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발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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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의 황족. 평문제 탁발울률의 증손자. 반란자 탁발근의 장남
탁발낙진은 탁발규를 섬기면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북위의 건국 공신이 되었다. 탁발규가 적들을 평정하고 칭제했을 때, 할아버지 탁발고가 고량왕(高涼王)으로 추존받아 그 작위를 계승하였다.
천흥 2년(399년) 정월, 도무제 탁발규가 북쪽으로 순행하여 대장군 탁발준 등에게 3개의 부대로 동쪽 길을 따라 장천(長川)으로 나아가게 하고, 진북장군 탁발낙진 등에게 7개의 부대로 서쪽 길을 따라 우천(牛川)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그리고 도무제 탁발규는 친히 나머지 부대들을 거느리고 그 중간에 위치한 길을 따라 박염수(駮髯水)로 진군하여 고차를 습격하였다.
천흥 2년(399년) 2월, 탁발낙진 등은 고차 산하의 30여 개의 부(部)를 전부 무찌르고, 70,000여 명의 포로와 말 300,000여 필, 소와 양 1,400,000여 필을 약취하였다.
영흥 원년(410년) 정월, 명원제 탁발사가 탁발낙진을 평양왕(平陽王)으로 개봉하였다가, 얼마 뒤 탁발낙진이 사망하자 다시 고량왕으로 되돌렸다. 시호는 '양(襄)'. 아들 탁발예(拓跋禮)가 후사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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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량양왕(高涼襄王) 拓跋樂真 | 탁발낙진 | |
시호 | 양(襄) |
작위 | 고량왕(高涼王) |
성 | 탁발(拓跋) |
휘 | 낙진(樂真) |
자 | 불명 |
생몰 | 불명 |
출신 | 운중군(雲中郡) 성락현(盛樂縣) |
부친 | 탁발근(拓跋斤) |
형제자매 | 2남 중 장남 |
자녀 | 3남 |
1. 개요[편집]
북위의 황족. 평문제 탁발울률의 증손자. 반란자 탁발근의 장남
2. 생애[편집]
탁발낙진은 탁발규를 섬기면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북위의 건국 공신이 되었다. 탁발규가 적들을 평정하고 칭제했을 때, 할아버지 탁발고가 고량왕(高涼王)으로 추존받아 그 작위를 계승하였다.
천흥 2년(399년) 정월, 도무제 탁발규가 북쪽으로 순행하여 대장군 탁발준 등에게 3개의 부대로 동쪽 길을 따라 장천(長川)으로 나아가게 하고, 진북장군 탁발낙진 등에게 7개의 부대로 서쪽 길을 따라 우천(牛川)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그리고 도무제 탁발규는 친히 나머지 부대들을 거느리고 그 중간에 위치한 길을 따라 박염수(駮髯水)로 진군하여 고차를 습격하였다.
천흥 2년(399년) 2월, 탁발낙진 등은 고차 산하의 30여 개의 부(部)를 전부 무찌르고, 70,000여 명의 포로와 말 300,000여 필, 소와 양 1,400,000여 필을 약취하였다.
영흥 원년(410년) 정월, 명원제 탁발사가 탁발낙진을 평양왕(平陽王)으로 개봉하였다가, 얼마 뒤 탁발낙진이 사망하자 다시 고량왕으로 되돌렸다. 시호는 '양(襄)'. 아들 탁발예(拓跋禮)가 후사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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