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동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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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행정구역
2. 역사
3. 지리
3.1. 자연지리
3.1.1. 지형
3.1.2. 기후
3.2. 인문지리
3.2.1. 생활권
4. 교통
4.1. 도로
4.2. 철도


1. 개요[편집]


동해안(東海岸)은 일반적으로 한반도 내에서 동해와 면하는 해안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태백산맥의 동쪽, 함경산맥의 남쪽 지역이며, 함경도 해안지역, 강원도 영동지방, 부산광역시 일대의 경상도 해안지역을 포함한다.

동해안이라고 하면 푸른 해변과 설악산, 오대산 등 명산이 많아 예전부터 관광지로 각광받는 곳이다. 따라서 동해안에 있는 도시들은 대부분 관광도시의 특성을 띈다. 그러나 경상도의 동해안 지방은 부산, 울산, 포항 같은 공업도시들이 줄지어 있는데, 바다가 깊어 큰 배가 접안할 항구를 만들기 유리하기 때문에 일찍이 항구도시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1.1. 행정구역[편집]


※ 북쪽부터 나열함.

2. 역사[편집]



2.1. 원삼국시대[편집]


이 지역에서 유물이 발견되는 연대는 기원전 16세기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옥저의 전신이 되는 집단의 문화로 추정되며, 영흥만 이북에서 연해주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퍼져 있다.

동옥저의 중심지는 지금의 함흥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옥저의 별호였다는 부조(夫租)가 한사군 설치 이후 임둔군 부조현(夫租縣)으로 그대로 이어진 점과, 부조현이 함흥에 있었다는 점, 현도군의 치소를 옥저성에 둔다고 한 기록을 보아 함흥이 동옥저의 중심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북옥저가 있었는데, 북옥저는 동옥저와는 800리 정도 떨어져 있다고 되어 있다. 그 중심지에 대한 설은 분분하나, 함경북도 동해안 일대가 북옥저의 영역이었음은 분명하다.

기원전 3세기 이전에는 영흥만함흥만 일대에 임둔국이 있었다고 한다. 옥저도 가야마한처럼 소국 연합체였다는 것을 볼 때, 동옥저의 중심지라는 함흥 일대에 있던 임둔국은 동옥저의 맹주 역할을 하던 국가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 국가는 대략 기원전 3세기 즈음에 고조선에 복속되었다가, 기원전 2세기에 고조선이 한나라에 의해 멸망한 이후 한사군의 하나인 임둔군이 되었고, 옥저 역시 임둔군과 현도군에 복속되었으나, 세력 자체는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둔군은 기원전 82년현도군으로 편입되었다가 기원전 75년에 현도군이 지금의 지린성으로 옮겨 가며 낙랑군 동부도위에 편입되었다. 기원후 30년에는 동부도위도 폐지되고 옥저는 조공국으로 독립할 수 있었지만, 동옥저는 기원후 56년에는 고구려 태조대왕에 의해 정복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북옥저기원전 28년고구려 동명성왕에 의해 이미 멸망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그 이후에도 번번히 기록에 등장하고 있다. 완전히 고구려에 귀속된 것은 기원후 3세기의 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임둔군이 사라진 기원전 82년 무렵부터는 영흥만 이남에서 동예가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예의 유물 자체는 기원전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세력의 정립은 그 즈음이었던 것 같다. 동예의 중심지는 지금의 강릉이었고, 영역은 영흥만 이남에서 강릉까지이다. 비슷한 시기에 경상도 동해안 지방은 진한이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의 동해시삼척시 일대에 있었던 실직국도 진한에 포함되었다.

2.2. 삼국시대[편집]


기원후 2~3세기 무렵이면 이 지역의 세력들은 점차 주변국에 종속되기 시작한다. 옥저고구려에 복속되었고, 신라는 남쪽의 우시산국(울산), 거칠산국(부산)을 복속한 후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기 시작한다.

기원후 50년실직국은 지금의 울진에 있던 파조국을 정복 후 합병하였다. 이로써 실직국은 동해에서 울진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지만, 10여년 후 강릉 쪽에서 동예가 쳐들어 오는 바람에 울진까지 밀려났다. 이렇듯 동예의 압박이 있게 되자, 실직국은 남쪽으로 눈을 돌리게 되고 음즙벌국(경주 안강읍)과의 영토 분쟁으로 이어졌다.

기원후 102년에는 음즙벌국이 신라에 복속되어 실직국과 신라가 바로 국경을 맞대게 되었고, 그 바로 2년 뒤인 기원후 104년에는 실직국마저 신라에 복속되었다. 이로써 신라는 경상도 동해안 일대를 모두 석권하고, 지금의 강원도 동해시까지 진출한다. 실직국은 2세기 초에 신라에 복속되었지만, 3세기 후반까지 거의 200여년 동안은 실직국 시대의 유물이 출토된다. 즉, 신라가 실직국을 편입하긴 했지만 200여년 동안은 완전히 신라에 동화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실직국 시대의 양식은 3세기 후반부터는 조금씩 신라(경주)식으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한편 기원후 56년동옥저를 복속한 고구려4세기 광개토대왕 시기에 이르러 동예를 완전히 복속한다. 동예가 고구려의 영토가 되면서 지금의 동해시 일대에서 고구려와 신라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는 강릉 지역까지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실직주와 하슬라주 등이 설치되었다.

기록에 진흥왕 시기인 556년에는 지금의 안변 지역에 비열홀주(卑列忽州)가 설치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신라는 영흥만까지 진출했음을 알 수 있다. 568년마운령비황초령비가 세워진 것이 확인되므로 영흥만에서 함경남도 동해안 지역까지 확장한 것도 그 즈음일 것이다.

태백산맥 이서에서는 임진강까지 진출한 데에 반해서 동해안에서의 북진 성과가 훨씬 두드러진다. 고구려 입장에서도 평양에서 동해안 지역을 방어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러나 함경도 지역은 신라로서도 경주에서 너무 멀기 때문에 점령했어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선덕여왕 시기에는 진흥왕 때 편입한 영토를 대거 상실하고 다시 동해시 일대에서 고구려와 대치하게 되었다. 특히 영흥만 이북 지역은 신라가 다시는 차지하지 못 하는 지역이 되었다.

7세기 삼국통일전쟁으로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이후, 신라와 당나라는 한반도의 주권을 놓고 나당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하게 되고 대동강-영흥만 선에서 국경이 확정되었다.

2.3. 남북국시대~후삼국시대[편집]


영흥만 이북에는 발해가 들어서서 통치하였다. 발해는 영토를 5경 15부 62주로 나누었는데, 지금의 함경남도 북청군, 혹은 그 근방에 남경남해부가 설치되었고, 두만강 하구에 동경용원부가 설치되었다. 영흥만 이북의 행정구역은 그 2개 행정구역에 의해 통치되었다.

영흥만 이남의 신라는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고 강원도 영동지방에 명주, 경상도 일대에 삽량주(양주)를 설치했다.

선덕왕[1]이 후사를 남기지 못 하고 죽어 원래는 태종 무열왕의 5세손인 김주원이 왕으로 즉위하게 되어 있었으나, 경주의 북천에 홍수가 나서 왕위에 오르지 못 하고, 상대등이었던 김경신이 그 틈에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원성왕이다. 원성왕은 내물왕의 후손이었으므로 무열왕계를 밀어내고 내물왕계가 왕조를 잇게 된 것이다. 김주원은 왕위를 잇지 못 하게 되자, 멀리 강릉으로 가게 되었고, 영동지방의 토호 세력이 되었다. 그러니까 태종 무열왕의 후손들은 경주보다는 강릉에 많이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김주원의 세력은 김주원이 경주에 있을 때부터 매우 컸던지, 강릉으로 옮겨갈 때 그 행렬이 볼 만했다고 한다. 강릉으로 옮겨간 후에도 세력은 꽤 커서 김주원을 명주군왕에 봉하고 고성에서 울진까지를 봉토로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주원은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되었는데, 현대에도 영동지방에 있는 김씨들은 강릉 김씨인 경우가 많다.

후삼국시대에 이 일대는 경주 일대의 신라 중앙정부와 강릉 일대의 김예·왕순식 세력이 있었다. 김예는 김주원의 후손으로, 전통적인 강릉의 토호세력이었고, 왕순식은 그 출신이 불분명하다. 두 세력이 별개였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강릉을 중심으로 동시대에 존재했던 호족임은 확실하다. 이 두 세력은 궁예에게 투항하며 태봉에서 우대를 받았으며, 훗날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한편 신라는 진성여왕 이후로 서라벌도 근근이 지키는 도시국가로 전락한다. 지금의 경주역 근방인 건천읍 모량리까지 외부 세력이 쳐들어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결국 서라벌이 후백제에게 한 번 유린을 당하고 나서 얼마 안 있어 고려에 귀부하며 고려는 이 지역을 완전히 석권하고 통일을 이루었다.

2.4. 고려시대[편집]


고려 건국이 918년, 발해 멸망이 926년이다.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 함흥 이북은 요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요나라의 영토에 속하게 되었지만, 사실상 여진족의 영역이 되었다.

한편 고려에서는 995년(성종 14년)에 전국을 10도로 나누었는데, 기존의 삭주명주의 영역을 삭방도로 정하고,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동해안 일대는 영동도로 편제되었다. 특히 삭방도는 최초로 영서영동이 한 행정구역으로 통합된 사례이다.

1018년, 현종은 삭방도를 폐지하고 영동지방을 다시 동계로 편제했다. 동계는 군사적 성격이 강한 행정구역으로, 당시 왜구의 출몰이 빈발했던 탓에 해안 경비를 강화하고자 설치된 행정구역이다. 경상도 동해안 지방은 최초로 경상도라는 이름을 가진 행정구역이 등장했다.

1108년(예종 3년)에 윤관예종의 명을 받아 함경도의 동해안 지방을 일시적으로 수복한 적이 있는데, 바로 동북 9성이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긴 하나, 함경남도 동해안 일대는 확실히 점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에 관리가 어려워서 여진에 땅을 돌려주었다.

12세기부터는 금나라가 건국됨에 따라 함흥 이북은 금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13세기에 금나라가 망하고 원나라가 이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고, 철령 이북, 곧 안변부터 함흥에 이르는 지역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직접 다스렸다.

그러나 공민왕은 즉위 이후 반원자주정책을 펴면서 제일 먼저 고려의 옛 영토를 수복하고자 했는데, 1356년쌍성총관부가 혁파되먼서 일단 함흥 일대까지는 수복했고, 1370년 쯤에는 청진 일대까지 수복했다.

2.5. 조선시대~현대[편집]


1395년동계강원도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곧 영서는 강원우도, 영동은 강원좌도가 되었다. 경상도도 낙동강을 기준으로 경상우도와 경상좌도로 나뉘었지만[2], 이건 딱히 경상도 동해안만이 아니라 낙동강 동부 지역은 다 경상좌도에 포함되었다.

세종 대에는 두만강 유역까지 북진하여 4군 6진을 개척했다. 이로써 현재의 동해안 지역은 모두 한국의 영역이 되었고, 함경도에 편제되었다.

1895년, 갑오개혁 이후 23부제가 시행됨에 따라 지금의 함경북도에 경성부(鏡城府)[3], 함경남도 동해안 일대에 함흥부(咸興府), 영동지방에 강릉부(江陵府), 경상도 동해안에는 동래부(東萊府)가 설치되었고, 영덕은 안동부(安東府)에서 관할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에 23부제는 혁파되어 13도제를 시행하게 되었고, 함경북도, 함경남도, 강원도, 경상북도, 경상남도에 소속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45년에는 38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는데, 동해안에서는 양양군에서 남북으로 갈렸다. 1950년6.25 전쟁이 발발한 후 군사분계선고성까지 북상하면서 그 남쪽의 속초시, 양양군 일대가 모두 수복되었다. 특히 휴전선철원군화천군 일대에서는 거의 수평으로 지나가지만, 고성에 이르면 갑작스럽게 북쪽으로 휘어 올라간다.

1963년에는 울진군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이관되었다.

3. 지리[편집]



3.1. 자연지리[편집]



3.1.1. 지형[편집]


한반도의 지형은 대체로 동고서저(東高西低)형인데 이 지역은 서쪽에 백두대간을 비롯한 태백산맥이 있으므로 서고동저(西高東低)형이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자연지리적 특성이 이 곳에서는 다른 경우가 많고, 일반적으로는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지형들이 이곳에는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한반도 동해안의 주요 시가지는 바닷가 바로 옆의 평지에 들어서있는 경우가 많다. (강릉시, 고성군, 양양군, 속초시, 울진군이 대표적이다.)

지면의 경사가 급하여 동서 폭이 매우 좁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하천의 길이가 매우 짧으며, 대부분 곡류하천이 아닌 직류하천의 형태를 띄고 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하상계수가 안 그래도 높은 한반도에서도 동해안 지역은 하상계수가 극히 높은 편이다.

또한 대륙붕이 없이 곧장 심해로 들어가기 때문에 서해안처럼 해안이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이 아니라 거의 직선 형태의 해안이 되었다. 그래서 동해안에는 섬이 없고, 먼 바다에 화산섬으로 생겨난 울릉도독도가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큰 배가 접안할 항구를 만들기는 유리하나, 이 없어 항구로 직접 들이치는 파도를 막을 수가 없다. 그래서 부산, 울산, 포항, 원산처럼 제한적인 곳에 항구가 발달한 것이고, 나머지 강릉이나 속초 같은 곳은 항구가 발달하지 않은 것이다.

동해안 지방에는 한반도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석호가 있다. 강릉경포호, 속초청초호, 영랑호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석호는 시간이 지나면서 퇴적물이 쌓이면 평야가 되는데, 동해안에 있는 함흥평야정평평야 같은 곳들이 원래는 석호였던 곳이다.

3.1.2. 기후[편집]


한반도는 대체로 대륙성 기후이나, 동해안 지방은 크고 깊은 동해의 영향을 받아 동위도 내륙이나 서해안 지방보다 연교차가 적은 편이다. 덕분에 여름이 덜 더운 편이고, 겨울은 북서풍을 막아주는 태백산맥까지 있어 다른 지역보다 온난한 특징이 두드러진다. 일례로 서울과 동위도인 강릉의 겨울 기온은 훨씬 남쪽에 있는 분지 도시인 대구와 거의 비슷한 정도이다. 울릉도는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져 아예 해양성 기후를 띠는데, 울릉도의 여름 기온은 한낮에도 30도를 넘기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이며 겨울에도 남해안 지역과 비슷한 정도이다. 물론 섬 답게 강수량도 많은 편이며, 특히 강설량이 많아 우리나라에서는 다설지역이다.

한편 동해안 지역은 습고 서늘한 오호츠크해 기단의 영향으로 겨울 강수량이 어느 정도 있는 편이다. 늦겨울 이 지역에 이따금씩 오는 폭설과 강수[4]는 대개 오호츠크해 기단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심지어 오뉴월에도 해당 기단의 영향력은 여전하여 오호츠크해 기단이 확장하면 동해안 지방은 다른 지역보다 5℃가량 온도가 급강하하고 냉해 피해를 입기도 한다. 이때 서쪽 지방은 푄 현상까지 일어나 벌써 여름이 온 거 아니냐며 후텁지근해하는데 동해안 지역은 저온 현상으로 다시 봄옷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는 지경이다.

반대로 서, 북서풍 계열이 우세한 날에는 바람이 서쪽의 태백산맥을 타고 넘어오면서 급격한 고도차로 인해 동해안 지방에 푄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때 양간지풍이라고 하여, 2~3월 즈음 양양군간성 사이로 특히나 심한 바람이 부는 날이 있다. 대기가 건조하다면 여기서 산불이 발생하여 걷잡을 수 없는 대형 재난이 된다.

3.2. 인문지리[편집]


한반도의 경우, 대체로 서해안의 평야지대가 국가의 중심지 역할을 해 왔으므로 산맥에 가로막혀 단절된 동해안 지방은 상대적으로 발전이 더딜 수 밖에 없었다.

전근대에는 교통수단이 발전하지 않았으므로 태백산맥 이서 지역과는 왕래가 힘들었다. 강릉 일대에서는 대관령을 넘는 것보다 아예 배를 타고 부산이나 원산으로 가서 거기서 기차를 타는 게 훨씬 빨랐다고 할 정도이다. 때문에 동해안 지방은 문화나 언어 등 여러 분야에서 독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강원도 사투리는 영서 방언영동 방언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3.2.1. 생활권[편집]


동해안을 따라 좁고 길게 늘어선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여러 도시들이 선형으로 이어진다.

강원도의 중심지는 영서에 있는 원주춘천이고, 경상도경부선 연선에 있는 대구, 부산이 중심이다.

영동지방은 강릉을 중심으로 생활권이 형성되어 있다. 다만 강릉과 속초 두 도시가 양양을 사이에 두고 영동지방의 2극을 이루고 있으며, 그 외에도 동해시삼척시가 강릉과는 조금 분리된 생활권을 이루고 있다.

경상도의 동해안은 포항-울산-부산으로 이어지는 큰 도시권이 형성되어 있다.

4. 교통[편집]


오랜 시간 동안 동해안 지방은 교통이 매우 불편한 지역이었고, 현대에도 타 지역과 비교하면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경강선의 개통부터 시작하여 이 지역을 한꺼번에 묶을 동해선동해고속도로, 경강선 수요를 분산할 춘천속초선2020년대 안으로 개통되며 획기적인 교통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4.1. 도로[편집]


동해안을 관통하는 국도7번 국도로,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6가 옛시청교차로에서 시작하여 한반도 최북단인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면에서 끝이 난다. 그러나 남북이 분단되어 있기 때문에 실질적 종점은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군사분계선이며, 동해대로로 지정되어 있다. 통일이 된다면 동해대로 역시 7번 국도를 따라 온성까지 연장될 가능성이 있다.

동해안을 관통하는 고속도로동해고속도로가 있는데, 현재는 삼척~속초, 울산~포항 구간만 개통되어 있고 포항~삼척 구간은 현재 공사 중이다. 아시안 하이웨이 6호선으로 지정되어 있다.

1969년에는 경부고속도로 부산~대구 구간이 이 지역을 지나게 되었다. 대구에서 곧장 청도밀양을 거쳐 부산으로 가지 않고 경주울산을 경유하게 된 것은 당시 공업지대가 조성되던 울산과 포항을 경유하기 위해서이다.

1975년에는 드디어 태백산맥을 넘어가는 최초의 고속도로인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수도권영동지방이 직접 이어지게 되었다. 현재는 영동고속도로 이외에도 서울양양고속도로새만금포항고속도로, 함양울산고속도로가 동해안과 다른 지역을 연결하고 있다.

북한 지역에서는 원산금강산간 고속도로, 평양원산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있다.

4.2. 철도[편집]


동해안 지방에 처음 생긴 노선은 1911년에 생긴 경원선으로, 경성에서 항구도시원산을 잇는 노선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곧이어 원산에서 청진을 잇는 함경선1916년에서 1928년까지 12년에 걸쳐 구간별로 개통되었다. 함경선에서 평양으로 이어지는 평원선1941년에 개통되었다.

동해안 지방을 하나로 묶는 동해선의 구상은 이미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존재했다. 1918년에는 포항~경주 간 동해남부선이 개통하였고, 이후 경주에서 울산광역시를 거쳐 부산광역시부전역까지 이어지는 구간이 1935년에 개통되었다.

1929년에는 경원선 안변역에서 동해북부선이 분기하는 형태로 건설되었다. 최초에는 흡곡역까지, 1937년에는 양양역까지 개통하였으나, 6.25 전쟁 이후 동해북부선의 운행이 중지되고 양양역에서 군사분계선까지는 차츰 철거되었다. 북한 치하의 구간은 금강산청년선으로 바뀌어 영업 중이고, 2006년에는 남북철도연결 사업의 일환으로 제진역까지 복원되었지만 남한에서는 아직도 해당 구간에 열차 운행을 하지 않는다.

1940년에는 영동선 도계역~묵호역 구간이 개통되었다. 이 당시에는 경원선과 함께 태백산맥을 넘나드는 유이한 철도 노선이었고, 분단 이후에는 유일한 노선이 되었다. 2017년 경강선 개통 전까지는 청량리역에서 출발해서 제천까지 내려간 다음에 태백선과 영동선을 경유해서 강릉역에 도착하는 식이었는데, 무려 6시간이 걸렸다. 이런 이유로 영동지방은 전통적으로 열차편보다는 고속버스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았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경강선이 개통되며 수도권까지 2시간대로 앞당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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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덕여왕과는 다른 인물[2] 한성부에서 볼 때를 기준으로 하므로 우도가 경상도 서부, 좌도가 경상도 동부이다.[3] 일제강점기서울에 설치되었단 경성부와는 다르다.[4] 주로 영동 지방은 폭설, 그 이남 지방은 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