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당(북위)
덤프버전 :
<bgcolor=#DC143C><height=33px>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남북조시대 유송, 북위의 관료로 자는 처언(處言). 청하군(淸河郡) 동무성현(東武城縣) 출신이다.
장당의 6대조는 서진에서 대장추를 지낸 장홍(張弘)이다. 장당의 부친 장화(張華)는 남연에서 좌복야(左僕射)를 지냈다.
장당은 유송에서 급사중(給事中), 태산태수(泰山太守)를 역임했고 청기2주장사, 보국부 장사를 역임했고 위군태수(魏郡太守)를 겸임했다.
465년, 전폐제 유자업이 수적지에게 시해당하고 상동왕(湘東王) 유욱이 즉위하니 이가 제6대 황제인 명제였다. 장당은 명제 즉위 후 동안동관2군태수(東安東莞二郡太守)가 되어 팽성의 동북쪽 단성(團城)에서 진안왕 유자훈을 지지하고자 거병하였다. 유자훈의 난이 진압된 뒤 장당은 유송 조정에 투항하여 467년 관군장군(冠軍將軍), 동서주자사(東徐州刺史)에 제수되었다.
468년, 울원을 통해 북위에 귀순하였다. 울원이 이를 조정에 상주하여 장당은 북위로부터 관군장군, 동서주자사에 제수되었고 북위 조정에서 중서시랑(中書侍郞) 고려(高閭)를 파견하여 장당을 자사로 임명하였다. 이후 입조해서 북위 조정으로부터 설안도, 필중경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았고 평륙후(平陸侯)에 봉해졌으며, 평원장군(平遠將軍)이 더해졌다.
장당은 열린 성격으로 구휼을 잘 했으며, 청주와 제주의 선비들은 비록 먼 친척 관계라 하더라도 모두 장당을 중시하였다. 이부(李敷)와 이흔(李訢) 등이 문성문명황후로부터 총애를 받았는데, 장당과는 진심을 드러내고 거리낌없이 이야기했다. 필중경 등도 장당을 매우 존경했고 고윤지 또한 장당을 중시하였다. 이후 474년에 죽어서 평남장군(平南將軍),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추증되고 강후(康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 ||||||||||||||||||||||||||||||||||||||||||||||||||||||||||||||||||||||||||||||||||||||||||||||||||||||||||||||||||||||||||||||||||||||||||||||||||||||||||||||||||||||||||||||||||||||||||||||||||||||||||||||||||||||||||||||||||||||||||||||||||||||||||||||||||||||||||||||||||||||||||||||||||||||||||||||||||||||||||||||||||||||||||||||||||||||||||||||||||||||||||||||||||||||||||||||||||||||||||||||||||||||||||||||||||||||||||||||||||||||||||||||||||||||||||||||||||||||||||||||||||||||||||||||||||||||||||||||||||||||||||||||||||||||||||||||||||||||||||||||||||||||||||||||||||||||||||||||||||||||||||||||||||||||||||||||||||||||||||||||||||||||||||||||||||||||||||||||||||||||||||||||||||||
|
張讜 장당 | |
시호 | 강(康) |
작호 | 임치현자(臨淄縣子) |
성 | 장(張) |
이름 | 당(讜) |
자 | 처언(處言) |
부친 | 장화(張輯) |
본관 | 청하군(淸河郡) 동무성현(東武城縣) |
생몰 | ? ~ 474년 |
국적 | 유송(劉宋) → 북위(北魏) |
1. 개요[편집]
남북조시대 유송, 북위의 관료로 자는 처언(處言). 청하군(淸河郡) 동무성현(東武城縣) 출신이다.
2. 생애[편집]
장당의 6대조는 서진에서 대장추를 지낸 장홍(張弘)이다. 장당의 부친 장화(張華)는 남연에서 좌복야(左僕射)를 지냈다.
장당은 유송에서 급사중(給事中), 태산태수(泰山太守)를 역임했고 청기2주장사, 보국부 장사를 역임했고 위군태수(魏郡太守)를 겸임했다.
465년, 전폐제 유자업이 수적지에게 시해당하고 상동왕(湘東王) 유욱이 즉위하니 이가 제6대 황제인 명제였다. 장당은 명제 즉위 후 동안동관2군태수(東安東莞二郡太守)가 되어 팽성의 동북쪽 단성(團城)에서 진안왕 유자훈을 지지하고자 거병하였다. 유자훈의 난이 진압된 뒤 장당은 유송 조정에 투항하여 467년 관군장군(冠軍將軍), 동서주자사(東徐州刺史)에 제수되었다.
468년, 울원을 통해 북위에 귀순하였다. 울원이 이를 조정에 상주하여 장당은 북위로부터 관군장군, 동서주자사에 제수되었고 북위 조정에서 중서시랑(中書侍郞) 고려(高閭)를 파견하여 장당을 자사로 임명하였다. 이후 입조해서 북위 조정으로부터 설안도, 필중경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았고 평륙후(平陸侯)에 봉해졌으며, 평원장군(平遠將軍)이 더해졌다.
장당은 열린 성격으로 구휼을 잘 했으며, 청주와 제주의 선비들은 비록 먼 친척 관계라 하더라도 모두 장당을 중시하였다. 이부(李敷)와 이흔(李訢) 등이 문성문명황후로부터 총애를 받았는데, 장당과는 진심을 드러내고 거리낌없이 이야기했다. 필중경 등도 장당을 매우 존경했고 고윤지 또한 장당을 중시하였다. 이후 474년에 죽어서 평남장군(平南將軍),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추증되고 강후(康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4-02-26 13:02:48에 나무위키 장당(북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