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r26판)

편집일시 :

역대 일본 총리

87대 ~ 89대

90대

91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
95대

96 ~ 97대

(현직)
노다 요시히코
아베 신조

安倍(あべ) 晋三(しんぞう) / Shinzō Abe
안배진삼

2006년 10월 9일 서울 국립현충원 참배.[1] 아베 국립현충원 참배


한국 문화는 나름 즐기는듯하다. 일설에 따르면 400년 전 일본에 건너간 조선인의 후예라 카더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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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26일 제 96대 총리 취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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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유 눈부셔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 국제판 셋째 주 커버 페이지. 기사에서는 아베노믹스가 가능할 것인지에 의문을 던진다.

이름
아베 신조(安倍晋三)
출생
1954년 9월 21일, 일본 도쿄 도
사망
2022년 7월 28일, 일본 나라현 나라시
국적
일본
신체
175cm, 70kg, B형
직업
정치인
가족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아버지 아베 신타로[3], 어머니 요코 아베
3남 중 차남
부인 아베 아키에
경력
중의원 8선
72대 내각관방장관
90대, 96대, 97대 총리

"침략에 대한 정의는 학계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정해져 있지 않다. 국가간 관계를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아직 이런 발언을 하기 때문에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가 좋을 수가 없다.

1. 개요
2. 소개
3. 집안
4. 정계 입문
5. 1차 아베 내각
6. 사퇴 뒤 재기
7. 2차 아베 내각
7.1. 집권
7.2. 참의원 통상선거
8. 아베 내각 & 자민당 지지율
9. 외교 정책
10. 역사적 성향
12. 기타
12.1. 가정 내 야당(?) - 아키에 여사
13. 저서
14. 관련 웹 사이트


1. 개요[편집]


일명 선거의 제왕

일본의 정치인. 제 90대, 96, 97대 총리로 1954년 9월 21일 도쿄 출생. 본적지는 야마구치나가토시이다. (즉, 舊 조슈 번) 키는 175cm.


2. 소개[편집]


우선 대한민국을 제외한 서방 국가 입장[4]에서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대표되는, 믿을 만한 우방이자 반서방 세력[5] 견제에 매우 중요한 조력자. 이는 미국만의 이야기도 아닌 영연방 국가들과 유럽 등 대부분의 서방 국가들에 형성된 공감대이다. 게다가 회전문 총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1년을 못 넘기고 내각이 교체되던 일본이었는데 이젠 강력하고 안정된 정부가 꾸준히 이러한 정책을 밀어주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우호적이므로 같이 일하기도 편하니 서방 국가 입장에서는 얼마나 고맙겠는가? 위안부 문제의 경우 서방 국가에서 관심이 크지 않아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있다.[6] 실제로 G7은 자국에 불리한, 대신 일본에 힘을 싣어주는 아베노믹스를 묵인할 정도로 기존부터 일본에 우호적이었다. 중국과 러시아는 무섭다...

대한민국중국을 비롯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제국에게 시달린 아시아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시대착오적 총리이자 현대 일본을 최악으로 치닫게 하는 군국주의자. 게다가 국가 간의 손익관계를 떠나 자신의 신념, 그리고 정치적 입지를 지키기 위해 한일관계를 악화시켰던 인물이므로 상당히 경계하는 편.[7] 일본에서 총리는 일왕이 휘두르는 두 개의 칼중 하얀칼이라고 불리우지만 아베의 경우는 자국 내에서조차 '하얀 칼이자 검은 칼'이라고 불린다. 하얀 칼은 총리, 검은 칼은 야쿠자를 의미한다. 보통 현직 총리를 검은 칼이라고 말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일본 내에서 그가 보여주는 극우 행보가 역사적으로도 독보적임을 말해준다.

일본의 좌파, 그 중에서도 한국에서 양심적인 일본인으로 평가될 정도로 일본의 주변국에 대해 우호적인 사람들, 일본의 평화헌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극우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 일본 우익, 그 중에서도 넷우익에게 최고의 총리라 불리고 있으며, 아베 정권의 집권 이후 극우적 운동이 더 극심해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사실 반대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이것은 과거사 반성같은 작은 문제가 아니라 개헌되면 징병제가 실시될 수 있으며 거의 무조건 세금 부담도 급증하는 실질적인 문제이므로 절박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개헌을 반대하는 세력 중에서는 가뜩이나 돈 없는데 뭔 군대냐는 의견도 상당하다.

경제적으로는 망해가던 경제를 살린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취업률의 경우 현재 일본에서 쉽게 들어갈 수 있는 대학을 들어간다면 공대를 졸업한 경우 대기업에도 쉽게 들어갈 정도다. 문과의 경우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쉽게 들어갈 수 있는 대학이라도 대학을 졸업만 하면 중소기업 정도는 역시 쉽게 들어가고[8] 취업빙하기라고 불리우던 10~20년 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 한국은 현재 연고대는 물론이고 서울대학교를 나와도 대기업 취직이 쉽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두산 사태에서 보듯이 설사 취직을 해도 20대 '희망퇴직(?)'까지 벌어지는 상황이다. 거기에 물가는 상당 품목이 최근에 일본보다 훨씬 더 비싸기까지 하고 [9][10] 곧 서술될 본문이나 아베노믹스, 아소 다로 (...) 항목을 보면 의아할 수도 있는데 일본은 20년이 넘게 디플레이션에 시달렸기 때문에 물가상승률이 안정된 것만도 큰 업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디플레이션이란 것이 그만큼 치명적이기 때문. [11]

아베 내각에 대한 지지도가 악화일로를 겪기 시작한 것은, 대체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지 알 수가 없다는 여론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아베 내각에 대해 동일본 대지진 이후 험악해진 민심을 회복시키라고 뽑아 놨더니 오히려 좌우 대립만 격화시키고 있다는 인식이 있다. 당장에 이 사람 말고 대안은 딱히 없는데 그 와중에도 총리 본인이 예측 불가한 행동을 반복하는 데에 피로감이 늘고 있다.

시간이 흐르자 아베 내각의 지지율과 자민당 지지율은 다시 반등했다. 2015년 11월 NHK 여론조사 일본어 기사 결과, 아베 내각을 지지한다는 비율이 47%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39%를 앞섰고 정당 지지율도 자민당이 37.1%로 1위. 이는 정작 아베 내각의 지지율이 급추락하던 8, 9월에 비해 오히려 악재가 더 늘었던 직후에 있었던 여론조사라서 더 역설이라 할 수 있는데, IMF에서 10월경 일본의 2015년 경제성장 전망에 대해 연 0.6%라는 비관적인 분석을 내놓았고 #1 #2 이는 작년 (2014년) 10월에 내렸던 분석보다 약 1/3 정도로 추락한 것이기에[12] 오히려 아베 내각 입장에서는 지지율이 더욱 추락하는 것을 예상해야 할 상황이었다. 즉 일본에 있어서는 반대파조차 아베를 일종의 필요악으로 인식하는 것 아니냐는 것.

그러니까 결론을 말하자면 일본 입장에서는 분명 문제점도 있지만 지금 일본에 필요한 리더라는 게 여론이다. 실제로 2016년의 쿠마모토 지진 때 정부의 적절하고 신속적인 대응[13]미국오바마 대통령히로시마 방문이라는 외교적 성과[14]는 아베 총리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고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졌다.[15] 한마디로 한국과 좋게 관계를 쌓았던 외교적 성과는 없었던 총리이지만 경제적 정책으로 인해 유능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있다.

3. 집안[편집]


솔직히 아베뿐만 아니라 오부치 게이조[16], 고이즈미 준이치로[17], 아소 다로[18], 점잖아 보이던 후쿠다 야스오 등등..... 거기다 심지어는 야당인 민주당 출신의 하토야마 유키오도 집안의 권력 때문에 총리 직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를 말하려면 우선 그의 집안부터 다루어 볼 필요가 있다. 김정은처럼 보통 그 형태가 형식적인 세습이거나 민주적이거나, 혹은 이와 관계 없이 대를 이어 정권을 이양받은 경우 어느정도 선대의 가치관에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아베 신조 또한 이러한 특성을 크게 벗아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정치관은 그의 집안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의 출세에는 그의 집안 내력이 크게 작용했다. 일본의 경우 한국과는 달리 정치적 입지와 정치 진출에 있어 집안과 가문이 중요한데,[19] 노골적인 권력세습으로 자유민주당(일본) 의원의 40%가 이런 세습족들이다. 이 사람들은 사실상의 세습귀족으로 일반인들과 완전히 괴리된 삶을 살기 때문에 많은 폐해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자민당 뿐 아니라 민주당의 여러 정치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하토야마 총리도 세습족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의 논리에 의하면. 아베 신조도 자기 집안의 후광을 받으며 정치인이 된 경우. [20] 이 때문에 그를 알려면 그의 집안을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1954년에 아베 신타로와 기시 요코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무척 화려한 정계 집안이다. 외할아버지는 A급 전범 용의자(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석방 처리.)이자 자민당 체제를 확립한 기시 노부스케 총리, 기시의 친동생이자 비핵 3원칙으로 유명한 사토 에이사쿠는 아베 신조에게는 외종조부(외작은 할아버지)다.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는 외무장관을 지냈을 만큼 집안이 화려하다.

위의 내용에 관련한 내용을 첨부하자면 2014년 3월 15일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에선 안중근의사와 관련한 일본의 불법 재판 사건과 관련해[21] 현 아베 정부의 특성과 방향, 아베의 출신 가문, 사상적 배경을 추적했다. 이 방송에서 방영된 바에 따르면 아베의 외고조부는 일본 정한론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의 밑에서 사상적 영향을 받은 오시다 요시마사로 이 자는 청일전쟁 이전 경복궁을 기습하여 점거한 전적이 있는 일본 육군 대장 출신이며, 외조부는 위에서도 언급한 대로 기시 노부스케로 A급 전범이자 일본 우경화에 앞장선 인물이다. 이들은 조슈 번의 일본 전범, 극우 중에서도 거물로 꼽히는 인물들이다.[22]

그리고 자신도 요시다 쇼인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하고 [23]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 말한 관방장관의 언행을 두둔하는 등 심각한 행각을 벌이는 인물이다. 참조 까놓고 말하자면 전범 가문 출신.

세이케이 초등학교, 세이케이 중학교, 세이케이 고등학교를 거쳐서 세이케이 대학[24]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에 미국에 건너가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정치학과를 다녔지만 1979년에 중퇴했다.[25]

대학교에서 양궁을 배웠으며 후지TV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양궁 실력을 실제로 선보이기도 했다.


1960년대로 추정되는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와 함께 한 어릴적 사진


1972년, 고등학교 졸업사진


4. 정계 입문[편집]


미국 유학 뒤 고베 제강이란 회사에서 일하다가 1982년 아버지 아베 신타로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1987년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26]의 주선으로 모리나가 제과 회장의 딸인 아키에(당시 광고사를 다니던 중)와 결혼한다.

아버지 아베 신타로는 유력한 총리 후보였으나 암 선고를 받고 1991년 사망했다. 아베 신조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1993년 아버지의 지역구인 야마구치현 제1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하며 국회에 입성했다.

모리 요시로 총리 시절에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추천으로 관방장관에 임명되었고 고이즈미가 총리로 취임한 뒤에도 유임했다. 참고로 관방장관은 총리 비서실장 겸 내각 대변인으로 총리 집무실 바로 옆방에 사무실이 있으며, 총리를 보좌해서 내각의 조정업무를 담당한다. 대변인으로 언론에도 매일 나오기 때문에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알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보통 정치세력의 차세대 에이스들이 관방장관으로 경험을 쌓은 뒤에 총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

자민당에서 북한에 대한 강경파로 주목을 받았고 북한에게 무력 사용과 경제제재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해 인기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그 인기 덕인지 2003년 자민당의 간사장을 맡았다. 3선 밖에(!) 안 되는 젊은 정치인인 그에게 간사장직을 맡김은 2003년 11월 중의원 선거의 승리를 위해서였는데, 실제로 11월 총선에서 자민당은 과반 이상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간사장으로서 아베 신조는 당내 개혁 조치를 폈지만 2004년 참의원 선거에서 목표치 51석에 못 미치는 49석을 확보하자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 그러나 후임 간사장의 요청으로 간사장의 밑인 간사장 대리를 맡는다. 어쨌든 간사장 대리로서 아베 신조는 우정개혁으로 촉발된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 반고이즈미파 낙선을 위한 소위 "고이즈미의 자객"으로 불린 미녀 후보들을 공천하는데 역할을 했고 큰 성공을 거뒀다.


5. 1차 아베 내각[편집]



제90대 총리 시절 공식 사진

이런 활약으로 고이즈미 총리의 후임으로 거론되기 시작해 2006년 자민당 총재선거에 출마해 경쟁후보인 덕후 아소 다로와 다니가키 재무상을 물리치고 자민당 21대 총재에 당선됐다. 다수당 대표가 총리를 맡는 일본의 관례에 따라 제 90대 일본 총리에 올랐다. 전후세대 첫 총리, (전후) 최연소 총리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총리 취임후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경색한 한일, 한중 관계 회복을 위해 2006년 10월 8일 중국후진타오 국가 주석과, 10월 9일에는 대한민국 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아베 총리의 재임은 내각의 각종 스캔들로 얼룩졌다. 사다 겐이치로 행정개혁상이 사무실 재정운영 문제가 불거져 사임했고 마쓰오카 도시카쓰 농림수산상이 각종 비리 의혹으로 자살했으며 규마 후미오 방위상은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는 어쩔 수 없었던 일[27]이라는 일본인에게 매우 민감한 발언으로 결국 주의 처분을 받고 사임했다. 후임 방위상은 고이즈미 총리가 2006년 자객후보로 공천한 고이케 유리코가 선임되었다.

이런 악재 가운데 열린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1989년 참의원 선거[28] 이후 사상 최악의 성과를 거두며 연립여당인 공명당과 더해도 과반의석을 못 얻은 역사적 참패를 겪었다.[29] 아베 총리는 내각을 계속 유지할 것임을 시사했지만 새로운 아베 내각에 국민들은 실망감을 드러냈다.

이렇게 되자 아베 총리는 2007년 9월 10일부터 열리는 국회에서 테러 특별조치법을 연장시키지 못하면 내각이 총사퇴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그러나 불과 며칠 뒤인 9월 12일 총리 사퇴를 선언해 무책임하다는 비판만 받았다. 사임의 이유로는 아베 총리가 일본 민주당 오자와 이치로 대표와 협상을 가지고 테러 특별조치법 연장을 위해 노력했으나 오자와 대표가 이를 거부해 사퇴를 결심했다고. 물론 건강이 안 좋아진 것도 원인이지만 자민당 안에서 아베 총리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계파간 밀실 합의로 밀려났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퇴임 뒤 수상 관저에서 나와 바로 병원으로 향했는데 이를 두고 영국 BBC는 '수상 관저에서 체크아웃해서 병원에서 체크인했다' 라고 비아냥댔다(...).

그러나 추후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정말로 건강이 안 좋았다고 한다. 그가 걸린 궤양성 대장염은 심하면 음식 먹은 지 5분 뒤에 대변으로 나올 만큼 심각한 병으로 그를 압박했으며 그의 부인 아키에 여사는 총리 직보다 목숨이 더 중요하다며 울면서 그를 설득했다고 한다.

이 당시 그의 이미지는 말 그대로 골골거리는 "도련님(봇짱)"이었다.


6. 사퇴 뒤 재기[편집]


한동안 몸을 챙기다가 2008년부터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자민당 몰락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인물임에도 반성은 전혀 없이 자민당이 캐몰락한 2009년 중의원 선거에서도 당당히 자기 지역구에 출마해 당연히 당선했다.(...) 이후 고이즈미의 우정개혁에 반발해 탈당했던 히라누마 다케오를 자민당으로 복당시키고 총재선거에 출마하려 했지만 히라누마가 거부해, 자신의 측근인 니시무라 야스토시를 밀었지만 실패했다. 아마도 니시무라를 당선시켜서 막후에서 자민당을 이끌어보려고 했던 듯하지만 자민당 안에서는 니시무라의 총재선거 출마 선언에 웬 듣보잡이라는 반응이었다니... 망했어요

보수 정치인답게 민주당 각료들은 단 1명도 참배하지 않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했고,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로 불리는 시진핑이 일본을 방문할 때 덴노를 예방하자 이를 격렬하게 반대하는가 하면 중국을 나치즘에 비유하는 등 안티 중국 활동을 벌인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 일왕 사과 요구에 대해 '상식을 벗어난 행동이자 예의를 잊은 행동'이라고 맹비난했다. 물론 이 발언은 이명박 대통령이 나중에 '사죄 발언은 오해였다', '총리가 여러 번 사과하는 것보다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일왕이 말하면 쉽게 해결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라며 정정했으며 실제로 매우 심각한 발언이었다.[30]

한편 자민당은 다니가키 대표의 후임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데 일각에서는 아베 전 총리를 투표없이 대표로 추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은 자신의 보수신당에 아베의 참여를 요청하고 있어서 느닷없이 다시 일본 정계의 태풍의 핵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본인은 자민당에 남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11월에 열릴 듯한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단독 과반 확보까지는 못 가더라도 제 1당일 가능성이 유력한지라 차기 당대표로 거론받는 아베 입장에선 다시 총리를 할 절호의 기회이고 자신이 다루기 어려운 하시모토와의 연대보단 이쪽이 훨씬 낫기도 할 테니...


7. 2차 아베 내각[편집]


2012년 12월 26일 96대 수상 취임으로, 전후 요시다 시게루 이후 처음으로 총리직을 공백기(5년 3개월)를 두고 2번 재임하는 총리를 했다. 공백기가 길기로는 역대 4위로 1923년 9년 5개월만에 정권을 찾은 야마모토 곤노효에 이후로 89년 만에 최초다.(참고로 일본 총리직의 역사가 고작 130년이다) 이보다 조금 짧은 게 이토 히로부미의 1차, 2차 내각의 격차가 4년 3개월, 마쓰카타 마사요시의 4년 1개월. 야마모토 이후로 아베 이전 공백기가 가장 길었던 와카쓰키 레이지로가 4년. 참고로 역대 최장 공백은 15년 5개월의 오쿠마 시게노부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베처럼 잊혀졌다가 완벽하게 부활한 인물은 전후에 전무후무하다. 공백 뒤 2차 내각이란 기준으로 이번 중의원 임기 중 사임하지 않는다면 이토 히로부미(4년), 가쓰라 다로(3년)을 빼면 가장 긴 임기에 머물 수도 있다. 물론 공백이 아닌 단순한 2차 내각의 임기는 전후에도 긴 총리가 많다.


7.1. 집권[편집]



제96대 총리 취임 공식 사진

2012년 9월 26일 자민당 총재로 당선하고 11월 16일에 중의원이 해산해 2012년 12월 16일 치른 제46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공명당이 320석[31]이 넘는 의석을 확보하며 압도적인 승리로 96대 총리 및 아베 신조 내각이 탄생했다. 총리 정식 취임일은 2012년 12월 26일로 결정했다.

선거철인 2012년 11월, 일본에서 무제한 양적완화를 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기사. 그러면서 시라카와 마사아키 일본은행 총재를 제일 먼저 짤라버리겠다는 공약은 덤. 그리고 총리에 당선되자마자 제일 먼저 시라카와 마사아키 총재한테 파면을 통보한다.(...) 이에 대해 시라카와 마사아키는 물러나기 전에 후임자 결정때까지는 자리를 보전할 수 있다는 규정을 이용해 버틴다. 결국 일본은행 총재 시라카와 마사아키를 굴복시키고 무려 10조엔에 달하는 1차적 양적완화를 폈다. 뉴스. 2013년 3월 31일까지 임기인 시라카와 총재를 곧이어 물러나게 하고 아베 신조의 측근을 심어서 양적완화를 하겠다는 뜻을 더더욱 밀어붙일 듯하다.

96대 총리로 당선하자마자 '센카쿠 열도는 일본 땅'이라고 발표했다. 기사. 그리고 야스쿠니 신사수상 임기 동안 반드시 참배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기사.

대체적인 분석이, 아베 내각의 출현은 한국 입장에선 달갑지 않다. 과거사 문제나 독도 문제야 차치하고라도 무제한 양적완화를 내세운 탓에 한국과 일본이 환율 전쟁을 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우려가 있다. 한편으로는 아베 내각이 한중과의 관계 개선을 안하면 일본 경제에 악영향이리라는 우려도 나온다. 하지만 동아시아 외교에서는 매우 강경한 공약을 내건 아베인지라 한중과의 관계 개선이 썩 쉽지는 않으니 문제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아베가 과연 일본을 부흥시킬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 외조부 때부터 긴밀한 연을 맺던 박근혜 정부가 탄생했기 때문에 양자 사이의 친밀성으로 한일관계가 호전하라는 전망도 있다. 박근혜 당선인의 당선이 확정되자 아베는 박 당선인과 조속한 시일에 만나겠다는 의사도 보였다. 기사. 대놓고 "다케시마의 날 지정을 자기(아베) 임기 중에는 유보하겠다" 는 것으로 봐서 관계 개선의 의지가 정말 강한 듯 했다. 부인 아베 아키에의 한류 드라마 시청 재개 역시 관계 개선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걸 보여주는 듯. 중국을 자극할 우려가 큰 센카쿠 열도 공무원 상주 공약 역시 유보했다. 그야말로 집권하자마자 외교정책 관련 공약을 하나도 지킬 생각이 없음을 천명하는 패기를 보였다.

12월 21일에 아베는 박 당선자에게 직접 친서를 보내고 누카가 후쿠시로 전 재무상을 특사로 파견하겠다는 발표를 했지만 박 당선자측에서 주말이고 해서 일정이 안 맞으니[32] 아베가 총리에 정식 취임하는 12월 26일 이후에 일정을 조율하자는 입장을 밝혔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아베가 일방적으로 한일 관계 개선에 나서서 박 당선자 측이 부담을 느꼈냐는 분석이 나왔으나 박 당선자 측은 일정이 안 맞았을 뿐 정치적인 이유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12월 26일 이후에 아베의 특사가 박 당선자를 방문할 것으로 보인다. 2013년 1월 4일에 방문하였다.

12월 25일 내각 주요 인사를 내정, 한국에 각종 망언을 한 바 있는 아소 다로 전 총리가 재무부총리에 내정되는 등 극우 인사들을 대거 기용해 앞으로의 한-일 관계가 미궁 속에 휩싸였다. 하지만 12월 27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가 밝혔던 무라야마 담화를 이어갈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기사. 이로써 선거할 때 내놨던 외교 공약은 전부 폐기처분 확정. 다만 고노 담화 수정 검토라든가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추진하겠다고 밝혀 이것이 앞으로 한일 관계에 암초일 가능성은 있다.

그 밖에 탈원전 노선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혀 사실상 원전 재가동을 밀어붙일 개연성이 높아졌다.

일본 국민들은 '닥치고 경제나 살려' 라는 여론이 큰 편이다. 평화헌법 개정에는 약 50% 정도가 반대의사를 나타냈고 집단적 자위권 행사도 30% 정도가 반대의사를 나타냈다. 이것은 우경화 바람에 반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경제가 어려운데 쓰잘데기 없는 데에만 신경 쓴다는 쪽에 더 가깝지만, 아베 내각은 연립여당인 공명당도 신경써야 하기 때문에 이런 국민적 여론을 의식한 듯 우경화 정책을 보류하거나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여갔다.

물론 아베 내각의 행보가 우경화를 절대 포기하지는 않으리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런 분석에 힘을 싣는 상황이 나왔는데 12월 31일 산케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베 총리는 적절한 시점에 역사 문제에 입장표명을 하리라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을 언제 발표할지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대체적인 분석으로는 무라야마 담화는 그대로 두고서 새로이 아베 담화를 발표해 '침략전쟁이 피해를 준 것은 반성하겠지만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임을 드러내리라는 이야기가 있다. 발표 시점은 당장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일본 여론도 좋지도 않고 한국의 박근혜 정권, 중국의 시진핑 정권 등 새로 출발하는 정권들과 구태여 초장부터 각을 세우는 무리수를 두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담화의 발표 시점은 일본 패망 70주년이 되는 2015년일 공산이 커보인다고. 2015년은 무라야마 담화른 발표한 지 20주년인 해이고 한일 기본조약(한일협상) 체결 50주년이기도 하다.[33] 장기집권 기반을 구축해놓은 뒤에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드러내겠다는 복안으로 보여 우려를 낳는다.

제2차 아베 내각이 처음 성립되었을 때 아베 총리가 다시 일본 경제의 부흥기를 가져오겠다고 하자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아베 총리가 심도있는 경제 정책을 펴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고 사실은 경제에 관심이 적은 사람이라고 비판하여 잠시 논란이었다.

7.2. 참의원 통상선거[편집]


2013년 3월 구로다 하루히코일본은행 총재에 지명하고 4월 1일부로 앉혀서 아베노믹스 기조를 본격화했다.

2013년 7월의 제23회 일본 참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 참의원 선거에서 이겨보기 위해 일본 엔화를 더더욱 떨어뜨리는 엔저 정책을 밀어붙였다. 이른바 아베노믹스. 각종 양적완화 및 경기부양책을 시행하는 것은 물론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해서 지속적으로 미국 달러유로화를 사들였다. 이에 따라 엔-달러 환율은 20% 넘게 올랐고(엔화 가치 하락) 일본외환보유고는 급속도로 늘어났다. 심지어 닛케이지수는 30% 뛰어올라 14000 포인트를 찍었다. 이런 일방통행 행보가 일본인들의 지지를 얻은 때문인지 지지율이 고공행진이라 참의원 통상선거에서의 압승이 쉬울 듯하다. 설문조사 결과 42%는 자민당에, 13%는 일본 유신회에, 7%는 민주당에 투표하겠다고 응답.

참의원 선거에서 낙승이 예상됨에 따라 아베 신조 정권에서 우익 성향을 조금씩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2013년 2월, 일본 유신회다함께당 등에 제안하여 헌법 개정안 발의 요건을 중의원, 참의원 2/3 서명에서 과반수 발의로 바꾸자는 개헌안을 내기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기사.

심지어 안보 법제 간담회의 야나이 슌지 위원장은 집단적 자위권에 '한국과 호주도 들어간다'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즉, 한국과 호주에 대한 공격도 일본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서 자위대를 파병하겠다는 것. 다만 일본이 한미일 동맹체제에 들어가 있음을 감안하면 이전부터 추진중이던 것이기는 했고, 무엇보다 두 나라 모두 일본의 육상자위대라면 모를까, 해자대와 공자대는 필요한 입장이다.

게다가 미일관계 복원을 외치면서도 도쿄 전범재판을 '승자의 판단으로 단죄한 재판'이라고까지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한 마디로 저 말은 '미국이 이겼으니까 지들 마음대로 처단했지?'라는 뜻이라서 일본 안에서도 미일 관계에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2013년 3월 15일 TPP 협상에 정식으로 참가하겠다고 발표했다. 노다 요시히코총리가 참가하겠다고 선언했다가 보류한 뒤 다시 참가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2013년 4월 23일 기사. "침략의 정의는 학계에서도 전세계적으로도 확실치 않다며 국가 간의 관계에서 어느 쪽에서 보는가에 따라 다르다"고 말해 논란이다. 이런 극우적 발언에 일본 안에서도 '외교 관계가 가뜩이나 나쁜데 제정신이냐'며 비판했다.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을 침략이 아닌 '진출'로 여기는 극우파의 역사인식을 대놓고 까발린 셈. 극우파 정치인들의 대규모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함께 외교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킬 듯하고 이미 한국과 중국은 '이게 무슨 개소리야?'라며 격렬한 반응이다. 아사히신문은 '지지율 70%에 취해서 국제관계를 까먹었냐?'며 우려했다. 중의원 선거 이전에 무라야마 담화를 부정할 의사는 없다며 눈치를 보다가 압승이 확실하자 강공으로 나섰다는 분석도 있다.


4월 24일에는 '서울대 교수가 일제시대에 인구가 증가했다는 연구를 내놓은 바 있다'라면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들어 일제 통치의 정당성을 설파하냐는 논란이 있다. 그리고 4월 28일 미군정이 끝난 날을 기념해 주권 회복의 날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기념식을 거행하리라고 밝히는 등 우경화 폭주를 이을 기세다. [34]

끝내 미국까지 나서서 비공식적으로 일본의 우경화 폭주에 우려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한중일 3국 재무장관 회담까지 취소된 데다가 일본 내에서 심지어는 보수적 언론인 요미우리 신문까지 신중론을 제기하자 아베도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였다. 4월 26일, "역사 인식문제가 정치외교 문제로 비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발언을 통해서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 것. 그러나 이런 행보는 일단 한 발 물러서는 척해서 현재의 국면을 타개하려는 제스처일 가능성이 높고 적당히 시기를 봐서 다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도 일본 안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니 아베가 폭주를 이으리라 생각해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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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식 전차에 오른 모습

4월 27일, 니코니코 동화[35]가 주최한 박람회인 '니코니코 초회의 2'[36]를 찾아 "반드시 강한 경제를 되찾겠다. 지금 일본 영해와 영토에 도전이 이어지지만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37] 이어 자위대와 주일미군 부스에 방문해 군복과 헬멧을 쓰고 육상자위대 최신 전차 10식 전차 위에 오르기까지 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전차에 탄 총리는 아베가 전후 최초라고 한다. 당연히 군국주의 부활이라는 한국과 중국의 우려가 더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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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노 헤이카 반자이!

4월 28일, 주권 회복의 날 행사를 강행했다. 심지어 덴노 부처까지 동원해서. 이 때 한 기념사가 가관으로 "일본을 강한 나라로 만들어 전세계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나라가 되도록 하자". 게다가 행사 말미에는 패전 이후 공적인 장소에선 금기시하던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도 외쳤다. 그러나 우경화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알려진 아키히토 덴노 부부는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나가서 불쾌감을 표현했다.

침략의 정의가 나라마다 다르다는 발언에 내각 차원에서 표현부족으로 벌어진 오해라고 국회에서 야당이 질의하면 해명할 계획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개헌을 앞두고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행보란 분석이다.

2013년 5월, 미국 의회조사국이 아베의 견해에 침략을 부정하는 수정주의자의 견해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미국의 국익을 해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아베 내각이 침략사실을 부정한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다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고 한다.

5월 5일에는 도쿄돔에서 프로야구 시구[38]를 하면서 등 번호를 96번을 달고 시구를 했는데 이는 일본 헌법 96조의 개헌 발의요건을 완화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는 해석이라 어그로라는 비판을 받았다. 아베 총리가 96대 총리이기 때문에 썼다는 해석도 있어 당시에는 과민 반응이라는 의견이 있었지만 현재의 행적을 보면 개헌 의지 맞다. 어차피 교진의 슈퍼스타 아베도 있는데 뭣하러 96번 같은 생뚱맞은 번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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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번 훈련기에 오른 모습

여기에 더해서 2013년 5월 12일, 아베 총리가 미야기 현의 항공자위대 기지를 방문해서 블루 임펄스 곡예비행단을 시찰했다. 이때 그는 훈련기 조종석에 앉아서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는데 이 비행기의 번호는 731이다. 관련 기사. 이게 얼마나 미친 도발적인 행위인지는 731 부대 항목 참조. 어쩐지 731이라는 숫자 볼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했다 당장 중국은 명백한 도발이라고 맹비판했고, 한국에서도 메르켈 독일 총리가 하켄크로이츠 문양이 달린 비행기를 타는 일과 같은 행위라는 맹비판이 쏟아졌다. 우연히든 의도적이든 도발적 행위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이후의 폭주 행각들을 살펴보면 의도적인 도발임이 기정사실이 되었다.

2013년 5월 14일,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가 문제가 되고 있으니 새로운 시설을 만들어야 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쉽게 말해서 야스쿠니 신사에 전범들을 그대로 두겠다는 것이다.

2013년 7월 제23회 일본 참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 자민당은 아베의 높은 지지율를 의식해서인지 아베와 부인 아키에와 친분이 있는 인사들을 대거 공천했는데 이를 두고 정실 공천이라는 논란이 있다. 공천을 받은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가관인데 에이벡스 소속 가수인 이토 요스케, 올림픽 체조 금메달리스트 츠카하라 미츠오, 개훈련 전문가 다나베 히사토 등은 모두 아베의 부인 아키에가 추천한 인물들로 알려졌다. 이토 요스케는 아키에의 아버지가 사장으로 있었던 모리나가 제과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고 츠카하라 미츠오는 아키에와 술친구라고 하며 다나베 히사토 또한 강아지를 좋아하는 아키에와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사실상 공천에 총리 부인이 개입한 모양새라 뒷말이 무성한 듯하다. 심지어 이토 요스케는 자민당 간사장인 이시바 시게루조차 "그게 누구지?"라 했다고(...) 아베 또한 자신의 고향 친구인 기타무라 츠네오를 공천한것으로 알려졌다. 이럼에도 상대당인 민주당은 인지도가 부족한 노조 출신들을 대거 공천했고 그나마도 공천을 포기하고 사퇴하는 인물들이 속출했다고 알려졌다. 개나 소나 공천해도 자민당의 승리가 유력하니, 일본 정치가 얼마나 개판으로 돌아가나 짐작할 만하다.

2013년 5월 19일,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야스쿠니 신사와 알링턴 국립묘지가 뭐가 다른가라는 망언을 했다. 너네는 전범을 묻어두거든? 한국과 중국에도 비판의 날을 세웠는데 몇 년 사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별다른 항의를 하지않다가 갑자기 이에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뭐하나 아베 안 잡아가고

이런 가운데 치른 지방선거에서 자민-공명 연합이 6개 선거구에서 3개 선거구 당선에 그쳐서 자민당 내에서 충격적인 결과라는 지적이 있다. 특히 자민당은 사이타마 시장 선거에 아소 다로 부총리와 이시바 시게루 간사장까지 지원유세에 투입하면서 아베노믹스의 성과를 홍보했으나 자-공연합이 내세운 후보가 현직 시장에게 패배했다. 아오모리와 나고야에서도 현직 시장들에게 패배했다. 득표 결과를 보면 공명당 지지층의 80%가 자-공연합에 투표했으나 자민당 지지층의 55%만이 자-공연합에 투표했다고 드러났다는 점에서 공명당이나 자민당이나 크게 우려하는 실정. 물론 이런 결과는 자민당이 고령의 지역 본부장이나 간사장을 공천해 비교적 젊은 현직 시장들에 맞서기에는 신선미가 떨어졌다는 지적이 많지만 이런 결과는 자칫 7월 참의원 선거에도 영향을 미치겠다는 우려가 나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베노믹스의 성과가 지역까지 못 퍼졌다는 지적도 있다.

이런 가운데 천조국에서 제프리 베이더 전 NSC 선임보좌관은 한 강연회에서 한 기조연설에서 "아베 정권이 무라야마 담화를 수정하려 든다면 미국은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베이더 전 선임보좌관은 아예 하시모토 도루의 위안부 망언에 "제정신이 아닌 짓"이라고까지 했다고. 그러나 평화헌법 개정에는 일본의 판단이니 미국이 간섭할 일은 아니라는 모순적인 발언도 했다. 평화헌법 개정과 우경화는 별개로 보는 셈.

이와중에 치른 도쿄도의회선거에서 자민당과 공명당이 전원 당선 기록을 세우면서 향후 참의원 선거에서 개헌선까지는 몰라도 안정 과반은 확보할 것으로 예상된다.

제23회 일본 참의원 통상선거 첫번째 유세지역으로 후쿠시마를 선택하였다. 이 부분에서 방사능 유출 사고가 터졌을 때 자기 지역구인 이와테를 버리고 도쿄로 도주한 오자와 이치로 일본 생활당 대표와 더욱 극명히 대비되고 있다. 기사


7.3. 2016년[편집]


그동안 밀어붙였던 아베노믹스 정책 중 하나로 도쿄 23구 전체를 투자촉진구역, 규제완화 시범구역으로 지정하는 승부수를 띄웠는데, 이에 일본 기업들 위주로 도쿄 도심 지역에 대규모 재개발, 재건축 사업을 진행중이다. 미쓰비시 그룹은 일본은행 맞은편에 일본 최고높이 마천루인 높이 390m, 100층 건물을 짓겠다고 계획을 잡을 정도.

8. 아베 내각 & 자민당 지지율[편집]


※ 참고사항.
공명당, 공산당, 오사카유신회(유신계열)의 세 정당은 평소 여론조사에서는 매우 낮은 지지율을 보이지만, 선거만 했다하면 비례대표에서 10% 이상을 찍곤한다. 그러므로 여론조사 지지율이 낮다고 과소평가할수는 없다. 사실 그 두꺼운 무당층이 꼭 투표하지 말란 법도 없다.

  • 2016년 5월
NHK 여론조사 (1월9일~11일, 전국 20세이상. 대상 1618명. 응답자 1043명) #
1. 내각 지지율 : 지지한다 45% vs 지지하지 않는다 36%.
2. 정당 지지율 : 자민 37.0%, 민진 8.2%, 공산 4.1%, 공명 3.7%, 유신 1.3%, 사민 0.6%.

9. 외교 정책[편집]


아베 신조/외교 정책 문서 참조.


10. 역사적 성향[편집]


전형적인 일본 극우. 우파 오브 우파이자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을 생략할 만큼 우파이다. 이말은 매우 보수적이란 것. 외조부의 영향을 받아 다른 일본 우익들처럼 구 일본제국은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미국이 쓸데없이 끼어들어 어쩔 수 없이 전쟁을 그만두었다[39]고 생각하며 일본이 침략하면서 벌인 전쟁범죄에 대해서도 죄라는 인식이 희박한 것으로 보이고, 일본의 이익을 위해선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로 나오고 있다. 물론 미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등 2차 세계 대전 관련으로 미국을 자극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저자세를 유지하는 한편 한국, 중국, 대만 등 만만한 아시아 국가들에게는 역사왜곡과 전쟁 불사, 헌법 개정 등 엿을 한가득 선사하고 있다. 아베 : 소~옥~죄? 그게 뭐에요? 아베는 그런거 몰라영~♥ 대한민국, 중국, 북한 : 아오! 저 개xx!!

다만 제국주의 시대의 회귀를 바란다는 말을 듣는 아베 본인과 별도로 일본 내부 여론은 제국시대로의 회귀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11. 경제정책[편집]


자국 국민들조차 상당한 반감을 가지는 온갖 문제에도 불구하고 아베 정권이 이렇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


적극적인 친서방 정책을 바탕으로 G7에게 암묵적 동의를 받아 실시한 아베노믹스는 확실히 큰 성과를 얻었고, 경제성장률이 아예 정체 상태인 박근혜 정부는 확실하게 앞질렀다고 볼 수 있다.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일본이 부활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주요 수출품이 겹치는 일본을 경계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

경제와 친서방 행보를 동시에 잡는 정책의 일환으로 당초 일본은 미국이 권유하는 TPP(다자간 FTA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참가 여부를 놓고 저울질했다. 그러나 당시 내각이 민주당 내각인 데다가 농가의 타격이 우려인 만큼 농촌을 기반으로 하는 자민당의 반대가 많아 참여에 소극적이었으나 아베 총리는 높은 인기를 기반으로 TPP 추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2013년 4월 TPP 참가국들의 참가 협상 승인을 받았고 # 미국은 자국 의회에 정식으로 일본의 TPP 협상 참여를 통보하였다. # 이것으로 한국의 FTA 행보(특히 한미 FTA)에 뒤처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던 일본이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TPP가 성사되면 일본의 국내 총생산은 0.66%(3조 2000억엔)이 증가할 것이고, TPP 참여국 가운데 미일만으로 90%의 경제 규모를 차지하는 만큼 환태평양 경제권의 리더로 재도약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 수치조차 보수적인 예측으로 피터 페트리 미국 브랜다이스대 교수는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TPPA 참여는 일본 경제 생산성을 높여줄 것"이라며 GDP를 10조엔(약 98조원) 정도 늘리는 효과가 있으리라 추산했는데 이것은 일본 정부의 예측치 3조 2천억엔의 3배를 넘는 수치다. # 일단 기대치는 그런 상황. 또한 일본의 갈라파고스화한 시장과 규정을 TPP 참여로 단숨에 글로벌 규격에 맞추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노릴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정책은 긍정적인 측면만큼 부정적인 측면도 무시할 순 없겠지만, 일단 일본 국민들은 긍정적으로 평가한 모양이다. 아베 정권은 2013년 상반기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70%를 넘는 고공 행진을 하는 중.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베식 경제개혁은 좋게 끝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이 만만치 않다. 양적완화인 경제부양정책은 필연적으로 장기금리상승으로 이어지기 마련인데 일본 경제는 구조적으로 국채금리상승에 취약해[40] 미래의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또한 세계시장 사정이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 엔화 약세가 일본의 무역수지 회복으로 안 이어진다. 애초에 (자국 내의 국채지만) 빚더미 나라가 돈을 더 풀어봐야 국민만 더 가난해질 뿐이다. 그렇지만 일본인들은 아베를 지지하겠지, 안될거야 아마

일본 니케이 지수는 아베가 본격적으로 아베노믹스를 밀어붙이자 하루에 3~4%가 넘는 급상승세를 펼쳐 5년 4개월만에 15000선을 돌파했다. 그러나 2013년 5월 23일, 중국 제조업 지수(PMI) 하락과 폭등세에 대한 반동 때문에 2년만에 최대급락폭인 7%까지 떨어지면서 불안감을 나타내었다. # 그러나 6월 10일에는 다시 5% 증가. 이후 2013년 11월 말 다시 급반등하면서 15000선을 재돌파한 뒤 안정했다. 2014년 2월 18일 지금 기준으로는 15000선 밑에 있다. 2015년 5월 6일 기준 19500이 넘는다.

사족으로 통화 정책은 그 연구를 가장 활발히 하던 1980년대에도 한 국가의 경제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정책으로서는 연구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미국에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경기부양책으로 대대적인 세금 감면과 기술개발의 정부 보조 등을 약속하는 와중에 이러한 조세 정책만으로는 자본이 제대로 나타날 때까지 지나친 시간이 걸린다는 비판을 받자 (Timing Problem), 보다 단기적인 대책으로 통화 정책이 부상한 것.

자세한 내용은 아베노믹스 참조.


12. 기타[편집]


발음, 특히 か행(카키쿠케코)이 아주 나쁘다.



그의 발음을 단적으로 알 만한 영상. 아베 지지자들도 이걸 보고 어떻게 못하냐며 한탄했다.

それが、本来の日本の姿です。
取り戻す!取り戻す!取り戻す!
日本を取り戻す!
皆様と共に総力で!
自民党!
세계에 리더를 선도하는 것. 좋은 교육과 언제나 안심이 되는 것. 그것이, 본래 일본의 모습입니다.
되찾는다! 되찾는다! 되찾는다!
일본을 되찾는다!
여러분과 함께 총력으로!
자민당!

본래는 이런 말이지만 2ch에서는 저 영상을 보고

それが、ほんあいのりっぽんのすあたです
とりもろす!とりもろす!とりもろす!
いっぽんをとりおろす!
みなさんともにソウルまで!
自民党!
그것이, 봉내 릴본의 모읍입니다
닭고기도 돼지고기! 닭고기도 돼지고기! 닭고기도 돼지고기!
닐본을 끌어내린다!
여러분 모두 함께 서울까지!
자민당!


이렇게 해석(...) 졸지에 서울 관광 홍보영상...이 아니라 서울까지 진격하자는 뜻인가? 그동안의 행적을 보면 서울까지 진격하겠다는 것도 일본을 끌어내리겠다는 것도 진심인 듯하다. 이제 보니 발음이 나쁜게 아니었네

의외로 영어를 잘한다! 외신에선 "일본인들은 보통 영어 못하는데 잘한다"가 기본적 견해다.


총리 취임 뒤로 총리 관저에 들어가질 않아서 총리 관저의 귀신 때문에 못 들어가냐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실제로 일본 총리 관저에서 1932년 5.15 사건이누카이 츠요시 총리를 비롯해 여러 명이 피살된 이후로 이곳에서 전직 총리들이 귀신을 봤다는 소문이 있었다고.[41] 국회까지 이 문제를 거론하자 아베 총리는 귀신 때문에 관저에 안 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소문은 알고 있다고 답변했다. 한편으로 6월 1일 요미우리 TV 방송에서는 모리 요시로 전 총리가 관저에서 귀신의 다리를 봤다는 이야기를 해서 귀신 때문에 못 들어가냐는 소문은 식을 기미가 없다.

나무위키에 있는 역대 일본 총리 항목 가운데 가장 내용이 방대하다! 총리 가운데 한국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인물인 이토 히로부미고이즈미 준이치로 항목보다 더 길다! 게다가 그의 정책인 아베노믹스는 따로 항목까지 있어 아베노믹스 항목까지 더한다면 나무위키에 개설한 일본 정치인 가운데 내용이 가장 많다. 그에 건 한국의 높은 관심을 반영한다고 볼 만하다. 비판이 반 이상이라 특이한데(...) 사실 아베 총리 스스로 부른 측면이 크다. 2013년 여름까지만 해도 이 항목은 최소한 객관적인 업적을 꽤 호의적으로 적었다. 그랬던 항목이 현재 이 모양임은 그만큼 짧은 기간에 수많은 병크를 터뜨린 탓이다.

페이스북을 매우 적극적으로 쓰는 총리로 하루 평균 1.8개의 페북 소식을 올린다고. '인터넷 재상이 분?'이라고 불릴 만큼 독보적 인기를 누리는데 늘 휴대하는 태블릿 PC로 전직 관료, 현직 야당 의원 등을 심하게 까내리면서 호평과 혹평을 함께 받는다. # 참 문제 많은 행태지만 일본의 보수와 젊은 세대들은 열광한다고. 특히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아베는 "폭거다. 점령하는 쪽이 도발적 행동을 하면 몰상식하다"는 글을 올렸고 반나절 만에 2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좋아요"를 연발했다.(...) 여하간 일본에선 대단히 보기 드문 유형인 인터넷 활동이라, 분명 대중적 인기를 끄는 총리다.
최일구: "사람이나 옷이나 아베가 문제다."[42]
김진철: "아베... 아베?... 할 말이 없다..."[43]

보수 성향 정치인임에도 뜻밖에 한국계라는 떡밥이 있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보통 넷 우익들의 한국계 드립은 하토야마 유키오간 나오토같이 진보 성향의 정치인에 쳤지만 아베 신조는 극우 성향임에도 한국계설이 나돈다. 대표적으로 참의원 선거 때 파칭코 업계에게 5천만엔의 정치 자금을 받았다는 루머가 있었는데 파칭코나 야쿠자 정치 자금설은 어느 정치인에게나 흔하니 비방성 루머로만 그쳤지만 한국계 떡밥을 결정적으로 불지핌은 아베 신조 1차 내각이 나온 2006년 9월 주간 아사히가 아베가에서 40년간 가정부로 일해온 구보 우메와의 인터뷰에서였다. # 인터뷰에 따르면 아베 신조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가 스스로 "자신은 조선(인)이다. 조선(私は朝鮮(人)だ。朝鮮)" 이라 말한 적이 있었으며 입관식 때 본 그의 골격이 조선인 체형이었다고. 출처가 어디까지나 가십 기사로 먹고 사는 주간 아사히이니 신뢰성에 의문은 있다. 이것 말고도 그의 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와,[44] 그들의 피를 이어받은 아베가 한국계라는 주장도 있다.

역시 같은 강경보수끼리 통한다고 조갑제 기자와 친분이 깊다. 이미 오래 전(2005년 간사장 시절)부터 서로 면식과 인터뷰를 한 경험이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2013년 집무실에서 인터뷰(녹음)도 했다. 조갑제 닷컴의 기사. 여하간 양국 관계가 나쁜 상황에서 한 아베 재취임 이래 한국언론 최초의 인터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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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5월 1일 현역 수상으로써는 이례적으로 일요 아침 예능 방송인 와이도나쇼(버라이어티성격의 시사프로)에 출연하였다. http://sashihara.blog.me/220698864084
현 정권에서 보육원에 대한 정책 방향을 비롯해 인터넷에서의 비방이나 국회에서의 야유에 대한 생각, 그 밖에 음주와 관련된 에피소드등을 진솔하게 이야기 하였다.
음주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과거 고베 제강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시절, 대장염으로 인해 전혀 음주를 하지 못했지만 야유회에는 참여했는데, 바로 운전수 역할이었다는 얘기.

미국에서도 드디어 까이기 시작했다. 그와중에 도조 히데키 의 의문의 1패


12.1. 가정 내 야당(?) - 아키에 여사[편집]



부인 아베 아키에 여사는 한류 팬으로 유명한 걸로 알려졌는데 박용하가 자살한 뒤에 부부 명의로 조화를 보내고 부부가 함께 조문도 했다. 2012년 한일 관계가 악화되면서 남편의 정치적 위치 때문에 본의 아니게 어쩔 수 없이 한류 드라마 시청을 끊었다(역시 아베의 음모인가?)고 밝혔으나, 한일 관계가 다시 진정국면에 들어가자 다시 한류 드라마 시청을 재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자기 페이스북에 한국 뮤지컬을 소개하고 감상한 글도 올렸다.

가톨릭계인 세이신(聖心) 여자학원 출신. 하토야마 유키오의 부인 미유키 여사 이래로 가장 활동적인 총리 부인이다. 도쿄 금융가 뒷골목에서 우즈(소용돌이)라는 유기농 선술집도 열었으며[45] 활발한 페이스북 활동 속에 TPP나 원전 노선[46]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히는 등 진정한 가정의 야당인 모습을 보인다. #

애초에 1기 임기 취임 당시에도 "첫 해외 순방길에 나섰을 때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아키에 여사가 총리의 손을 잡는 모습이 공개돼 대중을 놀라게 했다", "아침에 헝클어진 머리에 졸린 표정을 한 총리의 모습과 늦은 밤 소파에 앉아 파자마 차림으로 빙과류를 먹는 모습" 등을 대중에 공개해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켰고 "한 번은 아베 총리가 젓가락으로 고기 조각을 '로이'라는 이름의 닥스훈트 애완견에게 먹이는 사진을 아키에 여사가 게재한 적이 있다"고 한다. 정치적 의견 차이가 금슬과는 전혀 무관한 모양. 그녀의 이런 활동이 정치적으로 도움을 주는지 평가는 엇갈리지만, 적어도 아베의 강성 이미지를 완화시키는 데는 톡톡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듯하다.

아베 퇴임 기간 미얀마의 교육정책에 석사 논문도 썼을 만큼 뛰어난 인재다. 다만 불임이며[47] 개인 자격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전쟁 반대와 평화 기원이란 목적임을 내세우는, 즉 아베의 강경함을 희석시키는 보완적 역할인 그녀의 역할이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도긴개긴이라고 보긴 어렵고 강온차이가 있으나 상보적이며 전면적 반대는 아니라고 봐야 옳다.

남편과는 어느 정도 다른 정치적 입장을 보였기 때문에, 둘 사이에 갈등이 있었으며 어떨때는 부부싸움까지 했다고 직접 고백하기도 했다. #

2014년 3월에 일본 외무성 관계자들이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이 모여사는 "나눔의 집"을 몰래 방문해 일본 정부의 입장만 일방적으로 발표하고 돌아간 가운데 나눔의 집 측에서 이 관계자들에게 아키에를 초청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제안을 아베와 그녀가 어찌 생각할지는 미지수. 생쇼하려고 이용하지 마라

2015년에 결국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서, 야스쿠니 문제만큼은 둘 다 한통속이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이게 증거 자료다. 그런데 그런 아베 아키에와 한일 혼혈출신인 가수 호테이 토모야스와 불륜설이 터저나와 역시 한류팬 일본 극우들은 멘붕에 시달리는 중이다. 기사 일각에선 아베 신조를 보고 국가는 커녕 가정도 제대로 못다루는 남자라는 비아냥이 나오기도.

13. 저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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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베 신조 대론집 : 일본을 이야기한다(安倍晋三対論集 日本を語る) : 2006년 4월 출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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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로운 나라로 아름다운 나라로 완전판(新しい国へ 美しい国へ 完全版) : 2013년 1월 출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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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권 모두 2015년 현재 대한민국에는 번역 출간되지 않은 상태이다. 출간되면 불쏘시개 분서인증용으로 많이 팔릴 거 같은데 노이즈 마케팅하기 좋아보이는 책들이다 저 책은 해로운 책이다

14. 관련 웹 사이트[편집]



15. 사망[편집]


해당 문서 참조


[1] 여담이지만 저 당시에 네티즌들 반응이 고이즈미보다 낫네, 차라리 아베가 일본을 통치했음 한다 등의 반응이 대다수였지만 이제는 거듭된 극우 행보들로 그런 말은 사라진지 오래다.[2] 이 때문인지 일부 넷우익들에게 친한파(...) 의혹을 받고 있다. 대다수 한국인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야기다.[3] 1924년 ~ 1991년, 신문기자 출신의 자민당 정치인. 장인 기시의 눈에 띠어 고속승진을 했고, 이게 총리가 거의 다와 갈 뻔 했을 때 건강상에 문제로 총리가 되지 못했다. [4] 미국, 영국, 호주등 영미권, 유럽연합 등[5] 러시아, 중국[6] 서방 국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동남아 상당수 국가에 대해서도 배상이 끝났으며, 당시 조약에 참여하지 못한 국가들도 한일기본조약 등으로 배상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하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관심이 적다. 자기들 문제도 아니니까.[7] 심지어 같은 나라의 천황아키히토이 인간과 사이가 굉장히 좋지 않다고 한다. 아키히토 천황이 생전양위를 결정한 배경에 아베 정권의 선거 승리가 있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니 정말 사이가 안 좋은 것.[8] 한국은 일명 '*소기업'이라고 불리는 것과 달리 일본의 중소기업은 소수의 블랙기업을 제외하고는 한국보다 처우가 훨씬 좋은 편이다.[9] 여기에는 사실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일본 경제가 안정 궤도에 들어선 게 맞다는 의견의 논거는 시중에 풀린 통화량이 늘었다는 건데, 이건 사실 중앙은행에서 의도적으로 돈을 풀면 늘어나는 수치이다. 반면 정작 일본이 직면한 가장 큰 과제인 노령인구 문제에 있어서는 연금 사태 등 상당히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10] 물론 이 부분에서도 독보적인 회계부정을 저지른 부실기업에까지 거침없이 투입되는 한국 연기금은 몇십년 뒤 지급불이행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지만 일본 연기금인 GPIF는 워냑 규모도 크고 지켜보는 눈도 많으며 관료가 한몫 챙겨먹을 수 없는 특유의 시스템 덕분에 상당히 투명하므로 한국보단 사정이 낫다.[11] 일본은행 쪽 인사들이 자민당에서 요구하는 정도의 양적완화는 시행할 수 없다고 버티고 있던 걸 당시 현직이던 시라카와 총재의 모가지를 날려가며 밀어붙였다. 그 때문에 오히려 총리가 강경파인 것이 이로울 수 있다는 의견들이 꽤 많이 있다.[12] 작년 분석은 연 1.75%였다.[1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8359902[1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8436512[15] 특히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은 2015년 아베 총리의 방미 당시 미국의 최고급 환대와 더불어 최대의 외교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일본과 미국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최상의 상태로, 이것만으로도 아베 총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다. 심지어 아베 총리를 비판하는 측에서도 이것만은 잘 했다고 칭찬할 정도이니 말 다했다. 일본 입장에서는 미국과 사이 좋아서 나쁠 게 전혀 없으니.[16] 아버지와 형이 의원직(중의원인지 참의원인지 모르나 자민당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음)에 있었음. [17] 할아버지부터가 의원이었으니까.... [18] 집안빨 분야의 끝판왕. 심지어 본국의 발음조차 틀리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그리고 오타쿠 [19] 일본은 '개인의' 정치적 텃밭 물려주기가 굉장히 심하다. 지역유지, 토호들로 구성된 사조직(후원회)에 이권을 몰아주고 선거때 정치자금과 고정표를 보장받는 식으로 정치를 하다가 은퇴하면서 자신의 아들, 사위 혹은 비서관에게 사조직을 그대로 물려주는 식이다. 물려받은 사람도 사조직을 기반으로 편하게 당선.[20] 한국 정계에서도 어느정도 집안빨로 먹고 들어가는 일이 있긴 하지만, 일본에서는 이러한 일이 유독 많이 일어나고 있다. 물론 일본은 한국보다 여러 면에서 선진적인 부분이 많긴 하나 정치 면에서는 한국보다도 후진적이라 볼 수 있는 것. 참고로 말하자면 비교적 과격 항쟁이 적다고 알려진 일본에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정부에서 투입한 과격파 극우 단체와 야쿠자까지 격파하고 총리를 물러나게 만든 일이 있었는데, 이 총리가 바로 아베 신조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이다. 일단 아베가 뽑힌 이유는 비록 문제가 있어서 국민들에게 쫓겨나긴 했지만 망해가던 경제를 살리는 등 유능한 모습을 보였던 기시의 외손자였기 때문인 것이다. 일단 경제가 위태로운 상황에서는 경제를 살릴만한 인물이 필요할테니. 여담이지만 과거에 기시 내각에 맞서 시위에 참여했던 한 노인은 현재 아베의 행보를 보면 기시 전 총리가 떠올라 불안하다는 뜻을 밝혔다. 헌데 더 큰 문제는 정부에 불만을 품은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와 목청을 높여가며 정부에 맞서던 옛날과는 달리 요즘 젊은이들이 너무 정치에 관심이 적어졌고, 그나마 관심있는 젊은이들은 거리에서가 아니라 SNS 상에서 정부 비판글 올리기만 바쁘고, 정작 선거때가 되면 '아, 뽑을 사람이 없넹'하고는 투표를 안하는 탓에 결과적으로는 아무 것도 개선하질 못한다는 언급도 했다...알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건 지역정당이 독점하는 대한민국 호남영남 지방에서 흔히 일어나는 문제다.[21] 아직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지도 않았음에 불구하고 일본이 조선인에 대한 재판을 감행한 사건. 이것만이어도 엄청나게 큰 문제가 되는데, 당시 구라치 데츠키치 외무성 정무국장이 정부의 지시를 일본 사법부에 중개하여 실행하도록 한 것도 큰 문제가 되었다. 이는 행정부가 사법부의 독립성을 사실상 짓밟은 삼권분립의 원칙을 심각하게 침해한 것이기 때문. 하긴 이 당시 군국주의제국주의, 파벌에 미쳐돌아가던 일본에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대응을 기대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긴 하다.[22] PD수첩은 아베 신조가 기시 노부스케와 어릴적부터 생활하면서 기시와 요시다 쇼인의 사상을 그대로 흡수해 지금처럼 극우인사가 된 것이라고 추정기도 했다.[23] 물론 요시다 쇼인은 정한론외의 다른 이론이나 능력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이중적인 인물이긴 하다.[24] 도쿄도 무사시노시 소재[25] 이건 어찌 보면 그의 컴플렉스인데 세이케이 대학은 일본에서도 3류로 대접을 받는 곳인데, 그마저도 일본 특유의 중고일관제로 들어갔다. 게다가 도피유학 같은 미국유학도 졸업도 결국은 못해 지금도 일본에선 그의 학력을 두고 비아냥이 많이 나오고 있다.[26] 재미있게도 아베의 후임으로 총리를 한 후쿠다 야스오 총리의 아버지다.[27] 전문은 다음과 같다.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원폭 투하가 많은 인명의 희생을 야기했고 또한 일본 역사에서 비극이 아닐 수 없으나 전쟁을 일으킨 전범 국가로서 미국의 원폭 투하는 역사의 대 역률적 관점에서 볼 때 합당한 일이며 또한 원폭 투하로 군부의 불필요한 전쟁의지를 억제하고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켜 많은 일본인의 생명을 구하고 또한 지금의 일본의 밑거름이 된 데에 다행으로 생각한다. 맞는 말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실제로 죽은 수십만의 희생자 앞에서 필요한 희생이었다 운운하는 것이 제대로 된 말인지 곰곰히 생각해보시길. 칼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다.[28] 이 선거에서 자민당은 36석을 확보하는 데 그친다.[29] 자민당이 83석, 연립여당인 공명당이 20석으로 모으면 103석, 여당계 무소속 2석을 더해 105석인데 민주당이 단독으로 확보한 의석 109석에도 못 미쳤다. 거기에 일본 공산당과 사민당이 7석, 5석을 확보했고 국민 신당과 신당 일본이 4석, 1석을 확보하고 야당계 무소속까지 모으면 139석이어서 자민당의 입장에서는 기록적 참패였다.[30] 히로히토가 죽은지 수십년이 지난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관여하는 것이 엄금된 허수아비인, 하지만 일본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천황에게 최근의 극우 행보에 대한 반감으로 사과 요구를 하는 건 외교적으로 매우 부적절했다.[31] 중의원 2/3[32] 결정적으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구성을 아직 시작조차 않은 상태이다.[33] 여담으로 패전 60주년이었던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담화는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답습, 계승하며 야스쿠니 신사에 (적어도 2005년 당일) 참배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한중의 반응은 냉랭했는데 만약 "아베 담화" 가 강경어조로 나온다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격랑이 일 듯.[34] 이 발언으로 인해 오키나와 현민들의 민심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오키나와에서 내지(內地)라고 불리는 본토의 경우 이 날을 기점으로 미군정이 끝난 것이 사실이나, 오키나와는 그 후에도 한동안 미국의 점령하에 남아있었던 탓이다. 아베의 이 발언에 일부 오키나와 현민은 TV 인터뷰에서 "우리는 일본이 아닌거냐?" 라는 돌직구를 날리기도 했다.[35] 2ch와 같이 넷우익 성향이 강한 사이트이다.[36] 이날 같이 온 유명인사는 그를 비롯한 일본의 정치인들 뿐 아니라 니시무라 히로유키(개최자), 빌리 헤링턴, moot, ZUN 등도 있었다.[37] 1차 중일전쟁은 청일전쟁[38] 이 날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미스터 베이스볼 나가시마 시게오와 교진군을 거쳐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에서 맹활약하며 월드 시리즈 MVP 등의 업적을 남긴 마쓰이 히데키가 일본 국민영예상을 받는 시상식을 가진 날이다.[39] 노파심에 첨언하자면, 일제는 '전쟁을 그만 둔' 게 아니라 미국에 시비를 걸며 선전포고도 없이 선빵을 갈겼다가 되려 개발살나서 패전한 거다. 이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40] 이미 국채 자체가 GDP의 2배를 넘어간 지 오래고 이 상태에서 국채금리가 올라가면 국가신뢰도가 바닥을 친다. 안 그래도 못 갚을 수준의 빚을 더 못 갚으니까.[41] 하타 쓰토무 전 총리는 귀신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귀신을 직접 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42] SNL 코리아 3기 14화 Weekend Update에서 아베 크롬비의 문제를 보도하면서 한 말.[43] 6월 2일 개그콘서트 오성과 한음에서 한 말. 18센치인가?[44] 기시의 동생이 사토 에이사쿠가 자신도 한국계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떡밥이 있다.[45] 적자는 간신히 면하는 정도라고. 아베는 1년 한 뒤 적자 내면 때려치라 했다는 평가다.[46] 해당 기사에 따르면 "한 야당 의원은 아베 총리가 자신의 '이너서클(즉, 아키에 여사와 고이즈미 전 총리)'에서조차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고 조롱도 했으나 아베는 웃으면서 "이 두 사람이 내 인생에서 무척 중요한 인물들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부 차원에서 우리는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을 보장시켜야 한다"라며 무마했다고.[47] 그래서 자녀가 없는 총리 부부가 강아지 로이를 키운다고. 3대 세습 우려는 없다. 물론 형제세습 가능성은 충분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