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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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북위의 관료로 자는 자장(子章). 대군(代郡) 출신.
2. 생애[편집]
연봉은 학문을 좋아했고 경전과 사서에 널리 통달했으며, 음양과 참위에 대해서도 배웠다. 대나라의 탁발십익건이 연봉의 명성에 대해서 듣고 사람을 보내 예를 갖추어 연봉을 초빙했으나 연봉은 탁발십익건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탁발십익건은 이에 군대를 이끌고 대성을 포위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봉이 나오지 않는다면 내가 장차 너희들을 마구 죽일 것이다.
대성의 사람들은 두려워해서 이에 연봉을 탁발십익건에게 보냈다. 탁발십익건은 연봉과 대화를 나누면서 기뻐했고 귀빈의 예로 연봉을 대우하였다. 뒤에 연봉은 좌장사(左長史)가 되어 국정에 참여했으며, 탁발식에게 경전을 교육했다.
이후 전진의 부견이 우념(牛恬)을 사신으로 보내면서 탁발십익건도 연봉을 전진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다음은 부견과 연봉 사이에 오간 대화이다.
부견: 대왕(代王)은 어떤 사람이오?
연봉: 대왕께서는 너그럽고 온화하며 어질며, 지모가 높고 심원하며, 한 시대의 뛰어난 임금이자 항상 천하를 병탄할 뜻을 품으셨습니다.
부견: 북방의 사람들은 단단한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가 없어서 적이 약하면 전진하고 강하면 물러난다는데, 어떻게 천하를 병탄할 수 있소?
연봉: 북방의 사람들은 용맹하고 씩씩하며, 말에 올라 세 자루의 무기를 쥐며 나는 듯이 달립니다. 주상께서는 뛰어난 재능으로 북쪽을 복종시키셨고 100만 명의 군사들을 거느리며 호령을 가지런히 하셨습니다. 군대는 군수품이나 식량의 어려움이 없어도 가볍게 진군하고 빠르게 승리하여 적으로부터 물자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남방이 피폐하고 북쪽이 항상 승리하는 이치입니다.
부견: 저들은 얼마만큼의 인마를 보유하고 있소?
연봉: 군사는 수십 만이고 말은 100만 마리가 있습니다.
부견: 경의 말대로라면 사람의 수는 그정도겠지만 말이 매우 많으니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오?
연봉: 운중천(雲中川)은 동산(東山)에서 서하(西河)까지 200리요, 북산(北山)에서 남산(南山)까지 100여 리며, 매년 초가을에는 말들이 항상 모여들어서 온 들판을 거의 가득 채웁니다. 이것으로 헤아린다면 오히려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후 연봉이 대나라로 돌아갈 때 부견은 연봉에게 후한 재물을 전했다.
376년, 대나라가 멸망한 뒤 부견은 탁발규를 장안으로 옮기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의 탁발규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기에 연봉은 부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나라의 군주가 막 붕어하고 신하들이 모반해서 달아난데다 뒤에 남은 손자는 너무 어려서 보좌할 사람이 없습니다. 별부대인(別部大人) 유고인은 용맹하고 지모가 있으며, 철불부의 유위진은 교활하고 변하기 쉬운 인물이라 그들에게 홀로 맡길 수 없습니다. 2개의 부로 나누려고 하신다면, 이 두 사람이 거느리게 하십시오. 두 사람 사이에는 본래 깊은 원한이 있으니 누가 감히 먼저 세력을 접수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변경을 방비할 상책입니다. 그 손자가 장성하기를 기다렸다가 보존하고 군주로 세우는 것이야말로 폐하가 망국에 베푸시는 큰 은덕이 될 것입니다.
부견은 연봉의 진언에 따랐고 연봉은 동쪽으로 돌아갔다.
383년,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참패하면서 전진이 혼란에 빠졌다. 386년, 탁발규가 대나라를 부활시키고 국호를 위(魏)로 고쳤다. 연봉은 이부랑(吏部郞), 급사황문시랑(給事黃門侍郞), 행대상서(行臺尙書)를 역임하며 탁발규로부터 중시되었다. 명원제가 즉위한 뒤 최굉, 봉의, 양월 등과 함께 경전을 교육하며 국정에 참여했다. 태무제가 즉위한 뒤 연봉은 평서후(平舒侯)에 봉해지고 진원장군(鎭遠將軍)이 더해졌다. 이후 428년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