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발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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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의 황족. 환제 탁발의타의 후손.
젊은 시절부터 도무제 탁발규를 따라다니며 중원 평정의 공을 세워 정주(定州)와 병주(並州) 자사를 역임하였다. 도무제 탁발규가 백사(柏肆)에서 후연의 황제 모용보가 이끄는 대군과 치열하게 싸울 때, 북위군 소속의 탈영병 하나가 진양(晉陽)으로 도망쳐서 "위나라가 대패했고 탁발규는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진양을 수비하던 장수 봉두진(封竇真)이 이를 곧이곧대로 믿고 반란을 일으키니, 병주자사 탁발소연이 진양의 반군을 제압하고 봉두진을 참수하였다.
하지만 이런 헛소문에 넘어간 것은 봉두진 뿐만이 아니었던지라, 하란부의 부력권(附力眷), 흘린부(紇鄰部)의 익물니(匿物尼), 흘해부(紇奚部)의 질노근(叱奴根) 등이 일제히 봉기하여 나라를 어지럽히자, 운중(雲中)을 지키던 남양공 탁발순(拓跋順) 홀로 반란을 능히 진압하지 못 했다. 이에 도무제는 후연과 싸우는 와중에도 안원장군 유악(庾岳)과 기병 10,000명을 보내 3부(部)를 토벌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당시 도무제는 참합피 전투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을 생매장한 것을 후회하며 새로 귀부한 자들을 위무하고자 하였는데, 탁발소연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자비하게 살육하는 것을 보고 그를 면직시킨 뒤 해목(奚牧)을 병주 자사로 삼았다.
황시 2년(397년) 10월, 도무제가 마침내 중산(中山)을 함락시키자, 탁발소연을 유주(幽州) 자사로 임명하고 다시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도무제의 기대와 달리 탁발소연은 호화롭게 사치 부리는 데에만 힘쓰고 일을 태만하다가 상곡(上谷) 태수로 좌천당했다. 그래도 이전의 공은 인정받아 곡양후(曲陽侯)에 봉해졌다.
도무제는 도가 사상인 황로학에 심취하여 나라의 풍속을 순수하게 만든다는 명목으로 신하들에게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였으나, 탁발소연은 번번이 이 지침을 어기고 사치를 즐기다 걸려 도무제의 노여움을 샀다. 결국 탁발소연은 죄가 누적된 나머지 천사 6년(409년) 3월에 도무제로부터 사약을 받고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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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양후(曲陽侯) 拓跋素延 | 탁발소연 | |
작위 | 곡역후(曲陽侯) → 무릉후(武陵侯) |
성 | 탁발(拓跋) |
휘 | 소연(素延) |
자 | 불명 |
생몰 | ? ~ 409년 3월 |
출신 | 운중군(雲中郡) 성락현(盛樂縣) |
1. 개요[편집]
북위의 황족. 환제 탁발의타의 후손.
2. 생애[편집]
젊은 시절부터 도무제 탁발규를 따라다니며 중원 평정의 공을 세워 정주(定州)와 병주(並州) 자사를 역임하였다. 도무제 탁발규가 백사(柏肆)에서 후연의 황제 모용보가 이끄는 대군과 치열하게 싸울 때, 북위군 소속의 탈영병 하나가 진양(晉陽)으로 도망쳐서 "위나라가 대패했고 탁발규는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진양을 수비하던 장수 봉두진(封竇真)이 이를 곧이곧대로 믿고 반란을 일으키니, 병주자사 탁발소연이 진양의 반군을 제압하고 봉두진을 참수하였다.
하지만 이런 헛소문에 넘어간 것은 봉두진 뿐만이 아니었던지라, 하란부의 부력권(附力眷), 흘린부(紇鄰部)의 익물니(匿物尼), 흘해부(紇奚部)의 질노근(叱奴根) 등이 일제히 봉기하여 나라를 어지럽히자, 운중(雲中)을 지키던 남양공 탁발순(拓跋順) 홀로 반란을 능히 진압하지 못 했다. 이에 도무제는 후연과 싸우는 와중에도 안원장군 유악(庾岳)과 기병 10,000명을 보내 3부(部)를 토벌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당시 도무제는 참합피 전투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을 생매장한 것을 후회하며 새로 귀부한 자들을 위무하고자 하였는데, 탁발소연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자비하게 살육하는 것을 보고 그를 면직시킨 뒤 해목(奚牧)을 병주 자사로 삼았다.
황시 2년(397년) 10월, 도무제가 마침내 중산(中山)을 함락시키자, 탁발소연을 유주(幽州) 자사로 임명하고 다시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도무제의 기대와 달리 탁발소연은 호화롭게 사치 부리는 데에만 힘쓰고 일을 태만하다가 상곡(上谷) 태수로 좌천당했다. 그래도 이전의 공은 인정받아 곡양후(曲陽侯)에 봉해졌다.
도무제는 도가 사상인 황로학에 심취하여 나라의 풍속을 순수하게 만든다는 명목으로 신하들에게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였으나, 탁발소연은 번번이 이 지침을 어기고 사치를 즐기다 걸려 도무제의 노여움을 샀다. 결국 탁발소연은 죄가 누적된 나머지 천사 6년(409년) 3월에 도무제로부터 사약을 받고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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