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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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북위의 황족. 평문제 탁발울률의 후손. 고량왕 탁발예의 아들. 태원공 원대조의 고조부.
2. 생애[편집]
태평진군 6년(445년) 4월, 용맹하고 전투에 능하여 중도대관을 지내던 탁발나는 태무제 탁발도의 명을 받고, 정서대장군에 임명되어 토욕혼의 모용모리연(慕容慕利延)을 치기 위해 백란(白蘭)으로 출병하였다.
태평진군 6년(445년) 8월, 탁발나의 군대가 만두성(曼頭城)에 이르자, 모용모리연은 부족을 이끌고 사막을 건너 서쪽으로 도주하였다. 탁발나는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모용모리연의 아들 모용피낭(慕容被囊)을 격파해 패주시키고, 중산공 두풍(杜豐)에게 정예 기병을 주어 도망친 모용피낭을 추격케 하였다. 두풍은 돈황의 삼위산(三危山)과 설산(雪山)을 넘어 끈질기게 추격한 끝에 모용피낭과 모용십귀(慕容什歸), 걸복성룡(乞伏成龍)을 모두 사로잡았다. 토욕혼 토벌에 성공한 탁발나는 포로들을 데리고 북위의 수도인 평성(平城)으로 개선하였다. 이후 탁발나는 안정공 한무(韓茂)와 함께 양평(陽平)에 주둔하고, 기주(冀州)의 백성들을 징발해 확오진(碻磝津)에 부교를 만들었다.
태평진군 6년(445년) 11월, 태무제가 하북 6주에서 날랜 기병 20,000명을 선발해 영창왕 탁발인, 고량왕 탁발나(拓跋那)와 병력을 나누고, 두 갈래로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북위군은 회수(淮水)와 사수(泗水) 이북에서 송나라를 공격해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하북으로 끌고가 부족한 인구를 충당하였다.
태평진군 7년(446년) 2월, 송의 백성 안백록(顔白鹿)이 국경을 넘어 북위의 영토를 침범했다가 붙잡혀 죽을 위기에 처하자 송의 청주(靑州) 자사 두기(杜冀)의 사신을 가장해 두기가 투항하려 한다 거짓말하였다. 태무제는 기뻐하며 탁발인과 탁발나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두기를 영접해 오게 하는 동시에, 송의 기주(冀州) 자사 신념이 지키는 역성(歷城)을 치게 했다. 이에 두기가 사마 하후조환(夏侯祖歡) 등을 보내 역성을 구원하게 하니, 탁발나는 탁발인과 군사를 나누고 동평릉(東平陵)을 침략해 그곳의 백성 6,000호를 하북으로 옮겼다.
태평진군 7년(446년) 5월, 일전에 전중상서 을발(乙拔)에게 대패했던 천태왕 개오(蓋吳)가 송의 지원을 등에 업고 다시 무리를 규합해 행성(杏城)에서 진지왕(秦地王)을 자칭하며 거병하니, 그 위세와 명성이 사방을 떨쳤다. 태무제는 탁발인과 탁발나에게 북도(北道)의 여러 군대를 감독하게 하여 개오를 토벌케 하고, 장안 남쪽에 위치한 계곡마다 병력을 배치하여 개오가 숨어서 달아날 것에 대비하였다.
태평진군 7년(446년) 8월, 탁발인과 탁발나가 개오의 군대와 교전하여 승리를 거두고 개오의 숙부 2명을 포획하였다. 탁발나는 그들을 곧바로 평성으로 압송하려 했는데, 장안진장 육사(陸俟)의 계책에 따라 개오의 두 숙부에게 처자식의 목숨을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개오의 목을 가져오라 요구하며 풀어주었다. 과연 수일 후, 개오의 숙부들은 개오를 배신해 죽이고, 그 수급을 가져와 탁발나가 이를 평성에 전달했다.[1]
태평진군 8년(447년) 2월, 토경(吐京)에서 산호족(山胡族)이 반란하자, 탁발나는 안정(安定)에서 출병하여 무창왕 탁발제(拓跋提), 회남왕 탁발타(拓跋他)와 군대를 합치고 반란 주모자인 조복혼(曹僕渾) 등을 쳐 토벌하였다.
태평진군 10년(449년) 9월, 태무제가 재차 유연 정벌에 나설 때, 탁발나 또한 군대를 이끌고 종군하였다. 처라가한 욱구려토하진(郁久閭吐賀真)가 유연족 최정예병을 뽑아 탁발나의 부대를 포위하자, 탁발나는 군영 주변에 참호를 파고 굳게 지켰다. 처라가한은 여러 차례 탁발나의 군영을 무너뜨리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였고, 며칠 동안 소모전만 벌이다가 태무제의 구원병이 출발했다는 첩보를 듣고 허겁지겁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때 탁발나가 수비를 그만두고 도망치는 처라가한을 추격하니, 9일 밤낮으로 쫓기던 유연족 군대는 치중까지 버려가면서 퇴각하였다. 탁발나는 그들이 버리고 간 치중을 모두 취한 뒤 돌아왔고, 처라가한은 궁륭령(穹隆嶺) 너머로 도망쳤다. 이후로 유연은 쇠약해져 감히 북위의 국경지대를 약탈하지 못 했다.
태평진군 11년(450년) 정월, 태무제가 탁발나에게 의동삼사를 더하였다.
태평진군 11년(450년) 11월, 태무제가 송나라의 북벌에 대한 반격으로 제장들에게 명해 여러 갈래로 나란히 남진하게 하였다. 이에 영창왕 탁발인은 수양(壽陽)으로, 장수 장손진(長孫眞)은 마두(馬頭)로, 초왕 탁발건(拓跋健)은 종리(鍾離)로 각각 나아갔으며, 청주(靑州)에 있던 탁발나 역시 출격하여 하비(下邳)로 향하였다. 이후 하비에 도착한 탁발나는 다시 산양(山陽)으로 내려가 4로의 군대와 함께 장강 연안까지 진격하였다.
정평 원년(451년) 정월, 태무제는 우이(盱眙)를 지키던 송의 보국장군 장질(臧質)의 분뇨 도발에 노하여 우이성의 해자를 메우고, 전군에 명해 일제히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탁발나 등 4로의 군대도 태무제와 합류하여 우이를 쳤으나 끝내 성을 함락시키는 데 실패하였고, 성벽을 오르다가 사망한 병력만 10,000여 명에 달했다. 태무제는 하는 수 없이 남정을 중단하고 공성 기구를 모두 불태운 후 북으로 퇴각하였다. 송의 우이태수 심박(沈璞)은 퇴각하는 북위군의 행렬이 가지런하고 정돈된 것을 보고 그 뒤를 습격하자는 주장을 묵살시켰다.
정평 원년(451년) 6월, 탁발나가 죄를 지어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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