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여담

덤프버전 :

분류



1. 여담
1.1. 그의 인기
1.2. 한자 선호파
1.3. 인재 발굴
1.4. 각종 타이틀


1. 여담[편집]


  • 민주화운동가이다. 크게 보면 커리어를 보수정당→민주당계 정당→보수정당[1]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저 두 번의 진영 변경이 모두 당시 정치사의 중요한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는 게 포인트다.[2]

  • 정치 인생의 대부분을 박정희 - 전두환 등 군사 독재 정권과 맞서 싸우는 일에 써왔던 인물이라 그런지 육사군인들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것 같다. 대통령 퇴임 후 일본 언론[3] 등과의 인터뷰에서 "육사는 다른 공부는 안 하고 사람 죽이는 것만 배우지 않습니까?", "육사는 바보들의 모임"[4], "박정희는 총 맞아도 싼 인물"[5] 등 과격한 발언들을 아끼지 않았다. 후술되어있듯 "전두환은 대통령도 아니데이"라는 발언도 한 것 보면 군부 출신 대통령에 반감이 무척 많았던 대통령이었다.

  • 존경하는 인물로는 한국 사람 중에서는 성격이라든가 지도력이라든가 정치가로서 조병옥을 지목한 바 있고, 외국 사람으로서는 전직 미국 대통령인 존 F. 케네디를 지목한 바 있다. 특히 케네디는, 자신이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구태 정치인으로 찍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케네디 대통령이 군사정권의 행보에 태클을 걸면서 빨리 이들을 석방해야 된다는 성명을 발표, 실제 미국의 눈치를 봤는지 재판도 안끝났는데 도중에 석방된 일화를 거론하며 은연중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 민주화 운동의 일환으로 단식 투쟁하던 시기와 관련해 김영삼 보름달 사건이라는 유명한 도시전설이 전해진다. 그리고 보름달 사건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또다른 도시전설이 있었는데 바로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김영삼이 노태우의 집무실에 쳐들어가 막말을 퍼부었다는 루머가 있었다. 다만 훗날 노태우는 회고록을 통해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 파일:external/ppss.kr/%EA%B9%80%EC%98%81%EC%82%BC3.jpg
서법에 따르지 않고 독창적인 글씨체를 구사했다고 한다. ‘大道無門’(대도무문)은 그의 필체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붓만 왔다 갔다 한 듯 필획이 약하다는 평. 여백을 거의 두지 않고 굵은 체로 종이 전체를 메우고 있는 것에서 ‘통 큰’ 사람임을 드러낸다고 한다. 또한 글씨 속도가 매우 빠른 편이라 실제로도 일을 빠르게 결정하고 좌고우면하지 않았을 성격으로 보인다고 한다. 글씨의 기교가 거의 없고 정확한 정사각형 형태로 쓰고 있는 것은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고 올곧은 사람임을 드러낸다는 분석이다. 나름 마니아층이 있어서 그의 글씨는 한 점당 300~400만 원까지 꾸준히 경매에 낙찰된다고 한다. 최고 기록은 560만 원이었다.


  • 2022년, 민주화 이후 역대 대선후보 신뢰도 여론조사에서 보수정당 인물 중 1등을 차지했다.# 재미있는건 2050·중도·진보 지지층에선 1등을 한 반면, 60대 이상·보수 지지층에선 윤석열에 밀려 1등을 하지 못했다는건데, 이걸 보면 김영삼 대통령 호감층이 진영을 넘어 꽤나 넓게 분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퇴임 후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총 5번 대만을 찾았다. 대만을 방문하여 천수이볜 당시 총통과 면담하고 대학에서 강연을 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의 대만 방문은 단순한 외유일 뿐만 아니라 1992년 단교 이후 끊겼던 한국-대만 직항을 되살리고자 한 것이기도 했는데관련 기사 이는 2003년에 성사되었다. 또한 재임 중인 1993년 대만대표부를 개설했다. 중국은 김영삼의 대만 방문에 불편한 기색을 보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관련 기사

  • 다만 재임 중의 대중국 외교는 괜찮은 편이었고, 특히 취임 직후인 1993년 4월 중국 허난 성 안양시 화현의 시골 마을에 사는 소년[6] 저우샤오화(周少華)로부터 참외 씨앗 66개가[7] 동봉된 취임 축하 편지를 받은 뒤 1994년 3월 방중 때와 8월 청와대에서 만나는 등의 훈훈한 일화도 있었다. 방중 당시 한국 방문 당시. 여담으로 저우샤오화의 고향인 화현 마을은 중국 내에서도 매우 낙후된 시골 마을이었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보도되면서 한중 우호를 상징하는 곳으로 급부상하여 허난 성 정부가 학교를 아예 새로 지어주고 아스팔트 도로까지 대거 포장해주는가 하면 가정 형편이 어려운 저우샤오화의 집에 특별 식량 및 한국 방문시 입을 의류를 지원하기까지 했다고 한다.[8]

  • 일제강점기 말기 창씨개명한 일본식 이름은 '가네무라 코유(金村康右)'이다. 심지어 일본 언론과 인터뷰를 보면 알겠지만 일본어도 제법 한다. 하지만 오늘날 그의 일본식 이름을 아는 대중은 매우 드문 편인데, 이는 박정희, 김대중의 일본식 이름인 다카기 마사오, 도요타 다이쥬가 넷상에서 안티들의 공격 소재로 심심찮게 이용되는 것과 달리, 김영삼의 일본식 이름은 언급이 거의 되지 않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 김영삼의 아버지 김홍조(金洪祚, 1911~2008, 향년 98세)와 김영삼 본인(향년 87세)은 모두 80이 넘게 살았다. 최초로 아버지가 아들의 대통령 취임식을 본 사례다.[9] 이범숙(李範淑, 1876~1969, 향년 94세, 윤보선의 어머니), 김태향(金泰香, 1910~1999, 향년 90세, 노태우의 어머니), 강한옥(姜韓玉, 1928~2019, 문재인의 어머니)은 어머니가 아들의 대통령 취임식을 본 사례다. 매일 아침 조깅과 배드민턴을 하면서 젊은이 같은 건강함, 활력을 유지하였으며, 대통령 시절 국빈이 방문해서 청와대에 머물면 같이 조깅을 하기도 했다. 지미 카터빌 클린턴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주화 투쟁을 하던 1980년대에는 가택 연금 해제 후 민주 산악회를 조직해, 민주화 동지들이 건강을 유지하고 뜻을 모으는데도 도움되는 일석이조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10] 이런 철저한 관리 덕분에 단식 투쟁 후에도 회복이 빠른 편이었으며 만 87세까지 장수하였다.[11] 김영삼은 생전에 질산 테러 및 조폭, 경찰들과 부딪히며 위험한 고비를 수차례 넘겼으나, 심적으로 움츠러들지 않고 다음 날 김대중과 함께 국회에 등원해 여권의 잘못을 지적하는 배짱을 발하였는데, 이러한 기백 저변에는 타고난 건강 체질 + 철저한 관리 + 용기가 있었던 것이다.

  • 선친 김홍조는 거제도에서 멸치 어업을 했다.[12][13] 그냥 동네 어민 수준이 아니라, 어선 수십여 척에 멸치 가공 공장을 여러 개 갖춘 업계의 큰손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김영삼은 야당 정치인 시절부터 주요 정치인들과 재야민주화운동가들에게 명절 때마다 꾸준히 멸치 박스를 선물로 보냈다. 이때문에 정치인과 재야인사들 중에 YS 멸치 혹은 민주멸치를 받은 사람이 허다했다. 김종필이 김영삼을 조문하면서 이 멸치 박스 이야기를 언급했는데, 김영삼은 여당, 야당, 정치적 대립 관계 여부를 신경 쓰지 않고 설 선물로 멸치를 보냈다고 한다. 지금도 깨끗한 멸치는 귀한 선물이지만 당시엔 꽤나 이색적인 선물이었다. 그런데 김영삼 재임 시절인 1995년에는 멸치 가격이 급등해서 큰 난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당시에는 '김영삼이 아버지 돈 벌게 해주려고 멸치값을 올렸다'라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물론 이 멸치값 급등 자체는 김영삼과는 무관하고, 실제로는 씨프린스호 기름유출 사고 등으로 멸치 어획량이 크게 감소한 탓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야당에서는 정부의 물가정책을 질타하고, 김영삼 정부에서 긴급 대책 자료를 만들고 멸치를 긴급 수입하는 등의 소동이 있었다.

  • 박근혜와 함께 금수저 출신 대통령으로도 자주 언급된다. 바꿔 말하면 한국에선 부잣집 출신 대통령은 이 둘뿐이고[14] 나머지 대통령들은 대부분 서민층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이런 부유한 집안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김영삼은 학생 때 전쟁에 징병되어 군복무를 수행했다. 더군다나 YS는 집안의 하나뿐인 외동아들이었다. 집안의 대를 이어줄 아들을 낳는데 집착했던 과거에 외동아들이 군대에 끌려간다는 것은 부모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같은 일이었을 것이다.[15] 또한 그 많은 재산을 민주화 운동하는데 많이 털어부었기에 금수저에 대한 반감이 강한 유권자들에게도 인정받았다.

  • 2022년 전까진 유일한 서울대학교 출신 대통령이기도 했지만[16], 2022년 서울대 출신인 윤석열이 취임하며 이 기록은 깨졌다.

  • 김영삼이 빌 클린턴을 두 번째로 만났을 때 대뜸 "Who are you!"(너 누구야!) 라고 인사를 건넸다. 화들짝 놀란 통역관이 대통령이 "How are you?"(잘 지냈어?)를 잘못 말한 줄 알고 정정했는데 나중에 왜 그러셨냐고 물어보니 경상도에선 반가운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면 "이게 누꼬?" 라고 인사한다며 그래서 Who are you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17] 그러나 통역관이 영남 방언을 모르자 "배아라(배워라)"라고 돌직구를 날리기도 했다. 그 외에도 YS 관련 유머를 보면 이 영남 방언과 관련된 유머가 많으며 실제 사례도 적지 않다.

  • YS 시리즈 내용 中에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빌 클린턴과 만나서 빌이 "I'm Hillary's husband." 라고 하자, 김영삼이 그걸 'nice to meet you' 비스무리한 인사말로 알아듣고 "Me too." (사실은 nice to meet you too 또는 you too 라고 해야 맞은 문법) 라고 답변했다는 유머가 있다. 한때 이 일화가 사실인 것처럼 항간에 퍼졌지만, 사실 이건 일본의 전 총리 모리 요시로의 일화를 차용한 것이다. 근데 나중에 일본 모리 요시로 전 총리의 일화가 구설수에 오르자, 한 일본측 관계자들은 "한국의 어느 대통령의 일화가 와전된 것."이라 해명하려 했다고 하니 뭔가 양쪽이 떠넘기기 분위기.(...)

  • 파일:external/ilyo.co.kr/1378255197627740.jpg
    파일:external/www.kyosu.net/25823_12014_2647.jpg
생전에 칼국수를 매우 좋아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칼국수 집 단골이었다. 단골 국숫집으로 알려진 모 점포에 매년 연하장을 보낼 만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2013년 뇌졸중 증세가 악화되기 직전에는 고생 많이 했다고 따로 돈을 주고 갔는데, 이게 마지막 만남이었다고. 대통령 재직 당시에도 칼국수가 청와대 주력 메뉴로 완전히 자리잡은 바 있었다. 이 시절 청와대에 초청받은 손님들은 꼭 칼국수를 대접받았으며, 때문에 면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니은 초청받기를 꺼렸고, 또 국수의 특성상 먹어도 밥보단 배가 빨리 꺼지는 편이라 YS와 함께 칼국수를 먹었던 사람들 중에는 식사가 끝나면 몰래 다른 식당에 가서 또 식사를 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는 후문이 전해지기도 했다.[18] 나중에 문재인청와대에서 곰탕을 메뉴로 내놓은 부분을 이와 관련해서 개그로 연결시키기도 했다. "청와대에서 칼국수 먹고 나온 사람들은 다 배고파서 곰탕집에 모여서 2차를 했는데, 그런 일이 없도록 곰탕을 차렸습니다!" 라고 페북에 적은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당시를 겪은 사람들에게는 감회가 남다르다고 한다.

김영삼 관련 유머에도 칼국수가 단골로 등장한다. 당시 유행하던 김영삼 시리즈에는 칼국수 관련 유머가 하나씩은 들어 있었다. 임기 말에 터진 IMF 사태로 인해 인기가 바닥을 찍었을 땐 '먹으면 먹을수록 머리가 나빠지는 음식'이라는 조롱도 돈 적이 있었다. <고바우 영감> 만평에서 자꾸 먹으면 머리가 나빠진다면서 '4년 동안의 임상 실험 결과'라고 확인사살을 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 원래 김영삼은 서울대 출신이지만 머리 나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보니 더더욱 그랬다. 칼국수 애호에 대해서도 '일부러 청렴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조작한 거 아니냐?'라는 비난도 없지 않았다. 물론 이런 이미지 구축의 의도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김영삼이 칼국수를 좋아한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김영삼의 단골 칼국수 식당들마다 김영삼이 남긴 휘호나 기념사진들이 걸려 있을 정도. 다만 김영삼이 생전에 가장 즐겼던 칼국수멸치 육수나 바지락으로 국물을 낸 해물 칼국수가 아니라 쇠고기사골 육수로 끓인 형태의 안동식 칼국수, 일명 안동국시로, 시중에서 먹으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해물 칼국수에 비해 좀 더 비싼 물건이다. 그렇다고 아주 사치스러운 음식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고, 보통 서울 시내의 매장에서 한 그릇에 1만 원 안팎 수준으로 판매하는 편이니 일반인들도 쉽게 먹을 만한 가격대이다. 즉 일반인들이 먹는 음식 중에서 좀 비싼 물건 정도다. # 따라서 결론을 내리자면 '이미지 메이킹을 할 필요가 있었는데 마침 좋은 소재가 김영삼 본인에게 있었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스케일은 다르지만, 이명박은 배고픕니다를 비롯한 각종 이명박의 먹방처럼 이해하면 될 듯 하다.

당시 청와대칼국수 대접에 대해 정치적인 전략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는데, 3당 합당 이전까지는 김영삼을 열렬히 지지했다고 밝힌 시사평론가 이동형은 팟캐스트 이이제이 김영삼 편에서 "김영삼은 거제시의 아버지 선단에서 잡은 멸치를 자주 선물로 보냈다. 멸치라는 게 금방 먹는 것도 아니고 두고두고 먹는 식재료이기 때문에 선물받은 사람은 먹을 때마다 YS를 생각하게 된다. 칼국수 육수 또한 멸치로 우려내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이유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는 의견을 낸 바 있다. 다만 YS 임기 당시 청와대에서 나왔던 칼국수는 당연히 평소 대통령이 선호하는 안동식 칼국수, 즉 '육수를 멸치로 우려내지 않은 칼국수'였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진짜 저런 의도가 있었을지는 미지수.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단골로 찾아 안동국시를 즐겼던 곳 중 한 곳인 성북구 성북동의 '국시집'이라는 음식점은 역사성을 인정받아 김영삼 사망 한 달 뒤인 2015년 12월에 서울특별시 미래유산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기사. 그 외에도 서민 음식을 많이 좋아했다고 하며 설렁탕을 먹는 사진이 사후 포털에 올라온 적도 있었다. 신사동에 위치한 '봉희설렁탕'(새절역 인근)이라는 음식점 역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골 식당 중 한 곳이었다고 한다.

김영삼이 칼국수를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을 때 당시의 대학가에서는 YS를 폄하할 때 칼국수가 아니라 차라리 보름달빵을 먹으라는 대자보가 돌기도 했다고 한다. 그 외 김영삼의 정치적 정적이던 박철언의 처제이자 올림픽 탁구 금메달리스트기도 했던 현정화인터뷰에서 "땀 흘려 뛰고 온 운동 선수들한테 칼국수가 뭡니까?"라고 툴툴거린 적도 있었다.

5월 5일 어린이날에 초등학생을 청와대에 초청하여 간담회를 가지던 중 한 초등학생이 YS에게 "청와대에서 매일 칼국수를 드시냐?" 고 물으니 "매일 먹는 건 아니고 자주 먹는다" 고 답하자 그 초등학생이 "그러면 우리도 청와대 칼국수를 먹어볼 수 있느냐?"고 다시 물어보니 "먹게 해주겠다"고 흔쾌히 답하였다. 그러자 다시 초등학생이 "정말이냐?" 고 물어보니 YS가 껄껄 웃으면서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거짓말을 해서야 되겠느냐?" 고 답하자 초등학생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후 그 초등학생들이 진짜 청와대 칼국수를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는 보도자료가 나오지 않아 확인이 불가하다.

  • 그의 딸 김혜영(김현철의 누나)이 배우 이덕화와 국민학교 6학년때 같은 반이었다. 이덕화에게 김영삼은 친구의 아버지인 셈. 그 인연으로 이덕화는 1992년 대선 때 김영삼을 공개 지지하기도 했고 유세에도 참여했으며, 1996년 총선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남궁진과 맞붙어 단 1,400여 표 차이라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낙선하였다. 이때 선거자금으로 돈 엄청 까먹었다고. 이 때의 경험이 상당히 뼈아팠는지 이후 이덕화는 단순한 지지 선언 정도를 제외하면 정계에는 관여하지 않고 있다. 헌데 공교롭게도 이덕화는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김영삼의 평생의 숙적 중 한 사람인 전두환 역할을 맡은 바 있다. 물론 해당 드라마가 전두환 까는 내용도 많은걸 고려하면..


  • 김영삼이 평소 가장 아꼈던 차남 김현철은 아이러니하게도 YS 정권 당시 한보 스캔들 여파로 구속당한 이후 사실상 정계에서 퇴출되었지만 꾸준히 재기를 노렸는데, 원랜 무소속으로라도 부친의 고향이기도 한 거제시 지역구에 여러차례 출마하려 했으나 당시 한나라당 내부 사정 등으로 이를 무르고 공천 결과를 기다렸으나, 과거 구속 전례 등 공천받기엔 워낙 여건이 좋지 않아 결국 공천을 못 받았고 2012년에도 새누리당 소속으로 공천받지 못하자 결국 당시 당권을 잡고 있던 박근혜에 대한 악감정도 있고 해서인지 당을 탈당했다. 이후 연장선상인지 2012년 대선에선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고, 2014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는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를 시사한 적도 있었으나 여론의 반발 등으로 성사되진 못했다. 2016년 총선에서도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출마할 가능성이 점쳐졌고, 이에 대해 구체적인 기사도 나왔으나, 2015년 말 부친의 사망 후 충격 때문에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부친의 기념사업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다만 제19대 대통령 선거 때도 김현철은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고, 이후 더불어민주당에도 입당해 당원이 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에서도 찬밥 신세가 이어지자[19] "이 당에선 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며 탈당했고, 이후 보수당이 수구화되면 부친의 간판은 떼라는둥 정치적 훈수 행보를 이어가다 2022년에는 윤석열을 지지하는 행보도 보인다.[20] 대선 이후엔 YS가 철거한 조선총독관저를 윤석열 정부가 복원하려 한다는 기사가 뜨자 이에 절대 반대하기도 했다.

  • 전국 각지의 관공서에 사진이 걸린 마지막 대통령이기도 하다. 1993년 취임 당시부터 걸렸던 사진은 이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근엄하게 입을 굳게 닫은 사진이었으나, 1994년부터 국민들에게 친근히 다가가기 위해서 맨 위의 사진처럼 웃는 사진으로 바뀌었다.[21] 그러고 나서 후임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권위주의 타파라는 이유로 재외공관 등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통령 사진을 걸지 않기로 하면서 이 관행은 사라지게 된다.

  • 관공서 대통령 사진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에 대한 경칭인 '각하'가 쓰인 마지막 대통령이기도 하다. 역시 김대중 전 대통령부터 '대통령님'이란 호칭으로 바뀌었다.[22]

  • 상도동에 장기간 거주했다. 김영삼계를 지칭하는 상도동계라는 명칭도 여기서 비롯됐다. 1960년대에는 상도동이 영등포구에 속해 있어서 영등포구로 주민 등록이 되어 있다가 1973년, 관악구가 영등포구에서 분구되고 상도동도 관악구에 편입되면서 관악구로 주민등록이 이전되었다가 1980년, 동작구가 관악구에서 또 분구되고 상도동도 동작구로 편입된 이후 서거할 때까지 동작구로 주민등록이 되어있었다.

  • 김두한 전 의원과 같은 시기에 정치 생활을 했고 그와 같은 당이었던 적도(자유당, 신민당) 있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54%EB%85%84_%EC%97%AC%EC%95%BC_%EA%B5%AD%ED%9A%8C%EC%9D%98%EC%9B%90_%EA%B8%B0%EB%85%90%EC%82%AC%EC%A7%84.jpg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김두한, 두 번째가 김영삼.
야인시대에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등장했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김두한이 3김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궁금해하기도 했다.[23] 위의 사진은 국회의원 야구대회 사진이고, 김영삼이 나중에 퇴임 후 2010년대에 김두한 이야기를 인터뷰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야인시대에서 나왔던 것처럼 김두한은 부하들 끼니를 챙겨주고자 김영삼을 포함한 동료 의원들에게 돈을 빌리곤 했고, 김영삼은 김두한을 '머리랑 언변은 좋은데 글은 못 읽는 사람' 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김두한 의원은 자신에게 온 편지들을 읽을 줄을 몰라 김영삼을 찾아와서 좀 읽어달라고 한 적도 많았다고 하는데, 이는 평소 김두한에게 "이렇게 작고 예쁜 손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느냐?"며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는 김영삼에게 호감을 느낀 김두한이 YS를 만나고자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 이명박 정부 시절 이명박이 정운찬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면서 중용했는데, 이 시기에 정운찬과도 상당히 친해졌다.

  • 5공 때 가택연금을 당하던 시절 상도동 옆집에 살던 당시 국민학생인 이규희와 친해졌다. 당시 10살이던 이규희씨는 운동 중인 김영삼에게 인사하고, 김영삼이 나올 수 없으니 이규희가 놀러 가며 김영삼이 이규희를 '꼬마동지'라 부르고 자신은 '대장동지'라 하며 친해졌다. 이규희가 부모님이 해준 음식을 들고 가기도 하고, 김영삼도 아버지 김홍조 옹이 보낸 멸치를 나눠주기도 했다. 서슬퍼른 5공 경찰들도 10살 꼬마는 수색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일하게 김영삼의 집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던 사람이었기에, 이를 이용해 김영삼의 편지를 숨겨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에는 이 시절 이야기들을 『꼬마동지 대장동지』라는 책으로 내고, 이 때 인세로 심장병에 걸린 어린이의 수술을 도왔다. 결혼 후 한 때 미국으로 떠났다 상도동의 그 집으로 돌아오고, 어머니가 되어 아들을 데리고 김영삼을 만나기도 하고, 김영삼의 사망 후 빈소도 방문하였다.[24] 관련기사

  • 상기했던 2003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일본에 대한 감정과는 별개로, 통역 없이 일본어로 인터뷰를 진행했을 정도로 일본어 실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삼이 어린 시절을 보낸 당시의 시대를 생각해 보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다.[25] 처음에는 약간 머뭇거리는 듯한 말투였으나, 인터뷰가 진행될 수록 예전의 감을 찾아가는지 현지인과 별 다를 것 없는 억양을 보였다.


  • 알고보면 전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과 유사한 점이 많다. 우선 자연인으로서의 프로필만 보더라도, 두 사람 다 유복한 집안 출신이며, 키가 168cm에, 체중 또한 63kg이랑 62kg으로 거의 비슷하다. 둘 다 각각 6.25 전쟁보어 전쟁에 참전한 참전용사들이며, 결혼했을 당시 아내의 나이도 22살, 23살로 거의 비슷하며, 아내와 총 5명의 자식을 낳았다는 점에도 동일하다. 성격적으로 보더라도 둘 다 배포와 통이 크고, 한량아적 성격과 유머 감각, 다혈질이라는 점도 매우 유사하다. 정치인으로서 볼 경우, 두 사람 모두 보수주의 정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자유주의 정당으로 옮겨가서 활동했다가, 다시 보수 정당으로 돌아와서 정부 수반의 자리에 오른다. 정부 수반의 자리에 오른 나이도 만 66세로 동일하다. 자유주의 정당에서 활동한 이력 때문인지, 두 사람 모두 보수정당 내 온건파라고 할 수 있는 자유보수주의, 보수자유주의 성향이라는 것도 유사하다. 또 소속 정당 내 소수파로서, 각각 당 내 다수파인 민정계, 화독파와 대립했다. 심지어 김영삼과 처칠이 대립했던 당 내 다수파인 민정계와 화독파 또한 각각 국가주의, 군국주의적 성향을 띠는 정치세력과, 그런 정치세력집권한 나라에 유화적인 정치세력이라는 점에서 연계되는 부분이 있다. 또 극우의 입김이 강한 이웃 나라에 대해 매우 강경했다는 것도 유사하다. 정부수반으로서의 첫[26] 임기가 5년 정도였다는 것도 동일하고, 심지어 정부수반으로 취임하고 5년 후에 치러진 정부수반 선출 선거에서 승리한 제1야당이 사실상 거의 처음으로 안정적인 집권에 성공했다는 점도 동일하다.[27]

  • 1920년대생 치고는 키가 크다. 1920년대생의 평균 키가 150대 후반 정도에 불과했는데, 김영삼은 키가 168cm로, 키가 컸다. 그런데, 자신의 정치적 동지였던 김대중173cm로, 그 연도에 활동했던 정치인들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큰 편이였다. 지금도 20대 남성 평균 키가 174cm이니, 얼마나 키가 큰지 알 수 있는 부분. 그 시기 173cm는 190 중후반에 필적하는 장신이였다.


1.1. 그의 인기[편집]


집권 초반[28]에는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 도입, 부정부패 사정[29] 및 공직자 재산 공개 제도화[30] 등으로 초반 지지율이 90%를 상회했었다. 이러다보니 집권 첫 해인 1993년에는 방송국 코미디 프로에서 뜬금없이 도우미 복장[31]을 한 김영삼 전 대통령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했다.[32]
파일:external/www.younglock.com/1041581400-3.jpg
파일:external/www.burimbook.co.kr/1231840899RUntitled-20.jpg
덕분에 그를 소재로 한 유머집 YS는 못말려도 발간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원래 이 'YS는 못말려' 시리즈는 유머 1번지 작가 출신인 장덕균이 세간에 떠돌던 유머를 모으고 그 자신도 여러 개를 창작하여 1993년 대전 엑스포에 맞추어 펴낸 것이다. 상단 사진의 2권은 장덕균이 아닌 다른 편집자가 PC통신 유머를 끌어모아 엮어낸 것이다.[33] 그와 관련된 여러 유머 시리즈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다시 회자되기도 했다.

김영삼을 주인공으로 한 무협소설도 나왔다. 그것도 팬픽처럼 대충 쓴 게 아니라 무협 1세대 작가 중 손꼽히는 사마달이 쓴 작품으로 전 12권 분량의 대하소설이다. 대도무문 문서로.

파일:external/c4493247386995d86c9471aac81b4567b6e276064eff486aa05e84c7e31c4a6e.jpg
[34]

그 외에도 심지어 PC용 게임(메인 게임은 퍼즐, 보스전은 대전 액션 게임형식이라기엔 스트리트 파이터 2를 베낀 수준)까지 등장할 정도였으며 양종철이 김용삼 역으로 나온 정치풍자 코미디 영화 YS!안녕하십니까? 도 있다.

물론 단순히 인기가 많았기 때문만은 아니고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김영삼 본인이 자신을 소재로 한 풍자작품 등을 만드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농담이 아니라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만 해도 풍자 한번 잘못하면 코렁탕을 먹을 수 있던 시대였기도 했고. 전임인 노태우는 그래도 물태우라는 별명도 쓰였듯 6월 항쟁의 결과로 제도적 민주화가 이뤄졌기에 이전 정권들보단 많이 유연해졌지만 노태우 역시 근본은 군인 출신이었고, 전두환과 달리 자신을 비판했다고 잡아가서 고문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노태우 정권 때는 너무 심한 풍자를 할 경우 고발하여 조사하거나 하는 경우는 있었다고 한다. 김형곤 문서의 방귀개그 문단으로.

다만 'YS는 못말려'를 비롯하여 당시 나온 풍자작품들의 경우 김영삼을 희화화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고, 김영삼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위 대도무문만 해도 사상 초유의 가상정치무협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왔지만 주인공 곡운성(김영삼을 모티브로 한 인물)은 부정적인 면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인간형이다. 이런 점은 시대적 한계로 볼 수도 있다.


1.2. 한자 선호파[편집]


한글로만 된 신문은 읽지도 않아요.[35]

- 월간조선 2001년 2월호 내용 중 조갑제 편집장과의 상도동 사저 인터뷰에서[36]

사적으로 한자 선호자로 알려져 있어서 친필 사인에도 한글 대신 한자로 사인을 하는 편이었다.[37] 하도 많이 뿌려대서 '영삼시계'란 별명을 갖고 있는 청와대 기념품 시계에도 김영삼은 한자로 사인했고 이 사인이 널리 알려져 있다. 또 상기했듯 신문을 읽을 때도 한글로 된 신문은 보지도 읽지도 않는다고 인터뷰한 바 있다.

또한 퇴임 후에도 한자교육은 국민들의 인식능력이 향상된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면서, 한자 선호에 대한 애정과 자신감을 보이기도 하였고, 한자교육 강연회에도 곧잘 참석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하였다. 다만 같이 3김으로 묶여있던 김대중김종필도 평소에 국한문혼용체로 글을 썼던 것을 보면 사상이나 신념이라기보다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국한문혼용체를 쓰던 것이 당연시되었던 시대에 정치활동을 한데다가, 사회전반적으로도 한문학 지식을 가진 인재를 높게 평가하던 시절에 교육받고 활동했던지라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세대차이인 것. 막말로 지금 세대 중에서도 한자교육을 실컷 받았는데 사회에서 점차 효용 가치가 떨어진다면 공부한 게 억울해서라도(...) 한자 병용하자고 주장할 법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문민정부 때 신문의 순한글화가 진행되었다. 이유인 즉슨, 신문 인쇄의 전산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세로쓰기-국한문혼용체를 유지하기보다는 가로쓰기-한글전용으로 신문인쇄하는 것이 비용절감에 유용한데다가 편집이 간편해지기도 하고, 정부 시책으로 한글전용을 밀어붙이면서 세월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면서 이들이 본격적으로 사회진입을 할 무렵이 되어 수요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1.3. 인재 발굴[편집]


1968년에는 정치학을 지망하던 서석재를 발탁하여 자신의 비서로 채용하여 정계에 입문시켰고 1970년에는 서울대학교 운동권 출신 김덕룡을 발굴하여 정계에 데뷔시켰다. 1971년 유신 선포 이후에는 김동영, 최형우도 측근으로 발탁하였다. 이들은 김영삼의 최측근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김동영과 최형우의 활동은 두드러져 '좌동영 우형우'라는 별칭이 생겼다. 그의 휘하에는 수많은 반군정, 반독재 성향의 정치 지망생들이 모였다.

1988년에는 인권 변호사로 이름이 알려지던 김광일, 노무현을 정계에 입문시켰다.[38] 그러나 민주정의당과 3당 합당을 하는 과정에서, 노무현은 김영삼과 갈라섰다.[39] 1992년 이명박민주자유당으로 정계에 입문시킨것도 김영삼 본인이었고, 문민정부들어서고는 이재오, 손학규, 이회창, 정형근, 홍준표, 김문수 등 여러 사람을 민주자유당신한국당에 넣었다. 이와 같은 인물들을 주축으로 역사상 가장 성공한 개혁 공천으로 평가 받는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공천을 통해 사실상 보수 내부에 새로운 분위기를 불어넣었고, 한국의 보수주의 사상이 단순히 반공 안보만을 울부짖던 수준에서 벗어나 시장주의, 자유주의, 세계화를 지향하는 이념을 탄생시켰다.


1.4. 각종 타이틀[편집]




이 문서는 나무위키의 이 토론에서 일부 타이틀을 삭제하기(으)로 합의되었습니다.
타 위키에서의 합의내용이 더위키에서 강제되지는 않지만 문서를 편집하실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최규하 이후 12년 만에, 민주화 이후 5년 만에 등장한 문민 출신 대통령
  • 삼김 중에 최초의 대통령
  • 최초의 김씨 대통령.
  • 유일하게 전직 대통령을 2명씩이나 구속한 대통령[40]
  • 김종필, 박준규와 더불어 역대 최다선 국회의원(9선)
  •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만 25세 5개월)[41]
  • 유일하게 국회에서 제명당한 국회의원
  • 최초로 대선 낙선 이후 당선된 대통령
  • 최초로 동향인 영부인을 둔 대통령[42][43]
  • 가장 많은 당적으로 선거에 당선된 대통령[44]
  • 최초로 전임자 노태우보다 연장자인 대통령[45]
  • 유일하게 임기 후에 부친상을 당한 대통령
  • 최초의 서울대학교 출신 대통령[46]
  • 최초로 군내 사조직을 실각시킨 문민 출신 대통령[47]
  • 대한민국에서 사형을 집행한 마지막 대통령
  • 가장 많은 6명의 자녀를 둔 대통령[48]
  • 생일이 가장 늦은(12월 20일) 대통령[49]
  • 최초로 국가장이 치러진 대통령
  • 보수정당 출신 대통령 중 유일하게 낙선 기록이 있는 대통령
  • 보수정당 계열 대통령 중 유일하게 사망 시점까지 전직 대통령 예우가 제공된 대통령[50]
[1] 다만 그가 처음 정치를 시작한 자유당은 점점 타락하다 4.19 혁명으로 망했기에, 1990년대 민주자유당과 계보가 직접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사실 YS가 사사오입에 반발해 7개월만에 자유당을 탈당해서 기간도 짧긴 했다.) 이념적으로도 사실 군부 색채가 일부 끼어든 민주자유당은 (점차 우경화되긴 하지만) 자유당과 결이 다르다. 이는 일반인들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모두 독재자로 싸잡아 보지만, 일부 학자들은 민간인 출신 이승만과 군인 출신 박정희, 전두환은 좀 구분지어 보기도 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을듯.[2] 첫 번째 진영 변경은 사사오입 개헌에 항의하는 뜻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두 번째 진영 변경은 본인이 주체가 된 3당 합당이다. 어찌됐든 군인 출신 대통령의 시대를 마치고 본격적인 (실권을 가진) '문민 대통령'의 시대를 연 인물이라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 적지 않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임은 분명하다.[3] 영상.[4] 다만 김영삼이 육사 자체를 마냥 안좋게만 본건 아니라, 대통령 시절엔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축사자로 가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잘못된 것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아 주는 일에 앞장설 것을 여러분에게 다짐합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5] 여담으로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일본육사(편입) 출신이다. 다만 여기서 한 발언은 육사와는 관련이 없고, 독재자 박정희가 10.26 사건으로 암살당했을 때 죽어도 싸다고 느낀 소회를 말한 것.[6] 1982년생으로 당시 만 11세가 될 무렵이었다.[7] 취임 년도 김영삼의 만 나이에 맞춘 것.[8] 다만 이후의 근황은 2003년 11월에 한 번 나왔고 이후의 소식은 알 수 없다.[9] 2022년 5월 10일에 윤기중이 아들인 윤석열의 대통령 취임식을 보게 되면서 두번째 사례가 되었다.[10] 당시 중앙정보부나 안기부 등의 도청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추측도 있다. 건물 안이나 평지에 비해 미행이 붙거나 전자 도청을 하기가 어려운 높은 산에서 정치 전략을 짜기 위해 등산을 자주 하였다는 것이다.[11] 교통사고로 무릎이 불편하게 된 DJ는 몸 운신이 비교적 편한 수영을 택했으며 또한 부인인 이희호가 헌신적으로 음식 내조를 해주었다는 후문이 있다.[12] 영화 투캅스 2에서도 이와 관련된 대화가 나온다. 이제 더 이상 대놓고 지역 유지들에게 보호세를 걷을 수 없게 되어 툴툴거리는 강형사(박중훈)를 파트너인 이형사(김보성)가 "용기를 내십쇼. 대통령도 월급받으면서 일하는 세상인데요"라 위로하자, 강형사는 "마! 대통령은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멸치어장이라도 있지"라고 되받아치고 이형사가 전혀 몰랐다는 듯이 "멸치어장이요?"라 반문하자 "넌 신문도 안 보냐?"라고 한심해하는 강형사에게 이형사는 "전 가쉽란은 안 읽습니다"라고 대꾸한다.[13] 김경진(소설가)의 첫 군사소설 동해에서도 짤막하게 나오는데, 그 유명한 멸치어장 소유자를 장문휴의 함장이 떠올리는 대목이 등장한다.[14] 물론 박근혜는 원래부터 금수저는 아니었고, 부친이 대통령+독재자 크리를 타면서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게 된다. 육영재단 항목도 참조. 결국 민간인 출신 진짜 금수저는 부친이 멸치 사업을 한 김영삼 뿐이라는 소리.[15] 그래서 1980년대까지는 조건(삼대독자)을 총족시켜야했지만 외동아들일 경우에는 일종의 병역특례를 받을 수 있었다.[16] 김영삼이 기득권층과 타협하지 않고 여러 개혁을 성공시킨 이유로 그의 무대포 성격에 비유해 "무식하니 용감했다"는 평을 쓰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 김영삼의 이미지와 달리 학력은 초엘리트였다.(...)[17] 영어에도 거의 똑같은 표현이 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look who it is!" 라며 못 알아보겠다는 척을 하는 것.[18] 김대중 전 대통령도 야당 총재 시절 영수회담을 하면서 칼국수를 대접받았는데, 한그릇으로 성이 차지 않아 회담을 마치고 나서 돌아와 당사 지하 식당으로 내려가 혼자서 해물탕 3인분을 해치우고서야 포만감을 느꼈다고 한다. 물론 이건 일반인 수준을 넘은 대식가긴 하다만. 사실 대식가 이명박에 가려져서 그렇지 DJ도 미식가+대식가 기질이 상당했다고 한다. 다만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식사량을 많이 줄였다고.[19] 애초에 냉정하게 보면 과거 스캔들을 일으켜 대중의 공분을 산 당사자를 다시 정치판에 공천한다는 것 자체가 법 논리를 떠나 이미지도 중요한 정치판에선 쉽게 할 수 있는게 아니다. 차라리 본인 대신 자식을 정치판에 밀고 본인은 킹메이커나 하는게 더 나았을듯.[20] 2021년 국민의힘 입당 직전 윤석열이 김영삼도서관을 찾아 김현철과 대담한 바 있다.[21] 파일:김영삼 관공서사진.jpg 참고로 이 사진이 기존의 근엄하게 입을 굳게 닫은 사진에서 웃는 사진으로 바뀐 1995년 ~ 1996년경에 실제로 관공서에 걸렸던 사진이다.#[22] 원래 노태우 전 대통령 때부터 "'각하' 대신 '대통령님'이라 호칭하자"는 말이 나왔고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각하란 말이 사용되지 않았지만, 관습이란게 은근 무서워서 여전히 비공식적으로 대통령을 대면할 땐 각하란 호칭이 김영삼 전 대통령 때까지 사용되었다.[23] 야인시대에서는 자유당 정부 시절 젊은 YS가 유진산, 조병옥, 김두한 및 야당 의원들과 함께 원탁에 앉아 시국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24] 다만 정재계의 쟁쟁한 인사들이 모인 자리다 보니 불편해서 오래 있진 못했다고 한다.[25] 당장 김영삼 뿐만 아니라 김대중, 김종필 등도 그 당시에 태어나서 일본어에 상당히 능숙했다.[26] 김영삼은 단임제 국가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인만큼 당연히 첫 임기밖에 없지만, 처칠은 두번째 임기도 재임했다.[27] 물론 영국은 노동당이 그렇다는거고, 노동당에 지지층 내주고 몰락하기 이전 20세기 초까지 보수당과 경쟁한 자유당은 이미 여러번 집권 경험이 있었다.[28] 임기 2년 차 4분기부터는 직무수행 평가에서 긍정 비율이 30%대로 떨어진데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후에도 41% 밖에 얻지 못했기 때문에 중반도 인기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29] 사회 곳곳에 부정과 부패가 만연화되어 있던 상황이라 사회 전방위로 하루가 멀다하고 비리로 잡혀가고, 공직을 사퇴하는 기사가 1면을 장식했다. 공직자의 의심스러운 과다한 재산, 율곡 사업과 같은 방위 사업의 비리, 사행산업과 연관된 검경 등. 이러한 부정부패 관련 기사가 1면을 차지하는 것은 9월말까지 지속된다.[30] 이전 버전에 있던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는 집권 3년차 시점이라 초기도 아니었고, 지지율도 많이 떨어진 상태라 제외한다.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시점에는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지방선거의 참패로 인기가 많이 떨어져 있던 시기다. 갤럽 자료에 의하면 1995년 3분기의 업무수행에 관한 긍정 지지율은 29%다.해당 그래프[31] 지금은 널리 쓰이게 된 단어가 되었고 어떤 판촉행사의 행사 진행자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지만, 도우미는 원래 93 대전 엑스포 행사의 접객원으로 새로 창설한 단어였다. 방송에서 엑스포의 상징 중 하나로 굉장히 많은 홍보를 했다.[32] 참고로 이 코너가 등장한 당시 MBC 토요일 저녁 6시대의 코미디 프로그램은 후대의 무한도전-1박2일 같은 양강구도가 아니라 아예 MBC의 독주시대였으며 기본적으로 시청률 40%는 깔고 가던 시대였다.[33] 저자의 말로는 노태우 정권 당시 노태우를 주인공으로 한 풍자 유머집을 냈다가 안기부에 끌려가서 심문을 당했다고 한다. 고문이나 밤샘 조사 같은건 없었지만, 출판사까지 압력이 들어가서 광고도 못하고 증쇄도 못했다고 한다.[34] 위 사진의 인물들은 시계 방향으로 사담 후세인, 보리스 옐친, 빌 클린턴, 호소카와 모리히로, 덩샤오핑, 프랑수아 미테랑, 마거릿 대처.[35] 당시 한글로만 기사를 싣던 신문으로는 한겨레 등이 있었다. 다만 한겨레신문 창간 초기에는 김영삼이 대표적인 야당 정치인이던 시절이었고, 상당수 언론의 친정부적인 색채가 빠졌다고는 하지만 뒷돈을 받는 등 이런저런 거래를 했던 것은 여전해서 진보언론이 생기는 것이 김영삼 입장에서 나쁘지는 않았기에 직접 한겨레 신문의 주식을 사는 등 후원을 했다. 다만 오래가지 않아 3당 합당으로 틀어졌다.[36] 재미있는건 조갑제는 김영삼 생전에는 '좌파숙주'라면서 그를 비난한 인물이란 점이다.# 그러나 YS 사망 후 조문할 때에는 김영삼이 독재와 싸운 챔피언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37] 이는 정적이기도 했던 박정희가 한자 사인을 쓰다가 한글 사인으로 바꾼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38] 원래는 문재인까지 영입을 시도했으나 문재인 본인은 당시 정계입문을 거절하면서 무산됐다.[39] 이후 15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이 분열한 상태에서 노무현의 신한국당 영입설이 뉴스로도 나왔으나, 결국 흐지부지된 바 있다.#[40] 박근혜황교안 권한대행 체제였던 2017년 3월 31일 구속되었으며, 문재인 정부에서 구속된 대통령은 이명박 1명이다.[41] 2022년부터 대통령을 제외한 공직선거 출마 연령 하한선이 만 18세로 완화된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시행됨에 따라 이 타이틀은 깨질 가능성이 커졌다.[42]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고향경상남도 통영시(현 거제시)인데, 손명순 여사의 고향 또한 경상남도 김해시로, 같은 경남 지역 출신이다.[43] 두번째는 노무현 전 대통령. 경상남도 김해시 출신이며, 아내인 권양숙 여사는 경상남도 창원시 출신으로 역시 같은 경남 지역 출신이다. 여담으로 손명순 여사와 권양숙 여사는 초등학교 동문이다. 세번째는 윤석열 대통령이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 출신이며, 아내인 김건희 여사는 서울특별시 강동구 명일동 출신이다.[44] 6개의 당적을 가지고 총선과 대선에서 당선되었다. 6개의 당적은 문재인 전 대통령과 동률이지만, 문재인 전 대통령의 역대 당적 중에서 당선된 당적은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2개 뿐이다.[45] 2호는 1927년생인 전임자 김영삼 전 대통령보다 연장자인 1924년생인 김대중 전 대통령. 3호는 1946년생인 전임자 노무현 전 대통령보다 연장자인 1941년생인 이명박 전 대통령.[46] 두 번째는 윤석열. 김영삼은 철학과 출신이고 윤석열은 법과대학 출신이다.[47] 실제로 김영삼 덕분에 대다수 하나회 간부들이 정치적인 실각을 겪고, 하나회 숙군 덕에 그들이 날뛰지 못해 최종적으로 김현집, 최익봉 둘 정도만 남게 되었다. 한명은 불미스러운 사건, 그리고 한명은 임기를 못 채우고 예편하면서 하나회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후 몇 년 뒤 2017년을 기점으로 우병우, 김관진 등이 키워 주었던 알자회 출신들은 문재인 정부에서는 대다수가 강제 전역되어 실각했고 사실상 회장이나 마찬가지였던 조현천 장군은 미국에서 잠적한 상태로 사실상 국내의 군내 사조직들은 뿌리가 끊긴 상태이다. 이 점에선 김영삼의 공이 큰 셈. 거기다 동향 인생후배인 김진영 전 육군참모총장 역시 그대로 숙청되었다. 당시 항상 언급되는 타이틀 중 하나인 지연조차 개의치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48] 혼외자식 하나를 빼더라도 여전히 5명으로 최다다.[49] 17대 대통령 이명박과는 생일이 하루 차이고, 20대 대통령 윤석열과는 이틀 차이가 난다.[50] 이승만은 법률이 없어 예우 자체가 없었고(애초에 계보부터 안이어진다), 박정희는 임기 중 사망(여기도 법적 처분이 안내려졌다 뿐이지 엄밀히 따지면 쿠데타로 예우 박탈이다),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는 실형 선고, 탄핵 등으로 예우 박탈. 무소속이나 민주당 계열에서는 사망한 전직 대통령 전원이 예우를 끝까지 받았으므로 국민의힘 계열에서 사망 시점까지 예우를 받은 대통령은 김영삼이 유일하다. 윤석열이 임기 만료 후 사망까지 예우가 제공된다면 유일 타이틀이 깨지게 된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3675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3675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0-16 19:50:51에 나무위키 김영삼/여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