사태, 카드사 고객정보 유출사건, 농협 사태 등으로 그제서야 정부는 금융사에 대한 보안 요구사항을 의무화하는 법규를 추가하기로 조치하였다.[29]

이후 정부는 2011년 8월 국가정보원을 중심으로 국방부, 행정안전부, 방송통신위원회, 지식경제부 등을 포함한 15개 부처가 유기적으로 협력하겠다는 내용의 '국가 사이버안보 마스터플랜'을 발표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협력계획 없이 말로만 그쳤다는 평가와#, 정보기관으로서의 성격이 강할 뿐 사이버테러에 대응하는 협업체제를 갖춘 것이 아니라는 평가가 있었으며, 청와대에 사이버안보보좌관을 신설하겠다는 논의도 유야무야됐다. 이에 대해 임종인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장은 “컨트롤타워에 예산집행 권한도 부여해야 실제로 기능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 보안업계 대표는 "국가정보원이 안보이는 곳에서 상황 발생시 회의를 주재하는 정도로는 제대로된 콘트롤타워의 역할이 아니며, 국가 사이버위기 대책을 총괄, 조정하고 사이버전쟁이나 위협적인 공격이 발생할 시 전면에서 지휘해야 한다. 국가 사이버보안관련 예산과 보안정책, 인력·조직 운영 및 양성, R&D 투자 등을 총괄하고 부처별 역할과 소관업무를 부여하고 조정할 수 있는 권한과 임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며 마스터플랜에 그간 중요하게 지적됐던 보안인력 양성과 연구개발(R&D), 예산 투자 계획까지 실효성을 담보할 계획이 빠졌음을 지적했다.#


2.1.6.2. ICT 경쟁력 약화와 미래성장동력 대비 부족[편집]

한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는 휴대폰 및 정보통신(ICT) 산업의 국제경쟁력이 약화됐다는#, 아이폰으로 상징되는 스마트폰의 등장과 글로벌 ICT 생태계가 크게 변동하는데 대해 정보통신기술 업무 분산으로 정부 대응이 미흡했다는 지적#, 정부의 미래성장동력 대비 부족과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비판과 함께 정통부, 과기부 부활 여론이 대두되기도 했다.

배경을 보면 2007년 1세대 아이폰 등장, 2008년 7월 애플이 ‘3G 아이폰’을 출시하자 3일 만에 100만대가 팔릴 정도로 반응이 컸으며, 이어 2009년 11월 KT가 국내에 아이폰을 도입하자 국내 휴대폰 제조사들은 그동안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던 스마트폰이 세계적인 트렌드로 급부상하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삼성전자, LG전자, 팬택 등 국내 제조사들은 그때부터 발 빠르게 대응해 글로벌 스마트폰 제조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지만, 이미 모바일 시장의 주도권이 플랫폼 업체인 구글, 애플에 넘어간 뒤였다. 또한 선진국보다 2년 늦게 형성된 스마트폰 생태계는 관련 산업의 발전 역시 뒤처지게 만들었다는 지적이 있었다.#

안철수 당시 KAIST 석좌교수는 “한국은 대기업이 계속 대기업으로서 혜택을 누리고, 새로운 기업은 불이익을 받는 구조, 시장이 투명하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구조인 데다 산업지원 인프라도 허약하기 때문에 정통부 같은 조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IT 분야가 각 부처로 흡수되면서 우선순위가 뒤처졌다”며 “그러다보니 우리나라 전반적으로 IT쪽 경쟁력이 떨어지게 됐다”#, “IT융합이 정통부 폐지의 주요 논리였는데 정작 3년이 지난 지금 융합정책을 제대로 책임지고 집행한 곳이 어디냐”#, "2007년 아이폰 출시부터 지금까지 '잃어버린 3년'이다.", "플랫폼 구축 등 다양한 선제적 대응을 위해 컨트롤타워 복원이 필요하다. 정통부와 같은 부처의 형태가 될 수도 있고 위원회 형태도 있겠지만, 위원회에서 내린 결론이 해당 부처로 이관되면서 원래 내용과 다르게 해석돼 시행되는 것을 여러 번 봤다. 과거 조직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단점을 줄인 새로운 형태의 정통부 조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 인사인 최시중 당시 방송통신위원장도 “정통부 기능을 방통위, 지식경제부, 문화체육관광부, 행정안전부로 나누면서 분야마다 마찰이 생기고 있다”며 “IT의 경우 정말 일으키기 어려운데 그런 헌신의 노력이 우리 대에 와서 잘못된, 조금은 사려깊지 못한 부작용을 남긴 데 대해 아쉬움을 느낀다”고 말한바 있다.#

정통부 부활 논란에 대해 최경환 당시 지식경제부 장관은 "미국에 정통부가 있어서 애플이 생겨났느냐", "예전에 경제기획원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했었는데 정통부를 부활하자는 것은 이 경제기획원을 다시 만들자는 말과 다름없다"며 "지금은 정부의 규제를 어떻게 완화해 시장 기능을 촉진하느냐를 고민해야 할 때"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정작 애플사는 미국 정부의 중소기업 기술혁신 프로그램을 통해 정부 자금을 지원받았으며, 터치스크린 화면, 음성인식서비스 등 정부가 지원한 기술 덕분에 애플의 스마트폰 등이 발전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있다.# #

미래 성장동력 대비 부족과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2010년 1월 김효석 당시 민주당 의원은 "세계 휴대전화 시장은 삼성이 20% 이상을 장악했지만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점유율이 3%밖에 되지 않는다"면서 "애플사(社)는 태블릿PC(아이패드)까지 출시하고 있는데, 국내 업체는 실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IT경쟁력이 3위(2007년)에서 19위(2009년)로 떨어졌다", "IT, 바이오 산업 등 미래에 먹고 살 일들을 준비해야 한다"고 비판했으며, 같은당 우상호 당시 대변인은 "최고의 일자리 정책은 산업을 키우는 것이고 그래서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이 IT산업을 키운 것"이라며 "그러나 이 정권은 집권 2년이 지나도록 미래 성장동력에 대한 얘기는 없고 4대강에만 돈을 풀고 있다"고 비판했다.# # 손학규 의원 또한 같은 맥락으로 비판에 가세한바 있다.# 이어 정용길 충남대 교수는 “이명박 정부의 과학정책은 실패로 끝났다”며 “정부조직을 개편해 과학기술부를 설립해야 한다.”,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 수준은 경제규모를 고려하면 다른 나라에 비해 높지만, 문제는 미래의 먹거리로 전환할 수 있는 R&D 관리와 이의 사업화가 매우 중요하지만 이 부분이 미흡하다”고 말했다.# 또한 우리나라가 ICT 인프라나 하드웨어 제조에서는 경쟁력을 갖추고 있으나 규모가 크고 부가가치가 높은 콘텐츠나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존재감은 미약하므로 미래의 성장동력 확보를 위해서는 창조산업 중심으로 경제구조를 전환해야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분산된 ICT 거버넌스(행정)로는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웠다는 지적과 함께 주무기관인 방송통신위원회가 종합편성채널 선정 등 정치적 이슈에 휘말려 합의제 기관(위원회)이라는 한계 때문에 정치와 무관한 정책기능까지 차질을 빚어 방송, 미디어의 산업적인 발전이 가로막혔다는 지적도 있었다.# #


2.1.7. 대통령기록물 유출 ★[편집]


다급한 MB "압수물 대통령기록관에 넘겨야"…법위반 자인
청계재단 압수수색하자 쏟아진 대통령기록물…MB "착오"
다스 창고에서 '대통령 기록물'…검찰 "유출 수사 검토"
영포빌딩 '국정원 문건' 수백건…검찰, 직접조사 계획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가조작에 관련되었다고 의심되는 다스와 BBK 수사에 압력을 넣고, 그 과정에서 대통령기록물을 빼돌린 사실이 드러나 파장이 일고 있다.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을 위반한 것이다. 2018년 1월 25일 다스의 서울 사무실이 있는 영포빌딩에 대한 검찰 압수수색에서 청와대 문건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는데, 다스의 상황을 청와대에 일일이 보고하는 문건과 함께 대통령 기록물에 해당하는 문건들도 포함돼 있었다.

이 기록물들의 원본이 대통령기록관에 남아 있는지가 관건인데, 만일 대통령기록관에도 남아있지 않은 원본을 숨겨 보관해온 게 확인될 경우 이명박의 혐의 사실이 더 추가될 것으로 보인다.[30]# 이에 대해 이 전 대통령 측은 "(이 전 대통령 퇴임 당시) 청와대에서 이삿짐을 정리, 분류하는 과정에서 착오로 대통령 개인의 짐에 포함돼 이송됐다"며, 검찰이 영창 범위를 초과한 잘못된 압수물을 압수수색했기에 대통령기록물을 반납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나, 검찰이 이 전 대통령의 대통령기록물 관리법 위반 혐의를 추가 수사하려고 법원에서 압수수색 영장을 받은 상태라, 기록물법 위반 혐의를 피하기 위한 물타기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게다가 영포빌딩의 청와대 문건들이 국가위기관리센터와 국정원, 민정수석실 등에서 생산해 이 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거나 대통령실에서 접수한 문건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 큰 파문이 일어나고 있다.# 더 무서운 사실은 기밀로 가득한 이런 청와대 문건 내용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기에 어느 규모의 파장을 불러올지 알 수 없다는 것.

특히 발견된 문건들 중 국정원의 보고 문건이 정치공작에 관련된 것들을 포함해 최소한 수백건인것으로 확인이 됐다. # 이게 매우 심각한 사안인것이, 현재 국정원·국군 사이버사령부 댓글공작 수사가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이 전 대통령이 이러한 정치공작에 관여한 정황이 담긴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된 후의 보도에 따르면, 영포빌딩에 유출된 청와대 문건은 무려 3,395개에 달한다. # 이는 박근혜가 최순실과 공모해 유출한 청와대 문건 47개의 72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수치다.

이 전 대통령 재판에서 영포빌딩에서 발견된 법원행정처가 언급된 국정원 문건이 나오면서, MB정부 사법농단 의혹이 일고 있다. #

KBS가 단독 입수한 일부 문건 내용에 따르면, 경찰청 정보국이 정부 지원금으로 대통령 숙원 사업에 반대하는 시민사회를 압박해야 한다는 내용과 국가인권위원회 위원과 직원들을 정치 성향으로 분류하고 평가해 청와대에 보고한 정황이 담겨있다고 한다. ##2

1심 재판부는 공소장 일본주의를 위배했다면서 이 혐의에 대해서는 검찰의 공소를 기각했다.



2.2. 정적 탄압[편집]


'DJ·盧 뒷조사' 최종흡·김승연 구속…MB국정원 수사도 탄력

이명박 정부 시절 대북공작금으로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음해 정보를 수집한 최종흡 전 국정원 3차장과 김승연 전 대북공작국장이 구속되는 등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 인사들에 대한 표적수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수사는 사실에 근거한 정보 없이 해외에서 떠도는 풍문성 비위정보를 수집·생산하는 비밀 프로젝트를 가동하였고, 대북공작금 10억여 원을 사용했는데도 혐의를 찾지 못해 큰 문제가 되었다.

결국 단순히 소문만 가지고 수사를 하여 행정력, 세금 낭비를 했다는 것이며, 정적 탄압용이란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이 점에 대해서 MB 본인이 워낙 해먹은 게 많으니 '내가 그랬으니 저 사람들도 그럴 거야' 하는 오류에 빠졌다는 냉소적 평이 있다. 그러나 결국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들의 무고함만 밝혀준 셈. 게다가 후에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위해 뒷공작을 벌였다는 사실까지 드러났다. 이는 정권 비호를 위해 전직 대통령 두 명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함한 것이라 인간적으로도 못할 짓이다. 이 부분 때문에 민주당계 정당인 더불어민주당과 민주평화당 지지층은 당연히 이명박에게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으며 이명박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특히 민주평화당은 DJ 직계들이라 DJ를 건드렸기 때문에 분노한 것이다.

2.2.1. 국정원의 노벨평화상 취소 공작[편집]


이명박 정부 당시 국가정보원은 원세훈 국정원장 재임시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뒤 노벨평화상을 취소시키기 위해 보수단체를 앞세워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취소되어야 합니다'라는 내용의 영문 청원서를 보내는 등 노벨상 취소 공작 계획을 세우는 것은 물론 실행 과정도 국정원이 관여했으며, 그 과정에서 국정원 예산이 집행된 사실도 드러났다. 특히 노벨상 취소 공작 계획이 원세훈 원장에게 보고된 사실까지 확인되었다.# #

또한 '라프토 인권상' 취소 청원 공작도 계획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공개된 심리전단 보안등급 내부 보고서에 따르면 "노벨평화상을 취소시키려면 이에 앞서 받은 권위있는 인권상인 라프토상을 취소시키는 '단계적인 공작'이 필요하다"면서 "자유주의진보연합 간부를 통해 노르웨이의 라프토상 시상단체에 서한을 보내겠다"는 계획을 당시 원세훈 원장 등 수뇌부에 보고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해 MB 핵심 측근인 김효재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취소를 생각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국정원 직원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노벨평화상 취소에 대해 언급을 했을 수는 있겠지만 어떻게 정권 차원에서 그럴 수가 있나”며 정권 차원에서는 추진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2009년에 보수단체인 어버이연합 회원들이 서울현충원 앞에서 벌인 김대중 부관참시 퍼포먼스의 배후에 국가정보원이 있었다고 밝혀졌다. 특히 이때 원세훈 전 원장이 이끌던 국정원 심리전단 소속 요원 A씨가 어버이연합 간부에게 김대중 전 대통령 현충원 안장 반대 시위를 요청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국정원 A씨는 시위 요청 사실이 있었다고 진술했지만 추선희 어버이연합 사무총장은 국정원의 요청으로 퍼포먼스를 한것은 아니라며 혐의를 부인했다.#

이와 관련해 정치권에서는 부정적 평가가 많았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실로 밝혀진다면 전 세계 웃음거리가 될 내용"이라며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본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종찬 前국정원장은 "원세훈 원장이 정치에 개입한 것은 무엇이라고 해도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는 입장을 밝혔다. 박지원 국민의당 의원은 "천벌을 받아 마땅한 일"이라며 비난했고,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는 "노벨 평화상 수상은 국격을 높이는 국가적 영광이다. 국익을 손상한 이명박 정부를 개탄한다"고 말했으며, 우원식 원내대표는 "일종의 반역행위를 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등의 여러 발언이 나왔다.# # # # #

2.2.2. 데이비드슨 프로젝트[편집]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해외 비자금 의혹을 캐기 위해 가동한 비밀 프로젝트 '데이비드슨'의 진행 과정에서 미국 국세청 직원에게 거액의 뇌물을 건넨 정황이 검찰의 수사 결과 드러났다.

당시 이현동 전 국세청장은 국정원으로부터 공작금 명목으로 수천만 원을 받았으며, 이 전 청장이 국세청 직원들에게 공작금을 건네고 김 전 대통령의 해외 비자금을 찾으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특히 국세청 직원들이 관련 정보를 알아보려고 미 국세청 공무원에게 뇌물까지 먹였다는 진술도 확보했다.

한편 '데이비드슨 프로젝트'는 2년 넘게 지속됐지만, 김 전 대통령의 비자금과 관련된 어떤 증거도 찾지 못했다. #


2.2.3. 연어 프로젝트[편집]


일명 '연어 프로젝트'는 노 전 대통령의 해외 비리를 증언해 줄 관계자를 국내로 송환하겠다는 취지로 이름이 지어졌다. 2010년 '노 전 대통령이 미국의 한 카지노 전직 마케팅 디렉터에게 비자금 13억 원을 전달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시점으로, 국정원은 이 역시 뒷조사했지만 근거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



2.3. 사회와 문화[편집]


내용이 워낙 길어서 따로 분리가 되었다. 이명박/부정적 평가/사회와 문화를 참조하면 된다.


2.4. 안보·국방[편집]




2.4.1. 구제역으로 인한 피해[편집]


이명박 재임 4년차였던 2011년 1월 24일 당시에 경남 김해에서 구제역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방역당국에 따르면 구제역이 25일 오전까지 겨우 이틀 동안 소 14만 2901마리, 돼지 247만 6451마리 등 262만 5553마리의 우제류 (=발굽이 2개인 동물)가 매몰 처분됐다. 이는 과거 4차례의 구제역 피해 매몰 규모(2000년 2216마리, 2002년 16만155마리, 2010년 1월 5956마리, 2010년 4월 4만 9874마리)를 모두 합한 것보다 피해 규모가 12배나 큰 것이었고 구제역에 따른 매몰 보상금, 생계안정자금, 가축방역자금 등 재정 지출 피해액은 2조 원을 훌쩍 넘어섰다. 그리고 동원된 인력도 10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2.4.2. 학군사관 정원 폭증으로 인한 차후 인사적체 악화 야기[편집]


전세계에서 학군사관 제도를 운영하는 나라는 매우 적으며 그 중에서도 징병제를 하면서 학군사관 제도를 운영하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그 이유는 당연하다. 소위를 너무 많이 선발하면 나중에 그들이 영관급 장교에 도달하게 될 경우 엄청난 진급 경쟁과 이로 인한 심각한 인사적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군대에서는 이것 때문에 장교인사적체를 차단하기 위해 일부러 부사관상사소대장으로 임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알못인 이명박은 학군사관의 정원을 3,000명에서 4,000명으로 대폭 증가시켰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육군3사관학교학사장교의 정원까지 줄였다. 이명박의 무리한 학군사관 정원 증가는 지금 당장은 장교를 정예화시킨다는 효과를 볼 수도 있겠으나 이는 완벽한 임시땜빵으로 2008년에 임관하는 학군 46기가 소령이 되는 2018~2019년 이후부터 장교의 인사적체가 기하급수적으로 심각해질 것이다.


2.4.3. 북한의 군사도발 대처 미흡[편집]


이명박 정부 시절은 박왕자 사건, 연평도 포격 사건, 천안함 피격 등의 사건으로 급속히 남북관계가 경색된 시기였다. 그러나 금강산 폐쇄사태의 경우 북한의 우발적 도발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불가항력적인 면이 있으나 정작 2010년 11월 북한이 감행한 연평도 포격의 경우에는 국가정보원에서 사전에 도발 징후를 포착하고 있었음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에 무능한 대처라는 비난을 받아 마땅했다. 연평도 포격지시를 이미 8월에 감청해놓고 그랬다.

미국조지 W. 부시 행정부를 예로 들어 9.11 테러 당시에도 징후를 예견하였으나 대비하지 못했다는 지적하는 경우도 있으나, 오히려 9.11 테러, 중동 전쟁 등을 포함하여 부시 행정부의 전반적인 대처는 미국 안에서도 크게 비판받았기 때문에 반론이 되지 못한다. 조지 W. 부시네오콘 문서를 읽어보자.

특히 천안함과 연평도 모두 이명박이 대북공작금을 상납받을 일로 대북 정보력이 약화된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

실제로 감사원은 국군의 대응실태를 조사한 뒤 허위보고, 음주근무 등 초기 대응에서의 총체적 문제점이 드러나 합참의장 등 장성급 장교들을 포함해 총 25명에 대해 징계를 요청했으며 이 중 12명은 형사처벌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합참의장, 천안함 당시 '만취'…통제실 이탈까지 그러나 감사원의 감사 결과가 발표된 이후 3개월이 넘도록 4명을 입건하는 데만 그쳤으며, 또한 감사원 감사에서 처벌 대상이 아니었던 최원일 함장이 입건 명단에 포함되면서 형평성 문제도 불거졌다. 결국 11월에 발표된 최종 징계안에서 기소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천안함 책임자 처벌 흐지부지

이때문에 이회창 前대표가 연평도 포격 대응과 관련하여 “초기 대응은 아주 낙제점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천안함 폭침 사건이 일어난 뒤에 대통령과 정부는 강력응징을 다짐했습니다. 그래놓고 아무것도 안 한 거예요. 제가 사건이 터지고 나서 연평도에 직접 가서 보고는 기가 막혔습니다. 천안함 폭침 사건 때에는 반격을 못 했다고 하더라도, 다시 연평도 포격 도발 때에는 즉각 반격해서, 공격원점을 초토화하는 강력 대응을 했더라면 아마 초기에 상당한 사건의 진전이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비판하였을 정도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이 담화문에서 "이제는 북한 스스로 군사적 모험주의와 핵을 포기하는 것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 부분과 관련해 "정말 이명박 정권이 그런 식의 생각을 기조로 해서 대북정책을 해왔다면 그것이 결국 오늘날과 같은 사태를 오게 만든 것"이라고 지적하며 "북한은 스스로 변하는 게 아니고 변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게 분명한 대북정책의 기조가 돼야 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지 못한 점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고 언급한 부분에 대해서도 "천안함 사태 때에도 대통령이 그렇게 얘기했다"며 "하지만 한 번 당하고 46명의 귀중한 생명이 희생당했는데 그후에 전혀 변한 게 없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2016년에는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에 이어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해서도 "이명박 전 대통령도 연평도, 천안함 사태 때 대북정책이 다 실패한 것"이라며 "그런데 인정을 안 한다"고 비판했다.#

2.4.4. 기강해이[편집]


소위 '노크 귀순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방에 대한 경계태세도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제22사단에서 2009년 민간인 월북사건, 간첩선 은폐사건(JTBC 다큐로드 - 무너진 철책선 참고), 2012년 북한군 귀순 사건(노크 귀순) 등이 발생하여 정권의 안보 능력에 대한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2.4.5. 방산비리[편집]


이명박 정부의 방위산업 비리는 제6공화국 정부 중에서 단연 최악이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전 정부들과는 다르게 모든 무기사업을 청와대가 주관하도록 방위사업청에 지시, 대통령이 직접 회의를 주재하도록 방식을 바꾸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MB정부는 2009년 국방예산에서 전력증강과 직결되는 방위력 개선 부문의 예산을 대폭 삭감하면서도 방위사업창에 값싼 무기도입을 원했고 결국 각종 비리와 부실 사업이 판치는 원인을 제공하고 만다. 이는 대통령의 행정적 능력이 다소 부족했으며 국가행정을 기업운영과 같이 해선 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특히 성능은 엉터리에 가격은 20배인 통영함 음파탐지기 도입을 강행한 사실이 알려져 관련자들이 사법처리됐고 이후 해상작전헬기 도입 과정에서의 비리, 불량 방탄복 비리 등의 사건 등이 터졌다. MB정부 당시 벌어진 방산비리는 전, 현직 장교들과 사관학교 선후배, 동기들 간의 유착, 수뇌부의 묵인 혹은 동조란 특이점이 있다.



2.5. 외교[편집]




2.5.1. 자원외교[편집]



"광물자원공사가 창립 51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정부는 올해 말까지 광해관리공단과 통폐합하기로 오늘 결정했습니다. 10년 전, 부채비율 100%를 밑도는 건실한 공기업이었지만, 부채비율 6,900%에 이르더니 지금은 완전한 자본잠식 상태입니다. 그 이유, 역시 자원외교였습니다. 광물공사는 5조 2천억을 쏟아붓고 5천억만 회수했습니다." - KBS


MB정부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총 69개 사업에 약 26조 984억 원을 투입했으나 정작 회수율은 14.06%, 즉 3조 6698억 원에 불과하고 2018년 초까지 발생한 영구적으로 회수가 불능한 손실액은 13조 9000억 원이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정권실세들과 기업인과의 유착 등 온갖 비리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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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박근혜 정부에서 시민단체와 야당, 언론의 문제제기로 공론화된 끝에 감사원은 2015년 1월 2일 자원외교 과정에서 총체적 부실이 있었다면서 "부실한 회사를 고가로 매수하고 공사에 해를 끼친 강영원 전 한국석유공사 사장을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업무상 배임) 혐의로 고발하고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에게 손실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도록 통보했다"고 밝혔다. 성완종 전 경남회장 역시 MB 정부의 자원외교와 관련해 수사를 받자 자살을 선택했다. 상세 내용은 이명박 정부/자원외교 문서를 보자.


2.5.2. UAE 원전수주 이면합의[편집]


이명박 정부가 감춰둔 희대의 폭탄으로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김태영 전 장관의 군사 지원 이면합의 체결을 인정하면서 이면합의 수습설이 사실로 드러났다. 이 사건 하나만으로 이명박 정부 수뇌부 상당수가 구속될 초대형 사건으로 국민과 국회를 속인 만약 이명박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이였다면 탄핵까지도 가능한 희대의 사건이라고까지 평가받는다.

이 비밀협약 의혹을 언급한 정의당 김종대 의원은 당시 정부가 여러 중동국가와 맺은 비밀협약이 더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했는데, 만일 이마저 사실로 드러나면 어마어마한 파장이 일게 될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2.6. 경제[편집]




"경제, 반드시 살리겠습니다!" - 이명박, 제17대 대선 당시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 - 제17대 대선 당시 유행어


"아마 내년되면 3000을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실물경제를 한 사람이기 때문에 허망한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더 나아가 임기 5년 중에 제대로 되면 5000까지 올라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주가가 진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은 정권교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권 교체를 하면 주가가 전반적으로 상향조정 될 것입니다." 2007년 12월 14일 여의도 대우증권 본사에서


이명박은 위장 취업, 위장 전입, 선거법 위반, 횡령, 탈세 등 기업인 시절에 온갖 불법을 일삼아 한때 피선거권도 박탈당했다.[31] 하지만 선거 과정에서 그 유명 주가 3000 주장과[32] "주식 사서 부자 되세요", "반값 등록금을 실천하겠다"라는 실현가능성이 없는 말까지 해가면서 경제를 '반드시 경제만큼은 살리겠다'는 슬로건으로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정작 그토록 공언한 친서민 정책, 복지, 경제 성장(747 공약) 약속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2#3#4

2.6.1. 외환보유고 낭비와 환율 정책 실패[편집]


이명박 정부는 기업 위주의 경제성장을 지속한다면서 원달러 환율을 인위적으로 떠받치는 정책을 썼다. 그렇게 해서 노무현 대통령 임기말에 920원대까지 떨어졌던 원달러 환율을 1100원대 이상으로 유지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 결과 2009년 이후 삼성전자와 같은 수출대기업들은 막대한 추가 이익을 올리는 등 환율효과의 혜택을 입었으며, 2010년의 무역수지는 417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이는 2년 연속 400억 달러 이상의 흑자를 기록한 것으로 사상최대치였다. 기업의 실적도 증가해 상장기업 157사의 순이익이 2분기 19조원, 3분기 22조원으로 분기 사상 최대치를 달성하였고, 경제성장률이 그해 6%를 기록하는 등 겉보기에는 실적을 거두었다. 2012년 3분기 기준 삼성전자 영업이익(8조 1247억 원)에 미친 환율효과는 가정에 따라 2.37조 원에서 3.62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2

하지만 최단기간에 경제를 회복했으나 환율과 외환보유고는 쑥대밭이 되었다. 2007년 2,622억 달러였던 외환보유고는 2008년 2,012억 달러까지 떨어졌지만 2009년 2,700억달러로 원상복구된 후 2013년 3,465억 달러까지 상승했다.# 외환보유고를 털어 환율을 방어한 것은 단기적 처방이었다는 의미로 수출편중과 같은 한국사회의 고질적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전혀 도움되지 않았으며 이 과정에서 정경유착이 심화되었다. 대기업의 수익이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철 지난 낙수효과에 의거한 정책이었단 비판은 둘째치고, 국민들의 달러 환산 소득, 즉 대외구매력 관점의 소득은 크게 떨어졌다는 문제도 있다. 참여정부 말기인 2007년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1632달러였던 것을 감안하면 2011년에야 겨우 2만 2489달러로 올라왔다. MB정부의 고환율 정책은 큰 비판을 받았다.#1#2#3[33]

게다가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정부의 고환율 정책으로 이득을 본 기업은 16개에 불과하다. # 이는 이명박 정부가 일부 대기업에만 특혜를 몰아준 것이란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보고서에서 정부의 환율정책으로 많은 중소기업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분석하였다. #2

환율효과로 수입물가가 치솟아 서민경제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도 있다. 결국 이명박 대통령도 이 사실을 깨달았는지 기획재정부 초대 장관이었던 강만수 대신 윤증원 장관을 임명하여 환율이 더 떨어지더라도 정부 개입을 하지 않을 것을 천명하며 뒤늦게라도 안정시켰으나, 이번에는 무역 수지가 급격히 악화되어 2011년 8월의 무역수지 흑자는 8억 달러선으로 전 달에 비해 55억 달러, 비율로는 87%가 감소하고 산업생산 역시 전년 동기에 비해서는 3.8% 증가했지만 전월에 비해서는 0.4% 감소해서 감소세로 돌아서는 일이 일어났다.

2.6.1.1. 키코 사태[편집]

이 같은 정부의 정책 실패가 폭발한 것이 바로 KIKO 사태다. 이 사건은 이명박 정부 고환율 정책의 최대 흑역사 중 하나이다.



2.6.2. 막대한 정부부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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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이후의 경제위기가 기업이나 가계보다 국가와 공공부문 부채가 문제가 되어 발생했다는 교훈에 비추어보면 엄청나게 국가부채를 늘린 점에서 혹평받고 있다. 공공기관 부채 규모는 2007년 말 241조 8000억 원에서 2009년 310조 6000억 원으로 최근 5년 간 58.4%나 급증했으며, 2012년 말 493조 원으로 확대돼 연평균 50조 원이 넘게 증가했다. 전임 노무현 대통령과(연평균 13조 6500억 원)와 후임 박근혜 대통령(연평균 13조 7500억 원) 시절보다 3배 이상 높은 수준이다. 이는 4대강 정비 사업, 자원외교 등 대규모 국책사업을 계획성 없이 무리하게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국가부채의 경우, 2009년 1637조 4000억 원으로 2007년 말과 비교해 291조 9000억 원(21.7%)이 늘었다.# 물론 참여정부에 비해서 낮은 수치였으나, 공공기관의 부채비율이 가장 높았기에 한국 사회의 공공서비스에 적신호가 켜졌다.#

2011년에는 최초로 대한민국 정부의 채무가 400조를 돌파하였다. 이는 2년새 100조가 증가한 것으로 재정부 관계자는 "OECD 국가들에 비하면 안정적인 수준"이라고 말하였으나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는 점, 증가 속도가 매우 가파랐다는 점 때문에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1#2 이명박 정부는 당초 집권 당시 국가채무 300조 원 유지를 목표로 내걸었기 때문에 큰 비판을 받았다.# 그 밖에 급증하는 국가 채무로 인해 정부의 매년 이자로 지출되는 비용이 2006년 11조 4000억 원에서 2010년 22조 9000억 원으로 2배가 늘었다.

특히 2007년 571조 2000억 원이던 국가부채가 이명박 정부를 거치면서 481조 8000억 원이나 불어나며 2013년 말 국가부채는 1053조 원을 기록했다. #1#2

한국은행 금융통계에 따르면 일반 정부의 대외부채는 2007년 367억 달러에서 2012년 608억 달러로 241억 달러 증가하였다. 같은 기간에 공기업의 대외 부채는 77억 달러에서 256억 달러로 179억 달러로 증가하였으며, 정부와 공기업의 채무는 총 420억 달러가 증가하였다. 순대외채권의 경우 일반 정부는 2007년 160억 달러 순채무였었고, 2012년은 410억 달러 순채무로, 250억 달러 채무가 늘어났다.

2.6.2.1. 공기업 부실화 초래[편집]


같은 기간에 공기업의 순대외채권은 2007년 77억 달러 순채무에서 2012년 256억 달러, 순채무로 179억 달러 채무가 늘어났다. 일반 정부와 공기업의 채무는 총 429억달러 증가하였다. ##2

게다가 정부에서 추진한 4대강 사업 때문에 아예 한국수자원공사는 파산 직전의 위기에 몰렸다. 당시 수자원공사는 2007년 말에 부채비율이 16%밖에 안 되는 우량 공기업이었으나 이명박 정부 들어 부채비율이 급속히 악화되어 2011년 말이 되면 116%로 치솟았다. 이는 수자원공사가 이명박 대통령 공약인 4대강 사업을 정부 대신 떠맡았기 때문이었다. 정부가 막대한 돈이 필요한 4대강 사업을 재정으로 충당할 경우 국가채무가 불어날 것을 우려해 수자원공사에 맡겨 일어난 일이다. #

설상가상으로 자원외교를 담당한 석유자원공사나 광물공사 등의 주요 공기업들 역시 사업 실패로 파산 위기에 몰렸다. ##2#3 특히 부채 1위 LH공사는 2013년에 총부채 138조를 기록했다. #4#5 다만 LH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LH는 언제든지 부채 털어낼 수 있는 공기업이다. 주거복지 때문에 이런 막대한 빚을 지고 있을 뿐.

2011년 기준 한국의 국가부채는 GDP 대비 채무 35%이나 공공기관 빚을 포함하면 70%에 육박하였다. 공무원연금공단이나 예금보험공사 같은 준정부기관의 빛은 2008년만 해도 80조 원대에 머물러 있었지만 2010년에 100조 원대로 불어나고, 2011년에는 124조9000억 원으로 전년에 비해 24.0% 급증했다. 같은 해 정부의 감사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석탄공사, 여수광양항만공사, 한국전력공사, LH, 한국가스공사, 한국지역난방공사 등 여섯 곳이 재무지표상 한계에 다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

공기업 부채 역시 지속적으로 늘어나 공공기관 부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커졌으며, 2011년 총 부채는 329조 5000억 원으로 전체 공공기관 부채의 71%를 차지하였다. 2007년 이후 연평균 증가율도 20.4%로 전체 증가율을 크게 앞섰다. #3




2.6.3. 막대한 가계부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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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부채뿐만 아니라 가계부채의 상승률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자영업자들의 대출이 600조에 육박하고, 2004년에는 66% 정도의 비율을 유지한 GDP대비 가계부채율이 2009년에는 86%까지 치솟았으며, 저금리 기조가 계속되는데도 불구하고, 금융당국은 적절한 대책을 강구하기는커녕, DTI(Debt to Income, 소득 대 부채 비율) 규제를 완화하여 노인과 청년층의 대출가능금액을 대폭 상향시켜 주는 등 경제감각을 상실한 듯한 행보를 보였다.

참여정부 5년 동안 늘어난 가계부채는 213.9조 원이나, 그런데 MB 정부 시절 늘어난 가계부채는 272조 원이 넘는다. 상대적으로 부동산 침체기인데도 더 짧은 시기에 더 많은 가계부채를 늘린 것으로, 부동산 거품을 빼고 가계부채 감소를 유도해야 할 시기에 오히려 무리한 부동산 부양책을 쓰며 거품을 키웠다는 지적이다. 또한 이를 두고 하우스푸어를 잔뜩 양산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MB 정부 가계부채의 또 다른 특징은 카드사, 증권사, 보험사, 대부업체 등 고금리 악성 대출을 크게 늘렸다는 것에 있다. 참여정부 때는 상대적으로 제1금융권 위주의 저금리 대출 위주로 가계부채가 늘어났으나, 이명박 정부는 지역적으로도 수도권에 국한돼 있던 부채문제를 지방까지 확산시켰다는 비판도 있다.#


2.6.4. 물가 불안정[편집]


통계청 지표-물가 상승률

이명박 정부는 5년 동안 세계경제위기로 인한 서민생활 불안정 개선과 지속적 경제성장을 위한 기반마련을 위하여 서민 물가안정을 중점적으로 추진해왔다. 서민생활과 밀접한 품목에 대하여 주기적으로 가격과 수급동향을 점검하고, 유통구조 개선, 불공정거래 단속 등을 통한 가격안정 노력을 해왔다. 특히 2008년에는 유가 등 국제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서민생활 부담 완화를 위하여 유류세인하, 유가환급금 지급 등을 시행하였으며, 서민생활과 밀접한 공공요금, 대학등록금 등은 동결 또는 인상 최소화를 유도하였다. 그러나 별 효과가 없었으며, 유가급등으로 물가가 4.6%으로 크게 치솟았다. 다행히도 2009년~2010년대는 물가가 2% 후반대로 안정되었다.

그러나 2010년 9월 이후 이상기후, 구제역, 국제유가 상승 등으로 물가가 다시 상승하였다. 특히 2010년 9월에는 소득에서 먹거리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을 나타내는 지수인 엥겔 계수가 9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러한 엥겔지수 상승은 소득대비 먹을거리 지출 비용이 높은 서민이나 빈곤층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게다가 2010년의 살인적인 물가상승은 이상 기온과 태풍 등 각종 악재가 겹쳐 일어난 일지만, 이명박 정부는 대처가 부적절했다는 비판에 직면하였다. 물론 물가상승에 대처하기 위해 정부는 물가 집중 관리 품목을 지정하여 물가관리에 나섰으나, 오히려 관리 품목들의 물가가 더 많이 오르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특히 아래 서술된 대통령의 "배추가 비싸니 내 식탁에는 배추김치 대신 양배추김치를 올리라"는 멍청한 발언으로 국민의 원성을 샀다. 참고로 당시 한국은 양배추가 배추보다 더 비쌌다. 그래서 원성을 들은 것.

사실 MB정부 시절 물가 상승의 원인으로는 한국은행 총재로 김중수가 취임한 이후로 한국은행이 경기 부양을 위한 저금리 정책을 펼친 것이 핵심 이유로 꼽힌다.#1#2 이 저금리 정책은 가계부채 폭탄이 현실화되는 데도 일조하였다.# 게다가 김중수는 청와대 경제수석 출신으로 청와대에 보고가 잦아 한국은행의 독립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한국은행 노조가 결의대회를 갖는 등 반발이 일었다.# IMF는 한국의 경제상황을 우려하며 국내 금리는 4%가 적절하다는 권고안을 내놓았으나, 한국은행은 여전히 2.75%로 저금리 경기부양정책을 고수했다. 이러한 저금리 정책은 원화가치의 절하를 가져와 수출을 촉진시키고, 경기활성화를 유도하지만, 수입축소로 인한 물가 상승 및 가계부채 증가 같은 부작용으로 인해 민생에 타격을 입힐 수도 있는 이면이 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는 2011년 상반기부터 경제정책의 최우선순위를 물가안정에 두고 서민생활 안정을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2011년 1월부터 7월까지 7개월 연속으로 4%대의 고공행진을 기록하였으며, 이는 2008년 금융위기 기간의 상승률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높은 기록이었다. 물가안정 속에 경기회복 흐름이 지속될 수 있도록 경기상황을 감안하여 거시정책을 유연하게 운영하고, 공급 측면의 물가불안 요인에 대하여는 공공요금 안정과 농산물 수급안정, 할당관세 인하, 불공정거래 단속 등 미시적 대책과 함께 장기적·구조적요인에 대하여 유통구조 개선, 시장경쟁 촉진 등 구조적 개선대책을 병행 추진하였다고 발표했다. 특히 물가안정을 위하여 2011년에만 총 43번의 장·차관 회의를 개최하고, 166건의 안건 논의를 거쳤지만 효과는 없었고 유명무실했다. 결국 유가상승 등 공급 충격, 하방경직적 가격구조 등으로 인하여 높은 수준의 물가 상승률이 지속되었다.

2011년 8월의 전년 동월비 월별 물가상승률은 5.3%를 기록하였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유승민 의원은 "5% 물가가 서민들에게 주는 직접적인 고통과 실질소득의 감소 이런 것은 정말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면서 이명박 정부 들어와 2009년부터 금리정책이 실패한 게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지적하였다.# 실제로 청와대 경제수석 출신인 김중수 한국은행총재가 취임한 이후 정책의 독립성과 금리정책의 적절성에 관한 논란이 계속되어 온 만큼 타당하다는 지적이다.

2012년에는 국제원자재 가격 급등세 완화, 정부의 정책적 노력 등으로 2%대로 다시 낮아졌으나, 결과적으로 참여정부 평균 물가 상승률인 2.9%와 비교하면 3.6%의 물가상승률을 기록하면서 물가를 성공적으로 안정시켰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또한, 앞서 언급한 비정상적인 환율정책으로 인위적으로 수입물가를 올려 민생고를 가중시킨 점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2.6.5. 노동탄압과 친재벌 정책[편집]


노동자 탄압 역시 이명박 정부가 가장 많이 비판받는 면이다. 이명박 정부는 참여정부에 이어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를 더욱 밀어붙이면서 노동계와 좌파의 큰 비난을 받았다.

무엇보다 이명박 정부는 노사 갈등에서 일방적으로 경영자 편만 들어선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대표적인 예가 쌍용자동차 논란 중 벌어진 쌍용자동차 노조원 평택공장 점거 농성 사건 진압이나 한진중공업 사태가 꼽힌다. 친재벌 정책으로 죄를 지은 재벌 출신 인물을 맹목적으로 사면(2008년 광복절 특사 당시 74명의 기업인이 사면)하기도 하면서 크게 논란을 일으켰다.

게다가, 유성기업 사건에서 이명박 정부의 김황식 총리는 사실무근인 "1인당 연봉 7천만 원 받는 노동자"란 어이없는 발언을 해 친재벌 성향을 드러냈다. 연봉 7000만 원은 30년 이상 장기 근속자 등 일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농담이 아니고 진짜다. 그래서 민주노총은 논평에서 "땀 흘려 일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유성기업 노동자들을 졸지에 파렴치범으로 만든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어느 누구도 유성기업 노동자들에게 사과를 했다거나, 방송을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라고 비난하였다.# 지금도 노조파업을 비난하는 이들 중 대부분이 정말 연봉 7천만 원 받는 노동자가 진짜인 줄 알고, 귀족노조라고 비하하는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는 근거없는 궤변이며 국내 기업 중 연봉 7천만 원, 또는 그 이상을 받는 노동자는 30년 이상 장기 근속자들뿐이다.

경영악화를 이유로 대규모 정리해고를 실시해 일어난 한진중공업 사태 당시 경찰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외치며 영도조선소를 찾은 7000여 명의 희망버스 참가자들의 행진을 저지했고 이에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 노회찬진보신당 대표 등 야당의 주요 정치인도 피해를 입었으며, 이 과정에서 심상정 진보신당 상임고문, 이광석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등 총 50여 명이 연행됐다.

광복절 특사 이전 이명박 대통령은 더 이상의 특별 사면은 없을 것이라 말하였으나, 2년 뒤인 2010년 12월 29일 삼성 이건희 회장에 대해서 역사상 유례 없는 단독 사면을 단행하였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이건희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삼성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사면했다고 해명하였지만, 정작 이건희는 삼성 비자금 사건으로 인한 특검 당시 배임, 탈세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기 때문에 IOC 위원 자격을 박탈당한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 재벌 1위 이건희에 대한 특혜란 비난이 제기됐다. ##2 그리고 이 사건은 삼성 다스 소송비 대납사건으로 그 실체가 들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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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참여정부의 실패한 비정규직 정책을 고치기는커녕 그대로 이어받아 비정규직 비율이 크게 증가했다. 고쳐서 비정규직 비율을 감소세로 돌렸다.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778590.html http://www.index.go.kr/potal/main/EachDtlPageDetail.do?idx_cd=2477 특히 공공기관의 경우 비정규직이 50%나 증가했다. 결국 노동자에게 불리하고 기업인에게 유리한 정책을 펴 그 이후의 정권들에서 실업난을 야기시킨 주범이 되었으며 이명박으로 인해 취업시장은 비정규직과 계약직이 난립하게 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공기업 선진화 정책 역시 노조 무력화 시도와 더불어 일방적인 임금 삭감, 정원 축소 강요란 비판에 직면하였다. #

2.6.5.1. 노조 파괴 공작[편집]



"제3노총 배후는 원세훈 국정원"…집요한 노조파괴 공작

"경징계가 갑자기 중징계로 바뀌어서 '왜 그랬나 했더니 더이상 버틸 수가 없다' 이렇게 담당 직원이 얘기했습니다." - 양성운 전 국공무원노조 위원장


"(정당한 노조 활동을) 친북, 종북, 좌빨들의 행위로 왜곡시킴으로써 실제로 노동자들을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 진선미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이 전방위적인 노조 와해 공작을 한 것으로 국정원 내부 감찰결과 드러났다. 제3노총을 조직해 민주노총을 와해시키려는 과정에 국정원이 뒤에서 수억 원의 자금을 댔다. KT 노조의 민주노총 탈퇴, 공무원노조위원장의 해고, 그때마다 뒤에 국정원이 있었던 걸로 파악됐다. 감찰보고서에는 또 국정원이 전교조를 상대로 반대시위를 벌이는 단체에 수천만 원을 지원하고 가짜 게시글로 공격까지 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2011년에는 노조조직률이 10% 아래로 떨어지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2.6.5.2. 부자 감세[편집]

이명박 정부의 경제 활성화를 위한 감세정책은 ‘감세 포퓰리즘’ 및 ‘부자감세’란 지적을 받았다.##2 논란이 된 감세 정책의 일환으로서 종합부동산세 정책이 있다.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 때 시행된 종부세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하였는데, 종부세 폐지로 인한 세수 감소가 2조 2000억 원에 달해 재정악화 및 복지 축소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를 받았다. 특히, 감세 혜택이 대부분 부자들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부동산 불패 신화(집장사) 등 한국의 좋지 않은 투자 관행을 더욱 공고히 할 것이란 전망이 나왔으며# 100만 명이 종부세 폐지 반대에 서명하기도 했다.#[34]

반대여론이 어찌나 거셌던지, 한나라당의 텃밭인 대구광역시에서도 5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반대서명에 참여하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2008년 주거목적 1주택 장기보유자 부과 규정이 위헌이라는 헌재의 판결이 나오면서 종부세는 사실상 무력화됐고, 그 결과 2011년에는 강남의 20억짜리 주택의 종부세가 참여정부 시절 1200만 원에서 73만 원으로 급감한 사실이 드러났다.# 2010년 국세청의 국세감면 자료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의 국세 감면 비율이 참여정부 때보다 2.2%P 증가했으며 그 혜택이 대기업과 상위 10%에 해당하는 고소득층에 집중된 것으로 드러났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에 대해 “감세와 재정지출 확대를 병행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라고 해명하였으나#, 정부 주관 토론회에서 국내 경제학자들이 입을 모아 감세 정책을 중단하라고 촉구하는 등# 감세가 경제 활성화에 도움을 준다는 그 어떠한 학술적 근거도 없다는 것이 경제학계의 중론이다. 게다가 주요 선진국들의 세금 비율도 40~50% 이상으로 20% 수준인 대한민국보다 월등히 높다.# 대한민국에서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저자로도 유명한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도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면 투자, 경제성장이 잘 된다고 하는데 실제 성공한 예가 없다"고 지적했다.#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 역시 부자 감세를 철회해야 한다고 밝혔다.# 친이계로 분류되던 정두언 역시 이에 동조하였다.# 한편 전경련은 부자감세 철회와 중소기업 동반성장 정책에 대해 격렬히 반대하였고# 이 대통령은 여당에서도 나오는 감세 철회 요구를 거부하였으나 2011년 감세 정책을 끝내기로 합의하였다.#



2.6.6. 보편적 복지 축소[편집]


"예산안 졸속 처리 과정에서 우리 아이들을 위해 꼭 필요한 예산도 날아갔습니다." - 신경민 MBC 뉴스데스크 앵커


부자감세, 복지축소로 인해 중산층이 지속적으로 감소를 하였다.# 관련 보고서에 의하면 복지축소에 불구하고 GDP대비 국가채무 비중은 32%로 증가(전임 정부 27%)하였으며 중산층은 67.1%로 전임 정부(69.3%)로 감소하였다. 더군다나 선별적 복지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같은 자료에서도 빈곤층이 11.7%에서 12.6%로 되려 늘어났다. 보편적 복지축소로 인한 피해는 중산층-빈곤층으로 이전이 되었다.

물론 이명박 정부 시절에도 복지 예산은 꾸준히 증가하였다. 하지만 보편적 부문에만 한정된 자연증가분이었으며, 이명박 본인이 공약한 '친서민 복지 정책', '노약자·장애인·청년 맞춤형 복지'와는 한참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 논란은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도 재조명되었다. ##2#3

또한 복지 정책을 보편적에서 선별적으로 방향을 바꿨으며 부자 감세 정책과 양극화 저지 실패와 함께 보면 보편적 복지를 축소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 특히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10월에는 장애아 무상보육 지원금, 보육시설 확충비용, 장애인 차량 지원비, 기초수급생활자 의료비지원, 실직가정 생활안정자금대부사업, 결식아동급식 한시적 지원금이 수억 원에서 수백억 원까지 일부 삭감 혹은 전액 삭감되었기 때문이다. # 참여연대는 정부의 저소득층 무상장학금 폐지 및 생활비 지원대상을 수능 등급에 따라 제한한 것을 두고 비판하였다.# 이는 이명박의 공약과도 반대되는 조치라 큰 비난을 받았다.

게다가 2010년 12월 처리된 새해 예산안에선 여당의 날치기 과정에서 영유아 예방접종 예산이 전액 삭감되었으며, 방학 중 결식아동 예산과, 장애인 연금 인상분도 전액 또는 일부 삭감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결식아동 급식지원은 지방정부의 사업이므로 지원 불가능하나 경제위기 여파와 열악한 지자체 재정자립도 등을 감안, 2009~2010 회계연도에 예산을 긴급 편성해 지원해왔다. 그러나 2011년 예산에서 이 부분 예산이 전액 삭감됨에 따라 무산되었다. 대신 정부는 “관련 예산을 국고에서 보조할 수 있도록 법령을 정비하고 예산을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야당 의원들 의견을 받아들였으나 문제는 관련법 정비 일정 등을 감안하면 빨라야 2012년에나 지원이 가능해서 규탄의 대상이 되었다. 이로 인해 교육청에서 지원하는 결식아동 69만 명 중 지자체가 지원하는 급식지원자는 27만 명으로 40만 명 가량이 굶게 되었다.#1#2

민주노동당 곽정숙 의원이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결국, 아이들의 필수예방접종 예산까지 빼앗아 4대강 보 건설에 쏟아 붓고 있다"고 비난한 것에 대해서 이명박 정부는 복지예산이 증가했다고 반박하였다. # 하지만 민주당은 정부가 주장한 복지 예산이 오히려 잘못되었다고 반박하였다. 특히 보건복지위 소속 민주당 의원들은 "복지 예산 증가액 5조248억 원 중 노인장기요양보험, 기초노령연금,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 대상자 확대에 따른 자연증가분 2조2000여억 원과 기초생활급여 2195억여 원 등 법정 의무지출에 따른 증가분 6848억 원은 제외돼야 한다"며 "주택관련지출 1조3000여억 원 중에서도 취약계층 임대주택 지원금은 미미하고 강남이나 신도시에 조성, 분양하는 보금자리주택 등의 예산이어서 복지예산으로 분류할 수 없다", "복지예산의 실제 증가분은 8049억 원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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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에 대한 복지예산을 축소하는 행태를 보이는 와중에도 이명박은 정부의 복지 예산은 날로 늘어나고 있다면서 '친서민 복지'에 초점을 맞췄다는 해괴한 변명을 하기도 했다. #

이명박 정부의 복지 예산이 늘어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 민주당 전현희 대변인은 “2006년부터 2008년까지 10%대였던 복지예산 증가율이 이명박 정부 들어 8%대로 떨어졌고, 내년도 예산의 경우 6%대로 급감했는데도 정부는 사상 최대 복지예산이라고 자화자찬하고 있다”며 “4대강 사업으로 줄어든 복지예산을 숨기기 위해 국민 앞에 ‘눈 가리고 아웅’하는 꼴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2

더욱이 복지예산 대부분이 기초노령연금 수급자 증가 등 자연증가분이어서 매년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도 마치 이명박 정부가 복지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는 것처럼 진실을 왜곡했다는 비판도 줄을 이었다. #2#3#4

참고로 이명박에 대한 평가가 날이 갈수록 부정적으로 바뀌는 이유는 이명박이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이였다는 것이다. 기업인 시절만 해도[35], 성공신화의 인물로 꼽히던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이명박이였다. 현대건설 신입사원으로 입사해서 사장까지 올라갔으니까. 그런데 그랬던 인물이, 본인의 어린 시절처럼 가난했던 사람들을 지원해주는 온갖 복지예산을 다 깎거나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2.6.7. 정경유착[편집]


2010년 12월 29일, 이건희 삼성 회장을 대상으로 유래없던 원포인트 사면을 단행했다. 당연히 당시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던 사면이었지만, 그 배경이 불분명하였다.

하지만 2018년, 다스 관련 혐의로 수사하던 검찰이 미국에서 진행된 140억 반환 소송 비용을 삼성이 대신 내줬다는 것을 포착하였다. 다스 실소유주가 이명박이라는 전제하에, 이 돈은 당연히 이명박에게 흘러간 돈이 된다. 그리고 이학수삼성그룹 부회장을 소환하였고, 이건희 사면을 댓가로 소송비용 40억을 지원했다는 진술을 받는다.# 삼성 다스 소송비 대납사건 항목 참조.

2020년 10월 대법원 2부(주심 : 박상옥)에서 상고 기각 판결을 내려 최종적으로 사실임을 사법부가 인정하였다.




3. 이명박 개인에 관한 평가 및 논란[편집]




3.1. 각종 막말[편집]




3.1.1. 금속 노조 대학교수 비하 발언[편집]


이명박 대통령은 재임 이전부터 많은 문제 발언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대학교수란 사람들이 노조를 만들겠다니, 교육이 제대로 되겠냐"라는 발언과 "아니, 음악하는 사람들이 민주노총에 가 있는데, 그것도 전에는 금속노조에 가 있었다. 아마 바이올린 줄이 금속이라서 그랬나 보다"라는 대학교수와 오케스트라 연주자, 노조를 비하하는 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관련기사


3.1.2. 서울 봉헌 발언[편집]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 재임 시절의 기도회에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거룩한 도시이며 서울의 시민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서울의 교회와 기독인들은 수도 서울을 지키는 영적 파수꾼임을 선포한다", "서울의 회복과 부흥을 꿈꾸고 기도하는 서울 기독 청년들의 마음과 정성을 담아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 라고 말해 공직자로서 공사구분을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다.[36]


3.1.3. 여성 비하 발언[편집]


이 대통령의 막말 중 대표적인 예시로는 대선후보 시절 '관기(官妓)' 발언일 것이다. 관기는 조선시대에 관청에 종사하는 여자노비 중 기생을 뜻하는 단어이다.

문제의 관기 발언은 2007년 8월 3일 한나라당 청주 합동연설회때 청주실내체육관 귀빈실에서 한나라당 소속인 정우택 충북지사가 이명박 후보를 만난 자리에서 전날 청주의 한 호텔에 묵었던 이 후보에게 “긴긴 밤 잘 보내셨습니까? 예전 관찰사였다면 관기라도 하나 넣어드렸을 텐데”라고 말을 건네고, 이에 이 후보가 웃으며 "어제 온 게 정 지사가 보낸 게 아니었냐”고 화답한 것을 가리킨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주류 여성단체들은 일제히 이명박 후보에 대한 질타에 나섰다.

7월 28일에는 중앙일간지 편집국장들과 술자리에서 인생의 지혜라면서 "현지에서 오래 근무한 선배는 마사지걸들이 있는 곳을 갈 경우 가장 얼굴이 덜 예쁜 여자를 고르더라. 예쁜 여자는 이미 많은 손님들을 받았겠지만 예쁘지 않은 여자들은 자신을 선택해준 게 고마워 성심성의껏 서비스를 하게 된다"는 말을 하여(소위 '마사지걸 발언) 비난을 받았다. 이에 대한 해명으로 한나라당 대변인실이 17일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기회가 주어져서 모두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취지였을 뿐, 일부 매체에서 암시하는 특정 직종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내놓자(...) 조롱거리가 되었다.


3.1.4. 장애아 낙태 발언[편집]


서울시장 시절 이 대통령은 2007년 5월 12일 <조선일보> 전면(B섹션 3면)에 실린 ‘최보식의 직격인터뷰’에서 "아이가 세상에 불구로 태어난다든지, 이런 불가피한 낙태는 용납이 될 수밖에 없는 거 같다"는 발언으로, 장애인 단체의 반발을 불러 왔고 장애인들의 사무실 점거 농성을 겪기도 하였고 쏟아지는 비판에 결국 사과하였다.관련기사


3.1.5. 민주화세력 비하 발언[편집]


이명박은 정책자문 교수 모임인 '바른정책연구원' 주최 세미나에서 "요즘 산업시대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보면 70∼80년대 빈둥빈둥 놀면서 혜택을 입은 사람들인데, (그들이 산업화 세력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본다"고 말해 크게 비판받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얘기하는 빈둥빈둥 노는 사람들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주도한 학생운동권이기 때문이다. 이 당시 운동권뿐만 아니라 야권 정치인, 일반 시민, 학자들 역시 사회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음을 생각하면 국민에 대한 모독이다. 아이러나게도 이명박은 6.3 항쟁의 주모자여서 진보 언론에서는 이명박의 모순적 행보를 비판하기도 했다.[37]


3.1.6. 그 외 문제가 된 언행들[편집]


  • 대한민국이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과 2020년 부산하계올림픽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2009년 6월 28일 일본에 방문하여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 올림픽 여는 게 한국에도 좋아"라고 말하면서 일본 올림픽 유치를 적극 지지하기로 했다고 해서 큰 비판을 받았다.#
  • 국회에서 합의된 행정중심 복합도시 법을 "군대라도 동원해 막고 싶다"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다.
  • 저출산 대책 특강에서 "나처럼 애를 낳아봐야 보육을 얘기할 자격 있고, 고3을 4명 키워봐야 교육을 얘기할 자격이 있다"라는 말을 하기도 해 구설수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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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경인 아라뱃길 현장보고회에서의 연설에서는 "4면의 바다를 갖고 있는 대한민국이 바다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은 역사적 과오입니다"란 발언을 하여 큰 파장이 일었으며 네티즌들에게 "대한민국이 섬나라인가?"라며 비난을 받았고, 더불어서 이 대통령의 출생지가 일본인 것이 논란이 돼 친일파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당시 KBS는 이명박의 이런 발언을 그대로 자막으로 내보냈다.# 물론, 본인의 출신지가 일본이어서 순간 헷갈려서 말실수를 한 걸지도 모른다.
  • 2008년 현충원 방명록에서는 '습니다'를 '읍니다'로 쓰고, '바치다'를 '받치다'로 쓰는 등 맞춤법 오류로 인하여 비판받았고 이를 조롱하여 "나는 이명박을 찍지 않았읍니다" 라는 유행어가 생기면서 이를 쥐 그림과 함께 티셔츠에 인쇄한 제품이 발매되기도 하였다.#
  • 2007년 9월 선거 운동 중에는 누구를 존경하냐고 묻자 "안창호 씨"를 존경한다고 표현하여 논란이 일어났다. 독립운동가는 '~선생' 호칭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 이명박 대통령은 '최초'란 단어에 집착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최초가 아닌 사례에도 최초란 단어를 붙여 사실왜곡을 했다. 대표적으로 최초 전군주요지휘관 회의를 주재한 대통령이란 타이틀이 있는데 주요지휘관 회의는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회 이상 주최하였다.#
  • 2008년 초 한미 정상 공동기자회견에서는 기자가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대해 논의했느냐고 묻자 "하지 않았다."라고 답했으나, 부시 대통령은 화난 얼굴로 그 옆에서 곧바로 "논의했다"라고 반박하여 사실 여부에 관심이 쏠렸다.# 결국 이때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논의한 것으로 밝혀져 대통령의 말은 거짓말로 드러났다.[38]
  • 경쟁자이자 다음 대통령이 되는 박근혜에게는 "나도 지난 대선때 어느 괴한이 권총을 들고 집에까지 협박을 하러 와서 놀란 적이 있는데, 경호원들이 붙잡고 봤더니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고 그냥 돌려보냈다" 라고 말했지만, 최측근인 강승규 의원에 의해 실제로는 협박범이 집에 찾아온 것이 아니고 전화로 총소리를 내며 협박한 것이라고 밝혀졌으며, 심지어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았다는 진술도 실제로는 경찰 조사 후 그냥 돌려보낸 것으로 확인되어 거짓말임이 드러났다.

  •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6월 25일 이문동 시장 방문시 시장상인들에 보인 무성의한 태도로 논란이 되었는데, 식당에서 같이 회식을 하며 시장상인들의 어렵다는 하소연에 "내가 젊어서 노점상할 때는 끽소리도 못하고 가만히... 장사되면 다행히고 안되면 죽고 ... 이게 뭐 ...하소연 할 데도 없었어! 어~ 지금은 뭐 그래도 뭐 얘기할 데라도 있으니 좋잖아? 허허 지금 좋아졌잖아 세상이"라며 웃어넘겨 원성을 샀다.
  • 이 대통령은 수도권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2010년 9월 21일 한국 중부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 현장을 살펴보다가 수재민에게 "마음을 편하게 먹어요. 기왕에 된거니까. 편안하게"라고 말을 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기왕에 이렇게 된 거"란 표현이 인터넷 유행으로 번졌다.##2
  • 2010년 9월 채소값 폭등 시기 이명박은 "배추가 비싸니 내 식탁에는 배추김치 대신 양배추 김치를 올리라"라고 지시하였다. 문제는 양배추 가격도 배추와 비슷한 수준으로 폭등하였기 때문에 누리꾼들은 "전 국민이 먹는 김치 값 관리도 제대로 못하면서 '양배추 김치'로 생색만 내면 다냐"라며 한국판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정도의 무개념 언사라며 비난하였다.##2#3
  • 2008년 촛불집회에 1만 명이 참석했다는 보고를 받고 "신문만 봐도 나오는 걸 왜 보고하느냐. 1만 명의 촛불은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했는지 보고하라." 라며 언성을 높였다. 촛불집회의 근본적 원인이 정부의 태도에 대한 국민의 불신으로 일어난 점을 감안하면 사태를 진정시키긴 커녕 악화시키는데 일조하였단 비판이 있다.##2
  • 2011년에 저축은행들이 줄줄이 영업정지가 되면서 정치인과 고위공무원들의 비리가 문제시되자 "도대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온통 나라가 비리투성이 같고…"라며 공직자들을 비판했는데 이에 유체이탈 화법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 내가 해봐서 아는데란 말을 입만 열면 하여 젊은 사람들에게 꼰대 취급을 받았다. 이로 인해서 여러 언론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과연 못해본 것이 과연 무엇이냐?"라는 말이 나오며, 네티즌들은 이 말을 비꼬아서 이명박을 "군복무를 제외한 모든 것을 다해본 사람"이라 부르며 조롱하기도 했다.
MB, 이번엔 "나도 환경미화원 했는데.."
[why 경제]"해봤어?"와 "내가 해봐서 아는데"의 차이
[시민사회 중계석]"웬만한건 해봐서 아는데.." 민심은 왜?
2010 MB어 사전
"나도 한때 노점상" "나도 학생 때 민주화운동" "내가 애 넷 낳아봐서 아는데"[39]



3.2. 현대건설 부실 경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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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과 이명박 (1981년)

사실 사람은 그렇다. 기용하는 사람이 그 사람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으면 재능이란 것은 쓸모없게 되는 것이다. 내가 서울대학 출신의 많은 선배들을 물리치고 그 분을 기용했기 때문에 많이 클 수 있었다. 〈야망의 세월〉이라는 드라마가 그 분을 너무 유명하게 만들었는데, 그건 정말 작가의 장난이었다. 드라마에서 보면 이명박 씨가 소양강 댐이다 뭐다 해서 다 한 것처럼 나오고 박 대통령 앞에 가서 으르렁 으르렁 거린 걸로 나오는데 사실이 아니다. 소양강 댐 만들 때 이명박 씨는 간부도 아니었고 참여도 하지 않았다. 설계에서부터 설계 시공에 이르기까지 전부 서울공대 패거리들이 했다. 모두 이 씨의 (회사)

현대건설이 65년에 태국 파타니 나리왓 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하는 현지 주민들이 난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 칼을 든 폭도들이 금고를 열라고 요구했으나 이명박 씨 혼자 끝까지 금고를 지킨 무용담이 있는데 이 씨는 사실 금고를 지킨 많은 사람 중의 한 명일 뿐이었다.

현대건설은 생긴 지가 40년이 넘는다. 그런데 현대건설 초반기에 맡았던 공사에 그 분이 주역을 담당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드라마 상으로는 조선소 건설이나 자동차 등등 다 그 분이 한 것처럼 나오니까 사내에 보이지 않는 위화감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밑의 직원이 매스컴에 나오면 그걸 좋게 보지만 같은 동료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 때 저 밑에서 서류도 만져보지 못한 사람이 자기가 다 한 걸로 나오고, 그건 좋은데 초기의 중동 건설도 다 자기가 한 것처럼 나오니, 그 때 이명박 씨는 참가할 자격도 못 됐다.

서울대 선배들이 다 한 건데 서로 말은 못해도 회사 내에서 분위기가 아주 어색했다. 그런 저런 이유로 해서 그 분이 떠날 분위기를 자초한 거다. -정주영


이명박은 1965년 현대건설 재정/경리과 직원으로 입사, 1977년 현대건설의 CEO에 올랐으며 여러 계열사의 사장과 회장직을 거쳤으며, 1988년 주축 계열사인 현대건설의 회장에 올랐다.

당시 이명박 회장은 한국 건설사의 사우디 수주로 인해 활황이었던 중동 건설붐을 이어가기 위해 1978년 이라크 건설 수주 사업에 뛰어들었다.[40] 이에 총 41억 달러 규모의 이라크 인프라 건설을 최저가에 입찰하여 수주하였다.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고 외국계 건설사들의 이탈이 가속화 되었으나 현대건설은 이라크에 대한 수주 받은 건설현장에서 작업을 지속하였다. 1980년 시작한 전쟁이 8년간 지속되어 1988년에 마무리가 되었고 당시 이명박은 이라크 건설수주 미수금에 대한 자금부족의 우려를 회복하기 위해 국내외 은행에게 자금을 빌리러 다녔다. [41]

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나고 미수금을 회수하려고 하였으나 1990-1991년 이라크-쿠웨이트 전쟁이 심화되며 걸프전으로 발발하였고 1992년 이명박은 회장 자리에 사임 후 정치권에 뛰어 들게 된다.

이명박은 1981년부터 1995년까지 공사미수금에 대한 대손충당금을 적립하지 않았고 91년도에는 미수금은 8908억여원까지 불어났다.[42][43]

현대건설은 이명박의 퇴임 이후 각고의 노력에 불구하고 2000년 회계 감사에서 미수금에 대한 일괄 반영하고 2001년 워크아웃을 신청하게 된다. 당시 삼일회계법인은 2000년도 대규모 적자의 내용이 이라크 장기 미회수 공사대금이라고 공시하였고 금액은 1조 7000억원이라고 하였다.[44]

공적자금 250억원을 수혈하게 된 현대건설은 지속적인 개선의지로 다시 회생하게 되었다. 이후 현대건설은 2005년 미회수 공사대금의 75%를 탕감하여 미수금은 마무리가 되었다. 1조 7천억원에서 1조 3천억을 탕감하고 6천억 가량만 회수하였다. 물가 상승율을 감안하면 손해는 더욱 커진다.

이명박의 현대건설 재임기간 중 1981년부터 1991년까지 영업이익은 1.4조이나 영업외 손실이 1.1조로 부채 및 환율에 따른 비영업손실이 컸으며 퇴임 이후 현대건설이 2000년 전까지(92~99) 영업이익은 3.6조, 비영업손실은 3.2조였다.
이명박의 현대건설 취임 이후 퇴임까지 총자본은 5149억 증가하였으나 부채는 2조 증가하였고 퇴임 말 부채비율은 622%였다. 재임동안 평균 640%의 높은 부채비율을 유지하고 있어 이자비용의 부담이 높았다.

경영성과면에서 보면 이명박의 재임기간(81~91년)동안 매출액은 평균 6% 성장하였으며 영업이익은 12% 성장을 보였다. 퇴임 이후 현대건설의 각고의 고통으로 92년~99년까지 매출액은 평균 14% 성장하였고 영업이익은 14% 성장을 보여왔다.[45]
이명박의 현대건설 사장 취임 동안 막대한 부실은 지속적으로 현대건설의 경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왔으며 결국 2001년도 워크아웃으로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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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선거법 위반과 범인 도피 ★[편집]


1996년 15대 총선에서 이명박은 '대한민국 정치 1번지' 서울 종로에 출마하여 노무현, 이종찬 후보 등을 누르고 당선됐다. 이로써 그는 14대 국회에 여당의 비례대표 의원 (25번)으로 들어오면서 'CEO 출신 정치 신인'이라는 딱지를 떼게 됐다.
그러나 그해 5월 11일 각 후보의 선거비용 액수가 공개되면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야 4당 후보 중 신고 재산액(2억 6천만 원)이 가장 적었고 최하위 득표를 기록한 김을동[47] 자민련 후보가 4명 중 가장 많은 선거비용(9,255만 원)을 신고했기 때문이다. 2위는 노무현 민주당 후보(7,271만 원)였고, 이명박 신한국당 후보(7,149만 원)와 이종찬 새정치국민회의 후보(6,819만 원)가 각각 그 뒤를 이었다.

당시 이명박은 262억 원 가량의 재산을 가진 재력가였고, 그가 후보 중 가장 공세적인 선거 운동을 전개했다는 평이 많았다. 그런데도 그가 3∼4위 후보보다 적은 비용을 신고하자 뒷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특히 노무현 후보는 이명박의 신고액에 대해 "한 마디로 코미디"라며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총선 당시 이명박의 선거 기획을 담당했던 김유찬이 넉 달 후인 9월 10일 새정치국민회의 당사에서 "이명박이 총선 당시 전화 홍보 및 각종 행사 비용 등으로 6억 8천만 원을 썼고, 이 중 3,800만 원 가량의 영수증을 가지고 있다."라고 폭로하였다.

검찰 수사 결과, 당시 국회의원 6급 비서관이었던 김유찬은 이명박이 국회의원 재선에 성공하자 5급 비서관으로 승진시켜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이종찬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에게 이명박의 선거법 위반 사실을 제보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명박은 사건 초기부터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고려대 후배로서 이명박의 '자문 역할'을 자임했던 홍준표 의원도 "후보 또는 회계 책임자 등이 금품 전달을 지시한 사실이 밝혀지지 않는 한 당선 무효까지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리고 1999년 3월에 홍준표 본인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잃었다.

그러나 종로구의 법정 선거 비용이 9,500만원이었기 때문에 김유찬의 주장이 사실로 드러나면 이명박은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잃을 게 분명했다. 한편으로, 공소시효 만료일 (1996년 10월 10일)만 넘기면 이명박이 의원직을 유지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1996년 10월 9일 이명박은 형법상 범인 도피 및 공직 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어 1997년 9월 11일 1심에서 법정 선거 비용 초과 지출 및 범인 은닉 혐의에 대해 유죄 선고를 받았다. 유죄 선고로 말미암아 국회의원 자격을 잃기 직전인, 이듬해 2월 21일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하며 의원직을 사퇴했다. 이명박은 1998년 4월 28일 서울고법에서 열린 항소심에서도 선거법 위반 혐의로 벌금 400만 원, 김유찬의 해외도피 혐의로 벌금 300만 원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명박은 "서울고법의 항소심 선고는 법적 판결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판결로 도저히 승복할 수 없다."라며 서울시장 경선 출마를 포기했다.


3.4. 상습적인 거짓말 논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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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에게 재임기간 내내 따라붙은 별명이 여러가지 있지만 그 중 가장 유명한 별명은 바로 사기꾼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저는 말로 한 약속을 안 지켜본 적이 없습니다"라는 말까지 했지만 정치활동을 할 때동안 이명박 대통령은 여러가지 거짓말들을 했다. 대표적으로 선거법 위반으로 도피할 당시에 "양심을 걸고 그런 일이 없다"[48]라는 말을 했지만 결국 법원으로부터 7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며, 반값등록금 공약이 실천되지 않아 대학생들과 토론을 했을 당시에 "내 자신은 반값으로 등록금을 하겠다고 공약을 한 일은 없습니다만"이라는 발언을 하여 거센 비난을 받았다.

또한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이 BBK 기업을 설립한 적이 없다고 모든 의혹들을 부정했지만 2000년에 한 자신의 강의에서 위에 나온 "금년 1월달에 BBK라는 투자 자문회사를 설립을 하고"라는 발언이 알려지기도 했다. 또한 2009년 7월 27일 20차 라디오 연설에서 "방송을 장악할 수 있다, 언론을 장악할 수 있다"하는 시대는 지나갔다라는 말을 했지만 이후에 밝혀지기로는 방송과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유명한 거짓말로 2007년 12월 7일 대통령 선거 전 KBS 선거방송연설 중에서 “대통령 당락에 관계 없이 우리 내외 살아갈 집 한 칸이면 족합니다. 그 외에 가진 재산 전부를 내어놓겠습니다”라는 발언을 했지만 이 말을 전혀 지키지 않았다. 이외에도 이명박 대통령은 사적으로나 심지어 국민들에게 공표하는 대국민담화나 여러가지 기자회견에서까지도 대놓고 거짓말을 하여 국민들로부터 사기꾼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3.5. 가족 위장 전입·취업과 탈세·횡령 ★[편집]


이회창 “이명박 자녀 위장취업, 탈세 더 심각”
이명박, 본인ㆍ부인 운전기사도 '위장취업'
대통합민주신당, '위장취업 의혹' 이명박 선관위에 고발

2007년 11월 국회 대정부 질문 자리에서 강기정은 이명박이 자녀 막내(장남) 이시형장녀 이주연을 자신의 회사인 대명기업에 허위 채용하고 월급을 지급하였다고 주장했다. 자녀를 유령 직원으로 등재하여 8,800만 원을 횡령하고 세금을 탈세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대명기업의 경비원과 관리직원이 이시형과 이주연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시형이 2006년 국제금융센터(SIFC)에 입사하여 일한 기간과 대명기업에서 근무한 것으로 되어 있는 기간이 겹치며, 이주연은 이 기간에 미국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대선 당시 대변인을 맡은 나경원 의원은 "해명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란 이유로 해명을 거부하였으나 "상근직으로 근무한 것은 아니지만, 건물 관리에 일부 기여한 바가 있다"라고 해명하였다. # 결국 이명박은 "본인의 불찰이고 꼼꼼히 챙기지 못해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세금 문제 등 해결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조치하겠다"라고 사과했다. ##2

탈세·횡령에 대한 기소 문제로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 자격 유지 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자, 이명박은 자녀에게 지급한 월급을 소유한 기업의 비용 처리에서 제외하고, 건물 관리 업무와 무관한 성격의 자식에 대한 순수한 증여로 처리했으며, 장녀에게 지난 7년간 지급된 월급에 대한 세금 4,394만 원을 세무서에 납부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사돈이 운영하는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에 이시형을 위장 취업시켰다는 보도가 나오는 등 문제가 끊이질 않았다. (이명박의 3녀 이수연이,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사장의 아들 조현범에게 시집감) ##2 심지어는 자식뿐만 아니라 본인과 아내의 운전기사도 위장 취업시켰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사기꾼이란 비난을 받았다. #3 [[박근혜]와의 경선 과정에서 위장 전입 사례도 폭로됐다. #4

자녀들을 사립 초등학교[49]에 입학시키기 위해 위장전입한 것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3.6. 출생지 표기 논란[편집]


선술한대로 출생지는 일본 오사카로서 외국에서 태어났지만, 4살때 대한민국 포항으로 넘어가 그곳에서 대부분의 유년시절을 보냈다. 즉, 본인으로선 일본에서의 시절은 기억조차 거의 없다고 보는것이 맞다고 볼 수 있다. 본인으로서는 친일이나 일본의 영향없이 그랬던 시절에 지나지 않겠지만, 문제는 선거 후보 프로필에 기재된다는 점이었다. 이런저런 해명없이 오사카 태생이라는 사실만 기록되기에 정통 한국인으로서 의심을 받을 여지가 있었고, 일본 태생이라는 점은 반일 감정을 자극할 공산이 컸다.

현재는 대부분 오사카라고 정정됐지만, 서울시장 후보 시절에는 출생지가 포항으로 기재되었고 대통령 후보 시절에도 그렇게 기재를 했으나, 상대방 후보 측에서 문제삼으며 출생지가 드러났고 본인은 포항이라고 계속 주장했다. 결국 당선되고 나서야 사실대로 기재되었다. 2008년 이전 시기의 글을 보면 출생지를 가리고 논쟁을 벌이는 글을 여럿이 볼 수 있다. 참고로 출생지 허위표기는 '선거법250조'와 '선거법110조' 위반으로서 불법을 자행한 것이다.


3.7. 내곡동 사저 매입 사건[편집]


2011년 5월에 이명박의 아들인 이시형이 청와대에서 대통령 사저 부지를 매입했다가 논란이 된 사건.

배임과 부동산실명제법 위반과 같은 의혹이 발생하자 이명박은 퇴임 후 논현동으로 이전을 발표하였다. 이후 특검이 도입이 되었고 관련자에 대하여 전원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청와대는 이시형과 함께 이명박의 퇴임 후 사저에 대한 부지를 54억에 매입을 하였으나 비율에 따르면 청와대는 30억, 이시형은 24억을 지불하여야 하나 청와대는 42억, 이시형은 12억에 매입을 하여 배임 혐의가 적용되었다. 부지의 매입 주체가 이시형으로 청와대는 이명박의 명의로 구매할 경우 사회적 논란을 우려 아들 이시형의 명의를 빌려서 매매를 했다고 하나 부동산 실명제법에 위반 되는 내용이었다. 또한 이시형의 부동산 매입대금 12억은 당시 이시형의 자산과 신용으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부당 대출의 의혹을 받았다.

2011년 10월 여론에서 보도면서 논란이 불거지자 검찰은 조사를 벌였으며 불구속 기소 처분을 발표하였다. 2012년 6월 특검으로 진행되었다. # 특검 결과 경호처 직원들에게만 불구속 기소 처리하였고 아들 이시형이나 부인 김윤옥,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는 각각 불기소, 혐의없음, 공소권 없음 등의 판정을 내려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3.8. 다스 실소유주 논란[편집]




그것이 알고 싶다 - 140억은 누구의 돈인가?
이명박, "BBK는 내 회사" 발언
[단독] 2007년 다스 수사 대비 정황 문건 발견
[단독] 지하 주차장서 'MB 자료' 무더기 발견...검찰 영포빌딩 압수수색
포스코건설 전 팀장 “도곡동 땅, MB 소유라 무조건 사라고 했다”
검찰, '120억원 횡령' 다스 경리직원 참고인→피의자 전환
MB 조카 "상속받은 부동산, 사실 MB 차명 재산" 진술
검찰 "도곡동 땅 진짜 주인은 MB"…잠정 결론

다스는 경상북도에 있는 자동차 시트 제작회사다. 그런데 다스가 BBK에 투자할 때, 이명박의 가족들이 도곡동 땅을 팔아 출자금으로 넣었다. 이 땅은 1993년 이명박의 차명재산으로 밝혀졌다. 즉, 이명박의 차명재산이 이명박 본인이 회장이던 BBK로 흘러들어갔고, 주가조작으로 이명박 일가가 막대한 시세차익을 챙겼다는 것이다.

BBK 주가조작 사건으로 5,200명이 넘는 피해자와 1,000억원이 넘는 피해액이 발생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사건에 전임 대통령 이명박이 개입됐다는 자료가 발견된 것은 매우 중대한 법위반을 의미한다. BBK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 두 문서를 모두 참조할 것.

게다가 이 과정에서 현재 이명박의 아킬레스건인 다스 140억 회수 논란에 삼성이 개입된 정황이 드러나면서, 또 다른 초대형 비리의 전조가 드러나고 있다. 삼성 다스 소송비 대납사건 참조.


3.9. 청계재단[편집]


문서 참조.


3.10. 무료 테니스 논란[편집]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임 시절 테니스협회의 초청을 받아 ‘무료’ 테니스를 즐겼다가 협회측과 테니스장 운영자 사이에 이용료를 둘러싼 마찰이 빚어진 사건을 말한다. 2006년 3월 YTN이 처음으로 보도하면서 의혹이 증폭되었고 대부분의 보도가 사실로 드러났다. 당시 YTN은 "이명박 서울시장이 수년간 시 산하 체육기관 등의 후원으로 황금시간대에 테니스장을 독점하면서 무료로 접대 테니스를 즐겼으며 이용료 문제가 불거지자 사후에 사용료 6백만원을 별도로 지불했다"고 보도하였다.

4일 뒤 김한길 당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는 "한나라당은 이해찬 전 총리 골프피 3만 8000원 대납과 40만원 내기골프에 대해 국정조사를 요구했다"며 "그렇다면 한나라당은 이명박 시장의 테니스 비용 2000만원을 다른 사람이 낸 것에 대해서도 국정조사를 주장해야 한다"고 비판하였다. 3월 21일에는 이명박이 전국에 폭우가 쏟아져 비 피해가 잇따르는 위급 상황에서 논란이 되는 무료 테니스를 친 것으로 확인되면서 여론이 악화되었다. 한편,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고건 전 총리, 정몽준 의원, 노태우 전 대통령 부부 등도 남산 테니스장을 이용했다는 증언이 나오면서 특정 권력자나 부유층 클럽 등의 전유물처럼 이용되어 온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됐다.

이후 민주노동당이 이명박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및 직권남용, 직무유기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장을 제출하고 국가청렴위원회가 `황제 테니스' 논란과 관련하여 공무원행동강령 위반 신고사건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자 이명박 시장의 테니스 예약을 도맡았던 것으로 알려진 서울시체육회 부회장이 잠적하고 협회장이 서울시 발주공사를 맡은 건설업자인 것으로 확인되며 접대인 것으로 결론났다.

2017년 9월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인 기무사 테니스장을 이용한 게 드러났다. 대통령 예우 차원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엔 민간인 통제 구역인 군사시설에 출입을 허가하는 규정은 없다.


3.11. 히딩크 사진 촬영 사건[편집]


이명박은 서울시장 재임 시절인 2002년에, FIFA 월드컵이 끝난 이후 열린 히딩크 감독의 명예서울시민 수여식에 참관하여 당초 예정된 모든 행사를 취소하고 히딩크 감독이 자신의 아들인 이시형, 사위 조현범과 함께 강제로 사진을 찍게 하여 축구팬들의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행사장 밖에서는 히딩크 감독의 얼굴을 보려고 서울시청을 찾아온 서울 시민들이 있었는데, 이때 경찰을 동원해 제지하면서 일가가 히딩크와 사진을 촬영하며 욕을 먹은 것이다. 특히 이명박의 막내아들인 이시형은 공식석상임에도 반바지를 입고 맨발에 슬리퍼 차림으로 나왔으며, 이명박의 사위인 조현범 한국타이어 부사장은 "난 히딩크 감독과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회사도 빼먹고 여기로 왔다."라고 발언해 조롱을 받았다. ##2#3#4


3.12. 취임식 엠블럼 관련 논란[편집]


파일:The_17th_Presidential_Inaugural_Ceremony_emblem.jpg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엠블럼
파일:17th_predisent_gideon_emblem.jpg
기드온의 나팔과 비교

이명박이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후 취임식에 사용될 '태평고'라는 엠블럼이 공개됐는데, 이 엠블럼이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기드온의 나팔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하여 종교편향시비가 있었다. 엠블럼에서 구부러진 피리를 나팔에, 동그란 부분을 항아리에, 불꽃처럼 보이는 부분을 횃불에 대입해 보면 딱 그렇다는 이유. 이에 대해 대통령취임준비위원회 박범훈 위원장이 해명하기를, 이 엠블럼은 태평소을 모티프로 하여 만든 것으로 편안하고 희망찬 미래를 염원하는 의미에서 만든 것이며 또한 자신은 불자인데 어떻게 성서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의도할 수 있었겠냐며 오히려 불자가 로고 제작 및 선별책임자로 있어 오해받을까 걱정했는데 엉뚱한 방향으로 논란이 일어난 건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3.13. 노무현에 대한 표적수사[편집]


파일:게이트.jpg
2009년 5월 23일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자 국민들 사이에서 보수언론과 수사기관에 의한 정치적 타살이라는 주장이 계속되고 있다. #1#2#3 2015년에는 당시 중수부장인 이인규국정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탄압했다고 증언하였다.# 노무현의 부인 권양숙이 노무현의 회갑 선물로 받은 1억 원짜리 시계 두 개를 논두렁에 버렸다고 검찰에 진술했다는 언론 보도와 관련하여 이인규 당시 수사 책임자는 국정원 주도로 유언비어를 조작하여 언론에 흘린 정치 공작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이 18대 대통령 선거 이전까지 노무현에 대한 인신공격을 온라인에서 유포했다는 사실이 조사 결과 밝혀졌다. 물론, 노무현이 측근과 친인척 관리를 제대로 못해 일을 자초했다는 비판과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문제상황의 탈출구로 삼았다는 비판도 있으나, 그렇게 비판 하는 사람들도 노무현에 대한 표적수사가 있었다는 점은 동의한다. #1#2 당시 검찰의 수사 방식은 매우 잔혹해서, 한나라당 인사들인 박희태 당시 당 대표와 홍준표 당시 원내대표 조차 '이런 수사 방식은 처음 봤다', '구속을 하려고 했다면 신속히 결정해야지, 전직 대통령 수사를 하면서 모욕만 주었다.'라며 검찰을 비판할 정도였다. 이들이 노무현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라고 우려한 것.[50] 결과론적인 얘기이지만 이 우려는 이후 현실이 되었다.

노무현 사후 경찰이 시민분향소를 강제 철거하는 바람에, 이른바 '노무현 정치적 타살설'이 대두되기도 했다.#3 노무현 사후에는 보수, 진보 언론이 서로에게 노무현이 죽었을 때 책임이 있다면서 서로에게 칼을 겨누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노무현에 대한 강압적인 수사와 죽음에 민심은 변하기 시작한다. 이명박과 이후 정권을 잡는 박근혜. 그리고 이들의 정당인 한나라당부터 새누리당,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에 이르는 보수세력에 적개심을 품게 되어 정권을 내주었던 친노세력이 점차 힘을 쌓는 계기가 되었고, 문재인도 이를 계기로 정계에 복귀하게 된다.

결국 국민들은 19대 대선에서 이명박근혜 정권의 쌓아온 적폐를 무너트리겠단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후보에게 호응해주어 그를 대통령에 당선시켰으며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이명박 정부 또한 대대적인 수사가 들어가는 마당이다. 당시 적폐행위에 가담했거나 이득을 본 자유한국당바른정당의 정치인.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이명박측 세력은 정치보복이라며 비판하지만, 문재인정부 지지자들은 과거정부의 적폐청산에 호응하는 분위기며,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당신이 정치 보복을 언급할 자격이 있느냐?'고 대놓고 인신공격을 퍼붓는다. 문재인 본인도 이런 이명박의 발언에 직접 분노했다는 표현까지 썼을정도. 이명박이 이런 꼴을 맞게 된 건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문화 하나만큼은 전통을 확실히 세우겠다'던 과거의 약속을 깬 인과응보일 뿐이라는 여론도 존재한다.[51]

심지어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상 폄훼 공작을 모의한 정황까지 드러났다.# 그래서 DJ 지지자들도 이명박을 당장 구속하라고 언성을 높였고, 동교동계 더민주와 국민의당 의원들에게도 분노를 샀다. # 그리고 대북공작금까지 동원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꽁무니나 따라다녔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 이 모든 공작이 전직 대통령들을 추모하던 와중에 터져서 더욱 악질이라고 볼 수 있다.


3.14. 리더로서는 낙제점인 용인술[편집]


"검찰만 다녀오면 다들 연락두절"…분통 터지는 MB
10년 전엔 무혐의였던 MB 구속 왜?…등돌린 측근들 폭로 결정적
MB "허위진술" vs 측근들 "지시했다"..대질 신문 이뤄질까
MB, '내 편은 없다' 결론…"옛 측근들 허위 진술" 맞대응

이명박의 개인적인 성격이나 용인술에 대해서도 좋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명박의 측근들이었던 사람들의 평가에 의하면, 이기적이고, 돈을 악착같이 끌어모으는데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면 단물을 쪽쪽 빨아먹고, 자신에게 안 좋은 쪽을 보면 가차없이 내치는 사람이었다. 이는 팀킬하는 보스 유형 중에서도 최악의 유형으로 이런 성격으로 성공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52]

결국 2018년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칼끝이 자신에게 들이댔을 때, 프렌드 실드는 커녕 최측근이었던 남경필, 정두언, 정태근자신의 형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불법사찰을 해버리면서 애시당초 친이계에서 벗어났으며, 특히 자신의 집사라고 불리웠던 김희중은 아예 내부고발자 역할을 자처하여 자신의 성격이나 태도로 자신의 목을 죄고 있는 형편이다. 다만 최근 재판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장로로 있었던 대형 교회의 신도들이 방청석을 가득 채우고 검사들을 비난하는 등 어느 정도 지지자들이 결집하는 모양새다.


3.15. 가든파이브[편집]


이명박 서울시장 최악의 정책으로 손꼽히고 있다. 2019년 현재도 일부 동은 파리만 날리고 있고 SH공사 입장에서는 하루 2억에 달하는 이자비용이 지금도 꼬박꼬박 나가고 있다.


3.16. 그 외 논란[편집]


  • 서울시장 시절 Again 1907이라는 개신교 행사에서 축사를 하기도 했는데, 축사 내용 자체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그 행사가 삼광사, 범어사부산광역시의 대형 사찰을 실명으로 저격하며 '사찰이 무너지게 하소서'를 외치는 타 종교를 비하하는 편향적 행사였던 점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위의 서울시 하나님 봉헌 발언과 궤를 같이 하는 논란.

  • 2010년도에 있었던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때 이명박 대통령은 가슴에 손을 얹지 않고 거수경례를 했는데, 대한민국 국기법 시행령 제3조에는 "제복을 입지 아니한 국민은 국기를 향하여 오른손을 펴서 왼쪽 가슴에 대고 국기를 주목한다" 라고 명시되어 있어 국기법을 위반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 대강 + 원외교 + 위산업[2] 삼성 비자금 사건, 김용철 살인청부로 논란을 빚은 이건희 삼성 회장과 보복폭행 사건을 일으키고 경찰에 뇌물을 줘서 물의를 빚은 김승연 한화 회장 등.[3] 이 때문에 과거 공정성과 신뢰도에서 1위를 달리던 문화방송은 극우 언론매체로 변질되며 정권의 어용방송으로 전락해 버렸고, 훗날 MBC 블랙리스트 사태까지 터지면서 이명박 정부의 시궁창스러운 공영방송의 현실이 제대로 드러났다. 한국방송공사도 마찬가지.[4] 어떻게 보면 박근혜 정부 이상의 막장 집단인데, 박근혜 정부는 조직깡패 수준의 권력 남용과 사익 추구를 한 탓에 꼬리를 잡기가 쉬웠지만, 이명박 정부는 아주 치밀하게 조직적으로 국론을 분열시키고 교활하게 사익을 추구했다. 당장 현재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이명박 시절의 국가정보원이 저지른 행각을 보면 답이 나온다.[5] 擧世皆濁, 온 세상이 탁해 모든 사람이 바르지 않다[6] 그 외에도 대권재민(나라를 다스리는 권력은 백성에게 있다), 무신불립(믿음이 없으면 일어설 수 없다) 등이 뽑혔다.[7] 공직에 있던 사람이 퇴직을 하고 자신의 업무와 이해관계에 있던 사기업에 입사하는 행위를 회전문 인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이 경력을 이용해서 공직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정경유착의 예시로 꼽힌다.[8] 부산은행저축 비리로 사임하였다.[9] 원세훈은 행정공무원으로서는 관록이 깊은 인물로, 관선 강남구청장과 서울특별시 행정 1 부시장을 맡은 인물이었기에 행정안전부 장관을 맡았다가 국정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경우였다.[10] 다만 조현오는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악명 높던 전의경들의 내무부조리를 척결했다는 매우 큰 공도 있는 사람이다. 단순한 인사실패의 예로 보기는 힘든 예시.[11] 그리고 몇 년 뒤 조선일보는 박근혜 정부의 인사 형태조차 비판하기에 이른다.[12] 더욱 큰 문제점은 이명박 본인도 기관지 확장증으로 인해 군대를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13] 박한철 헌법재판관을 칭찬하는 동시에 이명박 정부의 공직자들을 비꼬는 발언이다. 당장 "이 정부는 군대를 안 갔다와야 고위직 후보가 될 수 있다." 라고 발언한 것만 봐도...[14] 이에 대하여 수많은 패러디들이 쏟아졌는데 대표적인 말로 이외수"도둑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는 말이있다.[15] #[16] #[17] #2[18] 이외에 이명박 대통령의 사위인 조현범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사장도 2009년 주가조작 혐의를 받았지만 무혐의 처리됐다.[19] 도원교통(서울) 사장으로, 이명박이 서울시장으로서 버스 준공영제를 추진할 당시에도 버스운송조합 이사장직을 맡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친밀한 관계이기도 했다.[20] 박영준은 다만 장다사로와 더불어 원래는 이상득이 데리고 있었던 인물이었다.[21] #[22] 미디어법 당시 500만 원 돈봉투와 별개의 돈이다.[23] 이명박이 서울시장을 하던 당시에는 서울메트로 사장을 지냈고, 현재는 다스 사장이 되었다.[24] 스탠포드 대학에 200만 달러를 기부한 후에 그 이자는 자신이 쓰려 했다.[25] 김진모는 검찰 내에서 우병우 사단에 속하는 인물이기도 하다.[26] 참고로 박근혜도 20대 총선 당시에 공천에 일정부분 관여했다는 점이 흥미로운 부분.[27] #1[28] #2[29] 관련 법규에 따르면 IT보안 예산은 전체 IT 예산 대비 7% 이상을 확보하고, IT인력은 총 임직원 수의 5% 이상, IT보안 인력은 IT인력의 5% 이상을 확보해야 한다. 또한 금융회사 정보보호 최고책임자(CISO)의 지정도 내년 5월15일부터 의무화 하기로 했다.#[30] 대통령기록물 무단 은닉이나 유출은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는 중범죄다.[31] 이후 2000년에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 새천년민주당 총재인 김대중 대통령이 영수회담을 하여 이명박(1998년 사퇴, 1999년 선거권 박탈), 홍준표(1999년 의원직 상실ㆍ피선거권 박탈) 같은 선거사범의 피선거권을 회복시켜 주었다.[32]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코스피가 3000이 될 것이라는 주장. 물론 이명박 정부가 끝나고 5년이 되어가도 안 되고 있다. 심지어 임기 중에 1000선이 무너진 적도 있다(...). [33] 다만 이는 고환율 정책으로 인한 착시효과일뿐 경제성장은 금융위기뿐만 아니라 임기 말까지 꾸준히 이루어졌다.[34] 일반 국민들은 부자들을 "정치인과 결탁해 각종 탈법을 저지르는 부패한 범죄자"로 볼 만큼 감정이 좋지 않다.[35] 넓게 봐서 서울시장이나 대통령 당선 당시 분위기만 해도 [36] #[37] #[38] 다만 당시 논의한 파병 병력은 전투 병력은 아니었으며, 이에 대해 2009년 6월 16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의 정상 회담에서 다시 논의하였다.[39] 친이계이기도 했던 정병국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MB가 참모들의 말을 다 듣다가 '내가 해봐서 아는데' 화법을 통해서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회고했다.[40] 출처 : 신화는 없다 - 이명박 저.[41] 후에 자서전에서는 "정주영 회장은 그 책임이 그 시장을 개척한 내게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라고 언급하였다.[42] 출처: 이명박 현대건설 사장때 분식회계 의혹.[43] 이명박은 국정감사에 지적받은 사항에 대하여 경영적 판단에 의해서 적립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통상적이면 적립을 더 강하게 하는 것이 정설이다.[44] 출처 : 김영주 의원 "이명박 후보, 현대건설 부도 장본인".[45] 퇴임 이후가 더 경영 성과가 좋았다는 이야기이다. 장기미수금을 떠안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46] 정주영의 아들인 정몽준이지만, 정몽준은 애초에 현대중공업을 자신의 몫으로 받았으며, 왕자의 난이 끝난 2002년에 분가해서 현대중공업 대주주가 되었고 현대건설과는 별 접점이 없다.[47] 김두한의 외손녀, 송일국의 어머니가 맞다. 후에 여당 최고위원에 국회입성까지 한 인물인데 같이 출마한 후보들이 대통령만 둘인지라 최하위일 수밖에 없던 것. [48]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라는 뜻[49] 딸들은 리라초등학교, 아들은 경기초등학교를 졸업했다[50] 그와 별개로 해당 발언의 장본인이 젊은 시절 검찰조직의 더러움 때문에 강제로 법복을 벗었던 전적이 있는 인물이라 과거의 트라우마가 도진 것일 수도 있다.[51]조선일보조차 현 정권보고 정치보복 운운하기 전에 노무현에 대한 표적수사야말로 정치보복이었음을 인정하라고 사설에 실었다. #[52] 사실 신기한 일도 아닌 게 애당초 이렇게 단물만 빨아먹고 버리는 쪽이 출세는 더 빠르게 된다. 그리고 출세를 하고 나면 그동안 당한 피해자들이 어떻게 하려고 해도 이미 권력을 쥐고 있으니 찔러 볼 구석도 없게 된다. 하지만 종신통치가 아닌 이상 결국 언젠가는 권력을 놓게 되어 있고 그렇게 되면 당연히 그동안 쌓아온 원한이 한꺼번에 몰려오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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