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풀 FC/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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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리버풀 FC

1. 창단과 초창기
1.1. 리버풀 FC의 출발(1892~1896)
1.2. 왓슨 시대(1896~1915)
1.3. 양 세계 대전 사이 우승과 긴 침체기(1919~1939)
1.4. 전후 챔피언, 그러나 강등(1946~1959)
2. 붉은 제국의 최전성기
2.1. 샹클리 시대(1959~1974)
2.2. 페이즐리 시대(1974~1983)
3. 영광의 시간 뒤에 찾아온 비극
3.1. 페이건 시대(1983~1985)
3.2. 달글리시 시대(1985~1991)
4. 침체기
4.1. 수네스 시대(1991~1994)
4.2. 에반스 시대(1994~1998)
5. 중흥기
5.1. 울리에 시대(1998~2004)
5.2. 베니테스 시대(2004~2010)
5.2.1. 2004-05 시즌
5.2.2. 2005-06 시즌
5.2.3. 2006-07 시즌
5.2.4. 2007-08 시즌
5.2.5. 2008-09 시즌
5.2.6. 2009-10 시즌
6. 암흑기
7. 몰락한 명가의 부활
8. 역대 주장 목록
9. 역대 올해의 선수 목록



1. 창단과 초창기[편집]



1.1. 리버풀 FC의 출발(1892~1896)[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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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을 창단한 존 하울딩(1833~1902)

안필드의 임대인이었던 존 하울딩에 의해 창설되었다. 하울딩은 1878년에 에버튼 FC를 공동으로 창단한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울딩과 에버튼은 금전적인 이유로 큰 갈등을 겪었고 당시 에버튼 창단주 가운데 보수적인 성공회 목사도 있어서 맥주제조업으로 돈을 번 하울딩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갈등 요인도 있었다.[1] 이런 가운데 1891년 하울딩은 구장의 임대료를 100파운드에서 250파운드로 올리려고 했다. 에버튼은 이에 불만을 품고 냅다 구디슨 파크로 자리를 옮겼는데 졸지에 구장이 비어버린 바람에 난감해진 하울딩은 결국 새로 구단을 창단해버렸다. 그 구단이 바로 지금의 리버풀 FC다. 하울딩의 절친이자 축구를 좋아했던 윌리엄 바클리(William Barclay)는 원래 에버튼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친구와의 의리를 생각하여 하울딩 옆에서 구단 창단에 도움을 주었다. 같은 지역에 있는데다 이런 이유로 에버튼과는 머지사이드 더비를 이루고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는 노스웨스트 더비를 이루고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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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93 시즌 리버풀 선수단

원래는 '에버튼 FC & 애슬레틱 그라운즈'라는 이름으로 축구협회에 창단 신청을 했으나 협회는 에버튼과 이름이 겹친다 하여 불허했고 결국 리버풀 FC로 이름을 바꾸었다.[3] 에버튼이 떠나는 바람에 달랑 3명만 남았던 선수진은 바클리와 함께 존 매케나가 바클리와 함께 하울딩 옆에서 그를 도왔고 리버풀의 출발 과정에서 팀에 큰 기여를 했다. 맥케나와 바클리 공동감독 체제에서 선수단은 매케나가 스코틀랜드에서 선수들을 대거 영입해와 몇몇의 잉글랜드 선수들과 함께 구색을 갖추었고 당시 지역 리그였던 랭커셔 리그에 참가한다.[4] 창단 첫 경기 상대는 1892년 9월 1일 로더럼 타운 FC와의 친선경기였는데 200여명이 보는 가운데 7:1 승리를 거두었다. 첫 골의 주인공은 맥빈. 창단하자마자 랭커셔 리그에서 블랙풀 FC에 득실률(Goal Average)에서 앞서 우승하였고 잉글리시 풋볼 리그 참가 신청을 했는데 리버풀 옆동네의 부틀 FC이라는 축구팀이 재정 문제로 풋볼 리그에서 기권하면서 1893-94 시즌 디비전 2에 참가하게 된다. 93-94 시즌 디비전 2에서 첫 해부터 무패로 우승을 달성하면서 디비전 1 꼴찌인 맨유의 전신인 뉴튼 히스(Newton Heath)와 승강 플레이오프 격인 테스트 매치를 치르게 되었고 여기에서 2-0 승리를 거두며 창단 2년 차에 처음으로 1부 리그에 진출하게 된다. 리버풀은 나중에 맨유가 될 클럽을 꺾고 처음으로 1부리그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첫 1부리그 시즌은 혹독했는데 30경기에서 7승만을 거두며 16개 팀 중 16위로 디비전 2 1위였던 베리 FC와 테스트매치를 치르게 되었고 여기서 0:1로 패하며 한 시즌 만에 다시 강등되고 말았다.[5] 다행히 95-96 시즌 디비전 1에서 마지막 14경기 12승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스몰 히스[6]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FC와의 테스트매치를 통해 1년 만에 디비전 1 복귀에 성공했다.


1.2. 왓슨 시대(1896~1915)[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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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왓슨 감독

리버풀은 1년 만에 복귀한 1부리그에서 기존의 매케나&바클리의 공동 감독 체제를 끝내고 선덜랜드 AFC로부터 톰 왓슨(Tom Watson) 감독을 데려온다. 당시 왓슨은 감독으로는 젊은 36세였으나 이미 3번의 1부리그 우승과 FA컵 준결승 3번을 올라간 능력있는 감독이었다. 리버풀로 그를 데려오기 위해 선덜랜드 시절 연봉보다 2배나 많은 돈을 지불했다. 연봉 300파운드라는 잉글랜드 최고 연봉으로 그를 대우했다.

왓슨 감독은 선수들의 식생활에 굉장히 신경을 썼다. 아침 식사는 8시 30분을 지키고 차, 계란,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빵이나 숙성된 빵을 먹고 버터, 설탕, 감자, 우유 등은 먹지 못하게 했다. 음주는 저녁에만 허용하고 훈련은 하루 두 번, 오전 9시 45분과 오후 3시 30분. 그리고 저녁 7시 반에는 팀 동료들과 한시간씩 산책을 하게 했다.

96-97 시즌부터 리버풀은 빨간색 상의와 흰색 하의를 입고 경기에 나가기 시작했다. 리그에서는 초반 1위에 올랐고 다음해 초반까지 상승세를 이어갔으나 페이스가 떨어지며 5위로 마쳤다. 그 시즌 FA컵에서 준결승에 진출하여 결승에서 사상 첫 머지사이드 더비가 치러질 수도 있었으나 아스톤 빌라 FC에 0:3으로 패하며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15골을 득점한 핵심 공격수였던 조지 알란(George Allan)이 셀틱 FC로 이적한 97-98 시즌에는 클럽 사상 첫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승리를 거두지만 지난 시즌보다 더 떨어진 9위의 성적표를 받고 착실히 영입에 나선다.

사상 첫 슈퍼 스타라고 할 수 있는 19세의 수비수 알렉스 레이스벡(Alex Raisbeck)을 영입했고 셀틱에서 조지 알란을 1년 만에 다시 데려왔다. 또한 우측 윙어 톰 로버트슨(Tom Robertson)과 공격수 존 워커(John Walker), 그리고 잭 콕스까지 폭풍 영입을 단행했다. 로버트슨은 첫 2시즌간 1경기 빼고 다 나왔고 리버풀에서 4시즌간 141경기 34골로 활약했고 워커는 4시즌 120경기 31골을 득점했다. 콕스는 리버풀에서 12년을 보내면서 361경기 80골을 득점했다.

98-99 시즌 여러 선수들을 영입한 효과를 보며 개막전에서 셰필드 웬즈데이 FC에 4:0 대승을 거두더니 에버튼과의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창단 첫 더블을 거두는 등 창단 첫 1부리그 우승 기회가 찾아왔다. 최종전 전까지 아스톤 빌라와 승점이 같았는데 득실률에서 0.2가 밀려 2위였다. 그리고 최종전 상대가 아스톤 빌라라 이기면 우승이 가능했지만 사실상의 결승전에서 0:5 대패를 당하며 준우승을 하고 말았다. 같은 시즌 FA컵에서 2년 전에 이어 준결승에 진출했으나 셰필드 유나이티드 FC에 재경기만 2번 치른 끝에 0:1로 패해 결승 진출은 좌절되었다.

99-00 시즌 전시즌 최종전의 후유증이 너무 커서 가시지 않았는지 개막하자마자 8연패라는 충공깽스러운 성적을 기록했다. 게다가 팀의 공격수인 조지 알란이 24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요절하고 말았다. 다급한 리버풀은 시즌 중 샘 레이볼드, 찰스 새터스웨이트(Charles Satterthwaite)를 영입하며 후반기 상승세를 탔으나 전반기를 망친 탓에 10위에 머무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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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의 첫 1부리그 우승 이후
첫 1부리그 우승 당시 '리버풀 에코'에 실린 포스터[7]

1900-01 시즌 리버풀은 별다른 보강 없이 시즌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지난 시즌 후반기의 기세를 이어가며 샘 레이볼드가 시즌 초 맹활약했고 중반부 페이스가 떨어져 1위 노팅엄 포레스트 FC에 승점 9점 차 8위에 머물렀으나 막판 12경기에서 9승3무에 4실점을 기록하며 결국 첫 1부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첫 1부리그 우승의 영광도 잠시 그 이후 두 시즌을 11위와 5위[8]를 기록했다가 03-04 시즌 급기여 18팀 중 17위로 우승한지 불과 3년 만에 두 번째 강등의 아픔을 겪고 말았다.[9] 다행히 리버풀은 첫 강등 때 그랬듯이 디비전 2에서 볼튼 원더러스 FC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의 경쟁 끝에 우승하며 1년 만에 디비전 1에 복귀했다.

그리고 승격한 리버풀은 05-06 시즌 초반 3경기에서 울위치 아스날 FC-블랙번 로버스 FC-아스톤 빌라 FC에 3패 11실점으로 최악의 출발을 했고 8라운드까지 5패를 당해 16위(20팀)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후 14경기에서 11승을 거두며 새해 첫날에는 1위까지 올라갔다. [10] 이후 리버풀은 프레시턴 노스 엔드의 추격을 뿌리치며 잉글랜드 최초로 2부리그-1부리그 연속 우승에 성공했다. FA컵 준결승에도 진출했지만 에버튼에 0:2로 지며 더블은 실패했다. 리그 우승 이후 그 유명한 콥 스탠드가 안필드에 세워졌다.[11]

그러나 2번째 우승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전까지 리버풀은 준우승한 09-10 시즌을 제외하고 중하위권을 전전했다.[12] 그 와중에 13-14 시즌에는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FA컵 결승에 오르지만 번리 FC에 0:1로 져 준우승에 그쳤다. 한편 1915년에는 맨유에 2:0으로로 진 경기에서 양팀에서 7명의 선수(리버풀 4, 맨유 3)가 1915년 영국 축구 승부조작 사건에 휘말려 해당 선수들은 리그 영구 제명이라는 중징계를 받기도 했다.[13] 그 해에 19년간 팀을 이끌던 톰 왓슨 감독은 폐렴으로 타계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리그는 4년간 중단되었고 참전했던 리버풀 선수들도 몇 있었으며 그 중 윌프레드 바트롭은 전사하기도 했다.


1.3. 양 세계 대전 사이 우승과 긴 침체기(1919~1939)[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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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샤 스콧
고든 호지슨

폐렴으로 타계한 톰 왓슨 감독의 후임자는 데이비드 애쉬워스(David Ashworth)였다. 리버풀은 전쟁 후 첫 시즌이었던 19-20 시즌 10년 만에 상위권인 4위로 마쳤고 그 다음시즌에도 4위로 마쳤다. 그리고 21-22 시즌과 22-23 시즌 연속 우승에 성공하며 강자의 위치를 회복했다. 22-23 시즌 애쉬워스가 가족 문제로 팀을 떠났음에도 그의 뒤를 이은 매트 맥퀸(Matt McQueen)[14]이 팀을 잘 수습하여 첫 연속 우승을 이끌었다. 이때 크게 활약했던 선수는 골키퍼 엘리샤 스콧(Elisha Scott)이었는데 그는 42경기 31실점으로 42경기 체제 최소 실점으로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이 시즌 이후 리버풀은 또다시 무관의 세월을 보내기 시작했다.

1928년에 콥 스탠드는 입석으로 30,000명을 수용할 수 있게 되며 영국에서 가장 많은 수용인원을 가진 스탠드가 되었다. 그러나 리버풀은 성공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결국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맥퀸 감독은 사임했고[15] 클럽 비서였던 조지 패터슨(George Patterson)이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감독이 바뀌었음에도 리버풀의 운명은 여전히 중위권일 뿐이었다. 1925년부터 1936년까지 활약한 고든 호지슨(Gordon Hodgson)의 득점력도 우승 없는 세월에 빛이 바랬다.[16] 33-34 시즌엔 승점 4점 차이로 강등을 면하기도 했다.[17] 1936년에는 패터슨 감독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고 조지 케이(George Kay)가 감독이 되었다. 계속해서 중위권 이하로 저조한 시즌을 보내자 주축 선수들을 상위 구단에 넘겨주는 일이 생겼다. 리버풀에서 리그 358경기 233골을 득점했던 고든 호지슨은 1936년 아스톤 빌라로 이적했고 그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면서 리버풀은 36-37 시즌 18위로 가까스로 강등을 모면했으며 그 다음 두 시즌도 11위에 그쳤다. 그리고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7년 간 리그가 중단되었다.


1.4. 전후 챔피언, 그러나 강등(1946~1959)[편집]


전쟁 후 재개된 46-47 시즌 리버풀은 24년 만의 우승에 성공했다. 우승의 공신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0-5 대패 이후 뉴캐슬에서 이적한 앨버트 스터빈스(Albert Stubbins)와 잭 발머(Jack Balmer), 그리고 빌리 리델(Billy Liddell)이었다. 스터빈스와 발머는 각각 24골씩 득점했으며 발머는 3경기 연속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0년대와 1920년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우승 이후 두 시즌 11위와 12위에 그치며 또 추락했다. 49-50 시즌에는 개막 19경기 무패로 새해 첫날에는 선두였으나 1950년 새해가 밝은 뒤 급추락하며 8위에 그쳤다. FA컵에서는 35년 만에 사상 두 번째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아스날 FC에 2:0으로 패하며 또 준우승에 그쳤다.

FA컵 준우승 이후 리버풀은 다시 추락하기 시작했다. 조지 케이 감독은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했고 돈 월쉬(Don Welsh)가 새 감독이 되었다. 월시 감독 체제 하에서 세 시즌 연속 중위권에서 보내가 53-54 시즌 꼴찌로 50년 만에 디비전 2로 강등되고 말았다.

50년 만의 디비전 2 첫 시즌인 54-55 시즌 리버풀은 11위에 그치고 말았다. 이 시즌에 버밍엄 시티를 상대로 구단 역사상 최악의 패배인 9:1 패배를 당하기도 했다. 그 다음시즌인 55-56 시즌 3위로 발전하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2위까지만 승격이라 승격이 무산되었고 웰시는 결국 경질당했다. 과거 주장이었던 필 테일러(Phil Taylor)가 감독을 맡았고 그는 로니 모란(Ronnie Moran), 앨런 에이코트(Alan A'Court), 지미 멜리아(Jimmy Melia)를 영입했다. 그러나 그 역시 3위-4위-4위로 계속해서 리버풀을 다시 디비전 1에 올려놓는데 아깝게 실패했다. 구단 수뇌부는 1959년 1월 FA컵 3라운드에서 논리그의 우스터 시티에게 탈락하는 수모를 겪고도 끝까지 그를 신뢰했으나 59-60 시즌 중반 저조한 성적을 내자 필 테일러는 자진 사임하고 빌 샹클리가 그의 후임으로 오게 된다.


2. 붉은 제국의 최전성기[편집]


10년 가까운 2부리그를 겪은 뒤 리버풀은 1970~80년대엔 잉글랜드와 유럽을 제패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이 시기에는 특히 빌 샹클리 감독과 밥 페이즐리 감독이 큰 역할을 했다. 붉은 제국이 유럽을 제패하던 20년 되는 기간을 축구 역사상 가장 강한 팀에 자주 언급된다.

2.1. 샹클리 시대(1959~1974)[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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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샹클리 감독

리버풀은 나를 위해 만들어졌고, 나는 리버풀을 위해 만들어졌다.

빌 샹클리


He made the people happy.(그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안필드 앞에 세워진 샹클리의 동상에 새겨진 문구.


리버풀의 역사는 빌 샹클리 감독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샹클리 감독은 2부리그에 있던 리버풀에 취임하자마자 리버풀을 세계 최강 무적의 요새로 만드리라고 다짐했다. 그는 부임 당시 2부 리그에서 빌빌대던 팀의 구조를 혁신해 강팀으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경기장과 훈련장의 시스템 등 구단 내부적인 문제들을 뜯어고쳤으며 자신의 눈에 차지 않는 선수들은 과감히 방출하고[18] 스태프들을 정리하여 팀의 모양새를 갖추면서 부트 룸(Bootroom)[19]을 만들어 코치진의 결속을 강화했다. 그 결과로 3회의 리그 우승과 유럽 대항전 트로피를 비롯하여 10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리버풀이 명문 구단으로 발돋움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의 코칭 스태프로 헌신했던 밥 페이즐리조 페이건은 샹클리의 영향을 받아 후에 감독으로 그 못지 않은 엄청난 성적을 거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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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클리 감독과 위대한 코치진들.[20]

샹클리의 첫 두 시즌에 3위로 승격에는 실패했지만 팀의 현황을 점검하여 선수 24명을 방출하고 이안 캘러한, 로저 헌트 등 장차 팀의 주축이 될 선수들을 기용했다. 61-62 시즌에는 스코틀랜드에서 론 예이츠, 이안 세인트 존을 영입하면서 전력을 강화시켰다. 결국 그 노력이 결실을 맺으며 61-62 시즌 리버풀은 초반부터 개막 6연승에 11경기 10승1무로 독주하더니 안필드에서 무패를 기록하며 결국 62점의 승점으로 여유롭게 디비전 2 우승을 차지하며 8년 만에 디비전 1에 복귀하였다.

8년 만에 디비전 1에 복귀한 62-63 시즌 초반 15경기에서 8패로 하위권에서 고전하자 샹클리는 왼쪽 미드필더 윌리 스티븐슨을 영입했고 그 효과로 9연승과 함께 하위권에서 5위까지 뛰어오르고 FA컵도 준결승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60년대 리버풀의 골문을 책임지는 토미 로렌스도 이 시기에 데뷔하였다. 하지만 FA컵 준결승에서 레스터 시티 FC에 0-1로 지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고 리그에서는 당시 2위팀 토트넘에 7:2로 지는 등 막판 좋지 않은 성적을 기록하며 8위를 기록하게 되었다.

1960년대 리버풀의 주축 선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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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헌트
론 예이츠
이안 캘러한

1963년 여름 오른쪽 윙어인 피터 톰슨을 영입했였다. 63-64 시즌 출발은 9경기 승점 9점으로 느렸으나 에버튼과의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2:1로 1950년 이후 첫 승리에 성공한 뒤 상승 무드를 타기 시작했고 30경기에서 승점 47점을 따내면서 17년 만에 6번째 리그 우승과 함께 유러피언 컵 출전권 획득으로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대항전에 나가게 되었다. 리버풀의 유명한 응원가인 You'll Never Walk Alone이 안필드에서 불리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이다.

64-65 시즌 리그에서는 비록 7위에 그쳤지만 유러피언컵과 FA컵에서 좋은 결과를 냈다. 유러피언컵 2라운드 RSC 안데를레흐트와의 경기에서부터 유니폼이 기존의 상의 레드 하의 화이트가 아닌 상하의 모두 지금의 형태인 올레드로 바뀌었다. 리버풀은 첫 유럽대항전에서 준결승에 올라갔으나 우승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석연찮은 골로 실점하며 아쉽게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다. FA컵에서는 15년 만에 결승전에 진출했고 결승전에서 로저 헌트의 선제골과 이안 세인트 존의 연장전 결승골로 리즈 유나이티드 FC를 2:1로 꺾으며 첫 FA컵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65-66 시즌에는 2위 리즈에 승점 6점차로 2년 만에 7번째 리그 우승을 탈환했다. 로저 헌트는 리그 29골을 기록하며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 승선했고 리버풀 출신 최초의 FIFA 월드컵 우승자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FA컵에서는 3라운드에서 첼시 FC에게 광탈했으나 UEFA 컵위너스컵에서 첫 유럽대항전 결승전에 진출했는데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상대로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2:1로 지며 아쉽게 더블에는 실패하고 준우승으로 마무리했다.

하지만 3시즌 연속 우승트로피 이후 6년 간의 무관의 세월을 보냈다. 66-67 시즌 에버튼을 꺾고 채리티 실드에서 우승하기는 했지만, 유러피언 컵 2라운드에서 요한 크루이프AFC 아약스에 7:3으로 무릎을 꿇었고 리그에서는 마지막 11경기에서 2승만을 기록하며 라이벌 맨유가 우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다음 시즌에는 챔피언 맨체스터 시티 FC에 승점 3점이 뒤진 3위로 마감했고 FA컵과 리그컵, 페어스컵 모두 무관이었다. 게다가 라이벌 맨유가 잉글랜드 최초의 유러피언컵 챔피언이 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68-69 시즌에도 리그에서는 리즈에 승점 6점이 부족한 2위, 3개의 컵대회 모두 조기 탈락으로 여전히 무관에 그쳤다. 12시즌간 333경기에 나선 레프트백 게리 번(Garry Byrne)이 은퇴했는데 샹클리는 그의 은퇴를 대비하여 미래의 주장이 되는 엠린 휴즈를 블랙풀에서 데려와 등용하고 골키퍼의 토미 로렌스의 후계자로 레이 클레멘스를 스컨소프 유나이티드에서 영입하여 컵대회에서 중용하기도 했다.

69-70 시즌 리그 초반 9경기에서 7승2무를 기록했지만 최종 순위는 5위에 그쳤다. 챔피언은 머지사이드 라이벌 에버튼. 나머지 컵대회들도 조기 탈락하며 4시즌 연속 무관이 되었고 FA컵 8강에서 디비전 2의 왓포드 FC에 패하자 샹클리 감독은 가차없이 이안 세인트 존, 론 예이츠, 토미 로렌스 등 노장 선수들 대신 레이 클레멘스, 레리 로이드, 알렉 린드세이 등 젊은 선수들을 기용하기 시작했다. 리버풀에서 286골을 넣으며 당시 기준으로 리버풀 최다 득점자였던 로저 헌트도 시즌 중반에 볼튼으로 떠났다.

70-71 시즌 전 시즌부터 기용했던 젊은 선수들 덕에 평균연령이 22세가 되었다. 21세의 공격수 존 토샥카디프 시티 FC에서 11만 파운드라는 클럽 레코드로 영입하고 윙어 스티브 헤이웨이를 아일랜드에서 영입했다. 젊은 선수들이 주축이 된 리버풀은 FA컵 결승전과 인턴시티페어스컵 준결승에 오르지만 각각 리그-FA컵 더블을 달성한 아스날과 리즈에 무릎을 꿇으며 다시 한 번 무관이 되었다. FA컵 준우승 이후 샹클리는 스컨소프 유나이티드 FC에서 20세의 케빈 키건을 영입했다. 당초 키건은 미드필더였고 30줄에 접어드는 캘러핸의 대체자로 여겨졌으나 샹클리 감독은 그의 빠른 스피드를 알아채며 토샥과 함께 스트라이커로 데뷔시켰다.

1970년대 리버풀의 공격 듀오
파일:케빈 키건.jpg
파일:존 토샥.jpg
케빈 키건
존 토샥

71-72 시즌 새로 영입된 키건은 데뷔전이었던 노팅엄 포레스트와의 홈경기에서 전반 12분 만에 선제골을 기록하며 홈팬들 앞에서 인상깊은 데뷔전을 가졌다.[21] 리버풀은 중반 이후 5연승과 8연승을 기록하며 더비 카운티, 리즈 유나이티드, 맨체스터 시티와 치열한 우승경쟁을 펼쳤고 리그 우승이 눈앞에 왔으나 브라이언 클러프가 이끌던 더비 카운티와의 41라운드 단두대매치에서 0-1로 졌고 더비가 경기를 다 치르고 리즈와 리버풀이 1경기씩 남은 가운데 울버햄튼이 리즈를 2:1로 잡아주며 리버풀은 아스날과의 원정 최종전에서 승리하면 더비를 제치고 극적 우승할 수 있었으나 후반 43분 존 토샥의 득점이 취소되며 0-0으로 무승부, 결국 더비에게 1점차로 우승을 내주고 말았다. 위너스컵과 FA컵, 리그컵 모두 조기 탈락하며 6시즌 연속 무관이 되었으나 18세의 센터백 필 톰슨이 데뷔하는 등 왕조를 세우기 위한 기반을 다지는 작업은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1972년 여름에는 노팅엄에서 피터 코맥(Peter Cormack)을 토샥의 이적료와 똑같은 11만 파운드로 영입했는데 샹클리는 이를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라고 언급했다. 72-73 시즌에는 샹클리의 6시즌 연속 무관이라는 인고의 리빌딩 작업이 마침내 그 결실을 맺었다. 지난 시즌 눈앞에서 놓친 리그에서 2위 아스날을 승점 3점 차로 따돌리고 7년 만에 8번째 우승을 했고 UEFA컵에서는 디펜딩 챔피언 토트넘 홋스퍼 FC를 준결승에서 원정다득점 끝에 승리한 뒤 결승에서 당대 분데스리가 최강팀이었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상대로 1차전 홈에서 키건의 2골로 3-0 승리, 2차전 원정 0-2패, 합계 3-2로 구단 첫 유럽 대항전 우승을 달성했다. 이는 잉글랜드 팀 최초로 리그와 유럽 대항전 동시 우승이기도 했다. 그리고 리버풀 역사상 첫 더블이었다.

73-74 시즌 리그에서는 개막 29경기 무패라는 어마어마한 포스를 낸 돈 레비의 리즈에 밀려 준우승에 머무르고 유러피언 컵에서는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에 2라운드에서 탈락했으나 FA컵에서 결승전에 진출하여 뉴캐슬 유나이티드 FC를 키건의 2골과 헤이웨이의 골로 3:0으로 꺾고 9년 만에 2번째 FA컵 우승을 기록하게 되었다. 빌 샹클리 감독은 FA컵 우승과 레이 케네디를 아스날에서 데려오는 것을 끝으로 이제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하여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자신의 오른팔인 밥 페이즐리에게 자신이 완벽하게 리빌딩시킨 찬란한 유산을 물려주고 명예롭게 은퇴하여 리버풀의 전설적인 감독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2.2. 페이즐리 시대(1974~1983)[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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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페이즐리 감독

샹클리 감독이 은퇴하고 수석코치였던 밥 페이즐리가 감독이 되면서 리버풀의 최고 전성기가 시작된다. 70년대에는 당시 간판 공격수이자 탁월한 피니셔, 케빈 키건과 그와 함께 했던 크랙 성향의 스티브 헤이웨이, 이 둘을 뒤에서 받쳐주며 킬링 패스를 뿌려주던 테리 맥더모트로 구성된 공격 트리오가, 80년대에는 감히 세계 최고의 조합이라 해도 손색없는 수네스-달글리시-러시 공격 트리오가 위용을 떨쳤다.

15년의 샹클리 체제가 끝나고 페어즐리호가 출범한 74-75 시즌 필 닐테리 맥더모트를 영입했고 초반에는 리그 5승1무로 순항했지만 1위부터 10위까지 승점 8점 차에 불과한 치열한 레이스에서 우승팀 더비에 승점 2점 부족한 준우승으로 마쳤고, 컵위너스컵은 2라운드에서 헝가리의 페렌츠바로시에게 조기 탈락했고, FA컵과 리그컵 모두 4라운드에서 탈락하며 3년 만에 무관으로 마쳤다. 컵위너스컵 1라운드에서 노르웨이의 스트룀스고세 IF를 11:0으로 대파하여 클럽 역사상 최다 점수차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75-76 시즌 개막전에서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에 0:2로 패하며 불안하게 시작했다. 하지만 리버풀은 후반기 승점을 무섭게 쌓기 시작했고 마지막 9경기에서 8승1무를 기록하며 QPR을 승점 1점차로 제치고 페어즐리 감독의 첫 우승 트로피인 9번째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우승하려면 반드시 이겨야 했던 최종전 울버햄튼 원정에서 후반 31분까지 1:0으로 끌려가다가 막판 14분 동안 3골을 몰아치며 우승할 수 있었다. 국내 컵대회에선 조기 탈락했지만 UEFA컵에선 결승에 진출했는데 클뤼프 브뤼허 KV와의 결승전은 극적이었다. 안필드에서 열린 1차전에서 전반에 2골을 먼저 실점했으나 케네디와 케이스, 키건의 3골이 6분 만에 나오며 3:2 역전승에 성공했고, 2차전 원정에서는 이른 시간 실점했으나 키건이 동점골을 넣으며 1:1 무승부, 합계 4:3 승리로 3년 만에 두 번째 UEFA컵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3년 전에 이어 더블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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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이어를 들어올리는 리버풀[22]

76-77 시즌 전 키건이 유러피언컵 우승에 대한 열망을 드러낸 가운데 리그에서는 초반부터 선두에 올랐고 리그 2연패와 함께 10번째 리그 우승에 선착하는데 성공했다. 유러피언컵에서는 승승장구한 끝에 로마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4년전 UEFA컵 결승 상대인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를 만나 맥더모트와 스미스, 닐의 득점으로 3:1 승리를 거두고 첫 유러피언컵 우승을 거머쥐었다. 아쉽게도 유러피언 컵이 열리기 며칠 전 FA컵 결승전에서 아쉽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1:2로 패배해 준우승하며 잉글랜드 첫 유러피언 트레블 달성에 실패했고 리그와 유러피언컵 더블에만 만족해야 했다.[23] 유러피언컵 우승 꿈을 이룬 케빈 키건은 5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남기고 함부르크 SV로 이적했다.


77-78 시즌 전 키건의 대체자로 셀틱 FC에서 케니 달글리시를 영국 클럽간 레코드인 44만 파운드에 영입했다. 여기에 더해 수비수 알란 한센을 스코틀랜드의 파트릭 티슬로부터 데려오고 겨울에는 미들즈브러에서 그레이엄 수네스를 영입했다. 달글리시는 적응기 없이 첫 시즌부터 리그 20골 포함 전체 대회 31골을 기록하며 키건을 생각나지 않게 했다. [24] 리그와 리그컵에서 노팅엄 포레스트에게 우승을 내주었고 FA컵에서도 첫 경기에서 첼시에 탈락했지만 2년 연속 유러피언컵 결승에 진출해 런던 웸블리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2년 전 UEFA컵 결승전 상대였던 클뤼프 브뤼허를 만나 이번에도 1:0 승리로 2년 연속 유러피언컵을 우승하는데 성공했다. 이 우승으로 유러피언컵을 연속으로 우승한 유일한 잉글랜드 팀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78-79 시즌 유러피언 컵 3연패에 도전했으나 1라운드에서 디비전 1 우승팀 노팅엄 포레스트를 만나 2:0으로 광탈하고 말았다.[25] 리그컵에서도 3라운드에서 셰필드 유나이티드에게 조기 탈락했다. FA컵에서도 준결승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재경기 끝에 탈락했다. 하지만 리그에서는 역대 최고의 시즌을 보냈는데 개막 6연승과 11경기 10승1무를 기록하면서 초반부터 앞서나갔고 12라운드 에버튼 원정에서 0:1로 패하며 무패가 깨졌으나 42경기 30승8무4패를 기록하며 승점 68점으로 68-69 시즌 리즈가 기록했던 67점의 기록을 경신하며 11번째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더 놀라운 기록은 실점 기록이었는데 42경기에서 단 16실점만 내주며 최소 실점 기록까지 세웠다. 안필드에선 무패와 함께 단 4점만 실점했다.

79-80 시즌 초반 사우스햄튼과 노팅엄 포레스트에 패배하며 흔들렸으나 1월에 선두에 올라간 뒤 끝까지 1위를 지키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승점 2점차로 따돌리며 12번째 리그우승을 기록했다. 홈에서는 2년 연속 무패를 기록했고 단 8실점만 허용했다. 아쉽게도 유러피언컵에서 2년 연속 1라운드에서 탈락했고 이번에는 소련의 디나모 트빌리시에 덜미를 잡혔다. FA컵과 리그컵 모두 준결승에 올라갔으나 각각 아스날과 노팅엄 포레스트에 탈락했다. 1980년 4월에는 체스터 시티로부터 18세의 공격수 이안 러쉬를 영입했다.

80-81 시즌 리그에서 8번의 패배[26]와 17번의 무승부를 기록하며 16년 만의 최악의 성적인 5위로 마쳤지만 리그컵에서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를 상대로 재경기 끝에 첫 번째 우승을 거두었고 파리에서 열린 레알 마드리드 CF와의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도 케니 달글리시의 결승골로 세 번째 우승에 성공했다.[27] 이 시즌을 끝으로 주전 골키퍼 레이 클레멘스가 토트넘으로 이적했다. 클레멘스의 대체자로 브루스 그로벨라가 영입되었다.

81-82 시즌 승점 3점제가 도입된 리그 박싱데이 시점 17경기에서 6승만을 거두며 12위에 그쳤다. 페어즐리는 주장직을 톰슨에서 수네스에게 넘겼고 후반기에 11연승으로 급격한 상승세를 타며 2년 만에 리그 우승을 탈환했다. 13번째 리그 우승 FA컵에서는 당시 디비전 2였던 첼시 FC에 5라운드에서 탈락하고 디펜딩 챔피언 자격이었던 유러피언컵에서도 8강에서 PFC CSKA 소피아에게 떨어졌지만 리그컵에서 2년 연속 결스전에 올라가 토트넘과의 결승에서 로니 웰란이 종료 3분 전 극적인 동점골로 연장전으로 끌고 간 뒤 역전골까지 넣고 러시가 쐐기골을 넣으며 3:1로 리그컵 2년 연속 우승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 해 일본 도쿄에서 열린 FIFA 클럽 월드컵의 전신인 인터콘티넨탈컵에서 지쿠의 대활약으로 인해 브라질의 CR 플라멩구에 0:3으로 지며 우승에 실패했다.

밥 페이즐리가 은퇴를 예고한 82-83 시즌 리그에서 2위 왓포드 FC에 11점 차로 넉넉하게 앞서며 연속우승에 성공했다. 14번째 리그 우승 FA컵과 유러피언컵은 각각 브라이튼 호브 알비온과 폴란드의 비제프 우치에 5라운드와 8강에서 탈락했지만 리그컵에서 3년 연속 결승에 올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연장전 끝에 웰란의 결승골로 2:1로 꺾고 3년 연속 리그컵 우승을 거두었다.

페이즐리 감독은 9년의 재임 기간 동안 리버풀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조직력을 바탕으로 리그 우승 6회, 유러피언컵 우승 3회, UEFA컵 우승 1회, 리그컵 우승 3회, 채리티 실드 우승 6회, UEFA 슈퍼컵 우승 1회라는 기록을 세우며, 샹클리보다 더 월등한 모습으로 잉글랜드의 어떤 팀도 리버풀의 위상을 넘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총 20개의 우승 기록으로 9년의 시간 동안 시즌마다 트로피 한개씩은 꼭 따내는 저력을 보였다. 유일하게 따내지 못한 우승컵은 FA컵 하나였다.


3. 영광의 시간 뒤에 찾아온 비극[편집]



3.1. 페이건 시대(1983~1985)[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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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페이건 감독

83-84 시즌 이후 페이즐리 감독이 떠나고 어시스턴트 코치인 조 페이건이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리그 - 리그컵 - 유러피언컵 우승으로 구단 역사상 첫 트레블 달성을 이뤄냈다.[28] 리그 3연패는 허더즈필드 타운 AFC와 아스날만 기록했던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으며 이안 러시는 리그 32골을 포함해 전 대회 47골을 득점해였다. 리그컵 4년 연속 우승이었고 머지사이드 라이벌 에버튼을 상대로 재경기 끝에 수네스의 결승골로 우승을 기록했다. 유로피언 컵은 AS 로마를 상대로 로마의 홈인 스타디오 올림피코에서 열렸는데 연장전까지 1:1로 승부를 가리지 못해 승부차기에서 브루스 그로벨라의 활약으로 4:2로 승리, 4번째 유러피언 컵 우승을 거둔다.[29]

그러나 중원의 장군 그레이엄 수네스UC 삼프도리아로 이적하는 바람에 전력에 구멍이 생겨 84-85 시즌에 라이벌인 에버튼에게 밀려 1위 우승컵을 내주어야 했다. 4연속 우승을 기록한 리그컵에서도 조기 탈락했으며 FA컵에서도 준결승에서 1921년 이후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넘지 못하고 탈락했다. 그래도 새로 영입된 덴마크인 선수 얀 묄비와 존 워크의 활약으로 그 해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 진출하여 유벤투스 FC와 경기를 했는데, 이 경기는 미셸 플라티니의 결승골로 1:0 유벤투스의 우승으로 끝났지만 진정한 문제는 관중석에 있었다. 경기 도중, 리버풀 훌리건들이 유벤투스 서포터 자리로 달려들어 헤이젤 참사가 일어나자 그 책임을 물어 7년간 유럽 대항전[30]에 출전이 금지되는 중징계를 받게 되었다.[31] 결승전이 열리기 전 은퇴를 예고했던 조 페이건 감독의 후임으로 케니 달글리시가 플레잉 코치로 형식으로 감독을 맡게 되었다.


3.2. 달글리시 시대(1985~1991)[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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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니 달글리시 감독

페이건 감독의 은퇴로 플레잉코치 형식으로 새 감독이 된 달글리시는 오랫동안 활약한 필 닐과 앨런 케네디 대신 스티브 니콜과 짐 베글린을 기용하였는데 새 팀을 구성하면서 적응 기간을 거친 후 후반기 11경기 10승을 기록하면서 에버튼을 제치고 2년 만에 16번째 리그 우승을 탈환했고 머지사이드 더비로 열린 FA컵 결승에서는 에버튼에게 3:1 역전승을 거두며 12년 만의 FA컵 우승이자 역사상 첫 리그-FA컵 더블을 달성했다.

86-87 시즌 이안 러시는 유벤투스와 계약한 뒤 리버풀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밝혀 1년 임대로 곧바로 돌아왔지만 리버풀은 그의 맹활약에도 무관에 그쳤다. 리그에서는 에버튼에 9점차로 뒤진 준우승에 머물렀고 FA컵은 3라운드에서 루튼 타운에 재경기 2차례 끝에 탈락, 리그컵에서는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아스날을 상대로 러시의 선제골에도 불구하고 2:1 역전패를 당했다. 러시가 떠나는 때를 대비해 리버풀은 존 올드리지를 영입했다.

87-88 시즌 러시가 임대 복귀로 유벤투스로 떠난 가운데 공격력 강화를 위해 피터 비어즐리존 반스를 영입했다. 리버풀은 개막 28경기 무패를 기록한 끝에 리그에서 단 2패만 허용하며 2년 만에 리그 17번째 정상을 탈환했다. 여기에 더해 2년 전에 이어 FA컵 결승에 올라 더블에 도전했으나 풋볼 리그 진입 11년 차의 윔블던 FC에 0:1로 충격패를 당해 리그 우승 하나에 만족해야 했다.

88-89 시즌 유벤투스로 떠난 이안 러시가 향수병을 호소하며 리버풀로 컴백했다. 리버풀은 1989년 1월까지 리그에서 고전하며 1위 아스날에 승점 9점 뒤져있다가 4월 들어 아스날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1989년 4월 15일 셰필드 웬즈데이 FC힐스버러 스타디움에서 FA컵 4강전을 치렀는데 여기서 경기는 3:1로 이겼지만 앞서 헤이젤 참사와 더불어 축구 역사상 최악의 사고인 힐스버러 참사가 발생하였다.

이 참사가 벌어지면서 96명의 콥이 운명했는데, 영국 대표 황색 언론인 더 선에서는 콥들이 심지어 노상방뇨, 갈취, 폭행을 했다는 수많은 허위 기사를 게재하며 비난을 했다.[32] 현재도 콥들은 이런 과거 때문에 더 선에 아직도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힐스버러 참사 참고.

힐스버러 참사에도 불구하고 1989년 5월 20일 결승에서 에버튼에게 연장전 끝에 러시의 2골로 3:2로 승리하며 4번째 FA컵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참사로 인해서 연기되었던 경기를 치렀는데 최종전 전까지 리버풀은 아스날에 승점 3점, 골득실 4가 앞선 1위였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5월 26일 안필드에서 열린 최종전에서 두 팀이 만나게 되었다. 리버풀은 2점차로 지지만 않으면 우승을 할 수 있는 상황. 여기서 우승하면 지난시즌에 이루지 못했던 더블이 가능했다.

그러나 리버풀의 홈경기임에도 아스날은 후반 7분 공격수 앨런 스미스의 선제골로 우승에 대한 불씨를 살렸다. 경기 종료 직전까지 리버풀은 0:1 스코어를 유지하며 우승을 눈앞에 두었지만 후반 추가시간 아스날의 마이클 토마스가 추가골을 득점하며 경기는 아스날의 2:0 승리로 끝났고 리버풀은 아스날에 골득실은 같았으나 다득점에서 뒤져 결국 통한의 준우승을 기록하고 말았다.[33]

89-90 시즌 존 올드리지가 레알 소시에다드로 떠난 가운데 이안 러시가 주전 공격수로 복귀했고 11월까지 리그 4패를 기록했으나 그 이후 단 1패만 허용하며 여유롭게 18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FA컵에서 준결승에 올라 다시 한 번 더블에 도전했으나 리그에서 9:0으로 깔아뭉갰던 크리스탈 팰리스 FC에 연장전 끝에 4:3으로 지며 탈락했다.[34]

헤이젤 참사로 유럽 축구 연맹 주관 대회 출전권을 일시 박탈 당한 리버풀은 리그에선 1,2위만을 다투는 등 강팀의 면모를 보였지만, 힐스버러 참사까지 터진 이후에는 감독도, 선수들도 트라우마를 호소하며 한두명씩 점점 팀을 이탈해 가면서 리버풀 구단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90-91 시즌 개막 8경기에서 전승을 거두며 기분좋게 시작했고 12월 아스날에 3:0으로 지기 전까지 무패행진을 기록했다. 그러나 무패가 깨진 이후 팰리스에게 패배를 당하는 등 좋지 않은 성적으로 선두 자리를 1991년 1월에 내주었다. 2월 FA컵 에버튼과의 재경기에서 4:4로 무승부를 거두자 극심한 스트레스와 피로에 시달린 케니 달글리시 감독은 자진 사임을 선언했다. 코치였던 로니 모란이 달글리시 대신 감독 대행을 맡았지만 아스날을 추격하지 못하고 7점 차 뒤진 2위로 마감했다.


4. 침체기[편집]



4.1. 수네스 시대(1991~1994)[편집]


91-92 시즌 리버풀의 주장이었던 그레이엄 수네스가 새 감독이 되었다. 선덜랜드 AFC를 2:0으로 이기고 FA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지만 리그에서는 6위에 그치고 헤이젤 비극 이후 처음으로 출전한 유럽대항전 UEFA컵에서도 제노아 CFC에 16강에서 조기 탈락하며 전처럼 강팀으로서의 리버풀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으며, 더 선과의 인터뷰 논란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빌 샹클리가 남긴 최대의 유산 중 하나인 부트 룸도 기자회견실을 만든다는 이유로 사라졌다.

프리미어 리그가 출범한 92-93 시즌에는 3월 무렵에 15위를 찍는 충격적인 성적을 기록했지만 이안 러시의 분전으로 간신히 6위로 마감했다. UEFA컵과 위너스컵, 리그컵, FA컵에서도 모두 조기 탈락했다. 유럽대항전에도 당연히 나가지 못했다.

그리고 93-94 시즌에는 노팅엄에서 나이젤 클러프를 사며 초반에는 3연승으로 잘 나가는 듯 했지만 로테이션의 부재로 시즌 중반에 DTD를 시전하고 FA컵에서 하부리그의 브리스틀 시티에 충격패를 당했다. 결국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수네스는 짤렸고 로이 에반스가 감독으로 왔지만 수네스의 똥을 치우지 못하고 1962년 승격 이후 최악의 순위인 8위(...)를 찍고 말았다. 그리고 이 시즌을 끝으로 입석 콥 스탠드는 막을 내리고 다음 시즌부터 전좌석으로 바뀌게 되었다.[35] 그나마 유스에서 배출한 로비 파울러가 리그컵 3라운드 1차전 풀럼을 상대로한 데뷔전에서 골을 넣고 2차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암울한 콥들의 새 희망이 되어주었다.


4.2. 에반스 시대(1994~1998)[편집]


94-95 시즌 로비 파울러, 존 반스, 이안 러쉬, 롭 존스, 스티브 맥마나만, 제이미 레드냅 등을 앞세워 리그 4위로 달글리시 이후 최고 성적을 기록하고 2부리그 볼튼을 맥마나만의 2골로 2:1로 꺾고 풋볼 리그 컵(당시 코카콜라 컵)에서 우승했다. 이 시즌을 끝으로 로니 웰란과 브루스 그로벨라, 니콜이 팀을 떠났다.

95-96 시즌 노팅엄을 3위로 이끈 스탄 콜리모어를 850만 파운드에 영입했고 프리미어리그에서 3위로 마친 뒤 FA컵 결승에 오르지만 이번에도 맨유에게 후반 40분 칸토나의 결승골로 1:0으로 패배했다. 그리고 이안 러시의 리버풀에서의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

96-97 시즌에는 UEFA 유로 1996에서 체코의 준우승을 이끌고 스타덤에 오른 파트리크 베르게르를 영입했고 새해가 시작되는 시점에 리그 1위에 오르며 간만에 리그 우승에 도전했으나 후반기에 페이스가 떨어지며 3위로 마감했다. 위너스컵에서 준결승에 오르지만 파리 생제르맹 FC에게 탈락했다. 이 시즌에 리버풀 유스인 마이클 오언제이미 캐러거가 데뷔했고 오웬은 득점까지 했다. 이 시즌을 끝으로 존 반스뉴캐슬 유나이티드 FC로 떠났다.

97-98 시즌 반스의 대체자로 폴 인스가 합류한 가운데 프리시즌에 주전 공격수 로비 파울러를 무릎 부상으로 잃었다. 하지만 마이클 오언이 혜성같이 난세영웅으로 등장하여 36경기 18골을 득점하며 공동 득점왕이 되는 활약을 펼쳤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3위로 마감했으나 여전히 우승 경쟁과는 거리가 멀었다.

로이 에반스 체제의 리버풀은 전임 수네스와는 달리 꾸준히 리그 상위권을 기록했지만 당시 EPL의 끝판왕이었던 맨유의 아성을 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그는 리더십이 부족하여 선수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맥마나만, 파울러 등 주축 선수들은 훈련 대신 머리, 여자, 클럽 등에 관심을 가졌다. 언론에선 리버풀 선수들을 당시 영국 최대 인기 걸그룹 스파이스 걸스를 본따 '스파이스 보이스'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98-99 시즌을 앞두고 공동 감독으로 구단 최초 외국인 감독인 프랑스 출신의 제라르 울리에가 취임하여 세계적인 수준의 팀을 만들고자 시도했다. 울리에는 선수 훈련과 관리 등을 맡고 에반스는 경기 지휘를 맡는 것인데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처럼 공동 감독 체제는 리버풀에 악재로 작용했다. 공동 감독 체제에서 리버풀은 중위권으로 내려앉았고 급기야 UEFA컵에서 셀타 비고에 충격패를 당하기도 했다. 결국 로이 에반스는 1998년 11월에 공동 감독직을 내려놓고 사퇴했고 제라르 울리에가 단독으로 감독이 되었다. 잔여 시즌은 7위로 마감하며 유럽대항전 진출에 실패했다.


5. 중흥기[편집]



5.1. 울리에 시대(1998~2004)[편집]


1998년에 울리에가 취임한 이후 로이 에반스와 공동 감독을 이뤘으나 팀은 부진했고 선수들은 축구 외의 요소에 빠지며 선수 관리가 개판이었다. 울리에가 단독 감독이 된 후 해이해진 팀 기강을 강화하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주축 선수들을 과감히 방출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 동안 사미 히피아, 디트마 하만, 블라디미르 스미체르, 지미 트라오레, 에릭 메이여르, 에밀 헤스키 등 당시 새로운 얼굴들을 영입하고 마이클 오언, 제이미 캐러거, 스티븐 제라드 등 유스 출신 선수들을 중용한다. 99-00 시즌에는 최종전에서 브래드퍼드 시티에 덜미를 잡혀 3위에서 4위로 미끄러졌다.[36] 하지만 리빌딩의 결과가 빛을 발해 2000-01 시즌에 제라르 울리에 감독이 미니 트레블을 기록했다. 저 미니 트레블은 FA컵을 빼면 UEFA컵이나 캐피탈 원 컵[37]같이 빅클럽들이 노리기엔 다소 부족한 컵이었고 중요한 리그나 챔스에서는 그렇지 못했기에 그다지 대단한 평가를 받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세 개의 메이저 트로피를 들어올린 것은 왠만한 강팀들도 흔히 세울 수 있는 업적이 아니기에 팬들이 새로운 전성기에 대한 기대감을 갖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울리에 시절에는 울리에 3종 셋트(엘 하지 디우프, 브루노 셰루, 살사프 디아포) 등 수많은 먹튀가 나왔기에 02-03, 03-04 시즌은 콥들에겐 악몽의 시절로 기억된다. 01-02 시즌 리그 준우승 후 02-03 시즌 초중반에 9승 3무로 12경기 무패를 달성하며 리그 1위를 일시적으로 차지했으며, 동 시즌 리그컵에서 라이벌 맨유를 결승에서 2-0으로 꺾고 우승했었을 때까지가 가장 잘 나갔다. 사실 이 시절의 리버풀은 울리에 감독의 심장 수술 이전까지는 잘 나갔다가 그 후가 문제였으며, 플레이 면에서도 스트라이커 오언에 너무 몰빵해 경기 흐름이 너무 단조롭고, 수비가 약해 축구 전문가들의 비판을 받기에 충분했다.

02-03 시즌 개막 12경기 무패 이후 4연패가 포함된 11경기 5무 6패의 무승으로 7위로 추락했고 29라운드에서 36라운드까지 7승을 거두며 4위 첼시와 승점 동률을 이루며 추격했으나 마지막 홈경기였던 37라운드 승격팀인 맨시티와의 홈경기에서 지난시즌까지 임대로 활약했던 니콜라 아넬카에게 동점골과 역전골을 연거푸 실점하며 충격적인 역전패를 당해[38]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에 패한 첼시를 역전하는데 실패했고, 반드시 이겨야 했던 첼시와의 최종전 단두대 매치에서도 예스페르 그룅키에르의 대활약으로 또 다시 2:1 역전패를 당하며 첼시에 4위를 내주고[39] UEFA컵으로 밀려났다.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발렌시아 CF에 2번 모두 패한 것 때문에 FC 바젤에 밀려 조 3위로 UEFA컵으로 갔고 8강에서 셀틱 FC를 상대로 홈에서 0 대 2로 무기력하게 져 탈락했다.

03-04 시즌에는 측면 윙어 보강을 위해 리즈로부터 해리 큐얼을 사서 4위로 챔스 진출권을 얻었으나 우승팀 아스날과의 승점차가 무려 30점이나 됐고, 아스날-첼시-맨유 3강을 제외하고는 매 라운드마다 순위가 바뀌던 혼돈의 리그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아스톤 빌라 FC, 찰튼 애슬레틱 FC 등과 함께 서로 니가가라 챔스를 시전한 끝에 겨우 얻어낸 4위라서 팬들에게 큰 감흥을 얻지 못했다. 우승팀 아스날보다 꼴찌팀 울버햄튼과의 승점차가 더 적었다.[40] FA컵과 리그컵 역시 조기에 각각 포츠머스와 볼튼에 패해 떨어졌고, UEFA컵에서도 16강에서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를 상대로 디디에 드록바에게 1,2차전 1골씩 실점하며 합계 2대3으로 패해 탈락했다. 결국 무관으로 시즌을 마친 탓인지 변화를 꾀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경질되었다.


5.2. 베니테스 시대(2004~2010)[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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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베니테스 감독

울리에의 후임으로 2004년 여름 발렌시아 CF를 두 차례 라리가 우승과 UEFA컵 우승을 이끌었던 라파엘 베니테스가 선임되었다. 라파가 재임한 6년은 붉은 제국 시절 이후 위르겐 클롭 부임 전까지 리버풀의 중흥기로 꼽힌다. 부임 첫 해 리그 성적은 좋지 못했지만 이스탄불의 기적으로 회자되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21년 만에 5번째 빅 이어를 들어올리면서 리버풀을 다시금 유럽 최정상급 클럽으로 복귀시켰던 시기였다. 리그에서 꾸준히 빅 4의 일원으로 있으면서 챔피언스리그에서 수많은 명승부를 만들어내며 이때 리버풀에 입문한 국내 팬들이 많다. 그러나 2007년 초 미국의 악덕 구단주인 조지 질레트와 톰 힉스의 클럽 인수 이후 재정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페르난도 토레스를 영입하기 위해 여러 선수들을 팔아 자금을 충당해야했고 팀의 기반은 점점 약해져갔다. 그리고 2009년 샤비 알론소의 레알 이적 이후 급격한 전력 악화를 겪으며 2위에서 7위로 추락해버렸고 그렇게 베니테스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5.2.1. 2004-05 시즌[편집]


베니테스는 부임하자마자 리버풀의 주축 선수 두 명인 스티븐 제라드마이클 오언을 팀에 잔류시켜야하는 과제를 떠안았다. 제라드는 돈으로 무장한 주제 무리뉴첼시 FC의 러브콜을 받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팀에 남았는데 오언은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희망하며 갈락티코 군단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41] 대니 머피와 마르쿠스 바벨도 팀을 떠난 가운데 베니테스는 자신의 모국인 스페인에서 대거 선수를 영입했다. 사비 알론소루이스 가르시아, 호세미, 안토니오 누녜스를 데려왔으며, 오언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리그 1 득점왕의 프랑스 대표 공격수 지브릴 시세를 14.5M에 영입하며 과거 오언의 역습에 의존했던 공격전술을 갈아치우고자 했다.

활발한 이적시장을 보냈음에도 리그에서의 성적은 좋지 못했다. 제라드, 리세, 피넌, 캐러거 등 좋은 선수가 남아있고 알론소와 가르시아가 적응기 없이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키웰, 시세 등등 주축 선수들이 줄줄이 부상병동에 시달렸고 하만과 스미체르는 노쇠화를 보이고 있었다. 이 때문에 트라오레, 누녜즈, 호세미, 디아오, 비스칸, 시나마-퐁골르, 워녹, 멜러, 포터, 르탈렉 등과 같은 1군 검증도 제대로 안된 선수들이 주전으로 뛰는 경기가 허다했다. 제이미 캐러거의 경우에도 이전에는 멀티 수비수로 나왔지만 이때부터 스티븐 앙쇼의 노쇠화로 인해 전력외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주전 센터백으로 사미 히피아와 듀오를 이루던 시즌이었다.

골키퍼 포지션도 혼란이 심했는데 예지 두덱이 예능감을 뽐내며 두덱과 크리스 커클랜드, 스콧 카슨이 번갈아 골키퍼 장갑을 꼈다. 같은 시기 자금난에 시달리던 터라 탁신 친나왓 태국 총리가 팀을 인수하려 하자, 리버풀 지역사회는 물론 각종 언론에서도 해당 문제를 거론하며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결국 구단측은 팀은 진정으로 그 팀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다며 매각을 거부했다. 탁신은 이후 맨시티를 인수하게 된다.

그러한 이유로 리그에서 크게 고전했고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이며 지난 시즌보다 낮고 에버튼에도 밀린 5위를 기록했다. 리그에서 최다골을 기록한 선수가 밀란 바로시의 9골일 정도로 득점력 부재로 고전했다. 리그에서의 기복있는 성적과는 별개로 리그컵에서 결승에 오르며 첫 우승컵을 들어올릴 기회를 얻었고 결승전에서 첼시를 상대로 종료 10분 전까지 1-0으로 앞서갔지만 제라드의 자책골로 통한의 동점을 내준 뒤 연장전에서 2:3 분패로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FA컵에서도 3라운드에서 2부리그 번리 FC에 1-0으로 패배하며 광탈당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베니테스의 리버풀은 초라하게 첫 시즌을 보내는가 싶었지만 후술할 챔피언스리그에서 놀라운 반전의 연속을 만들어내며 04-05 시즌은 성공적인 시즌이 됐다.


5.2.1.1. 이스탄불의 기적[편집]

베니테즈의 리버풀을 설명하는데 빠지면 안 될 것이 바로 04-05 시즌 챔피언스 리그일 것이다. 베니테스의 부임 첫 해인 04-05 시즌에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이후로도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굉장히 좋은 모습을 보였다. 이때 챔스 결승전에서 AC 밀란을 상대로 전반에만 3골을 허용했지만 후반전에 주장 스티븐 제라드의 활약에 힘입어 3골을 따라잡고 승부차기까지 가서 승리하였다. 당시 결승전 장소가 이스탄불이었기 때문에 이 경기를 이스탄불의 기적이라 부르며 챔피언스 리그 역대 최고의 명경기 중 하나로 꼽는다. 콥들에게는 바이블 격인 경기.

당시 리버풀은 A조에 속하게 됐는데 같은 조에 AS 모나코, 올림피아코스 FC,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가 들어오게 되었다.

모나코는 이전 대회 득점왕이었던 페르난도 모리엔테스가 레알로 돌아가고[42] 주장이었던 지울리는 바르셀로나로 이적하는 등 결승전 스쿼드 대부분이 이탈하며 공격의 수준이 조금 떨어졌지만 [43] 지난 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올라왔던 강호인건 틀림 없었고, 에브라, 지베, 스킬라치, 줄리앙 로드리게스로 이어지는 수비진과 플라실, 지코스, 디에구 로페즈로 구성된 미드진은 건재하였다. 게다가 디디에 데샹이 감독을 맡고 있었다.

데포르티보는 전 대회에서 리아소르의 기적을 일궈낸 팀인 동시에 팀 역사상 첫 챔스 준결승 진출을 이뤘던 팀이었고 팀 구성원은 여전했다.

올림피아코스에는 FC 바르셀로나에서 엄청난 활약을 했던 히바우두가 속해 있었다. 그는 전성기가 지났다는 평가를 받긴 했어도 주 무기인 왼발은 여전했다.

리버풀은 공격진에 밀란 바로시 혼자 뛰고 있다해도 무방할 정도로 뎁스가 얇은 상태였다.[44]

조별리그 1차전은 안필드에서 열린 모나코와의 경기였다. 전반 22분 가르시아, 제라드, 시세의 아름다운 합작으로 시세가 득점했고, 후반 84분 바로시가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침착하게 드리블하여 득점하며 2:0으로 승리했다.

2차전은 올림피아코스 원정이었다. 전반 17분 올림피아코스의 스톨티들스가 프리킥 세트피스 상황에서 백헤딩골로 득점하며 앞서나갔다. 올림피아코스 입장에선 후반 84분 판토스가 백태클로 레드카드를 받은 것이 경기에서 남은 유일한 아쉬움일 정도로 리버풀을 내내 압도했다.

3차전은 안필드에서 열린 데포르티보와의 경기였고, 공방 끝에 양 팀 무득점 무카드로 경기가 종료됐다.

4차전 데포르티보 원정에선 전반 14분 리세가 올린 얼리 크로스를 데포르티보의 조르지 안드라데가 자기 팀의 골대로 밀어 넣으며 1:0으로 승리했다.

5차전은 모나코의 스타드 루이 2세에서 열렸고, 후반 54분 홈 팀인 모나코의 하비에르 사비올라가 득점하며 리버풀이 1:0으로 패배했다.

6차전은 안필드에서 열린 올림피아코스와의 경기였는데 이 날 경기로 A조에서 챔피언스리그 16강에 진출할 마지막 팀이 결정되게 됐다. AS 모나코는 이미 16강 진출이 확정되었고, 남은 한 자리를 위해 올림피아코스와 리버풀 두 팀이 격돌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리스 원정에서 이미 패배한 리버풀은 이번 경기에서 2골이상 득점해야 했는데, 그만 전반 27분 히바우두의 날카로운 프리킥으로 올림피아코스가 앞서나갔다. 다행히 전반 추가 시간에 해리 키웰의 얼리 크로스를 시나마 퐁골이 골로 연결하며 리버풀이 균형을 맞췄고, 후반 80분 닐 멜러가 골대 코앞에서 득점하였다. 여전히 한 골이 더 필요한 상황에서 올림피아코스는 16강 진출을 위해 필사적으로 수비에 나섰으나, 후반 86분 스티븐 제라드의 스페셜 영상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 유명한 논스톱 중거리슛Oh! Yeah Beauty!이 골문 구석에 꽂히며 리버풀은 3:1로 승리했고, 챔피언스 리그 16강에 진출하게 됐다.

16강 상대는 바이어 04 레버쿠젠으로 결정되었다. 당시 레버쿠젠은 베른트 슈나이더레네 아들러를 비롯한 훌륭한 선수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콩장군께선 뮌헨에서 2연속으로 더블을 하셨다. 물론 챔스는 멸망 조별예선에서도 갈락티코 레알을 3:0으로 대파하는 등 압도적인 모습으로 조1위로 통과한 팀이었다.

1차전은 안필드에서 열렸고, 전반 15분 가르시아, 전반 35분엔 리세가 득점하며 2:0으로 앞서나갔다. 후반 90분 레버쿠젠의 프란카가 디미타르 베르바토프의 경악할 롱패스를 받아 만회골을 넣었지만, 그로부터 3분 후 디트마어 하만이 직접 프리킥으로 득점하며 리버풀이 3:1로 승리했다. 하만 득점 직후 박수치며 좋아하는 제라드는 덤

2차전은 레버쿠젠의 바이아레나에서 열렸다. 전반 28분과 32분에 터진 루이스 가르시아의 헤더, 후반 67분엔 바로시가 자신의 골결정력을 완벽히 보여주는 반박자 빠른 발리슛으로 리버풀이 3:0으로 앞서 나갔다. 후반 90분 레버쿠젠이 크쉬노바크의 중거리 슈팅으로 만회골을 기록했지만 승부를 뒤집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8강 상대는 16강에서 챔피언스리그 최다 우승팀 레알을 침몰시키고 올라온 유벤투스 FC였다. 헤이젤 참사 이후 20년 만의 만남. 다비드 트레제게,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파벨 네드베드, 에메르송,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잔루이지 부폰, 마우로 카모라네시, 릴리앙 튀랑, 잔루카 잠브로타, 파비오 칸나바로라는 엄청난 스쿼드가 리버풀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승부는 굉장한 접전으로 흘러갔다.

안필드에서 열린 1차전은 전반 10분 코너킥 세트피스 상황에서 사미 히피아가 왼발 발리슛을 꽂아 넣으며 리버풀이 앞서 나갔고, 뒤이어 전반 25분 루이스 가르시아의 엄청난 중거리슛이 터지며WHAT A GOAL! WHAT A NIGHTS! 경기에 일찍 쐐기를 박는 듯 했으나 후반 63분 칸나바로잠브로타의 크로스를 헤더로 연결하며 득점에 성공, 2:1의 스코어로 경기가 종료됐다.

리버풀 원정에서 1골차 패배라는 나름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둔 유벤투스는 홈에서 열린 2차전에서 4강 진출을 위해 공격에 집중하였다. 골문 고작 8 야드 앞에서 잠브로타의 크로스가 노마크 상대인 즐라탄에게 왔는데, 두덱이 막는 등 리버풀에겐 수많은 위기 상황이 찾아왔는데 다행히 양 팀 다 무득점으로 리버풀이 4강에 진출한다.

4강 상대는 스페셜 원 주제 무리뉴 감독이 무적 포스를 뽐내며 리그에서 1위를 질주하고[45], 챔스에서는 16강에서 무려 우승후보 0순위이자 라리가 선두 FC 바르셀로나를 탈락시키고 8강에서도 역시 분데스리가 선두 FC 바이에른 뮌헨을 탈락시키며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주었던 첼시 FC였다. 러시아의 석유 재벌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공격적 투자를 앞세운 첼시는 디디에 드록바, 페트르 체흐, 프랭크 램파드[46], 아이두르 구드욘센, 파울루 페헤이라, 존 테리, 윌리암 갈라스, 히카르두 카르발류, 데이미언 더프, 아르연 로번, 클로드 마케렐레까지 올스타급 노장 선수들과 당시 주목받던 유망주들이 어울려 잉글랜드 내 최고의 스쿼드를 갖췄다고 평가받고 있었기에, 모두가 이번엔 리버풀이 패할거라 예상하였다.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열린 1차전은 예상외로 0:0으로 끝났다. 안필드에서 열린 2차전, 전반 4분 밀란 바로시가 찬 공이 태클에 막혀 애매하게 떠오르자 루이스 가르시아가 재빨리 낚아채며 득점에 성공[47][48], 홈 팀 리버풀이 1:0으로 승리하여 챔스 결승 진출에 성공한다.

결승 상대는 당시 스쿼드 전원이 유럽 올스타급의 선수들로 즐비한 AC 밀란이였다. 그리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UEFA 챔피언스 리그/2004-05 시즌/결승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2.2. 2005-06 시즌[편집]


  • 이적 시장
여름 이적 시장에서 세비야 FC안토니오 바라간미들즈브러 FC부데바인 젠덴을 자유계약으로 데려왔다. 챔스 결승전에서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두덱은 베니테스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자신이 라리가에서 눈여겨보던 비야레알 CF페페 레이나를 영입했다. 그리고 발렌시아에서 자신의 제자였던 모하메드 시소코를 데려왔고 공격진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피터 크라우치를 영입했다. 지난시즌 볼튼으로 임대갔던 엘 하지 디우프가 완전이적했으며 밀란 바로시와 마우리치오 페예그리노, 안토니오 누녜스, 블라디미르 스미체르, 이고르 비슈찬이 팀을 떠났다. 겨울이적시장에서 다니엘 아게르가 영입되었고 로비 파울러가 안필드에 컴백했다. 그리고 호세미와 얀 크롬캄프의 스왑딜이 있었다. 마크 곤잘레스의 이적 계약이 2005년 10월에 성사되었으나 일단 레알 소시에다드에 시즌 후반기동안 임대보냈다.

CSKA 모스크바를 연장전 끝에 시세의 2골과 가르시아의 득점으로 3대1 역전승을 거두었다.

일본에서 열린 클럽 월드컵에서 결승에 올랐으나 상파울루 FC에 1 대 0으로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개막 후 4경기 연속 무실점 경기를 했지만 득점이 1골 밖에 없어 1승3무를 기록했다. 그리고 홈에서 첼시에 1:4 대패, 풀럼 원정에서 2:0 완패를 당하며 개막 후 8경기에서 2승4무2패로 부진했다. 다행히 10경기에서 1골만 내주며 2005년 말까지 파죽의 10연승으로 빠르게 3위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2006년 새해 첫 경기였던 볼튼 원정에서 2대2로 비기며 연승을 마감했고 토트넘 전 1대0 승리 이후 4경기에서 맨유, 첼시, 찰튼 원정에서 패하고 버밍엄에 홈에서 비기면서 우승 경쟁에서 사실상 탈락하고 말았다. 남은 14경기에서 12승1무1패를 기록했지만 맨유에 승점 1점 뒤쳐진 3위로 마감하여 다음 시즌은 UEFA 챔피언스리그 3차 예선부터 출전하게 되었다. 38경기에서 25실점만 허용하며 첼시에 이어 최소 실점 2위를 기록했지만 다른 빅4 팀에 비교해 57골에 그친 공격력이 3위에서 더 올라가지 못하게 했다. 빅4와의 맞대결에서 1승 1무 4패에 그친 이유가 스트라이커의 결정력 부재였다. 리그에서 최다골을 기록한 선수가 10골을 넣은 공격수가 아닌 미드필더 스티븐 제라드였다. 공격수들의 리그 골 스탯은 지브릴 시세 9골, 피터 크라우치 8골, 페르난도 모리엔테스 5골. 레전드 로비 파울러를 복귀시킨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스티븐 제라드P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으며, 페페 레이나는 20회의 클린 시트를 기록하며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다. PFA 올해의 팀에는 제라드와 캐러거를 배출했다.

3라운드에서 지난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강등된 크리스탈 팰리스에 2:1로 패해 광탈했다.

3라운드 챔피언십의 루턴 타운 FC를 상대로 알론소의 장거리골 등으로 난타전 끝에 5:3 승리를 거두었다. 4라운드에서는 강등권의 포츠머스 원정에서 제라드와 리세의 득점으로 2:1 승리를 거두었다. 16강 상대는 85년 동안 FA컵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했던 맨유와 안필드에서 상대했는데 이 경기에서 피터 크라우치의 결승골로 85년 묵은 징크스를 날려버렸다. 8강에서는 리그에서 강등권 탈출이 급했던 버밍엄 시티를 원정에서 7대0으로 도륙내버렸다.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첼시 FC와의 준결승전에서 리세의 강력한 선제골과 가르시아의 칩슛으로 드록바가 1골 만회한 첼시를 2:1로 제압하며 5년 만에 결승전에 올라갔다. 골장면

카디프 밀레니엄 스타디움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올림피아코스전을 떠오르게 하는 종료 직전 제라드의 극적인 동점골로 웨스트햄과 3대3으로 비긴 뒤 1년 전 이스탄불에서와 마찬가지로 역시 승부차기로 꺾고 FA컵 우승을 차지했다.하이라이트 웸블리 스타디움의 2007년 완공으로 밀레니엄 스타디움에서 열린 마지막 FA컵 결승전이었는데 이 우승으로 리버풀은 밀레니엄 스타디움에서의 첫 번째 FA컵(00-01 시즌)과 마지막 FA컵 우승의 주인공이 되었다.

지난 시즌 5위에 그친 터라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이 없었지만 챔피언스리그 우승팀 리버풀의 타이틀 방어를 보장하기 위한 방법이 논의가 되던 중에 갑자기 끼어든 제3의 클럽인 04-05 웰시 프리미어 리그 챔피언인 토탈 네트워크 솔루션 FC가 자신들의 챔스 1차 예선 티켓을 두고 리버풀과 경기를 치르자고 제의했고 UEFA는 결국 리버풀을 1차 예선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리버풀은 05-06 시즌 챔피언스 리그를 1차 예선부터 출전하여 3차 예선까지 웨일즈의 TNS와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 불가리아의 CSKA 소피아를 모두 제압하며 본선에 출전했고, 같은 잉글랜드 클럽인 첼시와 같은 조에 편성되었다. 원칙적으로는 같은 나라 클럽이 그룹 라운드에서 같은 조에 편성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리버풀은 그 해 잉글랜드 대표 자격이 아닌 타이틀 홀더 자격이었으므로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조별예선에서 첼시와 두 차례 맞대결 모두 0-0 무승부를 기록했고 한 수 아래의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RSC 안데를레흐트를 가볍게 따돌리며 3승3무 조1위로 16강에 올라갔다. 첼시가 베티스 원정에서 덜미를 잡히며 조2위가 되었고 FC 바르셀로나를 상대해야 했고 반면 리버풀은 상대적으로 쉬워보이는 SL 벤피카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죽음의 조에서 이미 맨유를 제치고 16강에 진출한 벤피카의 저력은 무시할 수 없었고 1차전 원정에서 루이장의 결승골로 1:0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안필드에서 열린 2차전에서도 전반 36분에 시망 사브로자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며 3골이 필요한 불리한 상황이 되더니 경기 종료 직전 파브리치오 미콜리에게 쐐기골까지 얻어맞으며 0:2 패배, 합계 0:3으로 16강에서 떨어졌다.


5.2.3. 2006-07 시즌[편집]


  • 이적 시장
여름 이적 시장에서 크레이그 벨라미, 가브리엘 팔레타, 파비우 아우렐리우, 저메인 페넌트, 디르크 쿠윗이 영입되었고 마크 곤잘레스가 임대 복귀하여 첫 시즌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페르난도 모리엔테스, 디트마어 하만, 안토니오 바라간, 지미 트라오레, 얀 크롬캄프, 닐 멜러, 시나마 퐁골, 크리스 커클랜드가 팀을 떠났다. 겨울이적시장에서는 알바로 아르벨로아하비에르 마스체라노가 영입되었고 스티븐 워녹이 팀을 떠났다.

첼시를 상대로 리세와 크라우치의 골로 2:1 승리를 거두었다.

초반 홈경기와 원정경기에서 극심한 대조를 이루며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였다. 에버튼 원정에서는 그 유명한 레이나의 더블클러치가 나오며 3:0 대패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올라올 팀은 올라온다고 지난해에 이어 12월을 기점으로 무실점 경기를 밥먹듯 하고 연승을 기록하며 3위까지 올라갔고 후반기에는 첼시와 아스날과의 맞대결에서 2:0, 4:1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챔피언스리그에 신경을 많이 쓰면서 로테이션을 돌려 들쭉날쭉한 모습을 보이며 아스날에 골득실에서 앞선 3위로 마무리했다. 에레디비지에 득점왕 출신 쿠이트가 리그에서 12골을 기록했지만 여전히 확실한 공격수에 대한 갈증을 풀지 못했고 팀득점도 57골에 그쳤다. 레이나는 19번의 클린시트로 2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3라운드와 4라운드에서 레딩과 버밍엄을 4:3, 1:0으로 이겼으나 8강에서 아스날에 안필드에서 밥티스타에게 4골을 허용한 끝에 무려 6실점하며 3:6 패배를 당했다.

리그컵 8강에서 3:6 대패를 당하기 전에 FA컵에서도 64강인 3라운드에서 안필드 맞대결이 있었고 1:3으로 패하며 디펜딩 챔피언으로서의 체면을 구겼다.

3차 예선에서 이스라엘의 마카비 하이파 FC에게 다소 고전하며 합계스코어 3:2로 본선에 진출했다.

PSV 에인트호번, 지롱댕 드 보르도, 갈라타사라이 SK와 다소 쉬운 조편성을 받아 4승1무1패 조1위로 가볍게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그런데 16강에서 디펜딩 챔피언 FC 바르셀로나를 상대해야하는 난관에 부딪혔다. 1차전 캄프 누 원정에서 골프채 사건이 있었던 벨라미와 리세의 골로 적지에서 귀중한 2:1 승리를 올렸고 2차전 안필드에서 0:1로 졌으나 원정다득점에서 앞서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 조별예선에서 만난 PSV를 다시 만나 1차전 원정에서 3:0 대승, 홈에서 1:0 승리로 가볍게 준결승에 올라갔다.

준결승전 상대는 2004-05 시즌부터 자주 만나는 첼시 FC. 스탬포드 브리지에서 열린 1차전은 2년 전과 다르게 무승부가 아닌 조 콜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0:1로 패하며 이번에는 결과가 다르게 나오는 듯 했다. 하지만 2차전은 무적의 안방인 안필드에서 열렸고 전반 22분에 터진 다니엘 아게르의 중거리슛으로 스코어를 1대1 원점으로 되돌렸다. 연장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해 승부차기에 돌입하였다. 승부차기에서 리버풀은 4명의 키커가 모두 실축 없이 성공시켰고 페페 레이나가 아르연 로번제레미 은지탑의 페널티킥을 막아내며 지난시즌 FA컵 결승전에 이어 승부차기 영웅이 되었다.

아테네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2년 만에 AC 밀란과 다시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맞붙었으나 이번에는 필리포 인자기의 두 골에 무너졌고 종료 직전 쿠이트의 만회골에 만족하며 1:2로 패배, 아쉽게 V6의 기회는 다음으로 기약하고 준우승에 그쳐야 했다. 그리고 아테네에서의 결승전 이후 다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오르는데 11년, 유럽대항전 결승전에 오르는데 9년이 걸려야 했다.

  • 암흑기의 근원, 조지 질레트와 톰 힉스 구단주의 부임
2007년 1월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 인터내셔널 캐피탈(DIC)가 리버풀 인수에 근접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조지 질레트와 톰 힉스가 뒤늦게 리버풀 인수에 뛰어들면서 혼전 양상을 띄기 시작했다. 2월 2일 질레트와 힉스는 리버풀 인수를 위해 4억 3500만 파운드라는 금액을 제시했다. 이 중 2억1500만 파운드는 리버풀의 숙원이기도 한 새 구장 스탠리 파크 설립을 위해 쓰여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데이빗 무어스 구단주와 릭 페리 단장은 리버풀의 장기적인 미래를 위해선 새 구장 설립이 필요하다고 간주하고 있었기에 만장일치로 오랜 기간 협상 과정을 밟아왔던 DIC가 아닌 질레트와 힉스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고 2월 6일 구단은 질레트와 힉스에게 매각되었다. 클럽 매입 가격은 2억1890만 파운드였고, 당시의 총 부채는 4480만 파운드였다. 질렛은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60일 이내로 시공에 들어갈 것이라라며 스탠리 파크 신축을 공식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재정지원을 확보하지 못하며 2008년 10월 5일 경기장을 지을 계획은 있으나 자금이 없다며 새 구장 건축 작업이 지연될 것이라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 안건은 2011년 팬웨이 스포츠 그룹에 의하여 전면 파기되었다. 자세한 것은 스탠리 파크 항목 참조.


5.2.4. 2007-08 시즌[편집]


지난 시즌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의 아쉬움을 만회하기 위해 질힉 구단주는 베니테스를 향해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다. 그리고 여름 이적시장에서 지난 시즌 리버풀의 최대 약점이었던 최전방 공격수와 측면 보강을 시도했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페르난도 토레스를 클럽 레코드인 2천만 파운드, 네덜란드의 최대 유망주 라이언 바벨을 1,150만 파운드로 화끈하게 영입했다. 그외에도 안드리 보로닌을 700만 파운드, 요시 베나윤을 500만 파운드, 루카스 레이바를 600만 파운드에 영입했고 하비에르 마스체라노를 MSI로부터 1,700만 파운드에 완전영입. 그리고 겨울이적시장에서도 마르틴 슈크르텔을 650만 파운드에 영입하며 전 포지션에 걸쳐 7,000만 파운드를 투자하며 체질 개선을 시도했다. 다만 영입 러시의 반대급부로 루이스 가르시아, 크레이그 벨라미, 마크 곤살레스등은 떠나보내야 했다.[49]

어쨌든 부족했던 부분을 보강하며 그 유명한 제토라인이 완성되었다. 지난 시즌 마땅한 윙 자원이 부족해[50] 중앙이 아닌 윙으로 자주 나서곤 했던 제라드는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이동하여 토레스와 조합을 맞추자 득점력이 폭발하게 된다. 챔피언스리그에서 가공할 만한 화력을 보여줬는데 조별예선에서 초반 3경기에서 꼴찌로 쳐지며 광탈의 위기에 몰렸으나 베식타스 JK를 상대로 챔피언스리그 최다 점수차 승리인 8:0 대승, FC 포르투에 4:1 대승,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에 4:0 대승을 거두었고 리그에서도 토레스가 리그 24골을 기록, 외국인 데뷔시즌 최다골 신기록을 경신한데 이어 리그 전체 득점 2위에 오르며 마이클 오언 이후 4년 만에 리버풀은 리그 최고 레벨의 공격수를 보유한 팀이 되었다. 2006-07 시즌 시즌 10골을 넘긴 선수가 피터 크라우치디르크 쿠윗, 스티븐 제라드 단 3명에 그쳤으나 07-08 시즌에는 토레스와 제라드에 이어 크라우치, 베나윤, 쿠이트, 바벨 총 6명의 선수가 시즌 10골을 넘기며 득점력 향상에 성공했다.

향상된 득점력과 함께 리그에서는 지난 시즌보다 승점이 올랐으나 선두 맨유에[51] 승점 11점이 뒤진 4위로 마감했고 챔스도 16강과 8강에서 인테르와 아스날을 연파하고 준결승에 진출하며 선방했다. 첼시와의 준결승 1차전에서 리세의 종료직전 통한의 자책골이 아니었다면 결승은 리버풀의 몫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시즌 결과만 놓고보면 선방한 시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조금씩 곪아가며 서서히 암흑기로 향해가고 있었다. 겨울 이적 시장을 앞두고 베니테스는 질힉 구단주를 향해 계속해서 더 많은 보강이 필요하다고 언론에 주장했지만 힉스는 베니테스에게 여름이적시장에서 그렇게 사줬는데 뭐가 문제냐며 현재 스쿼드에 집중하라고 이를 거절했다. 이후 베니테스는 언론에서 공공연하게 질힉을 비난했고 질힉과 베니테스의 관계는 악화되어 영국 언론에 오르내렸다. 마침 2008년 1월 리버풀이 리그에서 너무 많은 무승부로 아슬아슬한 4위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힉스는 전 독일 대표팀 감독이었던 위르겐 클린스만과 접촉하여 논란을 빚었다. 당시에는 베니테스가 타팀으로 떠났을 때 대체 감독을 준비하는 것으로 둘러댔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따르지 않는 베니테스를 경질시키려는 움직임이었음이 밝혀졌다. 감독과 구단주 사이의 불화가 언론에 오르내리자 리버풀 팬들은 베니테스를 지키기 위해 안필드에 질힉 구단주를 비난하는 배너를 들고와 구단주를 비난했다. 어수선한 가운데 07-08 시즌은 끝났다.


5.2.5. 2008-09 시즌[편집]


08-09 시즌을 앞두고 리그 우승을 위해 다시 한 번 보강에 나섰다. 키웰과 리세, 피넌, 크라우치가 떠난 자리를 측면 자원으로 도세나, 데겐, 리에라를 데려왔고 백업 공격수로 다비드 은고그를 영입했다. 그리고 1930만 파운드를 들여 토레스의 고립을 막고 그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토트넘으로부터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받던 로비 킨을 영입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측면과 공격을 보강해서 좋은 영입이 되었나 싶었지만 베니테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킨보다 가레스 배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배리의 이적료는 1,800만 파운드 정도.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제라드와 배리가 만났을 때 좋은 조합을 이뤘던 것을 보고 배리의 영입을 바랬다. 하지만 질힉은 킨과 배리를 모두 사는 것은 부담이 된다며 영입하려거든 현 스쿼드에서 선수를 팔아 재정을 충당할 것을 베니테스에게 전했다.

사실 배리 없어도 중원은 굉장히 잘 돌아갔지만 안타깝게도 베니테스는 주축 선수를 팔아 배리를 영입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베니테스는 선수단과 친밀하게 지내는 감독이 아닌 비지니스적인 마인드로 팀을 운영하는 감독이었고 슬슬 내리막길의 조짐이 보이면 가격대가 떨어지기 전에 가차없이 정리하여 이적료를 받아내곤 했다. 그랬던 그의 레이더망에 걸린 선수는 바로 사비 알론소였다. 07-08 시즌에 알론소는 잔부상과 함께 다소 부진하며 27경기 출장에 그쳤고 그 사이 마스체라노는 리그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성장했고 브라질에서 500만 파운드를 주고 사온 초특급 유망주였던 루카스 레이바가 알론소의 공백을 어느정도 잘 메워준 상황이었다. 베니테스의 입장에서는 알론소가 없더라도 잘 돌아갈 것이며 그 자리는 배리로 메워버리면 그만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때가 알론소를 팔 적기라고 생각한 셈. 그러면서 베니테스는 알론소에게 직접 이적자금을 위해 이적명단에 올릴 것임을 전달했고 알론소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스날과 유벤투스에 알론소를 사갈 것을 제안했지만 두 팀 모두 리버풀이 원하는 수준의 이적료를 지불할 생각이 없었고 결국 알론소는 팀에 잔류하게 되고 배리의 영입은 무산되었다. 구단주에 대한 불만으로 베니테스는 로비 킨을 홀대했고 결국 이적한 지 반년 만에 토트넘으로 반품되었다.

리그에서 제라드-알론소-마스체라노의 강력한 중원 조합을 형성하게 되었고 제토라인의 파괴력은 여전했다. 08-09 시즌 리버풀은 리그에서 리그 최다득점, 최다 골득실, 최소 패배를 기록하며 승점 86점을 기록했지만 승점 90점을 기록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승점 4점이 뒤져 아쉽게 준우승에 머무르고 말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두 차례 맞대결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고[52] 첼시와의 리그 맞대결도 두 차례 모두 승리를 가져갔다. 특히 첼시 원정에서는 스탬포드 브릿지 86경기 홈 무패 기록을 중단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중반부에 중하위권을 상대로 기록한 너무 많은 무승부가 결국 리버풀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53]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 레알을 상대로 1, 2차전 합계 5:0으로 대파한 후 8강에서 첼시를 만나게된다. 하지만 1차전에서 원정팀의 무덤 리버풀의 홈구장 안필드에서 3:1로 패배, 2차전 첼시의 구장 스탬포드 브리지에서 전반 2:0의 점수를 냄으로써 이스탄불의 기적을 재현할 뻔 했으나 후반에 4점을 내주고 2골을 추가함으로써 4:4가 되며 1, 2차전 합계 7:5로 첼시에게 4강행 티켓을 내주고 만다. 경기 자체는 엄청나게 재밌었다. 4월 22일 프리미어 리그 아스날 FC와 경기를 치렀다. 이 날은 하필 안드레이 아르샤빈의 인생 경기였는데 아스날의 아르샤빈이 4골 폭풍을 몰고와 4:4 무승부를 기록했다. 참고로 이 날 아스날의 유효슈팅은 단 4개였다.

08-09 시즌 리그는 아쉽게도 2위로 끝을 냈다. 하지만 계속해서 팀워크와 실력이 차차 나아지고 있어서 다음 시즌에도 훌륭한 순위로 끝낼 것으로 기대되었는데 열심히 영입하려고 했던 가레스 배리가 결국 맨체스터 시티 FC로 이적을 해버리면서 베니테스 감독만 바보가 돼버렸다. 거기다가 팀의 플레이 메이커라고 할 수 있는 사비 알론소레알 마드리드 CF의 러브콜을 받고 있었다. 배리가 왔다면 알론소가 떠나도 상관없겠지만 배리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알론소의 이적을 적극적으로 막아야 되는 입장. 하지만 09-10 시즌부터 레알이 갈락티코스 정책이 부활했다며 돈지랄(...)을 쳐대는 바람에 결국 알론소가 레알로 이적하였다. 대신 AS 로마에서 알베르토 아퀼라니를 영입했지만 팬들과 전문가들은 아퀼라니의 부상이 많다는 이유로 모두 의구심을 품었다. 리버풀 팬들은 아퀼라니의 포텐이 터지길 바랄 뿐이다. 문제는 2009년이 다 되어가도록 10분 이상 출전한 정규 경기가 한 번도 없다는 것. 이제 좀 뛰나 했더니 또 부상. 얼마나 심각한지는 모르지만 부상 고치러 베오그라드까지 날아갔다면... 거의 주급 도둑 수준이다.


5.2.6. 2009-10 시즌[편집]


맨체스터 시티 FC아스톤 빌라 FC, 토트넘 홋스퍼 FC 등의 팀의 약진과 사비 알론소의 부재로 힘든 시즌을 보내며 챔스에서는 조별예선에서 광탈, 리그에서는 7위에 그쳤다. "You'll Never Walk Alone"이라는 전통의 문구는 "You'll Walk Alone", "You'll Never Walk Again", "You'll Never Win Again" 등으로 패러디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베니테스 감독은 여전히 "토레스만 있었으면..." 하고 있으니... 하지만 토레스, 제라드 모두 복귀하고도 포츠머스에게 0:2로 패배하면서 계속 나락으로 떨어졌다. 게다가 패배하는 상황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 절로 나오기 때문에 로또풀이라는 별명을 대신하여 예능풀이라는 새로운 별명이 떠오르고 있다. 가령 골대 근처에서 팬이 던진 풍선에 공이 맞고 골이 들어간다던지(...)

09-10 시즌 리버풀의 진짜 문제는 수비라인이다. 시즌 첫 경기 토트넘전에서 선발로 나왔던 슈크르텔과 캐러거 두 센터백이 서로 팀킬...을 해버리는 사고가 있었고, 이후 15경기가 넘도록 부상과 출장정지등으로 인해 제대로 된 폼을 갖춘 수비라인이 선발 라인업에 뜬 일이 없었다. 잊지말자. 언제나 리그든 토너먼트든 우승하는 팀은 수비가 탄탄하다. 히피아도 없고 리세도 없고

그래도 토트넘, 에버튼 등을 상대로 한 경기에서 지긋지긋한 아퀼라니의 포텐이 드디어 터져서 각 경기당 한 도움을 꾸준히 주면서 이김으로서 토레스가 부상으로 빠지는 중이었음에도 다시 재기를 하나 싶었지만...아스날을 상대로 한 원정경기에서부터 밀리기 시작하더니 토레스가 복귀하고도 결국 강등권을 기어다니는 위건을 상대로 졌다. 게다가 그나마 될 것 같은 유로파마저 릴에게 얻어터지면서 슬슬 베니테스 감독 경질설이 부각되고있다.

그래도 아직은 토레스가 있어서인지 릴을 이기면서 유로파 통과는 해냈다. 하지만 맨유에게 1-2 역전패하며 6위로 내려앉았다. 5위 맨시티와 7위 아스톤 빌라 보다 2경기, 4위 토트넘보다 1경기를 더 치른 상태로 앞으로 더 떨어질 가능성도 높다. 감독부터 4위권이 힘들어졌음을 인정했을 정도로 최악의 시즌을 보내는 중. 게다가 유로파리그 8강 1차전 벤피카 원정에서는 1:2로 역전패. 그래도 홈에서는 관광보내고 4강에 진출했다.

베니테스 감독은 내년의 팀의 리빌딩이 필요하다면서 많은 이적 예산을 바라는데... 일단은 저 미국인 공동 구단주, 조지 질레트-톰 힉스 두 명이 이적 자금을 그 정도로 많이 내줄 것 같지는 않지만 회장도 당장 바뀌는데다가 구단이 인수되어가는 와중이라 모르는 일이다. 일단 베니테스 감독은 돈만 주어진다면 리버풀에 남겠다고 선언. 하지만 비슷한 처지의(...) 유벤투스가 베니테스 감독을 거액의 이적료가 있다면서 꼬드기고 있었다. 베니테스 감독은 물론 토레스나 마스체라노같은 주전 선수들도 노린다던데...

토레스가 시즌 아웃 선고를 받은 가운데, 월드컵 출전 여부가 불투명해지자 리버풀 때문에 페르난도 토레스를 월드컵에서 볼 수 없다!라는 이유로 세계 축구팬들에게 까였다. 여러모로 악재가 겹친 시즌이다(...) [54]

결국 첼시 FC에게 홈에서 0-2로 완패하면서 4위진입은 실패했다.

09-10 시즌 마지막 경기. 모든 시선이 첼시와 맨유로 쏠렸을때, 헐시티랑 비겼다. 결국 7위로 시즌 마무리. 풀럼이 유로파 리그 우승이라도 하면 우승자 진출권으로 인해 까딱하면 유로파 리그도 못나가게 생겼지만, 아틀레티코가 우승을 하여서 못나가진 않게 되었다.

결국 이적예산이 영 시원찮았는지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과의 계약이 해지되었다. 베니테즈 감독이 떠난 이후부터 위르겐 클롭 감독이 부임하기 전까지 리버풀은 트로피 걱정보다 프리미어리그 빅4의 위상을 지키기도 어려울 정도로 깊은 슬럼프에 빠져버리고 만다.

지나고 나서 돌이켜 보면 유럽 최고의 미드진을 보유하고 있다던 응원가는 허언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라드만 남고 알론소는 레알로, 마스체라노는 바르사로 가버린 상황에서 아무리 제라드라도 혼자서 팀을 구원하기에는 어쩔 수 없이 힘에 부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감독이 문제였냐, 선수들이 문제였냐 그런 문제보다 가장 만악의 근원으로 취급받는 부류는 바로 질-힉 구단주에게 있음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구단주가 제대로 구단을 운영하고, 필요한 만큼 투자를 지원했어도 성적이 곤두박질치면 할 말이 없겠지만, 문제는 이 구단주들은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성적이 갑자기 곤두박질 치기 전의 08-09 시즌의 리버풀은 분명 완벽한 팀이었다. 다른 빅클럽들의 구단주들처럼 구단에 책임감과 애정을 가지고 문제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지원을 해줬으면 리버풀이 암흑기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주축 선수들이 하나둘씩 떠나는 상황에서 아무리 베니테즈라도 방법이 있었을까. 이후 위르겐 클롭 사단을 지원하는 팬웨이 스포츠 그룹의 운영 모습을 보면 확실히 대비가 된다.

그리고 이후의 로이 호지슨-케니 달글리시-브렌던 로저스로 이어지는 암흑기 콤보를 겪으면서 그나마 라파 법사라는 리버풀 팬덤의 반응이 강해졌다. 애초에 영국 내에서는 오래전부터 베니테즈에 대해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팬들이 많은 상황이었다. 구단주가 새롭게 바뀐 상황에서 베니테즈 감독이 투자만 넉넉하게 받을 수 있다면 전과 같은 실패를 겪을 일은 없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6. 암흑기[편집]



6.1. 호지슨 시대(2010~2011)[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10-11 시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풀럼 FC에서 강등권 팀을 중위권 팀으로 끌어올리고 그 팀을 UEFA 유로파 리그 결승까지 끌고 간 업적을 높이 사 베니테즈 후임으로 낙점받았다. 비록 풀럼 시절 동안 명장 소리를 듣던 감독이나 경력을 보면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를 제외하고 별 볼일 없는 클럽들을 맡은 게 전부인 감독에게 리버풀 감독직을 맡기는 것에 의구심이 적지 않았다.

의심은 역시나 틀리지 않았고 그가 지휘했던 프리미어리그 20경기에서 단 7승만을 기록하는 처참한 기록을 세운다. 정확히는 7승 4무 9패. 붉은 제국 시절의 레전드들이 보면 피눈물 쏟을 기록이다. 그나마 잘한 것은 첼시를 홈에서 2-0으로 꺾은 것 뿐이다. 또한 리버풀은 리그에서 12위로 내려앉았다. 새롭게 영입한 자원들인 하울 메이렐레스, 조 콜, 크리스티안 폴센, 폴 콘체스키, 밀란 요바노비치 등은 대부분 철저히 실패했다. 전술도 중하위권 팀들이나 쓸 법한 뻥축구나 선제 득점 후 잠그기 전술 같은 것을 썼으니 부진한 성적은 당연한 얘기였다.

결국 시즌 도중에 상호 합의 하에 계약을 해지하며 리버풀 감독직을 떠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위의 시즌 문서를 확인.


6.2. 달글리시 2기(2011~2012)[편집]


선수로서는 리버풀 전성기의 주역이었으며, 감독으로는 1991년에 물러나기 전까지 리버풀을 위해 3회의 리그 우승과 2번의 FA컵 우승으로 붉은 제국의 황혼기를 장식한 레전드가 20년만에 다시 리버풀의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많은 리버풀 팬들이 환영하는 가운데 2000년에 셀틱 감독직에서 물러나온 후 10년만에 감독직을 맡는 것이라 오랫동안의 공백 기간에 우려를 표하는 팬들도 적지 않았다.

시즌 도중에 팀을 떠난 호지슨 대신 팀을 임시로 지휘하던 10-11 시즌에는 확실히 팀을 전보다 달라진 모습으로 바꿔놓으며 10위권 아래로 처졌던 팀 성적을 시즌 마지막에는 6위로 마치게 했다. 리버풀에게는 만족할 수 없는 성적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달라진 팀의 모습에 기대감을 나타냈으며, 3년 계약도 체결하며 정식 감독으로 11-12 시즌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즌 전의 기대와는 완전 딴판으로 이적 시장에서 결코 적지 않은 돈을 투자해서 새로 데려온 선수들이 좋지 않은 활약을 보여주고, 형편없는 경기력에 시대에 뒤떨어지는 전술을 쓴다는 비판에 시달렸으며, 루이스 수아레스의 인종 차별 논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등 문제에 시달리면서 리그에서 경악스러운 성적을 내고야 말았으며, 비록 리그컵 트로피를 들어 6년만에 무관을 탈출하기는 성공했으나, 리그에서는 8위라는 끔찍한 성적을 내고 결국 케니 달글리시도 실패하고 말았다.


6.2.1. 2010-11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10-11 시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2.2. 2011-12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11-12 시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3. 로저스 시대(2012~2015)[편집]


로이 호지슨케니 달글리시 감독이 모두 끝이 안 좋게 떠나게 되자, 구단 보드진들은 장기적으로 팀을 변화시킬 감독을 찾게 되었으며, 많은 리버풀 팬들이 라파엘 베니테즈 감독의 복귀를 간절히 바랬으나 보드진의 선택은 스완지에서 짧은 패스 위주의 플레이 색깔로 '스완셀로나'라는 이름의 돌풍을 일으키던 브렌던 로저스에게 리버풀 감독직을 맡기는 것이 되었다.

브렌던 로저스는 팀의 암세포나 다름 없는 주급 도둑들을 처분하고 현대적인 전술을 도입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었으나 항상 무언가 2퍼센트 부족한 모습을 보여왔는데, 특히 수비 쪽의 문제가 정말 심각하였다. 로저스 재임 기간 동안 마마두 사코, 콜로 투레, 데얀 로브렌, 알베르토 모레노 등을 영입하며 수비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욕을 보여주긴 했으나, 저 새로운 수비수들은 오히려 수비에서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만 낳게 하였다.

그외에도 이아고 아스파스, 마리오 발로텔리, 라자르 마르코비치 등 흑역사나 다름없는 선수들을 영입하기도 했으나, 필리페 쿠티뉴, 다니엘 스터리지[55] 등 알짜 영입도 없지는 않았다.

13-14 시즌에는 개막 3연승으로 최고의 스타트를 끊었고 지난시즌 막바지 핵이빨 사건으로 징계를 받은 지난시즌 리그득점 2위 루이스 수아레스가 징계에서 돌아오자마자 엄청난 득점력을 뽐내며 다니엘 스터리지, 라힘 스털링 공격진을 앞세워 빅4 진입에 더욱 탄력이 붙었다. 유럽대항전에 나서지 않으면서 국내 컵대회에서도 조기 탈락해 리그에만 오로지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고 25라운드부터 35라운드까지 11연승을 거두면서 단순히 빅4 진입을 넘어 24년만의 리그 우승이 눈앞에 다가왔다. 그러나 마지막 고비로 여겨졌던 36라운드 첼시와의 홈경기에서 주장 제라드의 뼈아픈 실수가 빌미가 되어 2-0 패배를 당했고 37라운드 크리스탈 팰리스 원정에서는 뒷심 부족으로 3-0 리드를 걷어차고 3-3 무승부에 그치면서 막판 엄청난 뒷심을 발휘한 맨체스터 시티에 최종전 끝에 우승을 내주게 됐다. 그래도 챔피언스리그 복귀만 해도 성공이었던 시즌에 리그 준우승은 기대 이상의 엄청난 성과였다. 다만 101득점으로 팀 역대 한 시즌 최다골을 기록하고도 50실점이나 내주는 불안한 수비는 끝내 팀의 발목을 제대로 붙잡았다.

그리고 14-15 시즌을 앞두고 루이스 수아레스가 바르사로 떠나고, 시즌이 시작하고나선 다니엘 스터리지가 부상에 시달리면서 오랜만에 진출한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물론, 리그에서도 졸전들을 펼치며 타팀 팬들에게 웃음거리를 제공했다. 이적생 리키 램버트마리오 발로텔리, 그리고 임대복귀한 파비오 보리니의 경기력은 너무나도 처참하여 '램발보'를 형성해 떠난 수아레스와 부상중인 스터리지를 그립게 만들어 지난시즌의 공격력은 온데간데 없었다. 시즌 도중에 쓰리백 전술을 들고 나와 리그 13경기 무패 기록을 세우며 반등하기도 했으나 결국 시즌 막판에서 무너지며 리그 6위로 마친다. 리그컵과 FA컵에서도 4강에서 떨어지면서 무관 모면도 실패하고 리버풀의 정신적 지주인 스티븐 제라드의 마지막 시즌을 트로피로 장식하지도 못했다. 그의 고별경기였던 스토크와의 최종전에서 6:1로 대패하는 대참사까지.

2015-16 시즌은 팀의 정신적 지주인 스티븐 제라드도 없고, 저번 시즌 에이스였던 라힘 스털링은 팀 분위기를 완전히 개판으로 만들고 맨체스터 시티로 튄 상태였다. 보드진으로부터 이번에 챔스 진출에 성공 못하면 미래를 장담 못한다는 통첩을 받고 절치부심한 모습으로 제임스 밀너, 호베르투 피르미누, 크리스티안 벤테케, 나다니엘 클라인 등을 영입했다. 그러나 이 시즌에도 역시나 약팀과의 경기에서 졸전을 거듭한 끝에, 보드진들조차 인내심의 한계가 도달하여 리그 전반기 머지사이드 더비를 끝으로 브렌던 로저스를 경질시키고 만다.


6.3.1. 2012-13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12-13 시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3.2. 2013-14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13-14 시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3.3. 2014-15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14-15 시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3.4. 2015-16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15-16 시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몰락한 명가의 부활[편집]



7.1. 위르겐 클롭 시대(2015~)[편집]


파일:Jürgen Norbert Klopp.png
위르겐 클롭 감독

우리는 의심하는 자에서 믿는 자로 변해야만 한다.

위르겐 클롭


브렌던 로저스 감독이 불명예스럽게 퇴장하고 난 후, 리버풀 보드진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성공을 거둔 위르겐 클롭 감독에게 리버풀의 지휘봉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베니테즈 감독 퇴장 이후, 로이 호지슨, 케니 달글리시, 브렌던 로저스 감독으로 이어지는 잔혹사를 몇 년 동안 아주 호되게 당해왔던 리버풀 팬덤은 드디어 분데스리가와 유럽에서 검증된 감독이 온다는 소식에 좋아라했다.[56]

당시 리버풀 팬덤은 클롭 감독의 장점들 중에서도 선수들을 보는 안목에 기대를 많이 걸었다. 클롭 감독은 도르트문트 재임 당시에 카가와 신지,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일카이 귄도간, 마츠 후멜스 등을 정말 저렴한 가격에 사들여 포텐을 터뜨리고 우승까지 해 본 경험이 있었기에 리버풀 팬들이 기대를 걸 만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클롭 감독이 도르트문트에 있었던 인맥을 이용해 도르트문트 출신 선수들을 리버풀로 데려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도 있었는데 클롭은 리버풀로 온 지 5년째가 넘어가는 지금도 예전 클럽의 제자들을 단 한 명도 영입하지 않았다.

클롭 감독은 2015-16 시즌 도중에 맡은 팀을 EFL컵 결승, UEFA 유로파 리그 결승으로 인도했다. 유로파리그 결승까지 가는 동안 토너먼트에서 강팀들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비야레알 CF를 차례대로 만났지만 모두 격파하였다. 특히 도르트문트와의 8강 2차전은 명경기였는데 이 항목을 참고하길 바란다. 반면 새로운 영입 없이 충분히 리그 4위권으로 올라갈 수 있는 팀이라는 클롭의 평가가 무색하게 비록 리그에서는 8위라는 안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클롭 감독 특유의 게겐프레싱 색채를 입힌 팀은 아직은 어설퍼도 확실히 전보다 달라져 있었고, 몇 가지 약점만 보완한다면 충분히 기대감을 가질 수 있는 팀이 되어 있었다.

2016-17 시즌의 클롭 감독은 리버풀에서의 첫 이적 시장에 뛰어들어 사디오 마네, 조르지뇨 바이날둠, 조엘 마팁, 로리스 카리우스 등을 영입했다. 그동안 리버풀의 위상이 많이 추락한 관계로, 소위 말하는 빅네임 영입은 없었으나 이때 영입한 마네, 바이날둠, 마팁은 이후 팀에 없어서는 안될 핵심 선수로 자리잡았다. 특히 마네는 주로 오른쪽 날개에서 공격을 책임지며 팀의 에이스로 우뚝 섰다. 리버풀은 이 시즌 필리페 쿠티뉴, 호베르투 피르미누, 사디오 마네, 아담 랄라나를 앞세워 전반기에는 리그 1~2위를 다투기도 했으나 후반기에는 마네의 네이션스컵 차출, 랄라나와 헨더슨의 부상, 게겐 프레싱으로 인한 피로 누적으로 승점을 뺏기는 빈도가 많아지면서 순위가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막판에 꾸역승을 반복한 끝에 애초의 목표였던 리그 4위, 챔피언스 리그 예선 출전 티켓은 획득할 수 있었다. 수비 문제가 아직 완전히 해결이 안 되는 등 아쉬운 점이 많은 시즌이었으나 프리미어리그 빅클럽들을 상대로 단 한 차례의 패배도 허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클롭 감독이 리버풀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였다.

2017-18 시즌은 리버풀이 챔스에 나갈 수 있게 되면서 전보다 더 퀄리티 있는 영입 자원들이 리버풀의 러브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떠오르는 센터백 신성이었던 버질 반 다이크가 대표적이었는데,[57] 결국 반다이크 이적은 여름 이적시장에서 불발되었지만 겨울 이적시장에서 7천만 파운드가 넘는 거액으로 영입이 성사되었다. 이후 판데이크는 리버풀에게 없어서는 안될 핵심 선수로 발돋움 하였다. 이 시즌에 영입된 모하메드 살라, 앤드류 로버트슨, 알렉스 옥슬레이드체임벌린도 팀의 핵심으로 자리잡으며 리버풀이 강팀으로 변모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여태까지 팀의 에이스 역할을 해줬던 필리페 쿠티뉴FC 바르셀로나의 영입 구애에 이적 신청서를 제출하는 청천벽력 같은 사태가 터져버렸다. 태업 논란까지 불거진 선수를 다행히 여름 이적시장에서 어떻게든 팀에 잔류시키긴 했지만, 겨울 이적시장에서 결국 바르사로 떠나버렸다. 팀 최고의 에이스가 떠나버리면서 리버풀에 큰 타격이 될 것이라는 축구팬들의 예상과는 달리, 이 시즌에 처음 선보이게 된 마네-피르미누-살라, 이른바 마누라 라인이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고 겨울에 영입한 판데이크 덕분에 수비가 안정화 되면서 쿠티뉴의 공백을 완전히 잊을 수 있었다.[58]

이 시즌 리버풀은 리그 전반기 때 맨시티에게 5-0, 토트넘에게 4-1로 털리는 악몽을 겪기도 했으나, 후반기에는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이번에도 리그 4위로 시즌을 마치는 데 성공한다. 시즌 무관에 리그 4위가 전부인 리버풀은 유독 이 시즌에 전세계 축구팬들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는데, 그동안 몰락한 클럽으로 취급받던 리버풀이 06-07 시즌 이후 오랜만에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진출했기 때문이었다. 결승 상대는 레알 마드리드 CF였다. 리버풀보다 한 수 위의 팀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리버풀은 지난 토너먼트 8강전에서 당시 유례없는 막강함을 자랑하던 맨체스터 시티를 홈, 원정에서 모두 떡실신 시키고 올라왔으며, 공격진에는 당시 팀과 리그의 득점 기록을 갈아치우며 폭발적인 활약을 보여주던 모하메드 살라가 있기에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러나 경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알의 세르히오 라모스가 고의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살라의 팔을 부상입혀 아웃시켜 버린다. 비록 팀의 주포가 전반전에 아웃되었지만 리버풀은 판데이크를 위시한 수비진들이 레알 공격진들을 안정적으로 틀어막으며 레알을 상대로 꽤 잘 싸우고 있었는데, 당시 골문을 지키던 로리스 카리우스가 문제였다. 골키퍼로서는 절대 해서는 안될 두번의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으며 결국 리버풀이 3-1로 패배하게 만들었다. 패배의 원흉, 카리우스는 결국 다음 시즌에 베식타스로 임대되어 버린다. 비록 원통한 패배를 당한 리버풀이지만, 몇 년 간의 암흑기를 거치면서 유럽 대항전 진출도 간당간당 했던 팀이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것은 선수들도, 감독도, 팬들도 모두 자랑스러워 할 만한 사실이었다. 이미 이 시기에는 많은 타팀 팬들조차 리버풀을 강팀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파일:드디어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클롭.jpg
2018-19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2018-19 시즌 여름 이적시장에서 클롭은 팀의 약점을 메꾸기 위해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다. 약점이었던 골키퍼 자리를, 유럽 무대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던 로마의 알리송 골키퍼로 채웠으며, 파비뉴나비 케이타, 제르단 샤키리를 영입하며 미드필드진의 두께를 늘렸다. 이로서 클롭의 팀은 전보다 완벽한 팀이라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저번 시즌에 챔피언스 리그 결승까지 올라간 경험이 보약이 되었는지 리그에서 파죽지세의 성적을 보여줬다. 30승 7무 1패, 97점으로 클럽 최다 승점 기록을 갈아치웠으나, 당시 크레이지 모드였던 맨체스터 시티에 승점 1점차로 밀려 준우승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맨시티를 상대로 1무 1패의 성적을 거둔 것이 부메랑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리그에서의 막강한 모습을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보여줘, 토너먼트에서 레바뮌 중 뮌헨과 바르사를 만나 다수의 예상을 깨고 차례로 털어버렸다. 특히 4강 1차전에서 0:3으로 패했던 바르사와의 4강 2차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스코어인 4:0으로 승리, 이른바 안필드의 기적이라 불리는 챔스 역사에 길이 남을 대역전극을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지난 시즌에 이어 2연속 챔스 결승 무대를 밟게 되었고, 마침내 결승에서 토트넘 핫스퍼를 2:0으로 꺾고 14년 만에 UEFA 챔피언스 리그 통산 6번째 빅 이어를 들어올리고야 만다. 이로써 리그 2위, 챔스 우승을 기록하며 연이은 감독 잔혹사와 끝이 보이지 않던 암흑기의 종지부를 찍고, 클롭은 몰락했던 명가의 새로운 전성 시대를 열게 되었다.

파일:Liverpool FC 2019-20 Premier League Champions.jpg
2019-20 프리미어 리그 우승

2019-20 시즌에는 영입보다는 기존 선수단을 지키는데 중점을 두고 시즌을 시작하였다. 전 시즌 챔스 우승 자격으로 타 국가에서 슈퍼컵, 클럽 월드컵까지 소화해야 하는 지옥 일정을 앞두고 우려가 상당했지만, 클롭과 선수단은 엄청난 정신력과 체력으로 이를 견뎌내고 결국 UEFA 슈퍼컵FIFA 클럽 월드컵에서 연달아 우승을 차지하며, 잉글랜드 클럽 최초로 한 해에 챔피언스 리그 - 슈퍼컵 - 클럽 월드컵을 모두 석권하는 컨티넨탈 트레블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렇게 역대급으로 남을 만한 압도적인 페이스를 선보이며 리그에서 무패로 전반기를 마무리 하였다. 이후 후반기에도 리그에선 그 기세를 이어 갔으나 겨울 휴식기 후 조금 주춤하며 결국 무패가 깨졌고, 챔스와 FA컵에서도 아쉽게 16강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다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전 세계적 대유행으로 인해 우승을 코 앞에 두고 리그가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도 겪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약 3개월 만에 리그가 재개되었고 결국 리버풀은 31R에 조기우승이 확정되었다. 이로써 잉글랜드 프로축구 역사상 가장 빠른 그리고 날짜로 따지면 가장 늦게 리그 우승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또한 리그에서 32승 3무 3패를 기록, 클럽 역사상 최다 승점인 99점을 달성하며 프리미어 리그 출범 후 최초이자, 30년 만에 1부 리그 통산 19번째 우승을 안긴 클롭은 마침내 콥들의 오랜 염원을 풀어내어 지난 시즌에 이어서 구단 역사에 길이 남을 성공적인 한 해를 보냈다.

2020-21 시즌에는 그야말로 롤러코스터를 탄 시즌을 보냈는데, 전반기에는 1위라는 훌륭한 성적을 유지했으나 시즌 중반부터 센터백 포지션을 비롯해 주축 선수들의 역대급 줄부상 등 여러 악재들이 겹치면서 홈 6연패의 늪에 빠져 한때 8위까지 떨어지는 최악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다행히도 시즌 막판 10경기에서 8승 2무로 극적인 반전을 일으키는데 성공하며, 끝내 리그 3위로 선방하였다. 비록 이전 시즌처럼 우승을 거두진 못했으나, 소위 하늘이 버린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불운했던 시즌을 어떻게든 수습하여 챔스권 수성에 성공한 점은 클롭과 리버풀 선수단이 오히려 박수를 받을만한 성과였다.

2021-22 시즌에는 지난 시즌의 여파로 축구 전문가들과 언론에서 예측했던 성적보다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한때 승점 14점 차까지 벌어졌던 격차를 1점 차까지 추격히면서 맨시티와 치열한 리그 우승 레이스를 펼쳤고, 잉글랜드 클럽 중 역대 최초로 단일 시즌에 EFL컵, FA컵,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모두 진출하기도 했다. 비록 리그와 챔스에서 한 끗 차이로 준우승을 거둔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동안 스쿼드 뎁스 문제로 거의 던지다시피 해왔던 자국 컵 대회에서 마침내 도메스틱 더블을 이뤄내었다.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펼쳐진 두 번의 자국 컵 대회 결승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첼시를 연달아 잡아내며, 10년 만에 EFL컵 우승16년 만에 FA컵 우승까지 차지하게 되었고, 클롭은 리버풀 역사상 최초로 메이저 대회를 모두 제패한 감독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2022-23 시즌 초에 맨시티를 상대로 승리하여 FA 커뮤니티 실드에서 우승을 차지함에 따라, 클롭 체제 하에 리버풀은 7개의 주요 대회를 모두 석권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좋은 출발을 알리는 듯 했으나 이후 전시즌 쿼드러플을 노리던 팀은 어디가고 없고 리그에서 부진을 거듭하며 최종 순위 5위로 6년만에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실패하였다.[59] 자국 컵 대회 역시 빠르게 탈락하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16강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작년 시즌의 리벤지 매치를 가졌지만 탈락하였다. 결국 고여버린 선수단 스쿼드와 이에 따른 전술적 한계를 견디지 못했다. 이에는 여러 이유들이 종합된 문제였으며, 클롭 부임 이후 가장 부진한 성적이라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여전히 콥들을 비롯한 선수단의 전격지지를 받고 있는 클롭인 만큼 새 시작이 필요한 시점이며, 시즌 후반기 라이벌 맨유를 상대로 역사적인 7-0 대승을 거두기도 하고 마지막 10경기에서 8승 2무로 유로파 리그 진출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7.1.1. 2015-16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15-16 시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1.2. 2016-17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16-17 시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1.3. 2017-18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17-18 시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1.4. 2018-19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18-19 시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1.4.1. 안필드의 기적[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안필드의 기적(2019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1.5. 2019-20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19-20 시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1.6. 2020-21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20-21 시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1.7. 2021-22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21-22 시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1.8. 2022-23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22-23 시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1.9. 2023-24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리버풀 FC/2023-24 시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역대 주장 목록[편집]


국적
이름
기간
비고
[[스코틀랜드|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스코틀랜드
]][[틀:국기|
]][[틀:국기|
]]

앤드류 한나
1892~1895
최초의 주장
최초의 스코틀랜드 출신 주장

지미 로스
1895~1897


존 매카트니
1897~1898


해리 스토러
1898~1899
최초의 잉글랜드 출신 주장

알렉스 레이즈벡
1899~1909


아서 고다드
1909~1912


에브라임 롱워스
1912~1913


해리 로우
1913~1915

제1차 세계대전으로 리그 중단

도널드 맥킨리
1919~1920


에브라임 롱워스
1920~1921


도널드 맥킨리
1921~1928


톰 브로밀로우
1928~1929


제임스 잭슨 주니어
1929~1930


톰 모리슨
1930~1931


톰 브래드쇼
1931~1934


톰 쿠퍼
1934~1939


맷 버스비
1939~1940

제2차 세계대전으로 리그 중단

윌리 페이건
1945~1947


잭 발머
1947~1950


필 테일러
1950~1953


빌 존스
1953~1954


로리 휴즈
1954~1955


빌리 리델
1955~1958


조니 휠러
1958~1959

로니 모란
1959~1960


딕 화이트
1960~1961


론 예이츠
1961~1970


토미 스미스
1970~1973


엠린 휴즈
1973~1979


필 톰슨
1979~1981


그레이엄 수네스
1982~1984


필 닐
1984~1985


앨런 한센
1985~1988


로니 웰런
1988~1989
최초의 아일랜드 출신 주장
최초의 영연방이 아닌 국가 출신 주장

앨런 한센
1989~1990


로니 웰런
1990~1991


마크 라이트
1991~1993


이안 러쉬
1993~1996
최초의 웨일스 출신 주장

존 반스
1996~1997
최초의 흑인계 주장

폴 인스
1997~1999


제이미 레드냅
1999~2002


사미 히피아
2001~2003
최초의 비(非)브리튼 섬 - 아일랜드 섬 출신 주장

스티븐 제라드
2003~2015
가장 오랜기간 역임한 주장

조던 헨더슨
2015~2023
프리미어 리그 출범 후, 최초로 리그 우승한 주장

버질 반 다이크
2023~
최초의 네덜란드 출신 주장

  • 국적으로 따지자면 잉글랜드가 23명으로 가장 많고, 스코틀랜드가 15명, 나머지 아일랜드와 웨일스, 핀란드, 네덜란드 1명 씩이다.

9. 역대 올해의 선수 목록[편집]


시즌
이름
국적
포지션
경기
스탯
비고
01-02
사미 히피아
파일:핀란드 국기.svg 핀란드
수비수
57경기
5골

02-03
대니 머피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미드필더
55경기
12골

03-04
스티븐 제라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미드필더
47경기
6골

04-05
제이미 캐러거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수비수
56경기
0골

05-06
스티븐 제라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미드필더
53경기
23골
PFA 올해의 선수상 수상
06-07
51경기
11골

07-08
페르난도 토레스
파일:스페인 국기.svg 스페인
공격수
46경기
33골

08-09
스티븐 제라드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미드필더
44경기
24골
FWA 올해의 축구선수상 수상
09-10
페페 레이나
파일:스페인 국기.svg 스페인
골키퍼
52경기
클린시트 17번

10-11
루카스 레이바
파일:브라질 국기.svg 브라질
미드필더
47경기
1골

11-12
마르틴 슈크르텔
파일:슬로바키아 국기.svg 슬로바키아
수비수
45경기
4골

12-13
루이스 수아레스
파일:우루과이 국기.svg 우루과이
공격수
44경기
30골

13-14
37경기
31골
PFA 올해의 선수상 수상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선수상 수상
FWA 올해의 축구선수상 수상
14-15
필리페 쿠티뉴
파일:브라질 국기.svg 브라질
미드필더
52경기
8골

15-16
43경기
12골

16-17
사디오 마네
파일:세네갈 국기.svg 세네갈
공격수
29경기
13골

17-18
모하메드 살라
파일:이집트 국기.svg 이집트
공격수
51경기
44골
PFA 올해의 선수상 수상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선수상 수상
FWA 올해의 축구선수상 수상
18-19
버질 판데이크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네덜란드
수비수
50경기
6골
PFA 올해의 선수상 수상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선수상 수상
UEFA 올해의 선수상 수상
19-20
조던 헨더슨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미드필더
40경기
4골
FWA 올해의 축구선수상 수상
20-21
모하메드 살라
파일:이집트 국기.svg 이집트
공격수
51경기
31골

21-22
46경기
31골

22-23
알리송 베케르
파일:브라질 국기.svg 브라질
골키퍼
49경기
클린시트 17번





[1] 하울딩은 보수당의 의원이기도 했는데 에버튼의 구단주들은 대부분 진보당의 의원들이었다.[2] 많은 사람들이 장미 더비가 노스웨스트 더비인줄 알지만 장미 더비는 맨유 vs 리즈 유나이티드 FC와의 것이다.[3] 리버풀의 창단일이 어디에는 3월 15일로 나와있고 어디는 6월 3일로 나오는데 3월 15일은 하울딩과 바클리가 구단을 창단한 날이고 6월 3일은 리버풀 FC가 승인받은 날이다. 공식적으로는 6월 3일이다.[4] 처음 리버풀은 풋볼 리그에 가입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5] 이 경기에서 베리는 골키퍼가 퇴장당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10명으로 경기했다.[6] 버밍엄 시티 FC의 전신.[7] 누가 다음 차례가 될까요?의 질문의 답은 이 포스터에서 왕관을 수여받은 남자가 있었던 팀 선덜랜드였다. 1900-01 시즌에 리버풀에 밀려 준우승했던 선덜랜드는 1901-02 시즌에 1부리그 우승을 거두었다.[8] 샘 레이볼드가 잉글랜드 풋볼리그 첫 단일시즌 30골을 기록하며 31골로 리버풀 역사상 첫 득점왕에 올랐다.[9] 31골을 득점한 간판 공격수와 간판 수비수였던 샘 레이볼드와 윌리엄 골디의 포츠머스 FC 이적 파동으로 인한 출장 정지 징계가 강등의 제1원인이었다. 당시 포츠머스는 풋볼 리그가 아닌 런던 포함 남부 축구 팀들이 참가하는 서던리그에 속해 있었는데 포츠머스는 레이볼드를 영입하려고 접촉했으나 불법으로 간주되었으며 포츠머스로의 이적 금지와 함께 레이볼드는 7개월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전력의 핵심의 둘이 빠진 리버풀은 5위에서 강등권으로 추락했다. 출장정지가 끝난 뒤 골디는 서던리그의 풀럼으로 이적했고 레이볼드는 실전 감각 부족으로 인해 15경기에서 4득점에 그친다.[10] 이 상황에서 난세영웅이 있었으니 22세의 샘 하디 골키퍼였다. 1905년 체스터필드에서 이적한 하디는 당초 네드 도이그 골키퍼의 백업이었으나 도이그가 류머티즘 증세로 인해 대신 출장하게 되었고 하디는 그의 공백을 뛰어나게 메우며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11] 보어 전쟁 때 많은 리버풀 출신 병사들이 전사한 곳의 지명인 스피온 콥(Spion Kop)을 추모의 의미로 붙인 것에서 유래한다.[12] 06-07 15위, 07-08 8위, 08-09 16위, 10-11 13위, 11-12 17위, 12-13 12위, 13-14 16위, 14-15 13위[13] 징계를 받은 선수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공로로 1919년 징계를 해제받았으나, 토마스 페어폴의 경우 전후에 곧바로 은퇴했다.[14] 리버풀 역사상 첫 리버풀 선수 출신 감독이다.[15] 사임한 뒤 교통사고로 인해 다리가 부러지자 그 해 은퇴한다.[16] 378경기 241골로 구단 역대 득점 3위를 기록한 선수이다.[17] 1913년부터 22년간 리버풀에서 활약했던 엘리샤 스콧은 이 시즌에 주전에서 밀리자 고향팀 벨파스트로 떠나 리버풀에서의 커리어를 마감했다. 현재까지도 최장기간 리버풀 FC 소속 선수로 남아있다.[18] 무려 24명의 선수들을 방출 명단에 올려놓고 1년 동안 모두 방출시키는 조치를 했다.[19] 선수들의 탈의실 옆 신발을 놓는 좁은 공간을 지칭하는데 빌 샹클리는 이 공간에 코치 스태프들을 불러모아 함께 차를 마시며 전술 구상과 구단 계획 같은 것들을 상의했다고 한다. 이 부트 룸 멤버였던 당시 코칭스태프 밥 페이즐리조 페이건은 훗날 서로 합해서 빅 이어 4개를 리버풀로 가져올 정도로 크게 성공한다.[20] 왼쪽부터 빌 샹클리, 밥 페이즐리, 조 페이건, 로니 머랜, 루벤 베넷, 톰 손더스[21] 이 경기는 리버풀의 장내 아나운서 조지 셰프턴이 안필드의 목소리가 된 첫 경기이기도 했다.[22] 첫 번째 사진은 1977년 첫 우승, 두 번째 사진은 1978년 두 번째 우승이다.[23] 얄궂게도 리버풀의 트레블을 저지한 맨유가 이후 98-99 시즌에 잉글랜드 첫 트레블을 달성한다.[24] 재미있게도 유러피언 슈퍼컵에서 키건이 간 함부르크와 상대했는데 1차전 원정에서 1대1로 비긴 뒤 2차전 홈에서 6대0으로 학살해버리며 키건을 머쓱하게 했다. 이때 달글리시도 한 골을 넣었다.[25] 해당 시즌 노팅엄 포레스트는 첫 유러피언컵 우승에 성공했다.[26] 1978년 1월부터 이어온 63경기 연속 홈 무패 기록을 마감했다. 이 기록은 2007년 첼시의 86경기 홈 무패로 경신되었다.[27] 참고로 이 경기가 2022년 현재까지 레알 마드리드의 마지막 챔스 준우승 경기이다. 이 이후로 레알 마드리드는 챔스 결승전에 올라가기만 하면 무조건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 중 두번은 리버풀을 상대로 우승했다.[28] 사실, 정식 트레블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이 원래 트레블의 기본 조건을 충족하려면 유러피언 컵 우승과 리그 우승, FA컵 우승까지 총 3개의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려야 하는데 리버풀이 들어올린 3개의 우승컵 중에서 유러피언컵과 리그 우승 트로피 2개는 트레블의 조건을 만족하고 있으나, 리그컵의 경우 FA컵과 달리 정식 트레블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기때문에 잉글랜드 구단 내에서의 정식 트레블을 최초로 이룬 클럽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로 보고 있다.[29] 승부차기에서 보여준 브루스 그로벨라의 현란한 춤 장면은 훗날 이스탄불의 기적예지 두덱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30] 유러피언컵, UEFA컵, UEFA 컵위너스컵[31]헤이젤 참사로 인해 리버풀 말고도 잉글랜드의 모든 팀이 5년간 출전이 금지되었다. 게다가 징계 후 리그 우승은 다름이 아니라 라이벌인 에버튼이 출전 금지 때문에 유러피언컵 출전이 무산되면서 두 팀간의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32] 물론 이는 있지도 않은 사실을 날조한 것이다.[33] 백패스를 골키퍼가 손으로 잡는 것이 허용되는 시기에 리버풀의 존 반스는 무리하게 공격에 나갔다가 역습을 허용하여 통한의 실점의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34] 여담으로 크리스탈 팰리스는 결승에서 재경기 끝에 맨유에 패해 준우승했다. 이때 맨유는 리그에서 큰 부진을 겪었었고 FA컵에서 우승하지 못했다면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여기서 경질당할 뻔했다.[35] 입석 콥 스탠드의 마지막 경기였던 노리치와의 홈 최종전에서 0:1로 지고 말았다.[36] 이때 3위로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한 리즈 유나이티드는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에 진출했다.[37] 당시엔 워싱턴컵[38] 이후 맨시티는 18년이 지난 2021년이 돼서야 코로나로 인한 무관중 상태의 안필드에서 승리를 따낸다.[39]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빚더미의 첼시를 인수하여 강팀으로 만들게 한 결정적인 경기가 됐다.[40] 아스날은 승점 90점, 리버풀은 60점, 꼴찌 울버햄튼은 33점이다. 아깝게 5위한 02-03 시즌보다도 승점이 4점 적었다.[41] 아이러니하게도 오언이 이적하자마자 리버풀은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기록했다. 반면 오언은 레알에서 슈퍼서브에 그쳤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16강에서 유벤투스에게 탈락하고 말았다. 16강 마드리드의 시작이었던 시즌.[42] 2005년 1월에 리버풀로 영입되었다.[43] 아데바요르와 사비올라가 있었지만, 아데바요르는 신인에 불과한 동시에 잡음이 많았고, 사비올라는 바르샤에서 임대되었었다.[44] 해리 키웰은 이 시즌 리그에서 단 1골만 득점하였고, 지브릴 시세는 2004년 10월 30일 부상으로 시즌아웃이 예상되었으나 2005년 4월 13일 유벤투스와의 8강 2차전에서 복귀했다. 시즌 중반 겨울 이적시장에서 합류한 페르난도 모리엔테스는 레알에서 챔스 조별 리그에 출전한 기록이 있어 본선 라운드 출전 명단에 등록하지 못하였다.[45] 이 시즌은 리그 기준 첼시 역대 최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강했다.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리그 15실점이 바로 이 시즌 기록.[46] 이 시즌 발롱도르 2위[47] 경기 이후 무리뉴의 유령이 골을 넣었다는 인터뷰로 인해 이는 아직까지도 유령 골 논란으로 알려져있다. 골라인을 넘어가는 타이밍에 윌리엄 갈라스가 바로 걷어냈는데, 이게 골라인을 넘어갔는지 안 넘어갔는지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남아있는 사진이나 영상 자료도 걷어내는 갈라스 뒤편에서 찍은 것 밖에 없어 진실은 여전히 미궁 속에 있다.[48] 그러나 골이 아니었더라도 체흐 퇴장에 페널티 킥 선언이 될 상황이었다.[49] 영입시장 적자를 만회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하락세에 접어들었거나 애매했던 자원들이기는 했다. 결국 벨라미와 곤살레스는 한 시즌 만에 팀을 떠나게 되었다.[50] 사실 해리 큐얼, 부데바인 젠덴, 마크 곤잘레스, 루이스 가르시아, 욘 아르네 리세, 파비우 아우렐리우, 저메인 페넌트 등 윙어로 뛸 수 있는 선수 자체는 많았으나 부상, 기량, 포지션 등 문제로 왼쪽 오른쪽 불문하고 꾸준히 밥값하는 선수가 없다시피 했다[51] 맨유와의 두 차례 맞대결에서 모두 패한 것이 뼈아팠다.[52] 올드 트래포드에서는 지금도 회자되는 4:1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레알을 4:0으로 꺾은지 3일 만에 또 빅클럽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53] 토레스가 유로 2008 출전의 영향으로 잔부상에 시달릴 때 승점을 많이 잃었다.[54] 다행히도 토레스는 월드컵 전에 회복하여 월드컵에 출전했지만 결과는...[55] 이 선수는 부상을 자주 당하는 것만 아니면 정말 월드클래스로 성장할 잠재력이 있던 선수였다.[56] 당시 클롭 감독은 암흑기에 빠져있던 도르트문트를 일으켜 세워 FC 바이에른 뮌헨이 버티는 분데스리가에서 두 번의 리그 우승과 한 번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 진출을 경험한 사람이다.[57] 당시 판데이크의 소속팀이 리버풀로부터 여태까지 아담 랄라나, 데얀 로브렌, 사디오 마네, 나다니엘 클라인 등 핵심 자원들을 빼앗겨 왔던 사우스햄튼 FC였기에 이번에는 쉽게 내줄 것 같지 않아 보이더니, 역시나 사우스햄튼이 리버풀의 접촉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급기야는 불법 접촉으로 협회에 제소하겠다는 초강수를 둔다.[58] 이와 반대로 쿠티뉴는 바르사 2년차 때 팀 적응에 완전히 실패하면서 결국 19-20 시즌에 뮌헨으로 임대 가게 되는 초라한 행보를 보이고 만다.[59] 시즌 중 한번도 리그에서 4위 이상 올라가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