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보수정당/5.16 군사정변 ~ 3당 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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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 이후부터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 발표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민주당계 정당과 대립한 주류 정당은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 등 군부 정치 세력이 주도한 정당이었다.


1.1. 역사[편집]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획득한 박정희민주공화당이라는 새로운 보수 정당을 세우고 민주당계 정당과 보수 양당제의 형성을 이어나갔다. 민주공화당은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할 때까지 여당을 지냈으며, 초반기에는 나름 높은 지지를 받았으나 한 때 6.3 항쟁한일협정 반대투쟁으로 큰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한일협정이 성공적으로 체결되고 월남파병도 잘 이뤄지면서 박정희는 재선에 성공하고 7대 총선에서는 압도적으로 승리한다. 그러다 7대 총선이 6.8부정선거로 번지면서 다시 위기 국면으로 몰리지만, 이후 경제가 성장하기 시작했고 강력한 반공주의 정책으로 계속 안정적인 권력을 유지했다.

이후 3선 개헌을 주도하면서 임기 연장을 이뤄내고 안정적인 권력을 유지했지만,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과 사법 파동, KAL빌딩 방화 사건, 의료파동, 교련반대운동, 10.2 항명 사태 등으로 다시 위기국면으로 진입했고 박정희는 간신히 3선에 성공하고 8대 총선에서도 민주공화당은 과반수 이상을 확보했지만 신민당에 15석 이상 의석을 빼앗겼다. 이에 박정희는 10월 유신이라는 친위쿠데타를 일으켰고 유신정우회통일주체국민회의를 설립해서 장기집권의 태세를 갖추게 된다. 이후 포항제철 설립, 중공업 산업 정책, 지하철 건설, 중동 진출 등으로 안정적인 권력을 누리지만 2차 석유 파동 이후 다시 위기 국면으로 진입했고 YH 사건과 부마민주항쟁으로 위기국면이 심화되더니 측근들의 분열로 10.26 사태가 터지면서 박정희는 서거했고 이후 민주공화당은 전두환노태우의 신군부가 12.12 군사반란, 5.17 내란을 일으키자 정국 주도권을 상실하였다.

이후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민주공화당을 비롯한 기성 정당들을 모조리 강제 해산시키고 민주정의당이라는 새로운 보수 정당을 창당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각종 유화책과 3저 호황, 서울올림픽 유치, 서울아시안게임 개최, 물가안정 등을 이뤄내며 정권을 이어나갔으나 6.29 선언으로 여당 민주정의당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그해 대선에서 민주당계 정당이 분열,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여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고, 민주정의당은 제6공화국의 첫번째 정권을 창출하며 여당 지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민주화가 이뤄지고 제6공화국이 들어선 이후 치뤄진 13대 총선에서 여당 민주정의당은 125석이라는 적은 수의 의석을 얻었으나, 이후 서울올림픽, 1기신도시, 범죄와의 전쟁 등의 호재를 이용해서 열세였던 지지율을 반전시켰고 적은 국회 의석수 또한 제2야당 통일민주당[1],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2]합당하여 218석의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을 탄생시키는 것으로 해결하였다.[3]

이 시기에 팽배했던 인식이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 등 군부 정당은 독재 세력, 신민당, 신한민주당, 통일민주당 등[4] 민주당계 정당은 민주화 세력으로 서로 적이라는 인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산업화의 역할을 자임하는 군부 독재 세력들과 민주화 세력이었던 통일민주당이 합당했던 3당 합당은 야합이라고까지 불릴만큼 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줬다. 한국 정치사에 있어서 큰 분기점이 된 사건 중 하나로 1987년 민주화로 6공화국 탄생의 의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후 1997년 보수정당에서 민주당계 정당으로 최초로 수평적인 정권교체가 일어날 때 새정치국민회의는 3당 합당과 비슷하게 군부 정치 세력이었던 자민련의 김종필, 박태준과 함께 DJP 연합을 하였고 이후 한국사회는 군부정치세력민간정치세력이 민주주의 실현을 놓고 벌이던 독재와 민주의 대결프레임에서 지금과 같은 보수진보의 프레임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실제로 언론들 역시 90년대 이후로 한국의 정치 체제를 보수 양당제라고 부르는 사례가 거의 사라져갔다.


1.1.1. 추풍회통한당[편집]


오재영이 1962년에 창당한 정당. 1967년 당명을 통한당으로 바꾼다. 1971년 지구당수 미달로 등록 취소되어 소멸하였다.


1.1.2. 재건당[편집]


김종필이 창당한 민주공화당의 전신이다.


1.1.3. 민주공화당[편집]


파일:Democratic_Republican_Party_logo.png
김종필이 선행조직이었던 재건당을 해체하고 1963년 2월 26일 창당한 보수정당. 대한민국 제3공화국, 대한민국 제4공화국 시절 여당으로서 군인 출신 정치인들의 군부정권의 서막을 연 정당이다. 약칭은 공화당이었다. 해당 항목 참조.

지지자들은 산업화 세력이라고 부르는 군부정치세력들의 시초이다. 드골주의처럼 박정희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만큼 박정희 신드롬을 가지고 있는 박정희의 지지자들과 박정희의 정치적 후계자인 딸 박근혜를 지지하는 자들은 이 정당을 보수정당의 기원으로 여긴다. 이들 공화계는 1980년대 이후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당시 박정희의 정치적 후계자로 여겨지던 김종필을 따라서 민주화 이후 신민주공화당으로 가거나 민주정의당으로 갔다.


1.1.4. 국민의당(1963년)[편집]


민주당계, 자유당계 및 관료 출신인 무소속계의 3파로 구성되어있는 신정당 창준위 위원장 허정과 구 족청 세력으로 알려진 민우당 창준위 고문 이범석이 민정당 대표최고위원 김병로 등과 함께 1963년 8월 1일 창당발기인대회를 열어서 창준위를 거쳐서 9월 5일 창당한 당이다.[5] 해당 항목 참조.

1964년 12월 12일 민주당 신파 계열의 재건민주당과 합당하여 해산되었다. 현대로 친다면 바른미래당 포지션과 비슷한데 차이점은 이 당은 민주당계 정당으로 완전히 흡수되었다.


1.1.5. 정민회정의당(1967년)[편집]


1963년 8월 29일 구 자유당계 일부인사와 무소속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창당하였다. 1965년 11월 9일 재보궐선거에서 유수현이 당선되었다. 1966년 8월 12일에는 유수현을 제명하였다.

1967년 3월 30일 정의당으로 당명을 교체하였으며 제7대 대통령선거에는 진복기 총재가 출마하였으나, 12만 2,914표를 얻는 데 그쳐 낙선하였다. 그 뒤 정당법에 규정된 법정지구당 수 77개에 못미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등록취소로 1971년 5월 4일 소멸되었다.


1.1.6. 보수당(1963년)[편집]


1963년 10월 28일 혁신적 보수주의 노선, 혼합적 자유시장경제의 경제정책 등을 노선으로 정하고 창당한 정당이다.


1.1.7. 한국독립당(1963년)[편집]


1963년 10월 30일 과거에 한국독립당에 소속되어 있었던 대한민국 초기의 군인, 정치인이었던 김홍일제6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에 재건한 당. 1965년 보궐선거에서 김두한 의원이 당선되었다. 해당 항목 참조.

이후 위의 자유당처럼 7대 대선을 1년 앞두고, 재야민주세력을 총집결하여 국민대중의 여망에 부응하는 참신하고 강력한 단일야당을 형성한다는 보수야당통합노력에 따라 1970년 1월 25일 민주당계 정당의 적통인 신민당에 흡수합당되어서 해산되었다.


1.1.8. 유신정우회[편집]


1973년 3월 10일 창립된 교섭단체로서 대한민국 제4공화국의 연립여당. 오로지 박정희와 유신 헌법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소속 의원은 박정희가 내놓은 명단에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찬반투표를 거쳐 당선됐다. 약칭은 유정회였다. 해당 항목 참조.

1979년 10월 27일 해체되었다.


1.1.9. 민주정의당[편집]


파일:민주정의당 로고.svg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 세력이 1980년 공화당, 신민당 등 기존 정당을 강제해산하고, 구 정치인들(특히 야당인사의 거의 대부분)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가운데 1981년 1월 15일 창당하였다. 약칭은 민정당이었다. 해당 항목 참조.


1.1.10. 한국국민당(1981년)[편집]


파일:한국국민당(1981년) 로고.svg
전두환과 신군부의 정치금지법으로 해산된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의 당원들 중에서 정치활동금지를 피한 인사들이 1981년 1월 23일 창당한 당이다. 관제야당으로 기능했다. 이후 1987년 민주화 이후에 김종필이 정계에 복귀하여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자 현직 국회의원 8명과 대부분의 당직자, 지역조직이 신민주공화당으로 넘어가면서 사실상 와해되었다. 해당 항목 참조.


1.1.11. 통일민주당[편집]


파일:통일민주당 로고.svg
통일민주당 항목 참조. 약칭이 "통민당"이 아닌 "민주당"이었다. 1990년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의 삼당합당으로 사라졌다. 민주당계 정당이면서 보수정당이기도 하다. 보수의 개념이 변화하게된 주역 중 하나이다. 해당 항목 참조.

통일민주당은 김영삼김대중이 1987년 5월 1일 이민우 구상에 반발하여서 신한민주당으로부터 분당해서 나왔다. 이때의 주축이었던 두 계파가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였다. 결국 당의 운영이 영남민주화세력과 호남민주화세력인 두 계파를 중심으로 돌아갔는데 제6공화국의 첫번째 대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누가 대선후보로 나올 것인가를 놓고서 단일화에 실패했고 결국 1987년 10월 29일 김대중 파벌이 탈당해서 같은해 11월 12일에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결론적으로 이 항목에서 말하는 통일민주당은 5월 창당 직후의 통일민주당이 아니라 10월 분당 이후 영남 중심의 민주화세력으로 구성된 통일민주당을 지칭한다. 해당 항목 참조.


1.1.12. 신민주공화당[편집]


파일:신민주공화당 로고.svg
1987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된 김종필이 정계에 복귀하며 만든 정당. 약칭은 민주공화당과 같은 공화당이었다. 창당 직후 한국국민당의 국회의원과, 이전에 민주공화당, 유신정우회의 세력들이 합류하며 어느 정도의 당세를 갖추게 되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 총재인 김종필이 출마하였으나, 득표율 8.1%로 4위를 기록하며 낙선하였다. 당시 대선 직전에 KAL기 폭파 사건으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로 표가 몰리면서 그 피해를 보았다. 그러나, 충남, 대전 등지에서 득표율 1위를 차지하며 충청도를 대표하는 정당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지역구 27석, 전국구 8석을 획득하여 원내교섭단체가 되는데 성공했으며, 특히 충남에서만 지역구 13석을 획득하여 본격적으로 충청도를 대표하는 정당이 되었다. 해당 항목 참조.

이후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과 함께 민주정의당과 노태우정부를 견제하며,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다른 야당들과 달리 확실한 대권주자가 없어[6] 부각되지 않았으며, 소위 박쥐로 많이 불렸다. 이러한 야당의 설움으로 인해 김종필은 의원 내각제를 본격적으로 주장하기에 이른다.

1990년 삼당합당으로 사라진다. 이 과정에서 신민주공화당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제13대 총선에서는 여야간 절묘한 의석 구성이 이루어져서, 여야간의 합의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법안이 통과될 수 없었다. 이러한 정국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노태우 정권은 합당을 구상하기에 이르며, 초기에 노선이 비슷한 신민주공화당과의 합당을 생각해 낸다. 하지만, 두 당의 의석 합계로는 부족했기에 통일민주당을 끌여들여 보수대통합을 이루고 개헌가능선을 넘게 된다. 합당의 조건으로 김종필은 내각제 개헌을 제시하고, 노태우와 김영삼은 이를 수락해 각서를 작성하기에 이른다.[7] 결국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창당되었으며, 김종필과 박태준은 신당인 민주자유당에서 최고위원 직을 맡게 된다. 해당 항목 참조.

김종필을 보스로 하였다는 점과 인적 구성원의 유사성때문에 1990년대 3당 합당 이후 분당되어 1995년 창당한 충청권 보수의 시초인 자유민주연합의 뿌리를 이 정당에서 본다. 충청권 보수는 이후 자민련을 거쳐서 자유선진당, 선진통일당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1.2. 소속 정치인[편집]



1.2.1. 대통령[편집]


대한민국 대통령
파일:대한민국 대통령 문장.svg

이름

임기
선출 방법
정당
취임일
퇴임일
3
파일: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jpg
파일:external/static.tumblr.com/purple_pixel.png
박정희
(1917 ~ 1979)
5
1963년 12월 17일
1967년 6월 30일
1963년 대선
직선 46.6%
민주공화당 (1963 ~ 79)
6
1967년 7월 1일
1971년 6월 30일
1967년 대선
직선 51.4%
7
1971년 7월 1일
1972년 12월 26일
1971년 대선
직선 53.2%
8
1972년 12월 27일
1978년 12월 26일
1972년 대선
간선 100.0%
9
1978년 12월 27일
1979년 10월 26일
1978년 대선
간선 100.0%
5
파일:전두환전대통령.jpg
파일:external/static.tumblr.com/purple_pixel.png
전두환
(1931 ~ 2021)
11
1980년 8월 27일[8]
1981년 2월 25일
1980년 대선
간선 100.0%
무소속 (1980 ~ 81)
민주정의당 (1981 ~ 88)
12
1981년 2월 25일[9]
1988년 2월 24일
1981년 대선
간선 90.2%
6
파일:President_RTW.jpg
파일:external/static.tumblr.com/purple_pixel.png
노태우
(1932 ~ 2021)
13
1988년 2월 25일
1993년 2월 24일
1987년 대선
직선 36.6%
민주정의당 (1988 ~ 90)
민주자유당 (1990 ~ 92)
무소속 (1992 ~ 93)


1.2.2. 국회의원[편집]



1.2.2.1. 13대 국회[편집]





1.2.3. 당대표[편집]


파일:재건.png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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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주공화당 로고만.png 파일:민주공화당 글씨만.png 총재 및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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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총재
초대
정구영
제2-3대
박정희
권한대행
박준규
제4대
김종필
권한대행
정래혁
역대 의장
초대
김정렬
임시-제2대
윤치영
제3대
김종필
서리-제4대
정구영
제5대
김종필
제6대 (서리)
윤치영
서리-제7대
백남억
제8대 (서리)
정일권
제9대 (서리)
이효상
제10대 (서리)
박준규
총재 겸 의장대행
김종필
제11대 (서리)
전예용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background: transparent; width: 50%; text-align: right;"
유신정우회 의장
민주정의당 총재 및 대표
한국국민당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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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총재
전두환

초대 대표
이재형
제2대 대표
진의종
제3대 대표
정래혁
제4대 대표
권익현

총재 권한대행·제5대 대표
노태우

제2·3대 총재
노태우

제6대 대표
채문식
제7대 대표
윤길중
제8대 대표
박준규
제9대 대표
박태준


{{{-2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width: 80%; text-align: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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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국국민당(1981년) 심볼.svg [[파일:한국국민당(1981년) 글자.svg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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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제2대
김종철
제3대
이만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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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주공화당 총재



파일:통일민주당 심볼(색반전).svg [[파일:통일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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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영삼
권한대행
김상현
권한대행
김명윤
2대
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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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민주당 총재
민주당(1990년) 총재
민주자유당 총재 및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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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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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자유당 총재 및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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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역대 선거 결과[편집]



1.3.1. 대통령 선거[편집]


후보자
연도
대수
정당
득표수
득표율
결과
변영태
1963년
5대
정민회
224,443표
2.22%
4위
박정희
민주공화당
4,702,640표
46.61%
당선
1967년
6대
5,688,666표
51.44%
당선
이세진
정의당
198,837표
1.9%
6위
전진한
한국독립당
232,179표
2.1%
5위
진복기
1971년
7대
정의당
122,914표
1.03%
3위
박정희
민주공화당
6,342,828표
53.19%
당선
1972년
8대
2,357표[10]
100.0%
당선
1978년
9대
2,577표[11]
100.0%
당선
김종철
1981년
12대
한국국민당
85표[12]
1.6%
3위
전두환
민주정의당
4,755표[13]
90.11%
당선
노태우
1987년
13대
8,282,738표
36.64%
당선
김영삼
통일민주당
6,337,581표
28.03%
2위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1,823,067표
8.06%
4위


1.3.2. 국회의원 선거[편집]


연도
국회
정당
전체 의석수
지역구
비례
결과
1963년
6대
국민의당
2 / 175
2 / 131
0 / 44 (1.1%)
원내 5당
민주공화당
110 / 175
88 / 131
22 / 44 (33.5%)
원내 1당
1967년
7대
129 / 175
102 / 131
27 / 44 (50.6%)
원내 1당
1971년
8대
113 / 204
86 / 153
27 / 51 (48.8%)
원내 1당
1973년
9대
146 / 219[14]
73 / 146
73/73 (38.7%)[15]
원내 1당
1978년
10대
145 / 231[16]
68 / 154
77/77 (31.7%)[17]
원내 1당
1981년
11대
한국국민당
25 / 276
18 / 184
7 / 92 (13.3%)
원내 3당
신정당
2 / 276
2 / 184
0 / 92 (4.1%)
원내 5당
민주농민당
1 / 276
1 / 184
0 / 92 (1.4%)
원내 7당
민주정의당
151 / 276
90 / 184
61 / 92 (35.6%)
원내 1당
1985년
12대
148 / 276
87 / 184
61 / 92 (35.2%)
원내 1당
한국국민당
20 / 276
15 / 184
5 / 92 (9.2%)
원내 2당
1988년
13대
민주정의당
125 / 299
87 / 244
38 / 75 (34.0%)
원내 1당
통일민주당
59 / 299
46 / 244
13 / 75 (23.8%)
원내 3당
신민주공화당
35 / 299
27 / 244
8 / 75 (15.8%)
원내 4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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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4-04-06 16:06:25에 나무위키 대한민국의 보수정당/5.16 군사정변 ~ 3당 합당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당시 둘로 나뉘어 있던 민주당계 정당 중 하나였다. 나머지 하나는 제1야당 평화민주당이었다.[2] 민주공화당을 계승하는 정당이었다. 그 당시 일반인들은 이 정당이 더욱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을 정통으로 계승한다고 보았다. 다만 민주공화당 출신 인사들 중에 민주정의당으로 넘어간 경우도 많아서 둘 다 어느 정도 민주공화당을 계승한다고 봐야 할 듯 하다.[3] 사실 노태우는 5공 시절부터 민주당계 정당 측에 곧 있으면 좌파가 제도권 정치에 진입할 것이므로 보수 정당들이 대통합해야 한다고 제의했으나,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이 모두 거부해 무산된 바 있었다. 그랬던 것이 몇 년 후에 다시 추진되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다.[4] 1967년 창당된 신민당은 1960년대 민주공화당에 맞섰으나 서로 분열되어서 지리멸렬했던 야당들을 1970년대에 야당통합의 기치로 통합한 야당이다. 오늘날 자유당의 라이벌로 1955년 창당된 민주당이 인식되듯이 공화당의 라이벌로는 신민당이 인식된다. 민주한국당의 경우 관제야당으로 기능해서 제대로 된 야당으로 쳐주지 않는 편이다.[5] 정당등록은 9월 10일[6] 김종필 역시 3김 중 하나라 하지만, 당장 13대 대선에서 YS나 DJ가 받은 득표율과의 차이만 보아도 둘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20% 이상을 획득하며 단일화했을 경우 당선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회자되는 둘과 달리, 김종필은 유신정권의 잔재라는 이미지 등으로 인하여 8%밖에 획득하지 못하였다.[7]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내각제 개헌은 대통령 욕심이 있던 김영삼이 나중에 반대하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김종필은 탈당 후, 정치 성향이 완전히 달랐던 김대중의 새천년민주당과 연합을 하면서까지 내각제 개헌을 추진했으나, 결론적으로 실패하고 2004년 정계를 은퇴한다.[8] 취임식은 1980년 9월 1일.[9] 취임식은 1981년 3월 3일.[10] 간선제로 실시되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투표로 이루어졌다[11] 간선제로 실시되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투표로 이루어졌다[12] 간선제로 실시되어 대통령선거인단의 대통령선거인 투표로 이루어졌다[13] 간선제로 실시되어 대통령선거인단의 대통령선거인 투표로 이루어졌다[14] 유신정우회와 합한 숫자이다.[15]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제로 선출한 유신정우회 소속 의원이다.[16] 유신정우회와 합한 숫자이다.[17]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제로 선출한 유신정우회 소속 의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