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계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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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현황
3. 보수정당과의 연관성
4. 역대 민주당계 정당 목록
5. 소속 정치인
5.4. 국회의원
5.4.1. 13대 국회
5.4.2. 14대 국회
5.4.3. 15대 국회
5.4.4. 16대 국회
5.4.5. 17대 국회
5.4.6. 18대 국회
5.4.7. 19대 국회
5.4.8. 20대 국회
5.4.9. 21대 국회
5.5.1. 서울특별시장
5.5.2. 부산광역시장
5.5.3. 인천광역시장
5.5.4. 광주광역시장
5.5.5. 대전광역시장
5.5.6. 울산광역시장
5.5.7. 세종특별자치시장
5.5.8. 경기도지사
5.5.9. 강원도지사
5.5.10. 충청북도지사
5.5.11. 충청남도지사
5.5.12. 전라북도지사
5.5.13. 전라남도지사
5.5.14. 경상북도지사
5.5.15. 경상남도지사
5.5.16. 제주특별자치도지사
5.7. 당대표
6. 역대 선거결과
8. 진보정당과의 관계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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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민주당계 정당은 대한민국의 정당 계열 중의 하나로, 1955년 민주당을 그 시조로 자처한다.[1] 다만 이건 역사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현재의 민주당계의 본격적인 시작은 1987년 양김이 결별하면서 창당한 평화민주당과 새정치국민회의이다.[2]
한국의 정당 특성상 이념보다는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정당이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고 사분오열과 이합집산이 자주 반복되어 왔는데, 특징을 잡아보면 야당이었던 기간이 훨씬 길고, 대체로 정당 이름에 민주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3] 한국의 현대사에서 민주라는 명칭이 붙은 정당의 역사는 아래에 기술한다. 또한 민주라는 명칭은 들어가지만, 실질적으로 민주당계와 관련이 없는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 민주자유당, 민주국민당[4] , 민주노동당[5] , 자유민주연합[6] 등은 제외한다. 더불어 역사적 의미가 옅은 군소정당들은 제외하고 원내정당이거나 특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위주로 서술한다.
2. 현황[편집]
2.1. 당색[편집]
민주당을 상징하는 색은 세 개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고른 초록색[8]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에서 주로 사용한 노란색[9] , 2013년 민주당으로 개명한 후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정부가 사용하는 파란색[10] 이 있다.
2015년, 국민의당은 당시 새누리당의 빨강과 더민주의 파랑이라는 스펙트럼의 중간인 초록색을 선택했다.[11] 주황색을 사용했을 때도 있었는데, 대통합민주신당이 그 예다. 2018년, 국민의당의 분열로 생긴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중 민주당 계열인 민주평화당은 초록색을 골랐고, 후신인 민생당까지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현재는 더불어민주당의 색깔인 파란색과 민생당이 사용 중인 초록색, 두 색깔이 쓰이고 있다. 다만 민생당이 원외정당이 됨에 따라 원내 민주당계 정당의 색깔은 더불어민주당의 파란색만 남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더불어민주당에서 시조격으로 여기는 1955년 민주당은 짙은 남색을 당색으로 사용하였다.
2.2. 정당 기호[편집]
국회 원내 의석수 순으로 선거 정당기호 순서를 정한 공직선거법이 제정된 이후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민주당계 정당이 전국 단위 공직선거에서 받은 기호는 2번 또는 3번이었다. 민주당계 정당이 배출한 3명의 대통령 중에 두 대통령(김대중, 노무현)이 기호 2번으로 당선된 바 있다. 이 때문에 더불어민주당이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탁현민의 연출하에 김대중의 번호, 노무현의 번호라는 유세 CF를 제작하기도 했다. 기호 1번은 보수정당들이 주로 받았는데 이는 1997년까지 당시 여당이었던 보수정당이 자연스럽게 다수당이 될 수 있도록 만들었던[12] 선거법의 영향이 크다. 제13대 대통령 선거와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평화민주당이 기호 3번을 받았고 이후 민주당,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은 1991년부터 2002년까지 열린 모든 전국 단위 선거 때 기호 2번을 달았다.
그러다 2004년 이후 민주당계 정당 역사상 처음으로 기호 1번을 받게 되는데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원내 1당이 되면서 기호 1번을 받았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기호 1번을 받은 후 모든 선거에서 모조리 참패하는 흑역사를 만들었고(...) 이 당의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과 통합민주당도 제17대 대통령 선거와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유산인 기호 1번을 받아 선거에 임했지만 역대급 참패를 당하고 1번 자리를 다시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에 넘겨주고 만다. 이후 시행된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제18대 대통령 선거,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민주통합당, 새정치민주연합이 기호 2번을 달고 선거에 임했다.
그러나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원내 1당 자리를 탈환하면서 기호 1번을 달 수 있는 권한이 다시 민주당계 정당으로 돌아왔고 제19대 대통령 선거,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 더불어민주당이 기호 1번을 배정받았다. 민주당보다 의석수가 적은 민생당은 기호 3번을 받았다. 그리고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절반을 가뿐히 뛰어넘는 압승을 거두면서 2024년 4월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치러지는 모든 선거에서[13] 더불어민주당이 기호 1번을 달 수 있게 됐다.
3. 보수정당과의 연관성[편집]
민주당계 정당의 이념은 보수 정당만큼이나 애매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 다만 언론에선 보수 정당이 보수 우파를 자처하기에 그에 반대되는 민주당계 정당을 좌파, 진보 진영으로 뭉뚱그려 말하는 경향이 있다. 굳이 정체성을 따지자면 민주당계란 이름에서 보이듯 민주화를 이끌던 계열의 정권 정도가 정체성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 한민당 시절엔 도리어 강경 보수 계열로 평가 받기도 했으나, 이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거치며 반정부, 민주화 투쟁을 벌이면서 민주/중도적인 방향으로 이동하였다.[14] 그리고 1987년 민주화가 이뤄진 이후에는 YS를 필두로 하는 통일민주당 계열은 3당 합당으로 지금의 보수정당의 뿌리가 되었고[15] , 남은 민주화 세력은 DJ를 필두로 평화민주당, 민주당, 새정치국민회의를 거치며 각계의 재야 인사와 개혁적 인사들이 다수 합류하였다. 그런데 사실 김영삼은 대통령 당선 뒤에도 딱히 노선은 반공 보수에서 변하지 않았다. 문민정부 시기에 터졌던 연세대 사태를 겪은 김영삼은 연세대 사태 당시 암살 위기에 몰려서 그런지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지정하는 등 아예 씨를 말리러 다녔다. 이로 인해 좀 더 진보적인 색채를 띠게 되어 오늘날에는 다양한 스탠스가 뒤섞인 세력 정도로 평가되고 있다.[16]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이후로는 친노계가 진보적 인사들을 대거 영입하면서 진보적 색채가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17] 문재인 대통령 또한 당 대표 시절에 재야 인물들을 대거 영입함에 따라서 당은 진보적인 인물부터 당 내의 중도보수 인사들까지 아우르게 되었다. 현재도 이재명 대표의 더불어민주당이 이러한 기조를 계승하고 있다.
사실 대중적인 표현과 달리 학술적으로 표현할 때나 스스로 칭할 때나 '진보'나 '좌파'라는 지칭은 거의 나오지 않고 "민주개혁" 또는 "중도개혁"이라는 표현이 주로 쓰인다. 참고로 참여정부의 주축이었던 열린우리당 당시 내세운 이념 역시 사회자유주의였다. 반면 같은 시기의 새천년민주당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이었다. 보통 참여정부 시기의 민주당계 정당의 이념을 다룰 때는 주의해야 할 점이 당원 각각의 정치적 스펙트럼이 넓은 편이었기에 당의 노선을 분명하게 가르기 어렵다는 점이다. 현재까지도 그런 기조를 유지하기에 민주당 계열은 온건 보수와 온건 진보 세력이 각각 계파를 이뤄 한솥밥을 먹는 구도라 해석할 수 있다.[18] 일례로, 박근혜 정부 당시의 민주당 계열도 참여정부 때와 유사하게 당시 민주당계의 양대 축인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각각 온건 진보와 온건 보수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본다.[19] 현재 민주당계의 주류정당인 더불어민주당만 봐도 19대 대선을 거치며 더 당 내부의 스펙트럼이 다양해졌지만 당의 주축은 이전의 민주당계 정당보다 더 진보화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좌파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덜해지며 정치지형 자체가 변한 것도 이유이다.
4. 역대 민주당계 정당 목록[편집]
4.1. 8.15 광복 이후 ~ 제2공화국[편집]
4.1.1. 한국민주당[편집]
- 1945년 9월 16일 ~ 1949년 2월 10일 (민주국민당으로 흡수)
한민당은 초기에는 이승만의 정읍 발언 및 단독정부 수립 구상에 동의하는 등 친이승만 성향을 띠고 있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반민특위 좌초에 앞장서는 등 이승만 정부의 연립여당 격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한민당이 체제를 의원 내각제로 바꾸고 김성수를 국무총리에 앉히려 했던 반면 이승만은 대통령제를 강하게 주장하면서 둘의 관계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이후 내각 구성 과정에서 한민당은 내각의 절반을 한민당 인물로 채워 줄 것을 요구했지만, 이승만은 이를 씹고 좌익 성향의 조봉암을 임명하면서까지 한민당을 노골적으로 홀대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승만은 한민당의 기반이던 친일 지주세력을 찍어누르기 위해 농지개혁법 카드를 꺼내들며 한민당과 이승만 대통령의 사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다.
4.1.2. 대한국민당[편집]
- 1948년 11월 13일 ~ 1949년 2월 (민주당으로 흡수)
4.1.3. 민주국민당[편집]
- 1949년 2월 10일 ~ 1955년 9월 18일 (민주당으로 흡수)
4.1.4. 민주당(1955년)[편집]
- 1955년 9월 18일 ~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으로 강제해산)
하지만 정작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극심한 내부 계파 갈등에 시달리며 국정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민주당에는 구파와 신파라는 두 계파가 있었는데 구파는 한민당-민국당 시절부터 쭉 당에 있었던 인사들이고 신파는 흥사단계, 자유당 탈당파 등 민주당 창당 때 새로 들어온 인사들이다. 2공 당시 장면 국무총리는 신파, 윤보선 대통령은 구파 소속이었는데 내각제 특성상 실권이 총리에게 있으므로 장면은 내각을 전부 신파 일색으로 구성해 버렸고, 그러자 윤보선은 장면 내각의 행보에 지속적으로 태클을 걸며 상징적 국가원수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았다. 즉 한민당 시절부터 그렇게 내각제를 부르짖었으면서 내각제를 제대로 실천하지도 못한 셈. 이러한 계파 갈등에 따른 정치 혼란은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으며 또한 2공이 무능해서 박정희가 갈아엎었다는 식으로 정당성도 제공해 줬다.
4.1.5. 신민당(1960년)[편집]
- 1960년 12월 14일 ~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으로 강제해산)
4.2. 5.16 군사정변 이후 ~ 제4공화국[편집]
4.2.1. 민정당[편집]
- 1963년 5월 14일 ~ 1965년 5월 3일 (민중당으로 흡수)
4.2.2. 민주당(1963년)[편집]
- 1963년 7월 18일 ~ 1965년 5월 3일 (민중당으로 흡수)
4.2.3. 자유민주당[편집]
- 1963년 9월 3일 ~ 1964년 11월 26일 (민정당으로 흡수)
4.2.4. 민중당[편집]
- 1965년 6월 14일 ~ 1967년 2월 7일 (신민당으로 흡수)
4.2.5. 신민당(1967년)[편집]
- 1967년 2월 7일 ~ 1980년 10월 27일 (5.17 내란으로 강제해산)
이후 김대중의 예언, 그리고 앞으로는 표달라 하지 않겠다던 박정희의 말대로 정부는 10월 유신을 선포했고, 신민당은 제1야당으로서 유신독재에 맞서 다양한 방식의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다. 이때부터 신민당을 비롯한 민주당계 정당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부정적 평가가 희석되고 민주화 투사 정당이라는 이미지가 자리잡게 된 것이기 때문에 혹자는 구 민주당보다 신민당을 민주당계 정당의 뿌리로 쳐주기도 한다. 이후 장기화된 유신 체제에 대한 국민적 불만과 피로가 누적되며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이 민주공화당의 정당 득표율을 앞서는 이변을 연출했고, 그해 10.26 사건으로 유신 정권은 종말을 맞이한다. 박정희 사후 신민당과 민주공화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민주헌법 개헌안에 합의했지만 신군부가 5.17 내란으로 정권을 잡으며 민주화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한편 40대 기수론을 타고 정치권 전면으로 급부상했던 양김 중 김대중은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해외 망명 투쟁을 벌이던 중 박정희 정권에게 납치/감금당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반면 국내 투쟁을 진행했던 김영삼은 총재로 선출되어 당을 이끌었으나, 당내 권력다툼에서 밀리고 있던 정적 이철승이 차지철을 비롯한 독재정권의 비호를 받고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을 일으키며 반강제로 이철승에게 당권을 넘기게 된다. 하지만 김영삼은 1979년 전당대회에서 강경 노선을 앞세우며 다시 이철승을 꺾고 기어코 총재직을 탈환했다. 박정희 정부는 YH 사건 탄압,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등을 통해 김영삼을 어떻게든 정치권에서 제거하려 했지만 분노한 국민들이 부마민주항쟁을 일으켰다. 이 당시 남긴 희대의 명언이 바로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4.3. 제5공화국 ~ 1995년[편집]
4.3.1. 민주한국당[편집]
- 1981년 1월 1일 ~ 1988년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전원 낙선으로 자동해산)
4.3.2. 신한민주당[편집]
- 1985년 1월 18일 ~ 1988년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전원 낙선으로 자동해산)
4.3.3. 통일민주당[편집]
통일민주당은 신한민주당 이민우 총재가 발표한 이민우 구상에 반발한 김영삼계와 김대중계가 신민당을 탈당하여 창당한 정당이다. 민주당은 6.10 민주 항쟁을 주도했고 마침내 노태우가 6.29 선언을 발표하며 직선제 민주화를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나란히 출마를 선언한 YS와 DJ가 끝내 단일화에 실패하자 DJ가 동교동계를 이끌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하며 민주당에는 YS의 상도동계만이 남게 되었다. 민주당은 단일화 무산의 대가로 대선에서 패한 데 이어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평민당에 밀려 제2야당으로 전락하면서 위기에 처했으며, YS의 차기 대권주자 행보에도 급제동이 걸렸다. 이때 똑같이 난관에 봉착했던 노태우 대통령이 3당 합당을 제안하며 접근했고, 김영삼이 수락하며 통일민주당은 여당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합당해 민주자유당이 되어 보수정당의 계보로 편입된다.
4.3.4. 평화민주당[편집]
- 1987년 11월 12일 ~ 1991년 4월 9일 (신민주연합당으로 당명 변경)
4.3.5. 민주당(1990년)[편집]
- 1990년 6월 15일 ~ 1991년 9월 16일 (민주당으로 흡수)
4.3.6. 신민주연합당[편집]
- 1991년 4월 9일 ~ 1991년 9월 16일 (민주당으로 흡수)
4.3.7. 민주당(1991년)[편집]
- 1991년 9월 16일 ~ 1995년 12월 21일 (통합민주당으로 흡수)
4.4. 1995년 ~ 2007년[편집]
4.4.1. 새정치국민회의[편집]
- 1995년 9월 5일 ~ 2000년 1월 20일 (새천년민주당으로 당명 변경)
국민회의는 대선을 전후하여 통합민주당 탈당파와 이인제의 국민신당, 그리고 재야/노동운동가 출신 인사들을 대거 영입하며 몸집을 불렸고, 그 결과 민주당계 정당의 대통합이 이뤄지게 되었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국민회의는 DJP 연합으로 연립여당이 된 자민련과의 전국적인 후보 단일화를 통해 광역단체장 16석 중 10석(국민회의 6석+자민련 4석)을 석권하는 등 대승을 거둔다. 여기에 한나라당 출신 의원들을 영입하며 여소야대를 여대야소로 뒤집는 데 성공했다.
4.4.2. 통합민주당(1995년)[편집]
- 1995년 12월 21일 ~ 1996년 6월 13일 (민주당으로 당명 변경)
4.4.3. 민주당(1996년)[편집]
- 1996년 6월 13일 ~ 1997년 11월 21일 (한나라당으로 흡수)
4.4.4. 새천년민주당[편집]
- 2000년 1월 20일 ~ 2005년 5월 6일 (민주당으로 당명 변경)
한편 2002 월드컵 열풍으로 정몽준이 대선 후보로 급부상했고, 급기야 당내 비노 세력은 후보 단일화 협의회(후단협)를 결성해 노무현 흔들기 및 정몽준으로의 후보 교체를 시도한다. 하지만 단일화 경선 끝에 노무현이 승리하며 그대로 출마하게 되었고, 본선에서 한나라당 이회창을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참여정부 출범 직후에는 민주당 당내 갈등이 잦아드는 듯 했으나 당 쇄신 관련 논쟁과 대북송금 특검 논란으로 인해 동교동계와 친노의 사이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친노가 열린우리당으로 탈당하며 민주당계 정당은 다시 쪼개지고 말았다. 이후 민주당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를 적극 주도했으나 탄핵이 기각되며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정면으로 역풍을 맞고 9석짜리 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민주당은 DJ라면 자신들을 지지해주리라 믿었으나 탄핵에 크게 실망한 DJ는 오히려 열린우리당을 공개 지지하며 확인사살을 시켜주었다.
4.4.5. 열린우리당[편집]
- 2003년 11월 11일 ~ 2007년 8월 20일 (대통합민주신당으로 흡수)
4.4.6. 민주당(2005년)[편집]
- 2005년 5월 6일 ~ 2007년 6월 27일 (중도통합민주당으로 흡수)
4.4.7. 중도개혁통합신당[편집]
- 2007년 5월 7일 ~ 2007년 6월 27일 (중도통합민주당으로 흡수)
4.4.8. 중도통합민주당[편집]
- 2007년 6월 27일 ~ 2007년 8월 13일 (민주당으로 당명 변경)
4.4.9. 민주당(2007년)[편집]
- 2007년 8월 13일 ~ 2008년 2월 17일 (통합민주당으로 흡수)
4.4.10. 대통합민주신당[편집]
- 2007년 8월 5일 ~ 2008년 2월 17일 (통합민주당으로 흡수)
4.5. 2008년 ~ 2017년[편집]
4.5.1. 통합민주당(2008년)[편집]
- 2008년 2월 17일 ~ 2008년 7월 6일 (민주당으로 당명 변경)
4.5.2. 민주당(2008년)[편집]
- 2008년 7월 6일 ~ 2011년 12월 23일 (민주통합당으로 흡수)
4.5.3. 민주통합당[편집]
- 2011년 12월 16일 ~ 2013년 5월 4일 (민주당으로 당명 변경)
총선 이후에도 계파 다툼이 이어졌지만 당대표에 출마한 친노의 이해찬과 원내대표에 출마한 비노(호남계)의 박지원이 서로를 당내 경선에서 지원해 주기로 합의했고 둘 모두 당선되면서 갈등은 봉합되었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경선에서는 참여정부 민정수석 및 비서실장을 지낸 문재인이 압승하며 후보로 선출되었다. 초반에는 "안철수 신드롬"을 일으키며 제3후보로 떠오른 안철수와의 단일화 합의가 좀처럼 이루어지지 못하며 1987년의 재림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지만 안 후보가 사퇴하며 단일화가 극적으로 성사되었다. 그러나 단일화에도 불구하고 문재인이 본선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패하며 민주통합당은 다시 비대위 체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뜬금없이 국민감정과 동떨어진 안철수 책임론을 제기하며 아직 쇄신이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결국 2013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도 패하고 말았다.
4.5.4. 민주당(2013년)[편집]
- 2013년 5월 4일 ~ 2014년 3월 26일 (새정치민주연합으로 흡수)
4.5.5. 새정치민주연합[편집]
- 2014년 3월 26일 ~ 2015년 12월 28일 (더불어민주당으로 당명 변경)
재보선 패배 후 비주류는 문재인 책임론을 제기하며 문 대표의 퇴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또한 비노 주승용 최고위원이 친노 정청래 최고위원과의 말다툼 끝에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고, 문 대표의 최재성 당 사무총장 내정을 두고 이종걸 원내대표 등이 당무 거부에 나서는 등 당내 분위기도 점점 험악해졌다. 새민련 지도부는 당내 통합 및 쇄신을 위해 혁신위원회를 설치하고 혁신안을 발표했지만, 이번에는 안철수 전 대표가 민주당의 혁신은 부족하고 실패했다며 정풍 운동을 주장하고 나섰다. 문 대표와 안 의원은 혁신안 및 당대표 재신임 관련 문제에 대해 회동을 나눴지만 결국 의견차를 좁히지 못했다. 그 사이 9월에는 박주선 의원과 박준영 전 전남지사가 탈당해 신당 창당을 추진했으며, 12월에는 문재인 대표 사퇴를 요구하던 안철수 전 대표 역시 탈당했다. 이후에도 비노, 비주류 의원들의 탈당 행렬이 이어졌다.
4.5.6. 민주당(2014년)[편집]
- 2014년 9월 25일 ~ 2016년 10월 31일 (더불어민주당으로 흡수)
20대 총선을 앞둔 2016년 1월 박준영 전 전남지사가 주도하던 신민당 창준위와 통합하였으나 두 달만에 국민의당으로 이탈하였다. 이후 더불어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한 신기남 의원이 입당하면서 원내정당이 되었으나 총선에서 모든 후보자가 낙선하면서 다시 원외정당이 되었다. 그 후 동년 9월 18일 더불어민주당과의 통합을 의결하였다.
4.5.7. 국민의당[편집]
- 2016년 2월 2일 ~ 2018년 2월 13일 (바른미래당으로 흡수)
탄핵 이후 치러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는 예상대로 안철수가 출마했고, 한때 민주당 문재인과의 양강 구도를 형성하며 문재인의 지지율을 턱밑까지 추격하기도 했지만 안철수 본인의 환장할(...) 토론 실력과 과도한 네거티브 전략으로 인해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에게도 밀린 3위를 기록하고 말았다. 이후 국민의당 제보 조작 사건이 터지며 정당 지지율이 5% 밑으로 추락했고, 지지 기반이었던 호남에서도 3~4%를 기록하며 민주당에 큰 격차로 밀리게 되었다. 이렇듯 당이 위기에 놓이자 안철수는 소속 의원들의 탈당 러시로 인해 비슷한 상황에 처한 바른정당과의 통합을 주장했지만, 동교동계와 호남 의원들은 보수정당과 함께할 수 없다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결국 안철수가 전당원 투표를 통해 합당을 밀어붙이면서 어떻게든 저지하려다 실패한 호남계는 탈당했고, 남은 친안계는 바른정당과 합당하여 바른미래당이 되었다.
4.6. 2018년 ~ 2021년[편집]
4.6.1. 민주평화당[편집]
- 2018년 2월 6일 ~ 2020년 2월 24일 (민생당으로 흡수)
4.6.2. 대안신당[편집]
- 2020년 1월 12일 ~ 2020년 2월 24일 (민생당으로 흡수)
4.6.3. 더불어시민당[편집]
- 2020년 3월 8일 ~ 2020년 5월 18일 (더불어민주당으로 흡수)
4.6.4. 열린민주당[편집]
- 2020년 3월 8일 ~ 2022년 1월 18일 (더불어민주당에 흡수)
4.6.5. 새로운물결[편집]
- 2021년 12월 19일 ~ 2022년 4월 15일 (더불어민주당에 흡수)
4.7. 현재[편집]
4.7.1. 원내[편집]
4.7.1.1. 더불어민주당[편집]
새정치민주연합이 2015년 12월 28일 당명을 변경한 뒤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정당이다. 약칭은 처음에는 더민주로 하다가, 2016년 9월 원외 민주당을 흡수한 뒤로는 주로 민주당을 쓰고 있다.[20][21][22]
새정치민주연합 비주류들이 떠난 뒤에 당명을 개정했기 때문에 새정치민주연합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초기에는 여당인 새누리당의 강세와 비주류등의 탈당으로 흉흉한 당 내외적인 상황으로 인해 당에 위기감이 조성되었다. 그리하여 당에서는 인재 영입 등 나름대로 쇄신작업을 진행하였지만, 야권의 분열, 전통적인 텃밭 호남권에서의 당 지지율 저조, 당시 대통령의 지지강세로 인해 20대 총선에서 패배가 예상됐었다.
그러나 대반전을 이뤄내며 전국 정당으로 도약하게 된다. 수도권 압승과 영남권 약진이 선거 승리에 주효했다. 총 123석을 확보하여 제20대 국회 원내 제1당으로 등극[23] 하여 정세균을 국회의장으로 선출시키기도 했다. 다만, 국민의당에게 민주당계의 텃밭이라고 불리는 호남권 대부분의 의석을 내줘야 했다. 비록 전통적인 텃밭을 빼앗기기는 했지만, 이것이 되려 호남 지역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하는 데에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호남 의석 대부분을 다른 당에 내주고도 수도권에서의 압승과 영남권에서의 약진 등으로 원내 제1당으로 등극했기에 더 이상 호남에 연연하지 않아도 충분히 당이 건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라는 과정을 겪으면서 범진보 지지층에서의 주류 정당화에 성공했고, 탄핵중도층과 중도 보수층 일부도 지지층으로 끌어오는데에 성공하였다. 그 덕분에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가 압승하면서 9년만에 다시 집권 여당의 자리를 되찾고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 선거 기간 정당 지지율이 고공 행진을 했고, 탄핵을 기회로 전국에서의 지지 기반 구축에 힘쓰면서, 정권 교체 이후에도 민주당계 역사상 가장 높은 지지율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었다.
정권 중후반기에 치러지는 2020년 21대 총선은 정권의 중간평가 성격이 있는 선거이기에 특유의 정권심판론 발동으로 더불어민주당이 쉽지 않을거란 예측이 있었으나, 이 예측을 깨고 헌정 사상 초유의 '단독 180석'이란 압도적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로써 더불어민주당은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등 전국단위 선거 4연승이라는 헌정사상 최초의 기록을 세우게 됐다. 이에 내부적으로는 더불어민주당이 수권 정당화 및 전국 정당화에 성공했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하지만,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 서울, 부산에서의 대참패를 겪으며 위기를 맞았고 1년 뒤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패배하면서 정권을 국민의힘에게 넘겨주었다. 다만 원내 과반 의석을 차지한 제1당의 지위는 유지하기에, 입법부에 한해서는 여전히 정국을 주도할 동력을 유지하고 있다.
- 대표:
- 문재인 (대표, 2015년 12월 28일 ~ 2016년 1월 27일)
-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2016년 1월 27일 ~ 2016년 8월 27일)
- 추미애 (대표, 2016년 8월 27일 ~ 2018년 8월 25일)
- 이해찬 (대표, 2018년 8월 25일 ~ 2020년 8월 29일)
- 이낙연 (대표, 2020년 8월 29일 ~ 2021년 3월 9일)
- 김태년 (대표 직무대행, 2021년 3월 10일 ~ 2021년 4월 8일)
- 도종환 (비상대책위원장, 2021년 4월 8일 ~ 2021년 4월 16일)
- 윤호중 (비상대책위원장, 2021년 4월 16일 ~ 2021년 5월 2일)
- 송영길 (대표, 2021년 5월 2일 ~ 2022년 3월 10일)
- 박지현, 윤호중 (비상대책위원장, 2022년 3월 13일 ~ 2022년 6월 2일)
- 박홍근 (비상대책위원장, 2022년 6월 2일 ~ 2022년 6월 7일)
- 우상호 (비상대책위원장, 2022년 6월 7일 ~ 2022년 8월 28일)
- 이재명 (대표, 2022년 8월 28일 ~ 현재)
4.7.2. 원외[편집]
4.7.2.1. 민생당[편집]
바른미래당과 대안신당, 민주평화당이 2020년 2월 24일 창당한 신당이다. 제3지대 정당을 표방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민주당 계열의 주로 호남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구 정치인들이 중진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주요 정치인들은 모두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 등으로 떠나고 지난 총선에서 비례대표 득표율 2.71%를 획득한 것을 바탕으로 받는 선거보조금에 의존하여 간신히 연명하고 있다. 사실상 남은 정치인들은 없다시피 하고 선거보조금을 나눠먹는 사람들만 남아있으며, 내부 권력 다툼도 심하여 사실상 기능이 마비된 정당이다.
- 대표:
4.7.2.2. 더밝은미래당[편집]
더불어민주당 더밝은미래위원회와 새로운물결 출신 인물들, 일부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모여서 창당되었다. 녹색자유주의, 참여민주주의, 세계주의 등 기존 민주당계 정당과 다소 다른 노선을 주장하고 있으며 창당준비위원회 단계에서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김동연 경기도지사 후보, 김영록 전남도지사 후보 등을 지지하며 선거를 돕는 등 더불어민주당과 친화적인 활동을 이었다.
- 대표:
- 서정미 (대표, 2022년 9월 30일 ~ )
4.7.2.3. 열린민주당(2022년)[편집]
구 열린민주당과 더불어민주당과의 합병 논의 당시, 합당에 반대하던 당원들이 열린민주당을 재창당한다며 만든 정당.
- 당 대표
- 김상균 (2022~현재)
4.7.2.4. 깨어있는시민연대당[편집]
- 2020년 3월 24일 ~
민주당에서 탈당한 유재호 성남시의원과 SNS 중심으로 활동하는 문꿀오소리들이 창당한 정당. 제도권 정치인은 유재호 한 명만 있다. 이들은 문파를 자칭하며 이재명 경기지사는 물론 이해찬 전 대표까지 비방한 바 있다.[27] 문재인 지지자 중에서도 아주 극소수만 지지할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도 제21대 총선에서 아주 낮은 득표율인 0.05%, 14,242표를 득표했다. 당명 부터 친노, 친문임을 주장하는 정당이었으나 이후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석열을 지지해 주류 민주당계 정당과 약간은 다른 노선을 걷는 중이다. 정확히는 친노, 친문이면서도 반이재명이라는 이유만으로 친윤인 상태다.
5. 소속 정치인[편집]
5.1. 대통령[편집]
5.2. 부통령[편집]
5.3. 내각제 총리[편집]
5.4. 국회의원[편집]
5.4.1. 13대 국회[편집]
5.4.2. 14대 국회[편집]
5.4.3. 15대 국회[편집]
5.4.4. 16대 국회[편집]
5.4.5. 17대 국회[편집]
5.4.6. 18대 국회[편집]
5.4.7. 19대 국회[편집]
5.4.8. 20대 국회[편집]
5.4.9. 21대 국회[편집]
5.5. 광역자치단체장[편집]
5.5.1. 서울특별시장[편집]
5.5.2. 부산광역시장[편집]
5.5.3. 인천광역시장[편집]
5.5.4. 광주광역시장[편집]
5.5.5. 대전광역시장[편집]
5.5.6. 울산광역시장[편집]
5.5.7. 세종특별자치시장[편집]
5.5.8. 경기도지사[편집]
5.5.9. 강원도지사[편집]
5.5.10. 충청북도지사[편집]
5.5.11. 충청남도지사[편집]
5.5.12. 전라북도지사[편집]
5.5.13. 전라남도지사[편집]
5.5.14. 경상북도지사[편집]
5.5.15. 경상남도지사[편집]
5.5.16. 제주특별자치도지사[편집]
5.6. 기초자치단체장[편집]
5.7. 당대표[편집]
6. 역대 선거결과[편집]
6.1. 대통령 선거[편집]
6.2. 부통령 선거[편집]
6.3. 국회의원 선거[편집]
6.4. 지방선거[편집]
7. 전당대회[편집]
8. 진보정당과의 관계[편집]
"진보적 방향으로 선회하는 경향을 보여온 민주당계 정당을 진보정당의 일부로 봐야 하는가?"의 문제는 "대한민국의 정당을 정치적 지형을 기준으로 구분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계파를 기준으로 분류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그 궤가 같다.
정치적 지형을 기준으로 볼 경우, 사실상의 양당제 구도로 정치지형이 형성된 한국 특성상 민주당계 정당을 진보정당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당의 분류를 단순히 진보-보수의 성향만으로 구분하는 것은 대한민국 정당의 계보를 극단적으로 단순히 해야만 가능하다. 민주당계 정당은 창당 이래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이념 변화와 분당 등의 사건을 겪었고, 이 과정에서 일부 민주당계 정당은 진보가 아닌 중도나 보수의 색채를 가진 적도 많이 있었다. 게다가 '민주당계 정당'이라는 용어는 각 메이저 언론사[65] 나 논문, 학술 목적의 연구에서도 사용될 만큼[66] '민주당계 정당'이라는 계파는 진보정당과는 별도의 계파로 공인되어 있다. 게다가 민주당계 정당 본인들 역시 '진보정당'이나 '보수정당'이 아닌, '민주당계 정당' 그 자체를 자신들의 이념 정체성으로 삼고 있다. 게다가 민주당계 정당의 경우, 자신들의 현 입장이나 정치적 사건 등으로 인해 중도보수 쪽으로 기울어진 사례가 여러 차례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통합진보당 해산 당시 민주당 및 새정치민주연합은 통합진보당이 해산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던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수사 사건의 엄정 수사를 촉구하는 등 민심이 바닥으로 떨어졌던 진보정당과 거리를 두기 위해 우클릭을 하기도 했다.[67][68]
다만, 21세기 들어 대체적으로는 민주당계 정당도 진보적인 성향으로 선회하고 있으며[69] ,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기존의 민주당계 정부에 비해 확실히 좌경화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정치 구도상 같은 범진보 계열로 분류되긴 하나 민주당계 정당과 진보정당은 입장 차이가 상당히 크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현존하는 진보정당들은 기존의 보수정당-민주당계 정당의 양강 구도를 깨려는 의지가 강하다. 그래서 민주당계 정당에서는 선거 때마다 진보정당과의 후보 단일화 문제를 두고 '진보 성향의 표를 모으느냐 아니면 진보 성향의 표를 포기하고 중도보수 외연을 넓히느냐'라는 이슈 때문에 당 내부에서도 늘 시끄러웠다. 그래서 민주당계 정당 일부에서는 '진보정당과 연정을 하느니 차라리 보수정당과 연정하는 것이 속 편하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진보정당의 시각에서 봐도 민주당계 정당이 추구하는 정책의 지향성이나 선거에서의 진보정당에의 단일화 요구 등이 자신들의 마음에 들 리가 없다. 더욱이 진보정당의 정책적 방향에서 결코 충분하다고 보기 어려운 민주당계 정당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같은 범진보로 분류된다는 이유만으로 민주당계 정당에 끌려다니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민주당계 정당이 점차 진보적으로 되더라도, 매일경제신문 정치부, MBN 정치부 기자 20명이 기사를 작성하는 레이더P의 조사에 따르면(법안 표결로 본 국회의원 300명의 이념성향), 정의당이 진보 쪽으로 -0.83만큼 치우쳐 있을 때(-1~1범위 내에서) 더불어민주당은 -0.13만큼만 진보 쪽으로 가 있는 등, 같은 진보적 노선이라 하더라도 민주당계 정당은 다른 진보정당들만큼 강경하게 좌파 쪽으로 이행하고 있지는 않다. 국민의당은 오히려 보수 쪽으로 0.15만큼 가 있다. 민주당계 정당은 이종찬, 이인제, 손학규, 오유방, 김종인, 진영 같이 보수정당 출신의 인물이 넘어오기도 하고[70] 민주당계 자생적인 인물들 중에서도 박영선 같은 보수적 인사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제19대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중도~중도보수 쪽으로 외연을 확장하기도 하였다.
다만, 민주당계와 진보계 정당이라는 두 당사자가 이러한 입장 차이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 바깥에 있는 강경 보수 세력들은 두 계열의 정당들을 싸잡아 좌파라고 하거나 빨갱이, 종북주의자로 매도하기도 한다. 이러한 인식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19대 대선에서 홍준표 당시 자유한국당 후보의 발언이다.(한국일보의 보도, SBS의 보도).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출범 이후 약 10년 동안의 보수정권 시대가 개막하고 한나라당 - 새누리당 정권 동안 보수적인 정책이 이어지면서, 이에 반대하는 야당이었던 민주당계 정당과, 진보정당들은 공동의 적에 맞서서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18대 대선에서 이정희 당시 통합진보당 후보가 대선 후보 토론회에 나와 "자신은 대통령이 되러 나온 것이 아니라 단지 박근혜를 떨어트리기 위해 나왔을 뿐이다"라는 식으로 당시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사이에 사실상의 '반 박근혜' 공동전선이 형성된 적도 있고,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당시에는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이 총력전 태세로 필리버스터에 참여하기도 했다.[71] ,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는 정부의 인선 및 정책 등에 가장 협조적으로 나오는 야당이 정의당이기도 한 만큼[72] 현재는 민주당계 정당과 진보정당이 상당히 친밀해진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최근 10차 개헌을 가지고 진보정당이 보수정당들과 같이 국회 중심의 개헌 스탠스를 취함에 따라 갈등이 생긴 상황.
더불어시민당 출범 당시, 민주당 측에서는 야권 단합을 명분으로 노동당, 녹색당, 미래당, 민중당 같은 진보정당들을 끌여들였으나, 기본소득당을 제외하면 합류 과정에서 잡음이 생겨 최종적으로 불참하였고, 특히 녹색당의 경우 더불어시민당 합류에 적극적이였으나, 성소수자 후보 공천 문제를 두고 민주당과 의견이 갈려 결국 최종적으로 불참하였다. 최근의 진보정당들이 탈민주, 독자노선을 걷고있기 때문에, 민주당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있는 상황, 특히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민주당과 정의당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2023년 기준으로 민주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있는 진보정당은 기본소득당과 진보당 정도인데, 기본소득당은 존재감이 크지 않고, 진보당의 경우는 NL계열에 대한 거부감 탓에, 무조건 우호적으로 보기보다는 오월동주하는 경향이 크다.
이렇듯 진보정당은 민주당계 정당과 협력과 결렬을 역사적으로 반복해온 사이다.
유권자의 입장에서는 개인의 사상이 진보정당을 지지하고 그들의 이념에 더욱 가깝더라도 진보정당 계열의 세력이 미약한 것을 감안하여 투표에서는 민주당계 정당에 표를 행사하는 전략적 투표를 보여주기도 한다. 지방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보정당이 전국 모든 지역구에 후보를 내지 못하는 만큼, 선거에서 진보정당 지지자들이 지역구에서는 민주당계 정당에서 출마한 후보에 투표하고, 비례대표 투표는 진보정당에 투표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반면에 진보정당이 아닌 민주당의 강성 지지자들 입장에서는 진보정당을 중도층들이 싫어하는 비현실적인 소리나 하는 바보들 취급하고 보수 정당을 막기 위해 단일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편이다.
정리하자면 신익희-조병옥-장면-윤보선-유진산-김영삼[73] -이기택-김대중-노무현-손학규-문재인-이재명 순으로 여러 대표와 대통령을 거치며 보수 성향에서 점점 진보 성향으로 변해가기는 했지만, 뿌리는 진보정당과 다르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9. 관련 문서[편집]
- 대한민국/정치
- 대한민국/정당
- 대한민국 보수정당
- 대한민국 진보정당
- 동교동계 / 상도동계[74]
- 친노 / 비노
- 참여계
- 친문 / 비문
- 친안희정
- 친이재명
- 손학규계
- 민평련
- 민주계
- 김성수
- 송진우
- 신익희
- 조병옥
- 윤보선
- 장면
- 유진오
- 김영삼
- 김대중
- 노무현
- 문재인
- 대한민국의 자유주의
10. 둘러보기[편집]
[1] 역사학적으로는 한국민주당과 그 후신인 민주국민당, 이후 호헌동지회를 통한 반이승만 세력의 빅텐트로 형성된 것으로 본다.[2] 보수정당인 국민의힘도 계보상 과거 민주당계 정당들과 이어져 있다. 실질적 뿌리는 1990년 3당합당으로 창당한 민주자유당으로 보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물론 더 정확히는 민주당계 정당이었던 통합민주당(1995년)이 신한국당과 합당해 1997년 보수 정당 한나라당이 되는 분기점이 있지만, 통합민주당의 규모가 1996년 15대 총선이 끝난 당시 이미 새정치국민회의에 밀려 당의 존속 자체가 위태했던 지경이었으므로 사실상 신한국당에 흡수된 셈이 되었다.[3] 사실 알고 보면 한국의 보수정당들도 민주라는 용어를 꽤 사용했다.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자유민주연합이 있다.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 등 독특한 이름들은 근래에 들어서 사용한 이름들이다.[4] 이 정당들은 보수정당들이다.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참고. 다만 민주자유당과 민주국민당의 경우 각각 민주당계 정당인 통일민주당과 통합민주당의 후신이기도 하므로 민주당계 정당과 완전히 관련없는 것은 아니다.[5] 참고로 민노당은 진보정당이다. 대한민국의 진보정당 문서 참고.[6] 사실 1997년부터 2001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민주당과 연립정권을 구성하면서 총리직과 상당수의 장관직을 배출했다. 하지만 사실 자민련은 군부 출신인 김종필 전 총리 계통으로 이념상 정통적 정치성향에서 민주당과 거리가 멀었고, 결국엔 갈라섰다.[7] 열린민주당, 미래한국당 등 누락되어있는 부분도 있으니 주의[8] 동교동계가 자주 사용하며, 호남을 중심으로 하는 당이 많았다.[9]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 친노에서 즐겨 사용한다. 과거에는 제13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김대중과 동교동계가 창당했던 평화민주당도 노란색을 썼다.[10] 과거 민주정의당을 시작으로 한나라당까지 보수정당이 오랫동안 상징색으로 사용하던 색깔이라 파격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변경하면서 미국 공화당처럼 상징색을 빨간색으로 바꾸었기에 파란색이 비어 있는 상황이었다.[11] 국민의당이 초록색을 선택했을 때, 호남을 타겟팅했다고 해석한 이들도 있었다. 왜냐면 새정치국민회의의 색깔인 초록색을 사용하여 김대중 정신과 호남정신을 당에 결부지으려는 의도로도 읽혔기 때문이다.[12] 제12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지역구 의석수 1위 정당이 전국구 의석의 절반 이상을 가져가는 희한한 규정이 있었다. 이 당시 정치 환경상 지역구 의석수 1위 정당은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과 민주자유당이었다.[13] 2021년 재보궐선거, 2022년 3월 제20대 대통령 선거, 2022년 6월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23년 재보궐선거 등[14] 다만 이승만과 박정희 시절에는 민주당 계열의 야당들도 반공을 띈 보수 성향이 강했다.[15] 실제로 현재 국민의힘의 계파 중에 가장 많은 원내의원을 보유한 계파인 친윤을 제외하고는, 친유의 수장 유승민, 친홍의 수장 홍준표는 동교동계 또는 상도동계가 절대 다수이다. 이준석도 사실 박근혜 키즈로 이미지가 박혀서 그렇지, 비박계에다 친유로 분류되고 있다.[16] 그러한 이유로 학계에서는 민주당계의 뿌리를 사실상 평화민주당으로 보기도 한다.[17] 물론 이 시절에도 진보 성향의 언론이나 지지자들에겐 '좌회전 깜빡이 넣고 우회전한다'고 욕 먹긴 했다.[18] 다만 빅 텐트 정당으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견해가 있다. 더 왼쪽에 자리 잡은 진보정당들이 미약하나마 제3세력으로 그동안 자리매김하고 있었기 때문. 다만 양당제로 알려진 미국도 제3세력은 있으며 미국 민주당과 유사한 정도의 빅 텐트 정당이라고 볼 여지는 있다.[19] 물론 사안에 따라 달랐다. 예를 들어, 박근혜 정부 후반에 추진했던 THAAD 배치는 초기엔 국민의당이 배치 반대를 당론으로 취한 반면, 오히려 더민주는 전략적 모호성이란 말로 중립적 태도를 보였었다.[20] 공식 당명을 2023년 5월 현재 7년 5개월 동안 유지함으로써 대한민국 제6공화국의 역대 민주당계 정당 가운데 가장 오래 유지하고 있다. 새천년민주당은 5년 4개월. 민주당계 정당 전체 역사를 봐도 역대 1위인 신민당의 13년 7개월에 이어 2위이다. 그 동안 2위를 유지하던 관제야당인 민주한국당이 7년 3개월 동안 당명을 유지했는데, 더불어민주당은 2023년 3월 28일 7년 3개월을 돌파함으로써 민주한국당을 뛰어넘어 민주당계 정당 역대 2위가 되었다. 그래도 한나라당의 14년 3개월, 민주노동당의 11년 10개월, 자유민주연합의 11년, 정의당의 9년 4개월에는 한참 못 미친다. 또다른 관제야당인 한국국민당도 7년 3개월이다. 한 정당이 공식명칭을 가장 오래 유지한 것은 민주공화당의 17년 8개월. [21] 신설/흡수 합당 없이 당명만 바꾼 걸 이어지는 역사로 계산하면 새정치민주연합 -> 더불어민주당의 역사는 2022년 5월 현재 9년 2개월로 신민당에 이어 민주당계 정당 역대 2위가 된다. 새천년민주당은 민주당으로 개명한 뒤의 역사까지 포함해서 7년 5개월로 민주한국당의 7년 3개월을 앞지른다.이 역사를 끊어낸 정당분쇄기 김한길. 모든 정당을 통틀어서 계산하면 더불어민주당의 9년 2개월은 한나라당 ->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의 22년 3개월, 민주공화당의 17년 8개월, 신민당의 13년 7개월, 민주노동당의 11년 10개월, 진보정의당 ->정의당의 10년 7개월에 이어 역대 6위의 기록이 된다. 갈 길이 멀다.거기다가 정의당은 현재진행형이다. [22] 3당 합당이나 한나라당 창당과 같은 굵직한 합당 말고 군소정당을 흡수하기 위한 서류상 신설 합당을 한 정당의 이어지는 역사로 보면, 더불어민주당의 역사를 새정치국민회의까지 거슬러서 27년 8개월로 볼 수 있다. 이해하긴 어렵지만 역대 1위의 기록이다. 새천년민주당에서 열린우리당이 분당한 것이나, 김한길이 2007년에 정당분쇄 소동을 일으킨 것은 그 정당들이 돌고돌아 결국 하나로 합쳐졌으므로 억지로나마 하나의 역사로 칠 수 있다. 평화민주당 -> 신민주연합당+민주당 -> 민주당 -> 민주당의 역사는 이 정당이 신한국당과 합치며 한나라당을 만드는 바람에 민주당계 정당으로는 계승되지 않는다.그렇다고 보수정당으로 계승되는 것도 아니다. 한편, 이렇게 계산했을 때 국민의힘의 역사는 한나라당 창당 이래 25년 6개월이 된다. 보수정당의 경우에는 민주당계 정당과의 굵직한 합당 때문에 민주정의당의 9년,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의 7년 10개월을 한나라당과 구분되는 역사로 보아야 한다. [23] 이후 새누리당 탈당파들의 복당으로 2당이 되었다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보수 정당의 분당으로 다시 원내 1당이 됐다.[24] 3월 24일 사퇴[25] 4월 20일 사퇴[26] 법원 판결에 의한 직무 정지[27] 이들이 얼마나 이재명을 싫어하냐면 지난 7회 지선 당시 민주당 경기지사 후보가 이재명이라는 이유로 남경필을 지지했을 정도다.[28] 선거당시 당적[29] 당시 야권의 단일후보였다. 보궐선거 당시 나경원 후보를 꺾었고 시장 취임 후 민주통합당에 입당한다.[30] 선거당시 당적[31] 선거당시 당적[32] 선거당시 당적[33] 선거당시 당적[34] 선거당시 당적[35] 선거당시 당적[36] 선거당시 당적[37] 제20대 대통령 선거에 전념하기 위해 조기사퇴.[38] 선거당시 당적[39] 더불어민주당으로 당명 변경[40] 선거당시 당적[41] 더불어민주당으로 당명 변경[42] 선거당시 당적[43] 더불어민주당으로 당명 변경. 사퇴서 제출 시점에는 제명 절차 중이었다.[44] 선거당시 당적[45] 선거당시 당적[46] 선거당시 당적[47] 선거당시 당적[48] 야권 단일 후보로 무소속 당선 후 민주통합당 입당하였음[49] 선거당시 당적[50] 선거를 열흘 남기고 전주로 가기 위해 전라선 열차를 타던 중 호남선 구간인 함열역 부근에서 뇌일혈로 졸도했고 이리역에 급히 내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51] 전체 투표수의 20.5%인 1,856,818표의 무효표를 이승만을 반대하지만 조봉암을 지지하지 않는 민주당 지지층의 표라는 해석이 있다.[52] 3.15 부정선거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53] 후보등록을 하고 나서 위병이 심해져서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으로 가서 복부수술을 받았는데 수술후유증으로 인한 심장발병증으로 사망했다. 이쪽은 상태가 회복되다가 일어난 상태라 암살설이 퍼졌다.[54] 간선제로 실시되어 민·참의원 합동투표로 이뤄졌다.[55] 대통령 선거인단으로 뽑는 간선제였다.[56] 당시에는 국회에서 간선제로 실시했는데, 여기의 수치는 결선투표의 수치이다. 1, 2차 선거는 제2대 부통령 선거 참고바람.[57] 비례대표제 없음[58] 비례대표제 없음[59] 더불어시민당과 합산하여 180석[60] 더불어민주당의 연합정당[61] 광역자치단체장와 기초자치단체장은 그 당시 임명직이다.[62] 기초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63] 기초자치단체의회 없음[64] 보수정당으로도 분류[65] 조선일보, 연합뉴스, 한국일보, http://news.joins.com/article/21855416 등의 언론에서 '민주당계' 또는 '민주당계 정당'이라는 하나의 정당 분류나 계보를 사용하고 있다.[66] 한 사례로, 영남대학교 정치학과 김학노 교수가 21세기 대한민국의 통일 정책에 대해 분석한 논문(해당 논문, 링크 클릭 시 pdf 파일이 자동 다운로드되니 주의)에서는 대한민국의 양대 정치 세력을 '보수계 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으로 구분하기도 하였다.[67] 참고로 통합진보당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진보정당들은 통합진보당 해산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당시 통합진보당과 결렬한 입장이었던 정의당과 북한에 매우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던 노동당, 녹색당 모두 통합진보당 해산에 반대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민주당계 정당과 진보정당간의 입장 차이가 극명하게 갈린 사례.[68] 다만 이석기 체포에 관해서는 진보정당 사이에서도 입장이 갈렸는데, 정의당은 반대 입장에서 찬성 입장으로 선회하였고, 노동당은 끝까지 반대했다.[69] 박윤희 ( Yun-hee Park ) , 김민수 ( Min-su Kim ) , 박원호 ( Won-ho Park ) , 강신구 ( Shin-goo Kang ) , 구본상 ( Bon Sang Koo ), 한국의회발전연구회, <의정연구> 49권0호 (2016), pp.117-157[70] 다만 현재는 진영, 박재호, 김부겸, 이시종, 조정식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다 탈당한 상태. 심지어 이 경우도 대부분 열린우리당을 창당했을 때 보수정당과 성향이 맞지 않아 합류했던 인사들이다. 보수정당에 1~2년 이하로 잠깐 머문 경우도 있으나 이 경우는 보수정당계 인사라 보기 어렵다.[71] 당시 국민의당은 일부 의원들이 개별적으로 필리버스터에 참여하기만 하였다.[72] 오히려 국민의당이 정의당보다 여당(더불어민주당)의 정책에 관해 반대가 심했다. 애초에 새정치민주연합이 당내 갈등으로 분열했던 것을 보면 이러한 국민의당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국민의당이 분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반 여당(더불어민주당) 기조는 국민의당을 계승한 양당에게 이어지는 형태를 보였다.[73] 3당 합당 후 보수정당으로 갔지만 과거 민주당계 정당의 경선후보나 당대표를 하기도 했다.[74] 반독재 투쟁 당시 동교동계와 함께 민주당계 정당의 양대 산맥이었다. 김영삼 총재가 1990년 3당합당으로 인해 보수정당인 민주자유당으로 이동하면서 상도동계들은 보수 정당으로 합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