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복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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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魏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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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공왕(廣陵恭王) 樓伏連 | 누복련 | |
시호 | 공(恭) |
작위 | 안읍현후(安邑縣侯) → 광릉군왕(廣陵郡王) |
성 | 누(樓) |
이름 | 복련(伏連) |
생몰 | ? ~ 449년 |
출신 | 대군(代郡) |
1. 개요[편집]
북위의 장수로 대군(代郡) 출신.
2. 생애[편집]
누복련의 집안은 대대로 추장을 지냈으며, 누복련은 13살의 나이에 부친의 뒤를 이어서 부락을 거느렸다.
도무제가 하란부(賀蘭部)를 정벌할 때 종군했고 후연을 정벌할 때도 종군하여 중산태수로 임명되었다.
402년, 승려 장교(張翹)가 스스로 무상왕(無上王)을 칭한 뒤 정령(丁零)의 선우차보(鮮于次保)와 함께 행당현(行唐縣)에서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누복련은 이들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같은 해, 후진의 요흥이 아우 요평(姚平)을 파견하여 건벽성(乾壁城)을 함락하였다. 도무제는 후진의 침공을 막고자 직접 출병했고 누복련 또한 도무제에게 종군하여 시벽(柴壁)에서 요평을 물리친 뒤 안읍현후(安邑縣侯)에 봉해졌다.
명원제가 제위를 이은 뒤 누복련은 진병장군(晉兵將軍), 병주자사(幷州刺史)로 임명되었다. 누복련은 조성(曹成)을 비롯한 서하(西河)의 오랑캐 70여 명을 초유했으며, 북하의 토경호군(吐京護軍)을 물리치고 북위에 반란을 일으켰던 아도지(阿度支) 등을 사로잡았다. 명원제는 누복련을 칭찬하여 성등장군(成等將軍)으로 임명하고 열후(列侯)에 봉했다. 누복련은 뒤에 내도대관(內都大官)에 임명되었다.
423년, 태무제가 즉위한 뒤 누복련은 광릉군공(廣陵郡公)에 봉해지고 위위(衛尉)로 전임되었으며, 광록훈(光祿勳)으로 옮겼다. 태무제가 유연을 정벌할 때 누복련은 수도에 남았으며, 작위가 왕으로 올라가고 평남대장군(平南大將軍)이 더해졌다. 누복련은 다시 가절(假節), 독하서제군사(督河西諸軍事),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으로 제수되고 통만(統萬)에 진수하였다.
누복련은 449년에 죽어서 공(恭)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