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부/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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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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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라인
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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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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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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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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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반적인 평가
2.1.1. 이승만
2.1.2. 박정희
2.1.3. 노태우
2.1.4. 공통적 비교



1. 개요[편집]


파일:wjse.jpg
전두환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정부에 대한 평가를 다룬 문서.


2. 전반적인 평가[편집]


전두환은 반역자다. 선거를 치르지 않고 대통령에 올랐다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은 대통령도 아니며, 그 비극을 국민들이 기억해야 한다. 세상에 인간으로서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국 국민을 그렇게 수백 명을 죽일 수 있나. 우리 역사에 길이길이 크게 기록돼야 한다.

김영삼[1]


전두환 정부는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가장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2][3] 특히나 인터넷상의 일부 누리꾼 세력을 제외하면 온도 차이는 둘째로 하고 성향 불문 대한민국 전 국민으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4],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도[5]전두환 정권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절대로 따르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이자 역사적 실패작으로 가르치고 있다.[6] 심지어 인터넷상의 친전두환 세력 역시 전두환에 대한 찬양은 진짜로 그에 대한 진심어린 찬양이 아닌 그저 호남권에 대한 맹목적인 반감이나 그저 밈적인 찬양이기에 진심어린 찬양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결론적으로 모든 세력에게 온도차는 있으나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7]

전두환이 극우 세력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민에게 부정적인 평가만 받는 이유는 크게 보면 일단 최소한의 명분도 없는[8] 두 차례쿠데타를 일으키고 유권자들에 의해 제대로 된 선거[9]로 뽑힌 경력도 없으면서 민주 국가의 수장인 대통령을 참칭했으며, 무엇보다도 집권 과정에서 독재에 저항하는 자국민에 대한 대규모의 학살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국민 상대로 사기를 치고 6.25 전쟁과 정권 말기 3.15 의거 당시 김주열 열사가 세상을 뜬 일로 인하여 까이는 이승만이나 독재자라는 평가를 받는 박정희도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10] 적어도 상당 부분의 임기 동안은 겉보기로라도 민주주의를 내세우기는 했다는 것을 감안하면[11] 하지만 전두환은 과정으로 보나 결과로 보나 정통성과 정당성 모두 결여된[12] 대한민국 헌정사상 가장 반민주적인 대통령이다. 이로 인해 한국에서 간선제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망쳐버린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김재익 경제수석을 중용하여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다져진 경제기반과 3저 호황을 토대로 경제 최전성기를 달렸으며, 1988 서울 올림픽을 유치시키고, 유신 시기의 과도한 중앙집권적 체제와 통금시간 해제나 두발, 교복 자율화 같은 극도로 보수화된 검열정책을 완화하는[14] 등 공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15] 그러나 1980년대에 다른 친서방 독재국가들은 대부분 민주화되거나 점진적으로 통제가 완화되었을 시기임에도 불구하고[16] 시계를 거꾸로 되돌려 대한민국 제4공화국과 같이 폭압적인 독재 정권을 유지했으며,[17] 경제성장의 성과도 전임자 박정희가 쌓아놓은 토대의 역할이 매우 컸고,[18] 검열정책의 완화도 우민화 정책의 일원이라 의도가 불순했다고 비판을 받는 등 실제로는 평이 그리 좋지 못한데다 결정적으로 상술한 문제점이 너무나도 심각한 탓에 그의 공은 거의 무의미하다고 평가된다. 애초에 업적을 남긴 폭군/독재자들도 과오가 너무 크면 그 업적이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는 언급하기도 버거울 정도로 흔하디흔한 일이기에[19]

더구나 박정희의 사례처럼 경제 호황기의 대통령은 보통 XX하면 어떠냐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란 말처럼 아무리 욕을 먹어도 지지율이 상승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대중들에게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은 것까지 감안하면 한국 역사상 최고 호황기에 집권했는데도 인기는 커녕 거의 모든 국민들에게 기록말살형 수준의 지탄만 받고 있다는 것은 정말 경이로운 대기록이다. 이것은 그만큼 당시의 정부가 고압적이고 파국적인 행태를 벌여왔다는 증거라 할수 있다. 실제로 경제 호황기에 집권한, 인권탄압을 자행한 세계의 독재자들 중에서 전두환은 가장 평가가 낮다.

이렇기 때문에 전두환은 90세로 장수했지만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편하게 밖을 돌아다니지 못했다.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어딜 가든 경호원을 동원해야 했으며 '숨어 살았다'라는 말이 적절할 정도로 전두환의 저택은 늘 경비가 삼엄했다. 재임기간동안 돈을 많이 모았기 때문에 남은 여생을 골프를 치고 다니며 호화스럽게 살았지만, 한 평생 국민들의 증오를 한몸에 받은데다 여러 미디어에서 자신의 악행을 낱낱이 고발하는 영화나 다큐멘터리 등이 나오는 상황에 과연 전두환이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았을 지는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전두환은 죽기 전 전방 고지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으나, 2021년에 사망한 이후에도 아직 유해를 묻을 장지를 구하지 못해[20] 2023년 기준 아직까지 유해가 생전 자택에 보관중 이라는 것만 해도 전두환이 얼마나 국민들의 증오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21]

호칭 역시 대부분의 언론들은 전 대통령을 빼고 전두환 씨라고 부른다.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한 이명박박근혜도 언론에서는 대부분 전 대통령이라고 붙혀주고 있고, 함께 재판을 받았던 노태우 역시 생전이나 지금이나 전 대통령으로 부르는 언론이 더 많다. 사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박탈이 전 대통령이라는 호칭까지 금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언론에서는 전 대통령이라고 호칭하지 않는 것은 결국 민주주의 체제의 한국 헌정사에 완전히 반대되는 인물이기에 그를 대통령으로 암묵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신호라고 볼 수 있다.[22]

2.1. 이승만, 박정희, 노태우와의 비교[편집]


대한민국 임시정부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내치 실정으로 인해 4.19 혁명으로 쫓겨났을뿐더러 현재까지도 국부로서의 대접을 잘 받지 못하는 이승만 정부나, 정보기관을 통하여 그러한 이승만 정부보다도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고 군사독재를 지속한 박정희 정부 모두 독재 정부로 평가받으나, 전두환 정부에 비해서는 공 또한 부각시키는 경우가 많다.[24] 이승만은 전두환을 넘는 학살, 박정희는 전두환을 넘는 억압적 통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과가 있는만큼 분명히 공도 인정되며, 보수 세력에서만큼은 확실한 지지를 받는다. 사실 전두환 역시 인사 능력이 좋은 편인 등 업적이 없는 것은 아니나 국가의 기틀을 잡은 이 둘보다는 확실히 미약하며 만약 전두환이 이승만의 한미동맹이나 박정희의 경제성장 같은 대업적이 있었다면 지금보다 평가가 훨씬 좋았겠지만[25] 과를 상쇄할 만큼 큰 공은 없기에 자신이 세운 공들도 모조리 부정당하는 것이다.


2.1.1. 이승만[편집]


이승만은 독재정치와 여러 인사 실패,[26] 부정부패와 부정선거[27], 우상화,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 실패, 정치깡패와 극단주의 세력의 활동, 언론탄압, 반공을 명분으로 자행한 학살[28]로 인해 내치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지만[29][30] 북한과 적대적인 스탠스를 유지함으로써 민주주의 진영에 대한민국을 알박기하고 토지개혁에 성공했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한미동맹을 굳건히 하고 평화선으로 독도를 일본으로부터 지켜내는 등 외교적 치적은 있다는 점에서 옹호하는 여론도 있다. 또한 경제 사회적 내치는 최악이였지만 이는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박살났던 시대라는 것을 감안해야하고 교육과정에 집중 투자하여 전문인재를 양성하여 추후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등 완벽한 무능은 아니였다. 그리고 집권 당시 국부라는 상징성으로 인하여 굳건한 지지층이 있었으며 하야 당시 시위대 세력까지 이승만의 하야를 환영, 만수무강하라는 포스터를 붙일 정도로 성과 불문 독립운동가이자 정치 원로로써 당시 국민들로부터도 폭넓게 인정받았다.


2.1.2. 박정희[편집]


박정희 또한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하고도 친위 쿠데타10월 유신을 저지른 군사독재자[31]에 가혹한 정적 탄압과 간첩 조작, 권위주의 정책을 일삼은 것은 본질적으로는 전두환과 비슷하다. 특히 유신 시기에 한해서는 중앙집권적 체제와 사회적 억압은 오히려 전두환 시기보다도 훨씬 심했으며, 집권 말기에는 미국과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박정희는 1960년대까지는 국민들의 민심도 읽으며 어느 정도 초심을 유지하고 있었고, 국가 인프라 구축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경제 성장의 토대를 마련해 대한민국을 일개 최빈국에서 신흥공업국가로 성장시키며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기틀을 만드는 등 공도 확고하기에[32] 절대 다수의 국민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만 받는 전두환과는 정반대로 김대중과 함께 정치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장 심하게 갈린다. 그리고 최소한 10월 유신 전까지는 어느 정도는 민주적인 통치를 했으며, 일단 3번의 국민투표에 의해 뽑힌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33] 물론 박정희도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 만한 사람들을 숙청하고 반독재 민주화 운동가들과 문화계 예술계 인사들을 중앙정보부를 이용해 탄압한 것은 전두환과 유사했지만, 적어도 전두환처럼 아예 대놓고 자국민을 무자비하게 대량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다.[34] 게다가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 당시 장면 총리를 비롯한 민주당내 신파와 윤보선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당내 구파의 정치 분쟁에 환멸을 느낀 시민들로부터 환영을 받기도 했으며, 그의 딸이 아버지의 부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보수정당의 대표를 거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로 그 경제적 공에 의한 박정희의 후광이 있었다는 점도 부정하기 힘들다.[37] 만약 박정희가 권력욕을 버리고 잘못된 선택으로 흑화하지 않은 뒤 순순히 정권을 포기했다면[38] 독재자라는 타이틀이 없어지거나 희석/미화됨으로써 그의 과를 고려하더라도 평가가 지금과 상당부분 달라졌을 것이고[39],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저 세상으로 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40]

다만 박정희는 살아서 퇴임한 것이 아니라 임기 중에 암살당한 거라 만약 살아서 퇴임했다면 전두환처럼 유죄 판결을 받고 현충원에 안장되지도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5.18처럼 대놓고 죽인 것이 아니어서 그렇지 중앙정보부, 인혁당 사건 같은 사법살인이 박정희의 잘못인 것은 명백한 데다 5.16이나 무리한 3선 개헌, 유신 등이 유죄로 인정된다면 사람을 직접 죽이지 않았음에도 3.15 부정선거 개입죄로 사형당한 최인규처럼 중형을 면치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10월 유신이 일어난 이상 박정희가 스스로 내려왔을 가능성은 낮다. 만약 10월 유신이 일어나지 않고 원래 3공 헌법대로 재선만하고 물러나거나 3선개헌 선에서 그쳤다면 그의 지지자들과 정치세력들에게 당할 후폭풍을 생각했을 때 처벌하지 못할 수도 있다. 박정희의 인기가 빠르게 식은것도 70년대 중후반에 긴급조치 9호로 억압적인 분위기 조성과 2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경제가 흔들린 것 때문인걸 감안하면 그에따른 역풍맞을 각오를 하지 않는한 함부로 체포하여 법정에 세우는게 쉽지 않을 수도 있다.


2.1.3. 노태우[편집]


전두환과 함께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한 하나회의 2인자이면서 전두환의 오랜 벗이자 후임자였던 노태우도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하고 야당 정치인들에게 잔혹한 탄압을 가하며 간접선거로 대통령이 된 절친 전두환과는 정반대로 야권 대선주자들과 정당하게 대결하여 국민의 직접 선거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민주적인 정통성과 정당성이 확실히 보장된 대통령이다.[41] 더구나 그도 회고록을 통해 12.12를 정당화하거나 1995년에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망언[42]을 남기기는 했지만 뒤늦게나마 자신의 죄를 후회하고는 죽기 전에나마 장남 노재헌을 통해 5.18 피해자들에게 사죄의 뜻을 지속적으로 전해왔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논란이 있긴 했으나 장례도 국가장으로 치루는 등 전두환보다는 대중적인 인식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양호하다. 오히려 그의 통치기가 너무 무난하고 안정적인 치세였던 나머지 윤보선, 최규하를 제외하면 가장 존재감 없는 대통령으로까지 꼽힐 정도. 덤으로 대통령 노태우는 많은 업적을 달성하고 업적에 비해 과는 확연히 적은 편이지만, 그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노태우가 조명받지 못했던 이유는 전적으로 '전두환의 친구'라는 멍에에 기인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2.1.4. 공통적 비교[편집]


반면 전두환 정부는 최소한의 명분도 없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서울의 봄5.18 민주화운동 등의 진압 과정 중에 시민 학살을 저질렀으며, 임기 초기 삼청교육대 등 인권 유린과 제4공화국 시절인 1975년부터 운영되던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은폐[43]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44], 부림사건 등 반독재 인사들에 대한 간첩 조작과 고문을 자행했다. 1987년에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여 직선제 개헌을 끝까지 거부하고[45], 퇴임 후에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으며 과거 비자금에 대한 추징금 납부 거부, 아들이나 친동생의(후자는 새마을운동의 이미지를 실추시킨 주범이다.) 탈세 문제, 손녀 전수현의 한국 비하 발언 등으로 대다수 국민들에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최악의 정부로 인식되고 있다. 당장 동시대 군사내란의 주범이자 하나회의 일원으로 같이 법원에 섰던 노태우가 12.12 군사 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의 유혈진압 개입 등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였으며 막대한 추징금을 완납한 것과도 무척 대비되는 부분이다.

당연히 전술한 것처럼 공식석상이나 사석에서 전두환을 공개적으로 옹호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철저하게 금기시되며, 만약 진짜로 전두환을 공식석상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간 십자포화를 각오해야 한다.[46] 때문에 극우 인사들조차 인터넷에서나 전두환을 미화하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전두환을 미화하는 발언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두환의 장례식에 조문하러 온 사람들도 5공화국 내란주범이었던 하나회의 살아남은 주축 세력, 주류에서 밀려나거나 은퇴해서 속된 말로 퇴물인 정치인들 정도 뿐이었고, 강성극우파인 조원진우리공화당 외의 정당은 물론이고 주요 언론들도도 공식적으로 추모의사나 성명을 밝히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헌정사 최초로 전직 대통령 사망에 대통령의 조화와 조의 표현을 하지 않은 결정을 내렸다.[47] 단지 어찌되었던 국가의 대통령이었으니 조문의사는 각자 개인의 역량에 맡긴다 정도로 표현한 정도였다. 이는 여야 당 지도부가 조문을 왔던 데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국가장까지 치러준 친구였던 노태우의 장례식과도 비교되는 부분이다.[48][49]

거기다가 생전 추징금도 완납하지 않았고[50], 회고록 등지에서 5.18 민주화운동 과정에서의 민간인 학살과 제5공화국의 국가적 범죄에 대해 반성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역사왜곡을 시도했다는 점이 드러나며 부정적인 재조명이 멈출 틀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사후 2년 뒤인 2023년에는 손자 전우원의 폭로로 전두환 일가의 비자금 은폐 정황과 자손들에게 정치적 세뇌 교육을 시킨 것[51]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전두환과 전재용-박상아 부부의 아동 학대 의혹이 제기된 데다[52] 동년 전우원이 국립 5.18민주묘지에 가서 5.18 희생자들에게 사죄하며 할아버지의 악행에 참회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국민들에게 동정 여론을 사며 전두환에 대한 평가는 회복 불가 수준으로 부정적으로 추락하고 있다.[53] 사망한 지 2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그를 비판하는 영화가 개봉하고, 영화가 크게 흥행함과 동시에 여전히 전두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나오는 등 사실상 그를 지지하던 민정계가 전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거나 어느 정당에서도 힘을 잃은 현 시점의 대한민국 내에서는 모든 세력에게 까이는, 심하게 말하자면 북한의 김씨 일가와 다를 바 없는 독재자 취급을 받고 있다.[54] 더욱이 국민의힘은 박정희 세력과 김영삼계, 일부 김대중계와 친이, 범민주계 이탈자 등등을 전부 포섭하려 하지만, 전두환은 확실하게 선을 긋고 전두환의 흔적을 필사적으로 지우려 하고 있으며 친 전두환 세력은 정계에 입문시킬 생각조차 않고 오히려 이들의 정계입문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을 정도다.

결론적으로 전두환은 대한민국의 처절하고 혼란스러웠던 현대사가 배태한 재앙이자 비극이라 할 수 있는 독재자이다. 민주화의 희망이 보였던 때에[55] 쿠데타를 일으켜 유아, 임산부까지 가리지 않으며 자국민 수백 명을 학살하고 국민들의 정당한 선거로 뽑히지 않은 주제에 대통령직을 참칭하며 민주주의를 다시금 후퇴시키고 제5공화국 내내 독재채제를 이어간 전두환에 대해 소수의 극우층을 제외하면 좌파든 우파든, 보수든 진보든 부정적인 평이 압도적이며, 이 때문에 전두환이 사망하자 인터넷에서는 전두환에 대한 온갖 모욕적인(?) 드립들이 들끓은 것은 기본에[56] 사망한 지 2년이 넘도록 전두환의 유해는 국립묘지는 커녕 그 어떠한 장지에도 안장되지 못한 채 생전 자택에 보관 중인 상황인 만큼[57] 전두환의 묘지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기피시설로 전락했다고 할 수 있다.


3. 긍정적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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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부정적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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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김영삼은 전두환 뿐만 아니라 이명박을 제외한 모든 대통령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긴 했다. 나머지 대통령 중에 이승만을 그나마 긍정적으로 평가 했으며 전두환을 가장 부정적으로 평가 하였다.[2] 본인의 정치 성향에 따라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전두환을 최악의 대통령으로 뽑지 않는 사람들은 많지만 대통령 개인의 평가를 봤을 때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다른 대통령들과 다르게 대부분 부정적으로 평가받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3] 기껏해야 탄핵당한 박근혜 정부의 평가가 전두환 다음으로 낮다고 볼 수 있으나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박근혜의 평가가 전두환보다는 훨씬 낫다. 박근혜 역시 대다수의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보수를 망친 주범으로 까이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당시에는 전두환까지 뛰어넘을 정도로 극악한 평가를 받으며 지지율이 한 자릿수까지 추락한 적이 있지만, 문재인 정부가 여러 실책을 범한 이후로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문재인 정부를 더 낮게 평가하며 박근혜 정부가 문재인 정부보다는 그나마 나았다고 소폭이나마 재평가하는 여론이 있기도 하다. 또한 최순실 게이트는 박근혜 정부 구성원들 개개인들의 문제로 치부되어 시간이 지나며 언급이 뜸해진 반면 전두환이 학살을 저지른 5.18 민주화운동은 증언, 영화, 드라마 등으로 40년이 넘게 지나도록 잊혀지지 않으며 두고두고 기억되고 있고, 이 여파로 現 보수정당민주정의당과 크게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라도의 보수정당 지지율은 여전히 한자릿수를 유지하고 있으며 최근들어 몇몇 지역에서는 두자릿수가 나오긴 하나 그래도 여전히 20%를 못넘을 정도로 저조하다. 이는 5.18을 직접 경험한 세대뿐만 아니라 겪어본 적 없는 호남의 2030세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몇몇 극우 인사조차 전두환을 전라도가 민주당계에 몰표를 주는 결과를 만들어 지역감정을 악화시킨 원흉 중 하나로 보기도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박근혜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당하게 당선된 대통령인 반면, 전두환은 국민들의 손으로 뽑힌 적이 전무한 인물이다.[4] 심지어 뉴라이트전광훈 같은 악명 높은 극우 인사들조차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로든 전두환을 대놓고 '위대한 지도자'라는 식으로 미화하지는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물론 전광훈은 5.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한 바가 있다.) 말 다한 셈이다. 당연히 일반적인 보수층 사이에서도 전두환에 대한 인식은 매우 좋지 않다. 대한민국의 보수는 이승만, 박정희를 좋아하는 친박계 노년층의 전통 보수와 김영삼, 이명박 계보의 자유보수주의 일파로 나뉘는데 전두환은 둘 모두와 사이가 좋지 않다. (그나마 전자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편이기는 하다.) 일단 위의 김영삼의 혹평에서 알 수 있듯 전두환은 김영삼계와는 상극이며, 명목상 박정희를 계승하긴 했으나 현재 노년층 박정희 지지자의 일반적인 총평은 "박정희가 세운 경제 업적에 전두환은 숟가락만 얹었다"이다. 에펨코리아를 위시한 보수 성향 커뮤니티에서도 이승만, 박정희에 대해서는 공과 과를 구별해가며 가급적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박근혜, 하다못해 펨코와 상극인 민주당계 출신 대통령들도 욕은 무지하게 먹지만 문재인을 제외하고 나름의 공은 있다고 평가하는 것과 달리 전두환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공 언급은커녕 인간 말종으로만 취급하고 있으며, 몇몇 극우 유저들이 전두환을 찬양하는 댓글을 남기면 바로 비추 폭격을 맞는다. 심지어 2013~2014년 정도까지만 하더라도 그 유명한 일베저장소에서 조차 김대중, 노무현과 별 다를거 없는 취급을 받았다. 다만 대부분의 보수 커뮤니티에서 '전땅크', '엔젤두환'과 같은 찬양이 나도는 등 "밈적으로 만큼은" 전두환을 좋게 평가하기는 하나, 이마저도 광주 폭동 진압 드립에 쓰이는 등 칭찬 아닌 칭찬에 불과한데다 막상 전두환이 죽었을 때 추모는커녕 '엔젤두환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진짜로 엔젤됐네' 와 같은 드립이 우세했다.[5] 다만 국내 역사 교과서들이 유독 민주당계 정권에 우호적이고 보수정권 에 대해서는 크게 적대적으로 서술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6] 심지어 청와대에 있는 역대 대통령 초상화청남대에 설치되어 있는 전직 대통령 동상 등 전두환에 대한 미술품들을 철거해야 한다는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고, 실제 청남대에서는 전두환 동상 철거를 논의하기도 했었다. 결론적으로 철거는 안 하고 대신 노태우와 함께 '내란 혐의로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다'는 문구가 붙었다.[7] 물론 80년대의 전두환 치세가 아닌 80년대의 경제 호황을 그리워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8] 5.16 군사혁명도 사회 혼란 수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그 당시에는 되려 국민들의 환호를 받았는데, 12.12 군사반란은 그조차 전무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5.16은 문민정부 이전까지만 해도 '5.16 군사혁명'이라고 불리었지만 12.12는 전두환 시절에도 '12.12 군사혁명'이라 불리기는커녕 '12.12 사태'라고만 언급되었다. 물론 12.12는 5.16처럼 아예 정권자체를 장악한 게 아니라 군만 장악한 것이란 건 감안해야 한다.[9] 직선제, 국민이 직접 뽑은 국회의원 또는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 등의 방식으로[10] 이승만은 4번의 당선 중 처음 1번은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에 의한 정당한 간선제, 다음 2번은 직선제로 정당하게 뽑혔고 마지막은 부정이 많았던 직선제였기에 취소까지 됐다. 물론 그 마지막 선거도 상대후보가 갑작스럽게 사망해서 단독 후보가 되었기에 부정선거를 할 필요 없이 자동 당선은 확실한 상태였는데 본인의 고집으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세우려는 욕심 때문에 부정선거가 들통나 혁명이 발생한 것. 박정희도 5번의 당선 중 앞의 3번은 직선제로 뽑혔으며 나머지 2번은 비민주적인 간선제를 이용해서 뽑혔다. 전두환은 2번 당선되었는데 둘 다 비민주적인 간선제였다. 단 3.15와 유신 선포 이전의 선거들 중에도 이승만은 3대, 박정희는 7대 대선이 관권선거였음이 거의 확실시된다.[11] 당장 제1공화국과 제3공화국을 비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치하 러시아리콴유 이래 싱가포르가 가장 대표적 사례이다.[12] 심지어 똑같이 정통성과 정당성 모두 결여된 북한 김씨정권에게도 시비가 걸리기도 했다.[13] 이로 인하여 부산시의 경제가 점점 쇠퇴를 시작했다. 부산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부산 경제를 무너뜨린 주범이자 원인인 셈이다.[14] 그러나 독재 체제를 완화했다고는 해도 간첩 조작과 정치범 수감자들이 득실했던 것은 박정희 유신 독재 시절과 다를 바 없었고, 국제그룹 해체 사건[13],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등 유신 시기 박정희도 기겁할 기괴한 사건들을 일으켰기 때문에 독재 체제 완화도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15] 긍정적 평가가 그나마 가능한 이유도 전두환이 독재자들 중에서도 매우 특이한 케이스이기는 하기 때문이다. 인재를 보는 눈이 뛰어나고, 자신이 비전문가라는 걸 인식해서 우수한 관료들을 중용했으며 (박정희도 초반에 자신의 부족함을 모르고 화폐개혁에 나섰다가 실패한 전적이 있다.) 자신 또한 이런 사람들에게 경제를 배우면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식견을 넓혔다. 보통 독재자가 자신을 과대평가해 독단적으로 삽질하다가 여태껏 일구어 놓은것을 모두 작살 내버리면서 나라를 박살내는데 비해 전두환은 이런 경향이 전혀 없었다. 당장에 전두환보다 더 비판받는 독재자들은 많지만 그 사람들은 좌우 관계없이 아돌프 히틀러김일성, 마오쩌둥처럼 국가자체를 통째로 말아먹거나, 이미 망한 국가라 경제 상황 자체가 좋지 않았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장 군사독재자들 중 네 윈이나 이디 아민, 호르헤 비델라는 자국에서 이미 전두환 이상의 금지어로 전락했으나, 저들은 자국의 경제를 뿌리까지 박살낸 인물들이다. 그리고 부르키나파소블레즈 콩파오레와 같이 전임자의 성과를 모조리 되돌리고 나라를 다시 후퇴시키는 경우도 있었다.[16] 그 일례로 아르헨티나의 군사 독재는 전두환의 집권 초기인 1983년에 종결되었고, 대만에도 민주화의 서광이 조금씩 비쳤으며, 심지어 칠레아우구스토 피노체트마저 집권 초기에 비해서는 통제를 어느 정도 완화했다. 다만 공산권, 친공산권 국가들은 저때까지도 전부 독재국가였는데, 물론 이들 중에서 소련과 척을 진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국가들도 전원 독재국가였다. 제3세계의 리더격이던 유고슬라비아도 쬐끔 덜 독재했을 뿐이다. 한편 독재 구도는 바뀌지 않았으나 캄보디아의 인간백정 폴 포트는 그보다 정도가 훨씬 덜한 베트남의 군사적 개입으로 실각했다.[17] 박정희 시기가 세계적으로도 독재자들의 춘추전국시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잔혹한 독재자들이 즐비했던 점과는 대조적이다.[18] 실제로 고령의 보수주의자들 중에서 전두환이 박정희가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19] 일례로 이오시프 스탈린소련미국 버금가는 양대 초강대국으로 만든 매우 큰 업적이 있으나 대숙청, 카틴 학살 등 악행이 너무 커서 공적은 잘 언급되지 않고 사망 얼마 후 후임인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처참하게 부관참시를 당했다. 물론 현대에 와서는 재평가를 받아, 대숙청 학살자라는 과오는 있되 말 그대로 썩어가던 소련을 되살린 면도 있다는 공과 사를 확실히 하는 추세다. 좌우를 막론하고 러시아의 국가주의자들은 대체로 스탈린을 좋게 보는 편이다. [20] 처음에는 캠핑장 부지로 쓰겠다고 해서 땅주인이 허가했다가, 전두환의 묘소로 사용할 것이라는 전두환 일가의 의도를 알고 나서는 땅주인이 자신의 땅에 전두환의 유해가 묻히는 것을 극도로 반대했다고 한다.[21] 차라리 본인의 유언대로 하되, 묘소는 만들지 않고 유골만 뿌리는 식으로 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동화경모공원에 묻힌 노태우처럼 민간묘지에 안장되기엔 어느 추모공원에서도 안 받아줄 것이고 조상들과 친척들이 묻힌 합천 선산에 묻혔다간 다른 친척들의 반발+전두환은 물론 같이 묻힌 선조들의 묘도 전두환에 분노한 이들에 훼손될 수도 있다. 다른 곳에 어찌어찌 무덤 자리를 마련했다고 할지라도 이완용, 폴 포트와 마찬가지로 그의 악행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지속적인 묘지 훼손에 시달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22] 위에 언급된 YS 역시 전두환에 대해 대통령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고 실제 정당한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생전 악평을 내렸던 박정희, 노태우, 김대중, 노무현 등도 악평의 수위와는 별개로 대통령이라는 직위 자체는 당연히 인정했다.[23] 특히, 긴급조치 9호가 떨어진 1975년 5월 13일부터 1979년 10.26 사태까지가 제일 극심했다고 볼 수 있다.[24] 물론 어디까지나 공 또한 언급되는 것이 거의 암묵적으로 금지된 전두환과 달리 모든 정치 세력에서도 인정받을 만한 공도 같이 언급될 뿐이지. 6.25 전쟁 및 정권 말기 이승만이나 대한민국 제4공화국 시기[23] 박정희 역시 전두환과 다를 바 없는 독재자이기에 제6공화국의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공이 언급될 뿐 과도 분명히 언급되고 있다. 대통령으로써는 평가가 좋은 편인 노태우 역시 대통령으로서는 몰라도 정치 생애를 종합하면 하나회의 핵심인물로서 12.12 쿠데타 책임이 있기에 공과를 구분하는 평가를 받는다.[25] 상술한 바와 같이 스탈린도 전두환은 가볍게 능가하고 나치 독일 내지 북한과 다를 바 없는 학정에도 불구하고 소련을 양대 초강대국으로 만든 공도 엄청나기에 최소한 러시아 내에서는 옹호 여론이 더 많다.[26] 인사의 경우 오히려 역대 최상급인 전두환과 달리 이승만은 역대 최하급으로 평가받는다.[27] 물론 부통령 선거 때 이기붕을 비롯한 이승만의 측근들이 저지르고 본인은 직접적으로 관여하진 않았으나, 이승만도 책임이 어느 정도 있다.[28] 특히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한) 민간인 학살"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이승만은 규모와 잔혹성 모두 광주 학살이 애들 장난로 보일 정도였다. 학살로 따지면 사망자가 최소 30만에서 최대 100만으로 추정될 정도로 2차 대전 이후의 반공권 독재자 중에서는 잔혹성, 규모 모두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외에는 적수가 전혀 없는 수준이다. 다만 전두환의 학살이 이승만의 학살보다도 임팩트가 큰 것은 이승만의 학살은 토벌을 명목으로 하거나 전시에 벌어졌던 것과는 정반대로 전두환의 학살은 전쟁은 커녕 나라에 반군도 전무했던 평시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평시에 전시에 일어날 만한 학살과 비슷한 잔혹성의 학살을 저질렀으니 전두환이 이승만보다 더 욕을 먹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인 셈. 비슷하게 호르헤 비델라 역시 규모 면에서 이승만보다 작으나, 단순히 통치의 잔혹성만으로도 그보다 훨씬 큰 비판을 받는다.[29] 더구나 일제강점기 미화로 논란을 빚은 뉴라이트가 앞장서서 이승만 고평가를 하고 있는 것에 대한 반감도 이승만의 부정적 평가 상승에 일조했다.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이승만은 광신적인 수준이던 반공 성향까지 능가할 정도의 극단적인 혐일이었다. 친일파 청산 실패로 인하여 일부 반이승만 세력들에게 친일파라고 까이는 경우도 있으나 영해를 침범한 일본어선을 상대로 함포사격을 하거나 재일교포를 강제북송을 저지하려 테러공작까지 시도할 정도로 실질적으로 역대 대통령 중에서 반일 성향이 가장 심하다.[30] 당연한 것이 이승만은 조선 시대에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겪은 역사의 산증인이기 때문. 물론 자신의 지지세력을 공고히 하기위해 친일 인사를 등용하는 이중적인 태도는 비판받지만, 이는 다른 독립운동가 출신 거물급 정치인도 마찬가지 였으며 그와 별개로 이승만이 가졌을 민족주의 성향과 혐일 성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당장 일본 극우들은 역대 가장 싫어하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문재인마저 능가하는 인물로 이승만을 꼽는다.[31] 정확히는 '군인 출신' 독재자다. 대한민국 헌법상 현역 군인은 대통령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당시 박정희는 전역한 후였기 때문이다.[32] 특히 경제성장 같은 경우는 민주당계 정치인들 조차도 인정하는 수준이다.[33] 제7대 대통령 선거가 관권선거였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최소한 그 전의 5대, 6대의 두번 선거는 국민들의 선택을 받아 뽑힌 게 맞다.[34] 물론 저지를 뻔 하긴 했다.[35] 단, 박정희의 일가족들 중 아들 박지만은 마약 범죄 혐의가 있었고, 또 다른 딸인 박근령은 육영재단 이사장 시절의 재단비 횡령과 사기죄 등 범법 혐의가 있었는데다, 한중일 역사 분쟁에서의 일본 옹호 망언 등 논란이 있어 2017년 박근혜 탄핵 심판으로 박근혜가 몰락한 뒤에도 정계에 입문하여 정치인이 되지 못했다.[36] 이는 전두환 뿐만 아니라 처자식인 본인들도 부정축재 등 법적인 논란이 있어서 그렇다.[37]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물론, 박정희의 손윗조카인 박재홍, 박준홍, 처남인 육인수가 박정희의 이름으로 정치인이 된 것과 달리[35] 전두환의 처자식들은 정계에 입문한 적도, 입문을 시도한 적도 없고[36]기껏해야 전두환의 처제와 결혼해 동서가 된 김상구가 전부이고 김상구 역시도 전두환의 동서임을 전면으로 내세우지 않고 의원이 되었다. 전두환이 2010년대 들어 다시 부정적으로 조명되어 전두환의 가족들이 언론을 피해 숨어 사는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38] 가령 유신을 저지르지 않고도 김종필 등을 7대/8대 대통령으로 세워 놓고 박정희는 상왕으로서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도 있었다. [39] 특히 박정희 개인이나 측근 비리도 70년대 이후로 상당수 몰려있다.[40] 썰전 패널이었던 이철희의 이야기에 따르면, 1980년대 초 대학가에서는 70년대 학번과 80년대 학번이 각각 박정희와 전두환 중 어느 쪽이 더 나쁜 놈이냐를 주제로 자주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이철희 본인은 박정희는 최소한 자국민에게 총 들고 학살은 안했다며, 전두환은 비교도 못할 만큼 나쁜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저희 대학 다닐때도 박정희 대통령 건드리는 애들은 별로 없었다. 박정희는 대부분 인정하는 분위기였지만 전두환은 절대 용서치 못할 존재..."라는 말도 남겼다.[41] 김옥숙이순자에게 이를 빌미삼아서 너희 남편체육관에서 뽑힌 독재자, 우리 남편국민의 직접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이라는 식으로 대놓고 까며 이순자에게 한방 먹인 바가 있었다.[42]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 수천만이 희생된 걸 감안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발언을 하여 5.18 희생자 유족과 자국민들로부터 비판을 야기했다.[43] 사건이 진행 중일 당시에는 직접적으로 형제복지원 사건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진상이 드러나자 주범 박인근을 두둔하며 형량을 깎아주는 등 사건을 은폐했다.[44] 한마디로 진짜로 내란을 일으킨 내란수괴무고한 정치인이 자신을 비판한다는 이유만으로 내란음모범이라는 누명을 씌운 것이다.[45] 후에 이 조치는 6월 항쟁을 점화하는 역할을 한다.[46] 그 일례로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경선 시절, 공개적인 자리에서 전두환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가 여권에서는 물론, 같은 진영인 에서마저 십자포화를 당할 정도였다. 또한 2007년 초에는 당시 한나라당의 대권주자였던 원희룡이 새해를 맞아 전두환에게 세배를 하러 갔다가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은 적이 있다. 이 사건은 당내에서 개혁보수 이미지를 띄던 원희룡의 정치적 커리어에 심각하게 타격을 입혔고, 현재까지도 이 사건을 이유로 원희룡에게 부정적인 평을 내리는 사람들도 더러 있을 정도다.(이후 원희룡은 2023년 12월 4일 전광훈을 만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또다시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는다.) 물론 2000년대만 해도 정치인들이 전직 대통령 예우 차원에서 전두환을 예방하러 가곤 했지만, 201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나이도 들고 전두환에게 접촉해봐야 이전 같은 껀덕지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데다(이는 박근혜 탄핵의 영향이 크다) 1987, 26년, 택시운전사 등으로 본인의 부정적 치세를 조명하는 미디어의 영향도 큰데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회고록 논란 등으로 이미지가 더욱 나빠지며 정치인들의 방문도 뚝 끊겼을 정도였다.[47] 문재인 대통령은 1980년 5.17 내란 당시 신군부에 의해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했던 전력이 있다. 1980년대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전두환 정권과 맞서싸웠던 인물이다.[48] 물론 이조차도 "군사반란으로 인한 내란죄로 대법원에서 유죄를 확정 받아 전직 대통령 예우가 박탈 당한 사람한테 국가장을 왜 베푸느냐?"는 논란은 있었다. 만약 전두환이 없었더라면 상대적으로 노태우에 대한 온화한 시선 역시 적어졌을 것이다.[49] 또한 2020년까지 건강하게 대외활동을 하면서 여러 발언들로 온국민을 상대로 어그로를 끈 전두환과 달리 노태우는 2000년대 중반부터 건강이 나빠져 대외활동을 거의 하지 못해 언론과의 노출이 줄어들었다는 것도 한 몫 했다.[50] 세간의 오해와 달리 아예 한 푼도 안 낸 것은 아니나, 약 2200억원 중 900억원 가량이 미납 상태이며 납부한 추징금 상당수가 자의가 아닌 2013년 타의로 인해 반강제로 납부되어 부정적 평가가 거두어질 일도 없었다. 노태우와 이명박은 완납해서 더더욱 비교되었다. [51] 5.18은 폭동이고 우리(전두환 일가)는 피해자다, 전두환은 민주주의를 수호한 인물이다 등의 내용이었다고 한다.[52] 전두환이 전우원에 부당하게 폭력을 행사하고, 전재용의 아동 방임과 불륜, 새어머니 박상아의 폭언 등등.[53] 이는 최순실 게이트 이후 김재규 재평가 여론과 '한강의 기적은 끝났다'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평가가 나락으로 떨어졌던 박정희도 문재인이 각종 실책으로 지지율이 떨어져 상대적으로 최순실 게이트가 잠잠해지자 비난 여론이 최순실 게이트 당시에 비해 많이 조용해진 것과 대조된다.[54] 물론 실제 악행은 북한 쪽이 비교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압도적으로 심하나, 이는 그만큼 대한민국 국민들이 전두환에게 큰 분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애초에 자신의 부당한 집권에 정당하게 반대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국민 수백 명을 도륙한 전적이 있으니 한국 국민들에게 전두환이 김씨 3대와 동렬로 취급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55] 잘만 하면 장징궈 집권 당시의 대만이나 카네이션 혁명 당시의 포르투갈, 프랑코 사망 후의 스페인처럼 온건한 민주화를 할 수도 있는 기회였다.[56] 물론 전두환의 악행을 생각하면 완전히 자업자득이다.[57]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자 호르헤 비델라도 고향 사람들의 반대로 고향에 안장되지는 못했어도 비델라가 사망한 당해에 어찌어찌 수도 외곽의 공동묘지에 안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대한민국 국민들이 전두환을 얼마나 기피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