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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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녕국
東寧國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60px-Kingdom_of_Tungning.svg.png
1661년 ~ 1683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네덜란드
청나라
남명
위치
타이완섬 남서부, 펑후 제도
수도
사명주(思明州) → 승천부(承天府)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역대 국왕
1대 정성공
2대 정경
감국 정극장
3대 정극상
국성
(鄭)
언어
대만 민남어
문자
한자
종교
유교, 도교[1], 대승 불교
종족
한족(본성인)
현재 국가
[[대만|

대만
display: none; display: 대만"
행정구
]]


1. 개요
2. 역사
3. 외교
4. 의의
5. 관련 문서
6. 역대 국왕



1. 개요[편집]


중국어: 東寧國 (Dōngníng guó)
대만 민남어: 東寧國 (Tang-lîng-kok)

정성공1661년 네덜란드인을 몰아내고 타이완섬을 통치하게 된 시기를 말한다. 1683년까지 존속했다.

정씨왕국(鄭氏王國), 동녕왕국(東寧王國), 연평왕국(延平王國), 명정시기(明鄭時期)라고도 한다. 조선에서는 대번국(大樊國)으로 《현종실록》에 언급되었다.[2]


2. 역사[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oxinga_territory.jpg
명정 지도

정성공은 평생을 명나라 부흥운동에 바쳤고 명나라의 옛 도읍 난징을 거의 되찾을 뻔 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17세기 중반 대륙에서 명나라가 망하고 새로이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들어서자 정성공은 청나라의 해안 봉쇄령(천계령)으로 인해 극심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이에 명나라 부흥을 위한 장기적인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그 거점으로 네덜란드가 지배하던 타이완섬을 노렸다.

결국 정성공은 네덜란드령 대만의 타이난을 공격했다. 그는 네덜란드령 대만의 반네덜란드파 대만 원주민 및 한족들과 함께 동맹을 맺고 봉기하여 네덜란드 세력을 공격해 질란디아[3] 요새를 점령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지원군도 격파하여 인프라를 통째로 빼앗았다. 이후 네덜란드군이 질란디아 요새 탈환을 시도했으나 이번에는 질란디아 요새의 성벽이 네덜란드 공격군에게 핸디캡이 되면서 공격에 성공하지 못하고 물러갈 수 밖에 없었다. 이로써 정성공 세력은 네덜란드 제국 세력을 몰아내고 대만 남서부를 차지해 그곳에 근거지를 마련하고는 동녕국을 건국했다.

한족들은 정씨 세력에 흡수되었으며 동녕국은 융화정책을 실시하여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 들지 못한 대만 원주민들의 관계 계선에 힘썼다. 다두 왕국을 통해 원주민들과 교역을 하고 이들에게 농사, 중국어, 사냥, 덫이나 옷 등의 제작법을 가르쳐 주는 등 관계 개선을 통해 통해 청나라에 대한 항쟁체제를 꾸리려고 했다. 그러나 1661년에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영토까지 침범하여 그로 인해 정씨 세력과 남부의 평포족 간에 갈등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때 다두 왕국의 전사였던 대만 중부 지역 출신의 파포라족 아 텍 카우종(阿德狗讓 / 1592~1661)이 정성공의 원정으로 파견된 두 장군의 매복전술에 살해당했다. 정성공은 반항하는 원주민들을 탄압해 학살하거나 착취했는데, 이 과정에서 사록사 전투가 일어났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정성공은 동녕국을 세우면서 청나라와는 독립적인 사회 제도를 구축했고, 반청복명 세력인 만큼 명나라 제후 왕국의 제도를 따왔다. 이를 통해 대만 원주민들에게 한족의 유교 문화가 수입됨으로써 대만의 역사는 동아시아사로 편입되었다.

정성공이 승하하고 그의 아들 정경이 즉위한 뒤에도 반청복명 정책은 유지되었다. 삼번의 난 때도 군대를 보내 경정충의 영지였던 푸젠 성 일부를 장악했으나 결국 쫓겨나기도 했다. 제3대 정극상까지 이어졌지만, 결국 중국 대륙을 완전히 평정한 청나라 성조 강희제의 침략으로 1683년에 펑후해전에서 참패한 후 멸망했다. 그래도 청나라는 정성공과 그 후예의 명예를 인정했고, 항복 이후 동녕의 정씨 왕족들은 청나라 본토에서 그럭저럭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 이후 타이완섬의 역사는 대만청치시기 문서 참고.


3. 외교[편집]



3.1. 청나라[편집]


건국 목적 자체가 반청복명인 만큼 청나라와는 내내 적대했다.

그러나 반청복명 의지가 비교적 확고했던 정성공이 죽은 이후 맏아들 정경이 자리를 이어받았을 때 청나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복종, 명나라의 옥새, 변발 등을 요구하면서 사면과 함께 높은 벼슬을 내리겠다고 했다. 그러자 정경은 그 조건으로 독립국으로서의 조공국 지위(예를 들면 당시 조선과 같은 국제적 지위) 설정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3.2. 조선[편집]


당시 조선은 제18대 현종과 제19대 숙종이 재위하고 있었던 시기였으며, 대만 섬에 있는 동녕국을 대번국(大樊國)이라고 표기하는 등 그 존재는 알고 있었다. 삼번의 난 당시에 북벌을 위해서 동녕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거리가 너무 멀기도 하고 청나라가 삼번의 난을 결국 진압하고 기반을 탄탄히 다지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

현종 11년(1670년)에 중국 옷, 오랑캐 옷, 일본인 옷을 입고 있는 무리들 90여 명이 제주도에 표류한 바 있었는데 이들이 당시 제주목사 노정에게 동녕국과 중국 남부의 사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이들은 청나라가 중국 남부를 석권하자 만주족의 탄압을 피해 나가사키로 도망가던 중에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했으며, 이에 제주목사는 그들을 나가사키로 보냈다고 한다.(출처: 《현종실록》, 《현종개수실록》)

그러나 중국이나 대만 쪽 학자들 중에서는 조선이 이들을 청나라에 송환했고, 결국 청나라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주장도 있는 듯하다.

한편 조선 일부에서는 동녕국이 명나라를 배반하고 청나라에 복속한 조선을 벌하러 쳐들어올 거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는데, 이 소문이 비기인 《정감록》에 등장하는 정진인의 모티브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실록보궐정오》에 기록된 운부, 장길산의 모반 기사를 보면 정진인을 '해상(海上)의 정씨(鄭氏) 성(姓)을 가진 자'라고 하여 정성공 가문임을 암시하고 있다.


3.3. 일본[편집]


에도 막부와는 활발하게 교역을 전개했다. 일본에 , 사슴가죽, 설탕 등을 수출하고 , 구리, , 면포 등을 수입하는 교역 관계가 멸망 당시까지 지속되었다.

정성공이나 정경은 에도 막부에 원병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거절 당했다.


3.4. 서양[편집]


동녕국 자체가 타이완섬의 서양 세력을 몰아내고 세운 국가라 대체로 유럽을 비롯한 서양 국가와의 사이는 영 원만하지 못했다. 네덜란드와는 정성공의 공격으로 네덜란드령 타이완을 빼앗은 만큼 최악이었으며, 이후 타이완을 다시 점령하려는 네덜란드와 계속 대립했고, 근처 필리핀영유하고 있었던 스페인과도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여 정성공부터 정경, 정극상까지 몇 차례나 필리핀을 정벌할 것을 고려했다.

한편 영국 동인도 회사와는 1675년에 통상 조약을 체결한 바 있다.


4. 의의[편집]


외세(네덜란드)를 물리치고 타이완섬에 건국된 첫 번째 독립국 혹은 첫 번째 한족 정권이라 할 수 있기에 현대 대만인들이 중요하게 배우는 시대이다. 동녕국은 다두 왕국대만 원주민들의 부족국가보다 좀 더 체계적인 정부를 세웠고, 영국과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써 통상조약을 체결하는 등 독립국가로써의 입지를 다졌으며 동녕국의 시기 한족들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여 대만이 동아시아의 중화권에 편입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일본과도 관계가 있으며 중국 대륙의 강대한 (불법으로 여긴)정권에게 대륙에서 밀려나 본토 수복을 기치로 넘어온 것부터 시작해서, 본토의 세력과 대치하는 등 지금 대만의 중화민국과 비슷한 점이 매우 많은 정권이었다.

최근에는 차이잉원과 대만독립단체가 대만 원주민단체 한테 찾아가서 정성공에 관한 문제를 사과하고 대만 원주민들이 정성공 동상에 방화하는 사태가 벌어졌다.[4]


5. 관련 문서[편집]




6. 역대 국왕[편집]


대수
시호

왕비
부친
재위 기간
1대
조무왕(潮武王)
정성공(鄭成功)
동씨(董氏)
정지룡(鄭芝龍)
1655년 ~ 1662년
2대
조문왕(潮文王)
정경(鄭經)
당씨(唐氏)
정성공(鄭成功)
1662년 ~ 1681년
감국
-
정극장(鄭克臧)
진씨(陳氏)
정경(鄭經)
1681년
3대
-
정극상(鄭克塽)
풍씨(馮氏)
정경(鄭經)
1681년 ~ 16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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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극성의 신인 현천상제(玄天上帝)를 대만의 수호신으로 숭배[2] '대번'은 '타이완'의 음차 중 하나로, 대만어로는 Tāi-hoân이라고 읽는다. 타이완은 중국어 유래 명칭이 아니어서 청나라 통치 이전에는 여러 한자 가차 표기가 보이는데, 그 중 하나이다. 오늘날 타이완을 한자로 표기할 때 쓰는 臺灣은 대만어로 Tâi-oân이라 읽는다.[3] 질랜디아가 아니다.[4] 예전에 대만독립단체가 대만 원주민이 아니면서 손문 동상을 파괴한 사건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