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AT/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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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 국적으로 활약한 운동선수들 중, 종목별로 최고의 선수라 불릴만한 이들의 목록. 한마디로 한국 역사상 최고의 인물을 의미한다.


2. 분류[편집]


하계/동계/비올림픽 종목 기준으로 나뉘되 한글 ㄱ부터 ㅎ까지의 순서를 기준으로 합니다.

2.1. 하계올림픽 종목[편집]


다음은 올림픽 정식 종목에 해당하는 스포츠 종목들이다. (임시 종목과 폐지된 종목은 제외.)


2.1.1. 골프[편집]



파일:external/jtbcgolf.joins.com/31377.jpg


2015년 세계 7번째이자 아시아 최초의 LPGA 커리어 그랜드 슬램[1], 통산 106주 여자 골프 세계 랭킹 1위, 한국인 최초 LPGA 올해의 선수상 수상, 2012~2013 LPGA 상금왕 등등 30세 이전에 프로 골퍼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기록을 달성한, 대한민국 골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할 수 있다.

박세리[2]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LPGA 투어 명예의 전당 입성에 필요한 자격을 모두 채웠는데, 다만 10시즌 활동이란 조건만 남았기에 실제 입성을 뒤로 미뤘다가 2016년 6월 10일에 입성했다. 만 27세 10개월 28일이라는 역대 최연소 기록으로 명예의 전당에 가입하게 되었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112년 만에 정식 종목이 된 골프에서 4라운드 최종 16언더파로 대한민국에 아홉 번째 금메달을 안기며, 남녀 골프 역대 최초의 골든 커리어 그랜드슬램(커리어 그랜드 슬램 + 올림픽 금메달)을 달성했다. 116년 만의 여자 골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면서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골프 역사에도 빼놓을 수 없는 발자취를 남기게 되었고 현재 진행형의 전설로도 동시에 등극하게 되었다.


2.1.2. 농구[편집]


농구 대통령이라는 이명으로 불린 한국 최고의 농구 스타이자 한국 농구의 아이콘. 실업 농구 시절 농구대잔치에서 기아 왕조를 열었고 국제대회에서 맹활약하며 여러 일화를 남긴 전설적인 선수이다. KBL이 출범할 당시에는 전성기가 지난 시점이었음에도 KBL 초창기의 흥행을 주도하면서 KBL의 정착을 이끈 선수였다.

대적할만한 선수로는 신동파, 서장훈 등이 있다. 신동파는 세계 선수권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기록상으로는 세계 무대에서도 돋보이는 실력의 소유자이나 너무 과거의 선수라 그를 접한 팬들이 거의 없다는 점이 걸림돌이며, KBL에서의 기록만 놓고 보면 서장훈이 압도적이기도 한지라 많이 비교가 되는데 여론은 대체로 허재의 손을 들어준다. 한국 농구의 아이콘이라는 상징성, 영향력, 대중적 인기와 인지도 면에서도 허재는 단연 우위이다.

다만, 귀화 선수를 포함한다면 이견 없이 라건아가 GOAT로 뽑힌다.

여자 선수 중에서는 박신자가 가장 GOAT에 가까우며, 혹은 LA 올림픽에서 은메달의 신화를 쓴 박찬숙을 비롯한 여러 선수들도 언급된다.


2.1.3. 레슬링[편집]



2.1.3.1. 그레코로만 레슬링[편집]

라이트 플라이급(48kg)과 플라이급(54kg) 두 체급에서 올림픽, 세계 선수권, 아시안 게임, 아시아 선수권 4개 대회를 모두 우승하며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경량급 레슬링의 전설적인 선수이다.


2.1.3.2. 자유형 레슬링[편집]

자유형 레슬링의 라이트급(68kg)과 웰터급(74kg)에 출전해,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우승을 포함해 올림픽 결승에 세 차례나 연속으로 진출한 선수. 레슬링 팬들 사이에서는 선수풀이 탄탄하고 서양 선수들이 강세를 보이는 자유형에서 중량급 선수로 활약했던 박장순을 심권호보다 높게 평가하는 의견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2.1.4. 리듬체조[편집]



파일:손연재 리우.jpg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가 리듬체조 불모지인 환경에서 역대급 성적을 거두며 대한민국에 리듬체조를 알린 선수다. 올림픽에선 비록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으나 올림픽 역사에서 아시아 국가가 리듬체조에서 메달을 획득한 건 2008 베이징 올림픽 당시 중국 대표팀이 단체 은메달을 획득한 게 유일할 정도로 아시아 국가는 전혀 두각을 내지 못하는 종목이 리듬체조이다. 손연재 이전에도 올림픽에 출전한 대한민국 선수들은 있었으나 개인전 결선에 진출한 건 손연재가 유일하며 결선에서 메달권에 가장 근접한 4위의 성적을 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다고 할만한 업적이다.

이외에도 아시안 게임 최초 메달 획득과 최초 개인전 금메달 & 단체전 은메달 획득, 하계 유니버시아드 최초 개인 종합 금메달 획득, 아시아 선수권 최초 개인 종합 우승과 FIG 월드컵 시리즈 최초 개인 종합 우승 등 대한민국 리듬체조의 역사가 곧 손연재라 할 정도로 독보적인 기록을 보유한 인물이자 유일하게 국제대회에서 경쟁력을 갖춘 선수였다.


2.1.5. 배구[편집]




2.1.6. 배드민턴[편집]


배드민턴 남자 복식, 혼합 복식에 출전해 올림픽 우승 1회, 세계 선수권 우승 5회, 배드민턴 월드컵 우승 4회로 세계 타이틀을 무려 10개나 보유한 역대 최고의 한국인 배드민턴 선수. 이후에도 김동문, 하태권, 이용대 등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이 등장했으나 박주봉만큼의 업적을 남긴 선수는 없다.


2.1.7. 사격(ISSF)[편집]


50m 권총 올림픽 3연패[3]를 달성한 국제사격(ISSF)의 GOAT이자 사격 황제. 총 세번의 올림픽 대회에서 50m 권총 3연속 금메달을 획득했다. 진종오의 올림픽 3연패는 사격 종목에서는 최초이자 유일한 기록이다. 2012년 런던에서는 10m 공기 권총도 우승하여 2관왕을 달성하였다. 세계 선수권도 3연패를 달성하였다. 월드컵 파이널도 3개의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이렇게 우승만 많이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종목에서는 세계 기록을 보유중이다. 올림픽 메달 6개(금 4개, 은 2개), 세계 선수권 메달 8개(금 4개, 은 2개, 동 2개), 월드컵 파이널 메달 4개(금 3개, 동 1개)와 10m 공기 권총 퀄리피케이션 세계 기록(594점), 50m 권총 퀄리피케이션 세계 기록(583점)[4]을 보유하는 등 진종오가 남긴 족적을 보면 그가 국제식 사격의 GOAT라 불릴 자격이 있다.

즉, 진종오는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 스포츠 사격의 GOAT로 인정받는다고 할 수 있다. 올림픽 웹사이트에는 진종오가 가장 성공적인 남자 개인 슈터라 언급한다.


2.1.8. 수영[편집]



파일:마린보이.jpg


도핑 논란으로 말이 많기는 하지만, 그 커리어에서 비교불가 수준의 위상으로 한국 수영은 그를 빼놓고 말할 수가 없다. 올림픽 수영에서 딴 한국의 메달은 전부 박태환이 딴 것이다. 박태환 이외에 아시아 결선 무대를 밞으면서 메달을 기록했던 선수로는 이전 세대에는 조오련이 있었고, 후대에 올림픽 결선 무대를 밟아본 선수로는 남유선, 황선우 단 두명밖에 없을 정도로 엄청난 수영 불모지인 한국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획득한 올림픽 금메달을 비롯하여 세계 선수권, 아시안 게임, 아시아 선수권에서도 금메달을 기록했던 것과 역대 한국 선수 중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가장 많이 획득한 선수로 남아 있다.

또한 국제대회 메달 뿐만 아니라 여태까지 전국체전에서 딴 금메달이 총 39개이고 전성기는 물론이고 전성기가 지난 후에도 국내에서 따라올 선수가 없다는 점에서 그가 역대 최고의 선수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심지어 선수 시절에 마린보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었고, 현재에도 많이 불리는 유명한 별명이다.

현재 세계 선수권(쇼트 코스) 자유형 200m에서 우승하고 박태환이 가지고 있던 자유형 200m 한국 기록을 경신한 황선우가 한국 수영의 새로운 재목으로 떠오르고 있다.

여자선수로는 현재 김서영이 가장 유력하게 떠오르는 중이다.

2.1.9. 양궁[편집]


세계 양궁 연맹 역대 올림픽 궁수 1위이자, 올림픽 공식 역대 최고의 여자 궁수. 처음 출전한 국제 대회에서 바로 세계 신기록을 세운 만큼 예사롭지 않은 재능을 가졌다. 올림픽 금메달 4개를 획득했는데, 이는 1972년부터 개편되어 출범한 올림픽 양궁에서 가장 많은 금메달을 획득한 기록이다. 올림픽 뿐만 아니라 세계 선수권에서도 두 대회 연속 2관왕을 달성했으며, 양궁 강국인 대한민국 내에서도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선수이다.


2.1.10. 역도[편집]



파일:장미란 금메달.jpg


역도 +75kg급 그랜드슬램[5] 달성자. 장미란이 금메달을 땄을 때 각각 은메달과 동메달을 수상한 선수 두 명은 알고 보니 경기 당시 도핑을 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장미란은 약기운을 빌리지 않고 순수한 본인의 재능과 노력으로 약쟁이들을 압도적 차이로 꺾은 것이다.


2.1.11. 육상[편집]



2.1.11.1. 높이뛰기[편집]

마라톤을 제외하면 육상 불모지나 다름 없는 한국에 혜성같이 등장한 선수. 한국 최초로 실내 세계 선수권 우승, 올림픽 4위, 세계 랭킹 1위를 기록하고 현재 한국 기록으로 실내 2.35m, 실외 2.36m를 보유하는 등 2020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육상 스타로 주목받고 있다.


2.1.11.2. 단거리[편집]

한국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로서 100m에서 9초대를 달성할 희망으로 여겨진다.

연습 중 100m 9초대를 기록한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2.1.11.3. 마라톤[편집]


파일:손기정-1936.jpg


한반도 출신 운동 선수 최초로 올림픽을 제패한 한국 체육계의 선구자다. 일제강점기라는 안타까운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었지만 누가 뭐라해도 그는 자랑스러운 한국의 영웅이다.

후에 서윤복, 황영조, 이봉주라는 걸출한 후배들이 나왔지만, 상징적인 면에서 손기정과 비교하기가 부족하다는 평이다.


2.1.12. 축구[편집]



파일:2021-22 Son.jpg


현재 현역으로서 과거의 전설들을 넘어 역대 대한민국 축구와 아시아 축구의 GOAT로 뽑히는 선수이다.

이전까지 1980년대 독일 클럽에서 통산 세 자릿 수 득점과 2차례의 UEFA컵 우승에 기여한 차범근,[6][7] 2000~10년대에 들어 국가대표에서 확실한 발자취를 남기면서 유럽에서도 많은 우승을 경험한 박지성을 필두로[8] "아시아와 한국 최고의 선수는 누구인가?"라는 논쟁이 주를 이루다,[9] 2010년대 후반부터 손흥민도 이에 가세하여 일명 차박손 라인을 형성, 이후 2021-22 시즌을 기점으로 역대 프리미어 리그와 유럽 4대 리그를 통틀어 최초의 아시아인 득점왕으로 등극함에 따라[10] 대한민국과 아시아 내에 가히 엄청난 수준의 위상을 지닌 선수로서 그 분명한 수준의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21-22시즌 종료 기준으로 메이저 우승 트로피가[11] 없다는 점이 약점으로 지적되지만, 개인 기록과 수상 경력 부분에서 그간의 대한민국을 비롯한 역대 아시아 출신 축구 선수들과도 격차가 크게 벌어진다는 논지 하에 손흥민이 곧 현역 및 역대 대한민국과 아시아의 GOAT라는 것에 반박할 여지가 없다라는 여론들이 대거 형성되었고[12], 2010년대 초중반부터 지속적으로 여러 굵직한 업적들을 남겼다는 점과 202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세웠던 기록들을 비롯하여 리빙 레전드로 선수 생활을 지속하면서 이후에 쌓게 될 족적과 미래에 대한 기대와 여러 긍정적인 전망들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여자 축구의 경우에는 지소연을 대표적인 GOAT로 꼽을 수 있다.


2.1.13. 근대 5종[편집]


전웅태는 한국 최초의 올림픽 근대 5종 메달리스트, 정진화는 한국인 최초로 근대 5종 세계 선수권 개인전에서 우승했다. 두 선수는 대한민국의 세계 선수권 단체전 우승을 두 차례 이끌기도 했다.


2.1.14. 권투[편집]


두 선수는 비슷한 시기에 동체급인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각각 양대 기구인 WBCWBA의 세계 챔피언을 지냈다. 장정구는 15차 방어전에 성공하였고 한국인 최초로 국제 권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으며, 유명우는 36연승에 17차 방어전 성공이라는 대기록을 세웠고 한국인으론 2번째로 국제 권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권투 전적이나 기록에선 역대 라이트 플라이급 최다 방어 기록 보유자였으며 단 1패만 기록하였고, 그조차도 리벤지에 성공한 유명우가 근소하게 앞서나, 두 선수의 타이틀 방어 기록 모두 라이트 플라이급에선 역대 1, 2위를 다투며 장정구의 15차 방어가 먼저 세워진 기록인만큼 절대적인 우열을 가릴 수준은 아니다. 게다가 서로 다른 기구에서 활약하여 비교군이 없고, 양대 기구의 위상이 비슷해서 이정도의 기록 차이는 우열을 가리기엔 미미한 수준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장정구의 경우 한국인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오른만큼 먼저 성과를 인정받은 것 아니냐고 볼 수도 있지만, 유명우도 3년 뒤에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고 장정구보다 후기에 활동한 선수였기에 이 역시도 큰 차이로 보긴 어렵다. 이 라이벌리가 얼마나 대단한지 해외에서도 두 선수를 비교하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기록에선 유명우, 경기력에선 장정구의 손을 들어주는 해외 커뮤니티의 반응이 있지만, 이조차도 절대적이진 않고 반박 의견이 존재한다. 유명우는 장정구의 실력을 인정하는 인터뷰를 남긴 바 있다.#


2.1.15. 탁구[편집]


한국 남자 탁구계의 GOAT 논쟁 후보군으로는 20세기에 올림픽-아시안 게임 단식-세계 선수권 혼합 복식-탁구 월드컵 남자 복식에서 모두 우승 기록을 남긴 유남규, 21세기에 아시안 게임 남자 복식과 유일한 비(非)중국인 올림픽 단식 금메달리스트라는 기록을 남긴 유승민을 뽑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에 대한 논쟁 여부는 다음과 같으며, 세대와 여부에 따라 확실한 우열을 가리기엔 여러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

  • 유승민은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의 복식 금메달과 중국이 지속적으로 독점하는 21세기 세계 탁구계에서 2004년 당시 아테네 올림픽 단식 금메달과 세계 랭킹 2위 성적을 기록하면서 사실상 유일한 대항마로 분투했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

  • 중국이 세계 정상의 패권을 장악하는 지금과 달리 과거 한국의 탁구 전력은 상당히 강력했고, 그 외의 국가들과 각축전을 벌일 정도였다. 특히 유남규가 활동하던 당시에 선배인 김기택과 서울 올림픽에서 1~2위 쟁탈전을 벌였었고 이후 세계 선수권 혼합 복식에선 현정화, 남자 복식에선 세계 탑랭커이자 올림픽 단식 동메달리스트 김택수와 출전하면서 대한민국 탁구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반면 여자 탁구계에서 가히 독보적인 행보를 밞은 인물로는 현정화가 가장 대표적이다.


2.1.16. 테니스[편집]


한국 테니스 선수 유일하게 그랜드슬램 4강에 진출하였고,[13] 마스터스 대회에서도 8강에 두 번 진출하였다.[14] 또한 넥젠 파이널의 초대 우승자이다. 최고 랭킹은 19위를 기록하였다.[15]

이형택이나 권순우의 경우 정현이 해보지 못한 ATP 투어 250 우승이라는 업적이 있지만, 그랜드슬램 4강의 업적이 워낙 크기 때문에 보통 정현을 더 높게 쳐준다. 산술적으로 계산해봐도 1년에 그랜드슬램 4강 이상 진출자는 최대 16명인데, ATP 250 이상 우승자는 한 해동안 최대 64명이 나온다.

정현이 2019년 이후로 끝없이 부진에 빠지면서 많은 국내 팬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긴 했지만, 이미 2018년에 이뤄놓은 커리어로 국내 1인자 자리는 확실히 차지한 상황이다.

2.1.17. 트라이애슬론[편집]


한국 트라이애슬론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하게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이다.


2.1.18. 펜싱(사브르)[편집]


한국인 올림픽 펜싱 최다 메달(4회), 구본길과 함께 올림픽 펜싱 최다 금메달(2회) 수상자이자 세계 선수권 단체전 및 개인전 금메달리스트이다. 다만, 약물 복용으로 자격정지 이력이 있다는 점과 아시안 게임에서 개인전 3회 금메달을 수상한 구본길과 달리 아시안 게임에선 개인전 금메달은 없다는 아쉬움도 있다. 반면, 구본길은 올림픽 개인전 메달과 세계 선수권 개인전 금메달이 없기에 커리어에선 김정환이 우위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김정환이 올림픽에서 사브르 개인전 금메달은 수상하지 못했지만 김지연이 올림픽 여자 사브르 개인전 금메달을 수상한 바 있으며, 이외의 종목으로 김영호가 남자 플뢰레 개인전 금메달, 박상영이 남자 에페 개인전 금메달을 수상한 바 있다.


2.1.19. 핸드볼[편집]


구기 종목으로 한국에서 월드 클래스라고 불릴 만한 몇 안되는 선수. IHF 올해의 선수상 수상, 세계 선수권 3회 연속 득점왕, 핸드볼 분데스리가 역대 최다 득점을 기록했다. 윤경신을 보유한 대한민국은 아시안 게임 4회 연속 우승 및 5회 우승을 달성하며 아시아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2.2. 동계올림픽 종목[편집]



2.2.1.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편집]



파일:안현수 토리노.jpg


대한민국 시절의 빅토르 안(안현수)이 꼽힌다. 러시아 귀화 논란, 러시아 국가대표팀 도핑 스캔들, 중국 국가대표팀 코치 활동 등 그와 연관된 여러 잡음들로 인해 현재 국내에서의 위상은 떨어졌다. 그러나 외부적인 문제들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면 한국 시절로 한정해도 올림픽 3관왕 및 세계 선수권 5연패와 더불어 2022년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쇼트트랙 선수 중 세계 선수권 최다 메달 기록 보유자로 남아있다.

안현수의 성적은 한 종목의 GOAT로서 부족함이 없으며, 세계 무대에서 경쟁자들을 모두 압도했다는 점과 한 시대를 지배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쇼트트랙 역사상 최고의 스케이터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이외에도 올림픽 역사상 유일한 전종목 금메달 보유자, 올림픽 남자부 최다 메달, 메이저 대회 최다 메달이라는 역사상 비교 대상이 없는 기록을 가졌으며, 이는 대한민국과 러시아 두 국적으로 세운 기록이다.

여자 선수로 한정했을 때는 단기로 따지면 진선유, 오랜 기간을 통틀어서 보면 전이경이나 최민정이 GOAT로서 언급되는 편이다.

2.2.2. 스피드 스케이팅[편집]



파일:2018021900387_8.jpg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2014 소치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금메달리스트,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은메달리스트로, 2013년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세운 36초 36이란 500m 세계 신기록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남자 스피드 스케이팅의 경우 종목마다 선수가 다양하지만 그 중 이승훈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2.2.3. 피겨 스케이팅[편집]



파일:김연아/10올림픽1.jpg


여왕이라고 불리우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스포츠 스타 중 한명으로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 금메달리스트, 2014 소치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 은메달리스트이다. 김연아는 피겨 불모지 대한민국에 혜성처럼 나타난 선수로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엄청난 기술력과 예술성을 동시에 갖춘 레전드 선수로 회자된다. 올포디움과 은퇴 시점에서 세계 기록 및 올림픽 최고 기록 보유자[16]로, 데뷔부터 은퇴까지 최정상의 자리를 지킨 당대 최고의 선수이자, 역대 피겨 스케이팅에서도 손에 꼽힐 세계적인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2.2.4. 스노보드[편집]




2.2.5. 스켈레톤[편집]



파일:윤성빈 아이언맨.jpg


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초로 올림픽 썰매 종목 금메달을 차지했다. 그 외에도 10차례에 달하는 월드컵 우승, 2017-18시즌 세계 랭킹 1위 기록 등 사실상 한국 스켈레톤의 역사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하다.


2.3. 비올림픽 스포츠[편집]



2.3.1. 씨름[편집]


천하장사를 총 10번이나 지낸 역대 최고의 씨름 장사. 원래 한라급인 경량급 출신이라, 화려한 기술 씨름을 구사한 데다 나중에 백두급으로 올라가면서 화려한 기술 씨름에 힘이 붙으면서 장기 집권했다. 초창기 프로 씨름을 국민 스포츠 자리까지 올린 주인공이기도 하다. 당시 205cm의 거인 씨름 선수 '인간 기중기' 이봉걸과 이만기의 대결은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로 비유되며 장안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더불어 라이벌 이준희와 숙명의 결승 대결도 매번 치를 때마다 지금의 야구나 축구 더비 못지않은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2.3.2. 야구[편집]


각각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투수와 최고의 타자로 손꼽힌다.

류현진한화 이글스에 입단 후 KBO 신인상 & KBO MVP & KBO 골든글러브를 동시 수상 및 KBO 사상 최초의 루키 시즌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였고 그 후로도 KBO 리그 최고의 투수로 군림하다가 메이저 리그로 진출했고 2013년부터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소속으로 최고의 투수들인 클레이튼 커쇼, 잭 그레인키에 이어 팀의 3선발로 활약했다. 2014년까지 활약을 이어갔으나 커리어 초반부터 이어온 혹사의 여파로 데드암 선고를 받는 등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재기에 성공하고 2019년에는 하락세를 맞이한 커쇼를 밀어내고 팀의 1선발을 차지하며 아시아 선수로서는 2번째로 올스타전 선발 투수로 경기에 출전하였고 아시아 선수로서는 최초로 ERA 타이틀 홀더가 되어 커리어 하이 시즌을 기록하였다.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팀을 옮긴 후 맞이한 2020년에도 비록 포스트시즌 경기에서 좋지 않았지만, 준수한 정규 시즌 활약을 바탕으로 2년 연속 All-MLB 세컨드 팀에 선정됐고, 최고의 좌완 투수에게 주어지는 워렌 스판 상을 아시아 선수 최초로 수상하였다. 2021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3시즌 연속 개막전 등판 기록을 세우는 등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투수이자 아시아 역대 최고 좌완으로 뽑힌다.[17]

추신수메이저 리그 통산 WAR가 역대 한국인 선수 중 가장 높은 선수이자 역대 아시아 출신 선수 중 두 번째로 높은 선수로[18] 내셔널 리그 1번 타자 최초로 20홈런-20도루-100볼넷-100득점을 기록하고 아시아 출신 메이저 리거로서 유일하게 통산 200홈런, 20-20 클럽(3번) 가입 및 사이클링 히트 달성, 한국인 메이저리거로는 최초로 MVP 득표와 한국인 야수 중 최초로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등 한국인 최고의 메이저리거로 활약했다. 특히 2010년대 들어 김현수, 박병호, 황재균 같은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타자들이 메이저 리그에 진출했으나 전부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한 채 짐을 싸게 되며 추신수의 위상은 더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다만 역대 KBO와 MLB에서 뛰었던 한국 전설들 그러니까 과거 시대의 선수들에 대한 맥락과는 일부 별개로 나뉘고 있는 수준이며 이것이 소위 말하는 세대에 따라 최고 선수가 누구인가라는 점이 서로 갈리는 상황인데다가 또 누가 확실한 GOAT인지 그리고 전반적인 선수들에 대한 GOAT 논쟁이 있더라도 확실한 총평도 나와있지 않은 상황이라는 점에서 아직까지도 한국 아구계의 GOAT는 현재 현역을 기준으로 최고의 기록을 쌓은 선수가 존재하지만 이와 같은 미정 상태가 계속 유지되고, 또 공인이 없는 상황에서 이를 확실하게 언급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다.[19][20]


2.3.3. 종합격투기[편집]


한국인 최초 UFC 타이틀전, 한국인 UFC 최고 랭킹[21]을 달성한 대한민국 역대 최고로 평가받는 파이터이다. 현 패더급 랭킹 6위로, 강한 펀치력과 그래플링 능력, 리치 187cm의 좋은 피지컬을 바탕으로 UFC에서 10년 넘게 컨텐더로 뛰는 몇 없는 파이터이다.[22]


2.3.4. 카바디[편집]


인도 카바디리그 PKL에서 비인도인 선수 최초 400 레이드 포인트를 기록한 선수다. 2019년 시즌 기준으로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한 주전 선수이며, 한국인 선수로는 가장 많은 출장 횟수인 111경기를 출장하여 480 레이드 포인트를 기록하는 등 인도 현지의 별명은 코리안 킹으로 불리는 선수다. 2020년 이후로는 인도의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한 리그 취소와 리그의 재개 이후에도 방송 출연으로 인해 리그에 출장하지 않고 있음에도 이 기록을 따라잡을 한국인 선수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또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서는 아시안 게임 역사상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카바디의 종주국 인도를 최초로 꺾은 대한민국 카바디 국가대표팀의 주장이기도 하다.


2.4. 마인드 스포츠[편집]


육체적인 운동 보다는 보드게임 등 지성을 주로 사용하여 겨루는 스포츠들이다.


2.4.1. 바둑[편집]


역대 인류 최고의 기사는 돌부처 이창호
이세돌에게 이창호라는 존재란?

1990년 11월 초순부터 2006년 3월 중순까지 16년간 세계 랭킹 1위를 놓치지 않았다. 이런 가공할 지배력은 바둑 역사를 통틀어도 유례가 없다. 전 세계의 모든 바둑 기사가 그의 기보를 붙잡고 파해법을 찾아 헤맸지만 그는 16년 간 세계 정상을 지켰다.

30세 이후의 이창호는 세계 최강의 기사가 아니지만 바둑사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끝내기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며 현대 바둑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꾼 업적으로는 오청원에 비견되는 선지자였으며, 뛰어난 천재가 쏟아져 나오면서 무수한 연구와 새로운 정석이 난무하던 현대 바둑의 백가쟁명 속에서 오로지 그 홀로 최정상에 우뚝 서 있던 십수년간의 전적으로는 사상 최강의 기사이기도 한 것이다.

참고로 바둑에서는 전성기에 해당하는 나이는 10대 후반에서 20대 후반까지로 본다. 이것도 길게 본 것이고, 보통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까지를 최고 전성기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예전에는 30~40대에도 정상급 기량을 보유한 기사가 꽤 많았으나, 연구생 제도가 확립된 이후로는 30대 초반만 되어도 한풀 꺾이는 경우가 많다. 기보 획득과 관리가 쉬워져 예전처럼 경험을 시간을 두고 쌓아야만 했던 시대가 아닌 것이 이유다. 이세돌은 이에 대해 자서전에서 이르길 "과거엔 기보를 구한다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또 정보의 유통이 늦어 '비장의 수' 몇 가지만 준비해 가면 한참을 써먹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제아무리 묘수라 해도 기보가 뜨면 한 시간도 안 돼 바둑 사이트에서 파훼가 된다. 거기다 젊은 기사들 사이 연구회도 전보다 활발하다. 녹록지 않은 여건인 셈이다."라고 평한 바 있다.

심지어 한국 바둑을 창시한 인물로 평가받는 조남철 혹은 조훈현과 같이 이전에 대한민국 내에서 엄청난 유명세와 실력을 쌓은 선수들이 존재했지만[23] 이창호에 대한 평가는 단순히 최전성기 당시의 내용만으로 결론 내려진 것이 아니며, 이창호를 정당하게 평가하려면 당대성이라는 범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바둑 역사라는 거시적이고 통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그의 실력과 업적을 견주어봐야만 한다는 것.

이렇게 바둑 역사의 통시적 업적과 당대의 경기력 양면에서 세계 정상에 오른 기사로는 4대 혼인보 도사쿠, 오청원, 이창호를 들 수 있고, 현대 바둑에 한정한다면 오청원과 이창호를 든다. 물론 오청원이 활동하던 당시에는 세계기전이란 개념 자체도 없었고, 일본과 비교해 다른 국가들의 바둑의 수준이 너무나 차이났기에 국외 활동을 할 이유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오청원은 포석과 정석 분야를 개척했고, 이창호는 중반과 끝내기 분야를 개척했다. 그 이전까지 중국 바둑은 묘수풀이를 이용한 전투 일변도였고, 일본 바둑 역시 포석의 연구를 하긴 했지만 덤이 없었기 때문에, 18세기~19세기에 발명된 포석 형식에 갇혀 있었다. 오청원은 신포석과 화점 발견으로 바둑계를 한번 갈아 엎었고, 이창호는 중반전에서 두터움과 끝내기 분야를 개척하여 바둑 기사들의 수명을 줄여버렸다. 계산 바둑의 시대를 열었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오청원과 이창호를 두고 뉴턴과 아인슈타인에 비유하는 경우도 있다.

바둑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쉽게 말하면 이창호는 단순히 실력이 좋은 게 아니라 바둑의 메타를 바꾼 것이다. 고로 이창호가 보여준 '끊임없는 형세판단'은 그 이후로, 모든 기사들에게는 기본이 되었다는 것이며 신포석과 화점에 기반한 오청원 체제가 1990년대까지 오는데, 이창호는 끝내기 메타를 창안한 것이다. 이창호의 메타를 깨기 위해 수많은 바둑 기사들이 도전했지만 결국 이창호를 깨기 위한 공격적인 메타[24]가 나왔을 뿐이지 결국 2010년대까지 바둑 기사들은 이창호의 메타를 의식하면서 공부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 것이다.


2.5. e스포츠[편집]


e스포츠의 경우 해당 종목 내 타 선수에 비해 커리어를 비교했을 때 확실히 우위를 점하는 선수가 GOAT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기성 스포츠 종목에 비해 게임사의 패치[25] 등의 요인으로 메타가 바뀌는 주기가 상당히 빠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메타나 트렌드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선수들이 많고 불판이 여러번 갈리듯이 세대교체가 빠르다는 의미가 있다. 즉, 여기서 GOAT로 꼽힌다는 것은 다른 선수들에 비해 다양한 메타에서 더 우월한 기량을 지녔기 때문에 월등한 커리어를 누적했다는 의미다.

때문에, GOAT에 논란이 있어 꼽히지 않은 종목들은 역대 모든 커리어를 누적했을 때 커리어 비교 우위를 따지기 힘든 케이스가 대부분이며, 특히 한국에 대회가 있던 던전앤파이터, 서든어택, 피파 온라인 시리즈는 당대 기준으로 최고의 선수가 굉장히 많다.


2.5.1. 리그 오브 레전드[편집]



파일:2022 Summer Faker.jpg


페이커는 역대 최고의 리그 오브 레전드 미드 라이너이자 프로게이머이면서 종목을 막론한 세계 최고의 글로벌 e스포츠 스타임과 동시에, 여러 측면에서 봤을 때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 선수이자 LoL e스포츠를 넘어 e스포츠의 GOAT로도 정의된다.[26]

커리어만 보더라도 e스포츠 종목 중 독보적인 세계 최상위권의 규모를 자랑하는 리그 오브 레전드 e스포츠에서 현역과 은퇴한 프로게이머를 합쳐도 리그 오브 레전드 최고 대회인 롤드컵 우승을 그간 3번 달성한 선수에는 페이커와 오랜 세월 함께 해온 벵기가 전부이다. 또한 롤드컵 뿐만 아니라 다음 가는 국제 대회인 MSI 2회 우승을 합해 라이엇 주관 메이저 국제대회 최다 우승자(5회)이며, 지역 리그 우승(10회)조차도 페이커와 우승 횟수가 동일한 선수는 4대 메이저리그에서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27][28] 그리고 2022 LCK 스프링까지를 기준으로, 그의 커리어를 반으로 접더라도 월즈 우승 1.5회, MSI 우승 1회, 지역리그 우승 5회인데, 이렇게 해도 역대 미드라이너들 중 독보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29][30][31]

페이커 본인은 자신의 타이틀이 향후 10년간은 깨지지 않을 것 같다고 언급하였고, 그의 커리어가 워낙 압도적이라서 많은 이들이 페이커의 커리어를 깨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의 영역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이 외에 각종 기록 및 압도적 위상과 리그 오브 레전드 내에서의 어마어마한 영향력까지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실제로 2019 롤드컵에서는 라이엇 게임즈와 롤 E스포츠에서 사실상 GOAT로 못 박는 장면을 송출한 바도 있다.

선수 커리어와 우승 경력을 쌓아나갔던 족적 역시 굉장한 편이며, 사실상 커리어와 꾸준함을 동등하게 바라보는 입장과 더불어 리빙 레전드로 간주되고 있다. 특히 LoL e스포츠가 많은 관심 속, 메타에 따른 변화 및 상향평준화가 지속되는 과정 속에서도 도태되지 않고 e스포츠에서 베테랑에 해당하는 나이까지 세계 순위권 내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을 뿐더러[32], 선수 데뷔 이래로 여러 강력한 면모를 통해 이후부터는 사실상 미드라는 포지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선수로 인정받게 되었고, 그 등장 이래로 선수 생활 10년 중 5년을 빛나게 보내거나, 정확하게 그 기간을 따져서 상술한 2015년부터 2017년 상반기까지의 시기까지 약 2년 반동안 연속으로 국제와 국내를 막론한 최고의 자리에 연속으로 올라서면서 전성기와 영향력을 유지했었다는 점에서, 이는 페이커의 꾸준함 및 기록의 역사와 족적을 상징하는 해로 언급되는 수준이다. 거기에 2021년 당시에 담원 기아가 2020 월즈 우승 이후 세계 최강급의 전력을 유지했음에도 다른 강팀들에 의해 2연속 롤드컵 우승을 비롯한 국제대회 우승이 막히는 사례가 발생하게 됨에 따라, 오히려 팀과 함께 당대의 강팀들을 모두 뚫어내고 우승을 거듭했던 페이커에 대한 고평가가 역으로 상승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2.5.2. 워크래프트 시리즈[편집]


역대 최고의 워크래프트 3 플레이어. 전성기의 포스는 압도적으로 외계인, 제5종족, 안드로장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정도로 동시기 다른 프로게이머들과 차원이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2020년에도 전성기만큼은 아니라도 최정상급 플레이어로 활동 중이다. 국내에서 워3가 묻힌 감이 있어서 실력에 비해 유명세는 낮지만, 워3가 엄청난 인기를 끈 중국에서는 정말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에도 참여해 그 인기를 증명했다. 워크래프트 대회에서 와우워3를 통틀어 가장 많은 누적 상금을 탄 선수이기도 하다.


2.5.3. 철권 시리즈[편집]


전 세계 철권 프로게이머들 중 가장 압도적인 커리어와 꾸준함을 보유하고 있다. 무릎을 이긴 프로게이머들은 몇 명 있지만, 늘 우승권을 유지하는 그의 꾸준함은 독보적으로, 역대 최고의 철권 프로게이머로 인정받는다.


2.5.4. 카트라이더[편집]



파일:문호준그래프.jpg


역대 최고의 카트라이더 프로게이머이자 다른 누군가가 위상을 깰 기미도 보이지 않는 영원한 카트 황제. 무려 15년간 현역으로 활동하면서 정규 리그 우승만 14회에[33][34][35] 달하고, 심지어 양대 리그 우승을[36] 무려 2회나 달성했다.

최초로 프로게이머 헌정 카트바디를 카트라이더 측에서 만들 정도이며, 15년 동안 정상으로 군림한 카트 개인 리그의 유일한 3-peat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37] 개인전은 2020년 시즌 1 우승을 마지막으로, 팀전에서는 2020년 시즌 2 우승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감독으로 전향하였다.[38][39] 벌어들인 돈도 김택환, 형독과 더불어 3위권안에 든다.

감독으로 전향한 첫 해에도 소속팀 한화생명 e스포츠 선수 유창현이 개인전 우승하는데에 도움을 줬고, 팀전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하며 감독으로써 좋은 시작을 알렸다. 그뒤 2021년 수퍼컵에서 감독 커리어 첫 우승을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15년동안 한 종목에서 황제로 군림했고, 적수를 찾지 못해 은퇴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애초에 e스포츠에서 한 종목의 프로 리그가 15년 이상 가는 게 힘들기에 타 종목과 비교하는 것도 어려우나, 한 종목에서 정상에 군림한 기간이 가장 긴 프로게이머를 고르라면 당연히 문호준일 것이다.

카트 리그가 2005년에 시작해서 현재진행형인데, 그 중 문호준은 2005년과 휴식기인 2014년을 제외한 모든 해에 참가했기에 카트 리그의 90%는 문호준과 함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선수 시절 가장 큰 라이벌은 유영혁인데, 이마저도 커리어상으로 두 배, 그 중 개인전은 문호준이 다섯 배 많은 트로피를 획득했다.[40] 유영혁도 물론 뛰어난 선수이지만, 일부 관계자들은 사실상 유영혁도 만들어진 라이벌일 뿐이며 실제로는 라이벌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또한 존재한다.


2.5.5.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편집]


현재는 히오스 공식 리그 폐지로 인해 리그 오브 레전드로 종목을 전향하였지만[41], 히오스 내에서의 명성은 히오스계의 페이커라고 불릴 정도로 세계 최고의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 프로게이머로 평가받았으며, HGC 폐지 전까지 2연속 글로벌 파이널 우승, HGC 글로벌 파이널 3회 우승, 국내 리그 쓰리핏, 2018년 시즌 통합 우승 등의 업적에 빛나는, 이제는 사라진 히오스 e스포츠계의 전설이다.

여담으로 리치 이재원이 롤 프로 리그에 뛰게 되면서, 그의 별명 중 하나는 '이세계 페이커'가 되었다. 그만큼 히오스에서의 리치의 위상이 높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별명.

피파 온라인 4


2.5.6. 스타크래프트[편집]


대체로 임이최 라인 중에서 임요환을 최고로 많이 뽑지만, 그 이후 이제동, 이영호 중에서 누가 최고인 지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많이 갈린다. 임이최 라인에서 승부조작으로 영구제명된 마재윤이 있듯, 스타크래프트의 GOAT 평가에는 영향력과 게임 외적인 측면도 고려하기 때문이다. 물론 임요환과 이제동, 이영호 중 어느 쪽이 더 위라는 것도 의견이 많이 갈린다.

스타크래프트 시리즈의 경우 커리어를 논할 때에, 시기에 따른 대회의 갯수나 위상 차이가 상당히 크기 때문에 동시대 선수를 놓고 비교하는 경우는 몰라도, 역대를 비교하는 경우에는 시각 차이가 많이 나기도 한다.

대략적인 정리를 해보자면, 게임의 외적인 영향력을 모두 포함한다면, 게임 내적 커리어는 확실하게 밀리지만 임요환이 후보가 될 수 있으며, 프로씬 토탈 역대 개인 리그 커리어 1위의 이윤열과 개인 리그 우승 횟수가 똑같으며 팀단위 리그 커리어가 더 높고 국제대회 커리어와 프로씬 종료 이후까지 게임 내적으로 GOAT에 가장 가까운 역대 최강의 선수인 이영호가 존재하며, 경기 내적 패러다임에 끼친 영향력과 더불어 선수와 지도자로 모두 우승을 경험한 최연성도 후보가 될 수 있다. 또한 역대 최강의 저그이자 저그 커리어 압도적인 1위의 이제동이 존재한다.[42]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 저 중에 실력적으로 GOAT에 가장 가까운 선수는 이영호라고 말할 수 있지만[43] 군입대 후 생긴 논란 중 코인 관련으로 생긴 논란으로 많은 스타 팬들의 지지를 잃은 편이다. 그와 별개로 스타리그, MSL와 같은 개인 리그는 물론이고 프로리그 우승, 국제대회 성적, 은퇴 이후 돌아온 ASL과 같은 스타리그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모습과 성적을 거두며, 커리어 타이틀, 실력에서 독보적이고 압도적인 발자취를 남겼다.[44] 이영호와 더불어 '리쌍' 이제동이 유일하게 국내는 물론 국제 커리어까지 쌍벽을 이루며 독보적인 커리어를 보여줬지만, 은퇴 시기의 차이로 ASL 커리어의 차이가 발생하였다. 다만 앞서 말한 코인 사건의 여파로 이제동을 지지하는 사람 또한 늘어나게 되었다.[45]

특이하게도 스타크래프트에서 독보적 1등은 미정에 있지만 독보적 2등은 이견없이 홍진호가 꼽힌다. 이벤트전 등 비공식 대회의 우승은 있지만 공식 대회 준우승 횟수만 22회라는 영예와 수모가 섞인 전적이 눈에 띄다보니 독보적 2등을 논할때만은 스타 팬들은 물론 스타의 문외한들도 입을 모아 홍진호를 말하는 수준이다. 1등은 못 하고 2등이 한계인 사람을 일컫는 콩라인이라는 신조어도 홍진호의 별명인 콩(진호)에서 따온 것이다.


2.5.7. 스타크래프트 2[편집]


특히 스타크래프트 2의 경우 한국인 선수들이 초강세를 보이긴 했지만, 1티어 대회(GSL, WCS, WCS Global Final, IEM 카토비체 등)만 따져도 한 선수의 독점 없이 누가 언제 우승할지 모르는 복마전이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1년에 걸친 시즌, 그러니까 당대 최고 선수를 뽑는데도 생각보다 난항이 많고, 그나마 한국 선수들 중 조성주와 이병렬이 가장 앞서는 가운데에서 정종현, 장민철, 이신형, 최성훈, 김유진, 김준호를 비롯한 대회별 우승의 족적을 남긴 선수들에 대한 지지 여론도 일부 존재한다.

[1] 커리어 중 4개의 메이저 대회 우승을 말한다. 과거 LPGA 여제라 불렸던 아니카 소렌스탐(2003년) 이후 무려 12년 만.[2] 참고로 박인비가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사실상 박세리가 명실상부한 한국 골프계의 GOAT에 가까웠다. 그것도 여러 측면에서 봤을때 유력으로 뽑히는 것이 당시에 그냥 당연했을 정도였고, 지금도 박세리에 대한 평가를 매우 높게 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3] 2008, 2012, 2016[4] 둘다 예선전 기록이다. 결승전 세계 기록은 따로 있다.[5] 올림픽, 세계 선수권, 아시안 게임, 아시아 선수권 금메달 석권[6]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바이어 04 레버쿠젠 소속으로 분데스리가 98골을 포함해 클럽 통산 121골을 득점했다.[7] 대한민국 해외 축구의 선구자라는 타이틀과 한국인으로 유럽 리그에서 뛴 최초의 선수로, 당대 분데스리가 외국인 선수 최다 득점, 한국인 남자 축구 선수 중 역대 최다 A매치 득점 기록과 최초의 센추리 클럽 가입, 세계 최연소 센추리 클럽 가입, UEFA컵 우승 2회,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에 2회 선정되었고, 당시의 분데스리가가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파울 브라이트너 등과 같은 당대 엄청난 전설들이 포진된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리그였다는 점과 그 중 단연 최고의 공격수 중 한명이었다는 사실은, 세계 주류 축구와는 거리가 매우 멀었고, 그 중 변방 지역이었던 아시아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선수가 일궈낸 활약에서 오는 위상과 의미가 큰 1970~80년대의 전설이다.[8] 한국인 최초의 프리미어 리거, 세번의 월드컵 본선에서 모두 1골씩 득점하여 총 3골을 기록한 아시아 최초의 선수, 아시아 선수 월드컵 최다 MOM, 아시아 선수 최초 및 최다 프리미어 리그 우승, 아시아 선수 최초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아시아 선수 최초 UEFA 올해의 공격수 후보, 발롱도르 후보 50인에 선정, 국가대표로는 2002 월드컵 4강, 주장으로서 2010 월드컵 16강 진출을 이끈 2000~10년대의 전설이다.[9] 국외 선수들인 파울리노 알칸타라, 알리 다에이, 나카타 히데토시, 카가와 신지 등도 아시아 GOAT 논쟁에 포함되었다.[10] 모하메드 살라와 함께 23골을 기록하면서 공동 득점왕이 됐다. 심지어 5골이 pk인 살라와 달리 손흥민은 pk가 없다.[11] 아시안 게임 금메달이 있긴 하나 A매치가 아니므로 제외.[12] 세계 최고의 축구 리그들 중 하나인 프리미어 리그와 최고의 클럽 축구 대회인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아시아인 역대 최다 득점 기록, 발롱도르 아시아인 최고 순위, 아시아 선수 최초의 FIFA FIFPro 월드 XI 후보 55인 선정, FIFA 푸스카스상 수상,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상 3회 수상,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됨에 따라 부족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아시아와 한국을 필두로 한 GOAT 논쟁에서 우위를 가진다고 여겨지고 있다.[13] 정현의 4강 기록을 제외하면 이형택이 16강 두 번을 진출한 것이 최고 기록이다.[14] 마스터스에서 정현을 제외한 최고기록은 이형택의 16강 1회 진출이 최고 기록.[15] 이형택의 최고 랭킹은 36위이고 권순우의 최고 랭킹은 52위다.[16] 현재는 다른 선수에 의해 기록이 경신되었다.[17] 일본에서 MLB로 진출하여 좋은 성적을 거둔 선수들은 다 우완이다. 한국도 류현진 전에는 MLB에 진출한 선수들이 대부분 우완이었다.[18] 1위는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이 확실해보이는 스즈키 이치로이다.[19] KBO 투수에 박철순, 최동원, 선동열, 김시진, 김용수, 송진우, 이강철, 구대성을 비롯한 과거 기라성 같은 KBO 전설들, 메이저 리그를 기준으로 이후 진출에 활로를 개척하고 활약한 박찬호,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 리그 우승 반지를 직접 손에 낀 김병현이 있다.[20] 타자에는 일본에서 대활약한 장훈, 일본에서 뛰다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4할 타자가 된 백인천, 거기에 이후 장효조, 이만수, 장종훈, 양준혁, 이종범, 박경완, 박재홍, 이병규, 이승엽, 심정수, 이대호 등을 비롯한 시대를 풍미한 KBO 타자들이 대거 포진된 상황에서 포지션을 막론한 GOAT 여부를 따지고 구분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심지어 이른바 추강대엽이 바로 이러한 현재 진행형 논쟁 중 하나이기도 하다.[21] 전 페더급 3위.[22] 김동현은 한국인 최초 UFC에 진출한 파이터로 지옥의 체급 웰터급에서 6위까지 했으며 한국인 UFC 최다승을 기록하여 GOAT라는 의견도 있지만 정찬성이 더 긴 시간 랭커로서 활동했고 랭킹이 높은 점, 결정적으로 김동현은 타이틀과는 인연이 없었던 점을 들어 정찬성이 김동현을 넘어섰다는 의견이 조금 더 많은 편이다.[23] 국가 주도하에 카 퍼레이드를 펼치거나 훈장을 받을 정도였다.[24] 끝내기 단계 이전에 이창호에게 완벽하게 우세를 따내는 방식이 주를 이루었다.[25] 게임 내에서 메타에 영향을 주는 패치 뿐만이 아닌, 신규 시리즈 출시 등도 넓게 보면 패치의 한 영역이라 볼 수 있다.[26] 2010년대부터 지금까지 e스포츠 종목 중 가장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이 바로 LoL e스포츠이기 때문이다.[27] 퍽즈LEC에서 8회, LCS에서 1회 우승으로 9회 우승자가 확실하긴 하다만은, 냉정하게 말해서 롤드컵 6회 우승 지역인 LCK와 각각 롤드컵 1회와 0회 우승을 기록한 지역인 LEC와 LCS 사이에는 거대한 위상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2018년에서 2020 중순까지 국제전 성적 하에 당시 퍽즈가 뛰었던 LEC의 위상이 LCK를 추월한 적도 있었지만, 이외 대부분의 기간에선 LCK가 앞서 있었다.[28] 다른 메이저 지역 출신인 북미의 원로 선수 더블리프트도 8회, 중국클리어러브도 지역 리그 우승이 5회다. 또한 마이너 지역까지 둘러보면 11회 우승의 일본세로스가 있지만, 4대 메이저 지역 리그와 마이너 지역 리그와의 위상 차이와 주목도 면에서 크게 떨어진다.[29] 타 스포츠처럼 롤 역시 특히 국제 대회 커리어가 중요시되는데, 절반으로 접은 성적인 롤드컵 우승 1회와 MSI 우승 1회를 만족하는 미드라이너가 한때 그의 라이벌로 불렸던 한 명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 조건을 상향조정하면 미드라이너 중에서는 만족하는 선수가 아예 없다.[30] 롤드컵MSI 2회 우승을 동시에 만족하는 선수는 타 포지션에서도 극소수로, 선수로만 한정하면 총 3명(페이커, , 울프), 코칭스태프는 단 2명(김정균, 최병훈) 뿐이다. 그리고 앞서 거론된 다섯 명은 2015년2016년, 그리고 2017년까지 많은 우승을 거두었고, 메이저 대회를 기준으로 논-켈린더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는 등 범접못할 기록을 SK텔레콤 T1이라는 팀에서 이뤄냈다.[31] 2022년을 기준으로 페이커의 MSI 우승을 능가한 선수로는 3회 우승자인 RNG의 샤오후(미드 2회, 탑 1회)와 밍(서포터 3회)이 전부이다.[32] 2018 시즌처럼 부진한 시즌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LCK 황금기 이후 2019, 2021년 두 번의 롤드컵 4강 진출을 이루었고 10년차에는 2022년 LCK 스프링 시즌 전승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까지 추가했다.[33] 우승 횟수 7회로 2위인 유영혁, 김승태와 2배나 차이가 난다. 그리고 또 대단한 건 개인전 우승 10회인데 2위 이재혁이 개인전 통산 4회 우승으로 문호준이 2배 이상의 차이를 냈다는 점이다. 또한 e스포츠에서 인정하는 공식 대회인 케스파컵에서도 2회 우승을 해서 공식 대회 우승이 16회로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달성했다. 여담으로 이 문서의 E스포츠 부분에서 세번째로 우승이 빠르다. (첫번째는 2003년의 장재호, 두번째는 2004년의 다이고)[34] 문호준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넥슨 측에서 16차 리그, 17차 리그를 2인제로 변경하였는데, 오존 게이밍의 규칙 악용으로 문호준은 17차 리그 후 잠정 은퇴를 선언하였고, 16차, 17차 리그는 카트 리그의 암흑기로 평가되며 공인 리그에서 제외된 수모를 겪는다.(실제로 17차 리그 이후 시즌 제로 개최까지 거의 1년 간 리그 공백기가 있었다.) 이후로는 팀전이 카트 리그의 메인 스트림이 되기는 했으나 개인전 리그 역시 듀얼레이스 때부터 정식으로 추가되어 이후로는 개인전-팀전의 양대 리그화가 되었다.[35] 3차리그(오프예선에 참가한 경력이 있음) ~ 2020 시즌 1까지 개인전이 총 19회가 열렸는데 문호준의 개인전 우승은 10회이다. 즉 우승률(우승 수/출전 수)이 50%가 넘는다. 카트라이더라는 게임 자체가 GOAT 문서에 서술된 다른 e스포츠 종목들에 비해 인기가 많이 적어서 그렇지 커리어로는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나름 리그는 국내 2위를 다툴 정도이다.[36] 개인전, 팀전 동시 우승, 문호준을 제외하고 양대 우승한 선수는 현재까지 없다.[37] 9차 ~ 11차, 13차 ~ 15차 우승으로 두 차례 3-peat을 달성했다.[38] 은퇴 이유 중에는 라이벌 없어 동기부여가 부족한 것과 하나는 결승전 전 날에 모바일 카러플을 하고 연습을 안하고 팀전을 우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39] 다만 이걸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게 좋다. 문호준은 카러플 출시 그 이전에도 은퇴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40] 개인전은 현재 문호준을 제외하면 이재혁이 최다 우승자이다.(4회) 이재혁과 비교해도 2배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이기에 문호준이 얼마나 대단한지 증명하는 셈이 되지만.[41] 2021년까지 농심 레드포스의 탑 라이너로 소속되었다.[42] 단순히 이제동이 저그이기 때문에 언급되는 것은 아니다. 양대 리그 우승 횟수는 이윤열-이영호의 6회 다음가는 5회로 최연성과 동률이며, 개인리그 상위권 진출 기록은 임요환이나 최연성보다 더 많다. 또한 이영호의 커리어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WCG 우승은 이제동 역시 마찬가지며, 프로리그 다승 1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도 손을 들어주는 요소.[43] 다만 이건 올드 세대보다 드래프트 세대가 실력이 압도적으로 우위인 것도 감안해야 한다.[44] 다만 현역 시절과는 달리 은퇴 이후에는 엄연히 아마추어 신분이고, ASL/KSL 또한 공식적으로는 아마추어 대회이기 때문에 공식 커리어에 넣지 않는게 옳다는 시각 또한 많다. 공식 개인 리그 커리어만 봤을때는 이윤열이 준우승이 2회 더 많아 우위이다.[45] 이제동이 새파랗게 어린 나이부터 그 오랜 기간을 선수와 방송인으로 지내왔음에도 도덕성 논란이 전무할만큼 자기관리가 대단한 인물인 점도 한몫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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