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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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580
북주(北周)의 황족이자 대신. 북주의 문제의 칠남이다. 조왕(趙王)의 작위를 가졌으며, 시호가 평(平)이라 조평왕(趙平王)이라고 불린다.[1]
선비식 이름은 두로돌(豆盧突)이다.[2] 서위(西魏) 대에 아버지 우문태(宇文泰)의 위세에 기대 정평군공에 임명된 바가 있었다. 북주가 서자 주국, 익주총관, 사공, 대사마 등을 역임했다. 나중에 조국공의 작위를 받았으며, 우문옹이 즉위하자 조왕으로 승진했고, 옹주목을 제수 받았다. 북제(北齊)와 계호(稽胡)를 토벌해 멸망시킨 공적이 있다. 그 공로로 상주국으로 승진하고, 태사(太師)를 겸하게 되었다.
대상 2년(580년), 우문초는 양견을 암살하려했으나 실패하였다. 이 시도에 열받은 양견의 손에 걸려 반역죄를 뒤집어 쓰고 일족이 멸족당했다. 수문제가 수나라를 세운 뒤 그에 대한 원한으로 시호를 참(僭)이라 했다.[3]
2. 생애[편집]
2.1. 간단한 내력[편집]
우문초는 대군(代郡) 무천현(武川縣) 사람이다. 우문태의 칠남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그는 유신(庾信)[4] 의 학문의 영향을 받았다.
위공제 3년(556년), 정평군공에 봉해지고, 북주 초기에는 조국공으로 봉해진다. 그리고 대사공, 대사마 등을 역임했다.[5]
무성 3년(561년), 작위가 왕으로 올랐으며, 옹주목에 제수되었다.
2.2. 북제를 멸하고, 계호를 평정하다[편집]
건덕 5년(577년), 무제는 북제를 정벌하였다. 우문초는 삼군의 총관이 되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화곡(華谷)으로 출병해, 분주(汾州)를 쳤다. 그리고 북제의 핵심부인 병주를 쳐서 상주국으로 승진했다. 북제가 망한 뒤, 행군총관이 되어 제왕 우문헌(宇文憲)과 함께 병사들을 거느리고 계호를 토벌해 그 우두머리인 유몰탁(劉沒鐸)을 잡아 처형한다. 그리하여 계호가 평정되었다.
그 공로로 선정 원년(578년), 태사에 임명되기에 이른다.
2.3. 입조[편집]
같은 해 북주 무제가 죽자, 북주의 선제가 즉위한다. 그는 시기심이 매우 많고 포악해 숙부들을 미워하였다.
대상 원년(579년) 5월, 선제 우문윤은 낙주 양국군의 만호를 조나라에 주었다. 우문초는 조나라로 돌아갔다.
다음 해 2월, 딸인 천금공주를 돌궐에 시집보냈다. 천원황제[6] 가 병이 들어 양견은 조왕 우문초와 진왕, 월왕, 대왕, 등왕 5명의 왕을 부르니 그들이 분분이 입조했다. 그 때 선제는 죽었다. 당시 우문윤이 그에게 정사를 맡겨 그 위세가 대단해 황제를 누를 정도였다.
2.4. 구국을 위한 눈물겨운 암살 시도와 최후[편집]
양견은 북주 정권을 본인이 차지하여 새 왕조를 개창할 뜻을 품고 있었다. 우문초는 그것을 알고 양견을 죽이고, 사직을 구하려 했다. 그리하여 잔치를 베풀어 양견을 암살하려 했다. 양견과 잔치를 즐길 때, 그를 처치하려고 벼르고 있었으나 양견의 심복인 원주(元胄)가 기지를 발휘해 우문초를 따라다니니 결국 일이 실패로 돌아갔고, 이 일을 한스럽게 여겼다. 얼마 후, 필왕 우문현(宇文賢)은 양견을 죽이려고 했으나, 일이 누설되어 우문현이 거꾸로 죽임을 당했다. 나머지 5명의 왕도 연루되어 반역죄로 죽임을 당했다. 양견은 검을 차고 신을 신고 황제를 직접 알현하는[劍履上殿] (소위 구석 중 하나이다)혜택을 받아 그 위세가 매우 커졌다. 이때가 대상 2년(580년) 7월 28일의 일이었다.
3. 시호 논란[편집]
우문초는 사서에 조참왕이라고 하는데, 수서에는 그가 쓴 글인 조평왕집이 언급된다. 그는 본디 시호가 평이었으나, 수나라에서 참의 시호를 받은 것이다. 그 이유는 양견이 수나라를 세운 뒤 그에게 악시를 주어, 자신을 살해하려 한 원한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4. 가계도[편집]
부친 우문태 북주 문제
아내 두함생(竇含生) 등국공(鄧國公) 두치(竇熾)의 딸. 후처 노씨(魯氏)
아들 덕광공(德廣公) 우문원(宇文員), 영강공(永康公) 우문관(宇文貫), 월국공(越國公) 우문건선(宇文乾銑), 우문건갱(宇文乾鏗)
딸 천금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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