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 요시히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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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장 과정
2. 정계 입문
3. 중의원 당선 및 총무대신 입각
6.1. 2020년
6.2. 2021년
6.2.1. 총재 선거 불출마
7. 총리직 퇴임 이후



1. 성장 과정[편집]


1948년 12월 6일 부농의 아들로 아키타현 오가치군 오가치정(현재 유자와시)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누나 2명, 남동생 1명이다. 아버지 스가 와사부로남만주철도의 직원으로서, 당시 만주국의 수도였던 퉁화(通化)에서 일본의 패전을 맞이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온 뒤 고향 아키노미야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아버지는 '아키노미야 딸기(秋の宮いちご)'를 브랜드화하는 데 성공하여 아키노미야 딸기 생산출하조합의 조합장과 오가치정의회 의원, 유자와시 딸기 생산집출하조합 조합장 등을 역임하였고, 2010년에 93세로 사망하였다. 어머니와 숙부·숙모는 전직 교사이며, 두 누나도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정계에서는 아주 오랫동안 빈농의 자식, 흙수저 출신으로 이미지 메이킹을 하였으나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 후 주간문춘의 보도로 거짓 미담이었음이 밝혀졌다. 여성 대학 진학률이 낮던 당시 누나들이 대학을 나와 교사가 되었다는 것도 그렇고, 학창 시절 이발소를 자주 다니면서 머리 관리를 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집안이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곧바로 상경하여 골판지 공장에 취직하였고, 고학으로 2년 늦게 호세이대학에 진학하였다. 여기까지는 사실이긴 하나, 알려진 것과 달리 집단 취업은 아니고 골판지 공장은 몇 달만 일하다가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 모아야 했기에 2년 늦게 입학한 것이다. 알바를 하고 2년이나 늦게 입학한 이유는 부자 간 갈등 때문이다. 정치에 뜻을 품은 본인과 달리 아버지는 아들이 딸기 농가를 잇기 바랐기 때문에 갈등이 꽤나 심했었다고. 때문에 상경하고 나서는 더 이상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다. (그래서 정계 진출은 아버지의 후광 없이 100% 본인의 노력으로 해낸 성과가 맞다.) 당시 도쿄의 주요 사립대학 중 가장 학비가 저렴하다는 이유로 호세이대학 제2부[1] 법학부 정치학과에 진학하였다고 알려졌으나, 사실은 정식 주간 과정인 제1부를 졸업하여 제2부라는 주장은 거짓임이 밝혀졌다. 1973년 대학을 졸업하고, 겐덴세츠비 주식회사(建電設備)[2]에 입사하였다.


2. 정계 입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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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에는 정치인을 지망하여 호세이대학 취업과와 상담을 하였고, OB회 사무국장으로부터 호세이대학 출신인 제57대 중의원 의장 나카무라 우메키치의 비서를 소개받아 같은 파벌이었던 중의원 오코노기 히코사부로[3]의 사람이 되어 이후 11년간 그의 비서로 일하였다. 1983년에는 오코노기 중의원이 통상산업대신에 취임함에 따라 대신 비서관을 맡았다.

1987년 요코하마시 니시구(西区) 선거구 출마하여 시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이후 시의원으로 재선까지 성공했다. 시정에 큰 영향력을 가졌던 오코노기 중의원이 사망한 후에는 정치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오코노기 의원의 사실상 대리인으로서 활동하였다. 중의원 비서 시절에 맺은 정·재계의 인맥을 활용하여 실력을 발휘하였다. 다카히데 히데노부 시장으로부터 인사 등에 대해 상담을 자주 받는 등 '요코하마의 그림자 시장'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3. 중의원 당선 및 총무대신 입각[편집]


1996년의 제41회 중의원 총선거에는 가나가와현 제2구에서 자민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하였고, 신진당의 공천을 받은 우에다 아키히로와, 구 민주당(1996~1998)의 공천을 받아 출마한 오이데 아키라를 누르고 당선되었다.[4]

1998년의 자유민주당 총재선거에서는 소속되어 있던 헤이세이연구회(平成研究会)의 회장 오부치 게이조를 지지하지 않고 스승으로 받드는 가지야마 세이로쿠[5]를 지지하였고, 헤이세이연구회를 탈퇴하였다. 이때, 아베 신조와 처음 인연 맺은 시기이기도 한다.# 여기에서 이미 일본군 위안부 부정에 있었던 일은 놀랍지 않다.#

이후에는 굉지회에 가입하였다. 2000년 제2차 모리 요시로 내각의 불신임 결정을 둘러싼 소위 '가토의 난'에서는 가토 고이치[6] 등에 동조하여 불신임안 투표에는 결석하였지만, 이후 가토파가 분열되었을 때에는 친 가토 그룹인 오자토파가 아니라 반 가토 그룹인 호리우치파에 가담하였다.

2005년 11월 2일에는 제3차 고이즈미 준이치로 개조내각에서 야마자키 쓰토무와 함께 총무부대신(副大臣)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9월 26일까지 총무부대신을 지낸다. 다케나카 헤이조 총무대신 아래에서 일하면서, 총무성 내부 통제의 수장으로 임명되어 사실상 인사권을 행사한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2006년에는 재도전지원의원연맹의 설립에 참가하였다. 이 의원연맹은 실질적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후임자를 선출하는 2006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아베 신조를 지원하는 모임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2006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아베 신조를 적극 지원하였고, 이후 아베 신조가 총재 선거에서 승리해 총리로 취임했다. 그리고 아베 신조는 당시 4선에 불과했던[7] 스가 요시히데를 총무대신(우정민영화 담당대신 겸직)으로 임명하였으며, 이로써 스가는 첫 입각을 이룬다. 원래 스가 요시히데를 관방장관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스가의 사무실 비용 문제 때문에 포기했고, 그 다음은 마치무라 노부타카였으나 그것도 기각되어 요사노 가오루가 관방장관이 되었다.

2006년 10월 NHK 단파 라디오 국제방송에 대한 방송 명령에 정의된 방송사항에 (북조선(북한)에 의한) 납치문제를 추가하려는 방침을 밝혔다. 당시 일본 방송법 제33조에는 '국제방송 등의 시행 명령 등(国際放送等の実施の命令等)'이라는 항목이 있었으며, 거기에 '총무대신은 협회에 대하여 방송구역·방송사항 그 밖에 필요한 사항을 지정하여 국제방송을 해야 할 사항을 명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었다. (2007년 12월에 방송법이 개정되면서 '명령'에서 '요청'으로 표현이 바뀌었다.)

2006년 11월 10일에는 방송사항에 '북조선(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에 특히 유의할 것'을 추가하라는 명령을 NHK에 보냈다. 한편 '보도의 자유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방송 내용이나 방송 횟수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NHK의 편집권에 대한 존중 입장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방송법 제44조에는 '편집권'에 관하여 '방송 프로그램의 편집 등'이라는 항목이 있고, 거기에는 'NHK는 국제방송의 방송 프로그램 편집에 대해 해외 동포의 적절한 위안을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당시 해외에서 방송되던 단파방송 '바닷바람(しおかぜ)'에 대해, 무선국 허가장을 교부하여 일본 국내 방송에 길을 터주었다.

2006년 12월에는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지방분권개혁) 보직도 받았다. 2007년에 발각된 연금기록문제에 관해서는, 후생노동대신 야나기사와 하쿠오이 아니라 총무대신이었던 스가 요시히데가 검증을 담당하였다.[8]

일본 우정공사 총재 이쿠타 마사하루와 회담을 가진 후에는 "이쿠타가 '총재를 사임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하고 발표하였다. 이후 후임 일본 우정공사총재에는 미쓰이 스미토모 은행 출신 니시카와 요시후미가 취임한다는 발표가 있었는데, 이쿠타 마사하루는 '나는 사의를 표명한 적이 없다'는 반박 기자회견을 하기도 하였다

2007년 제21회 참의원 통상선거 패배의 책임을 묻는 형식으로 내각 개편이 이루어졌고, 2007년 8월에는 총무대신과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의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자민당 선거대책 총국장에 취임하였다. 후임은 마스다 히로야.

2007년 9월에는 아베 신조 총리의 퇴진과 함께 치러진 자유민주당 총재선거에서 후쿠다 야스오를 지지한다는 고치카이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아소 다로를 지지하였고, 아소 다로의 추천인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후쿠다 야스오 내각 하에서는 선거대책 총국장이 격상된 선거대책 위원장에 고가 마코토가 취임하였고, 스가 요시히데는 선거대책 부위원장으로서 선거 대책 업무를 계속하여 맡았다.

2008년 9월 24일 아소 다로 내각 출범 후에는 아소의 측근으로서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던 아소 정권을 지지하였으며, 적극적으로 정책을 제안하여 정부지폐[9]의 발행과 무이자국채의 발행, 정치인 세습 제한 등을 주장하였다.

2009년 7월에는 고가 마코토가 도쿄 도의회의원 패배의 책임을 지는 형태로 자민당 선거대책 위원장을 사임하였으나, 스가 요시히데는 자민당 선거대책 부위원장직을 사임하지 않고 위원장 대리로서 직후의 제45회 중의원 총선거를 지휘하였다. 그리고 2009년 8월의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지역구 가나가와현 제2구에서 민주당의 미무라 카즈야의 맹추격을 548표의 근소한 차이로 따돌리고 5선에 성공하였다. 상대 미무라는 비례대표 병립제를 통해 첫 당선에 성공하였다.(이른바 부활당선) 이후 2009년 9월 28일에 치러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는 1996년 당선 동기인 오무라 히데아키·신도 요시타카·마츠모토 준 등과 함께 고노 다로를 총재 후보로 추천하였고, 이와 함께 고치카이를 탈퇴하였다 하지만 자유민주당 총재에는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당선되었다.

2010년에는 자민당 국회대책 부위원장 및 홍보본부장 대리에 취임하였고, 2011년에는 자민당 조직운동본부장에 취임하였다. 2012년 4월에는 우정민영화법 개정안 표결에서 자민당의 찬성 당론에도 불구하고 반대에 투표하였다.


4. 관방장관 재임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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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방장관에 재임하던 2013년의 모습
2012년 9월 아베 신조가 자유민주당 총재에 취임하면서 동시에 자유민주당 간사장 대행으로 기용되었다. 2012년 12월 열린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민주당의 미무라 카즈야의 부활을 저지하고 압승하면서 6선에 성공하였다. 그 결과로 2012년 12월 26일에는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이 출범하면서 후지무라 오사무의 뒤를 이어 내각관방장관에 임명되었다. 2013년에 우정 민영화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본우정사장 사카 아쓰오를 취임 6개월 만에 퇴임시키고, 고문직에서도 해임하였다. 같은해 발생한 알제리 인질사건 때에는, 방위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출을 위해 전례 없이 일본 정부 전용기를 보내기도 하였다.

한편 2014년 5월에는 아베 대신 내각인사국 국장 인사를 주도하여, 국장에 내정되었던 스기타 가즈히로 대신에 가토 가쓰노부를 임명했다는 설도 있다. 전직 내각참사관이었던 다카하시 요이치에 의하면, 국장 인사를 통해 관료를 완전히 통제하에 두어 역대 관방장관 중 가장 강한 정보 수집 능력을 확보했다고 한다. 2014년 7월에 출연한 NHK '클로즈업 현대(クローズアップ現代)'의 방송내용에 대해, 방송 후 'NHK에 관저를 통해 간접적으로 압력을 행사했다.'고 보도되었으나, 스가 요시히데 본인은 이를 부인하였다. 또한 2014년 11월에는 중의원 해산을 통해 총선거를 집행할 것을 아베 신조 총리에게 진언하였다고 한다. 관방장관이 된 이래로 2번의 중의원 총선거에서 연승하여 현재는 8선 의원이다.

관방장관을 지내면서 2기 아베 내각을 7년 이상을 이끌게 한 것도 스가 요시히데의 공도 크다는 것이 정설이다.

2019년 12월 19일 모치즈키 요시오 의원이 사망하자 스가 요시히데 관방 장관은 19일 오후 기자회견에서 "모치즈키 요시오 의원은 환경대신으로서 제염 토양 등의 중간저장시설 건설 등 후쿠시마현 부흥과 지구 온난화 대책에 매우 열심히 노력하셨다. 갑작스런 사망 소식에 놀라 유감스럽다. 삼가 명복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내가 당선 동기이며, 그런 의미에서 매우 괴롭다." 하고 말했다.

2020년 코로나 사태로 도쿄 올림픽이 무사히 개최될 수 있을지 회의적이던 시점에서,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IOC나 조직위원회, 도쿄도와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준비를 착실하게 진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전날까지 도쿄 올림픽에 관해 ‘예정대로’ 개최하기 위해 준비한다고 언급했는데 이날은 예정대로라는 표현을 삭제한 점이 눈에 띈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가 올림픽 연기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 하는 관측이 나왔다.

25일 NHK 등 일본 주요 매체에 따르면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은 정례 브리핑을 통해 이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아베 신조 총리와 가진 전화통화에서 잘했다고 말했다 전했다. 스가 장관은 또 두 나라 정상이 우한 코로나 감염증(코로나19) 치료제 개발 등과 관련해 긴밀한 협력을 계속 하기로 합의하고 북한 정세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고 전했다. 그는 도쿄올림픽 개최 시기에 대해서는 "늦어도 2021년 여름까지 개최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하면서 "구체적인 일정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최종 결정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도민들의 사재기가 심해지자 급기야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26일 기자회견에서 이 같은 사재기 현상에 대해 "올바른 정보에 근거해 냉정하게 대응하길 부탁하고 싶다." 하고 당부했다.

일본에서 도쿄올림픽 연기를 발표한 뒤 확진자가 크게 늘었기 때문에, 그동안 감염검사에 소극적이다가 이제서야 더 적극적으로 하지 않느냐는 지적을 받았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이날 정례 기자회견에서 긴급사태 선언과 관련한 질문에 "긴급사태 선언은 국민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점을 고려해 다방면의 전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신중히 판단할 필요가 있다.", "현시점은 그러한 선언을 할 상황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코로나19 이유로 하루 1차례에서 하루 2차례 기자회견을 열되 통상 10~15분 정도인 회견 시간을 한층 엄격하게 운영해 늘어지지 않도록 하는 쪽으로 절충하는 쪽으로 바꿨다.#

아베노마스크에 대해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도 이날 기자회견에서 "배포 전 마스크를 회수해 검품하기 때문에 예정보다 배포가 늦어지는 것이 사실"이라며 "가능한 한 빨리 실시하겠다."라고 하였다.

2020년 코로나19 사태 때 정치적인 논의에서 아베 내각에서 배제되었다는 설이 돌기도 했다. 주요정책 결정 과정에서 아베 측근들에게 밀려 배제된 후 아베와도 사이가 틀어졌다는 게 요지. 이에 자민당 관계자와 친분이 있는 모 방송 패널 왈, 이 말은 사실에 가깝고 실제 아베 총리와 스가 장관의 사이가 서먹해지기도 했으나, 이후로는 다시 풀고 관계를 회복했다고 한다.

당내 파벌 갈등 구조에서는 본인이 무파벌(무계파)인 만큼 거의 중립을 표방했다.#

5. 자민당 총재로 선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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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대 자민당 총재 스가 요시히데
2020년 8월 28일 사임을 선언한 아베 신조 총리의 후임자가 될 가능성이 큰 인물로 일본 언론에서 거론하였다. 과거 아베파가 밀던 기시다 후미오는 대중의 지지가 별로 없고[10] 아베의 모호한 태도에[11] 발목이 잡힌 형국이고, 아소 다로는 각종 망언, 집권 시절의 실정들, 80대 고령으로 이미 당선권 밖이었다. 아베의 당내 라이벌이자 대외 온건파격인 이시바 시게루의 경우 여론조사상으로는 압도적 1위인데도 불구하고[12][13] 당내 입지가 약한 것이 흠[14], 고노 다로고이즈미 신지로는 아직 무게감이 약하다.[15]

그에 비해 스가 요시히데는 대중 지지도도 적당했다.[16] 아베 총리가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아베파도 이를 따르므로, 스가는 2021년까지 일할 관리형 총리로선 나쁘지 않다는 평을 받았다. 물론 2020년에 정말로 총리가 된다면 1년짜리라도 충분히 입지를 다질 기회는 있으므로 당에서 기반을 넓혀 선거를 승리하고 내후년 이후까지 총리 자릴 유지할 기회는 만들 수 있다. 그러니 다른 후보들도 2020년 총리 자리에 눈독을 들이는 것.

2020년 8월 30일, 후보로 꼽히던 사람들 중 제일 먼저 총재선거 출마의사를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에게 전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2020년 8월 31일, 총재 선거 방식을 둘러싸고 집권당 내에서 정석대로 당원과 의원들 모두 포함해 투표해야 한다는 의견과 코로나로 인한 긴급 시기이니 당원을 제외한 의원과 일부 지방정부 관계자들만 추려 간이 선거 방식으로 투표해야 한다는 의견을 두고 내분이 일었다. 스가는 기자가 이에 대해 견해를 묻자 답변을 회피했다. 헌데 스가는 과거 2011년 민주당에서 치른 대표 선거[17]를 두고 비슷한 일을 겪었을 때 자신의 블로그에 민주당의 간이 방식을 비판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간이 선거 방식이 자신에게 유리해보이니[18] 입을 다무는 것 아니냐는 내로남불 지적이 나왔다.#

9월 1일, 자민당이 당원을 제외한 의원들과 일부 지방 정부 관계자만 투표하는 간이 방식을 채택했다. 이 덕분에 스가가 차기 총리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현 자민당 최대 파벌인 호소다파에게 지지를 받고, 간사장인 니카이와 부총리 아소도 지지를 선언하였기 때문에, 스가는 이미 큰 파벌 세 곳에서 당내 총재선거 의원층 유권자의 1/3 이상 지지를 차지했다. 또한 고노 외무상이 출마를 포기하면서 스가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하여 남은 유동층까지 상당수 흡수했다. 총 535표 중 의원 394표의 60% 가량인 230여 표를 이미 확보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시바는 당내 의원들에게 지지기반이 약하고, 기시다는 대중 지지가 낮은 것에 더해 아베 총리와 아소 부총리가 이끄는 아소파에게 외면을 받았다. 그래서 스가가 과반을 차지하냐 못하냐가 중요쟁점이 되었다. 일본 언론 정치부는 차기 내각은 스가 내각이 된다는 전제로 총리 교체 후 정국을 분석하는 기사를 연일 내보내는 등, 일본 내부의 분위기는 이미 큰 이변이 없는 한 스가가 된다는 예측으로 기울었다. 그만큼 일본 정치판에선 당내 파벌이 중요하다.

9월 2일, 기자회견을 열고 2020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이 자리에서 스가 장관은 국난 상황에서 정치 공백이 결코 있어서는 안된다며 "아베 총리의 정책 계승"을 강조했다. 아베 2호[19] 이 기자회견에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 정권에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늦어도 이듬해(2021)엔 오염수를 바다로 방출하겠다고 시사한 것으로 해석되어 우려가 크다.##

같은 날 니혼TV와 한 인터뷰에서는 아베 내각의 3대 스캔들인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가케 학교 비리 사건·벚꽃 스캔들이 모두 이미 끝난 일이라 재조사는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아사히 신문은 이에 대해 스가 장관도 의혹의 당사자인 만큼 3대 스캔들에 대해 계속 추궁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총재 공약

9월 6일,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해 1965년 체결된 청구권협정으로 이미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된 사안이라는 아베 신조 내각의 입장을 반복했다.# 한국에서 강제 징용 사건 관련 대법원 판결에 따른 후속 조치에 들어갈시 모든 보복 조치를 검토하겠다고도 발언한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스가 요시히데 본인이었으므로 스가가 후임 총리가 되더라도 아베 정권 시절 악화될대로 악화된 한일관계가 더욱 악화되었으면 악화되었지 결코 개선되지 않으리라는 것이 주된 여론이다.[20]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투표권을 쥔 의원들을 통해 지지동향을 조사해 본 결과 현역 의원들이 78%가 이미 스가 장관을 지지한다고 나타났다. 이는 이번 경선에 배정된 전체 표의 58%에 달하는 것으로 이미 1차 투표에서 당원들의 표심에 관계없이 스가 장관의 당선이 거의 확정됐음을 시사한다.#

9월 8일 열린 정견 발표회에서는 아베 정권 계승 의사와 함께 불임 치료에 건강보험 적용을 실현하겠다고 공언했는데, 2015년에도 이와 같은 취지의 제안을 한 후에 "아이를 낳아 국가에 기여하라." 하고 말을 덧붙였다가 비판을 받았던 전례가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한편 스가 요시히데의 자민당 총재 당선이 유력해지자 고향 아키타현 유자와시에서는 벌써부터 시의 중앙공원에 스가의 동상을 설치하는 방안을 논의했다고 한다.#

9월 10일 기자회견에서 "저출산에 대응하기 위해 장차 소비세 인상이 불가피하다."라고 언급했다가 파문이 커지자 하루 만에 "10년간 인상할 필요가 없다." 하고 번복했다. #

안 그래도 현 10%의 소비세를 다시 8%로 되돌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자민당 내부에서도 나오는 마당에, 그것도 저출산에 대응하기 위한다면서 감세가 아닌 거꾸로 증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으니 정치권은 물론 국민들의 반응은 대단히 차갑다. 경쟁 중인 이시바 시게루 후보 역시 소비세는 역진성이 심해 증세에는 신중해야 한다며 스가 후보를 비판했다.

실제로 일본에서 소비세 증세 문제로 수많은 정치인들이 낙마했는데 가장 최근의 세 총리만 봐도 2010년, 민주당 정권 시절 간 나오토 총리가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소비세 증세 문제를 꺼내들었다가# 참패해 정권 붕괴의 서막을 연 바 있고, 2012년 노다 요시히코 총리 역시 자민당의 도움을 받아 소비세를 증세하기로 합의한 후 치러진 총선에서 정권을 자민당에게 다시 내주고 말았다. 자민당 정권 복귀 이후 아베 신조 총리 역시 앞선 사례를 우려해 소비세 인상을 2차례나 연기했다가 2019년 10월 전격 단행했는데 이후 지지율이 내리막길을 걸었다.#

12일 열린 공개 토론회에서 중의원 해산 및 차기 총선 시기에 대해서 "신임 총리가 결정할 일"이라면서 말을 아꼈다.#

9월 14일, 투개표 결과, 스가 관방장관이 도도부현 지부 연합회 대표 투표에서 141표 중 89표(63.12%)를 획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나마 약점이 될 것으로 꼽힌 지방 투표에서도 과반 이상의 표를 획득함으로써 사실상 압승이 확정되었다.

의원 투표 결과와 도도부현 투표 결과를 합한 최종 득표수에서 534표 중 377표, 70%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다른 후보들을 크게 앞서며 총재로 당선되었다.[21]

총재 선출 정치권 반응
총재 선출 각계 반응
총재 선출 해외 반응(한국 포함)
총재 선출 전문가 분석

고향 아키타현 유자와시에서도 개표 결과를 유심히 지켜봤다고 한다.# 여담으로 16일, 중참 양원의 공식 지명을 받아 총리 자리에 오르면 아키타현 출신 최초의 총리가 된다.

신임 총재 취임 기자회견에서 과감히 인재를 등용하겠다고 발언했다. 원래 소폭 개각 또는 기존의 아베 내각을 유지할 것이란 인식이 많았지만 본인의 정책에 맞는 인사를 새롭게 등용하겠다는 것. 더불어 파벌의 야합으로 자리를 얻었다는 일각의 비난을 의식해서인지 기존의 기득권과 나쁜 전례를 깨나가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며 파벌의 폐해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신 내각 발족을 앞두고 4년전부터 임기를 이어온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을 유임시키기로 했다.# 그 외에도 아소파로 분류되는 사토 쓰토무 전 총무대신을 당 총무회장에 앉히기로 하면서 자신의 경선 승리에 큰 공헌을 했던 두 파벌를 안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밖에도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대신과 모리야마 히로시 국회대책위원장도 유임시키기로 정리가 됐다는 TV아사히 보도가 나오는 등 앞선 포부와 다르게 아베 내각과 인선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15일, 새로운 자민당 체제를 출범하고 임시 총회를 열었다.# 같은 날 당직 인선을 진행했는데 예상대로 니카이 간사장을 유임시키는 등 아베 시절 자민당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선을 선보였다. 여담으로 총재(71세) 및 이날 임명된 니카이 간사장(81세), 사토 총무회장(68세), 시모무라 하쿠분 정조회장(66세), 야마구치 다이메이 선대위원장(71세) 5명의 나이를 평균 내면 무려 71.4세가 되었다.##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대신에 따르면, 2021년에는 2020 도쿄 올림픽 개최가 예정되었기 때문에 조기에 중의원 해산 후 총선을 치러야 할 것 같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6. 총리 시절[편집]


9월 14일, 경선에서 거의 몰표를 받아 자유민주당 총재가 되었다. 이제 스가는 레이와 시대 두 번째 총리이자 나루히토 덴노에게 임명[22]을 받는 첫 총리가 되었다. 레이와 연호의 발표자가 그 레이와 시대의 천황의 인준을 처음으로 받는 우연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관방장관 자격으로 헤이세이 연호를 발표했던 오부치 게이조 총리는 헤이세이 시대의 9번째 총리[23]이면서 아키히토 덴노의 (명목상) 10번째 임명[24]을 받은 바 있다.

'포스트 스가'가 될 내각관방장관 자리에는 가토 가쓰노부 후생노동대신이 후보로 떠올랐으며, 그외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대신,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대신 등 아베 신조의 신뢰를 받던 주요 각료들은 유임된다고 전망했다.#

스가 요시히데 내각 명단

아소 다로, 고노 다로, 모테기 도시미쓰 등 아베 내각 내 주요 각료가 예상대로 잔류했고, 아베 신조 총리의 동생 기시 노부오가 방위대신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입각하는 등 전반적으로 파벌 안배에 철저하게 초점을 맞췄던 아베 내각의 연장선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들 20명 각료의 평균 연령이 60.38세로 상당히 높은 편인데, 직전 제4차 아베 신조 2차 개조 내각 시절보다 불과 1.17세 낮아졌다. 일본 정계의 노령화를 반영하는 수치인 셈.[25][26]

파일:스가_요시히데_1차_내각.jpg

9월 16일. 오후 1시 47분 먼저 중의원에서 462표 중 314표를 받아 중의원 총리 후보로 지명되었다.[27] 직후 2시 12분 참의원에서도 242표 중 142표로 참의원에서 정식 지명을 받아 중참 양원에서의 지명 절차가 끝났다.# 오후 8시 30분에 나루히토 덴노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남아있던 아베가 그 임명장에 내각총리대신 명의로 마지막 부서를 하고 직을 인계하면서 총리로서의 임기를 공식적으로 시작하였다.

총재 선거 경쟁했던 기시다와 이시바 반응
총리 선출 정치권 반응
총리 선출 각계 반응
총리 선출 해외 반응
고향에서의 반응
지역구 반응
무파벌이 총리가 되는 과정

6.1. 2020년[편집]


스가 1차 내각 구성은 이시바 시게루기시다 후미오 측 인사도 내각 구성에 포함하는 등 최대한 계파 안배에 힘쓰는 모습이다. 기사 아베 신조 시절 정적인 이시바 파의 인사는 철저하게 내각에서 배제시킬 정도로 이시바에 대한 정치 보복을 했는데, 스가 수상은 아베와는 달리 이시바 파에 대한 배려를 했다.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최대한 일본 자유민주당의 당내 분란 소지를 없애겠다는 정치적 포석으로 풀이된다.

오후 9시에 총리 취임 이후 첫 기자회견을 가졌다.# 국민들이 일상 생활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아베의 정책을 계승해 나갈 것이라고 언급했다. 한편 같은 날 관저 인터뷰에서 "국민을 위해 일하는 내각을 스타트(start)해 확실한 성과로 국민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 하고 소감을 밝혔는데, 이 때문에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나 심지어 극우 성향인 비토 다케시 등에게 지금까지 아베 내각은 일하지 않는 내각이었다는 소리냐는 비아냥을 들었다.#

다음 날, 17일 총리 관저에서 인터뷰를 하였다.# 이에 맞춰 금융완화 정책을 유지키로 했다.# 마이니치-JNN 여론조사에서 발표된 첫 내각 지지율은 64%로 나타났다. 이는 2차 아베 내각 출범 이후 52%보다 12%p나 높은 기록으로 2010년 민주당 정권 시절 간 나오토 내각 출범 직후 지지율(66%) 이후 최고 기록이다.# 같은 날, 아베 내각의 발목을 잡은 스캔들로 발전했던 벚꽃을 보는 모임을 내년부터는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18일. 닛케이와 TV도쿄는 16, 17일 양일에 긴급 여론 조사를 실시했는데 내각 지지율은 74%로 정권 출범 당시로서 3번째로 높은 수치이다.#[28] 지지 이유도 인품이 가장 컸다. 같은 날, 내각 출범 후 처음 열린 각 부처의 사무 차관이 참석해서 행정의 종적 관계와 전례주의 타파에 노력 대담한 규제 개혁을 진행하도록 지시했다.# 그 중 하나로 내세운 것이 휴대폰 요금 인하 정책이다. 내각관방장관 시절부터 통신사 3사(NTT도코모, KDDI, 소프트뱅크)가 통신 시장을 독점해왔다고 주장하며 경쟁을 통해 요금을 인하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20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 회담을 가졌다.#[29]

21일 요미우리신문에서 19∼20일 일본 유권자를 상대로 실시한 전화 여론조사에서 스가 내각 출범 지지율은 74%를 기록했다.# 이 역시 역대 3위 기록으로 1위는 2001년 자민당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 2위는 2009년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었다.

9월 22일, 국제수로기구에서 동해 명칭 문제에 관해 숫자 표기를 사용하기로 합의하자 스가 총리는 이에 대해 명확한 거부 의사를 밝히지 않고 묵인[30]했으며, 해당 안건은 IHO 총회에서 무난히 가결될 듯하다.기사

9월 23일, 업무 전산화를 위한 디지털청을 내년 가을까지는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날, NHK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62%가 나왔다.#

24일. 문재인 대통령과 전화통화 회담을 하였다.#

25일. 디지털화 목표를 2025년까지로 잡았다.# 같은 날, 시진핑 국가주석과 전화 통화 회담을 가졌다.# 같은 날 아베 정권의 내각관방 고문 4명을 재기용하고 전 정무비서관 이마이 타카야(今井尚哉)[31]도 내각관방 고문으로 기용했다.

26일. 유엔 총회 화상 연설에서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해 조건 없이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나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한편 같은 날, 취임 후 첫 지방 방문으로 후쿠시마를 선택해 원전 상황을 시찰했다.#

29일. 내각 출범 이후 첫 자민당 이사회를 열었다.# 교도통신 논설부(副)위원장을 지낸 가키자키 메이지(枾崎明二)를 총리 보좌관으로 기용하기로 결정했다.# 푸틴 대통령과 전화 통화 회담을 가졌다.#

10월 1일. 일본 학술회의 새로운 회원에 대해 회의에서 추천한 후보자 중 진보성향 학자 6명을 임명하지 않은 것이 관계자 취재로 밝혀졌다.# 이들은 아베 정권의 안보관련 법안 추진을 비판한 전력이 있다. 이에 정부를 비판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길들인다는 비판이 나왔다.[32] 같은 날, 2025년까지 농수산물 수출액 2조 엔을 달성하라고 지시했다.#

학술회의 문제는 학문의 자유 논란으로도 번지자 항의성명을 잇따라 발표되었다.#

10월 1일,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 대해 일본 스가 정부는 공식적으로 양국의 전쟁 행위를 즉각 중단할 것이며, 전쟁 행위를 선동하는 언동을 하지 말고[33] 대화에 나서라고 촉구하였다. 일본이 양국간 영토 문제에 대한 중재의 용의가 있다고도 말했다. 기사 사실상 아르메니아 쪽으로 기울어진 의사표현으로, 터키아제르바이잔은 일본의 제안을 즉각 거부했다.

5일. TBS와 JNN 첫 여론조사에서 스가 내각의 지지율이 70%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일본 학술회의 회원 후보의 학자 6명의 임명을 보류 한 것에 대해서는 51%가 '타당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같은 날, 스가 총리가 학술회의 회원 6명 임명을 보류한 것에 대해 학문의 자유와 무관하다는 해명을 내놓았다.기사

6일. 학술회의 임명 보류에 대한 반발시위가 일어났다.# 네이처에서도 이를 비판했다.# 추천 목록은 파악만 했다는 점이다.#

7일. 첫 규제 개혁 추진 회의가 열렸다.# 총재선거 지지 보답으로 니카이파 파티에 참석했다.#

이후 스가 내각에서 논란에 대해 사과하기는 커녕 아예 일본 학술회의를 행정 개혁의 대상으로 삼아 운영 및 조직에 대한 재검토에 착수했다고 드러났다.# 이 와중에 시즈오카현지사인 가와카쓰 헤이타가 스가 총리의 임명 거부 건을 비판하면서 스가의 학벌까지 거론하면서 비판해 역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34]

11일. 산케이 신문에서 스가 총리의 연내 방한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리고 스가 총리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회동을 가졌다.#

12일. NHK 여론 조사에서 스가 내각 지지율이 지난달보다 7%p 하락한 55%를 기록했다.# 한편 스가 총리는 강제 징용 문제와 관련해 일본의 요구가 수용되지 않으면 서울에서 열릴 예정인 한중일 정상회의에 불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편 스가 총리 임기 초반 아킬레스건이 된 학술회의 논란과 관련하여 최초 학술회의에 추천됐던 105명 중에 진보 성향 학자 6명을 제외해 보고한 것이 스기타 가즈히로(杉田和博) 내각부관방장관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총리 본인이 9일 인터뷰에서 105명 중 99명의 명단만 봤을 뿐이라며 105명 전체 리스트를 직접 보지 않았다고 해명한 것을 증거로, 총리의 결정이 아니라면 배후에 누군가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고 도쿄대학 교수진이 임명되지 않은 6명의 추가 임명을 요구하는 14만 명 서명을 내각부에 제출했다.#

16일에 성장 전략을 논의하는 회의를 신설하고 애널리스트 데이비드 앳킨슨을 기용한다.# 같은 날, 학술회의 회장과 회담을 하였다.#

17일, 야스쿠니 신사 가을 큰 제사(추계예대제)에 공물을 봉납했다. 아베 신조 총리도 즐겨 사용하던 방식으로 직접 참배에 따른 외교적 부담을 덜면서 국내 정치적으로는 사실상의 참배 효과를 노린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유감을 표명했다.# 오후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국장에 참석하여 추도사를 통해 "필요한 개혁을 실행하고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공헌했다." 하고 추모하고 "선생이 추진하신 개혁의 정신을 이어받아 국정에 전력을 기울일 것을 다짐한다." 하고 말했다.#

18일부터 4일간 인도네시아 등에 첫 해외순방에 나섰다.#

교도통신이 17, 18일에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내각 지지율이 5.9%p 감소한 60.5%을 기록했다.# 아사히 신문이 같은 기간에 조사한 여론조사에서도 12%p 감소한 53%를 기록했다.## 두 언론사 모두 폭락의 원인으로 상기한 학술회의 진보성향 학자 임명 거부와 관련된 논란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했다.### 실제로 보수 성향이 강한 요미우리신문에서도 학술회의 건에 대해서 여론 조사를 진행한 결과, 납득할 수 없다가 47%를 기록하며 납득한다의 32%를 크게 상회한 바 있다.

스가 내각은 학술회 임명 거부에 대해 정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고 '법에 근거하여 임명을 거부하였다'고 해명하였는데, 지지자들조차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한 것에 큰 실망을 나타냈다. 아베 신조 내각의 가장 큰 문제점이 국민들에게 어떤 사건이 있을때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는데, 아베 내각 2기인 스가 내각 또한 같은 문제점이 반복되고 있는 것. 쉽게 말해서, 아베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믿었는데 전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니 실망하는 층이 생기고 있는 것. 애초에 아베랑 불화설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원래부터 아베를 뒤에서 열심히 밀어주고 아베 정권에서 꾸준하게 장관으로 일한 사람한테 아베랑 전혀 다른 모습을 기대했다는 것부터가 허황된 꿈이나 마찬가지였다.

10월 21일, 스가 총리는 일제 징용 피해자 소송 문제와 관련해 한국에서 압류된 일본 기업의 자산이 현금화되면 한일 관계에 매우 심각한 상황이 초래되므로 절대로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같은날, 한국에서 열린 외통위 국정감사에서는 남관표 주일대사가 비대면으로 출석하여 강제 징용 및 압류 문제와 관련해 "본인(스가 총리) 스스로 현실주의적인 어프로치(접근)를 하고 있다.", "국민 생활과도 관련이 있어 조금 진전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하며 조금 다른 목소리를 냈다.##

2050년까지 탄소 제로를 선언했다.# 납북 일본인 가족 모임에 다시 참석했다.#

닛케이 신문와 도쿄신문이 23 ~ 25일 여론조사에서 스가 내각의 지지율은 9월 이전 조사에서 11% 감소한 63%였다.#

26일 NHK에 출연해 일본 학술회의 문제 대해 회원 구성이 "일부 대학에 편중돼 있다." 지적하면서 젊은 학자와 지방 출신 등도 선임해 다양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입헌민주당 등 야당에서 특정 대학과 지역 편중이 줄어나가고 있다고 반박했다.#

내각 재산공개를 했는데 평균 1억 652만 엔이다.#

11월 1일. 실시된 오사카시 폐지 및 특별구로 전환을 묻는 주민투표가 근소한 차이로 반대 의견 다수로 결론나 이를 주도한 일본 유신회는 치명상을 입었고 반대로, 스가 총리로선 입지가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2일. 중의원 예산위에서 다시 한번 일본 학술회의가 기득권 위주이고 폐쇄적이라며 비판했다.# 6명 임명 보류는 반정부라는 이유이다.#

11월 3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스가 총리가 지난 9월 26일 후쿠시마 제1원전을 방문했을 당시 도쿄전력 관계자가 원전 오염수를 정화 처리한 물에 대해 "희석하면 마실 수도 있다." 하고 설명하자 "마셔도 되냐?" 반문했다고 한다.

결국 스가 총리는 당시 오염수를 실제로 마시진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아사히신문은 "설사 스가 총리가 마셨다고 해도 오염수에 대해 '안전하다'거나 '그러므로 바다에 흘려보내도 괜찮다'는 인식이 세간에 퍼지진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1 2

7일. 마이니치 신문 전국 여론 조사에서 내각 지지율은 57 %로 내각 발족 직후 64%에서 7% 하락했다.#

9일. NHK 여론조사에서 내각 지지율이 56%로 지난달보다 1% 올랐다.#

10일 박지원 국정원장과 면담을 가졌다.# 다만 기존처럼 한국에게 징용 문제 관련 해법을 제시하라는 태도는 바꾸지 않았다.

내각부에서는 학술회의가 6명 후보를 다시 추천하는 것에 대해서는 배제하지 않겠다고 의견을 밝혔다. 다만 가토 가쓰노부 내각관방장관은 기존 6명을 다시 추천하는 것도 배제하지 않냐는 입헌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피했다.# 여기에 더해 제2차 아베 내각 때부터 대법원 인사에도 개입했다는 사실이 추가 폭로되었다.#

13일. 지지통신이 6~9일에 실시한 11월 여론 조사에서 스가 내각의 지지율은 전월 대비 2.9% 감소한 48.3%를 기록했다.# 학술회의 논란이 불거진 이후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15일 열린 우츠노미야시의 시장 선거에서 연립 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이 함께 추천한 사토 에이이치 현 시장이 65.6% 득표해 입헌·사민·공산이 함께 추천한 스도 히로시 후보를 큰 차이로 누르고 승리했다.

16일, 아사히신문 조사에서 지난달보다 3% 오른 56% 지지를 받았다.#

17일,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수상관저에서 만났다. 아베 신조 전 총리와 같이 서로를 애칭으로 부르며 친근함을 보였다고 한다. #

하지만 소강 상태로 바뀐듯했던 벚꽃스캔들이 아베의 퇴임 이후 11월 들어 검찰이 다시 정조준하면서 다시 점화되었다. 관방장관 시절에 아베의 입 노릇을 하며 아베의 혐의를 부정했던지라 스가 역시 이 스캔들에 강력하게 연루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게다가 홋카이도 2구의 요시카와 다카모리 전 농림상이 히로시마현의 양계장 관련해서 현금 수백만 엔을 제공한 혐의로 수사 중이다.# 12월 21일. 건강상의 이유로 중의원을 사의하였다.#

11월 29일 있었던 가고시마시 시장 선거에서 자민당이 추천한 우에카도 히데히코 전 가고시마 시의회 의장이 15.9% 득표에 그쳐 3위로 낙선했다. 당선되지 못함은 차치하더라도 당 해체 직전에 놓인 사민당이 추천한 후보(마쓰나카 노리요시)에게도 큰 격차로 밀렸다.

27 - 29일 닛케이, TV도쿄 공동 여론조사에서 내각 지지율이 58%로 지난달에 비해 5% 떨어졌다.#

12월 5, 6일에 실시한 전화 여론 조사에 따르면 스가 내각의 지지율은 50.3%로 지난 11월에 비해 12.7% 급락했다.# JNN 여론조사에서도 지난달보다 11.5% 하락한 55.3%가 되었다.# 요미우리 신문은 지난달보다 8% 떨어진 61%이다.# 학술회의 논란이 마무리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벚꽃 스캔들이 재점화된 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들 보았다. 스가 총리의 허니문 기간이 끝났다는 분석도 나왔다.

코로나19가 하루 평균 2천 명에서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관방장관 시절부터 추진해온 고 투 트래블(go to travel) 정책을 포기하지 않자, 대표적 극우/친정부 매체인 산케이 신문조차 비판했다. 심지어 원래 코로나19 대처로 일본 내에서 상대적으로 좋은 평을 듣던 오사카와 홋카이도에서까지 확진자가 늘어나서 안 좋은 평을 들었다.

11일. 니코니코동화에 정치 평론 프로그램에 깜짝 출연했다.#그리고 GoTo 캠페인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11일 - 12일 실시한 마이니치 신문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40%로 지난달에 비해 17%나 떨어졌다.# 마이니치 여론조사 기준으로 처음으로 긍부정 비율이 역전되었다. 취임한 지 불과 석 달 만에 역전되었다

11일 - 13일 실시한 NHK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42%로 지난달에 비해 14% 떨어졌다.#

2021년 9월에 설립되는 디지털청의 설치비용을 약 81억 엔으로 결정하기로 합의했다.#

18일, 나루히토의 즉위에 따라 심사를 통과한 수형자(성범죄자, 선거법 위반자 제외) 28명을 특별사면(형의 집행 면제 및 복권)하기로 결정했다.# 사형수 대상이 아니다

19 - 20일.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서 내각 지지율이 지난달 56%에서 무려 39%까지 떨어졌다.#

21일, 데이터청 설립 및 코로나19 대응을 명목으로 1979년 이후 42년 만에 국가 공무원 총원을 늘리기로 했다.# 같은 날, 일본의사회, 일본간호사협회, 일본병원회 등 의료 관련 9개 단체는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코로나19 감염 확대로 통상적인 의료를 제공할 수 없게 될 우려가 있다고 경고하며 '의료 긴급사태선언'을 발표하며 긴급사태를 선언했다. ##

25 - 27일. 닛케이와 TV도쿄 공동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42%로 지난달 비해 16% 떨어졌다.# 연이어 여론조사에서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31일, 태평양 전쟁 당시 바다에 수장된 전몰자 유골을 수습하기로 했다.# 1994년 당시 국회 답변에서 '바다 자체가 전몰자의 영면 장소라는 인식도 있어 (수습은) 원칙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던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을 뒤집은 것이다. 주요 후보지인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축 섬에서 당시 식민 지배를 받았던 조선인 유골도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같은 날, 분쿄도 서점에 있는 역사학자 이소다 미치후미(磯田道史)의 저서 '감염증의 일본사(史)'를 구입해서 연휴기간 동안 읽을 것이라 하였다.#

6.2. 2021년[편집]


1월 1일, 정무 담당 비서관을 교체하였다.# 그 와중에 마이니치 신문에서 중국산 코로나19 백신인 시노팜을 몰래 들여와 스가 총리 측근이 이미 접종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3일, 산케이 신문와 인터뷰에서 북한 김정은과 정상회담을 하고 싶으며, TPP에 미국과 중국이 가입하는 문제에 대해 발언했다.#

4일에는 신년 기자회견 자리를 가졌는데,전문 같은 날 지지율이 30%대에 머물자 슈칸 아사히(週刊朝日) 1월호에서 3월 말 퇴진 의사를 표명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 경우 중의원 해산 일정을 2020 도쿄 올림픽 이전으로 앞당길 가능성이 높다.

7일. 코로나 확산세가 폭발하며 신규 확진자가 6천여명에 달하자 일본내 코로나 확진자 발생의 절반을 차지한 도쿄도와 가나가와·사이타마·지바현 등 수도권에 긴급사태를 다시 선포했다. 일본 수도권에 사회적·경제적 계엄(戒嚴)을 의미하는 긴급사태가 다시 선포된 것은 지난해 4월 이후 9개월 만이다.

11일. TBS와 JNN 공동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41%로 지난달에 비해 14.3%나 떨어진 것이다.# 12일. NHK 여론조사에서도 지지율이 긍정 40%, 부정 41%로 역전되었다.#

코로나19 확산세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비상사태 선포 확대 등 뒷북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효과를 크게 보지 못하고 있고 연일 언론들도 이에 대해 질타하고 있다. 더불어 긴급사태 기자회견에서 '후쿠오카'를 '시즈오카'로 잘못 말하면서 일본 여론이 들끓는 일도 있었다.[35] 게다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건강 악화설이 나오는 실정이다.# 여론 악화로 4월 보궐선거에서 패한다면 스가 총리가 조기에 낙마할 수 있다는 예상이 나왔다.

마이니치신문 정례 여론조사에서 스가 내각에 대한 지지율이 33%까지 급락하였다. 집권 자유민주당 지지율 역시 33%에서 28%로 5%p 하락하였다. 이 때문에 집권 자민당 내의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마이니치신문 여론조사에서 중의원 총선거 이후 나올 차기 수상 후보 지지율은 고노 다로 행정개혁담당상이 12%,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이 10%, 스가 요시히데 현 수상이 8%로 나타났다. 기사, 원문

1월 15일, 아베 신조 4차 개조 내각 당시 농림수산상을 지냈고 자신의 측근으로 유명한 요시카와 다카모리가 전격 불구속 기소되자 관저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요미우리신문이 15 ~ 17일 실시한 전국 여론 조사에서도 스가 내각의 지지율이 긍정 39% - 부정 49%로 역전되었다.# 취임 넉 달 만에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 셈. 출범 4개월 하락 폭으로는 아소 다로 · 하토야마 유키오 두 내각의 30% 포인트 하락 기록을 넘어 역대 최대치라고 보도했다.

18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2020 도쿄 올림픽 개최, 코로나19 대응 문제, 디지털청 등에 대해 언급했다.전문

23, 24일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서 스가 내각 지지율이 33%로 지난달 비해 6% 떨어졌다.# 아사히 조사에서도 처음으로 긍·부정 비율이 뒤집어졌다.

후임 총리 유력 후보인 고노 다로 행정개혁담당상에게 백신접종담당상 자리를 겸임시켰다.[36] 그런데 1월 22일 각료회의가 끝난 뒤 인터뷰에서 고노 행정개혁상이 "아직 백신 공급 일정은 정해지지 않았다.", "전망은 백지상태"라고 밝혀 파문이 일었다.# 전날 6월까지 전국민 접종에 필요한 백신을 확보할 것이라는 사카이 마나부 내각관방차관의 인터뷰와는 정반대 내용으로 코로나19 백신 확보와 접종 일정을 두고 일본 정부 내에서 혼선이 빚어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스가 총리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올림픽 개최에 맞춰 백신 접종을 완료할 수 없다는 점을 사실상 시인하면서도 6월까지 백신 접종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올림픽 개최를 강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37]

1월 24일, 여론 풍향계로 평가받던 야마가타현, 기후현 지사 선거에서 모두 보수 성향 후보가 패배하면서 또다시 쓴잔을 들이켰다. 특히 야마가타현 지사 선거에서는 자민당이 직접 후보를 추천했음에도 매우 큰 차이로 패하면서 연내 중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당내에서 우려했다.#

1월 28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공산당고이케 아키라 서기국장이 지난해 9월 자민당 총재 선거 당시 내각관방장관이었던 스가 총리가 내각관방에 배정된 기밀비 예산을 선거에 유용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자 그런 일은 일절 없었다며 사실을 부정했다.#

닛케이와 테레비 도쿄의 1월 29일 - 3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스가 내각 지지율 지난 달과 비슷한 43%에 그쳤다.#

교도통신이 2월 6일 - 7일 여론조사에서 38.8%로 지난 1월 조사 비해 2.5% 떨어졌다.# NHK가 5일 - 7일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38%를 기록, 지난 1월에 비해 2% 더 떨어졌다.##

지지통신은 지지율이 지난달 대비 0.6% 증가한 34.8%, 지지하지 않는다가 3.1% 증가한 42.8%이었다.# 아사히 신문 13 - 14일 여론조사에서 지지한다가 34%,비지지가 43%로 큰 변동은 없다.##

2월 18일, 니혼게이자이신문을 통해 경제산업성에서 종이 약속어음 사용을 2026년까지 중단하고 은행송금·전자어음 사용으로 전환하겠다는 정책 목표를 세웠다는 보도가 나왔다.#

작년 7월 모리셔스에서 있었던 와카시오 호 기름유출 사고 관련으로 주변 항해 선박을 감시하는 레이더 등을 정비하는 데 6억엔을 무상 지원하기로 했다. 아울러 정부개발 원조로 최대 300억엔까지 차관도 같이 제공된다고 한다. 스가 내각은 모리셔스의 환경과 어업의 회복, 재생을 위해 지속적인 지원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2월 26일, 도쿄도를 둘러싼 수도권을 제외한 오사카·교토 등 나머지 지역에서 코로나19 긴급사태를 조기 해제하기로 결정했다. 당초 계획은 3월 7일을 기한으로 긴급사태를 해제한다는 계획이었지만, 전체 10개 지역 중 6개 지역의 종료 시점이 일주일 정도 앞당겨진 것.#

니혼게이자이 신문과 테레비도쿄는 2월 26 ~ 28일 여론 조사에서 지지율은 44%이다.#

3월 5 ~ 7 일 실시한 전국 여론 조사에서 스가 내각의 지지율은 48%로 지난달 39%에서 9% 상승했다.# 이는 코로나19 확진 감소와 백신 기대라는 것이 크게 반영되었다. 마찬가지로 NHK도 40% 지지하여서 지지하지 않는다를 역전했다.#

동일본대지진 10주기 행사에서 지진으로 인한 큰 희생으로 얻은 귀중한 교훈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발언한 뒤 "방재 및 감재(減災)를 부단히 재검토해 재해에 강한 나라 만들기를 추진하겠다."라고 말했다.

지지통신의 3월 5 ~ 8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35%이다. 이는 지난 달의 0.2% 차이에 불과하다.#

3월 16일, 오전 도쿄 신주쿠에 소재한 한 병원을 방문해 화이자 사의 BNT162 백신을 1차 접종했다. 내달 8일 방미하여 조 바이든 대통령과 회담하고 10일 귀국하는 일정 때문이라고 한다.#

교도통신 3월 여론조사로 지지율은 42.1%로 지난 2월에 비해 올랐다.# 아사히신문 3월 여론조사에서도 지지율 40%로 지난 달 비해 6% 올랐다.#

스가 내각 지지율이 2021년 2월 저점을 찍고 상승세로 돌아섰는데 코로나19 대응과 관련하여 쌓였던 불만이 백신 접종 시작과 함께 조금씩 희석되고 있는 면이 반영되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하지만 이것이 스가 개인의 인기로 연결되지는 않고 있는데, 요미우리신문 여론조사에서 여전히 고노 다로 행정개혁담당상이 26%로 1위를 기록하고 있는 가운데 스가 총리 개인에 대한 지지율은 3%에 불과했다.#

3월 21일에 있었던 치바현지사 선거에서 민주당 출신 구마가이 도시히토 후보가 자민당의 추천을 받은 세키 마사유키 후보를 51.3%p라는 압도적인 격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여야의 대결 구도가 극명하진 않았으나 전반적으로 유권자들이 스가 내각에 불만을 품었음이 투표 결과에 어느 정도 투영된 듯하다. 한편, 스가 총리는 같은 날 열린 당 대회에서 중의원 선거에 대비해 결속이 중요하다고 호소했다.#

'생리 빈곤' 해소를 위해 생리용품 무료배포 예산으로 13억 5천만 엔(140억 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3월 30일, 역사수정주의를 기반으로 한 우익단체 '새역모'의 구성원이 작성했고 임나일본부설에 입각해 역사를 기술한 일본의 중학교 역사교과서가 30일 문부과학성의 교과서 검정 심사를 통과했다.# 그외 다른 역사 교과서에도 독도를 일본 땅을 기술하는 내용이 전 교과서로 확대되는 등 일본 우익들의 사관이 아예 역사 교육 전면에 나타나는 모습이 스가 정권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저출산 대책으로 일명 '어린이청' 설립 준비한다.#

요미우리 신문이 4월 2 ~ 4일까지 1,074명을 대상으로 전화 설문 방식에 따르면 스가 내각을 지지한다는 응답은 47%, 지지하지 않는다는 답변은 40%를 기록해 한 달 전(지지 48%, 부지지 42%)과 비교해 큰 변화가 없었다. 한편 같은 여론조사에서 스가 총리의 재임 기간에 대한 질문에도 자민당 총재 보궐선거로 확보된 임기인 9월까지만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무려 47%에 달했고 당장 그만뒀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12%로 나와 둘을 합치면 60%에 육박하는 정도로 나타났다.#

4월 9일 - 11일까지 NHK 여론조사에서 '지지한다'가 지난달보다 4% 오른 44%, '지지하지 않는다'가 1% 오른 38%를 기록했다.#

4월 13일, 오전 7시 45분에 개최된 각료회의에서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에 저장중인 방사능 오염수를 2년 뒤인 2023년에 해양 방출을 하겠다는 결정을 강행했다.# 그러나 지역 어민들과 시민단체들은 지속적으로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주변국, 특히 직접적인 타격이 예상되는 한국중국에서 공식적으로 거세게 반발했다.[38] 자세한 내용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참조.

방미를 앞두고 월스트리트 저널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중요성을 기고했다.#

4월 16일(현지시간), 전격적으로 미국을 방문해서 조 바이든 대통령과 미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당초 미국 측에서 코로나19 방지 관점 차원에서 계속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회담에 앞서 정상 간 일대일 대화의 시간을 달라고 고집한 것으로 알려졌다.## 저녁 만찬을 거절당한 대신 햄버거를 대접받고 점심시간 20여분간 독대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는 이를 “가련하다”고 평가했다.#

4월 20일, 21일부터 시작되는 야스쿠니 신사 춘계 예대제(제사)에 공물만 봉납하고 참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 역시 따로 참배하지 않는다고 한다.#

23일 있을 기후정상회의를 앞두고 온실가스 배출량을 2030년까지 2013년보다 46% 낮춘다는 방침을 정했다.#

2021년 4월 25일 치러진 2021년 일본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참패했다.# 참의원 2석(히로시마현, 나가노현)과 중의원 1석(홋카이도 제2구)이 걸려있던 선거였다. 스가 요시히데 총리 취임 후 첫 국정 선거에서 참패하면서 올 가을 열릴 중의원 선거의 악재로 작용할 예정이다.[39]

스가 총리는 재보선 참패에 대하여 "국민들의 심판을 겸허히 수용하고 더 분석해 바로잡아야할 점은 확실히 바로잡아 나가겠다."라고 밝혔다.# 동시에 7월말까지 백신 접종을 희망하는 고령층에게 2차 백신 접종까지 마무리 될 수 있도록 범정부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연중 백신 접종을 자신했음에도 5월 6일, OECD 국가 중 코로나19 백신 접종률이 꼴찌인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인구 중 2%만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한 상황으로 트위터 등 SNS에는 백신 접종 예약하기가 마치 "콘서트 티켓 쟁탈전을 하는 것 같다" 등 불만이 터져나왔다.#

5월 7일, 도쿄, 오사카, 교토, 효고 등 4개의 광역지역에 선포해 놓은 3번째 긴급사태를 오는 31일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일본에서 코로나19로 인한 긴급사태가 선포된 뒤 연장된 것은 이번이 3번째다. 만약 이번에도 코로나19 감염 상태 악화를 저지하지 못할 경우 7월 23일 개막으로 예정된 도쿄올림픽 역시 다시 한번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

한편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중의원 해산 및 차기 총선거와 관련해 자신의 자민당 총재 임기가 1차로 만료되는 9월말까지는 시행할 것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한편 아사히 신문의 폭로에 따르면 자민당의 내부분열 및 갈등이 전국 단위로 진행중이라고 한다.

요미우리 신문 5월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43%를 기록, 이전의 47%에서 4% 하락하였다.# JNN 여론조사에서도 40%로 스가 내각 출범 이후 최저를 기록했다.# NHK 여론조사에서도 긍부정 비율이 역전되는 등 다시 하락세를 보였다. 백신 접종이 좀처럼 진작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코로나19가 재확산한 여파로 풀이된다. 지지통신도 5월 여론조사에서 32%만이 지지를 나타냈다.#

5월 12일, 디지털청 설치법이 자민-공명 연립 여당 및 입헌민주당, 일본 유신회 등 야당의 지지를 받아 참의원을 통과됨에 따라 2021년 9월부터 새롭게 디지털청이 창설된다.# 스가 총리의 취임 공약이 드디어 하나 이루어지는 셈.

한편 한미일 3국 정보기관장 회의 참석차 일본을 방문한 박지원 국정원장이 스가 총리를 만나 ‘구두 친서’를 전달하고, 스가 총리로부터 한·일 관계 개선 필요성에 공감하면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고 화답을 들은 것으로 알려졌다.1 스가 총리는 관저 출입기자들과의 기자회견에서 사실관계 확인을 거부했지만2, 만남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아 일본 정치 화법 상 회견은 사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5월 14일 열린 경제재정 자문회의에서 (소득) 격차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최저임금을 올려야 한다"며 최저 시급 전국 평균 1천엔 목표를 조기에 실현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일본의 최저 임금은 시급 기준으로 전국 평균치가 현재 902엔 수준에 머물고 있고, 지역별로 다르게 적용되고 있기 때문에 편차가 심한 편이다.#

도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도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긴급사태 적용 지역을 확대하고 기간을 연장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으나, 여전히 확진자가 하루 7,000명을 기록하는 모양새가 되자 일본 재계에서도 올림픽 취소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일본의 대형 전자상거래 업체인 라쿠텐의 최고경영자 미키타니 히로시가 공개적으로 올림픽 개최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역시 올림픽 개최 강행에 대해 부정적인 의사를 드러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가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안전한 올림픽 개최가 여전히 가능하다며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2

5월 15일 ~ 16일 양일간 진행된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33%를 기록했는데 지난 4월에 비해 다시 7%나 급락했다.# 마이니치 신문에서 5월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31%로 이는 4월 40% 비해 9%나 급감했다. 일본에서 보통 내각에 레임덕이 찾아온 시점으로 판단하는 지지율 20%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

5월 28일 ~ 30일. 닛케이신문, TV도쿄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은 40%로 4월의 47%에서 7% 급락했다.#

6월 4일 ~ 6일. 요미우리신문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은 37%로 내각 출범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난 달 비해 6%나 더 떨어졌다.

6월 9일 열린 대정부 질의에서 코로나19 관련하여 국민의 사적 권리에 제약을 거는 국가들의 사례로 호주, 뉴질랜드, 대만 3개국을 언급했는데 여기서 대만을 '국가'로 했다가 11일에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이 기자회견에서 국가가 아니라 '지역'이라고 정정하는 촌극이 있었다.#

6월 11일, 참의원 본회의에서 국민투표법 개정안이 집권 자민당과 연립 여당인 공명당,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 등의 찬성 다수로 가결됐다.# 개정안에는 개헌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의 편리성을 높이기 위해 상업시설이나 역 등에 '공동투표소' 설치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 등이 포함됐다. 이로서 평화헌법 개헌을 위한 공식적인 첫발을 뗐다는 평가.

6월 11일 ~ 13일 동안 NHK 여론조사에서 스가 내각 지지율이 지지율이 37%이고, 비지지가 45%이다.# 또한 야당 쪽에서는 자민당이 임시국회 회기 연장안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6월 15일까지 내각불신임결의안의 제출을 검토중이라고 한다. 만약 총리가 이것을 수용한다면 내각 총사퇴를 할 수 있지만, 총리가 이를 빌미로 의회 해산을 강행한다면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치르게 된다.

결국 15일, 입헌-국민-사민-공산 4개당이 손을 잡고 내각불신임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로 합의하고 그 사실을 자민당에 통보했다. 일단 자민당 측에서는 유감을 표하면서 야당에서 내각불신임결의를 내도 즉각 부결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지만,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은 의회 해산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등 실제 중의원 해산 및 총선 정국으로 빠르게 시계가 움직일 수도 있다.# 만약 불신임안이 부결될 경우 16일을 마지막으로 일본 국회는 폐회된다.

한편 콘월에서 개최된 G7 정상회의에 참여했으나 계속해서 겉도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비판받았다.#

6월 15일 결국 자민-공명연합은 불신임 표결을 부결시켰다.[40] 정기 국회도 연장 없이 폐회하기로 결의하여 문을 닫았고, 스가 또한 의회 해산을 하지 않았다. 지금은 내각 지지율도 엉망이고 보궐선거에서는 텃밭에서도 패하는 등 판세가 좋지 않기 때문에 백신접종으로 만들어질 반등을 믿고 버티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이후에는 도쿄 올림픽 그리고 뒤이어 9월에는 자민당 총재 선거까지 있기에 의회해산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어서 제48회 일본 중의원은 1976년 34회 일본 중의원 이후 45년 만에 두 번째로 임기를 모두 채운 중의원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아주 높아졌다.

마이니치신문 6월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은 34%로 이전 31%에서 3% 증가했다.# 아사히신문 6월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은 34%로 5월 여론조사(33%)와 큰 차이 없다.#

6월 20일에 있었던 시즈오카현 지사 선거에서 입헌민주당과 국민민주당의 지원을 받은 현 가와카쓰 헤이타 지사가 자민당의 추천을 받은 이와이 시게키 후보를 60.5% vs 39.5%라는 큰 차이로 누르고 승리, 4선에 성공했다. 스가 총리로서는 지난 보궐선거에 이은 또 한번의 패배.#

7월 1일. 치바현 야치마타시에서 발생한 트럭 돌진 사고로 어린이 5명이 죽거나 다치자 현장에 와서 묵념했다.#

7월 4일 열린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지난 선거 대비 의석수를 늘리며 제1당 지위를 다시 탈환했지만, 도민퍼스트회의 예상밖 선전으로 목표로 했던 자민-공명 연합 과반 달성에는 실패했다. 교도통신에서는 선거 결과에 대해 스가 정권에 타격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이예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말만 했다.#

7월 12일에 나온 NHK 여론조사에서 스가 내각 지지율이 33%로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1 요미우리 신문은 지지율 37%로 도쿄에서는 28%를 기록했다는 점이다.2 지지통신은 7월 여론조사에서 29.3%로 모든 여론조사 중에서 첫 20%대로 돌입하였다.3 마이니치신문 7월 여론조사에서도 지지율 30%이다.#4 교도통신은 지지율 35%이다.# 연이은 여론조사 결과 발표에 일본 내에서는 스가 내각의 레임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7월 17일 지지율 하락과는 별개로 스가 총리는 요미우리 TV와의 인터뷰에서 총리 연임 도전을 기정사실화했다.#

올림픽 개막식을 이틀 앞두고 WSJ와의 인터뷰에서 결국 TV를 보다보면 유관중으로 바뀔 것이라는 발언을 하였다.#

올림픽 개막식에서 나루히토 덴노의 개막 선언 중 무심코 앉아 있다 뒤늦게 일어나는 모습이 포착되었는데 이 때문에 일본 국내에서는 옆에 있던 고이케 유리코 도쿄지사와 함께 세트로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다.

7월 23일 ~ 25일 실시한 닛케이xTV도쿄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34%로 지난달 비해 9% 떨어졌다.#

8월 6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서 열린 원폭 희생자 위령 행사에서 연설문을 엉터리로 읽은 것에 대해 사과했다.#

8월 7일 ~ 8일. 아사히신문의 여론조사에서 스가 내각 지지율이 28%로 처음으로 30% 밑으로 내려왔다.# 10일. 요미우리신문 8월 여론조사에서도 지지율이 35%이다.# 같은 날, NHK도 지지율이 29%나 나왔다.#

13일. 지지통신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지지율이 29%로 나왔다.# 14 ~ 16일. 교도통신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31%로 다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총선을 앞두고 8월 22일에 열릴 요코하마 시장 선거가 그 전초전으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 선거에서 자민당의 추천을 받았던 현직 하야시 후미코 시장이 재출마한 가운데 이례적으로 총리가 지방선거에서 다른 후보를 공식 지지하고 나서면서 보수 분열 양상이 됐기 때문. 스가 총리 본인의 측근이자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던 오코노기 하치로가 그 주인공인데 그 덕분에 입헌민주당, 사회민주당, 공산당은 이번 선거를 정권 심판 선거로 규정하고 야마나카 다케하루 후보를 지원하면서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15일. 일부 각료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동안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에 참배했다. 물론 참배만 다른 장소에 했을뿐 그 와중에도 야스쿠니 신사에 스가 총리 본인 명의로 공물을 봉납했다.12 이에 대해 대한민국 외교부는 즉각 깊은 실망과 유감을 표명했다.

22일, 상술된 요코하마 시장 선거 결과 입헌민주당, 사회민주당, 공산당이 추천한 야마나카 다케하루 후보가 자민당 시의원들의 지원을 받은 하야시 후미코 현 시장과 스가 총리의 측근인 오코노기 하치로 후보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스가 총리로서는 또 한번의 정치적 치명상을 입었다. 같은 날, 마이니치 신문에서 발표된 스가 내각 지지율은 역대 최저치인 24%를 기록했다. 반면 지지하지 않는다는 64%에 육박했다.# 이후, 공식 8월 지지율이 26%로 나왔다.#

23일. ANN 여론조사에서는 25.8%로 최저치를 다시 기록했다. 특히 스가 총리와 자민당의 희망대로 2020 도쿄 올림픽 개최 강행에 대한 일본 국내 여론이 선수들의 연이은 승전보로 반전됐음에도 불구, 내각 지지율은 계속 하락세를 기록하고 있어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41]

이번 아프가니스탄 사태로 인해 대사관 인원을 전부 뺀 뒤 이후 자국민 및 협력자 피난을 돕기 위해 자위대와 가와사키 C-2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출정식 사열까지 하며 자국 뉴스에 유출한 것도 모자라서 현지사정을 미국을 통해 알려고 하지도 않은채 자국민과 협력자들한테 "공항에 자위대 비행기가 대기중이니 자력으로 공항까지 오라"는 최악의 악수까지 두면서 결국 체류중인 자국민은 물론 협력자들 아무도 오지 못하는(...) 사태[42]가 벌어졌고[43] 결국 테러가 발생한 뒤 안전상 철수했다.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피난민은 가까스로 도착해 파키스탄으로 탈출한 단 1명의 자국민이다. 사실상 수백명 가량의 인질이 잡힌 셈인지라 언론에서 뭇매를 맞고 있다. 심지어 협력한 아프간인만 구조를 못한 게 아니라 현지에 살고 있던 자국민들까지 구조하지 못한 것이라 카불 공항 테러 이후 가뜩이나 불안정한 상황이 더 악화된 아프간 현지 정세로 인해 현지에 있는 일본인들의 신변에 이상이 생길 경우 큰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8월 닛케이 신문 여론조사에서 내각 지지율이 34%이다.#

차회 당 총재 선거에 기시다 후미오 전 외무상이 재도전을 선언하는 등 당내에서 거세게 도전을 받자, 스가 총리가 총재 선거를 미루기 위해 중의원을 그보다 조기에 해산하고 총재 선거를 미루는 무리수를 둘 수 있다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이 경우, 총재 선거가 10월로 밀리는 대신 스가 총리는 그야말로 총리직 뿐만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명운을 걸고 차기 선거를 지휘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9월 1일, 스가 총리가 관저 기자회견에서 중의원 조기 해산 및 총재 선거 연기 가능성을 부정했다. 다만 이에 앞서 당내 불만을 수렴하기 위해 6일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 등 당 간부 인사를 교체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한편 같은날 스가의 숙원이었던 디지털청이 개청하며 히라이 다쿠야 디지털대신이 취임하여 1부 14성청체제로 개편되었다. 이 디지털청이 사실상 스가의 마지막 치적으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2021년 10월 4일, 기시다 후미오 후임 총리 지명 당일 내각 총사퇴를 결의하면서 공식적으로 임기를 마무리했다.

6.2.1. 총재 선거 불출마[편집]



당초 주간문춘에서 스가 총리의 9월 사임설을 제기하여 갑론을박이 있었으나, 스가 총리 본인이 일찍부터 연임 도전을 선언한데다가 추가적으로 확실한 입장표명이 없었던터라 자민당 총재를 계속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러나 9월 3일, 2021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불출마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일본 주요 언론이 보도했다. 당 간부 회의에서 차기 총재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에 따라 9월 말 총재 임기 만료와 함께 자연스럽게 총리직을 퇴임하게 될 전망이다. 이렇게 '아베 1강' 시대 종료 이후 첫 총리는 또 한 번의 단명 총리가 되고 말았다.#

불출마 의사를 굳힌 시점은 2일 밤으로, 가족도 연임 포기를 강하게 권유했으며, 스가 총리는 같은 날 밤 자민당 간부 인사와 관련해 사토 쓰토무(佐藤勉) 당 총무회장과 전화로 상담했는데, 3일 임시 간부회의와 총무회에서 "불만이 나올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임 포기 결심을 굳혔다.

한편, 한국 웹 커뮤니티에서는 자유민주당의 지속적인 지지율 하락과 일본 국민들의 원성과 불만을 해소하지 못한 스가 요시히데 총리의 불출마 선언을 호재로 보고 있다. 하지만, 9월 초 출마를 선언한 총재 후보들로 아베, 스가와 같은 강경파 및 혐한 발언을 서슴지 않던 고노 다로 행정개혁대신, 기시다 후미오 전 외무대신, 다카이치 사나에 전 총무대신이기 때문에 중도, 하다못해 보수본류조차 아닌 사람들이 다수라 자민당의 극우화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고, 이게 마냥 호재인지는 의문이란 시각도 있다.[44] 게다가 총재선거가 끝나자마자 진행될 중의원 총선거에 컨벤션 효과로 작용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이 어떻게 될지 지켜봐야겠지만, 차기 자민당 총재로 고노, 기시다, 다카이치, 이 셋 중 한명이 당선 되어서 자민당이 계속 집권하는 상황이 오게 되면 현 스가 정권에서 보여준 한일관계보다 악화될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애초에 여야를 막론하고 일본 정치 주류가 우경화 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에 자민당 내에서 총리 하나가 바뀐다고 해서 한일관계에 획기적인 변화가 있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분석도 있다.[45]

고노 다로가 총재선거에 출마한다면 그를 지원하겠다는 의향을 드러냈다.# 이는, 스가의 배후이자 스가 연임을 지지했던 니카이 도시히로 전 간사장을 차기 총재선거에 출마한 기시다 후미오가 사실상 경질시키려는데 대한 반발로 사실상 스가-니카이가 연합해 파벌은 다르지만 같은 가나가와현 지역 동지인 고노 다로를 지원하겠다는 계산으로 보인다. ### 그리고 고노 다로는 2021년 9월 10일 총재 선거에 공식 출마를 선언하였다.

마지막 NHK 내각 지지율 여론조사에서 내각 지지율이 30%로 조사되었다. 사실상 사퇴 선언에 가까운 불출마 선언에도 여론의 반등은 없었던 것.#

9월 24일 ~ 26일, 쿼드 정상회의 참여를 위해 마지막으로 방미하면서 조 바이든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한편 퇴임을 앞두고, 차기 총리 선출 후 내각 각료로 재입각한다는 하마평이 돌았으나 여기에는 선을 그었다. 하지만 10월 임기 만료 예정인 중의원 선거에는 계속 출마해 국회의원으로서의 정책적 노력은 계속한다고 밝혔다.#

이번의 총재선 불출마 및 퇴임으로 스가 총리는 1994년 하타 쓰토무[46] 총리 이후 27년 만에 처음으로 임기 중 한일정상회담 없이 퇴임하는 총리가 됐다.

7. 총리직 퇴임 이후[편집]


10월 17일, 아베 신조 전 총리와 마찬가지로 전직 총리 자격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모습을 보였다.#

2022년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이후인 2022년 8월 10일 출범한 제2차 기시다 제1차 개조내각에서 부총리로 재입각한다는 설이 나왔지만, 본인이 부인했다.

9월 27일에 일본 무도관에서 열린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국장에서 대표 추도 연설을 맡았다.#

10월 27일. 일본과 인도의 교류 촉진에 임하는 공익재단법인 ‘일인협회’ 회장에 취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동안 정중동 행보를 이어가다가 2023년 들어 기시다 총리 공격에 나서고 있다. 특히 기시다가 방위비 증액을 이유로 증세를 안건으로 내세우고 있는 점, 총리 자리에 올랐음에도 본인의 파벌인 굉지회 회장 자리에 그대로 있는 점 등을 문제삼았다. 이를 두고 일본 정가에서는 "남 평가를 공개적으로 하지 않던 스가가 변했다. 상황이 재밌어졌다."라며 기시다 끌어내리기가 시작됐다는 뜻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언행이 신중하기로 유명한 스가가 대놓고 총리를 저격한 건 아주 이례적이라는 평이다. 강력한 ‘포스트 기시다’ 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승부수를 던졌다는 것인데 본인이 총리직에 복귀하고 싶은 것인지, 다른 사람을 총리로 밀고 본인이 킹메이커 역할을 하고 싶은건지는 불확실하다고 한다.#

2023년 3월 27일 일한의원연맹 회장으로 취임했다.
[1] 야간학부를 뜻하며 호세이대학에서는 2011년에 폐지되었다. 야간학부는 주간학부에 비해 수업료가 절반 정도 저렴하다.[2] 현 주식회사 케이네스(ケーネス)[3] 그의 아들인 오코노기 하치로 중의원이 스가 내각의 국무대신 중 한 종류인 공안위원장에 임명되었다.[4] 이때 2위인 우에다 후보와의 득표율 차가 불과 2%였다.[5] 가지야마 히로시 중의원 의원의 부친.[6] 리버럴 성향으로, 1992년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 당시 관방장관 자격으로 일본 정부가 군 위안소(일본군 위안부) 설치와 운영·감독에 관여했다고 처음으로 인정한 이른바 '가토 담화'를 발표했다.[7] 한국은 4선 의원이면 기본적으로 중진 취급이고 5선 이상 의원은 국회 통틀어 손꼽을 정도이지만, 일본은 의회해산이 있는데다 비교적 정치인이 되는 나이가 빠른 편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의원직 세습이 많은 이유도 있다) 4선이 그다지 높은 선수가 아니다. 10선 이상 의원들도 간간히 찾아볼 수 있는 정도.[8] 참고로 '연금기록문제'란, 2007년에 국회가 사회보험청 개혁관련 법안을 심사하던 중 사회보험청의 전산에 오류나 미비점이 많다는 것이 밝혀져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사건이다. 2007년 7월 29일에 있었던 제21회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이 패배한 원인 중 하나로 언급된다.[9]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을 거치지 않고, 일본 정부가 직접 발행하는 지폐[10] 당장 중의원 임기가 만료되는 2021년에 중의원 총선거를 치러야 하는데, 총리의 지지도가 낮아 선거에서 지면 아무리 당내 파벌 싸움에서 이긴들 소용이 없어진다.[11] 보통 총리가 사임하면 자신이 지지하는 후임자를 지목함이 관례였다. 그런데 아베는 총재 선거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며 후임자를 지목하지 않고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 권한대행 체제 없이 일단 차기 총리 선출 때까지는 자리를 지키겠다고 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12] 다만 자민당 콘크리트 지지층인 넷우익들은 이시바의 온건한 대외 태도 때문에 싫어하는 편이다.[13] 그나마도 아베가 사임을 선언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스가가 총리 출마 선언하면서 동시에 당내 다수 의원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등 사실상 총리자리가 유력해지면서 결국 오랫동안 지켰던 여론조사 1위 자리 마저도 스가에게 내주고 만다.[14] 정적들뿐만이 아니라 같은 파벌 내에서도 인망이 없다며 까일 정도면 이시바의 당내 입지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다.[15] 고이즈미 신지로는 '펀쿨섹좌'로 대표되는 실언들이 하도 축적되다 보니 일본 내에서도 총리감은 아니라는 평판이 늘어났다. 고노 다로는 아소 다로 못지 않은 망언제조기여서 여론이 좋지 않은 데다가, 차기 황위에서 모계 계승을 지지한 까닭에 당내 주류인 우파 의원들로부터 지지를 잃었다.[16] 아베 사임 발표 직후 실시한 교도통신 여론조사에 의하면 이시바 시게루 다음인 2위였다. 3위는 고노 다로, 4위 고이즈미 신지로, 5위 기시다 후미오.[17] 노다 요시히코가 당선되었던 선거다.[18] 의원보다 지방이나 당원들의 지지가 높은 편인 이시바 시게루는 간이 방식으로 하면 불리해진다.[19] 아베랑 불화설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가가 아베의 정책을 반대했다거나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애초에 현 자민당 내에서 아베의 방식만 문제를 삼을 뿐이지 방향 자체는 뭐 크게 다르지 않다.[20] 무엇보다 8월 2일에 문재인 정부가 일본 정부가 준비한 모든 보복 조치에 대응책을 준비해놨다고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일본의 보복이 장기화될 경우 '완전히 끝장을 내버릴 전략'도 고려했다고 하니, 사실상 한일관계는 경제 보복을 넘어 여러 가지 의미로 경색된 상태가 지속될 것이다.[21] 반면 각각 2,3위인 기시다 후미오는 89표, 이시바 시게루는 68표를 얻어 예상대로 참패했다.[22] 실질적으로는 국회에서 총리를 지명하면 그대로 인준하지만, 어쨌건 내각총리대신 임명장은 천황의 명의로 나가고 실제로 천황이 친필로 서명을 한다.[23] 가이후 도시키 총리와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가 한 번씩 더 연임한 적이 있다. 그래서 연임을 반영하면 11번째이지만 머리 수로만 보면 9번째다.[24] '명목상'으로는 10번째가 맞지만 '실질적으로는' 11번째이다. 이유는 쇼와 시대에 임명되어 헤이세이 시대까지 유임한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의 임명장아키히토 당시 황태자가 섭정 자격으로 대리 서명하고 천황의 국새도 대신 찍었기 때문이다. 고로 다케시타 총리도 '실질적으로는' 아키히토 덴노의 임명을 받은 총리가 맞다. 실제로 유튜브에서 다케시타 총리 임명식 영상을 보면 아키히토 황태자가 쇼와 덴노 대신 다케시타 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광경이 나오며, 쇼와 덴노가 직접 서명했던 기시 노부스케 총리의 임명장을 보면, 裕仁의 필체가 다르다.[25] 다른 면으로는 현 내각 자체가 이전 총리인 아베 총리의 잔여 임기를 계승하는 목적인 만큼, 이전 내각의 인사들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안정적인 정국 운영을 위함에서 이루어진 조치란 분석도 있다.[26] 특히, 핀란드의 산나 마린 내각하고 비교되었다.#[27] 자민당과 공명당의 의석을 더한 것에 1표를 더한 수치인데 아마도 가와이 가쓰유키인 듯하다. 일본공산당사회민주당의 지지를 받은 에다노 유키오가 134표를 얻었는데 이는 사민당+공산당+입민당을 합진 122표보다 12표 많은 수치이다. 정황상 국민민주당이 에다노를 지지한 것으로 보인다. 가타야마 도라노스케는 11표로 일본유신회 의원 수보다 1명 많았는데 유신회에서 탈당해 정당 소조로 간 시모지 미키오인 듯하다. 희망의 당 나카야마 나리아키가 예상대로 2표, 그리고 고이즈미 신지로(...)의 이름 모를 반란표가 1표 나왔다. 고이즈미 표는 셀프(...)는 아니고 NHK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당 마루야마 호다카였다.# 그리고 참의원에서도 국민민주당의 이토 다카에가 무소속의 테라다 시즈카로부터 의문의 1표를 받았다.[28] 해당 조사에서 1위는 2001년 자민당 고이즈미 준이치로 80%, 2위는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 75%다. 호소카와 모리히로와는 74%로 타이 기록. 여담으로 아베 신조 2차 내각 출범 시 지지율은 62%였다.[29] 첫 정상 전화 통화는 아니다.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하고 한 통화가 첫 정상 전화 통화다.[30] 아베 신조때, 아니 일본국 성립 이후 모든 정부는 해당 해도에 표시된 일본해라는 명칭은 국제수로기구에서 '합의된 명칭'이라며, 일본해 이외의 명칭을 사용하거나 일본해라는 것을 사용하지 않는 표기법 모두 명시적적으로 거부 의사를 분명히 해 왔다. 그러나 스가 총리는 해당 안건에 대해 명시적 거부 의사를 내지 않았다.[31] 1958년생으로 도쿄대학 출신 , 경제산업성 관료 출신이며 2006년 비서관으로 기용되었고 아베정권 후반에는 정무비서관을 맡으면서 숨은 실세로 불리기도 했다. 對한국 수출규제 강화를 지휘한 인물로 유명하다.[32] 법조문상 총리의 임명이 있어야하나 기존의 법해석론으로는 총리가 추천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이었다. 스가 내각이 이를 바꾼 것이다.[33] 터키 에르도안에 대한 항의다.[34] 헤이타 지사는 옥스퍼드 대학 출신으로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교수와 시즈오카 문화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하면서 '학자 지사'로 불리던 사람이라 스가의 학문의 자유 침해 논란에 대해 더 노골적으로 비난했다.[35] 평소 엘리트 관료라는 이미지로 일본인들에게 알려진 만큼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36] 일본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급락한 지지율을 어찌하기 위해서 이러한 인사를 강행한 것으로 보인단 반응도 있었다.[37] 백신조차 준비 안 된 상태에서 무슨 올림픽이냐면서 도쿄올림픽 개최는 힘들다는 여론은 더 뜨거워졌다.[38] 사실, 방류 결정 하루 전에 오염수 처분은 언제까지나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주장한 바 있어,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다.[39] 물론, 스가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를 모를 리는 없을 테니 2019년 참의원 총선 직전쯤에 아베가 대한국 무역제재로 지지율 상승을 노렸듯이 스가도 중의원 총선 직전쯤에 혐한적 외교전략으로 지지율 상승을 노릴 듯하다.[40] 일본 유신회도 부결에 동조했다.[41] 통계상으로 보면 압도적으로 반대가 많았던 여론이 선수들의 선전으로 반반 정도가 됐다는 것에 가깝다. 찬성 여론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는 식의 반전이 아니라는 것. 그러한 상황에 올림픽 중에 코로나 확진자가 폭증하고 올림픽이 끝난 이후에는 일일 확진자가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며 의료붕괴라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으니 내각 지지율이 반전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다. 게다가, 자영업자들에게는 지원금 지급도 늦어지고 긴급사태선언 중 한국에서도 쓰지 않는 주류판매 금지라는 최악의 수까지 쓰고 자민당 인사들이 거리두기 수칙을 준수하지 않다 보니 자영업자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는 상황.[42] 탈레반은 다시 재집권하면 돈과 수교가 필요하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에 한명이라도 더 외국인을 억류시켜야 한다. 그래야 인질이 된 이들의 무사생환을 조건으로 경제원조도 뜯어낼수 있고 수교를 하여 실질적인 정부로 인정받을수 있도록 협상 테이블을 차릴수 있기 때문이다.[43] 뉴데일리가 이를 갖고 일본을 찬양했다가 결국 여론의 뭇매를 맞았는데, 수송 작전의 경우 테러단체가 알지 못하도록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하는 게 상식이고, 한국은 이를 지켜 미라클 작전을 성공시켰다.[44] 그럴만도 한 것이, 다른 인물도 아니고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자민당 내부에서 가장 한일관계에 유화적인 입장의 인물이다"라는 평가를 받는 상황이다. 다만, 기시다 후미오는 나름 자민당내 온건파로 취급되는 인물이며, "집단적 자위권이나 개헌에는 찬성하지만 제9조 개헌을 당장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 라고 밝힌 적이 있었다.[45] 물론 자민당 내에는 이시바 시게루처럼 한국에 대해 온건파적인 인물들도 있지만, 애초에 이시바는 자민당 내의 정적들뿐만 아니라 같은 계파의 아군들에게도 왕따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인망이 바닥이다 보니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46] 하타는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 일정을 잡았으나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겨우 64일 만에 퇴진해버리면서 의도치 않게 못 한 케이스지만 스가는 후쿠다 야스오와 거의 비슷하게 1년은 했음에도, 이명박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던 후쿠다와 달리 한일정상회담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히 보면 경우가 좀 다르다. 결국 스가가 한일관계 개선 의지가 없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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