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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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제24대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묘호는 '헌종(憲宗)', 시호는 '경문위무명인철효성황제(經文緯武明仁哲孝成皇帝)', 휘는 '환(烉)',[3] 자는 '문응(文應)'.
순조의 유일한 친손자이자 효명세자의 하나뿐인 외아들[4] 로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22살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요절하고, 할아버지 순조마저 건강 악화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왕세손(王世孫)의 신분으로 8살 어린 나이에 국왕이 되었는데 조선 왕으로서는 최연소로 단종보다도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5]
같은 경우로는 고려시대의 충목왕이 있으며, 충목왕 역시 즉위 당시 8살(만 7살)이자 최연소였다. 영조-정조에 이어서 2번째로 조부에서 손자로 권좌가 이어지는 조손(할아버지 → 손자) 계승의 절차를 밟았다. 기존 학계의 견해에 따르면 헌종조 전반은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 간의 알력다툼이 치열했던 시기로 정의되며 그에 따른 야사도 존재했으나, 이는 실제 역사와 차이가 있다.[6]
2. 생애[편집]
2.1. 효명세자의 아들[편집]
1827년(순조 27년) 7월 18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효명세자와 세자빈 조씨의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세자빈이 원손을 낳았다 대신들이 하례 하다
세자빈이 원손(元孫)을 낳았다. 하교하기를,
"오늘 신시(申時)[7]
에 세자빈이 원손을 낳았으니, 모든 행사는 관례대로 거행하라."하고,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대각의 신하, 약원의 세 제조를 함인정(涵仁亭)에서 불러 보았다.
영중추부사 한용귀(韓用龜) 등이 아뢰기를,
"하늘과 조종들께서 묵묵히 도우시어 빈궁께서 원손을 순산하셨으니, 이는 실로 억만 년 종묘 사직의 무궁한 기쁨입니다.
처음으로 손자를 보시는 경사를 맞았으니, 전하의 마음이 더욱 기쁘시겠습니다만 신들도 즐거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 《순조실록》 29권, 순조 27년(1827년, 청 도광(道光) 7년) 7월 18일 (신유) 2번째기사.[8]
《헌종대왕 행장》에 이르면 태몽이 꽤나 비범했다고 하며 출생일에 학들이 떼거지로 날아서 왕비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인데 이걸 궁궐에서는 기이하다고 했다. 《행장》에 의하면 준수한 외모에 큰 목소리가 금석같다고 하며 100일 전에도 벌떡 일어섰다고 한다.[9]
왕세손 책봉을 불과 4개월 앞두고, 아버지 효명세자가 1830년(순조 30년), 세는나이 22세에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헌종은 고작 세는나이 4세의 매우 어린 나이에 동궁(東宮)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할아버지 순조 역시 1834년(순조 34년), 44세에 죽고[10] 헌종이 세는나이 8세에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현재로 따지면 초등학교 1학년인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순조의 정비이자 할머니인 왕대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실시했다.
임금이 숭정문에서 즉위하고 왕대비 수렴 청정의 예를 행하다
임금이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왕대비(王大妃)를 받들어 수렴 청정(垂簾聽政)의 예(禮)를 흥정당(興政堂)에서 행하고,
조하(朝賀)를 받은 다음 교서(敎書)를 반포(頒布)하고 대사(大赦)[11]
를 베풀었다.
- 《헌종실록》 1권, 헌종 즉위년(1834년, 청 도광(道光) 14년) 11월 18일 (기묘) 1번째기사.[12]
한편 어머니 신정왕후는 안동 김씨 세도가에 이어 힘은 세지만 발톱을 숨기고 권력을 움켜쥐려는 풍양 조씨 집안 출신이다. 첫 왕비는 안동 김씨로 김좌근의 딸인 효현왕후 김씨였으나, 결혼 2년만인 헌종 9년인 1843년에 16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했고 이후 효정왕후 홍씨를 계비로 맞았다. 외가와 처가에서 알 수 있듯이 헌종의 치세는 실로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조선이 파탄 직전까지 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2.2. 왕대비의 수렴청정 및 병오박해[편집]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시기에는 '척사윤음'(斥私倫音)이 반포되었고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발생했다. 1839년(헌종 5년), 기해박해 때는 프랑스인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13] 주교,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 조선인 평신도 정하상 바오로 등이 순교했다. 1846년(헌종 12년) 병오박해 때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했다.
더욱 극심해진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민생은 파탄의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대책[14][15][16] 은 딱히 세우지도 못했고 외부에서는 서양 선박들이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는 이양선 출몰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 민심은 동요했다.
왕권도 헌종 초기에는 매우 떨어지는 편이였는데 즉위 2년인 1836년(헌종 2년) 남응중, 1844년(헌종 10년)에는 민진용[17] 과 이원덕 등이 사도세자의 서출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손자 회평군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으나 실패했다.[18] 이 역모의 특징은 정치적 기반이 전무한 몰락한 양반들의 계획으로 이만큼 왕의 위신이 떨어졌다.
남응중·남경중을 국문하여 사형에 처하다
남응중(南膺中)·남경중(南慶中)을 국문(鞫問)하여 사형(死刑)에 처하고, 고변인(告變人) 천기영(千璣英)은 상을 내려 오위 장(五衞將)으로 삼았다. 남응중의 족당은 모두 좋은 문벌(門閥)이었는데, 성품이 간교하여 남의 재물을 편취(騙取)하기 좋아하고 역모(逆謀)를 꾸며 경외(京外)에 출몰하면서 속임수만 써왔다. 일이 발각되자 면하지 못할 줄 알고, 동래(東萊)의 왜관(倭館)으로 도망해 들어가서 극도로 흉악하고도 부도(不道)한 말을 지어내어 투서(投書)하여 두 나라의 틈을 부추겼으나, 왜인들도 믿지 않고 그를 잡아서 우리 나라에 넘겨주었다. 이때에 이르러 국문하니, 남경중과 함께 승복하였다. 남공언은 그들의 도당이었는데 국정(鞫庭)에서의 난언(亂言)이 더욱 흉악하여 아울러 노륙(孥戮)하였다. 남응중의 수급(首級)은 왜관에 매달아 보이도록 명하고, 따로 서계(書契)[19]
를 지어 관수왜(館守倭)에게 전하여 약조(約條)를 중히 여기고 교호(交好)를 돈독히 한 뜻을 보이었다.---
- 《헌종실록》 3권, 헌종 2년(1836년, 청 도광(道光) 16년) 12월 23일 (임신) 1번째기사.[20]
결안에 민진용의 죄가 부대시 능지 처사에 해당한다고 하다
죄인 민진용(閔晋鏞)의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그는 미천한 무부(武夫)로서 감히 불궤(不軌)한 흉계를 품고 효경(梟獍)[21]
의 마음으로 귀신처럼 물여우처럼 역당(逆黨)과 체결하고 흉언(凶言)을 난만(爛慢)[22] 하게 하였습니다. 강사(江舍)에서 밤에 모여 세 사람이 주무(綢繆)한 것이 모두 지극히 흉악하고 지극히 참혹하였는데, ‘이곽(伊霍)’[23] 두 글자가 어찌 신하로서 감히 들을 수 있는 것이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마는 방자하게 입에다 내었습니다. 모반(謀反)하고 대역(大逆)하여 부도(不道)한 것이 확실하다고 지만(遲晩)[24] 하였으니, 죄가 부대시 능지 처사(不待時凌遲處死)[25] 에 해당합니다."하였다.
- 《헌종실록》 11권, 헌종 10년(1844년, 청 도광(道光) 24년) 8월 21일 (을묘) 1번째기사.[26]
2.3. 짧은 친정[편집]
안동 김씨의 세력이 큰 견제가 없이 무럭무럭 커가는 시기 헌종은 할머니 순원왕후로부터 수렴청정을 거둔 뒤로 친정이 시작된 이후에 20세가 될 무렵부터 척신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수렴청정이 15세 때에 끝나고, 첫 왕비인 효현왕후가 죽으면서 할머니 순원왕후의 의중에 따라 남양 홍씨 홍재룡(洪在龍)의 딸인 효정왕후 홍씨를 계비로 맞은 것. 이 때 주부(主簿) 김재청(金在淸)의 딸을 후궁으로 삼기도 했다. 그래서 안동 김씨의 세도는 풍양 조씨의 부상과 함께 다시 조금이나마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만, 야사에서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경쟁 시기 정도로 비추어진다. 일례로 한 야사에서는 조병구가 권세를 휘두르자 "외삼촌의 목에는 칼이 안 들어가는가?"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는 김좌근의 일화로도 알려져 있다. 이야기의 출처는 김택영의 《한사경》인데 헌종 앞에서 애체(안경)를 썼다고 한 소리 들은 것. 한 소리만 듣고 끝나서 다행인게 당대 예법에서 분명 어긋나는 것이었다. 안경을 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했으니 웃어른 앞에서 자신의 학식을 뽐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27] 헌종의 이 말에 조병구는 듣고 놀라서 황급히 물러나와 퇴궐하다가 가마가 뒤집혀서 머리가 깨져 죽었다고도 하고 이게 신정왕후 조씨 앞이었는데도 헌종의 책망을 듣자 음독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죽기 전 해까지도 한성 판윤, 예조판서, 이조판서, 공조판서를 한창 지내다가 대간들의 탄핵에 몰려 쫓겨나 1845년(헌종 11년) 사망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안동 김씨의 편인 대간들의 견제에 따른 것으로 사망 시기 자체가 헌종이 친정을 시작한 시기보다 이르다. 무엇보다도 조병구가 헌종이 그렇게 말할 정도로 권세를 휘둘렀다면 졸기에 좋은 내용이 실릴리 없다.[28]
대사간 서상교가 안동 김씨의 실세인 김흥근이 탐오하고 왕대비의 비위를 맞추어(= 궁위를 엿보아) 정치하는 것을 보고하며 처벌을 주장해 헌종은 김흥근을 탄핵하고 귀양보내기도 했다. 또한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좌근 등을 유배를 보내는 등 반(反) 안동 김씨 행보를 밟았다. 대구 서씨 서희순을 이조판서 겸 총위대장으로 내세우기도 했고 안동 김씨에게 밉보인 김정희, 조병헌은 헌종 14년(1848년)에 유배에서 풀렸으며 박규수를 조정으로 불러 중용할 뜻을 내비췄다. 반면 영의정 정원용은 안동 김씨에게 아부하다가 파직당하는데 오군영의 훈련대장을 외척이 아닌 사람들로 채워넣고 병조판서를 독자적으로 임명한건 대표적이었다. 이렇게 군권을 장악하고 정조의 장용영처럼 친위대인 총위영(총융청)까지 구성하는 등 아주 활발한 왕권 강화 정책을 펼쳤다. 아편전쟁의 전말을 보고 들으면서 국방력 강화와 척신 척결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수령의 장죄(뇌물) 문제를 전면으로 들고 나와서 법 개정을 주도한 적도 있었는데 수령의 뇌물이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해보면 세도 가문들을 타깃으로 노린 것이 확실하지만 비변사의 비협조로 법 개정은 무산되었다.
그런가하면 암행어사도 활발하게 전국으로 파견했고, 안동 김씨의 조병헌 사사 요구를 매우 강력하게 거부하면서 역으로 안동 김씨의 조종을 받던 삼사를 모조리 파직하기도 했다. 조병헌은 결국 귀양을 갔다가 헌종 말에 풀려나지만 철종 초에 사사된다.
재위 말에는 《국조보감》의 증수를 위해 정조·순조·익종에 대한 《삼조보감》(三朝寶鑑)을 1848년(헌종 14년)에 찬집됐고, 《열성지장》, 《동국사략》, 《문원보불》, 《동국문헌비고》 등이 편찬됐으며 각 도의 제방과 저수지를 정비하는 등 치적을 세우기도 했다.
2.4. 요절[편집]
세도가 안동 김씨를 견제하며 왕권을 힘겹게 잡아가는 시도 중에 1849년(헌종 15년) 7월 25일[29] , 향년 21세의 이른 나이로 창덕궁 중희당에서 승하했다. 헌종은 어느 순간부터 피를 토하며 소화 불량 증세를 자주 보였고 설사가 심해지며 얼굴에 갈수록 심한 부종 증상이 나타나 의원을 통해 약을 조제하고 치료하면서 상태가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매번 반복하다가 사망하였다고 전해진다.
오시에 창덕궁의 중희당에서 승하하다
오시(午時)[30]
에 임금이
- 《헌종실록》 16권, 헌종 15년(1849년, 청 도광(道光) 29년) 6월 6일 (임신) 9번째기사.[31]
이는 현대 의학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평소 정력에 좋다는 음식을 많이 복용하였다는 일화로 미루어 급성 간염이나 간경변의 합병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성기능 장애를 극복하려고 녹용과 인삼을 꾸준히 복용한 것을 보아 신부전증을 앓다가 심장 질환이 발생해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가능성도 높다. 죽기 직전 다급히 의원을 불렀으나 결국 병을 다스리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후사를 보지 못하며 세상을 떠났는데, 생전에 후사를 보지 못하고 요절한 탓에 정조의 마지막 남자 직계 후손이기도 하다.
아버지 효명세자도 헌종과 비슷한 나이에 각혈하며 쓰러졌고, 이후 요절한 것을 보면 아버지와 비슷하게 체질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5. 능묘[편집]
헌종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의 경릉(景陵). 왕비인 효현왕후 김씨, 효정왕후 홍씨와 나란히 묻힌 삼연릉(三連陵)으로 삼연릉 형식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다. '우왕좌비[32] '의 원칙에 따라 맨 왼쪽에 헌종 능이 있고 가운데에 효현왕후 김씨, 오른쪽에 효정왕후 홍씨가 묻혀 있다.[33]
3. 가계[편집]
3.1. 친가(전주 이씨)[편집]
- 부황 : (추존)문조 익황제(文祖 翼皇帝) 이영(李旲)
- 모후 : (추존)신정익황후 조씨(神貞翼皇后 趙氏)
- 양동생 : 고종 태황제(高宗 太皇帝) 이명복/이재황/이형/이희
- 양제수 :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 양조카 : 순종 효황제(純宗 孝皇帝) 이척(李坧)
- 양제수 :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 양조카 : (사시)의민황태자 영왕(懿愍皇太子 英王) 이은(李垠)
- 양제수 : 영보당 귀인 이씨(永寶堂 貴人 李氏)
- 양조카 : (추증)완효헌친왕(完孝憲親王) 이선(李墡)
- 양제수 : 귀인 장씨(貴人 張氏)
- 양조카 : 의친왕(義親王) 이평길/이강(李平吉/李堈)
- 양제수 : 내안당 귀인 이씨(內安堂 貴人 李氏)
- 양제수 : 보현당 귀인 정씨(寶賢堂 貴人 鄭氏)
- 양조카 : 왕자(王子) 이우(李堣)
- 양제수 : 복녕당 귀인 양씨(福寧堂 貴人 梁氏)
- 양조카 : 덕혜옹주(德惠翁主)
- 양제수 : 광화당 귀인 이씨(光華堂 貴人 李氏)
- 양조카 : 왕자(王子) 이육(李堉)
- 양제수 : 삼축당 김씨(三祝堂 金氏)
- 양제수 : 정화당 김씨(貞和堂 金氏)
- 양제수 :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 양동생 : 고종 태황제(高宗 太皇帝) 이명복/이재황/이형/이희
3.2. 외가(풍양 조씨)[편집]
- 외고조부 : 경상도관찰사 병조판서 문익공(慶尙道觀察使 兵曹判書 文益公) 조엄(趙曮)
- 외증조부 : 지중추부사 숭록대부 효문공(知中樞府事 崇祿大夫 孝文公) 조진관(趙鎭寬)
3.3. 처가(안동 김씨, 남양 홍씨)[편집]
3.3.1. 안동 김씨[편집]
- 장인증조부 : 좌의정 사헌부대사성 익헌공(左議政 司憲府大司成 翼憲公) 김이소(金履素)
- 장인조부 : 충주목사(忠州牧使) 김지순(金芝淳)
- 장인 : 의정부영의정 영흥부원군 효간공(議政府領議政 永興府院君 孝簡公) 김조근(金祖根)
- 장모 : 한성부부인 이씨(漢城府夫人 李氏)
- 처남 : 이조참의 성균관대사성(吏曹參議 成均館大司成) 김병집(金炳潗)
- 처남댁 : 이름 미상
- 양외조카 : 궁내부특진관 서사관(宮內府特進官 書寫官) 김갑규(金甲圭)
- 처남댁 : 이름 미상
- 처형 : 부인 김씨(夫人 金氏)
- 동서 : 이조판서 대제학 문정공(吏曹判書 大提學 文貞公) 남병철(南秉哲)
- 처남 : 이조참의 성균관대사성(吏曹參議 成均館大司成) 김병집(金炳潗)
3.3.2. 남양 홍씨[편집]
- 장인조부 : 판의금부사 공조판서 헌간공(判義禁府事 工曹判書 獻簡公) 홍기섭(洪耆燮)
- 장인 : 익풍부원군 증 영의정 돈령부영사 익헌공(益豊府院君 贈 領議政 敦寧府領事 翼獻公) 홍재룡(洪在龍)
- 장모 : 연창부부인 안씨(延昌府夫人 安氏)
- 첫째처남 : 예조판서 효정공(禮曹判書 孝貞公) 홍종석(洪鍾奭)
- 처제 : 이름 미상
- 둘째처남 : 홍종선(洪鍾善)
3.4. 배우자 / 자녀[편집]
- 정비 : (추존)효현성황후 김씨(孝顯成皇后 金氏)[35]
- 계비 : (추존)효정성황후 홍씨(孝定成皇后 洪氏)[36]
- 후궁 : 순화궁 경빈 김씨(順和宮 慶嬪 金氏)[37]
- 후궁 : 정빈 윤씨(貞嬪 尹氏)
- 승은후궁 : 화락당 숙의 김씨(和樂堂 淑儀 金氏)[39]
- 딸 : 옹주(翁主)[38]
슬하에 아들은 없었으며, 궁녀 출신 숙의 김씨에게서 딸 하나를 두었는데 요절했다. 헌종이 후사 없이 23세란 젊은 나이에 사망함에 따라 결국 정조로부터 이어진 정조계 왕통[40] 은 단절되었다. 이는 결국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 세도가 그나마 제일 가까운 왕실 종친 중에 강화도를 뒤져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서손자인 강화도령 이원범을 순조의 양자로 입적하여 옹립한 요인이 되었다.
4. 어진[편집]
5. 여담[편집]
- 야사에 따르면 헌종은 계비 삼간택 때 김재청의 딸인 경빈 김씨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하지만 자신의 의사와 달리 할머니 순원왕후와 어머니 신정왕후가 홍재룡의 딸인 효정왕후 홍씨를 계비로 간택하자 3년 뒤에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간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빈 김씨는 계비 삼간택에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야사라고 한다. 헌종은 경빈 김씨를 위해 친히 낙선재를 지었을 정도라고 한다.
- 17세에 천연두를 앓은 기록이 전해진다.
헌종 대왕 행장(行狀)
왕은 용청(龍睛)에 서각(犀角)이고 외모가 준수하고 명랑하며,
큰 목소리가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으며 백일이 되기 전에 능히 일어서셨다.
- 4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여의고 항상 효명세자를 그리워하였다. 효명세자의 외모를 기억하지 못하는 걸 안타깝게 여겨서 신하들에게 효명세자의 외모에 대해서 질문하니 "진전에 모신 수용이 오히려 매우 닮으신 전하의 용안에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자신의 외모가 효명세자와 비슷하다는 대답을 들은 헌종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하염없이 슬퍼하였다.
- 조선왕조실록에 헌종이 즉위할 때 신하들이 절실하고 시급한 여섯 가지 일들을 아뢰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중 궁위를 엄하게 하라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더욱이 어리신 나이라 보통 한가로이 계실 때쯤 무리들과 쉽게 친숙해지고 자질구레한 장난감으로 이러한 무리들은 쉽게 유혹하니 심지를 고혹시켜 성공에 누를 끼침은 모두 이에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선묘(先廟, 순조)께서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셨으나 환시를 거느리심이 매우 엄해 항상 말을 붙이지 아니하시어 전하께서는 힘쓰소서.'라면서 언급된다.[43] 헌종이 미남이라 젊은 궁녀들이 승은을 입기 위해 유혹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아마 앞서 말한 《실록》에 언급된 내용을 '미남이라 궁인들이 유혹하기에 안달났다' 이런 뉘앙스로 호사가들에 의해 널리 왜곡되어 알려진 것 같다. 헌종실록을 보면 알다시피 '헌종이 미남이라 궁인들이 유혹했다'보다는 '젊은 나이에 즉위해 궁녀 환관 등 이들이 쉽게 유혹을 해서 누를 끼친다' 이런 식으로 실제로 얘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 왕은 외모와 무관하게 궁녀들의 관심사인데 승은을 입기가 수월한 이유가 크기 때문이다. 궁녀들과 지나치게 성관계를 가졌다는 설화가 있는데 헌종이 궁녀들을 가까이 한 건 안동 김씨의 후손을 낳지 않고 후궁으로 대를 잇겠다는 의지라고 보는 해석도 존재한다.
- 좋은 외모에 영민한 편이었지만, 제대로 된 노력을 해보기도 전에 20대 초반에 요절하는 등 여러모로 아버지 효명세자를 닮은 왕이다. 실제로 효명세자와 헌종 부자는 외모가 판박이였다고 하며 승하 당시 나이도 효명세자보다 불과 1살밖에 많지 않았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승하 당시 장소는 신분과 정반대인데, 효명세자는 세자 신분에 편전인 희정당에서 훙서하였고, 헌종은 국왕 신분에 동궁인 중희당에서 승하하였다.
- 세간의 평가와 달리 왕권 강화를 위해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세도 가문을 견제해 이들을 제어하는 노력을 하였고 각종 서책 간행을 하였다. 동시에 수령의 뇌물 문제를 건드려 민생을 바로 잡으려 하였다. 하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사망하여 제대로 된 시도조차 하지 못하였으며, 그 결과 기울어가는 조선을 끝내 바로잡을 수 없었다.
- 실제로 안동 김씨에서 헌종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증거는 많은데, 할머니 순원왕후는 헌종을 "남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고 의심이 많으며 시기심이 강하다"라는 평을 내렸다. 특히 안동 김씨 출신의 왕비이자 헌종의 친할머니였던 순원왕후의 어필 봉서[44] 을 보면 헌종과 김씨였던 순원왕후가 의외로 상당한 갈등을 벌였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45][46]
- 앞서 소개되었듯이 헌종은 후사가 없어 정조의 생물학적 직계 혈통은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다. 헌종이 승하한 이후 조선의 왕위 계승권은 정말 복잡해졌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임오화변으로 폐서인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사도세자의 유일한 생물학적 적자인 정조는 폐서인이 된 아버지 사도세자의 아들 자격으로는 세손의 신분을 유지할 수 없었다.[47] 그렇기 때문에 영조는 손자를 오래전에 조졸한 자신의 큰아들의 양자로 보내 세손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물론 왕위 계승과 전혀 관계 없는 사도세자의 서자인 정조의 이복동생들(은언군·은신군·은전군)은 그대로 사도세자의 가계에 남겼다.
6. 대중매체[편집]
조선 역대 국왕들 중에서 사극과 가장 인연이 늦은 왕. 첫 등장이 2018년인데 그 전까지는 하다 못해 죽는 장면으로라도 나온 적이 없었다. 조선 왕들 중에서 인지도가 낮은 왕들은 여럿 있지만 예종은 남이의 옥사, 인종은 문정왕후의 치세라는 극적 사건이 있어 사극에 여러 번 얼굴을 비추기라도 했고, 이렇다 할만한 화제성[51] 도 없는 현종조차도 첫 사극 출연이 2002년으로 헌종보다 16년 더 빨랐다. 심지어 아내 효정왕후도 2001년 KBS 드라마 《명성황후》에서 출연했으니 마누라보다도 더 등장이 늦은 경우이다. 이때 효정왕후를 연기한 사람은 배우 김정하이다.
- 네이버 웹툰 《조선왕조실톡》에서는 아버지 효명세자를 그리워하는데 한 궁녀가 "전하(헌종)랑 똑 닮으셨다"고 하자 셀카를 자주 찍는다.
- 효명세자를 주인공으로 한 네이버 웹소설인 《구르미 그린 달빛》(작가 윤이수, 삽화 kk)이 2016년 KBS에서 구르미 그린 달빛으로 드라마화되었는데 드라마에서는 가상의 세자로[52] 설정이 바뀌어서 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 역시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 《광해의 연인》을 쓴 유오디아의 네이버 웹소설인 《반월의 나라》의 메인 남주인공이 헌종이다. 연재 당시에는 휘가 '연'으로 쓰였지만 후에 종이책으로 발간되면서 본래 휘인 '환'으로 수정되었다. 전체적인 내용은 천주교 박해로 인해 부모님을 잃고 청나라로 건너가 공주가 된 여주인공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조선으로 건너가 남주인공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