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유니콘스/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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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2. 시즌별
2.1. 1996년 이전, 현대그룹의 프로야구 입성 도전기
2.4. 매각 시도와 해체



1. 개관[편집]


현대그룹은 실업팀 현대 피닉스를 창단하여 프로팀에 뛰어들려고 했으나 KBO와 각 구단들의 반발이 심했고, 아예 현대 피닉스를 중심으로 프로야구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기업들을 끌어들여서 별도의 리그(이른바 제2리그)를 만들 계획을 세웠으나 그것 역시 여의치 않자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여 재창단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고 이렇게 현대 유니콘스가 탄생했다. 따라서 현대 유니콘스는 공식적으로 삼청태의 역사와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여 이어가는 팀이며 이 팀들과 동일한 한 팀이다.(삼청태현) 이 팀들의 역사는 공식적으로 현대 유니콘스의 역사에 포함되며 따라서 원래대로라면 현대 유니콘스의 역사는 82년부터 작성하여야 할것이다. 그러나 전신들까지 모두 다루기에는 가독성의 문제도 있어 이 문서는 주로 현대 유니콘스 시절에 한정하여 작성된 부분이 많다. 팀명 변경 전 역사에 대해서는 각 팀별 문서를 참고.

역대 우승은 1998년, 2000년, 2003년, 2004년으로 총 4회이며, 해태 타이거즈에 이어 두번째로 2년 연속 우승에 성공했다.[1] 태평양 돌핀스에서 팀명이 변경되고 해체되기까지인 12년간 4회 우승,1회 준우승, 포스트시즌 진출 8회, 5할승률이상 9회 등의 성적을 거두며 짧고 굵다라는 말이 무엇인지 잘 보여줬다. 팬들에게는 항상 5할이상의 성적을 거두는 강팀의 인상. 물론 공식적으로는 현대가 삼청태의 역사를 계승했기 때문에 원년팀으로 분류되어 82년부터 2007년까지 26년간 4회 우승이 된다. 하지만 관중 동원은 인천을 떠난 2000년 이후로는 기존의 팬들이 많이 떠나면서 경기당 평균 2,000명이 채 안되는 등 최하 수준이었다. 사실 인천에서도 1996년을 제외하면 평관 4~5천명 정도로 관중 동원면에서 리그 중하위권 수준이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절반 가까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2. 시즌별[편집]



2.1. 1996년 이전, 현대그룹의 프로야구 입성 도전기[편집]


원래 현대그룹은 프로야구 출범 원년부터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때는 1981년 말, 프로야구 출범 추진 과정에서 출범 추진 인사들이 강원도고향정주영 회장[2]에게 인천·경기·강원 지역을 연고로 현대그룹 야구단의 창단을 제안했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은 당시 대한체육회 회장을 겸직하고 있었고, 1988 서울 올림픽을 유치한 직후였기 때문에 올림픽 개최 준비에 전념하겠다고 하면서 거절했다.[3] 더구나 당시 현대그룹은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양궁수영 2개 종목을 맡고 있었다.[4] 하지만 올림픽 이후부터 프로야구 진출을 시도하면서 한때 현대 계열사들이 많이 입주해 있는 경상남도 울산시[5] 연고로 신생구단을 창단하고 야구장까지 짓는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기존 8개 구단의 견제로 인해 최종적으로 무산되었다.[6] 이 와중에 울산 지역의 유일한 고교야구 팀으로 창단했던 현대공업고등학교 야구부가 지역 야구의 취약한 기반을 이겨내지 못하고 해체되었다.[7]

한편 신생팀 창단으로 프로리그에 진입하는 방식이 실패한 현대그룹은 이번에는 쌍방울그룹과 교섭을 시도하며 쌍방울 레이더스 인수를 추진했으나[8] 이마저도 무산되었다. 1994년 실업 팀 현대 피닉스를 창단하며 제2리그 창설을 염두에 두었고, [9] 프로 입단을 앞둔 아마추어 선수들을 엄청난 계약금으로 싹쓸이해가면서 아마추어-프로 간 대립을 심화시키게 된다. 하지만 제2리그 창설은 현실적으로 힘들었는지, 결국 1995년 8월, 당시 매물로 나오게 된 태평양 돌핀스450억원 ~ 470억원[10]이란 거금을 들여 인수하면서 꿈에 그리던 프로야구에 진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삼성과 더불어 한국프로야구를 돈지랄판으로 만든 원흉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인천야빠들은 이제야 가난한 팀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열광했고, 덕분에 아모레퍼시픽야구로 돈을 번 기업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태평양 입장에선 1987년 청보식품으로부터 50억원 값에 구단을 사서[11] 근 10년만에 9배의 값으로 팔았으니, 구단 운영비를 빼고 나서도 엄청난 대박이였다 할 수 있겠다.

당시 현대그룹의 돈빨을 증명하는 일화로, 태평양을 인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던 1995년 말, 고려대 진학을 원했던 박진만이 자신에게 귀찮게 달라붙는 현대 스카우터들을 떼어버리기 위해 계약금 3억원이라는 당시로는 터무니없는 거액을 요구했더니[12] 현대 직원이 알았다면서 자동차 트렁크에서 3억원을 꺼내 보여주더라 하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13][14]

현대그룹은 창단 당시 대주주를 현대전자로 선정하고, 2000년 그룹 계열 분리 당시 현대그룹 측이 직접 개입하여 현대자동차가 보유하고 있던 구단 지분 45% 중 30.1%를 현대전자가 매입하도록 하여 현대전자의 구단 지배력을 더욱 강화한다. 그러나 SK하이닉스 문서를 참고해보면 알겠지만, 이미 1995년 당시에도 현대전자는 누적 적자가 상당한 부실기업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LG반도체까지 인수하니 자금난에 시달리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게다가 현대그룹에는 현대자동차현대건설, 현대중공업, 현대백화점 등 야구단을 충분히 운영할 만한 우량기업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그룹은 유니콘스를 그 당시에도 꽤나 위태로웠던 현대전자에 맡기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고, 바로 이 결정이, 현대 유니콘스의 구단 해체라는 결말을 불러오고 만다.

2.2. 숭의야구장 시절[편집]


태평양 돌핀스를 이어받아 숭의야구장을 그대로 쓴 시절이다. (1996~1999)
숭의 야구장 시절엔 총 1번의 우승을 기록한다. 2000년 연고지를 수원으로 옮긴다.


2.2.1. 1996년[편집]


1996년 첫해 타선에선 최초 30-30을 기록한 괴물신인 박재홍[16] 과 '미스터 인천' 김경기의 활약, 마운드에선 정민태, 위재영, 정명원의 활약 등에 힘입어 전반기1위, 최종 4위를 기록, 2년만에 포스트시즌에 재진입했다.[17]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 이글스를 2전 전승으로 물리치고[18] 플레이오프 진출, 플레이오프 전주 1, 2차전에서 쌍방울 레이더스에 아쉽게 패하며 밀리는 듯했으나 인천 3차전부터 왼손 에이스 최창호[19]의 호투로 극적으로 분위기를 반전시켜 3연승을 내리 거둬 3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창단 첫 해에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한 것은 1990년 LG 트윈스에 이어 현대가 두 번째. 그러나 상대는 막강 코시 7전 전승 해태 타이거즈. 잠수함 이강철과 싸움닭 조계현, 차기 에이스 이대진 등 바람의 아들 이종범 최연소 4번타자 홍현우 등 강력한 해태에게 2승 4패로 아쉽게 분패하고 준우승을 기록한다. 그나마 눈여겨볼 것이 있다면 4차전 선발투수로 자청한 정명원KBO 사상 유일한 한국시리즈 노히트 노런.[20]

1996년의 현대는 기존 태평양의 주축 타자였던 김경기, 윤덕규, 이숭용에 신인 박재홍박진만이 쏠쏠한 활약을 하였으나 두 신인을 제외하면 선수 보강이 딱히 이뤄지지 않아 태평양 시절과 다를 바 없는 물타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타격은 말 그대로 답이 없었다.[21] 반면 투수진은 현대 창단과 더불어 에이스로 거듭난 15승의 프랜차이즈 선수 정민태와 세이브 1위 [22] 믿을맨 정명원, 차기 에이스 12승 위재영, 8승 최창호, 중간계투라는 새로운 장을 연 셋업맨 조웅천, 마당쇠 가내영, 전천후 투준호 등 우수한 선수들이 많았다. 즉 타선의 힘보다는 투수진에 힘입어 겨우 4위를 하게 된 것. 특히 당시 프로 3년차였던 외야수 이숭용과 말년에 접어든 윤덕규를 빼고는 특출난 좌타자가 없었던 탓에 우완 잠수함 투수 상대로 고전하는 일이 많았다. 특히,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플레이오프 1, 2차전을 내준 것도 잠수함 원투펀치였던 성영재김기덕에게 당한 것이 컸고, 한국시리즈에서도 해태 이강철에게 2승 1세이브를 헌납하면서 무너진 게 패인. 전반기에는 투수력과 박재홍의 원맨쇼로 1위를 확고했으나 이후, 후반기에는 물방망이 뎁스질로 4위까지 떨어졌다. 감독 데뷔 첫 해부터 물리적인 이론을 예언하신 재박량김재박 감독


2.2.2. 1997년[편집]


이듬해 1997년에는 시즌전에 아마추어팀 현대 피닉스의 문동환을 롯데로 풀어주면서 위약금을 전액 탕감하는 대신 전준호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확실한 1번타자를 영입해 전력강화를 꾀했으나[23] 그 해 타선이 지독하게 부진했다. 타선에서는 입단 첫해인 전준호가 트레이드 충격을 털어내지 못하고 0.247라는 프로데뷔 이래 가장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팀내 핵심선수인 박재홍은 30홈런, 20도루를 기록 20-20을 달성하는 등 그래도 괜찮은 활약을 보였으나, 시즌 중후반에 부상으로 전력이탈했고,[24] 4번타자 김경기는 프로데뷔 이래 가장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으며, 역시 타선의 주축 역할을 해오던 윤덕규도 부진을 겪었고, 결국 시즌 끝나고 은퇴했다. 중간에 교타자인 김광림을 현금트레이드를 통해 쌍방울에서 영입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25] 유일하게 시즌 끝까지 꾸준하게 활약했던 선수는 데뷔 첫 3할을 친 이숭용 정도였다.

이상하게 이 해에는 상위 팀 삼성 라이온즈와 최하위 팀으로 전락한 롯데 자이언츠 상대로 강했다. 삼성은 엉뚱하게 이게 발목이 잡혔는지 정규리그에선 간신히 4위에 턱걸이 했고 준PO에서 3위 쌍방울에게 2승 1패로 PO에 진출했지만, PO에서 2위 LG를 상대로 5차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2승 3패로 아쉽게 탈락한다. 여담으로 이때 정규리그 2위를 기록하고 한국시리즈에 올라 준우승을 하게 된 LG는 삼성과는 반대로 현대를 그야말로 압살했는데 전반기에만 1승 11패였고 결국 최종 전적을 3승 15패로 마쳤던 것이다.[26]

투수면에서는 에이스 정민태가 건재했지만, 2선발 위재영은 시즌 도중 부상으로 드러눕고, 나머지 투수들도 전년도처럼 뭐 하나씩 부족한 성적이였다. 그러기에 마무리 정명원은 일찍 뚫린 선발 대신 선발과 계투를 오가다 너무 지친 나머지 갑자기 구위가 떨어지면서 난조를 자주 보였다. 1997년 시즌에는 내내 하위권을 달리다가 롯데, 한화를 겨우 제끼고 6위 기록했다.


2.2.3. 1998년[편집]


이듬해 1998년 시즌에는 현대그룹의 과감한 지원이 이어진다. 시즌 전에는 당시 IMF의 직격탄을 맞아 어려움을 겪었던 쌍방울 레이더스의 핵심선수였던 박경완을 현금트레이드로 영입하고, OB 베어스의 베테랑 2루수였던 이명수를 영입하는등 타선을 크게 보완했다. 거기에 이명수의 뒤를 이을 주전 2루수로 육성하기 위해 박종호까지 영입했다. 이러한 구단의 과감한 지원 속에 1998년에는 투-타 완벽에 가까운 활약을 보였다.[27] 박재홍-쿨바-김경기로 이어지는 클린업 타선은 실로 위력적이었고, 97년 트레이드 충격으로 입단 첫해 부진했던 전준호는 트레이드 충격을 딛고 확실한 1번타자로 활약한다. 투수면에서는 마무리에서 선발로 전환한 정명원의 화려한 부활등 힘입어 정민태-정명원-위재영-김수경-최원호 1~5선발 전원 10승 이상[28][29]을 기록하는 등 1998년 정규시즌은 엄청났던 해였다. 무엇보다 만개한 박경완은 최고의 리드를 보였고 홈런도 19개나 쳐냈다. 1988,1991 해태나 1992 빙그레[30] 1994 LG 수준으로 투타가 완벽한 시즌이었다.

그리고 이 때도 어김없이 현질을 했는데, 시즌중 6억원에 쌍방울에서 조규제 투수를 영입했다는 것이다.[31] 한국시리즈에서 LG 트윈스를 상대로 4승 2패를 거두며 창단 첫 우승[32]을 거두어 인천연고팀 역사상 최초로 한국시리즈 우승하는 등 최고의 해를 보냈다.[33][34]


2.2.4. 1999년[편집]


이듬해 1999년은 유례없는 타고투저 시즌이었다. 5선발 중 세 명이 이전같은 성적을 못 내었으나 압도적인 활약을 하였던 정민태와 2선발 및 추격조로 알바까지 뛴 2년차 신예 김수경 덕에 팀 실적은 롯데에 이어 2위를 기록한다. 그러나 문제는 타선이었다. wOBA가 4할 이상인 선수가 15명이나 있었던 시즌이었으나 현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wOBA 순위를 상위 25위로 범위를 넓혀야 박재홍(19위)와 박종호(24위)만 이름을 보였다. 피어슨이 쿨바 수준의 활약은 하지 못했고 전준호, 김경기, 이명수가 동시에 성적이 하락하였다. 타팀들이 열심히 타고투저 시즌을 보내는 동안 나홀로 투고타저 시즌을 치렀다. 결국 팀 득점은 쌍방울 다음으로 낮은 7위에 그치고 만다. 그럼에도 정규시즌 5위(당시 양대리그 체제였으니 4팀 가운데 3위) 기록했다.[35][36]

시즌 끝나고 그 시즌 부진했던 LG의 투타겸업 선수인 심재학을 영입했으며 투수 최원호가 LG로 이적했다. 또한 지명권 트레이드로 2차 1픽으로 지명된 마일영 투수를 쌍방울에서 5억에 사왔다.[37] 참고로 마일영을 끝으로 지명권 트레이드는 2020년까지 금지되었다.

이해 유일한 수확은 신인 박장희 단 한 명이였고 김수경은 탈삼진 1위 정민태는 다승왕(20승)과 방어율 2위를 차지한다.[38] 타자들은 그나마 박종호가 데뷔 첫 3할+10홈런을 기록하며 2루와 3루를 종횡무진하였고 지난 2년간 타격에 죽을 쑤던 박진만이 다시 포텐이 터질 기미를 보였다.


2.3. 수원 야구장 시대[편집]



2.3.1. 2000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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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구 역사상 최강이라 불리는 단일 시즌 팀중 하나

2000년 현대는 최고의 한해를 보낸 동시에 가장 힘든 한 해를 보내게 되었다. 시즌 직전, 모기업 현대그룹이 아무 상의도 없이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결정하였고, 연고지 이전 결정이 있자마자 모기업에 큰 위기가 찾아와 결국 서울 이전에 실패했기 때문. 이미 연고이전을 선언했고 연고지 권리를 SK에 팔아버린 현대로서는 인천으로 다시 돌아갈수 없었고, 졸지에 연고지가 없어진 현대는, 자신의 과거 광역연고지였던 수원에서 홈경기를 치뤄야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39] 연고지 이전에 대한 내용은 현대 유니콘스/연고이전 문서 참조.

지금 시각으로 보면 '그때는 어느 누가 현대 감독으로 앉혀놔도 우승은 기본!' 이렇게 인지하는데, 당시 2000년 시즌 시작 전에만 해도 현대가 이렇게까지 압도적인 성적을 낼 것이라 기대했던 이는 보기 드물었다. 시즌 전에 전문가들로부터 '중위권팀'으로 예상되었으나, 막상 뚜껑을 열자 전문가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어버렸다. 그해 투-타 밸런스가 98년때보다 더욱 완벽한데다 선수단 구성도 매우 우수한 선수들이 많았다. 포수 박경완, 1루수 이숭용, 2루수 박종호, 유격수 박진만, 3루수 퀸란, 좌익수 전준호[40], 중견수 박재홍, 우익수 심재학, 지명타자 이명수 그야말로 이 선수들을 어떻게 이기냐는 소리가 나올 법한 팀이다.

그해 당시 시즌 최다 승이었던 91승[41]정규시즌 승률 0.695 이라는 압도적인 기록[42]을 낸다. 2018년 종료 기준 리그에서 공격지표 wRC+ 와 투구 지표 ERA+ 가 둘다 9위인데 역대팀 중 이 2개가 모두 10위 안에 든 팀은 2000년 현대가 유일하다. 또 수비무관투구 지표 FIP+는 역대 2위로서 그야말로 공수에서 모두 KBO 역사에 남을 시즌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4승 3패로 우승. 1차전~3차전까지 일방적으로 이겼으나, 4차전부터 6차전까지 두산의 극적인 추격으로 상황은 급반전되었다.[43] 사상 초유의 리버스 스윕이 나오는가 했으나, 7차전은 수원 야구장을 가득 메운 두산 팬들의 기세에도 불구하고 3루수 톰 퀸란의 활약에 힘입어 우승했다.


2.3.2. 2001년[편집]


2001년 시즌 전부터 투수진에서 이탈이 발생했다. 철벽계투 조웅천+조규제[44]는 신생팀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15억원에 SK로 트레이드되어야했다. 또한 에이스 정민태가 해외 진출을 결심하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임대되었다.

야수진은 큰 문제가 없었는데, 팀의 주포인 외야수 심재학두산 베어스로 트레이드되었다. 트레이드 상대는 외야수 심정수인데, 시즌 중반 심정수가 안면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부상으로 빠지고 타선의 침체기가 있었다.[45] 그 외에도 돌핀스-유니콘스 출신의 백업 포수였던 장광호가 5천만원에 SK에서 현금 트레이드로 돌아왔다.

시즌 개막전에는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정명원과 백업 내야수 염경엽[46]의 은퇴식이 수원 야구장에서 열렸다.

또한 시즌 초반에는 계투진에 자리가 없던 최영필+김홍집이 한화 이글스로 이적하면서 선발감으로 쓰기 위해 좌완 이상열을 한화에서 영입하게 된다.[47]

이 해 모기업 현대전자의 부도로 인해 구단 재정상황 역시 나빠지기 시작하면서 정민태의 임대료 5억엔+조웅천, 조규제의 트레이드 머니 15억원을 털어서 구단을 운영했다.[48][49]

투수조의 선발진은 임선동이 에이스로 분전했지만, 13승과 4점대의 방어율을 찍어 에이스라 보기엔 모자랐다.[50] 특히 정민태의 공백이 너무나 컸고, 3년차 막내였던 김수경은 엄청나게 부진했다.[51] 그 외에도 마무리 위재영의 부상[52] 그나마 뒤에 있던 투준호마일영이 역시 선발과 중간계투로 뛰면서 지탱해 줬지만, 뭔가 2% 부족했었다.

그리고, 타선은 박재홍박종호의 부진이 컸으며[53] 그나마 다른 타자들인 박경완[54] 박진만, 이숭용은 제몫을 했고 전준호는 부상으로 복귀하여 1번타자로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

시즌은 정규리그 2위로 마감했지만, 그 해 두산에게 밀려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다.[55]

하지만 이 시기에 2군의 무명 투수 송신영이 발굴된 것과 셋업과 마무리를 오가던 신철인의 활약이 큰 소득이었다.

시즌 끝나고 김인호이명수가 현역에서 은퇴했으며, 백업포수인 이재주KIA 타이거즈로 현금 트레이드되었다.

외인 선수로는 톰 퀸란[56]과 J.R 필립스[57]과 케니 테일러가 당 시즌 활동하였고, 모두 평균 성적을 거뒀으나 전원 모두 재계약 포기를 했다.


2.3.3. 2002년[편집]


지난해에 비해 그나마 전력누수가 적은 시즌이었다. 여전히 몇몇 선수가 부상을 앓았지만 2001년 광대뼈 골절상을 당한 심정수가 부상을 떨쳐내고 팀 중심타선을 맡았다. 이밖에도 야수진에는 4박(박경완, 박종호, 박재홍, 박진만)과 이숭용, 전준호 역시 건재했으며 포수와 3루, 외야 한자리의 공백을 매우기 위해 강병식, 채종국 그리고 신인 포수 강귀태 등 한창의 선수들이 1군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투수진도 전준호가 이탈했지만 임선동, 마일영, 송신영, 신철인 등이 건재했으며 데뷔이후 처음으로 죽을 쑨 김수경이 무사 복귀하면서 희망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방어율이 거의 5점대 까지 오르긴 했다는 게 함정이었다.

이 해 현대는 영건 멜키 토레스가 에이스로 군림했고 오히려 더 안정감이 있었지만 워낙 등판하는 날 우천취소가 많아 승수쌓기에는 불운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대학최대어 중 한 명인 조용준의 가세가 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다만 부상 중인 마무리 위재영의 복귀가 늦어지면서 시즌 시작은 용병+조용준의 더블스토퍼 체제로 갈 수 밖에 없었다. 후에 위재영은 선발로 복귀했다.

외국인선수의 경우 삼진왕이지만 일발장타와 수비로 자기 몫을 하던 퀸란이 지난해에 비해 2/3의 성적을 기록하면서 쫓겨났다. 투수인 테일러와 엔리케스[58] 역시 재계약을 하지 못하고 방출됐다. 이를 대신해 일본야구 2군을 폭격중인 폴과 영건 토레스 그리고 강속구 투수 베라스를 영입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팀 전체가 삐걱거리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팀 중심 타선과 하위타선의 괴리가 너무나도 심했다는 점이다. 이승엽의 새로운 라이벌로 급부상한 46홈런의 심정수와 3할을 친 전준호 등 1~6번 타선까지는 다른 팀과 비교해도 밀리지않을 정도의 구색은 갖췄다. 문제는 7 8 9 멘도사라인인데 당시 박진만(0.219),박경완(0.203), 채종국(0.228)의 타격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특히 지난해 3할 22홈런으로 타격 커리어 하이를 찍은 박진만과 최초의 포수 20-20을 기록한 박경완의 부진은 크게 느껴졌다.

외국인선수인 폴과 토레스는 각각 초반과 후반에 고전했지만 시즌을 끝까지 이끌어나갔다. 그러나 강속구 마무리로 주목받던 베라스는 여름부터 난타당하다 결국 대체선수인 프랭클린으로 교체됐다.[59]

2002년은 정규리그 3위로 마쳤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4위 LG 트윈스에게 밀려 최종 순위는 4위로 마쳤다.

한편 시즌 끝나고 주전포수인 박경완이 FA를 선언하면서 SK 와이번스로 이적했다. 또한 중심타자인 박재홍이 KIA 타이거즈정성훈[60]+10억에 트레이드 되면서 팀 전력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포수공백은 고려대를 졸업하고 입단하는 이택근과 SK에서 방출되어 무적선수였던 김동수를 영입해 해결할 예정이었고, 중견수, 중심타자 자리는 이숭용이 맡게될 예정이었다.[61]

그리고 불행중 다행인 것은 이 해부터는 부상으로 추락한 위재영을 대신해 대졸신인 조용준이 마무리 투수로 뛰게된다는 것이었다. 조용준은 이 해부터 신인상을 받으면서 주전 마무리[62] 자리를 굳혔다.


2.3.4. 2003년[편집]


2003년에는 에이스 정민태와 4번타자 심정수의 활약에 힘입어 정규리그 우승을 거두며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한국시리즈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올라온 SK 와이번스와 상대를 하게 된다. 7차전까지 가는[63]끝에 에이스 정민태의 활약[64]에 힘입어 3번째 우승을 하였다.

시즌 시작전에 박경완, 박재홍이라는 팀 핵심 선수가 이적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동수가 프로 입문 최초로 0.319의 타율로 화려하게 부활하면서 팀을 이끌었고 포수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했다. 또한 현금 10억원과 함께 온 정성훈도 비록 규정타석에는 들어가지 못했으나 타율 .343에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며 시즌 3분의 2까지 타선 공백을 막아줬다. 게다가 2000 현대의 압도적인 타선에 가려서 그렇지 2003 현대도 어디 하나 피할수 없는 공포의 타선을 구축했다. 리그 최고의 타자이자 현재까지도 KBO 역대 최고의 몬스터시즌으로 꼽히는 심정수는 물론, 김동수와 이숭용이 커리어하이를 찍었고 박종호가 살아났으며 전준호,박진만도 여전히 건재했다. 오히려 전력누수가 심했던 것은 마운드였는데 임선동, 마일영, 위재영 등 로테이션을 지켜던 선발들이 몽땅 나가떨어지면서 선발전체에 구멍이 난 상태였다. 다행히 돌아온 정민태가 어김없이 타고투저에 강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1선발을 지켰고, 외국인 투수 바워스가 후반기에 잠시 이탈했지만 24경기에서 13승 평균자책점 3.01[65]이라는 준수한 기록을 올리며 팀을 구했다. 구원쪽은 선수에 변동사항은 없었지만 첫해에 힘을 다뺀 조용준이 시즌 내내 박살나면서 고전했으나 권준헌이 커리어 하이를 찍고 중간과 마무리를 오가며 팀을 받쳤다. 이밖에 신철인 이상열 등 7~8회에 나와줄 수 있는 계투들의 활약도 돋보였다. 그리고 입단 후 졸곧 주전에 있던 막내 김수경이 이 때 부터 조용히 묻어져 나갔다.

전반기에는 SK와 삼성의 상승세에 밀려 3위를 전전했으나 전반기 마지막 경기에서 SK에 승리를 거두며 승수 동률에 승률에서 앞선 1위로 마쳤다. 후반기에는 삼성의 페이스가 꺾이고 SK가 급속한 내리막길을 걸으며 현대가 독주체제를 갖추다가 전반기 5위에 머물렀던 KIA의 후반기 급상승세에 우승 확정이 미루어졌다. 하지만 KIA와의 마지막 맞대결에서 승리를 거두며 3년만의 한국시리즈 직행을 확정지었다. 전반기 삼성과 SK, 후반기 KIA로 인해 시즌 내내 압도적인 느낌은 다소 약했으나 꾸준히 페이스를 유지한 팀은 현대였다. 롯데를 상대로 17승2패로 확실하게 제압한 점이 우승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정규시즌 2위 KIA는 롯데전 17승 1무 1패[66]였다는 것이 함정이었다.

사실 2003년, 2004년에 치뤄진 다승제의 이득을 보았다. 사실 다승제가 아니라 승률제였다면 KIA와의 마지막 경기를 이겼더라도 KIA가 시즌 최종전을 이기면 승률이 더 높아서 우승은 KIA의 몫이었다. 하지만 다승제로 인해 KIA의 19차전으로 우승을 확정짓게 되었다.

한편 시즌 후 오프시즌에 주전 2루수인 박종호가 FA를 통해서 삼성으로 이적함에 따라, 김일경이나 서한규, 채종국같이 박종호에 비해서 뭔가 모자란 선수들이 센터라인을 지키게 되었다. 투수 권준헌한화 이글스로 가고, 외야수 송지만이 현대 유니콘스로 오는 트레이드가 이루어졌다. 물론 현대가 압승을 거둔 트레이드였지만 트레이드 초기에는 차라리 내야수를 받아왔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67]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송지만이 잘해주다보니 그런 의견들은 쑥 들어갔다.


2.3.5. 2004년[편집]


2004년에 두산, 삼성과 같이 치열한 선두권경쟁을 하던 끝에 정규시즌 1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맞아 역사상 유례없는 명승부를 보였다. 최종 전적 4승 3무[68] 2패.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11월 1일 열린 9차전에서 극적으로 우승함으로써 4번째 우승을 하게 된다. 3번의 무승부 가운데 4차전에서 배영수의 10이닝 노히트 노런이 나오기도 했다. 자세히 적자면 8회 2사까지 퍼펙트였다. 하지만 2사 후에 박진만에서 풀 카운트 승부끝에 볼넷을 주면서 퍼펙트는 무산되었고, 무승부가 되면서 노히트 노런도 공식 인정받지 못하고 말았다.

해태 이후 첫번째 2연패. 디펜딩 챔피언. 현대 이후 2연패에 성공한 팀은 삼성, SK, 두산 등이 있지만 해태 이후 첫번째 디펜딩 챔피언에 오른 현대가 해태 이후 처음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게 된다.

하지만, 2004년 우승이 현대의 마지막 우승이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시즌이 끝난 뒤 주축선수 박진만과 심정수가 FA를 선언, 삼성으로 이적하게 되는데 특히 박진만의 삼성 이적은 구단은 물론 팬들에게 있어서도 굉장히 치명타였다. 그 후유증은 히어로즈로 바뀌고서도 강정호가 등장하기 전까지도 계속되었으니 상당히 치명적인셈. 이 무렵 박진만이 현대공홈에 가서 글을 썼는데, 팬들의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이는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그만큼 박진만이 영원히 현대맨으로 남아주길 바랬던 마음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 시기에 위재영이 구단과의 불화를 통해 방출되었고, SK에 입단하여 현대팬들과 아예 등져버린 사건이 생겼다. 대충 쉽게 생각하면 이범호가 FA로 KIA로 이적했을때 한화 팬들이 뭘 느꼈나를 생각하면 된다. 위재영은 SK에서 부활에 성공해 FA 계약까지 이끌어냈지만 이후 다시 추락해버렸다. 자세한 내용은 위재영 문서를 보면 된다.

그리고 2004년 이후로 매년 억대연봉을 수령하던 정민태가 1승도 못거두고 사라진걸 생각하면 악재가 한꺼번에 덮쳤다고 봐도 무방했다. 거기에 조용준도 2005년 어깨 부상 이후로 폭망했으니 망했어요


2.3.6. 2005년[편집]


2년에 걸쳐 빠져나간 박종호, 박진만 키스톤 콤비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시작한 2005년 시즌은 내야진의 실책 연발[69]과 체력저하 등을 이유로 큰 부진에 빠졌다. 5월까지만 해도 4~5위를 하면서 나름대로 분전했으나 후반으로 가면서 막장화되었다. 특히 KIA에서 방출의 기로에 섰다가 두산 이적 후 후반기에 폭발한 리오스에게 제대로 박살[70]나며 7위를 기록했다. (이는 1997년 이후 최저 성적이다.) 1996년 OB 이후 9년만에 디펜딩 챔피언이 최하위를 기록하는 굴욕은 면했다.

타선은 그야말로 공갈 아니면 힘이었다. 우선 홈런과 타점 장타율 1위를 차지한 래리 서튼이 있었다. 서튼은 시즌 35개의 홈런과 102타점을 올렸고 타율도 0.292로 괜찮은 편이었다. 무엇보다 병살타가 단 3개 밖에 안되고 볼넷 삼진비도 크지않은 효자용병이었다. 다른 타자들도 파워면에서는 괜찮은 성적을 올렸다. 송지만은 홈런 4위를 기록했고 정성훈도 수비에서는 엉망이었지만 타격면에서는 팀을 이끄는데 도움이 됐다. 채종국, 김동수도 시즌 절반 정도를 소화했음에도 9~10홈런을 기록했으며 이숭용은 전반기에 홈런왕 페이스로 승승장구하다가 허벅지 부상으로 무너졌다.[71] 그러나 단 한 명의 3할타자도 없이 시즌을 마감해야했다.

투수진에서는 서튼과 함께 입단한 미키 캘러웨이가 주목받을만했다. 평균자책점은 3.97로 다소 떨어졌지만 시즌 다승 2위에 해당하는 16승을 올렸고 이닝도 3위와 크게 차이나는 197이닝으로 2위[72]를 기록하며 분전했다. 또 포수에서 투수로 전환한 황두성[73]이 기어코 터지면서 평균자책점 2위와 탈삼진 2위(공동 1위이므로 사실상 3위)를 차지했다. 마무리 조용준도 지난해만큼은 아니지만 27세이브를 기록하며 시즌 2위로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물론 아에 엉망이 된 부분도 있었다. 홀드왕 이상열과 신철인, 마일영 등 쓸만한 중간계투가 전부 사라지면서 홀드 최하위를 기록하는 등 중간계투가 두고두고 고생을 했으나 이 시절 5~8위팀은 모두 엘롯기였으니[74] 큰 굴욕이었다. 그나마 LG와는 1리차로 순위가 갈렸다. 현대가 경기를 다 치른 가운데 최종전 전까지 7위였던 LG가 최종전에서 2위였던 SK를 3위로 떨구는 큰 사고를 치면서 최종순위는 6위가 아닌 7위가 됐다.(마일영이상열(야구)의 공익근무요원으로 부재 원인,정수성은 부상과 심판의 항의로 퇴장으로 당했기 때문이다.)

삼성에게 주축 선수 3명이나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이해 우승팀이 된 삼성에 9승1무8패로 상대전적 우위까지 내주지는 않았다.


2.3.7. 2006년[편집]


그 다음해인 2006년, 현대는 전문가들 사이에 가장 유력한 꼴찌후보로 거론되었다. 시즌 개막전 이래 4연패하는 등 매우 부진했지만 5월달에 갑자기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와 삼성, 한화와 더불어 선두를 다퉜다. 결국에는 정규시즌 2위를 기록하고 플레이오프에서 한화 이글스 상대로 1승 3패로 패하고 3위로 마감하게 된다.

이 시기의 소득은 어린선수들 이었는데, 포수에서 외야수로 전향한 이택근이 포텐이 터져, 시즌내내 이대호와 타격왕 경쟁을 하여 골든글러브를 받았으며, 하위픽으로 점찍어 놓았던 투수 장원삼이 대학에서 에이스가 되어서 억대 계약금을 받고 입단했으며, 이종범 이후 최고의 공격형 유격수인 강정호가 이 시기에 입단했다. 또한, 황재균, 이현승이라는 준수한 선수들이 입단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시즌을 앞두고 전준호의 후계자로 생각했던 외야수가 상무에서 전역하자마자 방출당했는데[75] 당시만 해도 이것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시즌 중이었던 5월말에 부산 연고 이전 설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현실성이 전혀 없었던 소설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2.3.8. 2007년[편집]


그나마 지원을 해 주던 현대가의 지원이 2006년부터 끊겼다. 현대가의 몇 안 되는 야빠로서 끊임없이 지원을 해 주던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이 대북송금 특검 사건으로 조사를 받다가 2003년 8월 자살한 것과, 유니콘스의 당시 최대주주인 현대전자가 채권단 소유의 기업인 하이닉스가 되었고 채권단에서 돈도 없는데 왜 야구단까지 운영하냐며 태클을 걸기 시작한 것이 복합된 결과였다.

정몽헌에 이어 현대그룹을 책임지게 된 현정은은 2005년을 마지막으로 매년 주던 40억의 지원을 끊었고, 이전까지 80억을 지원하던 현대자동차그룹과 40억을 지원하던 현대해상 측에서도 현대그룹이 손을 털자 지원에 항의하던 주주들을 납득시킬 명분이 없어져 유니콘스에게 보내던 모든 지원금을 끊었다. 그나마 현대해상 정몽윤 회장 덕에 현대해상 브랜드의 헬멧광고를 통해 15억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당시 박용오 KBO 총재[76]가 2005년 5월경 현정은 회장을 찾아가 상황 타개를 시도했으나, 돌아온 것은 올해가 마지막이며 더 이상의 구단 지원은 어려우니 매각을 추진해 달라는 말 뿐. 또한 채권단이 장악한 하이닉스의 입장은 매각은 누구에게든지 하겠으나 지원은 한 푼도 해 줄 수 없다고 했다.

이렇게 되자 이전까지 현대그룹의 사세가 기우는 것과 함께 삐걱거리면서도 어떻게든 유지는 되던 현대 유니콘스 구단의 운영은 2006년부터 급격히 어려워졌다. KBO는 리그 전체의 규모 축소를 막기 위해 상황유지를 택했고, 매각이 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모아온 야구발전기금을 담보하여 주거래 은행인 농협에서 받은 대출로 사실상 유니콘스를 위탁운영하면서 인수기업을 찾기로 했다. 하지만, 결국 2007년 시즌이 끝날때까지 매각은 성사되지 않았고, 이때까지 KBO가 26년간 모아온 140억의 야구기금은 유니콘스 운영비에 전부 소진되어버렸다.[77]

결국 유니콘스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2007년 시즌을 치러나가게 되었다. 2007년 시즌 개막 3연전부터 3연패를 당한 것을 시작으로 4월에는 매우 심각한 부진에 빠지게 된다. 4월 말까지만 해도 7연패를 겪는 등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연패를 끊은 이후부터 5월6월에 치고 올라가 한때 4위권 내에 들어가기도 하였으나, 시즌 중에 용병투수 미키 캘러웨이가 부상으로 이탈함으로써 선발 투수진에서 김수경, 황두성, 조용훈, 송신영이 주축이 되나 틈만 나면 타자쪽이 말썽을 부리고 모처럼 타자들이 터지면 이번에는 투수들이 붕괴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시즌 내내 투-타 불균형 엇박자가 계속 이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선수단들은 포기하지 않고, 프런트의 지원과 열정속에 구단 특유의 가족같은 분위기에서 끝까지 분전했다. 당시의 분위기가 그대로 담긴 이숭용과 김수경의 인터뷰 영상 하지만 야구계 전체가 몇십년간 모아온 돈으로 연명하는 주제에 바득바득 우겨서 플로리다 전지훈련을 떠나고 인건비 절감 노력은 사실상 하나도 하지 않으며 성적에만 몰두해 당시 야구계에서 큰 비난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2007년 10월 5일 한화 이글스와의 고별경기를 2:0으로 승리함으로써 유종의 미를 거두며 페넌트레이스가 끝난 시점에서, 팀 내외적으로 '현대' 라는 이름을 더이상 쓰지 않게 되었다. 정규시즌 6위였지만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거둔 기적에 가까운 성적이었다. 마지막 경기 영상

하지만 야구기금은 이제 완전히 소진되었고, 이에 따라 유니콘스의 운명은 그야말로 초읽기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매각이 되거나, 7구단으로 축소되거나. 길은 단지 두 개 뿐이었다.


2.4. 매각 시도와 해체[편집]


첫번째로 농협중앙회와 매각 시도를 진행했다. 2007년 1월 16일, 언론은 "하이닉스의 경영 부진에 의해 농협중앙회에 야구단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라고 일제히 보도하였다. 실제 하이닉스와 농협중앙회측은 유니콘스 주식과 부채를 134억원에 인수하는 것에 동의하였고, 보도자료로 '농촌사랑야구단(가칭)'을 창단하고 목동 야구장을 홈으로 사용하기 위한 개보수 비용까지 산출하는 단계였다.[78] 그러나 유니콘스 프런트의 퇴직금 부담 문제 및 농협중앙회 노동조합과 농민들의 반발, 무엇보다 주관부처인 농림부가 이 과정에서 어떠한 협의도 없었다는 것에 불만을 표시하면서 모든 임원진의 업무정지 가능성까지 제기하자 1월 19일, 농협중앙회는 농민 등 여론의 반발을 이유로 인수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사실 이 인수는 비리로 인해 궁지에 몰려있던 농협중앙회 수뇌부가 정권의 비호를 받기 위해 무리하게 시도했다는 설이 돌았다. KBO는 6월까지도 계속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흘렸지만, 협상을 주도한 정대근 농협중앙회 회장이 7월에 구속되면서 판은 완전히 뒤엎어졌다. 이후 신경 분리로 농협중앙회에서 NH농협은행이 분리되면서 농협이 프로야구판에 뛰어들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사실 애초에 말이 안됐던 게, 현행 법령상 금융권은 본업과 무관한 계열사를 둘 수 없기 때문에 프로야구나 프로축구에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이다.[79] 이들 리그는 참가 구단들에게 법인화=단독 계열사화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규모가 작은 프로농구프로배구는 법인화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기업의 일개 부서로서 운영을 할 수 있고, 공기업이나 금융권도 스포츠 구단을 운영할 수 있지만, 프로야구프로축구는 금융권이 팀명에 명명권을 행사하는 정도나 가능할 뿐, 직접 팀을 운영할 수는 없다.

농협 인수가 물 건너간 후, 미국의 한인 부동산회사인 프로스테이트 홀딩스가 KBO에 유니콘스의 인수를 타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쌍방울 레이더스의 연고지였던 전주시 연고를 거론하면서 현대빠들의 화를 돋군데다가 실체가 불분명한 페이퍼컴퍼니라는 의혹이 일자 KBO 측에서는 실무진이 오면 이야기는 해 보겠지만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며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야구계 전반적으로도 반응이 좋지 않자 이 기업은 알아서 인수 의사를 철회했다. 게다가 프로스테이트가 전립선이라는 뜻이 있는지라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두 번째 매각 시도는 조선/해운업 한창 대호황으로 활발하게 성장하던 STX였다. KBO 측에서 대놓고 기업명을 발표하지는 않았으나, 신상우 당시 KBO 총재가 9월 라디오 인터뷰에서 '뻗어나가는 중견기업이 현대를 인수할 것'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스포츠 언론들은 이 중견기업이 STX를 지칭한다는 것을 KBO의 내부 소식통을 통해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10월 초면 인수가 끝날거라는 총재의 말과는 다르게 협상은 진전이 없었고, STX의 산업스파이 적발 등의 기업 내부 문제로 인해 두달여를 지지부진하게 끌다가 결국 11월 말에야 공식적으로 무산되었다. 당시 STX는 프로게임단 창단, 메인 스폰서였던 경남FC의 인수 제안[80], V-리그 타이틀 스폰서 제안 등 스포츠를 통한 마케팅에 주력했다. 그러나 자금 부담 때문에 더 이상 스포츠 마케팅 확대를 하지 않기로 함으로서 프로게임단을 운영하는 것 외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81]. 하지만 설령 STX가 인수를 했다고 하더라도, 이 기업의 이후 상황을 생각한다면 또 다른 매각 사태가 몇년 뒤에 일어났을 것이다.[82]

세 번째 매각 시도는 KT였다. STX의 인수는 공식적으로 KBO가 먼저 협상 결렬을 선언해서 좌절된 것이기에 또 다른 기업이 인수 의사를 보인 게 아니냐는 예측이 있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당시 KT 대표이사였던 이석채 회장의 스포츠를 통한 기업 홍보 전략의 일환으로 야심차게 추진한 이 시도는 걸림돌이 되는 하이닉스와의 협상을 우회하기 위해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하는 것이 아닌, 과거 쌍방울 레이더스 해체 후 SK 와이번스로 재창단을 했던 방식을 취하기로 결정되었다. 임시 구단 사무실이 꾸려지고, 엠블렘이나 유니폼 시안과 제작을 위한 선수들의 신체 치수 측정, 프런트 구조와 FA 영입 명단, 코칭스태프 명단까지 떠돌기 시작할 정도로 KT의 야구단 참가는 기존 농협, STX 때와는 달리 꽤나 심도있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KT 측에서는 김시진 감독을 만나 계속 팀을 이끌어 주기를 부탁하며 홍성흔, 박재홍 등을 영입할 것을 약속했고 해외에 있던 현대의 외국인 스카우트 직원들에게 돈은 걱정하지 말고 최고 수준의 외국인 선수와 협상할 것을 지시하는 등 선수단 구성도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KT가 요구한 연 12차례 잠실 야구장 사용 문제와 그것에 동의한 KBO의 합의안 문제, 이에 대해 서울특별시 연고권에 대한 보상으로 입성금을 내라는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 구단의 공동성명 등이 불거지면서 일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모 스포츠언론의 기자[83]가 KT가 실무차원에서 고려하고 있던, 가입비로 야구 기금 부채분과 서울 입성금을 합쳐 185억을 투자하기로 했다는 기사를 대서특필하면서 60억만 내면 된다는 경영진 측의 설명에도 탐탁치 않았던 사외이사와 노조, 그리고 주주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기존 7개 구단들이 요청한, 현대 유니콘스의 운영비로 써버린 야구기금을 KT 측이 부담하기로 한 부분을 KBO 이사회가 통과시키자 KT 측은 불만을 품고 공식적으로 인수를 포기한다.[84][85] 그러나 이는 명목상이며, 실제로는 KT가 야구단 창단을 매개로 정치권과의 교감을 시도했으나 그것이 잘 안 되자 야구단 창단을 포기했다는 이상일 당시 KBO 사무차장의 추측도 있다. 이전 기아해태 타이거즈 인수나 SK의 야구단 창단 과정에서 당시 정계 유력인사들의 영향이 있었다는 건 널리 퍼져있는 풍문 및 사실이기도 하고...

이 외에 소프트뱅크의 손정의와의 접촉설[86]도 있었고, 훗날 고양 원더스를 창단하는 네오플의 인수 타진도 있었으나[87] KBO 수뇌부가 느낀 IT 업계에 대한 생소함[88][89], 그리고 무엇보다 인수 의사를 타진할 당시에는 KT와의 협상이 한참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고려되지는 않았다. KT가 발을 뺀 후에는 모 언론사에 방송중계권을 포함하여 매각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하나 모두 좌절되었다.

새 시즌은 점점 다가오는데 모든 것이 좌절되고 물 건너가며 결국 7개 구단으로의 축소가 점쳐지던 중,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라는 투자회사에서 인수 의사를 밝힌다. 과거 재미교포 부동산회사인 프로스테이트 홀딩스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네이밍 마케팅을 들고 온 수상쩍은 회사를 예전 같았으면 당연히 거부했겠지만, 그때와는 달리 이제 KBO나 유니콘스의 상황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닌 상당히 절박한 상황이었다.[90] 결국 2008년 1월 30일,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측에서 가입금 120억원을 납부함과 동시에 KBO가 현대 유니콘스를 대체할 새로운 8구단 창단 대상자로 승인하여 현대 유니콘스 선수단과 프런트는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로 승계되었지만 현대 유니콘스 구단을 해체한 후 '히어로즈'란 구단명으로 재창단함에 따라 사실상 인수임에도 불구, 공식적으로는 해체였기에 삼미 - 청보 - 태평양 - 현대로 이어지는 계보와 우승 기록은 사라지게 되었다. 뒤이어 법인도 청산절차를 밟아 2009년 2월 23일 부로 완전히 문을 닫았다.

현대 유니콘스란 이름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지만, 그들이 남긴 족적은 절대 작지 않았다. 현대라는 이름으로 1996년 창단 ~ 2007년 팀 해체 12시즌 동안 4회 우승/8회 가을야구를 하였으며, KBO 프로야구 최초로 한시즌 팀 최다승인 91승을 만들었다. 현대가 돈대라고 비아냥을 듣긴 해도 2000년까지는 현질로 2번 우승한 팀, 2001년 이후로는 돈이 없는데도 우승을 2번이나 한 신기한 팀이라고 불린다.
[1] 현대의 2연패 직후 삼성 라이온즈가 2005~2006년에 2연패를 달성했으며, 그 뒤를 이어 SK 와이번스도 2007~2008년에 달성했고 두산 베어스도 2015~2016년에 달성했다.[2] 정확히는 휴전선 이북의 강원도 통천군 출신 실향민이다. 인천과도 인연이 어느 정도 있던 것이 젊은 시절 인천항에서 부둣가 하역 노동자로 일한 경력이 있다. 그의 일대기 중 빈대와 연관된 스토리가 있는데, 인천항 하역 노동자 시절의 이야기다.[3] 하지만 1984년 울산 현대 축구단을 창단하면서 프로축구에는 참여했다. 알다시피 현대가에는 축빠가 많기로 유명하며, 창업주 정주영도 살아생전에 축구광으로 유명했다.[4] 1970년대부터 재벌들에게 스포츠 종목을 강제로 할당해서 협회 회장을 맡게 했다. 이후 재벌들이 회삿돈으로 스포츠단체를 운영하면서 국제대회 성적을 책임지게 된다. 국가 예산으로 해야 할 스포츠 진흥을 재벌에게 떠넘긴 것이다. 이 때 현대건설 이명박 사장 - 대한수영연맹 회장, 정몽구 - 대한양궁협회 회장이었다. 양궁협회 회장은 현재 정몽구 회장의 아들 정의선이 맡고 있다. 삼성 - 레슬링, 두산 - 유도, 한화 - 권투 등 지금도 대부분의 스포츠 종목이 이런 식이다.[5] 당시까지만 해도 울산은 광역시 승격 이전 경상남도 산하의 일반시였다. 울산이 광역시로 승격한 해는 1997년.[6] 어느 정도였냐면 모 구단에서는 KBO 구단총회를 통해 현대그룹의 신생팀 창단 조건으로 무려 400억+@라는 가입금을 요구했을 정도로 어떻게든 현대가 야구판에 들어오지 못하게 텃세를 부렸다. 신생팀 창단 가입금으로 빙그레가 30억, 쌍방울이 40억을 냈다는 걸 생각하면 아무리 돈이 많은 현대그룹이라도 너무 터무니없는 액수였다.[7] 그리하여 1990년 강원도를 연고로 두고 있던 현대 호랑이 축구단을 울산시로 연고지 이전을 하면서 울산시 최초의 프로 스포츠단이 생기게 되고 30년 넘게 울산에 연고지를 두고 있다.[8] 당시 무주 동계 유니버시아드 개최 준비로 인해 자금이 필요했던 쌍방울그룹과 교섭을 시도했으나, 쌍방울 쪽에서 인수 조건으로 구단 인수대금 400억원+유니버시아드 선수촌 2개동 신설을 요구하는 바람에 거의 800억원 이상의 거금이 들어가게 되어 최종적으로 결렬되었다.[9] 사실 메이저리그일본프로야구의 양대리그제 역시 기존의 프로 리그에 대항하기 위해 후발주자들이 나름 독자적인 리그를 만들어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당시 현대그룹의 발상 자체는 황당무계한 것만은 아니었다. 막말로 현대그룹을 포함해 프로야구에 관심 있을 법한 대기업 몇 개 끌여들여서 팀을 창단하고 리그를 결성하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문제는 당시나 지금이나 한국의 아마추어 야구팜은 선수층 규모가 얇았기 때문에 프로야구 질적 하락이 우려되는 등 제2리그 창설까지는 한계가 있었다.[10] 450억원과 470억원 이렇게 두 인수금액이 언론 기사에 자주 나오고 있는데 순수 인수금액과 부대비용을 포함한 총 인수금액의 차이로 볼 수도 있을 것 같고 회계 자료를 보지 않는 한 신문기사 상으로는 정확한 인수금액이 어느 금액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11] 이마저도 청보에 현금을 준 것이 아니라 빚을 떠안은 형태로 구단을 인수했다. 인수 당시 50억원이던 부채 규모는 이자가 늘어나면서 70억원으로 늘었다. 태평양은 그 동안의 운영비와 구단 가치 등을 더한 400억원과 부채비용 합해 450억원 ~ 470억원을 불렀는데 현대가 쿨하게 이를 받아들이고 돈을 꺼내면서 거래가 성사됐다.[12] 당시 신인 최고 계약금은 LG 심재학의 2억 3,000만원.[13] 다만 박진만은 공식적으로는 체육특기자 수능 점수 상한선인 40점을 넘지 못해 진학이 좌절된 것으로 발표되었다.[14] 1995년 당시 3억원이라는 물가는 어마어마하다. 당시 서울 30평 아파트 한 채가 2억원이 안됐던 시절이었으며, 2022년 기준 8억원 정도에 해당되는 고액이다.[15] 그나마 유니콘스의 딱한 사정을 알고 있는 현대자동차, 현대백화점, 현대증권, 현대해상 등 범현대가 형제 기업들이 유니폼 패치 로고 광고와 야구장 내 펜스 광고를 통해 운영비를 대줬다. 해체 당시 구단 지분율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맏형 기업이던 현대자동차그룹이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해 KIA 타이거즈를 창단하게 되면서 사실상 2개 구단을 지원해 주는 셈이 됐고 여기에 정몽헌 회장의 사망 이후 현대그룹이 현정은 회장 체제로 본격 운영되자 심기가 불편해진 형제 기업들이 유니콘스에 대한 지원을 하나둘씩 끊어버리게 된다. 다만 야구에 대한 애정이 상당했던 정몽윤 회장의 현대해상만이 최후까지 지원해줬다.[16] 태평양 최상덕과 트레이드 후 현대에 입단.[17] 박재홍의 타격시비 등에 휘말려 후반기에 4위로 가라앉았다[18] 태평양 돌핀스 시절인 1994년 플레이오프에서도 내리 3연승으로 한화를 꺾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전례가 있다.[19] 물방망이 팀에서 승운이 따라주지 못했지만 팀의 좌완 최다 승을 가지고 있었다.[20] KBO 공식기록으로는 노히트 노런이 13회 집계되었으나 이는 정규시즌 기록들만 집계된 것이다. 정규시즌 기록과 포스트시즌 기록은 별개로 취급하기 때문. 단적인 예로 한 경기 4홈런 기록. 정규시즌 기록은 박경완, 박병호, 최정, 윌린 로사리오, 한동민까지 5명이 달성했지만 포스트시즌에서는 오재일이 한 경기 4홈런을 달성한 유일한 타자로 기록되어 있다.[21] 25개의 도루에 11개의 홈런을 친 1번타자 김인호의 투혼이 빛났으나 타율은 2할대 초반이었으며 고질적인 2루수, 3루수 공백이 컸다. 포수도 주전 김동기의 노쇠화로 장광호가 주전이었으나 타율이 너무 낮았다. 다만 신인으로서 30홈런을 쳐내며 홈런왕이 된 동시에 국내 최초의 30-30을 기록한 박재홍, 1994년 홈런 2위를 기록했던 이름값 어디 안가고 20홈런을 쳐준 김경기를 필두로 김인호, 이숭용이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며 뒤를 받친 팀홈런 부문에서는 1위를 기록했던 터라 예전 삼청태시절마냥 우습게 볼만한 타격도 아니었다.[22] 당시는 세이브포인트제 - 구원 - 으로 구원1위는 구대성[23] 전준호 영입 이전만 해도 현대에서 1번타자는 김인호였다. 김인호는 근성하나는 강한 선수였지만(단적인 예로 1996년 포스트시즌 1차전 때 정민철의 볼에 일부러 맞다시피하며 출루하려 했다.) 타율이나 장타면에서는 너무 떨어졌기 때문에 1번 타자로 활약하기에는 부족했다. 전준호 트레이드에 대해서 지금은 '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트레이드 1순위'로 꼽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롯데측 입장에서는 '전준호는 나이도 있고 기복이 심한 선수'라는 인식 때문에 계륵같은 존재로 여겼고, 거기다 연봉협상에서 고작 몇백만원 더주기 싫은 것도 있었다. 당시 롯데는 전준호 대체로 젊은 유망주였던 김대익을 크게 기대했으나 주루가 시망했으며 김주찬이 올 때까지 거의 5년 동안 제대로 된 리드오프가 존재하지 않았다.[24] 126경기 체제 96경기 출장이지만 이상하게 출루/장타율이 높았다. 시즌이 끝나고 예상치 못한 골든글러브를 받으면서 현대는 그나마 위안을 풀었다.[25] 근데 웃긴 건 마구마구에서 쌍방울 소속 카드이다. 운영자에게 건의를 했지만 돌아오는건 메크로 현대 역시 최창호를 LG로 보냈는데 현대 카드로 남아있다. 그와중에 뜬금없는 서한규 카드가 떡하니 있다. 서한규는 당시 롯데 자이언츠 소속이었다.[26] 현대 vs LG 맞대결 성적은 5할에 살짝 못미친다. 97, 98, 01, 02, 05, 07년은 LG 우세 96, 99, 00, 03, 04, 06년은 현대의 우세인데 97년 승패마진 -12를 기록한게 결정적이라 통산 승률에서 밀린다.[27] 하지만, 유일한 문제가 있었다. 그건 바로 마무리투수 용병 조 스트롱. 6승 5패 27세이브로 스탯상으로만 보면 괜찮은 성적으로 보이지만 겨우겨우 세이브를 따는 모습을 보였으며 Whip(이닝당 출루허용)이 1.60이나 되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나올 때마다 맨날 장작쌓고 불만 질렀다. 더구나 매번 등판할 때마다 경기 마무리는 제대로 못하고 땀만 한바가지를 쏟아내자 불안감에 사로잡힌 도원전사 아재들이 경기 막바지 구수한 욕설을 쏟아내기도 했다. 결국 1998년 한국시리즈에는 한 경기도 등판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중에 메이저리그도 잠깐 밟기도 했다.[28] 다만 이 때 최원호의 10승은 구원승 1승이 포함되어 있다. 이후 1선발부터 5선발까지 전원 선발 10승은 2015년 삼성 라이온즈(윤성환-알프레도 피가로-차우찬-타일러 클로이드-장원삼)가 달성하게 된다.[29] 현대처럼 구원승 포함하여 1선발부터 5선발까지 10승을 달성한 사례는 2018년 두산 베어스가 있다. (린드블럼-후랭코프-이용찬-유희관-이영하)[30] 정작 한국시리즈에서는 롯데에 패했다.[31] 이적 후 99년까지는 선발로 뛰었다.[32] 당시 LG는 태평양-현대전에 특히 강했고, 현대 입장에서는 LG하고 상대하는걸 극히 꺼렸다. 플레이오프 LG-삼성전에서 현대팬들은 삼성이 이기길 내심 바랐다. 그러나 LG가 승리하고 한국시리즈 진출. 한국시리즈 시작 전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LG가 이길 거라고 예상했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정민태, 박재홍의 맹활약에 힘입어 4승 2패로 우승했다.[33] 현대가 인천연고 팀으로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이다.[34] 그해 이후 9년뒤 SK 와이번스가 인천 연고 팀으로 우승하였다.[35] 사실 현대는 이해에도 가을야구에 나갈수 있긴 했다. 8월초 7연승을 했을 때에는 드림리그 및 전체승률 1위였던 롯데가 9연패하는 틈을 타 매직리그 1위 삼성보다 높은 승률로 롯데와 1경기차까지 좁히기도 했고, 10경기 남긴 상태까지 매직리그 2위인 한화 이글스에게 2.5경기차를 앞서서 와일드카드로 준플레이오프에 나갈수 있었지만 하필 마지막 3연전에 한화를 만나 3연전을 스윕을 당해서...역으로 한화에게 2.5경기차로 진출권을 내줬다. 이해에도 만약 진출에 성공했더라면 현대는 7년 연속 KBO 포스트시즌(98~04시즌)에 진출 성공 했을지도...하지만 와일드 카드 제도는 지들이 도입하자고 해놓고 못갔다... 훗날 현대 선수단을 인수한 히어로즈가 2015년과 2018년, 2020~2021년에 와일드카드 결정전에 진출하긴 했으나 이 시기의 와일드카드전은 10개구단 중 4-5위간의 맞대결로 순수하게 상위 50%에게 주어지는 것이라 양대리그제 시절인 1999~2000년에 시행됐던 와일드카드와 동일선상으로 비교하기는 그렇다.[36] 아이러니하게도 다음해인 2000년에는 삼성 라이온즈가 1999년 시즌 도중 도입된 와일드카드 제도 덕택에 드림리그 3위(133경기 69승 5무 59패로 현대의 99년 성적인 132경기 68승 5무 59패와 거의 판박이다!)를 기록하고도 매직리그 2위인 롯데 자이언츠의 승률을 추월하여 가을야구에 갈 수 있어서 8구단 체제에서 최초로 5개의 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일이 벌어졌다. 1999년 시즌 도중 자기네들이 가을야구 갈려고 급히 도입시킨 제도로 인해 다음해에 졸지에 라이벌 구단의 가을야구 진출을 도와준 셈이다.[37] 조규제, 김홍집 외에는 이렇다할 좌완 선발이 없어서 마일영을 데려왔다.[38] 90년대 최후의 20승 투수.[39] 문제는 SK에게 연고권리를 팔 때, 인천뿐만이 아닌 경기/강원 연고권리까지 같이 팔아버려서 원래대로라면 수원에도 못 있을 처지였다. 이는 2003년부터 1차 지명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는 이유가 된다.[40] 정작 전준호는 시즌 전 김경기와 선수협 문제로 다투어서 부상으로 얼마 뛰질 못했다.[41] 시즌 최다승 기록은 2016년 10월 4일 두산 베어스가 홈에서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하여 92승을 달성하며 깨진다. 최종 기록은 93승이었지만 최고승률을 기록하지는 못했다.[42] 참고로 144경기 기준에 대입하면 정확히 100승이다.[43] 이때는 두산이 우동수트리오가 있었던 시절이었다.[44] 98년 이적 후 2년 동안 선발로 뛰었지만 2000년에는 목 부상 탓인지 9경기(중간계투 위주) 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2년차 신예 마일영이 그 해 조규제의 공백을 메꿔줬다.[45] 아이러니하게도 2002년~2004년의 심정수는 심재학보다 연간 더 좋은 성적을 올리며 활약하게 된다.[46] 이후 매니저 등을 거치면서 2012년 가을 넥센 히어로즈의 감독을 2016년 시즌까지 했다.[47] 역대 유니콘스 좌완 투수들 중 가장 많은 홀드를 가지고 있다.[48] 그 와중에 모기업인 현대전자하이닉스로 재탄생하는 과정에서, 유니콘스가 연고 침해 명목으로 SK 와이번스에게서 받은, 그리고 자신들의 서울 연고 입성을 위해 LG 트윈스두산 베어스에 줘야 할 54억을 멋대로 가로채갔다. 이후 하이닉스는 구단 지분을 무려 76%나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운영비 한 푼도 대주지 않고 구단을 사실상 방치하다시피 한다.[49] 그 와중에 같은 범현대가정몽구현대자동차그룹이 현대 유니콘스 인수를 제시했지만, 하이닉스 측이 인수대금으로 무려 900억을 부르는 바람에 결국 인수를 포기했고, 현대차그룹은 대신 값싸게 나온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해 KIA 타이거즈로 프로야구에 입성한다. 하이닉스는 왕자의 난이 덜 끝난 상황에서 야구단을 현대자동차그룹에게 넘기고 싶지 않아서 저렇게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른 것이긴 하지만...[50] 최하위 롯데손민한과 역시 6위에 그친 LG 트윈스신윤호가 공동 다승왕을 하였기 때문에 방어율 4점대 였는데 상위권 팀인 현대의 에이스가 방어율 4점을 찍었다는건 역시 많은 전문가들이 봤을때도 문제가 제기되었다.[51] 그 뒤로 김수경은 15승 이상의 문턱은 커녕 아슬하게 아슬하게 서너번의 10승대 반열에는 오른다. 임선동도 이 시즌을 기준으로 완전히 폭망하고 10승 문턱에는 밟지 못한다. 이들의 전성기와 쇠퇴를 만든 주역이 바로 김시진 되시겠다.[52] 위재영은 원래 99년도 까지는 선발투수 2000년도 부터 마무리 투수로 옮겼으나, 마무리 라는 중책의 위압갑이 컸는지 이듬해 선발투수로 다시 복귀 했지만, 더이상의 가망성은 없고, 이후 추락하듯이 1군과 2군을 반복하였다.[53] 타율이 2할 4푼으로 1할씩이나 추락하는 등의 악재이며, 전년도 타격 1위가 규정타석 최하위로 추락한 것은 한미일 야구 사상 최초의 사례다. 박재홍은 이 후 3할은 쳤어도 장타력이 급감해버리며 다시는 20홈런을 칠 수 없게 되었다.[54] 포수가 20-20 클럽을 한 것은 동아시아 야구는 최초 그리고 메이저리그에서 단 한번 밖에 없다. 그걸 이룬 박경완은 사실 전년도 포수 최초 40홈런을 치고 MVP를 했는데 이듬해 20-20 클럽 가입한다고 인터뷰를 하다가 시상식에 있던 기자들 및 KBO 관계자들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는데 그걸 진짜로 했다.[55] 3위 두산이 한국시리즈로 올라가며 최종순위는 3위로 내려갔다.[56] 은퇴를 선언 했는데 다음년도에 LG 트윈스가 데려간다.[57] 필립스는 빅리그에서 백업으로 좀 뛰던 선수였다.[58] 2001년과 2002년은 2015년 현재와 같은 3명 보유 2명 출전이 가능했다.[59] 이런 해프닝이 있었다.[60] 당시 정성훈은 KIA의 주전 3루수였는데, 1999년에 1차지명으로 데려온 선수였다. 2002년에 대학리그 최고의 내야수인 이현곤이 입단하자 이현곤의 자리를 만들어주겠다고 정성훈을 내보냈는데, 결국 정성훈을 버린 것이 잘못된 것임은 나중에 보여진다.[61] 이숭용은 1루수 이미지가 강한 편이지만, 김경기나 쿨바, 이명수가 있을 때는 외야로도 나갔다.[62] 말이 마무리지 사실상 7회와 8회에 등판해 끝까지 던지는 투수인 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체구 때문에 고교 졸업 당시 박한 평가를 받았던 조용준은 몇 해 지나지 않아 부상의 덫에 걸렸고 불성실한 재활까지 겹치면서 커리어를 일찍 마감하고 말았다.[63] 특히 2, 3차전을 잡아낸 SK가 선 2승 그것도 2연승을 한 팀이 우승했다는 과거 기록을 감안했을 때 우승에 가깝지않냐는 말도 많았다.[64] 1,4,7차전에 선발로 나와 승리를 얻어냈고, 특히 7차전에서는 허리 통증에도 불구하고 테이핑까지 감아가며 완봉승을 하였다. 정민태가 이렇게 활약하지 않았다면 현대의 우승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애초에 정민태가 KIA전 정규시즌 1위 결정전에서 8이닝 1실점 호투로 팀의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지었기에 아예 정규시즌 우승조차도 없었을 것이다.[65] 2003년 평균자책점 1위 기록이다. 역대 최초로 3점대로 평균자책점 1위를 기록했다.[66] 그마저도 19차전에 1패. 이 경기마저 이겼다면 시즌 롯데전 무패였다.[67] 참고로 이 시기의 한화 센터라인 내야수는 전설의 임과장님부터 시작해서 원바운드 송구의 백재호, 3푼이 한상훈유격수 꽃범호 등으로 구성된 최악의 내야진이었다. 트레이드를 하려 해도 할만한 자원이 없던 상황.[68] 일정 시간 이후에는 새로운 이닝에 돌입할 수 없는 규칙으로 인해 무승부가 많이 나왔다.[69] 특히 정성훈은 3루수임에도 18개 채종국은 2루수, 그것도 다른 선수들에 비해 절반이나 덜뛰었음에도 13개의 실책을 기록했다.[70] 이 고통은 2007년에도 계속된다.[71] 그 이후로 이숭용은 두자릿수 홈런을 못치게 된다.[72] 1위는 205이닝의 리오스.[73] 1997년 삼성입단, 1999년 임창용 트레이드때 양준혁과 묶여서 해태로 갔으나, 2000년에 방출되고서 2001년 현대로 와서 2군에서만 던지고 있었다.[74] 5위 롯데, 6위 LG, 7위 현대, 8위 KIA[75] 그나마 다행인건지 당해년도 바로 고교 동창 손시헌의 도움으로 두산 베어스에 입단한다.[76] 두산그룹 회장을 역임한 인물로 정몽헌과 비슷하게 집안 권력 싸움에 밀리고, 실의에 빠져 2009년 자살한다. KBO 총재로서 선수협 창설에 결사반대하고 지상파 TV에 튀어나와서는 "자꾸 이러면 프로야구를 아예 없애버린다" 라고 하여 야구 팬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은 바 있다.[77] 이 일로 인해 이 시점 이후로 KBO의 독자적인 발언권은 현저히 약화되고 프로야구는 회원사들이 의사결정을 사실상 주도하게 된다.[78] 한편 마구마구 초기 시절, 스크린샷 게시판에 현대 유니콘스의 선수들과 농협의 로고를 섞은 유니폼을 합성시켜 만든 사진이 있었는데 다들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농협이 현대 유니콘스와 너무 잘 어울린다는 말이 나왔다. 현대와 농협 두 기업 모두 색깔이 초록/노랑으로 일치하였기에 이런 드립이 나온 듯 하다. 여기서 발전하여 '농협 파머스'라는 가상의 팀까지 만들고 각종 합성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79] 프로축구의 경우에는 초기에 국민은행한일은행이 프로축구에 참여한 적이 있지만, 구단 자체는 프로화되지 못한 채로 결국 다시 실업리그로 돌아왔다. 이후 2020년, 하나금융그룹대전 시티즌을 인수했지만 이건 하나금융그룹에서 재단법인을 만든 뒤, 그 재단법인이 축구단을 인수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소위 말해 편법을 쓴 것.[80] 이에 대해 축구해설가 신문선은 세계로 뻗어나가려면 야구 따위가 아닌 축구팀을 응당 인수해야 맞다고 어그로를 끌면서 인터넷에선 야구 vs 축구 키배가 불붙기도 했다. #[81] V리그 타이틀 스폰서 제안에는 동의했지만 개막 열흘전 갑작스럽게 철회했다. 이후 NH농협은행이 10년 동안 V-리그의 스폰서를 맡게 된다.[82] 그래도 STX가 위기에 빠진 2012년은 프로야구 인기가 정점에 다다른 상태라 제2의 유니콘스 사태까지는 가지 않고 빠르게 새 인수처를 찾았을 가능성도 크다.[83] 익히 알려진 것과 달리 박동희의 (협상 공개 이전에 나왔던) '오늘의 단어' 드립은 KT의 인수작업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이후로도 유니폼 디자인 시안 결정 등 인수작업이 계속 추진된 게 그 증거. 말 그대로 오비이락이 된 상황.[84] 이후 185억 투자 기사를 썼던 스포츠조선의 신모 기자는 KT의 인수 포기 이후 야빠들의 비난을 받게 되자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썼는데, '착잡하다'를 '찹찹하다'로 잘못 쓴데다가('찹찹하다'는 표준어이기는 하지만 '착잡하다'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단어이다)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 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비난을 자초하게 된다. 이로 인해 이 기자는 야구계 뉴스에선 사실상 퇴출되고 만다.[85] 결국 KT는 2014년, 현대가 연고지로 삼던 수원시에서 10번째 구단 kt wiz를 창단하여 2015년, 정식으로 1군 무대에 데뷔했으며, 수원에서도 7년 6개월만에 프로야구가 다시 열리게 되었다.[86] 단, KBO에서는 공식적으로 부인.[87] 당시 유니콘스 인수를 제안한 네오플의 창업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허민이다. 허민의 이 꿈은 먼 훗날 여러 다리를 건너서 간접적으로 실현이 된다. 그런데 네오플 창업자 허민의 지나친 갑질이 오히려 논란을 낳게 됐다.[88] 이런 인식은 게임회사인 엔씨소프트제9구단 창단에 뛰어든 후에도 계속 있었고, 실제 1군에 진입하고 나서야 조금 걷힌다.[89] "그럼 핸드폰 제조사 삼성전자가 돈 대주는 삼성 라이온즈는 뭔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삼성그룹은 삼성전자 외에도 여러 계열사들이 있다. 더구나 삼성전자는 엄밀히 따져서 IT 회사가 아니라 제조업 회사이며, 무엇보다 삼성전자가 그룹의 핵심이 된 것은 생각보다 오래 되지 않았다. 삼성 라이온즈가 창단되던 1982년까지만 해도 삼성의 핵심은 제일제당, 삼성물산, 제일모직 등이었고, 삼성전자가 반도체 개발 성과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세계 초대형 기업으로 성장한 것은 30년도 채 되지 않는다.[90] 이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 한 곳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접촉 중인 기업만 3개라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는 보안상 일부러 그렇다고 언론플레이를 했을 뿐 실제로는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 단 한 곳 뿐이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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