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성도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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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시대 함경도 온성 지역을 관할하던 도호부. 1910년 경술국치를 기준으로 하여 가장 북쪽에 위치한 도호부이자 조선의 최북단 관할 행정구역이다.[4] 지금의 함경북도 온성군의 대부분 지역과 만주의 일부 지역(현 두만강 일부 지역)이 온성부의 관할이었다.[5]
2. 역사 및 상세[편집]
온성 도호부(穩城都護府)
사(使)가 1인이니, 진 절제사가 이를 겸하고, 판관(判官)이 1인이니, 경원도 좌익 병마를 겸한다.
본래 고려의 땅이었는데, 중간에 야인(野人)이 또한 그 땅의 빈 것을 틈타 들어와 살면서, 이름을 다온평이라 하였다. 세종 22년에 비로소 군을 설치하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경원 및 길주 이남에서 안변 이북까지의 각 고을의 민호를 옮겨 채웠다. 〈세종〉 23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켜 판관(判官)을 두고, 또 토관(土官)을 설치하였다. 세종 24년에 진을 설치하여 절제사를 겸하게 하였다.
대천(大川)은 두만강이다. 사방 경계[四境]은 동남쪽으로 경원(慶源) 경관령(慶關嶺)에 이르기 43리, 서쪽으로 종성(鍾城) 지경에 이르기 53리, 남쪽으로 덕천보(德川堡)에 이르기 1백 35리, 북쪽으로 두만강에 이르기 2백 75보(步)이다.
호수가 8백 호요, 인구가 3천 6백 37명이었다. 군정은 갑사(甲士)가 25명이요, 정군(正軍)이 6백 86명이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가 가장 춥다. 간전(墾田)이 2천 9백 70결이요, 【논은 겨우 9결이다. 】 토의(土宜)는 기장·피·조·팥·황두(黃豆)·삼[麻]이다. 토산(土産)은 꿀·다시마·사슴포[鹿脯]·문어·연어이요, 약재는 바곳[草烏頭]·오독도기[茹]·창포·느릅나무껍질[楡皮]·박새[藜蘆]·도라지·과감풀[龍膽]·탱알[紫莞]·더위지기[茵陳]·족두리풀뿌리[細辛]·단너삼[黃耆]·구리때뿌리[白芷]·끼절가리뿌리[升麻]·칡뿌리[葛根]·방풍(防風)·검화뿌리껍질[白鮮皮]·범부채[射干]이다. 염소(鹽所)가 6이요, 【모두 부의 남쪽 안화리(安和里)에 있다. 】 목장(牧場)이 1이니, 대초도(大草島)이다. 【부의 동쪽에 있는데, 육지와의 거리가 10리이요, 동서가 6리 30보(步), 남북이 8리 50보(步)이다. 국마(國馬) 71필을 방목(放牧)한다. 】
읍 벽성(邑壁城) 【둘레가 1만 척이며, 안에 샘이 15가 있고, 군창이 있다. 】 참(站)이 1이니, 무령(撫寧)이요, 요해처(要害處)가 5이니, 소동건동(小童巾洞)·고성동(古城洞)·다온동(多溫洞)·미전동(迷錢洞)·입암동(立巖洞)이요, 관방(關防)이 3이니, 낙토보(樂土堡)·시건보(時建堡)·미전보(迷錢堡)요, 연대(烟臺)가 15이니, 입암(立巖) 【동쪽으로 경원(慶源) 마유(馬乳)에 응하고, 북쪽으로 석봉(石峯)에 응한다. 】 ·석봉(石峯) 【동쪽으로 전강(錢江)에 응한다. 】 ·전강(錢江) 【서쪽으로 미전(迷錢)에 응한다. 】 ·미전(迷錢) 【서쪽으로 포항(浦項)에 응한다. 】 ·포항(浦項) 【서쪽으로 평봉화(坪烽火)에 응한다. 】 ·평봉화(坪烽火) 【서쪽으로 남산(南山)에 응한다. 】 ·남산(南山) 【서쪽으로 유원(綏遠)에 응한다. 】 ·유원(綏遠) 【서쪽으로 압강(壓江)에 응한다. 】 ·압강(壓江) 【서쪽으로 고성(古城)에 응한다. 】 ·고성(古城) 【남쪽으로 시건(時建)에 응한다. 】 ·시건(時建) 【서쪽으로 견탄(犬灘)에 응한다. 】 ·견탄(犬灘) 【남쪽으로 중봉(中峯)에 응한다. 】 ·중봉(中峯) 【남쪽으로 송봉(松峯)에 응한다. 】 ·송봉(松峯) 【남쪽으로 소동건(小童巾)에 응한다. 】 ·소동건(小童巾) 【남쪽으로 종성(鍾城) 보청포(甫靑浦)에 응한다. 】 이다.
토관(土官)은, 서반(西班)이 유원위(柔遠衛) 일령(一領) 사직(司直)이 1인, 【종5품. 】 부사직(副司直)이 1인, 【종6품. 】 사정(司正)이 2인, 【종7품. 】 부사정(副司正)이 2인 【종8품. 】 , 사용(司勇)이 3인 【종9품. 】 , 대장(隊長)이 2인 【종9품. 】 , 대부(隊副)가 2인 【종9품. 】 이며, 이령(二領) 사직(司直)이 1인, 【종5품. 】 부사직(副司直)이 1인, 【종6품. 】 사정(司正)이 1인, 【종7품. 】 부사정(副司正)이 1인, 【종8품. 】 사용(司勇)이 2인, 【종9품. 】 대장(隊長)이 1인, 【종9품. 】 대부(隊副)가 3인 【종9품. 】 이다.
온성도호부
조선초기 세종의 4군 6진의 개척 과정에서 설치된 것이 그 시작이다. 당시 4군 6진은 두만강을 사이에 둔 함경도 지역의 국경선을 확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 때문에 여진족들과의 충돌이 많았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본래 고구려가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부터는 발해가 이 일대 지역을 모두 점령하고 있었다.(물론 실질적인 지배를 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거란, 여진족 등이 이 일대의 땅들로 이주를 하였기 때문.) 그리고 그 이후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때에는 이 지역 전부가 발해의 행정구역 중 하나였던 '동경용원부'의 관할구역 이었다.
한편 신라와 후백제, 태봉을 통일한, 한국 역사상 2번째 통일왕국인 고려는 건국 직후부터 이 지역까지 영향력 행사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한 여러번의 시도 끝에 고려후기였던 공민왕 때에 이르러서는 쌍성총관부를 혁파하고 북진하여 두만강 하류 지방까지 확보한 뒤 동북면으로 부르며 직접적인 통치를 하지는 못하였으나, 간접적인 통치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두만강이 굽이치는 이 일대 지역은 고구려와 발해가 거란에 멸망한 뒤 오랫동안 거란과 여진등 이민족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 풍습과 언어가 사실상 여진족에 가깝게 보여졌을 것이다. 특히 여진은 이 일대 지역을 다온평이라고 여진족 이름을 붙여서 부르기 까지 하였다. 그리고 강 바로 건너편에 여진족이 거주하였던 만큼, 여진족들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다고 전해진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연산군시기 '여진족 귀순 문제'이다.
신수근이 야인 귀순 문제를 아뢰어 어세겸 등에게 의논하게 하다
승지 신수근(愼守勤)이 아뢰기를,
"올적합(兀狄哈)·이이후(伊伊厚)·소소고(巢巢古)와 야당지(也堂只)의 아들 등이 온성부 근처 가흘라(加訖羅) 지방에 와서 말하기를, ‘우리는 별종(別種)이요 니마차(尼亇車)의 족류가 아닙니다. 귀순하여 와서 살기를 청합니다." 하였습니다.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고 이점(利坫)을 보내어 절도사(節度使)와 함께 저들을 효유해서 드디어 종성(鐘城) 건너편 남경(南京)에 거주하게 하고 말하기를, ‘가을 수확을 한 후 돌아가라.’고 하였는데, 병조(兵曹)에서 이르기를,
‘그 사람들은 이미 본토를 배반하였으며 만일 강제로 돌려 보낸다면 반드시 포주(蒲州)로 돌아갈 것이요 그러면 다시 한 도적이 생기게 되는 것이어서 잘하는 계책이 아니니, 청하옵건대 그대로 거주하게 하여 주소서.’ 하였습니다. 그 후 올적합·아당개(阿堂介) 등이 또 니마차에서 종성 지방으로 와서 말하기를, ‘우리는 원래 올량합(兀良哈)의 종족인데 니마차에게 잡혀 갔다가 지금 본토의 족류(族類)를 잊지 못하여 와서 살려고 합니다.’ 하였는데, 병조에서 또 이르기를, ‘아당개 등이 올량합의 종족이라 하지만 그 진위(眞僞)를 알 수 없다. 올량합이 연이어 귀순하여 오면 이것을 어찌 다 가까운 곳에 거주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절도사에게 엄히 분부해서 환송을 독려하도록 계청(啓請)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이후와 아당개가 똑같은 올적합인데 그 종류를 누가 능히 분별하겠습니까. 만일 이이후에게 거주하도록 허락하고, 아당개 등을 핍박하여 쫓아낸다면 아당개 역시 어찌 한 적이 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까. 지금 나라의 남방에는 왜의 호구가 날마다 불어나서 이미 복심(腹心)의 우환이 되었는데, 이이후가 지금은 비록 귀순하였다 하더라도 그 종족이 점점 번성한다면 반드시 복심의 우환이 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재상에게 의논하라."
하였다. 어세겸(魚世謙)·한치형(韓致亨)·이계동(李季仝)·여자신(呂自新) 등이 의논 드리기를,
"이이후 등이 가흘라(加訖羅)에 와서 거주하는 날에는 멀리 쫓아내지 못하고 남경 지방으로 이거할 때 추수한 후 본토로 돌아가라 허락하였는데, 조정에서 또 그만 쫓아내지 못하고 도리어 거주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다시 쫓아내면 이것은 조정의 명이 반복 무상한 것으로서, 원방 사람을 진정하고 감복시키는 도리가 아닌 듯하옵니다. 또 니마차가 아령개(阿令介)에게 보복하려 한다고 큰소리 치면서 지금 종성(鐘城) 건너편 올적합(兀狄哈) 부락에서 노략질하고 있는데, 그곳이 아령개가 거주하는 지역 안에 드는지, 이이후(伊伊厚) 등이 와서 사는 곳과 원근 및 이이후 등과 본종(本種) 올적합과의 통모(通謀) 내응하는 여부 등을 짐작할 수 없습니다. 이 몇 가지를 본도 절도사에게 유시를 내리어서, 성 밑 야인(野人) 오랑캐의 실정을 잘 아는 자를 찾아 물어 사실을 알아서 계문(啓聞)한 후에 다시 의논함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이극돈(李克墩)·이세좌(李世佐)·성현(成俔)·조익정(趙益貞)·홍응(洪應)은 의논드리기를,
"이이후 등을 본토로 돌려보내자는 의논은 과연 승정원에서 아뢴 바와 같습니다. 신 등의 처음 의논 역시 이와 같았습니다. 이 일을 가지고 좀 고쳐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곳에 오므로 올적합 등이 재차 우리 변방을 침범하니, 속히 본토로 돌아가서 말썽이 없어지게 하라.’ 하고, 절도사로 하여금 돌아가는 것을 독려토록 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노공필(盧公弼)·허침(許琛)·이숙함(李叔瑊)은 의논드리기를,
"지금 승정원이 아뢴 것을 보면, 이이후가 올적합과 함께 서로 통하여 길을 인도하여 도적질하는 것은 진실로 의심스러운 일입니다. 이 기회를 타서 이이후 등을 몰아내어 변방에 가까이 못하게 하여 저들 오랑캐의 엿보는 우환을 끊어버리는 것이 실로 변경을 방비하는 좋은 계책이 되겠습니다. 다만 이이후 등이 처음에 가흘라 지방에 거주하려는 것을 조정에서 허락하고, 그후에 핍박하여 쫓아내는 것이 불가하다고 해서 남경에 옮겼으며, 조정 의논이 남경은 우리 국경에서 거리가 좀 멀다 하여 이미 거주할 것을 허락하였는데, 또 다시 핍박하여 쫓아낸다면 이것은 이적(夷狄)을 대하는 도리가 너그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저들 오랑캐 역시 쫓겨난 원한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올적합 등이 올량합에서 도적질하는 것은 이이후 등으로 하여 오게 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예전 혐의로 하여 온 것인지 알지 못하겠으며 멀리서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관찰사로 하여금 절도사와 함께 이이후 등이 올적합 등과 같이 들어온 길, 이이후의 거주처와의 거리가 멀고 가까운 것, 이이후를 남경에 거주 하도록 허락하는 것의 이해 등을 성 밑 여러 추장에게 탐문해서 실정을 살펴 알아보게 하여 계문(啓聞)한 후에 다시 의논케 하소서."
하고, 윤효손(尹孝孫)·조숙기(曺淑沂)·이복선(李復善) 등은 의논드리기를,
"처음 이이후 등이 변장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귀순하여 도망왔는데 지금 만일 쫓겨 본토로 돌아간다면 반드시 우리를 죽일 것이다.’고 하며 구실을 삼았습니다. 지금 올적합 등이 재차 우리 변방 아래의 야인을 잡아 갔는데 이이후 등이 잡혔다는 말은 없으니, 어찌 응원하지 않을 것을 알겠습니까. 절도사를 시켜 이런 뜻으로 깨우쳐 설명하고 본토에 돌아가게 독려해서, 더욱 번성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하니, 세겸 등의 의논을 좇았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이지란 등 여진족 출신의 개국공신의 생가가 온성지역에 존재하며, 여진족들 부락과의 무덤 또한 많았다고 전해진다. 한편 조선이 개국된 1392년 이후 6년이 흐른 1398년. 당시 까지만 해도 여진족이 점령하고 있었던 공주[7] 의 옛터에 경원부를 설치면서 본격적인 개척이 시작되었다.[8] 당시 태조는 군사를 보내어 이 일대 여진족들을 모조리 토벌하게 하였으며, 덕분에 이 지역의 안정화를 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예상 외의 상황이 발생한다. 1410년, 당시 여진족이 두만강을 건너 이 일대에 대규모 공격을 가한 것이다. 이때 경원부는 이러한 여진족의 대규모 침입에 대비할만한 군사와 방어시설이 부족하였으며[9] 이에 경원부를 당시 함길도 평야, 해안지대였던 경성부에 전 군사와 시설들을 후퇴시키고 물러나 버리며 그 이북지역을 자그마치 25년 동안 여진족에게 다시 내주게 되었다.
그렇게 여진족에게 점령당한 온성지역은 마침내 세종 때에 이르러서야 김종서의 주도하에 다시 시작될 수 있었다. 1440년. 당시 지금의 다온평[10] 지역에 조선 건국 역사상 최초로 군을 설치하면서 지금의 온성으로 그 이름을 고치고, 경원을 비롯하여 길주를 기준으로 남방에 있었던 고을들과 안변의 북쪽에 있는 여러 고을들의 민호를 옮겨 이곳에 설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441년에 온성군을 '온성도호부'로 승격시키고 토관을 설치한 후 이곳에 판관을 파견하였다
세종 23년인 1441년 설치되어 고종 32년인 1895년에 전국의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온성군(穩城郡)으로 변경되기 전까지 함경도 북부 지방의 행정과 군사상의 요지로 기능하였다. 그 이후에 이곳 온성부 위치에서 홍범도가 이끌던 독립군이 온성전투(穩城戰鬪)를 벌였고, 바로 북쪽인 만주 봉오동에서 홍범도가 이끌던 대한독립군이 큰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으며, 온성부 바로 서남쪽인 만주 화룡현 월신강변 삼둔자에서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신민단 예하 독립군 1개 중대가 연합하여 전투를 벌이고 이를 승리하면서 봉오동전투에 영향을 주었을 정도로 이 근방 지역에 대한 위치, 전략적, 군사적 중요성은 고대부터 근세기까지 매우 높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도 이 근방지역은 북한과 중국, 러시아의 국경이 모두 만나는 지역인지라 그 중요성은 더할나위 없이 중요하다. 후에 남북통일이 되면 옛 온성부 지역인 이곳은 통일한국의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됨과 동시에 통일한국의 관광지로서의 역할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3. 기타 및 대중매체[편집]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에서 연산군이 세좌를 유배 보내려고 한 지역이 바로 이곳 온성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