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혁명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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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Industrial Revolution | 産業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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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2.1. 새로운 농업 기술의 도입
2.2. 사회적 배경
2.2.1. 식민지 개척과 시장 확보
2.2.2. 정치적 안정성의 확보
2.2.3. 지주 계급의 등장
2.3. 자연적 배경
3. 전개
3.1.1. 면 방직업의 발전
3.1.2. 증기기관과 교통의 발전
3.1.3. 제철 공업의 발전
3.2. 산업의 성장
3.3. 노동 계급 탄생
3.3.1. 노동자들의 고통
3.3.2. 노동 조건 개선
4. 왜 영국에서 일어났는가?
4.1. 경제적 동인
4.2. 재산권의 발달
5. 결과 및 의의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산업혁명(, Industrial revolution)은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사회경제적 변화와 기술의 혁신,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아 크게 변한 인류 문명의 총체를 일컫는다.[1]

영국에서 일어난 방적기개량을 시작으로 한 기술 혁명은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중반 사이에 유럽 여러 나라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 수공업에 기초한 작업장들이 기계설비를 갖춘 큰 공장(공장제 기계공업)으로 전환되었으며, 자본주의 경제가 확립되었다. 혁명은 19세기에 유럽을 넘어 북미, 그리고 아시아로까지 확산되었다. 독일의 사회주의 경제학자이자 역사학자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시대 구분으로서 1780~1840년대에 진행된 제조업, 공업의 기계화와 공장화를 처음 '산업 혁명'이라고 지칭했으며,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Lectures on the Industrial Revolution of the Eighteenth Century in England》라는 책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면서 대중화되었다.

모든 역사가들이 근, 현대의 많은 성취와 문제가 이 산업 혁명을 계기로 시작되었다는 점에 동의한다. 현대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사회 제도의 거의 모든 것이 산업 혁명 시기에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양적인 면에서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주었는데, 15세기와 21세기를 비교하면 인구는 5억에서 70억으로 늘었고 전 세계 총생산은 2,500억 달러에서 60조 달러로 불어났다. 참고로 15세기 전세계 총생산액의 5배 되는 돈(1.3조 달러)이 스코틀랜드 왕립은행 잔고에 있다.

백여 년에 걸쳐 일어난 사건인 만큼 전개 과정과 시기에 따라 다시 나눌 수 있는데,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에 소비재와 경공업을 중심으로 일어난 변화는 1차 산업 혁명으로 분류되고, 19세기 중후반에 전기화학 등 중화학 공업이 시작된 것은 2차 산업혁명으로 분류된다. 역사가들 사이에서 그 기준을 쉽게 합의하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한데, 뚜렷하게 변화의 계기나 시작점을 찾을 수 있는 정치적 사건에 비해서 오랜 세월이 걸린 산업·경제 분야의 혁명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기준인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도 증기기관 등 쉽게 구분할 수 있는 사건이 있기 때문에 편의적으로 나눈 것이라고 여기는 역사가들도 있다. 또한 후술하듯 16~17세기에 걸쳐 일어난 다양한 진보를 '조기 산업 혁명'이라고 부르는 구분도 존재한다.[2]

한편, 제레미 리프킨이 인터넷으로 인한 정보 혁명을 3차 산업혁명이라고 이름 붙이고, 인공지능으로 인한 기술 혁신을 4차 산업혁명이라고 지칭하여 이러한 용어가 세간에 퍼졌다. 사실 비교적 평가와 연구가 잘 정립된 1, 2차 산업혁명에 비해 3, 4차 산업혁명은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당대를 설명하면서 자의적으로 붙인 표현으로,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3차, 4차 산업혁명을 그저 산업 혁명의 연장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하고, 한국에서는 굉장히 화제인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도 영미권에서는 그다지 주목 받지 못하는 개념이다. 3차 산업혁명이라는 말 역시 한국에서 제레미 리프킨이 과대평가 되어 있어서 주목 받았던 단어. 3차 산업혁명은 아직도 경제학적으로 실체나 성과가 불분명하다. 경제 성장률이 0%에서 머물렀던 인류가, 경제 성장이라는 것을 최초로 이루게 된 1차 산업혁명에 비하면 3, 4차 산업혁명은 그 성과나 실체가 뚜렷하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영미권에서는 산업혁명이라고 하면 그냥 18세기~19세기에 있었던 현상을 말하지, 따로 1차 산업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이거나 하지는 않는다. 한국에서도 4차 산업혁명이란 단어가 실체가 없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2. 배경[편집]



2.1. 새로운 농업 기술의 도입[편집]


16세기부터 벨기에플랑드르 지방에서 중세시대의 농경법인 삼포제를 대체하는 4윤작법이 개발된다. 밭을 3분해서 3년마다 한 번씩 밭을 묵히는 삼포제와 달리 밭을 4분해서 보리, 클로버, , 순무 순으로 심는 농법으로, 클로버와 순무가 지력을 회복시키는 작용을 하며 동시에 사료로 사용되어 밭 중 일부를 사용할 수 없는 삼포제에 비해 훨씬 효율적이었다.

이 농법은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 찰스 타운센드 자작[3]이 노퍽 지방에서 강력하게 권장하기 시작하여 영국에 보급되며, 이 농업은 노퍽 농업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렇게 혁명적으로 발전한 농업은 후에 영국의 급속한 도시화로 늘어나는 식량 수요를 감당할 수 있게 된다. 통상 인구가 증가하면 식량의 가격이 증가하여 인구 증가를 억제하는 편이나 당시의 영국은 식량 가격이 안정화된 가운데 인구가 증가할 수 있었다. 이른바 맬서스 트랩으로부터 벗어난다.

한편 영국은 농부들 역시 이하의 인클로저 운동의 영향으로 자본주의적 이념이 발달해 있어서 자신들 소유의 경작지의 생산성과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많은 투자와 연구를 했는데, 그 사례 중 하나가 선택적 육종이다. 영국은 18세기에 이미 농업경진대회가 활성화되어 있어서 전국 각지의 농업인들이 경쟁적으로 우량 품종을 내놓았는데, 그 경쟁의 결과로 1700년에 평균 무게 170kg 이던 식육용 황소가 1786년에는 386kg 으로 증가했다. 소뿐만 아니라 돼지, 닭, 양 등도 육종이 진행되었다. 우리가 지금까지도 아는 유명 품종 가축 중 상당수가 이때 나온 것. 영국이 가진 막대한 해외 시장 덕에 해외에서 다양한 품종의 가축을 수입해올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다양한 형질을 들여와 실험할 수 있었던 것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러한 급격한 농업생산력의 증가는 1700년 브리튼 섬의 인구 550만이 1800년 900만으로 증가하는 데 기여했다. 1830년 기준 브리튼섬의 곡물 생산량은 당시 인구의 2배가 소비할 분량에 해당했다.[4]

덴마크뉴질랜드는 1차 산업으로 산업화를 이룬 국가로 분류되기도 한다.

사족으로 곡물 생산이 늘어 곡물가가 떨어지자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던 지주들이 18세기 중반 곡물을 을 생산하는데 투입하는 바람에 영국에는 알코올 중독자가 급증했다. 참고로 곡물 수입을 막는 법인 곡물법을 의회에 압력을 넣어 통과시킨 것은 1815년이었다.


2.2. 사회적 배경[편집]



2.2.1. 식민지 개척과 시장 확보[편집]


대항해시대 중반인 17세기 무렵부터 영국은 북아메리카 진출과 동인도 회사 설립을 통한 인도, 동남아, 청나라 등 아시아와의 동방무역 활성화를 통해 착실히 경제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18세기가 되고 북아메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태평양의 식민지 개척과 제국 운영도 어느정도 안정권에 들어섰는데, 당시 영국이 밀고 있던 산업은 모직 산업이었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특성을 갖춘 직물 산업은 노동 집약적이었고, 무역에도 적합해 넓은 잠재 시장[5]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일이 시작되려니까 인도에서 수출하는 저렴한 캘리코(Calico) 면직물이 영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영국의 모직물 산업에 위협이 되었다. 이에 영국은 이 인도산 면직물 수입을 금지시켜 다시 기회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영국 내에서 모직물에 비해 값이 싸고 쓰기 편한 면직물에 대한 수요는 높아져 갔으며,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밀수 등을 통해 들어온 캘리코의 인기는 높았다. 즉, 일단 면직물 시장이라는 시장이 생기니, 수요를 억제할 수는 없었던 것. 이에 영국에서는 자체적으로 면직물 산업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우선 1757년 플라시 전투의 승리를 통해 동인도회사가 인도 벵골 지방을 장악함으로써 원면을 마구 거둬들였고, 가격이 저렴해진 인도산 원면을 수입하여 랭커셔 지방을 중심으로 면직산업이 발전했다. 증기기관을 비롯한 기계 발달도 이 사건을 기반으로 한다.

또, 영국은 당시 이미 산업화의 포텐이 터질 만한 큰 경제규모를 가지고 있었고, 곧 산업화라는 새로운 기조에 대해 흥미로워하던 사업가들이 안정적인 투자를 이어가면서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으며, 게다가 그 성장의 수요도 담당할 수 있을 만큼 경제가 커지게 되었다. [6]


2.2.2. 정치적 안정성의 확보[편집]


이미 잉글랜드 내전 혹은 청교도 혁명(Puritan Revolution)이라 불리는 일련의 대사건에서 찰스 1세, 올리버 크롬웰 등의 혼란을 겪고, 또 명예 혁명으로 마침표를 찍은 뒤, 영국의 정치는 매우 안정되었다. 이에 반해, 유럽 본토는 당장 프랑스 혁명이란 다른 의미의 혁명의 한복판에 있었다. 지주계급 역시 약하지 않았다. 거기다 마지막엔 나폴레옹까지 물리치게 되면서 유럽의 주도권을 쟁취하게 되었다.


2.2.3. 지주 계급의 등장[편집]


농업 혁명에 한발 앞서, 중세 하반기부터 지주계층의 성장은 두드러졌고, 여기에 부르주아등 후발 신분들이 지주가 되면서 새로운 유력계층으로 대두되었다.

농업 혁명으로 인해 유럽의 농업은 분기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윤작을 통해 연속경작이 가능하자, 자신의 밭을 지력이 회복될 때까지 묵혀둘 필요가 없던 농민들은 차츰 자신의 경작지에서 독립적으로 농사짓는 것을 선호하였으며, 대경작지를 지주 본인이 직접 경영하는 것보다 경영 전문가인 차지농에게 임대해주는 것을 더 선호하게 된다.

분업과 직업구성률의 변화가 아직 미미하여 농업이 경제의 근간이던 시대였기 때문에 지주의 권력은 아주 막강한 것이었다. 또한 개중에서 청교도들은 일반적으로 유럽에서는 관료, 정치인, 학자 등 사회적으로 공인된 지위를 얻을 수 없어 상업에 종사하여 중산층 계급으로 발전해 있었다. 농촌 대지주들인 젠트리(gentry)들은 경제력을 통해 높은 교육 수준과 함께 지역에 따라선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우세한 참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영국에서는 중상주의를 거쳐 상품 작물과 양모무역을 통해 지주들이 막대한 경제적 수익을 올리고 있었고,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의회의 권한이 왕권보다 강력한 입헌군주정 시대에 이들의 영향력은 높아져만 갔다.


2.2.3.1. 인클로저 운동[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인클로저 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소작제도가 대두되고, 농민에 의한 직접경작이 활성화되자 자기 토지를 가지려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토지의 소유권을 명확히 확립하려는 움직임이 늘어났다. 장원제 시대에는 농민들이 공동으로 쓰는 들이나 숲을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공유토지로 두었는데, 인클로저 운동이 시작되자, 이들 땅은 각각의 다른 소유주에게 분할되었다. 분할된 공유지는 모직을 만들기 위해 목축지로 전용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농경지로 개간되는 경우가 더 많았고, 공유지의 개간으로 경작지가 늘어나자 식량생산량이 증가하여 늘어나는 인구를 효과적으로 부양할 수 있었다.

더불어 농민층은 비슷한 경제규모를 가지고 균일화되었으나, 이후 시장을 잘 활용하냐 못하냐에 따라 부농과 빈농으로 나뉘었다. 여기서 자본주의적 차지농인 부농이 대두되고, 많은 수의 영세농민들이 이 부농과의 시장경쟁에서 밀려나 농작을 포기하고 농촌의 임금노동자가 되었다. 이 때문에 농촌에서는 많은 수의 노동자가 생겨났고, 이들은 부농에게 고용되거나 농촌의 상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는 등 농촌 지역의 직업분화를 촉진하였다.

결과적으로 농업 생산량이 늘어나 인구증가, 특히 식량을 생산하지 않는 도시 인구의 증가를 뒷받침했고, 농촌 지역에서는 농업 분화를 통해 직업분화를 촉진시켰다.

종전에는 카를 마르크스 이래로 '인클로저 운동으로 인해 농촌 지역의 인구가 도시로 쫓겨나서 도시에 풍부한 노동력을 공급했으며, 그 농민들은 도시의 발전을 이끌고 산업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식의 도식과 설명이 주류였으나[7], 최근 연구에서는 그런 도식이 부정된다. 인구자료를 살펴보니 실제로 인구이동이 거의 벌어지지 않았고, 도시의 노동자들은 주로 도시출신이나 도시에 인접한 지역출신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8]

인클로저 운동은 현재는 다른 의미에서 영국의 산업혁명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는데, 토지의 사유재산권이 법적, 제도적으로 보장되게 했다는 점이 중요하게 평가 받는다. 이것은 아메리카 식민지 경영이 스페인과 전혀 다르게 진행되게 만들었다. 스페인령 식민지는 법적으로는 온 아메리카가 왕의 소유였고, 현지에서는 왕에게 권한을 부여받은 대지주 위주의 경제가 구성되었지만, 영국령 아메리카 13개 식민지는 토지를 소유한 자유민 위주의 경제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13주 식민지민들이 자신의 사유재산권에 대한 의식과 참정권에 대한 의식을 뚜렷히 가지게한 원인이기도 하다.


2.3. 자연적 배경[편집]


영국에는 풍부한 노천 탄광이 많았다. 상대적으로 적은 노력으로 쉽게 석탄 채굴이 가능한 환경은 산업혁명에 있어 강력한 추진체가 되었다. 게다가 섬나라라는 이점과 더불어 운하 붐이 일어나 어디에서나 바다에 접근하기가 쉬웠다는 점도 크다.

좀 더 이것저것 더 붙인다면,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정확히는 기술이 발달되지 못한 예전 석탄은 발열량만큼은 목재보다 우수하지만, 불완전연소 때문에 가스도 많이 생기고, 먼지가 묻고, 제련에 사용할 경우 황이 섞여 들어가 황화철이 포함된 질이 떨어지는 철이 만들어지는지라 연료로써 가치가 떨어졌다. 한참 동안 석탄은 산지를 제외하면 런던에서나 쓰던 것인데, 이전부터 산업이 발달하고, 배를 만들어내야 했던 영국이 국내의 목재 자원이 고갈되는 바람에 별 수 없이 석탄을 이용하게 된 것.

그런데 석탄은 채굴에 필요한 에너지 투하량이 높고, 영국은 지리적 특성상 갱도에 물이 고이는 경우가 많다보니 그 물을 퍼내기 위해 증기기관이 발명되었다. 요컨대 석탄의 채굴이 어려웠기에 증기기관이 발명된 것이다.

가장 중요했던 이 고질적인 석탄의 불순물 제거 문제는 기술의 발전으로 코크스를 만듦으로써 해결되어, 목탄의 부족으로 인해 위기를 맞고 있던 제철 등 타 산업에게 돌파구를 만들어주게 된다.

청동기에서 철기로 갈 때도 숯(목탄)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냥 장작을 때면 장작내부에 포함된 불순물과 수분 때문에 철광석을 녹일 만큼 고열을 만들기가 어려웠다. 장작을 일단 한번 찌면서 불순물을 없앤 것이 바로 숯으로, 연기도 안 나고 고열로 태울 수가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학이 발전하면서 코크스가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산업혁명 당시 발전은 대부분 기술자들이 한 것이고, 과학자들은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3. 전개[편집]



3.1. 기술 혁신[편집]


산업화 이전의 세계에서는 무엇을 하든 물리적인 노동력, 풍력, 또는 수력이 필요했다. 물리적인 노동력, 풍력, 수력에 접근이 가능한 지역에서만, 그리고 물리적인 노동력, 풍력, 수력이 뒷받침할 수 있는 정도까지만 작업이 가능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물리적인 노동력, 풍력, 수력을 마음대로 필요한 장소로 보낼 수 없다는 점이다. 적정한 규모의 인구를 뒷받침할 역량을 갖추지 않고서는 문명이 뿌리를 내리거나 번성하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대체로 툰드라, 사막, 스텝 지대, 밀림, 산악 기후 지대는 유럽이 달성한 수준의 부(富)와 경제적 발전에 도달하기가 불가능했다. 이것은 인류 문명의 발전을 제약하는 큰 구속이었다.

원양 항해 기술은 원거리 운송 비용을 파격적으로 낮추었고 그 덕분에 유럽 제국들은 먼 곳까지 진출하는 '시늉'을 내기는 했지만, 여전히 손쉽게 운항 가능한 수로를 보유한 지역들 간의 경쟁이 중요했다. 세계의 변방 지역들 즉, 지구상의 대부분의 지역들은 여전히 개발되지 않은 미개척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산업화 시대에 등장한 다음과 같은 기술들은 이런 상황을 완전히 뒤바꿀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 증기 기관과 석탄: 18세기에 결쳐 증기 기관은 주요 동력 수단으로서 노동력, 풍력 또는 수력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근대에 최초로 발명되어 성공적으로 쓰인 증기 기관은 일찍이 1698년 토머스 세이버리가 도입했는 데, 이 기술을 이용하면 탄광에서 펌프로 물을 뽑아내서 더 깊이 파고 들어갈 수 있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최초의 증기 기관은 문자 그대로, 또 발전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공히 자가 발전적인 기술이었다. 증기 펌프가 강력하고 안정적으로 작동할수록 더 많은 석탄을 생산할 수 있었고, 따라서 펌프를 가동하는 데 드는 석탄의 비용도 줄었다. 다만 증기기관의 발전은 서서히 발전한 것이 아닌 제임스 와트에 의해 갑작스럽게 발전하였다. 제임스 와트의 콘덴서(냉각기) 발명을 통해서 증기 기관은 강력해지고, 지형에 구애받지 않게 설치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심지어 수레나 배 위에 설치해서 동력원으로 쓸 수 있게 변모한다. 이제 관건은 가용 석탄이 있는지 여부였다. 풍력이나 수력과는 달리 석탄은 채굴한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고체 물질이다. 게다가 기존에 노동력을 담당하던 사람과는 달리 운송되는 동안 잠을 재우거나 음식을 줄 필요가 없다. 가용 석탄이 점점 늘어나면서 동력을 생산하고 금속을 제련하고 결국 운송 수단을 발달시키는 데 석탄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어느 모로 보나 돌파구가 마련된 해는 1806년이었다. 1780년대에 일어난 파격적인 산업 기술들이 충분히 성숙하면서 철강이 대량으로 보급되었고 철도와 철강 선박을 만들 만큼 강도가 높아졌다. 증기 기관은 크기가 작아졌고 철강 선박과 철도 기관차에 동력을 공급할 만큼 강력해졌다. 증기선 덕분에 원양이든 강이든 운항 속도가 빨라졌고 계절풍의 도움이 없어도 화물 운송을 자유자재로 하게 되어서 운송의 효율성도 높아졌다. 산업 건설 기법을 강에 적용해 수문을 만듦으로써 큰 선박들이 내륙 깊숙이 위치한 지역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철도 덕분에 일정한 지점들 사이에 인공적인 수로 건설이 가능해졌다. 강이나 천혜의 항구 같은 자연의 혜택을 받지 못한 지역들도 이제 내륙/뭍의 항구가 될 수 있었다. 철도 1마일을 설치하는 데 드는 비용은 대략 다차선 도로 1마일을 까는 데 드는 비용과 맞먹었지만 철도를 운영하고 움직이는 데 드는 비용은 도로 운영과 가동에 드는 비용의 4분의 1이 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철도는 여전히 해상 운송 비용의 두 배에 달하기는 했지만, 강과는 달리 철도는 사람이 만들 수 있었고 따라서 철도 교통을 뒷받침할 평평한 땅이 있는 지역이라면 어디든 경제 개발을 가능케 할 강력한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데 드는 시간은 몇 주와 몇 달에서 몇 시간과 며칠로 압축되었다.

  • 화학 물질: 이 부문에서 두 가지 중요한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바로 황산(1746)과 탄산나트륨(1791)을 대량 생산하는 방법이 발명되었다. 이 두 물질은 유리, 염료, 치약, 세제에서 철강, 제지, 의약품에 이르기까지 전천후로 쓰이게 된다. 산업 혁명 초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물질이 바로 탄산나트륨이다. 1820년대에 발명된 저렴하고 강력한 시멘트는 파격적인 변화를 가져온 또 다른 화학 물질이다. 시멘트 덕분에 오늘날 현대인이 익히 알고 있는 근대의 상징물들이 탄생했다. 바로 고층 빌딩, 교각, 대대적인 교통량을 감당할 수 있는 도로, 도시 규모의 상하수도 시설 등이다. 식량 공급량이 증가하고 새로운 건축 기법이 등장하면서 기근과 더불어 질병의 온상이던 도시들은 더 이상 이런 고통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 도시의 규모는 폭발적으로 커졌다. 1825년 무렵 런던은 세계 최대 도시로 부상했다.

  • 교체 부품(Replacable parts): 1700년까지만해도 소총이나 시계와 같은 정교한 제조 품목의 부품들은 모두 같은 전문가가 만들었다. 그러한 부품들은 고도로 숙련된 기술을 지닌 노동자가 한 번에 하나씩 정성을 다해 만들고 조립했고 수선하는 데도 그 못지 않은 정성이 필요했다. 18세기에 고도의 정밀 공법이 발달해서 상호 교체 가능한 부품들이 개발되었고 19세기 초에 선반에서부터 평삭판, 제분기에 이르기까지 공작 기계들이 발명되고 제작되면서 정밀 공법은 거의 모든 산업에 응용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술 혁신 덕분에 고숙련 노동력의 수요가 감소했고, 1800년대 초 무렵에는 최초로 조립 공장이 출현했다. 완성품의 내구성이 급격히 증가했다. 숙련된 기술자의 손에 맡기지 않아도 부품만 있으면 누구든지 망가진 제품을 수선할 수 있게 되었다. 섬유에서부터 무기 제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건을 생산하는 데 있어서 생산량, 품질, 노동자의 생산성이 모두 몇 배로 폭증했다.

기술적인 차원에서 산업 혁명은 강철이라는 새로운 소재의 활용, 석탄증기 기관 같은 새로운 동력원의 사용, 방적기방직기 같은 새로운 기계의 발명, 공장제라는 새로운 노동 분업 체계의 발전, 증기 기관차나 증기선과 같은 새로운 운송 및 통신수단의 발전 등 다양한 변화를 동반하며 진행되었다.

일반적으로 산업 혁명은 과학의 급속한 발전을 원동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으나, 과학 기술은 산업 혁명의 도화선은 아니었다. 산업 혁명 초기부터 과학 이론이 산업 기술에 직접 응용된 사례는 다소 찾아보기 힘들다. 초기 산업 혁명에 기여한 기술[9]들은 전부 숙련된 기술공들의 작품이었다. 19세기 중후반 전기, 광학, 화학산업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기술 진보는 숙련공 발명가들의 시행 착오와 경험의 산물이었다.

또한 산업 혁명이 일어난 영국은 교육이나 과학에 있어 프랑스보다 다소 뒤쳐졌다. 프랑스는 파리 대학을 대표로 중세부터 이어진 학문의 전통이 존재했고, 프랑스 혁명 시대에도 나폴레옹이 파리 이공과 대학을 설립하고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등 체계적인 학문의 발전과 절차가 있었으나, 잉글랜드의 대학이라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둘 뿐이었는데 둘 다 당시 유럽에서는 쳐주지도 않는 대학이어서, 좀 공부한다 하는 잉글랜드인들은 오히려 스코틀랜드로 가서 교육을 받았다. 일례로 증기기관을 설명하는 열역학이 프랑스인 카르노에 의해 시작됐다는 점, 근대 경제학의 시작인 애덤 스미스가 스코틀랜드 출신이라는 것이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근대 과학의 의의는 산업 혁명의 기술혁신 과정에서 나타난 발명품과 공학 기술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완성시킨 것에 있다. 그리고 산혁 과정에서 더 다양한 기계와 제품, 더 정교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물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과학 기술은 학자들의 논문을 벗어나 산업・민간 분야에 널리 상용화되었다.


3.1.1. 면 방직업의 발전[편집]


영국의 산업을 변화시키는 첫걸음은 바로 면직물 공업에서 시작되었다.

1733년 존 케이가 '나는 북(Flying shuttle)'을 발명하게 된다. 베틀의 북을 스프링을 이용해 자동화해서 한 번에 짤 수 있는 면포의 너비가 2배가량 늘어나고 속도 또한 훨씬 빨라지게 되었다.[10] 플라잉셔틀의 개발로 인한 생산성 혁신은 엄청났는데, 이전까지 양모, 실, 모직물 전부를 수출했던 영국은 이후로는 실과 양모를 수출하지 못하고 오히려 수입해서 모직물로 재가공한 다음 다시 수출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천을 짜기 위한 실이 부족해진다. 그러자 제임스 하그리브스가 1767년, 한 번에 8개의 실을 자아낼 수 있는 제니 방적기[11][12]를 발명하게 된다. 그리고 리처드 아크라이트는 1768년에 동력으로 수차를 이용하는 수력 방적기를 발명하고 1769년에 특허를 받는다[13]. 또 새뮤얼 크롬프턴은 이 둘을 합친 뮬 방적기를 만들어낸다. 이 셋이 산업 혁명 출발기에 면직물 공업의 혁신을 일으킨 이들로 보통 회자되지만, 사실 토머스 하이즈, 폴, 와이아트 등 거의 알려지지 않은 발명가들도 같은 시대에 비슷한 물건을 발명했다. 특히 토머스 하이즈는 아크라이트가 자신의 발명품을 표절했다고 소송, 승소했다. 게다가 제니 방적기도 그가 만들었다는 설도 있으며 제니라는 이름도 그의 아내에게서 따온 이름이라고 여겨진다. 어쨌든 그 덕에 아크라이트의 특허가 무효가 되어 기계를 마음껏 공짜로 사용할 수 있게되어 전국 각지에 수많은 방직 공장이 설립된다. 참고로, 이 발명들이 있기 전 방적기는 한 번에 한 가닥의 실 밖에 잣지 못했고 수력이 아닌 인력 혹은 축력으로 가동되었다.

방적 산업이 급격히 성장하자 이번엔 또 직조 능력이 방적을 따라가지 못해 실이 남아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1785년, 에드먼드 카트라이트가 동력으로 천을 짜는 방직기인 역직기(力織機, power loom)를 발명, 이것을 수력 혹은 증기기관에 연결함으로서 직조 능력이 방적 능력을 따라잡는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방직 산업은 자동화의 길에 완전히 들어서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이때 근대적인 공장이 처음 나오게 되며, 이때의 공장은 증기 기관을 차용하며 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많아지자 강 주변에 지어지게 되었다.

한편, 대량의 목화를 공급하던 미국 남부에서는 큰 골칫덩이로 목화와 실을 분리하는 작업이 남아있었는데, 1793년 엘리 휘트니가 이를 빨리 분리시켜줄 수 있던 조면기(cotton gin)를 발명했으며 이 기계는 2마력의 수력으로 5,000파운드의 솜을 처리해 1,000명분의 일을 하게 만들어줬다. 그러나 정작 휘트니는 특허를 출원해놓고 소송에 휘말려 이익을 올리지 못하다가, 1798년 소총 제조업으로 업종을 전환하며, 소총 산업에서는 부품 호환식 생산법을 발명함으로써 또 다른 산업혁명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만악의 근원


3.1.2. 증기기관과 교통의 발전[편집]


흔히 알고 있는 제임스 와트 이전에도 증기기관은 있었다. 1663년 에드워드 서머셋 우스터 후작이 개발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업용 증기기관이 등장한다. 후작은 이걸로 광산채굴업을 하려고 했다. 영국은 지질 구조상 광산을 조금만 깊게 파도 물이 나와서 물을 지속적으로 퍼내야했기 때문. 하지만 그렇게 되기도 전에 사망한지라 무산되었고, 이후 1698년 토마스 세이버리라는 자가 우스터 후작의 증기기관을 개량한 광산채굴용 증기기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1712년경에 토마스 뉴커먼이 증기 기관을 더 개량한다.

하지만 이 초기의 증기기관들은 1마력시[14]의 힘을 내는 데에 석탄이 20kg가량 필요할 정도로 아주 효율이 낮았다. 수증기를 데워 실린더를 채운 다음 그냥 기다려서 실린더를 식히고, 다시 수증기를 데워 실린더를 채우는 원리였기 때문에 효율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낮을 수 밖에 없다(...). 기관을 써서 채굴 효율이 개선된 만큼 석탄을 잡아먹은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오는 지경인데, 실제로 석탄이 비싸고 구하기 힘든 지역의 광산, 혹은 채굴되는 광물의 가치가 낮은 광산에서는 뉴커먼의 기관을 쓰면 오히려 적자가 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런 뉴커먼 기관이 퍼진 것은 광산이 너무 깊게 파져서 사람 손으로 물을 도저히 빼낼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뉴커먼이 자신의 발명에 대해서 특허를 출원해야할 정도로 대단한 발명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특허를 내지 않은 덕이다. 뉴커먼은 자신의 발명을 토마스 세이버리를 베낀 것 정도로 간주했고, 세이버리의 특허가 1733년 만료되고 더 갱신되지 않아 증기기관의 특허는 사라진다.

그러다가 마침내 1765년 스코틀랜드의 기계공학자 제임스 와트[15]가 증기기관을 개량하는데, 와트의 기관은 1마력시의 힘을 내는데에 석탄이 600g 가량 필요할 정도로 효율을 크게 개선했고, 강가나 석탄 산지와 먼 곳에서도 가동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와트는 1774년 매튜 볼턴이라는 운명의 동반자를 만나게 된다. 사업가였던 그는 증기기관의 파워를 한눈에 알아봤고, 증기기관에 대해서 특허를 출원만하고 사업화하기에는 재정적으로 영 부족해서 슬슬 관심이 없어지던 와트에게 개량을 종용하고 볼턴앤와트라는 기업을 설립했다.

뉴커먼 기관까지는 석탄이 무지막지 싼 영국과 유럽 일부 지방 광산에서나 좀 쓰이는 정도였으나, 제임스 와트의 증기 기관은 사업화 궤도에 들자마자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인류의 역사를 바꿀 발명, 고통 받는 노예들을 해방시킬 위대한 발명이라는 칭송이 당대에 나왔을 정도. 산업혁명기에는 위대한 발명을 하고서도 특허권 끝날 때까지 사람들이 사용을 안하거나 불법적으로 복제해가는 경우들 때문에 불우하게 산 발명가들이 부지기수였지만, 와트는 에딘버러 왕립 학회의 회원과 프랑스 국립 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으로 초청받는 등 생전에 영광을 누렸다.

그 후 미국 발명가 로버트 풀턴은 이 회사에 증기기관을 주문했고, 이를 이용해 클레르몽(Clermont)[16]이란 증기선을 개발했고, 1807년 성공적으로 운행을 완료했다. 클레르몽은 후에 뉴욕 허드슨 강의 승객을 나르게 된다. 이 발전된 수상교통은 영국의 운하 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운송비를 크게 절감시켰다.

한편 1769년에는 프랑스의 공병장교 니콜라스 조제프 퀴뇨가 개발한 세계 최초의 증기 자동차가 나오게 된다.

1804년 리처드 트레비식은 자신이 만든 증기 기관차 페니다렌호의 시운전에 성공했다. 그는 내기에도 이겨 몇천 파운드를 땄다. 그리고 이 일은 현존하는 4대 교통 수단 중 하나이자 육상 교통 수단의 양대 축 중 하나인 철도의 시발점이 되었다. 증기 기관차와 철도의 가능성을 예감한 영국의 기술자들은 트레비식의 것을 개량하기 시작했다. 조지 스티븐슨은 1825년 요크셔의 석탄광에서부터 스톡턴의 항구를 오가는 43 km짜리 세계 최초의 증기기관차가 달리는 화물철도를 깔았고 이 뉴스는 신속하게 영국 곳곳으로 전달되었다. 이것이 바로 스톡턴-달링턴 철도이다. 사업가들은 리버풀과 맨체스터를 레일로 연결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1830년에는 최초의 여객/화물 겸용 철도인 리버풀-맨체스터 간 철도가 개통되며 철도시대의 개막을 알렸다.[17]

철도는 국가기간시설이 될 뿐만 아니라 막대한 철의 수요를 창출해서 제철 사업 규모를 성장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정작 철도 사업 자체는 수익성이 높지 못했는데, 평균적으로 3.7% 정도의 수익률을 보였고, 중요 구간이라고 해도 너무 비싸면 차라리 다른 운송 수단을 택한 사람들 덕에 대부분의 구간은 적자만 겨우 면하거나 아예 적자가 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도 사업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는데, 급증한 중산층이 수익성 있어보이는 투자처를 찾아서 적극적으로 투자를 했던 덕택. 철트 코인


3.1.3. 제철 공업의 발전[편집]


영국은 15~17세기에 이미 해상 강국으로써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그 대가로 배를 만들기 위해 어마어마한 나무를 소모해서 16세기 즈음에는 전 브리튼 섬의 산림이 소실될 지경이었다. 덕분에 연료로 쓸 나무도 부족해져 다른 나라에서 나무를 수입해와야하는 수준에 이르렀다.[18]

17세기 말, 에이브러햄 다비 1세가 화학의 발전으로 영국에서 풍부했던 역청탄을 코크스로 정련하는 것이 가능해지자 이전까지 용광로에서 사용했던 연료인 숯을 대신해서 코크스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코크스는 심지어 숯에 비해 높은 온도로 오랫동안 연소했기에, 주철의 생산량을 급속도로 높일 수 있었다.

하지만 기존과 같은 고로(高爐)에서 생산되는 주철[19]탄소 함량이 지나치게 높아 유연성이 떨어져 쉽게 부서져, 강철 혹은 연철[20]의 생산을 위해서는 기존처럼 주철을 다시 망치로 두드리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헨리 코트가 철과 연료가 분리된 용광로를 사용, 철을 완전히 녹임으로써 불순물을 분리하고 녹은 철을 산소에 노출시켜 탄소를 제거하는 기술인 교련법을 개발, 또 녹은 철을 판 형태로 가공하는 압연 기술을 개발해 연철 생산량이 급격하게 증가한다.

코크스와 새로운 제철기술은 영국의 철 생산량을 급격하게 증가시켜 이후 산업 혁명의 전개에 필요한 막대한 철을 공급할 수 있었다.

1788~1796년 사이에 영국의 철 생산량이 2배 증가했고, 이후 8년 동안 다시 2배 증가한다. 특히 1779년에는 영국 세번 강에 세계 최초의 철교가 건설됨으로써 영국의 제철 공업의 발전을 증명하는 이정표가 된다.


3.2. 산업의 성장[편집]


산업이 왕성히 성장하였고, 이에 따라 공업과 상업의 중심지 도시도 성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도시인구도 역시 성장하게 되는데, 도시거주민들은 스스로 식량을 생산하기보다는 구매하거나 공급받는 측이었고, 이들의 인구가 늘수록 농업부양인구가 늘어나면서 나폴레옹 전쟁 무렵 영국은 식량수출국에서 식량수입국이 되었고 식량 수입대금은 무역흑자로 축적된 무역수지로 지불하는 양상이었다. 그런데 점차 늘어나는 면화 수요량이나 수출대금으로 내야할 식량의 수입량에 비해서 면화 생산량이 지지부진하거나 감당못할 수준이 되자, 대서양 건너편의 미국에서는 1800년대에 대규모 면화 플랜테이션을 조성하였다. 이곳의 노동자는 아프리카 노예였다.

거기에 때마침 아메리카에서 기존의 수작업 대비 50배의 효율을 지닌 조면기가 발명되어 퍼진터라 아메리카의 면화 플랜테이션에서는 대량의 면화를 값싸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아프리카의 노예 → 영국이 수입 → 아메리카 면화 플랜트에 노예 공급 → 아메리카 면화 플랜트들이 노예들이 생산한 값싼 면화를 영국으로 공급 → 생산된 면직물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수출하는 삼각무역이 완성되었다. [21]

특히, 영국에 의해 면직물 산업이 일찌감찌 붕괴하고 만 인도에 대한 수출이 엄청나게 활발해 20년 만에 수출 규모는 10배 증가했다.

면직 산업에 이어 철강 산업이 활기를 띄면서 워털루 전투 이후, 영국 주도의 철도 건설이 시작되어 영국의 호황은 절정에 이른다.


3.3. 노동 계급 탄생[편집]


인클로저 운동의 결과 농지들이 지주나 차지농들에 의해 통합되어 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여타 국가들은 상속시에 토지를 자손의 수에 맞게 분배해 주다 땅크기가 점점 줄어 들었으나 영국은 장자 상속제를 이어오고 있었으므로 대규모 농지를 가진 농장주들이 많이 남아 있었던 것도 대토지소유에 한몫했다. 대토지소유자들의 대두로 그들과의 시장경쟁에서 도태된 농민들이 등장하면서 농민층은 부농과 빈농으로 나뉘었고 빈농으로 전락한 농민들은 자기 땅의 경작을 포기하고 차지농인(Yeoman)밑에서 임금을 받고 일을 하게 되면서 노동자 계급(프롤레타리아)이 탄생했다.

도시에서는 일찍이 도제제도가 상공업을 기반으로 하여 근로계약이 정립되었다.


3.3.1. 노동자들의 고통[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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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당시 런던의 노동자들을 위한 숙소. 왼쪽의 그나마 편한 관 모양의 숙소[22]는 4페니였고, 그조차 낼 수 없는 이들은 더욱 열악한 오른쪽의 1페니짜리 숙소에서 의자에 앉아 로프에 기댄 채 자야 했다.

이 초기 산업 혁명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문제시되었던 것은 가혹한 노동 환경이다. 위에서 서술되었듯 기계가 노동력을 대체하는 데 비해, 당시 영아 사망률이 조금씩 줄어감에 따라 인구는 매년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했고 거기에 더해 인구가 늘고 도시화가 가속화되면서 노동 공급은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이로써 부르주아들이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을 손쉽게 착취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에는 노동자들의 참정권이 없었고 자유주의적 정책 기조로 정부와 의회는 부르주아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에만 바빠 관련 법 제정이 미비했기에, 제대로 된 근로시간도 정해지지 않아 많은 노동자들이 과로에 시달렸다. 특히 노약자 계층에서의 노동이 크게 늘어났는데, 어린이들도 만 7세부터 면직 산업에 동원되어 학대를 받으며 일하다 요절하는 경우도 많았다.

다만 이러한 가혹한 노동조건은 전근대 농촌 사회로부터 이어졌다는 맥락을 이해할 필요는 있다. 전통 사회에서는 막 걸음거리를 뗄 만한 어린 나이부터 일에 동원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또한 16시간에 달하는 가혹한 노동 시간도, 전근대 사회에서 해 뜰 때 일어나서 해 질 때까지 일하는게 당연했던 점에서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봤을때 산업혁명기의 노동환경은 그 이전 농경시대 노동환경에 비교해봐도, 엄청나게 퇴보했다고 보는게 맞다. 퇴보의 정도가 "전근대 농촌사회로부터 이어졌다." 라는 한 문장으로 퉁 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물론 그 이전 농경시대에도 아동노동이 있었고, 노동 시간에 대한 것도 명확히 정해진 바 없이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쉬는 수준이었다는건 맞다. 그러나 이걸 빌미로 마치 그 이전 시대에도 산업혁명기의 열악한 수준의 노동환경이 당연했고 그게 산업혁명기까지 이어졌다는 뉘앙스로 읽히게끔 서술하는건 그냥 교묘한 왜곡성 서술이다. 그 이전 농경시대에는 각 지역사회마다 관습법이 존재해서 산업혁명 초기 수준으로 아동을 미친듯이 굴리고, 성인이 하루 16시간씩 일하는 미친 짓이 당연하게 성행하진 않았다. 아동은커녕 청소년조차도 통계적으로 어른에 비해 더 적은 노동을 했을 정도이다. 긴 말 할 것 없이 그 이전시대와 비교해보았을 때 노동 시간이 30% 증가해서 연평균 노동시간이 1100시간 늘어난 시대다. 자세한건 "노동조건 개선" 문단에서 후술.

임금은 후대에 보면야 최소한의 생활 수준만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 낮은 수준으로 보이지만, 바로 이전의 농촌 사회와 비교했을 때는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초기 직물 공장은 여성 성인 노동자가 대다수였는데, 남성 직물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일하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초기 공장들은 남성 수준의 임금을 제시해서 여성 노동자들을 끌어들였는데, 이 시대 런던의 남성 노동자들의 임금은 북프랑스에 비해서 2배, 밀라노와 비교해서 4배에 달했다. 산업화가 시작되지 못한 유럽 타 지역에 비해서 거의 4배에 달하는 임금을 받은 것. 식량 유통을 기준으로 가늠해도 비슷한 결과가 나오는데, 이 시대 영국은 타 지역에서 일방적으로 식량을 빨아들였고 런던은 그 영국에서도 식량을 빨아들이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즉, 당시 기준으론 그 공장 노동자들의 구매력과 임금이 영국 및 유럽의 타 지역 사람들보다는 확실하게 높았다는 것이다. 당대 런던 노동자들의 임금이 먹고 살 여력이 없을 정도로 낮은 수준이었다면 런던의 인구성장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급여가 그렇다는 것이지, 사회변화상을 살펴보면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또한 산업혁명 시기에는 기존의 관습법이 사라진 시기여서 더욱 큰 문제가 일어났다. 기존에는 관습법으로 인해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하한선이 존재했지만, 관습법이 무시되면서 평균적인 노동자들의 삶은 관습법이 정해주었던 하한선보다 더욱 낮은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또한 어린이 노동 같은 경우에도, 농촌과 같은 시간을 일했다고는 하지만 농촌의 경우 모든 사람이 오랜시간동안 면식이 있던 사이다 보니 위아래간 서로 간의 편의를 봐주는등의 여유가 있었지만, 공장에서는 사방에서 온 사람들이 모인 만큼 이런 편의가 거의 없었고, 공장의 노동 강도는 당시 농촌의 노동 강도보다 훨씬 심했다.

1810년대에 러다이트 운동으로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한 항의가 전국적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고, 당시 영국 정부에서 이를 탄압했지만 더이상 늘어나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아예 안 받아들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를 무마하는 차원에서 규제하는 법률은 1833년에 제정되었으나,[23][24] 이후 30~40년에 걸쳐 지속되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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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 노동자들은 탄광이나 공장에서 하루에 1시간도 쉬지 못하고, 매일 10시간씩 건강을 해쳐 가면서 일을 해야 했다. 일을 하다 다치거나 쓰러지면 과정은 상관없이 무조건 본인 과실 취급이었고 급여 또한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실상 노예노동이었다. 심하면 탄광에서 주 6일 동안 하루 12시간을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른 산업 혁명을 겪은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여서 19세기 후반 유럽 노동자들이 저 힘든 중노동을 주당 평균 50~60시간 했어야 했다.

1760~1830년대 1인당 GDP의 성장률은 상당히 느렸기에[26] 실제 경제성장은 상당히 미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경제학에 따르면 임금은 대체로 노동의 한계생산만큼[27] 증가하기 마련인데, 이 노동의 한계생산은 노동에 들어가는 자본이 많을수록 올라간다. 1760~1830년대 영국의 자본투자는 나폴레옹 전쟁이나 주식투자 규제 등으로 상당히 미진한 상태였고 따라서 근로자들의 임금이 별로 높지는 않았다고 한다. 즉 임금이 적기 때문에 저런 중노동을 통해서만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었다는 이야기.

유럽권의 산업 혁명뿐 아니라 사실 각국의 산업화/근대화에선 독재정권,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이런 노동자의 고통이 거의 예외 없이 동반되었다. 소련의 스탈린 개발독재는 워낙 유명하며, 아시아에서도 일본의 메이지 유신, 한국의 제3공화국, 중국의 덩샤오핑 집권기 등으로 근대화가 진행될 때는 국민들은 항상 힘들었다. 유럽의 근대화에서도 사람들이 고통받고 죽어나갔고, 일본은 근대화와 경제발전 시기에 환경오염과 산업재해가 빈번히 일어나서 미나마타병, 이타이이타이병 같은 질병이 만연했고 한국의 경우에도 한강과 낙동강 등 주요 하천이 오염되면서 그냥 먹을 수 없는 수준이 되었고 정부와 기업이 수출 제일주의라는 구호 아래에서 노동 착취를 방조하면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연간 3,000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이는 현재 중국,
인도, 동남아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문제점으로 스모그도 이런 성장제일주의의 결과물이라는 지적이 많다. 올리버 트위스트플랜더스의 개가 산업혁명 당시의 유럽의 사회상을 반영한 소설이었고, 카를 마르크스가 왜 떴는지 알 만한 시대였다는 것이다. 동시대 인물인 허버트 조지 웰즈가 SF 소설인 타임머신(소설)에서 '엘로이'와 '몰록'의 설정을 각각 지배층과 하층 노동 계급의 후손으로 설정한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 처참한 격차 수준을 볼 때, 이 상태가 계속 지속된다면 언젠가는 같은 인류라고 보기도 힘들 지경이 될 수 있다는 우려는 전혀 무리가 아니었을 정도였다.

다행히도 19세기 중반에 들자 사회주의적 이념이 형성되어 일부 지식인과 정치인, 그리고 소수의 깨어있는 자본가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복지제도와 사회보험제도들을 도입하고 규제를 시작하면서 최소한 사람이 생존할 수 있는 꼬락서니는 갖추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 계속 놔둔다면 건강이 나빠져서 조기사망은 물론이고 극단적 양극화로 인해 노동자들의 구매력이 없어지기 때문에 생산물을 구매할 수요자층도 줄어 없어지게 되면 결국 공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12세 이하의 아이는 몇 시간 이상 노동 금지 같은 규제를 시작했는데, 당시 시장경제 자유주의자들은 "아이들의 일할 권리와 자유를 빼앗지 말라!"는 논리로 이에 반대했다. 아이들이 행복한 유년기를 보낼 권리와 자유가 먼저 아닌가?


3.3.2. 노동 조건 개선[편집]


일단 1차 산업 혁명기는 임금은 유지 혹은 약간 상승이지만 노동시간은 30% 이상 증가해서 뜨악한 시대가 맞다. 대략 노동시간이 연 2,400시간 평균에서 3,500시간 평균으로 산업혁명 기간에 노동 시간이 늘어났다는 게 통설이다. 얼마나 늘었는지에 관해 그 레퍼런스는 당시 재판기록을 이용한 추정으로서 최근에 이루어졌는데 범죄는 아무 때나 일어나므로 범죄 발생일과 그 전날 용의자와 증인의 기상 출근 식사 퇴근 취침 등의 행적으로 노동시간을 유추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성인 남성의 노동시간은 대폭 증가했다. 1750년 런던에서 연간 2,631시간, 1800년 3,538시간, 1760년 잉글랜드에서 2,576시간, 1800년 3,328시간, 1830년 3,356시간. 그렇다면 노동생산성 증가 추계는 하향 조정돼야 할 것이다. 여가를 고려할 때 생활수준은 그만큼 낮아졌다. 산업노동 공급은 양적이라기보다는 질적인 문제,즉 노동의 본질적 변화라는 면을 봐야 한다. 주 6일제 50주 근로라고 대충 땡치면 11.5시간 정도가 나온다.

허나 이런 상황은 19세기의 2차 산업혁명기를 거치며 대부분 나라에서 자연스럽게 완화된다. 이유는 크게 3가지를 꼽을 수 있다.

  • 인구펌핑도가 줄어들기 시작: 1차 산업혁명 절정기에 그냥 닥치는 대로 낳자 모든 동네들이 절정을 지나면서 출산율이 줄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서 무한의 노동공급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

  • 투표권의 점진적 확대: 구미권의 경우는 다수 국가에서 투표권은 점진적으로 확대되었다.물론 아닌 나라도 있지만 패스하고 근데 여기서 투표권이 확대되면 돈지랄 갑부도 1표, 거지급도 1표인 세상으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게 노골적으로 나타난 곳이 사민주의가 나온 독일인데 독일의 베른슈타인은 이 상황을 보고 혁명이 아닌 현실정치로 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숙련공의 니즈: 산업이 어느 정도 고도화가 되면서 숙련공이 필요해지는데. 이 케이스에서 가장 유명한 건 헨리 포드의 급여 인상일 것이다. 다른 나라도 그런 현상이 있었지만 예를 들기에는 헨리 포드가 제일 적절할 것이다. 헨리 포드는 일급을 2배 이상 인상시켜서 5달러로 만들었는데, 경제신문 관련 출판사 책들에선 헨리 포드의 도덕성을 거론하는데 천만의 소리. 미국의 공장은 19세기 기준 이론상 2년만 일하면 서부에서 땅을 살 수가 있었고 전간기는 흑인의 북부 이동이나 서부개척 거의 완료로 노동시장이 변했지만 여전히 공장은 반알바였다. 즉 "몇년 일하고 때려치면 되지 뭐." 딱 그 마음가짐이다. 그래서 이민자들이 뺑이 좀 굴리고 바이바이 하니 공장에서 오래 유지가 안 돼서 고급여 복지 정책이 나온 것이고, 그로 인하여 숙련공부터 대우가 올라갔다. 이 현상은 독일제국도 숙련공 부족으로 인하여 대우 상승, 급여 상승 효과가 일어났다.


4. 왜 영국에서 일어났는가?[편집]



산업혁명이 자생적으로 일어난 나라는 영국뿐이다. 아메리카나 유럽은 영국의 산업혁명의 영향을 받아 그것을 국가주도로 벤치마킹하면서 퍼지게 되었는데, 그 아메리카와 유럽조차 자생적인 산업혁명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또한 산업화를 적극적으로 모방하고 금방 성공해냈던 서유럽과 달리, 머나먼 동아시아나 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은 산업 혁명을 모방할 의지를 보이지도 않거나, 아니면 모방하기도 전에 식민지로 전락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겨우겨우 바늘구멍을 뚫어서 시도를 하고도 터키, 태국, 중국처럼 내/외부적인 요인으로 실패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비서양권 국가 중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성공적으로 산업화에 진입한 나라는 '모방하려고 했어도 매우 어려워서 한참 걸린' 일본이 유일하다.

뿐만 아니라 영국과 유사한 인적/제도적/상업적 조건을 갖추고 있던 네덜란드 저지대도 자생적으로 산업화에 도달하지 못하고 영국에서 산업화를 들여와야했다.

때문에 산업화는 서유럽 문명의 요소들을 기반으로, 영국의 특수성 및 우연한 사건들이 겹쳐져서 일어났던 아주 우연했던 사건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원양 항해 기술과 산업화 덕분에 거리라는 커다란 장벽이 허물어졌고 무역에 큰 변화가 왔다. 생산지 주민들이 다 소비하지 못할 만큼 생산량이 늘어났다. 영국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났다면 수요가 공급을 따라 잡지 못해서 제품 가격이 폭락하고 시장이 와해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 영국은(1707년 스코틀랜드와 통합한 후에 잘 알려지게 된 바와 같이) 해양 기술의 달인이었고 세계 전역에 펼쳐져 있는 방대한 군사적, 상업적 제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영국은 남아도는 생산품을 대량으로 대영제국의 식민지들과 물길로 닿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팔아 치울 수 있었다. 무력을 동반해서라도.

영국은 제국을 관리하는데 필요한 행정적 비용을 모두 손쉽게 회수했고, 그러고도 남아도는 재정으로 해군력을 더욱 증강하고 산업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원양 항해 기술로 스페인이 한동안 유럽의 패권 경쟁에서 월등한 우위를 누렸듯이, 산업화 덕분에 영국의 우월적 지위는 한층 더 신장되어 명실상부한 유럽의 패권 국가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영제국이 이베리아보다 원양 항해 기술을 지렛대로 활용하기에 훨씬 적합한 지리적 이점을 누렸지만, 유럽에서의 지리적 이점이 산업화의 궁극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산업화를 가능하게 하려면 엄청난 양의 자본이 필요하다. 산업화 이전에도 도시 주민의 1인당 소득은 농민들보다 우월했는데, 산업화 진행 시기에 공장에서 막대하게 생산되는 직물을 구입해줄 구매력이 있는 것은 도시민들 뿐이었다. 안 좋게 말하면 초기 산업화의 성과로 혜택을 본 것은 도시민들 뿐이라는 것이지만, 아무튼 산업화 이전에 이러한 도시와 도시민의 수를 늘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업 자본을 증대시키는 것 뿐(즉, 국제 무역으로 해외에서 식량을 수입해오는 것)이었다. 영국은 자본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이 본토 내에서가 아니라 해외 식민지에서 동원하는 자본이었고, 제국의 인구는 기껏해야 중간 정도 규모에 불과했다.

때문에 위에서도 말했듯, 영국의 성공은 대항해시대에 세웠던 해양 제국과 연관되어 있었다. 사실 대영제국의 태양은 절대로 저물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은 짜릿하긴 했겠지만, 대항해시대의 기술을 기반으로 한 해양제국 영국으로써는, 지구 전역에 펼쳐져 있는 물류와 공급 체계를 제국 전체의 15퍼센트에 불과한 인구로 관리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고 위태로웠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시작된 원양 항해 기술이 그 기술을 보다 잘 활용할 수 있는 지역으로 확산되었듯이 산업화도 같은 길을 걸었다. 1850년 무렵이 되자 독일이 부상할 차례가 되었다.

단 '산업혁명은 우연한 사건이다'를 "서구는 운빨로 산업혁명을 일으켰을 뿐이고 다른 데서 일어났을 수도 있다!" 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반대로, 영국의 직물산업의 발전과 동시에 증기기관이 발명되는 '우연'이 없었으면 인류는 기술이 발전해도 그 이상의 인구 증가로 인해 절대적 가난이 반복되는 비참한 생활 수준이 영원히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뜻이다. 또 다르게 말하면, '전인류사적으로 보편적이고 필연적으로 산업혁명으로 수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는 의미, 즉 필연의 반대 의미로써 우연인 것이다."서구는 운빨로 산업혁명을 일으켰을 뿐이지만 다른 동네는 운빨이 있었어도 산업혁명을 할 수 없었다!" 당장에 산업혁명 이전에 서구의 전반적 소득은 비유럽보다 세 배는 높았고, 프랑스 북부는 그중에서도 두 배에 달하는 1인당 소득을 보이고, 영국은 프랑스 북부보다 1인당 소득이 두배에 달했다.

이런 전반적인 임금 상승도 산업혁명이 일어난 주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영국과 비슷한 수준의 소득을 이미 달성했던 네덜란드에서는 정작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못했다. 상술한 막대한 석탄 매장량과 증기기관은 그야말로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해준 '우연적' 요인이었던 셈.[28]


4.1. 경제적 동인[편집]


일단 중국을 보면 14세기 왕정농서에 이미 축력,수력으로 돌아가는 방적기가 있다. 또 북송 때 이미 35,000톤의 원광과 42,000톤의 석탄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18세기 산업혁명기의 영국과 비등한 수준이다[29] 심지어 아편 전쟁 이후 중국에 많은 영국산 기계제 면포가 들어왔으나 중국에서 손수 생산된 토포에 밀렸다. 당시 청나라 시대 농촌은 과잉인구 때문에 농업뿐 아니라 가내수공업도 겸했는데, 여기서 나오는 면직물의 양이 어마어마해서 오히려 영국산 기계제 면포를 압도한 것이다. 당시 청나라의 연간 면포 생산량이 6억 필 정도. 그리고 영국이 이 물량을 따라잡는 데 약 20년이 걸렸다. 이렇게 중국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일반적인 설명은 중국은 인력 공급이 너무 많아서 기술적 혁신이 일어날 동인이 없었다는 것이 보통. 막말로 사람을 쓰는 게 비용이 더 싸서 기계를 안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면 유럽 지역은 전반적으로 동아시아에 비해서 임금이 높았는데, 특히 영국은 서유럽 지방에서 두 번째로 도시 임노동자 임금이 비쌌던 프랑스 북부에 비해서도 2배 가까이나 임금이 높았다. 이탈리아 밀라노와 비교하면 런던의 임노동자 임금은 4배에 달했다. 영국이 전세계 곳곳에 만든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해군과 육군으로 수많은 인구를 징집해갔기 때문에 인구 유출이 심했기 때문. 그래서 위에 서술했듯 광산의 물을 퍼내는 펌프가 적자가 날 지경으로 비싸도 임노동비보다 싸다는 이유로 증기기관을 사용했고, 그것은 제임스 와트에 의해 개량된다.

도시 생산물과 농업 생산물의 상대 가치를 통한 설명도 존재한다. 마르크스가 영국의 산업 혁명을 설명한 도식 이래로, 일반적인 통념으로는 <농업 생산물이 증가하고 인구가 증가한다 → 잉여 인구는 도시로 몰려 도시의 공업 생산물이 증가한다 → 반복>의 과정을 거쳐 국가의 경제력이 증가하고 산업혁명에 도달한다. 하지만 명/청대 중국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게 마르크스 말처럼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관찰됐다. 증가한 농촌 인구가 도시로 몰려 도시 노동자가 되는 과정은 존재했으나, 도시 노동자 수가 많아지면 임금이 내려가고 공업 생산물이 많아져 공업 생산물 가치는 내려가는 반면, 농업 생산물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올라가 도시민들의 삶의 질이 하락한다. 그렇게 되면 도시가 다시 해체되고 경제가 침체된다. 중국사에서 정권이 붕괴될 때 반란을 주도하는 민중들은 저런 과정에서 생긴 잉여인력이라는 점도 확인됐다. 덤으로, 마르크스가 위 도식을 설명할 때 예로 든 인클로저 운동도 실제론 농촌 인구가 도시로 몰려들게 하진 못했다는 것도 최근의 중론이다. 즉 멜서스 트랩은 생각 이상으로 빠져나오기 힘든 함정인 것이다. 이 역시 인구론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설명이 된다.

이 인구론적 문제는 서구가 천연자원 및 식량 자원을 수입해올 막대한 해외 시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었다. 영국은 당시 아메리카와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막대한 시장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업 생산물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하락하는 과정이나, 식량가가 상대적으로 폭등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단순히 도식화하면, 중국과 달리 영국은 면포를 비싸게 쳐주는 먼 곳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 팔 수 있었고, 식량 역시 싸게 사올 수 있었는데 중국은 자국 내에서만 유통되다 보니 경제 순환의 함정에 빠졌다는 것.


4.2. 재산권의 발달 [편집]


개인의 권리 인정과 보호, 주식과 채권 등 금융업의 발달, 자연과학의 학문으로서의 독립과 체계화, 특허권 같은 지적 재산권 인정 등 사상의 발전 등도 중요한 요인으로 꼽히는데,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는 이 점이 매우 미비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유럽은 중세부터 도시 및 농촌이 자치적으로 재판관을 뽑아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권리[30]가 마련되었다. 중세 유럽의 도시 규모는 잘해야 10만을 좀 넘어서 동시대 중국, 아랍의 대도시보다 작아보이지만, 군사적/정치적 목적을 위해 도시의 규모가 거대해진 타 문명과 달리 유럽의 도시는 상업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규모는 작아도 그 수가 매우 많았다. 이런 자치도시들은 상업적 이유로 설립되었다보니 상업적 권리의 충돌에 관한 판결이 매우 중요했다. 때문에 공증회사, 길드 등 경제적 권익 보호를 위한 제도와 조직이 특히 발전했다.

동아시아의 중국 관료제와 비교하면, 동아시아는 개인과 개인간의 충돌을 다루는 사법의 발전 자체가 매우 미약했다. 더 정확히는 죄를 지은 사람을 처벌하는 형법만 극히 발전해있고, 관료들이 주된 관심을 가지는 재판도 거의 형사 재판이었다. 유럽에서는 10세기부터 발달한 공증제도 조차 중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상업거래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신용 자체가 공적으로 보증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에 하위 관료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중앙에서 달랑 하나 파견한 관료가 혼자서 사법,행정,군사를 전부 도맡아하다보니[31] 만성적으로 업무가 지체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청조에는 앙쯔강 하류에 상업 발전으로 자체적으로 발달한 중소도시가 무수히 들어섰으나, 행정구역으로 새로 개편하지 않아 현실을 반영하지 못해 관료 파견조차 안 되는 경우[32]가 허다했다. 또한 유교 특유의 상업 멸시 때문에, 중국 명청 시대에 상인들의 기록을 보면 큰 재산을 가져 관료와 결탁한게 아닌 이상 제도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다는 것을 당연시 하고 있다. 일례로 대운하에서 부두 노동자들이 물건을 빼돌리거나 사기를 치거나 태업하는 등 잦은 문제를 일으켜도 관료들은 아무 대응조차 해주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영국네덜란드의 권력의 견제 역시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멀리 갈 것 없이 유럽에서조차, 왕에게 권력이 집중된 절대왕정 때문에 경제적으로 파토가 나거나 상인들의 재산권이 침해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에서는 징세청부업자에게 온 나라의 수조권을 맡겼다가 왕이 파산을 겪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왕이 돈을 떼먹어서 은행이 망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상업 자본 발전에 핵심적인 신용이 발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영국은 의회의 견제로 인해 왕이 징세권을 남발할 수 없었고, 네덜란드 공화국에서는 오라녜 공작이 간섭할 수 없는 은행이 설립되었다. 영국 의회는 조세 법정 주의의 뿌리가 되었고, 네덜란드 은행은 네덜란드를 유럽 금융의 중심으로 올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특허 제도는 산업혁명 뿐 아니라 군사 분야에서 일찍이 유럽과 다른 지역과의 격차를 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전근대에는 혁신이나 발명이 사회 전체의 노력으로 여겨졌지 개인의 성과로 여겨지지 않아, 혁신과 발명에 대해서 개인의 이윤이 거의 남지 않았기 때문에, 무언가 혁신을 일으킨 개인이 나타났다면 타인보다 앞서기 위해 그 혁신을 비밀로 하는 것이 중요했다. 아니면 도제식으로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자신의 비법을 전수하던가. 레벤후크의 현미경, 갈릴레이의 망원경, 티코 브라헤의 천문 관측 자료 등도 그들이 죽을 때까지 타인에게 공개하지 않아 유실될뻔했다. 이렇게 기술 중 많은 것이 기술의 개발자가 비결을 죽을때까지 숨기는 바람에 유실되었는데, 영국은 특허 제도 덕분에 발명가들이 자신의 이득을 보전할 수 있다고 여겨서 그 비법을 국가를 통해 공개했고 많은 기술이 보전될 수 있었다. 특히 국가를 통해 공개한 것은 국가가 망하지 않는 한 원본이 보전될 수 있단 점에서 자연적인 전파 이상으로 혁신에 기여했다.

다만, 실제로는 특허 제도는 '발명가의 이윤과 권리를 보장한다'는 이상을 별로 잘 실현하지는 못했다. 상기하였듯 사람들이 특허를 어떻게든 우회하거나 표절하고, 심지어 새 발명품 때문에 자기들이 망했다고 발명가를 습격해서 발명가가 쫄딱 망하는 일이 부지기수였으나,[33] 어쨌건 발명가들에겐 보호 받는다는 느낌(?)을 줬고 그 덕에 죽 쒀서 국가를 위해 헌납 기술이 유실되지 않고 공개된 것은 사회 전체의 혁신에 크게 기여했다. 그 외에도 초기 산혁 시대는 전화기 같이 역사적인 발명을 하고도 그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사례가 여럿 발생했다. 반대로 토머스 에디슨은 남의 발명 특허를 온갖 꼼수를 써서 뺏는데에 이골이 난 사업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발명가의 권리가 보호받는 느낌이 전부는 절대 아니였다. 맥심 기관총을 만든 맥심은 돈방석에 앉았고,[34] 심지어 미국이 스프링필드 M1903.30-06 스프링필드 탄을 적국인 독일의 게베어 18987.92×57mm 마우저 탄의 스핏저형 총알[35]을 만들면서 배꼈다고 전후 특허료를 보상하기도 했다. 또한 수많은 특허자료가 현대시대까지 발명가의 이름이 정확히 남아있는 등 특허법은 분명히 작동하고 있었고 실제로 증기기관의 초기 발전은 과학자들 보다는 발명가들의 영향이 컸다.

"특허 성문법" 제정 년도를 보면 왕권 몰락 및 개인 인권(소유권) 보장 그리고 진짜 혁명 의 변화를 볼 수 있다.


5. 결과 및 의의[편집]


계속적인 발명과 기술혁신은 종전의 농업적인 사회와는 전혀 다른 산업사회를 출현시키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생산력이 인류에게 풍요를 가져다주고, 빈곤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과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아무리 발전된 사회라도 무제한적인 풍요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이후에는 빼곡한 상점마다 물건이 가득 쌓여 소비자를 기다리며, 과잉생산으로 인해 가격이 폭락하여 생산비용보다 아래로 떨어지고 가격조정을 위해 일부러 물건을 폐기하는 사건이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인류 역사상 겪은바 없는 풍요를 누리고 있다. 산업혁명 이전 풍년은 역사적으로 식량이 풍부해지는 행운이었으나, 산업혁명 이후로는 공급량 조절을 위해 식량을 폐기처분해야하는 모순까지 나타나고 있다. 기업이나 국가는 과잉 생산된 물건을 판매하기 위해 마케팅 활동을 하거나 새로운 시장 수요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러한 시장 수요 창출의 노력이 국가적 규모로, 그것도 부정적인 면모로 나타난 것이 바로 해외 식민지 설립이다. 바로 아래에서 설명하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제국주의의 대두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도 나타나는 것.

산업 혁명 이전에는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 식량과 재화의 생산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났으므로 인구가 늘어날수록 재화의 가격이 상승하여 인구증가를 억제하였다. 이것에 대한 이론이 바로 맬서스 트랩이다. 그러나 산업 혁명 후 인구와 함께 물자의 생산력도 기하급수적으로 늘게 되면서 인구가 증가하면서도 물가는 안정적이었다. 사실 맬서스 트랩 문서에 서술되었듯이 맬서스가 처음부터 전제조건을 잘못 잡아둔 점도 없지 않았지만, 멜서스가 살고 겪었던 17~18세기는 실제로 기술적으론 정체되었는데 인구는 지속적으로 늘어서 생활 수준, 특히 서민의 평균 영양섭취 수준은 중세보다 떨어지기도 할 정도로 만성적인 가난을 겪던 시대였다.

전 세계에 자본주의의 열풍을 불러 일으킨 이 사건은 귀족과 평민, 지주와 농민이 아닌 산업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으로의 계급 전환을 불러 일으켰다. 공장의 출현으로 수공업자들이 밥그릇을 잃게 되었고 굶어죽지 않기 위해 공장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영국을 본떠 농업 → 산업 중심의 경제라는 테크 트리를 타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유럽에서 특히 과학, 기술의 급속한 발달이 촉진되었다. 한편 인구의 도시 집중현상이 나타났고, 노동 계급의 대두로 인해 노동 계급의 권리 신장을 위한 투쟁 및 사회주의 운동이 발발하였고, 칼 마르크스를 필두로 해 공산주의가 생겨나는 등 정치체제에도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앞서도 얘기했듯 산업혁명은 본격적인 제국주의 시대를 불러왔다. 18세기 산업혁명이 서양이 비서양을 압도하는 경제력을 가지게 됐다는 것은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동의하는 사안이다. 산업혁명을 거쳐 기계화된 문물을 갖춘 서양의 군대는 산업화되지 않은 군대에 비해, 그야말로 밸런스 붕괴 수준의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유럽의 여러 열강은 대항해시대부터 성장한 우수한 군사력을 이용해 다수의 식민지를 갖추고 이미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멀리 떨어진 다른 문명권에 대해 주도권을 갖고 우위에 설 수는 있어도[36][37][38] 일방적으로 정복할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분열된 유럽에 비해 비서구 제국들은 통일된 시스템을 유지하여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질적인 열세를 양적 우위로 보상할 수 있었으나[39], 나중엔 인구빨로도 극복이 안 될 정도로 질적 격차가 벌어지자 결국 유럽 국가들의 각축장으로 전락하였다. 유럽은 다른 모든 문명권을 제압하였음은 물론이고 아프리카 밀림부터 시베리아의 원시림에 남태평양의 작은 섬들까지 정복하고 심지어 북극과 남극까지 깃발을 꽂아 말 그대로 지구 전체를 정복하였다.

기존의 비유럽 제국들은 유럽 열강들에게 야만족으로 멸시되었으며, 유럽에게 정복된 수많은 문명들은 생존과 독립을 위해 자신들의 체계를 서유럽 기준으로 근대화하였다. 20세기 중반 이후 제국주의가 해체되어 식민지들은 독립했으나, 여전히 '어느 정도 서구의 기준(민주주의, 자본주의, 인권 수준)에 맞춘 나라가 되느냐' 가 곧 국가의 선진성으로 판단된다. 산업혁명은 그 탄생으로부터 불과 200여 년만에 서구문명을 바탕으로 세계 인류의 보편문명을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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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업 혁명' 이란 명칭만으로는 갑작스럽게 어떤 기계나 기술의 발명이 생긴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산업혁명은 르네상스 이래 유럽의 전반적인 근대적 발전을 배경으로 경제적, 사회적 조건이 서서히 누적되면서 어떤 임계점을 기점으로 경제·사회적인 변화가 급속도로 일어난 커다란 현상이다.[2] 경제사는 상대적으로 잘 정리된 사료가 적고 서술 단위도 거시적인 점도 통설 성립이 어렵게 하는 한 원인이다. 원래 정치외교사나 법제사는 다른 분야보다 사료가 풍부한데, 이는 국가 등 권위있는 주체가 공식기록을 남기고, 하나하나 굵직한 사건들이어서 분석하기 용이하다. 근대 역사학이 탄생했을 때도 연구분야는 정치사에 집중되어 있었다. 반면 경제는 수많은 개인의 빠르고 역동적인 물질생활과 경제활동이 쌓여서 이루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나오는 사료들도 어디까지나 상거래 증빙 등 일상적 용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후대에 전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어서 담긴 정보도 한정적이다. 따라서 경제사를 연구할 때는 1차 사료에 대한 창의적 분석으로 개별자에서 드러나지 않는 총체적 구조까지 파악해야 한다. 이는 문화사 등 여타 분야도 마찬가지며, 여기서 파생한 다양한 접근법은 다시 정치외교사에도 영향을 주어서, 현대 사학자들은 외교관 한 개인이 남긴 사소한 쪽지까지도 샅샅이 찾아 분석하고는 한다.[3] 순무 재배를 너무 열심히 권장한 나머지 '순무 타운센드'라는 별명이 생길 지경이었다고 한다.[4] 하지만 1800-1900년 동안에는 영국의 인구가 또 3배 이상 증가했기 때문에 19세기 무렵에는 영국은 식량의 상당수를 수입에 의존하게 된다.[5] 라틴 아메리카 및 인도 등의 영국 식민지.[6] 이 당시에 영국명예혁명 이래 정치사회가 안정되었고, 상공업이 발달하였으며, 넓은 해외시장을 확보하였고, 천연자원도 풍부했으며 인클로저 운동으로 풍부한 노동력이 확보되었었다.[7] 이런 이농 현상은 정작 영국이 아닌 한국과 일본 등 후발 산업국가에서 두드러졌다[8] 이에 관한 연구는 송병건,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 해남, 2008 에서 소개하고 있다.[9] 플라잉 셔틀, 증기기관, 뮬 방적기, 코크스를 이용한 제철법, 압연법 등[10] 참고로 이걸 발명한 존 케이는 방직공들이 자기들 일자리를 없애버렸다고 습격해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신세가 돼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후대에 재평가되어 지금은 그의 고향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물이 있다.[11] 딸 혹은 아내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어 이름은 Spinning Jenny(!)[12] 그런데 하그리브스의 아내의 이름도 제니가 아니었고 여러 명의 딸들 중 제니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제니는 엔진(engine)의 줄임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13] 이 사람도 방적공들에게 자신들의 일자리가 없어졌다고 공장이 습격을 당했다.[14] 1시간 동안 1마력[15] 제임스 와트는 원래 수학기구를 만들던 사람이다.[16] 로버트 풀턴이 해당 증기선을 최초로 시험한 프랑스 북부의 강의 이름이다. 정식 명칭은 북부 강 증기선(North River Steamboat)이었으나 해당 강을 끼고 있는 도시의 이름인 클레르몽이라는 이름이 더 유명해져 그렇게 불린다. [17] 기묘한 우연으로, 두 도시는 100년보다 조금 더 지난 20세기 후반에 거의 동시에 몰락했다 하지만 아직도 영국에서 손꼽히는 대도시.[18] 당시부터 수입하던 질 좋은 노르웨이산 목재와 그걸로 만든 가구인 Norwegian Wood가 유명하여 비틀즈 노래에도 있다.[19] = 선철. 탄소 함량이 2.5~4% 인 철.[20] 탄소 함량이 0.01% 이하인 철. 유연성이 높아 무르고 잘 부서지 않는다.[21] 우연인지 증기기관을 개량한 제임스 와트 역시 노예무역에서 나온 자본의 지원을 받았다.[22] 구세군이 운영한 곳인데, 가격과 모양 그대로 '4 penny coffin(4페니짜리 관짝)'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23] 그나마도 최저 연령이 9세로 늘어나고 노동시간을 제한한 정도지만 점점 나아지기는 했다.[24] 영국의 뒤를 이어 유럽 각국에서 아동노동을 규제하는 법률들이 성립되었는데 개중에서 독일의 프로이센은 그 입안 과정이 특이했다. 프로이센의 아동노동금지법은 프로이센 육군 참모총장(!)이 국왕에게 건의해서 제정된 것이다. 참모총장 왈, "폐하, 제발 아동노동을 금지해 주십시오. 애들이 어렸을 때부터 하도 부려먹히다 보니 자라지를 못해 징집을 해도 애들 몸에 맞는 군복도 없고 총도 못 가눠서 픽픽 쓰러집니다!"[25] 이와 같은 현상은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있었고 180년이 지난 현재에조차 개발도상국에서 흔하게 벌어지고 있다.[26] 1830년 이전에는 1인당 성장률은 고작 0.3%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1830년 이후 1차대전까지는 1%씩 성장했고, 2차대전 후에는 2%씩 성장했다.[27] 물론 자본가의 지대추구나 효율임금, 노동시장구조 등에 따른 여러 변수가 있긴 하다.[28] 역사학에서의 우연이란 (우리 일상언어에 비추어 본다면) 엄밀하게는 개연에 가깝다. 즉, 구조적 원인 속에서 언제든 일어날만한 상황이었다는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 자세한 것은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를 위한 변명』에서 언급되는 "알프스에서의 실족사" 예시를 참고하는 것을 권장.[29] 하지만 단순히 양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데, 그 양을 어떻게 썼느냐가 다르기 때문이다. 산업혁명기 영국은 증기기관이라는 혁신적인 동력원의 연료로 사용한 반면, 북송의 석탄은 땔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참고로 우리나라도 삼국시대때 석탄을 연료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30] 흔히 도시들만 그런 특권이 부여된 것처럼 말해지지만,이런 '자유도시' 즉 Burgo Franco 에서 Burgo 는 원래 고대 게르만어로는 읍락이라는 뜻이며, 성벽을 두르지 않고 수백 명 정도가 사는 규모의 작은 마을들도 아우르는 말이었으며, 14세기까지도 90% 이상의 자유도시가 인구 1천조차 넘지 못했다.[31] 정말 혼자 한 건 아니고, 보통 수백~수천의 아전들이 있었으나 아전은 공식적인 지방행정조직이 아니었다. 관료들은 중앙에서 내리는 박봉과 자체적으로 거둔 세금으로 아전들의 급료를 어떻게든 줘야했기 때문에 부패의 원인이 됐다.[32] 이런 상업 중소도시를 '진'이라고 하는데, 지방관료들은 진의 행정을 지방 유력 지식층인 신사에게 대강 일임했고 중앙에서 파견한 환관이 상세를 거두는 식의 느슨한 행정만 이뤄졌다. 치안의 공백이 커 일종의 마피아인 무뢰들이 장악한 경우가 허다해 사회 문제가 되었다. [33] 항목 내에서 언급된 발명가들 외에도, 퍼커션 캡과 같은 사례를 보면, 특허를 보장해야 할 국가에서 특허료 아끼겠다고 만료될 때까지 존버를 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34] 맥심 기관총의 탄띠 특허를 우회하기 위해 보탄판이 발명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35] 스핏저형 총알 자체는 프랑스에서 8×50mmR 르벨 탄에 적용한 것이 최초다.[36] 상대주의 사관에 따른 동양 재평가 과정에서 나온 학설들 때문에 산업 혁명 이전 유럽이 동양보다 뒤떨어졌다는 오해가 많지만, 이미 산업혁명 이전에 유럽의 육군과 해군은 타 문명권의 군대를 압도적인 교환비로 제압할 수 있었다. 15세기에 이미 서구 문명이 중동, 인도, 중국 등보다 군사적, 기술적, 제도적, 자본적으로 질적 우위에 섰다는 것이 보수적 서양 역사가들의 주장이다.[37] 관련 출처 Civilization: The West and the Rest, Niall Ferguson. 참고로 니얼 퍼거슨은 제국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다.[38] 관련 출처 2 Why the West Rules—For Now, Ian Morris[39] 산업혁명 이전에 유럽이 지구 반대편에 투사할 수 있는 군사력은 수백 남짓이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단 몇 척의 함선만으로 인도네시아의 함대를 전멸시킬 수 있었고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몇십 명의 용병대로 동남아를 휩쓸고 다닐 수 있었으나 가용 인력 문제로 정복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18세기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에 수천의 병력을 투입하여 수만의 현지 병력을 쓸어버릴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