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황후 임씨
덤프버전 :
<bgcolor=#DC143C><height=33px>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1. 개요[편집]
북위의 고종 효문제 탁발굉의 추존 황후. 평량(平涼) 태수 임승(林勝)의 딸. 평량공, 정주(定州) 자사 임금려(林金閭)의 조카.
2. 생애[편집]
임씨의 작은아버지 임금려는 문성제를 길러준 유모인 보태후 상씨(常氏)로부터 총애를 받아 상서에 임명되고 평량공에 봉해져 귀한 신분이 되었다. 이후 임금려의 형 임승 또한 평량 태수에 임명되었고, 임금려도 정주 자사로 승진하면서 권세를 누리는가 싶었으나, 어린 헌문제가 즉위하고 권신으로 등극한 태원왕 을혼(乙渾)에 의해 임승 형제 모두 살해당했다. 임승에게는 아들이 없고 임씨를 포함해서 두 딸 밖에 없었는데, 아버지를 잃은 임씨 자매는 궁중으로 거두어져 궁녀가 되었다. 임씨는 아름다운 얼굴과 빼어난 미색을 갖춰 효문제 탁발굉이 그녀를 후궁으로 삼았다.
태화 7년(483년) 5월 5일, 임씨가 효문제 탁발굉의 아들 탁발순(拓跋恂)을 낳았다.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풍태후는 탁발순이 태어나자마자 그를 장차 태자로 삼기 위해 북위의 옛 관습인 자귀모사(子貴母死)에 의거하여 임씨를 사사하려 하였다. 성정이 어질었던 효문제는 후궁 임씨를 불쌍히 여겨, 풍태후에게 임씨를 죽이지 말아달라 사정했으나, 풍태후는 황제의 청을 단호히 거절하고 끝내 임씨를 사사했다. 풍태후는 어린 탁발순을 거두어 임씨 대신 양육하였다. 임씨 사후 효문제는 그녀를 귀인(貴人)으로 추봉하고 운중금릉(雲中金陵)에 안장하였다.
태화 11년(493년) 7월, 효문제가 임씨 소생의 탁발순을 태자로 삼고, 임씨를 '정황후(貞皇后)'로 추시하였다.
태화 20년(496년) 12월, 원순이 여러 번 측근들을 모아 은밀히 반란을 모의하다 걸리니, 효문제가 청휘당(清徽堂)에서 대신들과 원순을 폐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였다. 원순은 결국 폐서인되어 무비성(無鼻城)에 유폐되었고, 효문제는 경비병을 두어 원순을 감시하게 하였다.
태화 22년(498년) 4월, 15세에 폐태자가 되어 쫓겨난 원순은 효문제가 보내주는 음식과 옷으로 간신히 배고픔과 추위만 면하고 초라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유폐된 이래로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있었고 효문제 역시 슬슬 마음이 약해지던 와중에, 어사중위 이표(李彪)가 원순이 또다시 모반을 꾸몄다고 모함하였다. 분노한 효문제는 중서시랑 형만(邢巒)과 함양왕 원희(元禧)를 보내 원순을 사사하게 하였다. 원순은 별말 없이 효문제가 내린 독주를 마신 뒤 죽었고, 그의 장례는 서인의 예로 치러져 하양(河陽)에 묻혔다. 이때 원순의 생모 정황후 임씨 역시 황후 신분이 박탈되어 서인이 되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4-02-21 21:28:56에 나무위키 정황후 임씨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아들 원순이 반역죄로 사사당하면서 서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