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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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타임라인
1. 항쟁 이전의 상황[편집]
1.1. 1979년 10.26 사건 발생[편집]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자 헌법 규정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을 대신 맡게 됐다. 최규하는 27일 새벽 4시부터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에 따라 계엄사령관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이희성 육군참모차장을 앉혔다.
12월 1일, 국회는 만장일치로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정부에 건의했다. 최규하 대행은 6일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0대 대통령에 정식으로 당선됐고, 8일에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며 문익환 목사, 함세웅 신부 등 민주화 운동가 68명[1] 을 석방했다. 동시에 김대중의 가택연금도 해제했다. 그리고 10일에는 후임 국무총리에 신현확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앉히며 새로운 정부를 구성해나갔다.
한편 계엄사에는 10·26 사건[2] 의 전모를 수사하려 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됐다. 합수부는 비상계엄 아래에서 당시 대한민국의 모든 정보·수사 기관의 업무를 조정하고 감독했다. 이런 강력한 기관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합수부장에 취임했고, 전두환은 보안사 처장들을 합수부 국장들로 임명했다. 그래서 보안사는 중앙정보부, 경찰 등 모든 정보·수사 기관을 조정하고 통제하는 강력한 기구로 등장했다. 이를 이용한 전두환은 훗날 12.12 군사반란으로 대한민국 군부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권력 공백기를 틈타 최고 실세로 떠오른다.
1.2. 전두환과 하나회의 12.12 군사반란[편집]
한편 당시 전두환은 10·26 당시 정승화가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과 전두환을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좌천시키려는 인사 조치[3] 때문에 서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전두환은 무력으로 자신의 좌천을 막고 군부 내 하나회 세력의 입지를 지키려고 했다. 12월 12일, 전두환 등 군사 반란 세력은 최규하 대통령 재가도 없이 정승화 총장을 '내란 방조' 혐의로 강제 납치해 연행했다. 게다가 병력을 동원해 최 대통령 관저
1980년 3월 1일 전두환은 중장으로 진급했다. 13일에는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의 내란 방조 사건 공판이 열려 징역 10년이 선고됐다.
1.3. 1980년 서울의 봄부터 서울역 회군 및 당시 군부의 동향 [편집]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6] 은 "유신헌법을 개정하겠다"며 정치 발전을 약속했고, 유신체제는 폐지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 와중에 정치권에서는 11월 26일 여야 만장일치로 국회에 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개헌특위)를 설치하는 등 국회 주도로 헌법 개정을 추진했다. 한편 최규하 대통령은 12월 21일 취임사에서 "정부도 별도로 헌법 개정을 연구하고 검토할 것"이라 밝혔다. 이어 1980년 1월 18일, 기자회견에서 "개헌안을 발의하는 것은 헌법상 대통령의 책임이다. 3월 중순까지 대통령 직속으로 헌법개정심의위원회를 설치할 것"이라며 정부가 개헌을 주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7]
1979년 12월 18일,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은 "정치는 군의 영역 밖이고, 애국심과 양식 있는 정치인이 발전시켜야 한다. 군은 빠른 시일에 계엄 목표를 완수하고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갈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1980년 2월 9일, 신민당과 민주공화당은 대통령 중심제 및 직선제, 4년 중임제를 골격으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서로 여야 합의해 확정하고 이를 국회 개헌특위에 제출할 예정이라 발표했다.
대학교 신학기 개학을 앞둔 2월 18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전국 주요 부대에 3월까지 혹독한 시위 진압 훈련인 충정훈련을 완료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3월 6일, 노태우 수경사령관은 수도권 군 지휘관들[8] 이 참석한 가운데 1차 충정회의를 열어 수도권 시위에 대한 군 대비 태세를 점검했다. 이 회의에서 군은 학생 시위 세력을 맹목적으로 저항만 하는 세력으로 규정하고, 주동자들은 사회에서 격리하며, 군을 투입하면 강경한 응징 조치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2월 29일 최규하 대통령은 "안정적인 정치 발전을 추진한다"며 윤보선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후보, 지학순 주교를 포함한 긴급조치 위반자 등 687명을 사면·복권했다. 그래서 항간에는 서울의 봄이 왔다는 얘기가 돌았다.
4월 7일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은 "신민당이 자신과 재야를 영입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며 신민당 입당을 포기했다. 이에 대해 윤보선 국민연합 공동의장은 "국민연합에서 같이 민주화 운동하겠다는 것은 환영하나, 신민당 입당 포기는 성급하고 안타깝다"고 밝혔다.
신민당 입당을 포기한 김대중은 4월 16일 한신대에서 복권 이후 첫 대중 강연에 나섰다. 이 자리에서 김대중은 "학생들은 어쩔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는 폭력 행사를 자제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의 함정에 빠지지 말라"고 강조했다. 4월 25일에는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민주 회복이 급선무"라면서도 대통령 출마 의사와 신당 가능성을 분명히 하고 "이원집정부제나 중선거구제는 반민주적 발상이므로 단호히 배격한다"고 했다. 4월 29일에는 윤봉길 의사 추모제에 참석해 "민주화 촉진 국민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선언했나 언론 검열로 보도되지 않았다.
한편 유신체제가 붕괴한 후 그동안 억눌렸던 사회 모든 분야의 다양한 주장과 욕구가 급격히 터져나왔다. 이 가운데 학생회가 부활한 대학교에서는 4월이 되자 학원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전국 대부분 대학교에서 '총·학장과 어용 교수 퇴진' '재단 비리 척결' '학교 시설 확충' 등 학내 문제를 중심으로 개선을 요구하며 시위·농성했다. 4월 중순에는 병영 집체 훈련 거부 문제가 투쟁 이슈로 전면에 등장했다. 4월 24일에는 서울 14개 대학교의 교수 361명이 '족벌 운영 사학 경영자 퇴진' '군사 교육 개선' '교수 재임용제 철폐' 등을 내용으로 학원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다.
5월 1일, 서울대 총학생회는 병영 훈련 거부 투쟁을 전두환 신군부가 정치 개입 명분으로 삼을까 우려해 이를 취소했다. 그 대신 '계엄령 즉각 해제' '유신잔당 퇴진' '전두환·신현확 사퇴' '정부 주도 개헌 중단' '노동3권 보장' 등을 내걸고 본격적인 정치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5월 2일 서울대 학생 10,000명이 이날부터 13일까지를 민주화 투쟁 기간으로 정하고 교내 시위와 밤샘 농성에 들어갔다. 이렇게 대학생들의 시위는 단순 학교 문제에서 정치 문제에 대한 시국 성토 단계로 발전했다.
노동자들의 요구도 봇물처럼 터지기 사작했다. 4월 9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이를 신호로 4월 29일까지 전국에서 노동 쟁의가 719건이나 발생했다. 4월 21일에는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 광업소에서 광부 3,500명이 사북지서(현 사북파출소), 사북역 등 사북읍을 점거하는 사북사건이 발생했다. 사북사건이 진정된 후에도 노동 쟁의가 90건 발생했고, 5월에도 노동자들의 투쟁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4월 30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를 긴급 개최했다. 여기서 이희성은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시위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며 이들이 "사회 혼란과 무질서를 조장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만일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국가 안보 차원에서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 경고했고, 예하 부대에 "소요 진압 준비 태세를 갖추라" 지시했다. 이에 육군본부는 5월 초부터 계엄군을 이동시키고 배치했다.[9]
5월 3일 9공수여단[10] 을 수도군단에 배속시켰다. 5월 6~9일에는 주영복 국방부 장관에게 승인받아 해병 1사단 2개 연대를 진압군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했고, 2군[11] 과 수도권의 모든 부대의 시위 진압 준비 상황을 점검했다. 5월 8~10일에는 11공수여단[12] 과 13공수여단[13] 을 1공수여단 주둔지[14] 와 3공수여단 주둔지[15] 로 옮겨 배치했다. 5월 13일 1군[16] 과 3군[17] 소속 장갑차 50대를 수경사와 수도군단에 배속시켰다.
군에서 5.17 쿠데타를 위와 같이 은밀하게 준비하는 동안,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5월 9일 기자회견을 가져 '계엄령 해제' '정부가 주도하는 개헌 중지' '임시국회 즉각 소집' 등을 촉구했다. 그동안 소극적 입장을 보였던 민주공화당도 "임시국회를 소집하고 계엄 해제 문제도 거론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한편 대학생들은 학교 안에서만 조용히 시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학교 밖으로 진출해 가두시위를 시작했다. 5월 7일 한국외대 학생 800명이 가두시위했다.[18] 5월 13일 연세대 주도로 서울 시내 6개 대학교 학생 2,500명이 세종로 일대에서 야간 가두시위를 벌였고, 고려대 등 7개 대학이 밤샘 농성에 들어갔다. 5월 14일에는 서울의 27개 대학교 총학생회 대표들이 전면적 가두시위를 결의했다. 그래서 이날 낮 12시부터 학생 70,000명이 일제히 화신백화점 앞, 남대문, 서울역, 광화문 등 서울 중심가를 메우면서 밤 10시 넘어서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김종환 내무부 장관[19] 은 신현확 총리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경찰만으로 서울 시내의 학생 시위에 대처할 수 없다. 군이 주요 시설의 경계 임무를 맡아달라"며 군 투입을 요청했다.
이에 앞서 5월 14일 육군본부는 오전 8시 50분 전군에 계엄군 투입 준비를 지시하고, 오후 1시 '소요 진압 본부'[20] 를 설치했다.[21] 이에 따라 서울에서는 수경사와 수도군단이 특전사 소속 1, 5, 9, 11, 13공수여단으로 시위 진압을 맡기로 했다. 광주, 전주, 대전과 대구, 부산에서는 2군사령부가 특전사 7공수여단[22] 과 해병대 1사단[23] 으로 시위 진압을 준비했다. 오후 5시 30분에는 3공수여단을 국립묘지에 배치하고[24] , 6시 25분에는 청와대, 중앙청 등을 경비하려 광화문에 수경사 병력[25] 을 배치했다. 이어 밤 8시 29분 전국 방송국과 중계소에 경계 병력을 배치했다.
5월 15일 낮 12시 20사단[26] 61, 62연대가 서울 잠실체육관과 효창운동장으로 출동했다. 16일 저녁 6시 한미연합사령부는 20사단 60연대와 포병단의 작전통제권을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이양했고, "수도권 소요 사태 진압, 질서 유지를 위해" 신군부가 사용하도록 승인했다.[27] 이에 따라 60연대와 포병단도 5월 17일 오전 0시 1분 서울 태릉선수촌으로 출동했다.
한편 이날 오후 2시, 서울역 앞 광장과 도로에는 서울 35개 대학교 학생 100,000명이 모여 3일째 시위하고 있었고 도중에 경찰 가스차 3대가 불탔다. 그러나 이때 버스 1대가 진압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는 바람에 전경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하는 사고가 발생했다.[28] 저녁 7시 50분 신현확 총리는 특별담화를 통해 "연말까지 개헌안을 확정하고 내년에 선거를 실시해 정권을 이양하겠다. 사회가 안정되면 계엄령도 즉시 해제할 테니 학생들은 정부의 약속을 믿고 자숙과 자제해달라" 당부했다.
시위를 마친 서울대 등 서울 23개 대학교와 24개 지방대 총학생회장들은 밤 12시 고려대에서 회의했다. 이때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을 중심으로 이 자리에서 "일단 가두시위를 멈추고 정상 수업에 들어가자" 결의했다. 이에 따라 5월 16일 서울, 부산, 대구, 전주 등 대부분 도시에서는 정상 수업이 이뤄졌으나, 전남대와 조선대 등 광주의 대학생 2만 명은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시국 성토 대회를 열고 밤에는 평화로운 횃불 시가 행진을 벌였다.
5월 16일 오전 9시 30분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은 '비상계엄 즉시 해제' '정부 주도 개헌 포기' '연내 정치 일정 확정' 등 6개 항의 요구 사항을 공동 발표했다. 국민연합은 "요구 사항에 대해 5월 19일까지 정부가 답변하지 않으면 22일부터 전국적으로 민주화 촉진 국민 대회를 여는 등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겠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때 이화여대로 옮긴 전국 대학교 총학생회장들도 국민연합 선언에 따를 것을 결의했다.[29]
이런 상황에서 이날 오후 주영복 국방부 장관은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논의하려 다음날 오전 10시에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를 열 계획을 세웠다. 최규하 대통령도 중동 순방을 마치고 밤 10시 30분에 급히 귀국했다. 5월 17일 민관식 국회의장 대리는 여야 국회의원 186명의 요구에 따라 "제104회 임시국회를 5월 20일 오전 10시에 소집해 비상계엄 해제를 논의하겠다"고 공고했지만, 이미 운동장은 기운 상태였다.
이미 5월 7일 이전에 전두환은 대학생들의 시위가 치열해지자,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에게 "「시국 수습 방안」을 만들라"고 지시했다.[30] 전두환은 이어 5월 10일경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에게 "소요 배후 조종 혐의자와 권력형 부정 축재 혐의자들을 검거하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이학봉은 5월 16일 전국 보안부대 대공과장들을 보안사로 불러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이학봉은 "5월 17일 밤 12시부터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니 학생 시위 주동자와 배후 조종자들을 일제히 검거하라" 지시했다.
1.4.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편집]
포고령 제19호
최규하 대통령 특별담화
대한민국 국회에서도 비상계엄 해제를 논의하기로 결정하자, 신군부는 이를 막고 정권 장악을 기도한다. 그렇게 전두환, 노태우 등의 압박으로 열린 비상국무회의에서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단행한다.
앞서 5월 16일 밤 10시 30분, 최규하 대통령은 일정을 하루 앞당겨 중동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밤 11시부터 1시간가량 청와대에서 최광수 비서실장이 배석한 가운데 신현확 국무총리, 김종환 내무부 장관, 주영복 국방부 장관,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 이희성 계엄사령관 등에게서 그동안 국내 학생 소요 등 시국 상황을 보고받았다. 김종환 내무부 장관은 "경찰력으로 시위에 대처하는 데 한계라서 어려운 형편이다"라고 보고했고, 주영복 국방부 장관은 "북괴 침공설 관련 첩보를 입수해 군에서 내일 대비책을 강구할 예정이다" 보고했다.[31]
5월 17일 오전 9시 30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을 통해 "「시국 수습 방안」[32] 을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겠다"라고 주영복 국방부 장관에게 알렸다. 그리고 "비상계엄령 확대 등을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결의하도록 회의를 개최해달라" 요청했다. 오전 10시, 전두환은 청와대를 방문해 최규하 대통령에게 안보 상황과 국내 치안 상황을 거론하며 비상계엄 전국 확대 선포 등 시국 수습 방안과 소요 배후 조종 및 권력형 부정 축재 혐의자 체포·조사 계획을 보고했다.
한편 주영복 국방부 장관은 장관실에서 "외부의 요청으로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를 소집했다. 안건은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인데 어떤가?"라며 유병현 합참의장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에 유병현 합참의장은 "국회 해산은 군이 관여할 수는 없고, 군의 정치 개입은 헌법 위반이다. 비상기구 설치, 국회 해산을 군 지휘관 회의에서 논의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견해를 냈다. 결국 이희성, 김종곤, 윤자중 육해공군 참모총장의 동의에 따라 '비상계엄 전국 확대'만 회의에서 결의하기로 했다.
오전 11시 주영복 국방부 장관은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유병현 합참의장, 조문환 국방부 차관,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김종곤 해군참모총장, 윤자중 공군참모총장, 윤성민 1군사령관, 진종채 2군사령관, 유학성 3군사령관, 차규헌 육군사관학교 교장,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정호용 특전사령관, 노태우 수경사령관, 박준병 20사단장 등 육·해·공군 주요 지휘관 43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최성택 합참 정보국장은 북한 동향과 국내외 정세를 먼저 보고했다. 그러자 주영복 국방부 장관은 "계엄하에서 학원 소요가 진정되기는커녕 오히려 과열·폭력화해가고 있다. 북괴의 동향도 심상치 않으니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고자 한다" 발언했다. 대부분 참석자는 계엄 확대에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안종훈 군수기지사령관이 "비상계엄 전국 확대는 시기상조다. 국민의 합의와 총화에 따라야 한다"라며 반대 의견을 표명했으나, 정호용 특전사령관, 노태우 수경사령관, 박준병 20사단장 등의 "사회 안정을 위하여 군이 나서자"는 신군부의 주장에 결국 묵살당했다. 결국 주영복 국방부 장관은 전군 주요 지휘관들의 의견을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고 요약하여 결론 내리고, 백지를 돌려 참석자들에게서 서명받았다.
오후 2시경 회의를 마친 후, 주영복 국방부 장관은 오후 4시 20분 이희성 계엄사령관,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함께 신현확 국무총리를 찾아갔다. 이 자리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방안과 비상기구를 설치, 국회를 해산하는 내용의 「시국 수습 방안」을 보고했다. 이에 신현확 국무총리는 비상기구 설치와 국회 해산은 반대하고, 비상계엄 전국 확대 여부는 대통령이 결정할 사항이라는 이유로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기로 했다.
오후 5시 10분 최규하 대통령은 신현확 국무총리가 배석한 가운데 전두환 보안사령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주영복 국방부 장관에게서 시국 수습 방안을 보고받았다. 결국 저녁 7시 계엄 확대만을 수용하고 신현확 총리에게 국무회의 소집을 지시했다. 이때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소요 배후 조종 및 권력형 부정 축재 혐의자에 대한 체포·조사 계획을 별도로 보고했다.
한편, 오후 4시 50분 육본은 1, 2, 3군 및 관구, 사단 작전참모에게 "정위치에서 육본 작전참모부장에게 지시받도록 준비하라" 지시했다. 오후 5시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돌아온 노태우 수경사령관은 수경사 작전참모에게 "중앙청에서 국무회의가 열릴 예정이니 내외곽 경비를 강화하라" 지시했다. 저녁 7시 황영시 육군참모차장의 지시에 따라 김재명 육본 작전참모부장은 아직 비상계엄령을 정식으로 확대하기도 전에(!) 전군에 부대 출동 명령을 내렸다.
저녁 7시 35분 중앙청 외곽에 수경사 30단 소속 군인 342명이, 현관과 국무회의장에 이르는 2층 계단과 복도 등 중앙청 내부에는 수경사 헌병단 소속 군인 253명이 약 1m 간격으로 배치돼 강압적인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밤 9시 42분 이희성 계엄사령관도 참석한 가운데 신현확 총리 주재로 제42회 임시국무회의가 개최했다. "북괴의 동태와 전국적으로 확대된 소요 사태 등을 감안할 때 전국 일원이 비상 사태하에 있다고 판단된다"며 주영복 국방부 장관이 제출한 계엄 확대 선포안을 찬반 토론도 없이 8분 만에 의결했다. 그리고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밤 11시 40분 정부 대변인인 문공부 장관이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 선포 지역을 전국 일원으로 변경한다" 발표했다.
밤 10시 30분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전군에 소요 진압 부대 투입 작전 명령을 내렸고, 18일 새벽 1시 보안사에서 입안한 정치 활동 규제 조치 방안에 따라 "모든 정치 활동과 정치적 발언을 금지하고, 정치 목적의 옥내외 집회·시위를 금지한다"는 내용의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령했다.
이에 따라 육본은 5월 18일 새벽 2시 30분 전국 92개 주요 대학과 국회 등 136개 주요 보안 목표에 계엄군 25,000여 명을 배치했다. 서울은 수경사 작전 통제하에 1공수여단을 연세대·명지대에, 5공수여단을 고려대에, 11공수여단을 동국대에,[33] 13공수여단을 성균관대·서울의대에, 20사단을 서강대·홍익대·단국대·산업대·한양대·건국대·경희대·국민대에 각각 배치했고,[34] 수도군단 작전 통제하에는 9공수여단을 서울대에, 1야포단을 중앙대·숭전대에 각 배치했다.[35] 부산·경남은 제2군관구사령부 작전 통제하에 39사단과 해병 1개 연대를 부산대·동아대 등 12개 대학에, 대구·경북은 제5군관구사령부 작전 통제하에 36·50사단과 해병 1사단을 경북대·영남대 등 9개 대학에 배치했다. 충남북 지역은 제3군관구사령부 작전 통제하에 32·37사단과 7공수여단 2개 대대를 대전대·충남대 등 8개 대학에 배치했다. 전남북 지역은 전교사(전투교육사령부)[36] 작전 통제하에 31·35사단과 7공수여단 2개 대대를 전남대·조선대·광주교대 등 30개 대학에 배치했다, 경기도는 33사단 등을 인하대 등 4개 대학에, 강원도는 1군수지원사령부 작전 통제하에 강원대 등 11개 대학에 각각 배치했다.
5월 18일 오전 8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육군참모총장 접견실에서 "5·17 조치에 따른 후속 조치를 논의하고, 계엄사령관의 중앙관서에 대한 감독권 행사 방안을 연구 검토하라" 지시했다. 그리고 오후 1시 주영복 국방부 장관, 유병현 합참의장, 전두환 보안사령관, 해군 및 공군참모총장과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정호용 특전사령관, 노태우 수경사령관을 육본으로 초청해 오찬 회동을 가졌다.[37]
오전 9시 청와대에서는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국무총리, 최광수 비서실장의 조찬 회동에서 계엄 확대 선포에 따른 대통령의 특별 성명 발표 문제를 논의해 국방부에 필요한 자료를 요청했다. 이에 보안사에서 자료를 마련해오자, 최규하 대통령은 오후 4시 40분 "일부 정치인, 학생, 근로자들의 무책임한 경거망동 등으로 국가가 중대한 위기에 직면해있어 국가 보위와 국민의 생존권 수호를 위하여 일대 단안을 내리지 않을 수 없어 관계법 규정에 따라 지역계엄을 전국 비상계엄으로 전환 선포하고, 국가 기강과 사회 안정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였으며, 누차 천명한 정치 발전은 착실히 추진해 나갈 것이다"라는 내용의 5·17조치 관련 특별 성명을 발표했다.
이러한 조치는 대한민국 헌법에 규정된 국회 통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계엄군을 동원,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한 채 취해진 불법 조치였다. 비상계엄의 확대에 따라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여단이 17일 밤 10시경 광주에 투입돼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 광주교육대학교 등에 진주했다.
1.4.1. 정치인과 재야 인사의 체포·연금[편집]
1980. 5월 초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은 학원 소요사태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정치인과 재야 인사, 복학생 및 재학생 대표들을 검거하여야 한다는 이유로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 겸 합동수사본부 합동수사단장에게 그들에 대한 조치 방안을 검토하도록 지시하면서, 국민들 사이에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여론도 좋지 않으니 그들에 대한 조치 방안도 아울러 검토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학봉 합동수사단장은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으로부터 관련자료를 협조받아, 5.13. 검거 대상을 학생시위 배후조종자에 대해서는 국기문란자로, 부정·부패 행위자에 대해서는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분류하기로 하고, 이를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보고한 다음 권정달 정보처장과 함께 대상자 선정작업을 마무리하여, 이른바 국기문란자와 권력형 부정축재자의 선정 기준, 명단, 혐의 내용 등을 정리한 보고서를 작성, 5.15.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최종 보고하였다.
80. 5.17. 오전 합동수사본부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소요 배후조종 및 권력형 부정 축재 험의로 김대중, 김동길,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김치열 등 주요 인사를 체포·조사하겠다는 보고를하였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동일 10:00경 청와대에서 최규하대통령에게 정치인 둥의 체포·조사계획을 보고하였다.
이학봉 합동수사단장은 11:00경 보안사로 중앙정보부, 경찰 등 합동수사단 관계자들을 소집, 조치 배경을 설명하고, 중앙정보부 수사국은 소요 배후조종자 중 국민연합 관련자들을, 보안사 대공처는 권력형 부정축재자들을, 경찰은 소요 관련 복학생과 재학생 대표들을 각각 검거·수사하도록 조치하면서, 대상자 검거 시각은 5.17. 22:00로 하되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가지고 시행하도록 하는 한편, 전국 각 지역 보안부대에도 검거대상자 명단을 보내 일제 검거를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5.17. 18:00경 이화여대에서 회의중이던 전국 대학총학생회장들을 검거하기 위하여 치안본부와 서울시경 수사관들이 출동하였으나 검거 소식이 사전에 노출되어 대부분이 도주하고 10여명만을 검거하였고,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은 수경사 헌병들에 의하여 23:00경 자택에서, 복학생 정동년은 24:00경 광주지역 합동수사단 수사관들에 의하여 광주 소재 자택에서, 김종필 공화당 총재는 23:00경 보안사 수사관들에 의하여 자택에서, 김상현 의원은 5.18. 04:00경 제주도 친지 집에서 각각 체포되었다.
80. 5.18. 12:00 계엄사는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로 김종필 공화당총재·이후락·박종규·김진만 의원·김치열 전 내무부장관·오원철 전 청와대경제제2수석비서관·김종락 코리아타코마 사장·장동운 전 원호처장·이세호 전 육군참모총장 등을, 사회흔란 조성 및 학생·노조 소요관련 배후조종자로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예춘호 의원·문익환 목사·김동길 연세대 부총장·인명진 목사· 고은(시인)·리영희 한양대 교수 등 모두 26명을 연행 조사중이라고 발표하였다.
비상계엄 확대와 병행하여 실시한 이른바 예비검속 과정에서 총 2,699명이 검거되어, 2,144명이 훈방되고 404명이 공소제기되었는데, 그 중 소요 배후조종 험의로 연행된 김대중, 문익환, 김상현, 예춘호, 이해찬, 한승헌, 한완상, 인명진, 고은태, 이신범 등 24명은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관련자로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80. 5.18. 오후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정무회의를 주재하여 연행자석방, 계엄군 철수 둥을 요구하였고, 5.20. 09:00 상도동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하려 하자 동일 07:20경 상도동 자택에 수경사 헌병단 병력 31명이 출동하여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였으며, 김영삼 총재가 이미 집안에 들어와 있던 기자들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강행하자 외부인의 김영삼 총재 자택 출입과 김영삼 총재의 외부 출입을 금지하여 이른바 가택연금 조치를 취하였다.
1.4.2. 국회 점거·봉쇄[편집]
신민당의 계속된 요구에도 불구하고 시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국회 소집에 소극적이던 공화당의 태도 변화에 따라 1980.5.12.여야 총무는 계엄 해제 등 정치 현안을 다루기 위한 임시국회 소집에 합의하였고, 5.17. 민관식 국회의장대리는 김용호, 이해원, 황낙주(黃珞周) 의원 둥 의원 186명의 요구에 따라 5.20. 10:00 제104회 임시국회 소집을 공고하였다.
5.17. 20:00경 육본 지시에 따라 수도군단은 예하 33사단에 101연대 1대대를 100훈련단 작전 통제하에 국가 보안목표인 국회의사당, 한국방송공사에 투입할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하달하였고,비상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됨에 따라 5.18. 00:20 1대대 2, 3중대에 한국방송공사와 국회의사당에 출동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어 01:45 33사단 101연대 1대대 3중대 소속 장교 3명, 사병95명은 연대 본부로부터 경장갑차 8대, 사단 전차중대로부터 전차 4대를 지원받아 국회의사당에 진주하였다.
5.18 03:15 계엄사로부터 모든 정치활동을 중지하고 정치 목적의 옥내외 집회를 금지하는 내용의 계엄포고 제10호가 33사단에 접수되었고, 군병력의 국회 진입 소식을 듣고 나온 길기상 국회 사무차장에게 이상신 1대대장은 누구도 출입시키지 말라는 상부의명령이 있었다고 하였으나, 길기상 사무차장의 요청에 따라 민관식 국회의장대리와 국회 직원은 출입을 허용하였다.
5.20. 09:00경 5·17조치를 비난하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상도동 기자회견에 참석하였던 황낙주, 손주항 의원과 의원비서관, 보도진 등 3백여명이 10:15경 국회 정문에 도착, 국회의사당으로 들어가려 하자, 이상신 1대대장은 100훈련단을 통해 수도군단, 육본에 상황을 순차 보고한 다음 출입 통제지침에 따라 국회의원 등의 국회 출입을 저지하였고, 민관식 국회의장대리는 대대장의 요청을 받고 이들에게 해산을 종용하였으며, 그 무렵 국회 상황을 보고받은 수도군단은 9공수여단 병력을 국회에 추가 투입하려 하였으나 상황 종료로 취소하였고, 17:00경 박노영(朴魯營) 수도군단장은 육본으로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방문, 국회 상황에대하여 지휘 보고를 하였다.
이후 제104회 임시국회는 개회되지도 못한 채 6.18. 자동 폐회되었다.
1.5. 광주지역 이외에서 보인 움직임[편집]
대구에서는 계명대학교와 경북대학교, 영남대학교를 중심으로 교내 민주화를 위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 결과 전경들이 투입되어 223명의 시민이 체포되었다.
1.6. 광주에서 보인 움직임[편집]
"제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이올시다. 이 우레와 같은 박수와 여러분의 함성이 전 국토와 민족에게 다 들릴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외쳐봅시다. 우리가 민족민주화 횃불대행진을 하는 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고, 이 횃불과 같은 열기를 우리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우리 민족의 함성을 수습하여 남북통일을 이룩하자는 뜻이며, 꺼지지 않는 횃불처럼 우리 민족의 열정을 온 누리에 밝히자는 뜻입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 광주시민, 아니, 전남도민, 아니, 우리 민족 모두가 이 횃불을 온 누리에 밝히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1980년 5월 16일 민족민주화대성회에서 박관현의 연설
서울의 봄은 광주에서도 민주화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전국 대학들의 흐름에 따라 광주 일원의 대학들에서는 학생자치조직이 재건되었으며, 운동권 조직도 보강을 거쳤다. 그 중심에 있던 것이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였다. 먼저 전남대학교는 전남 운동권의 핵심으로서 반유신 활동을 하다가 제적 및 투옥된 학생과 교수가 많았다. 이들이 돌아오면서 다시금 학교 내 민주화운동이 활발해졌고 1980년 3월 직선제를 통해 총학생회가 부활하였다. 전남대학교 법대 3학년생인 박관현이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대학의 소리」라는 홍보물도 만들어졌다. 조선대학교에서는 복적생과 재학생이 학교의 고질적 문제였던 사학재단 비리를 척결하고자 학원자율화를 위한 운동을 재개했다. 학교가 이를 탄압하자 학생들은 '조선대 민주화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대항하였다. 이외에도 광주교육대학교, 성인경상전문대학교, 동신전문대학교, 조선대학교병설공업전문대학교 등에서도 총학생회 부활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런 학생들의 활동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이들의 역량은 그 이전부터 이어져 오고 있었던 반유신운동과 사회운동, 그리고 문화예술운동 조직들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었다. 대표적인 조직이 녹두서점[38] 으로 각 대학의 운동권들을 연결해주는 접선책 역할을 해주었다. 또 김남주, 윤한봉 등이 운영하던 '현대문화연구소'는 운동권의 중요한 싱크탱크 중 하나였다. YMCA, YWCA, 가톨릭농민회 등의 기독교 단체들은 교인들을 중심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하며 학생들을 지원했고, 70년대에 조직된 문화예술단체들과 청년단체들도 힘을 보태었다. 야학도 중요한 사회운동으로서 학생들이 노동자를 가르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여러 야학 중에서도 들불야학[39] 이 가장 유명했다. 이렇게 광주 내에 있었던 다양한 사회운동 조직들은 학생운동과의 연계를 통해서 시민들과의 접촉을 넓혀갔고, 이는 향후 5.18에 있어서 적잖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1.6.1. 1980년 5월 14일 광주[편집]
시간이 흘러 1980년 5월이 되자 민주화에 대한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서울지역에서는 이미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가 이어졌고, 서울역 시위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그 소식을 들은 광주 지역의 대학생들은 5월 14일부터 민족민주화대성회라는 이름으로 시위를 시작했다. 이날 오전 10시경 전남대 운동장에서 6,0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단과대학별로 집회를 가졌고, 오후 1시부터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광주 시내로 나가 시위를 전개했다. 학생들은 이동하면서 구호를 외치거나 선전물을 뿌리면서 시민들의 참여를 호소하고, 최규하 정부와 전두환, 신현확 등을 규탄하였다. 오후 3시가 되자 시위대열은 전남도청 앞 광장에 도착했고 학생과 시민들을 포함하여 2만여 명의 인파가 광장을 가득 채워 주변 교통이 마비되었다.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분수대에 올라가 사회를 맡았고, 전남대 총학생회는 15개 조항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집회는 다음 날의 시위를 예고하는 박관현의 연설을 마지막으로 오후 6시 30분 즈음에 끝났다.
80. 5.14 10시 45분 장형태 전남도지사는 도지사실에서 31사단장, 경찰국장, 전남대 및 조선대 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학원사태 대책회의를, 14시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정 웅 31사단장, 신우식 7공수여단장을 불러 학생 가두시위대책 합동작전회의를 각각 열고 시위 대책을 협의하였다.
5월 14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소요사태 진압부대 투입 준비 명령에 따라 진종채 2군사령관은 전북 금마소재 7공수여단에 전북대·충남대·전남대·조선대에 각 1개 대대씩 출동시킬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하달하였고, 정 웅 31사단장은 동일 19시 예하 96연대 1대대 소속 병력을 광주 소재 MBC·CBS·KBS·전일방송 등에 배치하는 한편, 5월 15일 정 웅 31사단장은 7공수여단 2개 대대 숙영시설(宿營施設)로 전남대·조선대 교정에 천막 24개동을 가설하였으며, 506 항공대대로부터 31사단에 지휘용 500MD 헬기 1대가 지원되었다.
민족민주화성회를 위한 취지문
민족민주화성회 소개문
제1시국선언문(5/8)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5/9)
시국선언(5/13) - 전남대학교 교수협의회
민주화 선언문 - 전남대학교 상대
제2시국선언문
결전에 임하는 우리의 결의
1.6.2. 1980년 5월 15일 광주[편집]
15일 오후 1시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어제의 시위를 재개하기 위해 도서관 앞 광장에 모였다. 10,000여 명의 시위대는 곧 대학교를 나가 도청으로 출발하였다. 이번에는 조선대학교와 광주교육대학교 학생들과 각 대학 교수들도 시위대열에 동참했다. 3개 대학의 학생들은 도청으로 행진하는 도중 서로 만나 합류했고 오후 3시 경 도청 앞 분수대에 집결하였다. 학생들은 각 대학별로 시국선언문을 발표했고, 계엄령 해제와 민주화 등을 요구했다. 일부 학생과 시민들은 분수대에 올라와 즉석에서 연설을 하며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내비쳤다. 집회가 끝나기 직전에 다다르자 박관현은 다음 날 "민주화의 횃불을 밝히겠다"면서 횃불시위를 예고하였다. 집회 이후 학생들은 자신들의 모교로 귀환했는데, 그 대열 맨 앞에서는 각 대학 6명의 대표가 대형 태극기를 들고 행진했다. 그 뒤에 50여 명의 교수들이 있었고, 교수진 뒤에는 학생과 시민들이 따라가며 행진하였다. 경찰은 이들을 제압하려 하지 않고 질서 유지를 당부하며 시위 행렬을 자유롭게 놔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민들은 점차 시위대에 호응해주는 경향을 보였다.
1.6.3. 1980년 5월 16일 광주[편집]
16일은 민족민주대성회의 절정에 달한 날이었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된 집회에는 광주 내 9개 대학에서 온 30,000여 명의 학생이 집결해 있었다. 특히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교수들과 함께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가두시위를 벌이면서 도청으로 들어왔다. 오후 3시 30분이 되자 학생과 시민 50,000여 명이 전남도청 앞 광장은 물론이고 금남로까지 채운 상태에서 박관현이 개회 연설로 집회를 시작했다. 이 날에는 복학생 정동년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고, 각 대학의 대표는 물론이고 고등학생 대표까지 분수대에 올라와 선언문을 발표하고 연설했다. 일반 시민들도 여기에 호응하여자신들도 분수대에 올라가 하고 싶은 말을 하였으며, 한 학생은 스스로를 '민주시민'이라 지칭하곤 자신이 직접 지은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국군장병에게 보내는 메시지
전남대학교 언론자유 투쟁위원회의 성명
집회가 점점 끝나가고 저녁이 오면서 학생들은 전날 예고한 횃불시위를 준비했다. 박관현은 일장 연설을 하며 횃불시위의 의의를 설명하고 그 필요성을 호소하였다. 총학생회에서는 준비한 400여 개의 횃불을 지급하였고, 학생들은 보다 효율적인 시위를 위하여 여러 개의 조를 편성하여 역할을 나누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횃불시위대는 두 갈래로 흩어져 오후 8시부터 광주 시내를 행진하였다. 한 팀은 도청 광장→노동청→광주MBC→광주고등학교→무등산장→산수오거리→법원→동명로로 이동했다가 다시 도청으로 돌아왔고, 또 다른 팀은 금남로→유동삼거리→광주천을 통하여 다시 금남로를 통해 도청으로 복귀했다. 횃불시위대는 행진하면서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부르면서 흥을 돋웠다. 이 시위는 우려와 다르게 경찰과의 충돌은 없었는데, 그 이유는 박관현이 당시 경찰국장 안병하와 사전합의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경찰들은 비록 시위 진압을 위한 장비와 복장을 전부 갖춘 상태였지만 줄곧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집회는 아무런 충돌 없이 진행되어 오후 10시 경 모든 횃불시위대원이 도청 앞 광장에 모였다.
행진이 종료되자 마지막 순서로 학생들은 '5.16 쿠데타 화형식'을 시행했다. 분수대에는 박정희와 전두환의 허수아비가 내걸렸고 곧 횃불에 의해 불태워졌다. 시위군중은 박수를 쳤고 박관현은 그 가운데서 마지막 연설을 했다. 그는 3일 간의 집회 기간 동안 수고한 학생, 시민, 경찰에게 감사함을 표했고, 대한민국의 민주화가 조속히 이루어져야 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만약 정부가 민주화 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다시금 학생들은 거리에 나와 투쟁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연설을 끝으로 3일 간의 민족민주화대성회는 막을 내렸다. 집회가 완전히 끝난 후 학생들은 모여 향후 계획을 논의하였다. 여기서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회측은 만일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학교에서 만나자는 행동지침을 내렸다.[40] 학생들은 귀가하면서 집회 때 사용했던 물품들을 정리하고 쓰레기들을 청소하였고, 다음 날 새벽에도 청소를 이어갔다.
남도의 하늘을 아름다웠다 / (중략) / 페퍼포그가 멈추고 / 최루탄이 사라지던 날 / 무진벌의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 지식인이면 어떠냐 / 노동자면 어떠냐 / 농민이면 어떠냐 / 우리는 민주시민이다 // 가까이 가면 벌 받는다고 무서워하던 / 도청 앞 분수대 / 가만히 만져보고 / 부둥켜 안아보고 / 그대와 나 마주보고 웃는 모양 얼마나 좋으냐 // 어느 세상 이보다 아름다운 노래 있으리 / 모두가 한 입 되어 외쳐 부르는 민주의 노래 / 서기 천구백팔십년 오월 십육일 / 우리는 여기 도청 앞 광장을 민주의 광장이라 명명했다 // 그리고 영원한 민주의 행진을 위해 횃불을 들었다 / (후략)
5월 16일 집회에서 낭송된 시 「민주의 나라」 일부
2. 광주의 저항과 신군부의 폭압적 시위진압[편집]
2.1. 1980년 5월 17일 광주[편집]
5월 17일 10시 40분 2군사령부는 광주 소재 8개 전문대학에 31사단병력을 투입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16시 7공수여단 33, 35대대를 31사단에서 작전통제 하도록 지시하였고, 19시 40분 전교사(전투교육사령부)에 5월 18일 00시 01분부로 충정작전이 유효하며 대학점령은 5월 18일 04시 이전까지, 불순분자 체포는 5월 18일 00시 01분 이전까지 완료하라는 지시를 하달하고, 20시경 7공수여단에 5월 17일 20시 01분부로 2군사령관 작전통제 아래 전남대 조선대 등을 5월 18일 02시까지 점령하고 04시 01분까지 소요 주모자를 전원 체포하라는 지시를 하달하였다.
이날 사건의 조짐은 전남대 총학생회에 "서울에 있는 각 대학 학생회장단이 모두 계엄당국에 연행되었다"는 한 여학생의 다급한 전화에서 비롯되었다. 5월 17일 저녁 박관현, 윤한봉 등을 비롯한 총학생회장단은 계엄군에 의해 전국적인 체포령이 내려졌다고 판단해 무등산장으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비상계엄 확대소식을 확실하게 접한 일행은 각자 나름대로 광주를 빠져나갔다.
이후 밤 23시에 경찰과 보안사 요원들은 시위주동자에 대한 이른바 '예비검속'을 실시하여 재야인사와 학생회 간부 등 연행대상자 22명 중 정동년, 권창수, 오진수, 이승룡, 유재도 등 8명을 체포했다.[41]
이를 모면한 인사들은 광주 외곽이나 지하로 숨었으나, 총학생회가 피신하면서 비상 대중 동원 능력이 상실되어 버렸다. 이 상태로 23시 40분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두 시간 뒤, 전남대와 조선대에 특전사 7공수여단 장교 68명과 사병 680명이 M16 소총을 지닌 채 투입되어,[42] 이틀 전 횃불 시위를 마친 뒤 정부의 반응을 신중히 살피던 학생들이 군인들에게 구타를 당해 대다수 학생들은 학교 본부 건물에 감금되었고, 운 좋게 체포를 면한 몇몇 학생들은 강의실 옥상이나 화장실로 기어올라 파이프를 타고 내려와 화를 입지 않았다. 이 습격으로 전남대학교에서 69명, 조선대학교에서 43명이 연행되었다. 그렇게 계엄군은 두 학교를 완전히 점령했다.[43]
2.2. 5월 18일: 타오르는 저항과 잔인한 진압[편집]
천주님! 드디어 큰일은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오늘 아침 0시를 기하여 정부는 비상계엄을 해제하기는커녕 비상계엄을 더욱 강화한다는 발표를 하였습니다. 천주님! 이 무슨 청천벽력입니까? (중략) ...정권을 장악하겠다고 전국에 '비상계엄 강화'라는 날벼락을 떨어뜨렸습니다... 우리 광주에 전두환의 심복 부하들인 공수부대 특전단을 파견하여 우리 광주 시민들과 학생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을 몽둥이와 칼로 때리고 찌르면서 진압에 나섰습니다.
주이택 일기[44]
- 1980년 5월 18일자
다음 날인 18일 아침 10시,[45] 전남대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진 와중에도 1백여 명에 이르는 학생들이 전남대학교 교문 앞으로 모여들었다.[46][47] "정부 조치로 휴교령이 내려졌으니 가정학습하길 바란다"라고 쓰여진 공고문이 나붙은 교문 앞에 11명의 무장 공수부대원들이 서 있었다. 곧 학생들은 교문 근처의 용봉교(龍鳳橋)[48] 라는 다리를 사이에 두고 군인들과 대치하였다. 이후 학생의 수가 2 ~ 3백여 명으로 늘고 항의하는 학생들이 늘어나자 장교 하나가 나와 학생 한 명을 붙잡아 마구 구타했다. 이를 본 학생들은 이 구타 행위를 비난하면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계엄군 물러가라", "휴교령 철폐하라" 등지의 구호를 외치며 돌을 던지는[49][50] 등의 시위를 하고 이에 부상당한 공수부대원들이 분개하여 학생들을 향해 함성을 지르며 돌진하여 해산을 시도한다. 공수부대원들은 도주하는 학생들을 쫓아가 진압봉으로 어깨, 머리 등을 가격하고 체포한 학생들을 난폭하게 연행하였으며[51] , 심지어는 신분을 밝힌 전남대 교수에게도 사정없이 곤봉을 휘둘렀고, 근처를 지나던 시내버스에서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에 항의하던 학생들도 무자비하게 폭행당했다.[52] 재연 영상
계엄군에게 막혀버린 학생들은 "이 일들을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면서 광주 시내로 향했다. 학생들은 비상계엄 해제, 김대중 석방, 휴교령 철회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여럿씩 짝을 지어 행진했다. 광주역에서 재집결한 학생들은 공용터미널을 지나서 전남도청이 있던 금남로로 향했다. 전투경찰을 피하면서 학생 시위대는 여러 갈래로 나뉘었고, 이동하면서 합류하는 인원으로 인해 그 수가 불어났다. 11시 25분 경 충장로 파출소에 군중들이 돌을 던져 유리창이 부서졌고, 11시 30분이 넘어서는 금남로 가톨릭센터[53] 앞에서 학생 1,000여 명이 연좌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금남로에서 벌이는 시위를 전투경찰들은 저번의 진압방식과는 다르게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그러자 학생들은 금남로에서 차츰 밀려났고 주변의 시위대를 규합하며 돌아다녔지만[54] 경찰의 계속된 진압으로 분산되고 말았다.[55] 하지만 오후 2시가 되어 다시금 학생들이 모여들더니 오후 3시 경 수백여 명의 대오가 되어 시위에 나섰다. 시위대는 충장로 학생회관 부근의 전투경찰들에 맞서고 페퍼포그 차량을 불태우는 등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 전개했다. 하지만 계엄군이 투입될 정도로 위력적인 시위는 아니었고 그 이전의 통상적인 시위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젊은이가 북동우체국 옆 마지막 골목집으로 뛰어들어 안방 장롱 속으로 숨었다. 공수부대원이 뒤쫓아와 집에 있던 할머니에게 "금방 도망 온 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할머니가 "모른다"고 대답하자 "이 XXX이 거짓말을 해"라면서 할머니를 진압봉으로 두들겨 패 실신시킨 다음 집안과 방안을 뒤져 장롱 속의 젊은이를 찾아내 무참하게 두들겨 패고 짓밟은 다음 끌고 갔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초판)>, 황석영, 1985, p50 (김영택의 <5월 18일, 광주>에서 인용된 자료)
광주농아협회 관리부장이었던 김경철씨는 서울에서 내려 온 처남을 바래다 주기 위해 5월 18일 오전에 터미널로 나갔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금남로 지하상가 근처에서 공수부대에게 붙들려 전신을 짓이기는 구타를 당하고 사망했다. 공수부대가 처음으로 시내에 투입된 시간이었다... 그는 공수부대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어서 구타를 당했고 그들의 지시와 요구에 대답할 수 없어 구타를 당했으며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수 없어 구타를 당해 사망했다. 처절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벙어리에 귀머거리인 김경철씨가 계엄령 철폐를 요구할 수도 없고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 한마디 외칠 수 없었다는 사실만으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의 학살이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 일이다.
<광주민중항쟁비망록 : 망월동 묘비명>, 5.18광주민중항쟁유족회, 남풍, 1988, p235
한편 5월 18일 09시부터 전남대 앞 충돌 상황 등 광주상황을 보고받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대응 병력이 2개 대대 600여명에 불과하여 추가 병력 투입의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에게 1개 공수여단의 투입을 지시하고,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은 14시경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지정에 따라 11공수여단을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15시 11공수여단을 수경사 작전통제로부터 해제함과 동시에, 11공수여단에 광주로 이동하여 2군사령부 작전통제하에 소요 사태를 진압하라는 작전명령을 시달하였다.
5월 18일 10시경 진종채 2군사령관은 광주지역에서만 전남대 앞에서 계엄군과 학생들 간 충돌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현지 확인 및 작전 지도 차 광주를 방문하였고,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14시경 이희성 계엄사령관으로부터 다른 지역에는 시위가 없는데, 광주에만 시위가 있으니 빨리 진압하라는 지시를 받고 정웅 31사단장은 500MD 헬기를 타고 전남대와 조선대로 가서, 7공수여단 33·35대대장에게 경찰이 수세에 몰려 있다면서 16시에 병력을 투입하여 시위를 진압하되, 도청 앞은 경찰이 차단하고 있으니 35대대는 금남로를 중심으로 좌우측 도로를 차단하고 33대대는 금남로에서 도청 방면으로 압축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킬 것을 명령하였다.
15시 30분경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11공수여단이 주둔하고 있는 동국대학교로 가 최 웅 11공수여단장에게 광주에 7여단 2개 대대가 계엄군으로 나가 있으나 고전을 하고 있다면서, 광주에 가서 7여단을 도와 임무수행을 잘 하라고 지시하고 최 웅 11공수여단장은 즉시 여단 작전참모와 61대대 1지역대 병력을 선발대로 하여 16시 30분경 성남비행장을 출발하였고, 61대대 잔류 병력과 62·63대대는 17시 청량리역에서 열차편으로 광주로 출발하였다.
한편, 2군사령관-전남북계엄분소-31사단의 지휘계통을 따라 정웅 31사단장은 '작전명령 제1호'를 선포하여 공수부대원들에게 시내로 투입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제7공수특전여단 33대대(지휘:권승만 중령)와 35대대(지휘:김일옥 중령)가 3시 40분 출동하여 유동 삼거리에 출연했다. 거리에 나타난 공수부대는 일렬로 서 있었고, 같이 온 차량의 스피커는 4시에 시민들의 귀가를 종용하는 방송을 하였다. 헌데 그 방송이 나온지 1분도 되지 않아서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 전원 체포하라"는 충격적인 명령이 하달됐다.[56][57] 그러자 도열해 있던 계엄군이 튀어나와 금남로와 충장로를 중심으로 남녀노소 구분없이 눈에 보이는 시민들을 모조리 구타하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군용차량에서도 군인들이 쏟아져나와 시민들을 공격했다.
공수부대원들은 M16 소총을 등 뒤에 메고, 손에는 진압봉을 든 상태에서 진압대형을 유지하여 도청 방향으로 진군, 시위대를 압축해 나가다가, 돌격 명령이 내리면 함성을 지르며 시위대를 향하여 돌진하면서 진압봉으로 시위대를 타격하는 방법으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는데, 군인들은 시위 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와 무관했던 일반 시민들까지 진압봉으로 무차별하게 구타하였고, 3∼4명이 한 조가 되어 시위현장의 주변 건물까지 샅샅이 뒤지며 진압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과정에서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와 시민들을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군홧발로 밟기도 하고, 대검으로 찌르고 도주를 방지한다는 이유로 체포된 시위대의 상의나 하의, 혁대를 벗기거나 머리를 땅에 처박게 하는 등 기합을 주기도 하였다.
조선대를 출발한 제7공수특전여단 35대대는 16시경 광주전화국 부근과 광주일고 부근 천교에 도착, 시위진압 작전에 들어갔는데, 35대대장은 돌을 던지며 경찰과 대치하고 있던 1,000여명의 시위대에 자진 귀가하라는 선무 방송을 하였으나 시위대가 계속 돌을 던지고 구호를 외치며 해산하지 아니하자, 대대원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이에 공수부대원들은 M16 소총을 대각선으로 등 뒤에 메고, 방독면을 차고, 방석망은 내린 채 시위대를 향해 돌격하면서 진압봉으로 시위대를 가격하여 해산을 시도하였고, 35대대의 시위 진압은 시위대를 추적, 체포하는 과정에서 부근 공용터미널 일대에까지 확대되었다. 이런 진압작전으로 1시간 만에 광주 시내의 시위는 말그대로 "분쇄"되었다.
17시 50분에는 광주공항에 도착한 제11공수특전여단 선발대인 61대대 1지역대는 숙영지인 조선대로 이동하면서 시내 상가지역에서 위력시위를 하였고, 18시 11공수여단 3개 대대를 5월 19일 00시부로 31사단장이 작전통제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시민들은 이런 진압작전에 놀라 골목이나 건물 안으로 달아났다. 그러자 계엄군들은 자신들이 쫓는 사람들이 잡힐 때까지 악착같이 쫓아와 잡아갔다. 거리는 공포의 도가니로 변했고, 사람들은 공포에 질렸다. 공수부대원들은 체육대회가 열리고 있던 광주제일고등학교에 난입하여 운동장과 교실을 뒤지며 사람들을 구타하고 연행해갔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말리는 노인들은 물론이고 여관에서 머무르고 있던 외지인과 신혼부부, 경찰 간부까지도 때리고 끌고 갔다. 군인들은 그렇게 연행한 사람들을 끌고 가면서까지 폭행했고, 이들을 군용트럭에 실으면서도 구타와 욕설을 그치지 않았다.
이날 시위대는 모두 273명이 체포되어 31사단 헌병대에 인계되었으며, 시위 진압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김경철(남·28세·제화공,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최초 사망자)은 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으로 5월 19일 03시 사망하였고[58] , 이종남(남·27세) 등 광주 시민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시위대가 계엄군에게 맞서는 일도 발생했다.[59] 오후 6시 경 계림동 부근에서는 수백여 명의 시위대가 소규모 공수부대와 충돌했다. 아까 전의 유혈진압을 봐서인지 시위대는 칼, 각목, 파이프 등을 들고 계엄군과 맞섰다. 시위대의 반격에 공수부대는 산수동까지 밀려났지만 곧 증원부대와 합류하여 시위대를 재차 공격했다. 시위대는 군인들을 피해 골목가로 대피했고, 계엄군은 밤늦게까지 산수동과 풍향동 일대를 이 잡듯 뒤지며 젊은이란 젊은이는 모조리 수색하여 끌고 갔다. 그 사이 전남북계엄분소는 '계엄분소 공고 제4호'를 발표하여 통행금지 시각을 저녁 12시에서 저녁 9시로 변경했다. 7시 경에는 시위가 진압되었다는 보고가 정웅 31사단장에게 올라갔다. 하지만 시위는 계속 되어 계엄군과 시위대의 충돌이 산발적으로 이어지다가 저녁 11시 경 잦아들었다. 이 날 공식적으로 보고된 연행자만 405명이었다. 그런데도 이 모든 끔찍한 상황을 저녁 방송에서는 하나도 보도하지 않았다.
정 웅 31사단장은 5월 18일 저녁 21시 31사단 상황실에서 작전평가회의를 열고, 7공수여단 33, 35대대 병력을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주요 시설 및 교차로 등 거점에 배치, 시위대가 집결을 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여, 22시 30분 - 23시 20분 사이에 경찰 지, 파출소와 도로 교차지점을 중심으로 33대대는 17개 거점에, 35대대는 19개 거점에 각각 장교 1명, 사병 10명으로 구성된 공수부대 1개 지대와 경찰 2개 분대 24명씩을 배치하였으나, 11공수여단의 추가 투입에 따라 23시 40분 다시 작전회의를 열어 33, 35대대 배치 거점을 11공수여단에 인계하고 33대대는 전남대로, 35대대는 조선대로 각 복귀하였다.
2.3. 5월 19일: 수세에서 공세로의 전환[편집]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 명의로 뿌려진 「호소문」
5월 18일의 잔혹한 진압으로 시위가 진압됨으로서 19일 아침의 광주는 겉으로는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평일이었기에 회사와 관공서는 문을 열었고, 초, 중, 고교에서도 정상 수업이 이뤄졌다. 하지만 전날의 충격과 분노는 시민들의 마음을 들끓게 하고 있었다. 오전 9시부터 시민들이 금남로로 속속 모이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가 되어 3,000 ~ 4,000여 명이 군중이 집결하여 경찰, 군인과 대치했다. 시위대에는 학생도 있었지만 일반 시민들의 비중이 눈에 띄게 늘었다. 전날의 계엄군의 폭력에 대한 소식이 시민들에게 전해지면서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에 가세하게 된 것이다. 경찰과 군인들이 최루탄을 쏘면서 제압하려 들자 사람들은 합심하여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맞섰다. 시위군중은 가톨릭센터를 중심으로 관광호텔과 광주은행 앞을 거쳐 전남도청 방면으로 진출하려 애썼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구호가 외쳐졌고, 「애국가」, 「정의가」같은 노래가 불려졌다. 대형 화분, 보도블록, 공중전화 박스, 교통 철책 등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기도 했다.
그러자 공수부대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아니면 그보다 더 잔인하게 진압작전을 실시했다. 19일 도착한 제11공수여단[60] 61~63대대는 시내에서 시위 군중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했다. 시민들은 군인들을 피해서 주변 상가, 건물, 골목으로 숨어들어 갔지만 군인들은 3~4명씩 무리를 지어다니며 끝까지 추격에 나섰다. 잡힌 사람한테 곤봉과 총검을 휘둘러 피투성이로 만들었으며, 옷을 벗겨서 팬티만 남긴 채로 끌고가기가 부지기수였다. 진압이 계속 될수록 계엄군의 진압은 점점 도를 넘어서서 연행한 사람들에게 거리 한복판에서 기합을 주거나 여관을 습격해 직원은 물론이고 투숙객까지 잡아갔고, 자신들의 소행이 눈에 띌 것을 염려해 주변 건물들을 향해 "문을 닫고 커튼을 쳐라. 내려다보면 쏴버리겠다"는 협박도 서슴치 않았다.[61] 또 구경을 하거나 자신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건물 안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예외 없이 쫓아가 폭력을 행사했다.[62] 이렇게 되니 경찰 간부조차도 "제발 집으로 돌아가라. 공수부대에게 걸리면 다 죽는다"고 울먹거릴 정도였다.
점심 때가 되어서는 시위는 거의 해산되고 거리는 다시 침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금남로와 충장로는 어제처럼 다시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고, 상가, 회사, 관공서들은 일제히 문을 닫고 직원들을 내보냈다. 그러나 강경한 진압은 오히려 시위에 참가하는 시민들의 수를 더욱 늘어나게 했다. 12시부터는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할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고, 공수부대가 점심식사를 위해 철수한 오후 1시 30분부터는 수많은 군중이 거리를 가득 채웠다. 젊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중년와 노년, 부녀자, 노동자들도 쉽게 눈에 띄었다. 시위군중은 오전에 비해서 더욱 대담하고 과격하게 투쟁했다. 경찰들이 최루탄을 쏘며 진압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고, 시민들은 돌멩이와 화염병을 던지며 덤볐다. 가톨릭센터 앞에서는 기독교방송 취재차량이 불에 타는 채로 경찰 저지선을 향해 다가갔고, 근처 공사장의 기름통도 불에 타는 채로 경찰 저지선에 부딪혀 굉음과 함께 불길을 뿜어냈다. 시민들은 가톨릭센터 옥상에 군인들이 있음을 알아내고 이들을 공격하기도 했다.[63] 한편, 하늘 위로 헬기가 나다니며 해산을 종용하는 방송을 하자 분노한 시민들이 헬기를 향해 울분을 토해내기도 했다.
진압작전은 계엄군이 식사를 마친 오후 2시 30분~3시 사이에 시작되었다. 진압에 투입된 제11공수여단 61, 62, 63대대와 제7공수여단 35대대는 금남로에서 바둑판식 분할점령[64] 방식으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들은 다이아몬드형으로 진압 대형을 짜고 금남로를 향해 진격하면서 보이는 족족 시민들을 때려잡았다. M60 기관총을 장착한 장갑차가 시위대를 향해 돌진했고, 시민들은 급히 대피했으나 미처 피하지 못하고 가톨릭센터 내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계엄군에 의해 잔인한 폭행을 당했다. 3시 40분부터는 예비병력으로 남아 있던 제7공수여단 33대대까지 투입되어 다른 병력들과 함께 거리마다 무리한 진압작전을 진행했다. 1시간 즈음 지나자 금남로의 시위는 잦아드는 듯 보였다.
시위대를 뒤쫓던 공수대원이 복개상가 2층으로 청년 한 명을 쫓아 악착같이 따라 올라갔다. 그 광경을 보고 시민들이 다시 공수대원의 뒤를 쫓아 올라갔고, 시민들에게 역으로 완전히 포위된 공수대원이 겨우 빠져나갔다. ...공수대원 한 무리가 노점상 아주머니의 과일 그릇이 그들의 진로를 방해하자 아주머니의 아랫배를 군홧발로 내질렀다... 공수대원은 노인을 곤봉으로 후려갈겼다. "네놈들 때문에 다 잡은 놈들을 놓쳤다!"면서 고함을 질렀다...이런 모습을 도망치며 바라보던 시위 군중이 갑자기 일거에 돌아섰다. "좋다. 우리 모두 다 죽여라!" 하면서 공수부대의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전혀 예상치 않은 반응이었다. 갑자기 시위대가 거세게 반격해오자 추격하던 공수대원 7~8명이 기겁을 하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한 명이 낙오되었다. 시민들이 뒤쫓자 그는 광주천을 따라 도망치다 다급해지니 다리 밑으로 뛰어내렸다. 시민들이 그를 향해 돌을 던졌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전면개정판),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창비, 2017, p109~111
3.15 마산의거 당시를 100분위의 지진계로 말한다면 40도다. 사북사태는 45도이며, 부마사태는 60도 선이다. 그러나 지금 광주는 그 지진계의 바늘이 100도를 때려 부러진 상태다.
하지만 전과는 달리 시위대는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시민들은 필사적으로 계엄군에 저항했으며, 칼이나 각목 등 각종 무기들을 사용하거나 거리의 물건들로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또 중장년들이나 부녀자들이 보도블럭을 깨면 그 조각들을 젊은이들이 던지는 방식의 협업도 이루어졌다. 공사판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연장, 각목, 쇠파이프 등을 시위군중에게 흔쾌히 제공해주기도 했다. 마침 휴교령이 내려져 귀가하던 학생들도 대거 시위대열에 동참하였다.[66] 그리하여 계엄군의 계속된 진압으로 금남로로부터 밀려났어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군중은 "마치 풍선 가운데를 꾹 누르면 주변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광주시를 돌아다녔다. 충장로, 적십자병원, 광주공원, 광주천, 광주일고, 현대극장, 양동시장, 공용버스터미널, 대인시장, 전남여고, 중앙국민학교, 문화방송, 녹두서점, 노동청 등 수많은 장소에서 시위대가 있었다.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시위에 나섰고 보다 공세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소수의 공수부대원들의 경우에는 시민들에게 반격을 당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시민들의 시위는 마치 싸우다 죽겠다는 듯이 점점 열기를 띄어갔다. 시위대열은 시내 주위 곳곳에 포진하며 경찰, 군인들과 대치했으며 충돌 또한 쉬지 않고 일어났다. 가장 치열했던 곳 중 하나는 공용터미널 부근에서였다. 치열한 시위 도중 한 여성이 "나는 공산당도 아닙니다. 난동자도 아닙니다. 단지 선량한 광주시민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라고 외치며 "우리 모두 나섭시다. 학생들을 살립시다. 계엄군을 물리치고 우리 스스로 광주를 지킵시다"라고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그러자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었고 계엄군이 이를 진압하러 나서면서 한바탕 난전이 벌어졌다. 이 시위 도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고 연행되었는데 특히 터미널 내 지하도로 피신한 사람들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들은 몽둥이로 두들겨 맞거나 대검에 무참히 찔려 심각한 상해를 입은 것이다.[67][68] 한편 계엄군들은 터미널에서 발생한 부상자를 실어나르는 택시기사들에게도 폭력을 휘둘렀는데 이에 대한 기사들의 분노가 다음 날 시위의 또 다른 주축으로 작용하게 된다.
계엄군은 여전히 야만스러운 방식으로 시민들을 대했다. 진압봉과 대검은 기본이었고 온갖 가혹행위들이 시민들에게 저질러졌는데, 종국에는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기에 이르렀다. 오후 4시 50분경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최초의 발포가 발생했다. 시민들과 장갑차가 충돌했는데, 시민들이 장갑차에 불을 지르려고 하자 안에 있던 공수부대원이 총을 난사했다. 이 일로 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 3학년생 김영찬(19)이 손과 대퇴부에 3발을 맞고 쓰러졌다. 시민들이 그를 도우려고 다가가는 사이에 장갑차는 달아나버렸다.[69][70] 또한 이 날에 두번째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는 공사장 막노동일을 하던 김안부(36)로 일하는 와중에 광주공원에 들렸다가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인해 오후 5시경 살해당했다.[71] 이외에도 계엄군에 의해 두들겨 맞고 대검에 찔린 환자들이 대거 병원으로 몰려들었기에 광주 시내의 병원들은 북적거렸다. 허나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병원에 오게 된 부상자들이 계엄군의 진압작전에 겨우 빠져나온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저녁 7시가 되면서 비가 왔지만 시위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는 1,000여 명의 군중이 시위대를 벌이다가 경상남도 표지판을 달고 있는 화물트럭과 대형 아치에 불을 질렀다. 시민들은 양동, 누문동, 임동, 고속버스터미널, 광주역 등의 지역에서 게릴라처럼 시위를 벌이며 계엄군과 쫓고 쫓겼다. 시위는 자정 이전에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텔레비전 방송에 광주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것을 알고 분노해야 했다. 한편 밤 11시 경 정웅 31사단장은 광주에 파견된 공수부대 지휘관들과 경찰 지도부를 불러모아 강경진압을 중단하라는 '31사단 작전명령 제3호'를 지시하였다.[72] 하지만 전두환, 정호용 등을 포함한 신군부 실세들의 생각은 달랐고, 더 강경한 진압을 위해 제3공수여단과 보안요원들을 광주에 파견한다.
2.4. 5월 20일: 전면적인 시민항쟁의 전개[편집]
이날(5월 20일)은 중대한 날이었다.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살상과 가혹행위가 저질러졌기 때문에 시민들은 극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만일 이날 정부가 공수부대원들의 잘못을 사과하고 공수부대를 철수시켰다면 아마도 더 이상의 피 흘림 없어 문제가 해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아침 8시 전도대회단과 나는 광주기독병원에 예배를 드리러 갔다. 찬송가를 부른 후에 의사 한 사람이 기도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젊은이와 학생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기를 간구했다. "사랑하는 하나님, 어찌하여 우리의 군인들이 우리의 형제와 자매와 아이들을 죽입니까"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대부분의 교인들도 울었다. 몇 분간 그는 침묵했다. 예배실은 우는 소리로 진동했다. 나는 그런 깊은 감정의 분출을 지금껏 본 적이 없다.
18일과 19일의 참혹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 날 전라남도교육위원회는 광주의 모든 중고등학교에 임시휴교 조치를 내렸다. 새벽에는 전날 계엄군의 진압으로 목숨을 잃은 김안부의 시신이 발견되어 그 소식이 광주 전역에 퍼졌다. 아침 7시에는 서울에서 출발한 제3공수여단(지휘관 : 최세창) 5개 대대가 광주에 도착하여 전남대학교에 짐을 풀었다.[74] 전날부터 내리던 가랑비가 9시 경 그치자 시민들은 점차 시내로 몰려들었으며, 10시 경 대인시장에는 1천여 명의 시민들이 집결하여 계엄군의 폭력진압에 분노하며 시위에 나섰다. 상인들도 '이 난리판에 무슨 장사냐'면서 시위 대열에 참여했다. 그렇게 모인 시위대는 금남로에서 계엄군과 충돌하며 시위를 벌였다. 10시 30분에는 가톨릭센터 근처에서 30여 명의 남녀들이 팬티, 브래지어 등만 걸친 채로 계엄군에 의해 온갖 기합을 받는 모습이 목격됐다. 이 광경을 지켜본 시민들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75]
오전의 시위는 전에 비해서는 소강상태였으나 오후에 들어서 무섭게 타올랐다. 금남로 인근에 20만 명의 시위대가 모여들었다. 대학생과 고등학생, 대인시장의 아낙네, 중장년층, 노동자, 회사원, 유흥업소 종업원, 가정주부, 꼬마 손을 잡고 나온 할머니까지 다양했다. 동명동, 계림동 동문다리, 계림파출소, 조흥은행, 금남로 4가, 충장로 등에서 수백 혹은 수천의 군중들이 집결하여 돌을 던지고 계엄군과 충돌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여전히 시위대에게 잔혹한 진압방식을 택했다.[76]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도망가지 않고 거리에서 농성하며 "차라리 우리 모두를 죽여라!"고 외치며 저항했다. 결집력도 대단해서, "시위를 위한 스피커가 필요하다"는 말에 그 즉시 40여 만원의 모금이 시민들 사이에서 모일 정도였다. 시위대는 그렇게 모인 돈으로 스피커를 사서, 더욱 효과적으로 시위를 전개할 수 있었다. 또한 공수부대에 대한 반격도 빈번해져서, 소수의 군인들은 고립되어서 오히려 시민들에게 당했다. 그러자 군인들은 대규모로 모여 다니면서 진압작전을 수행해야 했다.
시위는 치열하게 벌어졌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진압이 있으면 흩어졌다가 그들이 사라지면 다시 모이기를 반복했다. 스피커를 마련한 시위대 사이에서는 가두방송단이 조직되어 시민들의 투쟁을 독려했다.[77] 사람들은 투석전을 벌이고 거리의 물건들로 계엄군을 막으며 맹렬하게 맞섰다. 인근 주택에서는 시민들이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대야를 갖다 놓았고, 시위대 속에서는 돌, 각목, 철근 등을 리어카와 자전거 등을 이용해 실어날랐다. 어떤 사람들은 치약이나 물수건을 준비해서 최루탄 연기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도 했다. 시위대는 이런 협동 속에서 계엄군을 밀어붙었고, 계엄군은 금남로에서 여러 겹의 저지선을 구축하며 시위를 진압하느라 진땀이었다. 오후 6시 경까지 시위대는 공수부대원들과 맞서면서 대치하였다. 시위를 하면서 시민들은 "내 자식 살려내라", "살인마 전두환은 물러가라", "군은 38선으로 복귀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78] 한편 광주매일신문의 기자들은 사람이 죽는 광경을 보고도 신문에 싣지 못함을 한탄하며 일제 사표를 제출했고, 거리에서는 투사회보를 비롯한 시민들의 대안언론들이 배포되었다.
그런 사이 운전기사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시위를 벌이려고 했다. 이날 아침부터 택시기사들을 주축으로 한 운전기사들은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에 대한 불평을 쏟아내었다. 멈추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거나 부상자들을 병원에 싣고 간다는 이유로 계엄군에게 곤욕을 치른 기사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79] 분노한 이들은 무등경기장에서 집결하기로 결의하고 오후 5시 30분에 각자의 대형버스와 택시를 이끌고 왔다. 이들은 일제히 금남로로 향하며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면서 천천히 이동했다. 이들 행렬이 금남로에 도착했을 때가 오후 6시 40분 ~ 7시 즈음이었다.[80][81]
운전기사들은 다수의 차량을 몰고 들어가면 아무리 철저한 공수부대의 저지선이라 해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것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헤드라이트를 모두 켠 200여대의 차량들이 무등경기장을 떠나 유동 3거리에서부터 금남로 4가까지 가득 메우고 전진하자 길거리의 시민들은 "우리의 용사들 잘한다", "이기자, 이겨야 한다"고 외치고 박수를 치며 열렬히 환호했다.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던 시민들은 차량시위가 벌어지자 이제 '우리도 대항할 수 있다', '저지선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 금남로로 모여들었다.
계엄군 아저씨, 당신들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까? 도대체 어느 나라 군대입니까? 경찰 아저씨, 당신들은 우리 편입니다. 제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도청광장을 잠시만 비켜 주면 우리는 평화적으로 시위를 하고 물러나겠습니다. 경찰 아저씨, 최루탄을 쏘지 마십시오. 우리는 맨주먹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꼭 이깁니다. 시민 여러분, 모두 힘을 합칩시다. 끝가지 물러서지 말고 광주를 지킵시다.
5월 20일 밤 당시 가두방송에서 울린 여성의 목소리[83]
차량시위를 맞은 시민들은 열광했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몇몇 사람들은 차량 안이나 위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쳤고,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기쁨을 나누기도 했다. 곧 차량과 사람들이 뒤섞여 시위 대열을 이루며 금남로를 가득 채웠다. 시위대는 대형 버스를 앞세워 공수부대의 저지선을 돌파하고자 했다. 당시 금남로에 있던 제11공수여단 제61대대와 제62대대는 급한 대로 도로변의 대형화분대로 군중을 막아섰다. 그러고는 최루탄을 마구 쏘면서 시위대에 달려들어 차량의 유리를 깨고 차량 안의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연행하는 방식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6시 55분 경 광전교통 소속 '전남 아 3706호' 버스가 가로수와 바리케이드를 들이받고 멈추자 계엄군들이 달려들어 10여 명을 두들겨 패 끌고갔다. 7시부터는 차량시위대와 군인들 간의 격렬한 충돌이 벌어져 수십 명이 크게 다쳤다.[84] 아직 시위대는 공수부대의 저지선을 깨뜨리지 못했다.
한편 광주 시내는 물론이고 외곽 지역까지 시위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시위대는 제봉로, 충장로, 학동, 방림동, 산수동, 지산동, 유덕동, 광천동, 화정동 등지에서 열띤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점차 시내로 모여들고 있었고 목표는 전남도청이 위치하고 있는 금남로였다. 이런 가운데 시민들의 시위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탄압에 대해서 전혀 보도하지 않은 방송에 분노한 시민들은 밤 8시 40분경에 광주MBC 건물에 화염병을 던졌고, 광주KBS 건물에도 난입하여 방송을 중단시켰다. 또한 시민들은 광주 전역의 파출소와 소방서 등도 점거했다. 광주시청도 시민들의 손에 넘어갔다.[85] 이렇게 되니 시간이 갈수록 고립되는 것은 공수부대였다. 이들은 광주역과 전남도청 부근만 점령한 채 밀려들어오는 무수한 시민들의 분노를 막아내야 했다. 시민들은 조금씩 공수부대원들을 조여오며 공수부대를 몰아내기 위해 싸웠다.
저녁이 깊어지며 시민들은 광주역과 전남도청 부근을 포위하고 다방면으로 간격을 좁혀나갔다. 먼저 전남도청에서는 그로 통하는 4개의 큰 길목[86] 으로 시위대가 자동차를 저지선으로 접근시키며 군인들을 위협했다. 그러다가 밤 9시 5분 경에 버스 1대가 저지선에 있던 함평경찰서 출신 경찰 4명[87] 을 치어죽이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는 시위대의 과격한 공세와 진압 측의 실수가 함께 빚어낸 사건이었는데, 저지선을 뚫고자 오는 버스에 경찰이 버스 안으로 최루탄을 발사하자 놀란 탑승자들이 버스를 뛰쳐나가는 바람에 그대로 경찰들을 친 것이다.[88][89] 이 일이 터지자 놀란 사람들은 후에 이 사고로 인한 경찰 부상자를 이송해야 할 때 길을 비켜주었다. 그럼에도 시위는 계속 이어졌다. 계엄군과 시민들은 쉴 새 없이 최루탄과 돌을 주고받으며 충돌했고, 수십 대의 차량이 불길에 휩싸일 정도로 격렬했다. 가두방송에 나선 여성들의 도움[90] 으로 시위대는 더욱 열기를 띠어갔다. 그 사이 9시 50분 즈음 광주MBC 건물이 끝내 불에 탔다.[91][92]
※ 5월 20일 광주역 사망자 명단 : 보기 / 접기
광주역과 부근 도로에서는 광주역 전투라고 불리어질 정도로 시민항쟁의 정점을 찍었다. 광주역에서는 제3공수여단이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무수한 시위군중이 모여들어 광주역을 일제히 포위했다. 시위대는 역시 자동차를 이용해 저지선을 뚫으려 들었다. 시민들은 트럭이나 버스의 가속기에다가 무거운 돌을 매달고 운전대를 고정시킨 채로 저지선에 보내는 방식을 썼다. 그러면 자동차들은 광주역 앞의 분수대나 저지선에 부딪혀 멈췄다. 거기에다 뒤에서 오는 차량이 앞에 부서진 차량들을 계속 들이박으면서 차량들은 뒤섞여 굉음을 내며 부서지고 폭발했다. 심지어 휘발유 드럼통이 든 트럭을 실어보내 폭발시키기도 했다. 이제 시민들은 계엄군에 맞서서 자신들이 공격을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른 것이다.[93] 물론 계엄군도 그런 공격 와중에 잡힌 시민들에게 야만적인 폭력을 가했다. 그러던 중 밤 10시 경 트럭 1대가 광주역 근처의 주유소를 들이박고 전복됐는데, 이 때 최초의 계엄군 사망자가 발생했다. 궁지에 몰린 계엄군들은 실탄까지 공급받으면서까지 과격한 진압에 나섰고, 밤 11시 20분 경 마침내 군중을 향하여 총기를 위협사격했다. 최초의 집단발포였다. 이 과정에서 4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당했다.[94][95] 집단발포 이후 새벽부터 제3공수여단은 광주역에서 철수를 시작했고, 시위대를 돌파하여 2시간이 넘는 시간을 소요하여 새벽 4시 반에 철수를 완료하였다.
금남로에서의 시위는 새벽에도 계속 되었다. 광주역에서의 발포 사실이 전해지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12시 45분 경 시민들은 "우리가 낸 세금으로 휴전선 지키라고 했더니 국민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눴다"면서 광주세무서에 불을 질렀다. 시민들은 세무소 내에 있던 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 소총 17정을 탈취하기도 했는데, 이미 군부대에서 실탄을 빼돌린 뒤라 빈 총에 불과했다. 노동청과 광주KBS, 광주MBC 건물에는 시민들이 방화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그렇게 시민들은 21일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시위를 끝내지 않았다. 밤부터 새벽까지 광주 시내에서는 고함 소리, 비명 소리, 함성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3. 저항권 발동, 시민군 조직[편집]
3.1. 5월 21일: 집단발포와 시민군의 탄생, 시가전 전개 후 외곽으로 철수하는 계엄군[편집]
장교인 듯한 사람이 공수들을 보고 소리쳤다. "이 개새끼들! 조준사격 안 하냐?"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계급장을 확인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공수들은 실제 장교인지 사병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공수들은 그때부터 도청 앞에 돌로 난간을 만들어놓은 곳에 길어 조준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총으로 쏘아 한 사람이 푹 쓰러지고 나면 사람들이 흩어졌다. 사람들이 불과 몇분 만에 다시 모여 시체를 떼메고 가고 나면 또 모이고, 그러면 또 한 사람이 푹 쓰러지고, 그러한 것을 3번이나 보았다. 그곳으로 다시 오면 분명히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모여들고 또 모여들고 하는 것이 꼭 불을 찾는 불나방들 같았다. 나는 그러한 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생각했다.
당시 의무전경 곽형렬의 증언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금남로를 메운 시위군중들도 주섬주섬 기립자세를 취했다. 바로 그때, 시위대 맨 앞쪽 사람들이 등 뒤쪽으로 피를 뿜으며 길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런 다음 귀를 찢는 총성들이 들렸다. 눈을 오른쪽으로 돌렸을 때 도청 앞 광장에 정렬해 있던 군인들은 맨 앞열이 무릎쏴, 다음 열이 서서쏴 자세로 총격을 가하고 있었다... 당시 내가 바로 그 지점에 있지 않았더라면 애국가가 집단 발포명령의 신호가 되는 참담한 비극을 증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총알이 총성보다 빠르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내가 두 사람의 신분을 소개하자 그들은 내 팔과 옷소매를 거머쥐고 "...신문, 방송사는 도대체 알고 있는 건가, 모르고 있는 건가"며 울부짖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경상도 사투리가 심하다. 그중 한 아낙네는 "경상도 기자양반이 와서 보기를 잘했소. 서울 가거든 군인들이 광주 사람 다 죽인다고 좀 알려주시오"라고 통곡을 했다.
동아일보 기자 김충근의 증언
새벽까지 이어진 치열한 공방전 끝에 광주역은 군중들의 손에 넘어갔다. 시민들은 기쁜 마음으로 광주역에 진입하다가 죽은 채로 널부러져 있는 시신 2구(시체 사진이다. 충격적일 수 있으니 주의할 것.)를 발견했다.[96] (밑에 80번 문단 링크도 충격적이니 주의할 것.) 시신을 리어카에 싣고 위에 태극기를 덮은 시위대는 크게 분노했고 리어카를 시내로 끌고 가며 계엄군의 만행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이것을 본 시민들은 더욱 격분하였다. 아침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전처럼 금남로로 모여들었다. 마침 5월 21일은 부처님오신날로 공휴일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졌다. 한편 계엄군 측에서는 새벽 2시 경부터 광주로 통하는 시외전화를 끊어버렸고, 시위 진압을 위하여 20사단을 증파하여 광주로 내려보냈다.[97][98] 이들 20사단은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시민들의 거센 저항을 받아 아침 8시 45분 경에는 지휘 차량 14대가 시위대의 공격에 의하여 탈취당하는 일을 당했다. 차량을 탈취한 사람들은 그 차량을 타고 시내로 나가기도 했고, 일부는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가서 버스, 지프, 군용트럭, 장갑차 등 260대여 차량을 탈취하였다.
오전 10시가 되자, 금남로엔 5만이 넘는 시민들이 모였다. 오전 6시부터 가톨릭센터 앞에 시신 2구를 가져와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던 시위대에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급속도로 불어난 것이었다. 인파는 전남도청 주변을 에워싸는 도로를 꽉꽉 채우고 있었다. 계엄군은 시민들을 해산시킬 엄두조차 내지못하고 도청 주위의 방어에만 신경 쓰고 있었다.[99] 시민들은 계속 계엄군과 마주보며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 맨 앞에는 전옥주가 전날처럼 가두방송을 진행하며 시위를 이끌고 있었다. 공수부대의 철수를 주장하던 그 때 누군가 계엄군 측과의 협상을 주장했다. 그러자 군의 사과와 시민의 명예회복이 이뤄진다면 타협하자는 여론이 군중들 사이에서 일기 시작했다. 이에 전옥주는 대치 중인 공수부대 지휘관들에게 가서 도지사와의 면담을 요구했다. 지휘관들이 이를 허락하면서 전옥주를 포함한 시민대표 4명이 도지사를 만나러 전남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도청 안에서 대표들은 구용상 광주시장과 장형태 전남도지사를 만났다. 대표들은 장형태에게 ① 유혈사태에 대한 도지사의 사과, ② 연행된 시민들과 학생들을 즉시 석방하되 여의치 않으면 소재파악이라도 해줄 것, ③ 공수부대는 21일 정오까지 시내에서 철수할 것, ④ 전남북계엄분소장과의 협상을 주선할 것 등을 요구했다. 장형태는 ①항은 적극 수용, ②항과 ③항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지만 적극 건의, ④항은 반드시 성사되도록 주선하겠다고 답했다. 대표들이 협상 결과를 시민들 앞에서 직접 발표해 달라고 부탁하자 장형태는 이를 수락했다. 마이크가 준비되는 사이 구용상 광주시장은 시민들을 달래본다며 나갔다가 시민들에게 비난만 받았다. 그러나 장형태는 끝내 시민들 앞에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10시 45분 경 경찰 헬기를 타고 "12시까지 계엄군을 철수시키겠다"며 시위대에 해산을 권유했다.
도지사가 나오지 않자 시민들은 격앙되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시민들과 계엄군 간의 간격은 좁아졌고 상황은 점점 정면충돌로 비화할 조짐을 보였다. 그 사이 오전 10시가 넘어서 도청 앞 광장에 군용 헬기들이 왔다갔다 했고, 전남도청 근처 상무관에 주둔하던 제11여단 61대대 군인들에게 공개적으로 실탄이 지급되었다.[100] 상황은 점차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시민들의 숫자는 더욱 더 불어만 갔고, 일부 시위대는 광주 일원은 물론이고 전남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며 시민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시민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시위에 나섰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시위에 동참했고, 동네에서는 동별로 시민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였다. "4.19 의거를 계승하라", "전남인은 궐기하라" 따위의 내용이 실린 전단들이 살포되었으며, 시민들 사이의 모금도 이뤄졌다. 그리하여 11시가 넘어서는 10만에 달하는 민중이 금남로를 가득 채웠다. 시민들은 "비상계엄 해제"와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차량에 달거나 직접 들고 시위에 나섰다. 차량들도 100여 대가 군중들 사이에서 시위에 동참했다.
간격은 점차 좁혀져서 이제 시민들과 계엄군 간의 격차는 몇십 미터가 채 지나지 않았다. 정오가 되자 도지사의 선무방송을 듣고 공수부대를 철수하겠다는 약속을 믿은 시민들은 정오가 되어도 계엄군이 물러나질 않자, 일부가 '속았다'고 판단해 흥분했다. 오후 1시를 5분 남겨놓고서는 시위대 대표가 나서서 계엄군에게 퇴각을 요구했다. 그러나 계엄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12시 58분, 시위대원들이 광성 관광버스 2대를 몰고 공수부대원들이 있는 도청광장을 들어와 분수대를 빙빙 돌았다. 그러자 공수부대는 즉각 사격을 가해 그 중 1대를 운전하던 기사가 즉사하고 버스는 분수대 옆에서 멈춰섰다.[101] 그 직후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시민들이 탈취한 해병대용 장갑차 1대가 뾰족한 앞머리를 내세운 채 전속력으로 질주해 들어왔다. 공수부대원들의 대열은 황급히 흐트러졌다. 그렇게 대열을 무너뜨리고나서 장갑차는 유유히 도청 광장을 빠져나갔다. 이 와중에 계엄군 1명이 장갑차에 깔려 사망했다.[102] 그러자 시민 2명이 달려나와 난리 와중에 계엄군이 떨어뜨린 M16 소총 2정을 가져가려고 했으나 고장이 난 게 있는지 1정만 가져갔다. 그리고 1시 정각이 되자 도청 옥상의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러퍼졌다. 시민들이 애국가를 부르고 있는 그 순간 수백 발의 총성이 일제히 울러퍼졌다.[103][104][105]
※ 5월 21일 집단발포 관련 사망자 명단 : 보기 / 접기
처음에는 공포탄인지라 사람들은 놀라 숨었다가 다시 나왔다. 그러자 이제는 진짜로 시민들을 향한 조준사격이 이루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군인들은 '앉아 쏴', '서서 쏴', '엎드려 쏴' 자세로 금남로의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총탄을 마구 난사했다. 시민들이 동요하면서 금남로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발포는 10여 분 동안 이어졌다. 일련의 사격이 끝나자, 1시 10분 경 1,000여 명의 시민이 다시 모여들어 금남로로 향했다. 그 중 5~6명의 청년들이 대형 태극기를 들면서 구호를 외치고 애국가를 부르면서 뛰쳐나갔다. 그러자 도청 주변의 건물에 숨어 있던 저격수들이 조준 사격을 가해 청년들은 모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시민 몇이 뛰쳐나와 쓰러진 이들을 수습하자, 또 다른 청년 대여섯명이 태극기를 들고 뛰쳐나와 시위를 하다 쓰러졌다. 이후에도 똑같은 상황이 여러 번 펼쳐졌다. 그 때마다 사람들이 총에 맞아 쓰러져 갔다. 이 끔찍한 광경은 주변의 시민들이 뛰쳐나오려는 사람들을 뜯어말리고서야 멈추었다. 그러던 1시 30분, 한 장갑차가 맨 위에 웃통을 벗은 채로 "광주만세"를 외치는 청년을 싣고 도청광장으로 돌진했다. 그 청년도 계엄군의 총격으로 머리가 고꾸라지며 죽었다. 조준 사격은 비단 시위를 하는 사람들에게만 가해진 것이 아니었다.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이나 주변 건물에 있던 사람들도 총을 맞았다. 계엄군은 캘리버50 기관총을 난사하고, 심지어는 헬기까지 동원하여 군중을 해산시키고자 총탄을 퍼부었다. 이렇게 전남도청 앞에서 벌어진 집단발포 등 21일에 발생한 계엄군의 발포로 최소 54여명이 사망하고 5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계엄군의 발포는 공수부대의 주둔지였던 전남대학교 앞에서도 벌어졌다. 21일 오전 10시부터 전남대학교 정문과 후문에서 전체 5만여 명의 시위대가 집결하여 공수부대의 철수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 규모는 점점 커졌고, 지원을 나온 시민들과 차량들이 합류하여 계엄군을 압박했다. 그러자 정오 즈음 계엄군은 최루탄을 쏘고 발포를 감행하여 시위대를 잡아들이고 해산시켰다. 이 일로 인해 최소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당했다. 사망자 중에는 임신 8개월의 임산부였던 최미애(23) 씨가 있었다. 그녀는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했으며,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그녀의 뱃 속에 있던 아이도 얼마 가지 않아 죽었다.[106]
광주시민 총궐기문먼저 이 고장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우다 목숨을 바친 시민학생들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 밖에 없었는가?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는 없어서 너도 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겁니다...
정부당국에서는... 18일 아침에 각 학교에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이에 반발하는 학생들에게 대검을 꽂고 '돌격 앞으로'를 강행하였고, 이에 우리의 학생들은 다시 거리로 뛰쳐나와 정부당국의 불법처사를 규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계엄당국은 18일 오후부터 공수부대를 대량투입하여 시내 곳곳에서 학생, 젊은이들에게 무차별 살상을 자행하였으니! (중략)
이 고장을 지키고자 여기에 모이신 민주시민 여러분!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당할 수 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장을 지키고자 우리 부모형제를 지키고자 손에 손에 총을 들었던 것입니다! (중략)
여러분! 잔인무도한 만행을 일삼았던 계엄군이 폭돕니까? 이 고장을 지키겠다고 나선 우리 시민군이 폭돕니까? 아닙니다!
시민여러분! 우리 시민군은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안전을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후략)
1980년 5월 23일 궐기대회 당시에 낭독된 「우리는 왜 총을 들 수 밖에 없었나」
민주수호 전남도민 총궐기문
전남민주회보
우리는 피의 투쟁을 계속한다!
도청 앞에서의 집단발포로 시민들은 생존을 위해 경무장을 시작했다[107] . 그래서 시위대는 집단발포가 있은 오후 1시 이후부터 전남지역 각 방면으로 흩어져 무기를 구하고자 했다. 광주 시내에서는 이미 무기가 회수된 뒤였기에, 시민들은 광주 외곽, 화순군, 나주시, 해남군, 영암군 등 시외 지역으로 진출해 경찰서와 무기고를 점거하고 무장했다. 당시 무기고 같은 장소들은 시민들이 찾기 쉬운 곳에 있었기에 조직적인 무기 탈취가 가능했다. 각 지역에서 시민들이 무기를 탈취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나주시에서는 오후 2시경 시위대가 계엄군의 발포 사실을 전하며 무장을 촉구했다. 그러자 여기에 호응하는 지역민들이 시위대를 도와 나주경찰서 본서에서 카빈 소총 94정, 권총 25정, 공기총 151정을 탈취했고, 금성동파출소에서는 카빈 780정, 실탄 4만 6,400발, 38구경 권총 12정, 45구경 권총 16정을 탈취하였다. 이외에도 반남지서, 영산지서, 금천지서, 영광지서, 다시지서, 금성파출소에서 무기와 실탄이 시민들의 손에 넘어갔다. 남평, 산포, 금성, 영광 예비군 무기고에서도 1,000여 정에 가까운 무기와 10만여 발의 실탄이 탈취되었다.[108] 화순에서는 화순경찰서에서 카빈과 M1 소총 200여 정, 수류탄 230여 개, 실탄 14,000여 발을, 동복지서와 능주지서에서 카빈 및 M1 소총 1,300여 정, 실탄 22,000여 발을 탈취했다. 이 외에도 화순 동복 예비군 무기고, 역전파출소, 남면지서, 동면지서, 북면지서 등에서도 총과 실탄을 빼갔으며, 화순광업소에서는 카빈 소총 64정과 더불어 다이너마이트까지 얻었다.[109] 이 외에도 영암군, 강진군, 해남군, 장흥군, 보성군, 장성군, 함평군, 영광군, 무안군, 목포시, 담양군 등지에서 시위대에 의한 경찰서 공격과 무기 탈취가 이어졌다.
이렇게 무장한 시위대는 곧바로 광주로 향했다. 무기를 얻은 시위대는 광주에 도착하여 시민들에게 무기를 분배하여 무장시켰다. 시민들은 무장한 시위대를 보고 시민군이라고 불렀다. 처음으로 '시민군'이 광주에 출현한 것은 오후 3시가 넘어서였다. 이 때부터 시위는 계엄군과 시민군의 대립으로 바뀌었다. 물론 체계적인 훈련과 압도적인 화력을 가지고 있던 계엄군을 시민군이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시민군은 전남대학교병원 옥상에 LMG 2정을 위협용으로 설치하는 등 계엄군을 물리치고자 나섰다. 교전은 도청 근처, 전남대 의대 근방, 노동청, 공원, 금남로 등지에서 격렬하게 벌어졌고 시가전은 오후 8시 30분까지 광주시내 곧곧에서 벌어졌다. 당연히 급조된 시민군들이 정예군인 공수부대의 전투력을 이기길 어려웠고 시민군의 피해가 막심했지만 시민군은 처절하게 저항했다.
시민들의 이러한 유례없는 대규모 저항에 계엄군 지휘부는 계엄군을 광주 외곽으로 전환 배치하여 광주를 포위하여 진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계엄군은 오후 5시 경에 조선대학교로 이동하고 곧바로 광주 외곽으로 철수하였다. 이 때 계엄군은 혹시 모를 시민군의 공격을 막고자 기관총을 사방에 난사하면서 퇴각하였다. 이 때문에 그 사격에 맞아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심지어 계엄군의 차량에 치여 사망하는 사례도 있었다. 도청 직원들과 경찰들, 특히 약 1,500여명의 전경 병력도 도청에서 빠져나갔다. 이 때 계엄군은 경찰 및 도청 직원들에게는 따로 통보하지 않고 자신들만 빠져나갔다. 뒤늦게 사태를 인식한 안병하 경찰국장이 철수하라고 통보해서 빠져나간 것. 이 때 철수하던 전경 병력을 시민군이 포위한 적도 있다. 다행히도 시민군과 경찰들은 크게 적대감이 없어 큰 충돌 없이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마침내 오후 8시 경 아무도 없는 전남도청을 시민군이 장악했다.
한편 계엄군 측에서는 자신들의 집단발포와 총기 사용을 정당하고자 오후에 '공식적으로'[110] 자위권 발동을 선포했다. 오후 2시 경에 국방부장관실에서 열린 회의에서 국방장관 주영복, 보안사령관 전두환, 수경사령관 노태우, 특전사령관 정호용 등이 참석하여 '자위권 발동, 5월 23일 이후 폭도소통 작전 의명 실시'가 결정되었다. 오후 4시 30분에는 다시 국방부장관실에 회의가 열려 군의 자위권을 천명하는 담화문을 발표하기로 하여 오후 7시 30분 계엄사령관 이희성의 이름으로 발표가 되고 각 공수부대원들에게 자위권 발동 지시가 하달되었다. 광주에 파견된 계엄군들에게 '자위권 발동 = 발포명령'이었고 결국 이후에도 무수한 희생을 낳게 된다.
이날 저녁 7시경에, 놀랍게도 국영방송이나 마찬가지였던 KBS를 통해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타 지역에 최초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미 각 언론사 내에서는 광주의 상황에 대해서 이미 인지는 하고 있었고 기사도 쓰여졌다고는 했다만 신군부의 압력에 의해 보도를 전혀 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보도되더라도 실상은 철저하게 가려진 채 보도되었었다. 헌데 당시 KBS 보도국 편집차장이었던 장두원이, 군부의 위협에도 진실을 알려야 된다는 사명감에 "보안사의 승인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기꺼이 보도를 승인해주어, 약 40분 정도에 걸쳐서 광주에서의 상황이 상세히 보도되었다.[111][112] 그 이후로 방송 종료 직전까지는 여러 방송사에서 광주의 상황에 대한 보도를 시작하였고 각 신문사에서도 호외를 돌리기 시작했지만, 그로부터 하루 뒤부터는 계엄군이 각 언론사 데스크진들과 기자들에게 촌지를 돌리는가 하면, 진실을 보도하는 기자와 언론사주에게 고문을 하겠다고 위협하는 식으로 채찍과 당근을 병행하는 조치를 썼다. 이는 곧 바로 효력을 발휘하여 다음날 저녁부터 각 언론사에서 광주에서 북괴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고 왜곡하는 식으로 논조를 전환하였다.[113]
3.2. 항쟁의 확산[편집]
※ 전남 지역별 항쟁 형태 : 보기 / 접기
5월 21일의 집단발포 이후부터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고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광주의 시위대가 시외로 빠져나가면서 항쟁은 전남으로 파급되었다. 사실 광주에서 발생하고 있던 일들은 조금씩 밖으로 알려지고 있었지만 주목할 만한 움직임은 없었다. 그러나 집단발포 이후 흥분한 시위대가 차량을 몰고 다니며 사실을 알리자 주민들도 분노하여 시위에 호응했다. 그러면서 광주를 중심으로 전남 각 지역에서도 지역민들에 의한 시위와 집회가 발생하였다. 지역 주민들은 광주에서 온 시위대가 무기를 탈취하는 것을 돕거나 음식물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시위대와 함께 광주로 들어가 항쟁에 직접 참여하는 이도 있었다.
화순은 광주와 가까웠기에 5월 18일부터 소식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화순 주민들도 광주에서 벌어지는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하고 있었다. 5월 21일 집단발포 이후 광주로부터 차량시위대가 도착하여 사실을 알리자, 화순군청과 화순경찰서 앞 사거리에 화순군민 2000여 명이 집결했다. 주민들은 인근에 있던 화순시외버스터미널과 주변 시장에서 김밥 등을 구해 시위대에게 제공했다. 청년들은 시위대에 호응하여 화순경찰서, 화순광업소 등에서 무기를 탈취하는 것을 도왔다. 그러는 사이 일부 지역에서는 시민군에게 무기가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예비군을 소집, 총기를 미리 나누어주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전사고 위험성을 이유로 다시금 무기를 회수하는데, 여기에 반발하는 청년들은 회수된 무기는 물론이고 경찰이 숨겨둔 무기까지 찾아내 시위대에게 제공하였다. 화순에서의 시위는 너릿재가 봉쇄되는 22일 오후까지 이어졌다.
나주에서는 오후 2시 경 나주삼거리와 나주버스터미널에 차량시위대가 몰려와 계엄군의 발포 소식을 전하고 무기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그러자 500여 명의 청년과 군민들이 파출소와 무기고 위치를 가르쳐주며 무기 탈취를 지원했다. 마침 대부분의 경찰이 광주의 시위를 막기 위해 차출된터라 일행을 막을 사람은 없었다. 몇몇 행정기관들은 자체적으로 무기를 은닉하며 무기 탈취를 막으려고 했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서 시위대와 나주군민들은 무기를 성공적으로 가져갔다. 이후 몇몇은 타 지역으로 이동했지만 일부는 나주에 남아서 시위를 계속 했다. 군민들은 시위대에 동참하거나 음식을 제공하며 도왔고, 시위대는 '남고문 광장'에서 경계근무를 섰다. 나주에서의 시위는 23일까지 계속 되었고 그 이후에는 잠잠해졌다.[114]
함평은 1970년대 함평 고구마 사건의 여파로 가톨릭농민회의 입지가 강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광주로부터 시위대가 오자 군민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청년들은 시위대 차량에 올라타고 시위에 동참하는 경향을 보였고, 음식과 음료수를 시위대에 제공하였다. 지역주민 60~70명이 신광파출소에 몰려가 반정부 구호를 외쳤으며, 일부 주민들은 22일의 궐기대회[115] 에 대한 반발로 시위에 동조하기도 했다. 함평군에서의 시위는 학교면, 신광면, 대동면 등지에서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다. 항쟁의 영향은 3일 정도 이어지다가 지자체의 능동적인 대응으로 사그라들었다.
영암에서는 5월 21일 아침에 시위 동참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왔다가 돌아갔었는데, 오후가 되어 공수부대의 집단발포 소식을 들은 시위대가 다시 돌아왔다. 시위대는 군민들의 지원 하에 영암경찰서를 습격했으며, 인근 지역 주민들을 규합하였다. 영암군민들도 독자적인 행동에 나섰다. 신북고등학교 학생들을 포함한 영암 청년 100여 명이 버스 2대에 올라타 광주로 출발했고, 영암읍 6개 단체 회장들은 시위대를 지원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모금을 하여 광목을 사다가 반정부 구호를 적어보냈다. 23일부터는 지역 유지들을 중심으로 무기 회수 작업과 자체 방어가 이루어졌고[116] , 시위는 잠잠해졌지만 시외도로에서는 시위 차량이 간간이 지나가곤 했다.
강진에서는 오후 4시 경 3대의 버스에 분승한 시위대가 몰려와 구호를 외치며 시내를 행진했다. 그러자 군민들이 시위대를 격려하며 환호했다. 특히 청년들, 그 중에서도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지역민 시위대는 강진읍 교회에 본부를 두고 조직적으로 시위에 나섰다. 강진농업고등학교 학생들도 나서서 5월 23일 400~500명이 교복을 거꾸로 입은 채로 '계엄철폐', '민주회복', '김대중 석방'을 외치며 행진하였다. 강진의 시위는 질서 있게 이루어져 딱히 체포되거나 피해를 입은 사람은 없이 24일 경 잠잠해졌다.
목포에서는 광주를 제외한 다른 지역 중에서도 가장 대규모로 오랫동안 시위가 벌어졌다. 5월 21일 오후 2시 15분 경 시위대 200여 명이 여러 대의 차량을 탄 채로 목포에 도착했다. 이들은 시가지를 행진하면서 연신 구호를 외쳤고, 목포 시민들의 궐기를 촉구했다. 목포는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이기도 했고, 동시에 광주 다음으로 시민운동이 활발한 곳이었다. 그래서 목포 시민들은 여기에 호응하여 시위대를 형성했다. 몇몇 경찰들이 시위대를 막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동안 목포 지역 기독교청년회와 앰네스티 소속원들은 KBS목포에 들어가 대민 방송을 시도했고, 특히 목포 지역의 대표적인 사회운동가 안철(34)[117] 의 주도 하에 시위대를 이끌었다. 21일 저녁부터는 시위는 점차 과격해져 시청, 파출소, 세무서 등을 파괴했다. 22일부터는 안철을 중심으로 '시민민주투쟁위원회'가 설립되어 궐기대회를 열었다. 5차례에 걸쳐서 열린 궐기대회는 목포역 광장에서 열렸으며 수많은 군중들이 여기에 참석했다. 23일에는 밤 8시부터 2시간 40분 동안 10만여 명이 참석하여 횃불시위가 벌어졌다. 시위와 집회는 27일까지 이어졌으며 무기를 회수한 상태에서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서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당시 목포에 뿌려졌던 유인물
해남에서도 차량시위대가 도착했는데 차량에 동승한 여고생이 태극기를 들고 군민의 지원을 호소하자 수많은 주민들이 몰려왔다. 오후 3시부터 타지역 시위대와 지역민 3000여 명이 해남군청 앞 군민광장에 모여 성토대회를 열고 행진을 벌였다. 해남의 교회들도 시위대를 지원하는 활동을 벌였고 주민들도 음료수, 스프레이 등을 제공했으며, 대흥사와 몇몇 여관은 숙식을 마련해주었다. 오후 5시에는 더 많은 수의 차량시위대가 도착하여 군민들과 함께 해남경찰서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관공서는 주민들에 의한 자체 경비가 이뤄졌다. 오후 6시 30분에는 지역 내에 있던 31사단 99연대 2대대 주둔지로 찾아가 시위를 벌였으나 대대장과 시위대 대표 간의 협상으로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해남에서의 시위는 근처의 완도군와 진도군으로 이어져 시위와 시가행진이 이뤄졌다.
시위는 23일부터 계엄군이 해남읍 해리와 옥천면 영춘리 경계에 있는 고개인 우슬재를 점령하고 군중과 차량들에게 발포를 자행하면서 멈췄다. 23일 해남에서 총격 사망자 2명 포함해서, 31사단의 유혈진압으로 총 6명이 사망했다고 5월단체는 밝혔다.("광주 향토사단이 5.18 진압중 시민 사살") 이 해남에서의 사망자 수 2명도 축소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실제 해남 사망자는 4~7명으로 추정된다. ("해남군부대서 시신 봤다"...청문회 증언 막아, 5.18 당시 해남 우슬재와 상등리에서 일어난 집단총격)
장흥군에서는 22일 오전에 시위대가 나타나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일부 군민들이 시위에 동참했고, 23일에는 100여 명의 시위대가 장동면지서를 공격했고, 200여 명은 보성과 순천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장흥고등학교 학생들을 포함한 400여 명의 시위대는 이동하는 다른 시위대열을 반겨주었고, 관산면에서도 군중들이 합류하였다. 보성에서는 21일 저녁 8시에 시위대가 나타나 시위를 하다가 벌교 방면으로 이동했다. 23일에는 화순과의 경계가 있는 문덕면에서 시위대가 무기를 탈취하여 군과 경찰과의 충돌이 임박한 듯 했으나 시위대의 무기 반납과 자수로 상황은 종료되었다.
무안에서는 시위대가 들어왔을 때 지역주민들이 호응하며 시위와 무기 탈취가 이루어졌고, 버스터미널을 중심으로 시위대 차량이 오고가며 항쟁이 이어졌다. 하지만 시위대 차량이 전부 떠나고 나서는 더 이상의 자체적인 항쟁 움직임은 일어나지 않았다. 영광에도 시위대가 다녀가기는 했지만 특별한 기록은 없다. 담양에서는 시위대에 의해 담양경찰서가 공격당해 무기가 탈취되는 일이 발생했고, 순천과 여수[118] 에서는 시위대가 오지는 않았지만 휴교령이 떨어지고 비상이 걸리는 등의 소동을 겪었다.
4. 5월 22~27일: 해방광주, 그리고 시작된 민간인 학살[편집]
4.1. 시민자치공동체의 성립과 활동[편집]
항쟁 5일째, 승리와 해방의 감격은 아침 햇살 퍼지듯 온 시내에 퍼져나갔다. 처음으로 만끽하는 해방감이었다. '폭도'라고 몰아붙이던 자들이 쫓겨 나갔다... "도청으로 도청으로 가자!" 이 골목 저 동네에서 몰려나온 사람들이 무기를 이루어 마치 봇물이 터진 것처럼 금남로를 향하여 쏟아져 들어갔다... '...민중의 자발적이고 역동적인 힘'이 폭발적으로 분출돼 억압체제를 무너뜨렸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전면개정판)>,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창비, 2017, p272
민주시민들이여! 더욱 더 힘을 내자! 승리의 날은 오고 만다! 광주시민 민중봉기의 함성은 전국으로 메아리쳐 각지에서 민주의 성전에 동참해 오고 있다. 장성에서, 화순에서, 나주에서, 다수의 차량과 무기가 반입되었다. 전주에서는 도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제 승리의 날은 머지 않았다. 승리의 날까지 전 시민이 단결하여 싸우자! 이기자! 민주의 만세를 부르자!
공수부대가 전원 철수한 다음 날인 22일, 거리는 들뜬 시민들로 붐볐다. 시민들은 계엄군을 몰아내고 광주를 되찾았다는 승리의 쾌감으로 흥분하여 거리로 나왔다. 18일부터 나흘 간 이어졌던 유혈사태가 끝나고 평온이 찾아온 금남로는 간간이 들려오는 총성을 제외하고는 조용했다. 아침 9시가 되면서 시민들은 점차 전남도청 앞 광장으로 향했다. 시민들은 오고 가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투사회보를 읽으며 대략의 정보를 파악하기도 했다. 10시가 되자 금남로와 도청광장은 전날처럼 다시금 인파로 채워졌다. 시민들은 무언가 희망적인 소식이 있기를 기다렸지만 10시 30분 즈음 되어서 나타난 군 측의 헬기는 시민들을 폭도로 몰고 자수를 종용하는 내용의 방송을 하거나 총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 질서를 회복하자는 내용의 전단을 뿌려 시민들을 공분케 했다. 시민들은 제대로 된 수습방법에 대한 언급도 없이 무조건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하라는 군의 명령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 사이 시민군의 조직화가 이루어졌다. 시위대원 중 하나였던 김원갑(20)은 아침 7시 경 시민군들이 머무르고 있던 광주공원으로 달려가 공수부대와 맞서려면 대열의 정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시민군들이 여기에 동의하면서 김원갑을 비롯한 몇몇 청년들이 주도적으로 나서 시민군을 재배치했다. 또한 시민군이 징발하여 사용하던 78대의 차량도 지역별로 나누어 순찰, 중간 업무연락, 환자 수송, 시체 수송 등의 구체적인 임무를 하달했다.[119] 이런 과정을 통해 시민군들은 광주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수십 명씩 조를 짜서 차량을 지원받아 광주 각 지역을 방어했으며, 200여 명의 병력은 도청을 경계하게 됐다. 다음에는 '기동순찰대'가 조직되었다. 기동순찰대는 말 그대로 무장 상태에서 차량을 타고 다니며 계엄군의 공격을 막는 역할을 하는 부대였다. 이들은 외곽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상황을 살폈고 광주를 방어하는데 힘썼다. 이렇게 조직된 시민군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노동자, 학생 등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혹시나 광주 시민들에게 불안을 줄까 싶어서 조심스레 행동하였다.
도청에서는 혼잡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학생들과 청년들이 나섰다. 전날 저녁 8시부터 전남도청은 시민군의 손에 들어왔는데, 안에는 계엄군과 경찰이 버리고 간 물품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진 채로 있었다. 시민군과 학생들은 그 물품들을 일일이 정리하고 분류하고 자기들이 사용했다. 또한 도청 내 상황실의 전화를 이용하여 광주 지역의 시민군들과 연락 체계도 마련하였다. 이를 통하여 광주 내부의 상황은 물론이고 계엄군의 동향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밖에도 사망자와 부상자 사진과 명단을 도청 부근에 붙여놓아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했고, 일반 시민들과 학생들도 받아들여 취사, 행정, 수습위원회 지원, 대민방송. 홍보를 돕도록 했다. 헌데 시간이 흐를수록 도청을 드나드는 사람들 중에는 계엄군이 파견한 정보요원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이 목격되었다.[120] 그러자 학생들은 상황실 출입을 통제하고 업무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증명서를 발행하여 돕겠다고 말하여 상황을 정리하였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움직임도 이어졌다. 아침 8시 10분에는 전남도청 2층 부지사실에서 정시채 부지사 등을 포함한 간부들과 직원들, 그리고 광주 지역의 민주인사들과 유지들이 만남을 가졌다. 정시채 부지사는 10여 명의 지역 인사들에게 사태수습에 나서 달라고 부탁하고, 계엄사령부와의 협상을 통한 사태수습을 제안했다. 그리하여 12시 30분 경 15명의 지역 인사들이 모여 '5.18 수습대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에 참여한 사람은 이종기, 이기홍, 천주교 광주대교구 조철현 비오 신부, 최한영[121] , 윤영규, 신용순, 장휴동, 홍남순, 박윤종,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 등이었다. 이들은 신부, 목사, 변호사, 기업주, 관료, 교수 등의 다양한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수습위원들은 이종기를 위원장으로 하고,[122] 토론 끝에 사태수습을 위한 7개 조항을 결의했다. 그리고 오후 1시 30분에 상무대의 전남북계엄분소로 가서 소준열 분소장을 만나 협상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소준열 분소장은 상부와의 논의가 필요하다면서 협상에 소극적으로 임했고, 결국 첫번째 협상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광장에서는 시민들이 도청에서 발표한 사망자 명단과 인적 사항을 발표할 때마다 모여들어 혹시 자신의 가족이나 친인척이 있을까 확인하였다. 정오에는 YWCA 직원들과 송백회[123] 회원들은 도청 옥상의 국기게양대에다가 검정색 천으로 조기를 만들어 달았다. 이들은 천으로 3천여 개의 검은 리본도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누어줬다. 그러던 오후 3시 도청 앞에서는 제1차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궐기대회의 시작은 자연발생적이었다. 사람들이 도청 광장에 앉아 있던 중에 한 사람이 일어나 자신이 목격한 바를 시민들에게 알렸던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차례로 올라가 18일 이후부터 자신이 겪은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놓았다. 마이크도 없이 이뤄지는 상황이라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시민들은 열심히 경쳥하고 울고 웃으며 박수를 쳤다. 대회 중이던 3시 48분 경에는 태극기가 덮혀진 관에 들어간 시신 18구가, 5시 40분 경에는 23구가 각각 광장 내로 운구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분위기는 과열되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새 도청광장과 금남로에는 10만의 시민들이 모여들어 대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5시 18분이 되어서는 상무대에 협상을 갔던 수습위원들이 돌아왔다. 시민들은 뜨거운 박수로 그들을 맞이했다. 8명의 수습위원들은 도청 분수대로 올라가 협상내용을 말하면서 질서를 강조하였다. 그러던 중 수습위원 중 하나인 장휴동이 "이런 식으로 해서는 결국 폭도밖에 안 된다. 어서 빨리 무기를 반납하자"는 투로 말을 하자, 이 때부터 시민들은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선대학교 3학년생 김종배가 끼여들어 "장휴동 씨는 시민의 입장이 아닌 그 반대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면서 "사태수습만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되어야 한다"고 외쳤다. 그 이후 수습위원장인 이종기 변호사가 "합의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밝히자 시민들의 불만은 커져갔다. 마침내 몇몇 시민군이 공포를 쏘고, 시민들이 야유를 하며 수습위원들은 황급히 물러갔다. 협상의 실패를 안 시민들은 굴욕적 협상 결사반대라 말하면서 수습위에 대해 반발했다. 하지만 무기회수에 대해서는 공감하여 수백여 정의 총기가 회수되었다. 한편 도청 내에서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학생수습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전남대학교 3학년생 김창길을 위원장으로 하여 김종배 등 1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했고 대민업무를 주로 맡았다. 같은 날 도청 뒤의 남동성당에서는 광주의 주요 재야 민주인사들이 모여들어 따로 수습대책을 논의하였다.
우리들은 헌혈버스에 올라탔다... "시민 여러분, 헌혈합시다. 지금 피가 부족해서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차가 도착하자마자 여기저기서 시민들이 몰려왔다. 시민들이 줄지어 섰으므로 헌혈하는 동안은 방송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시민들 중에는 술집 아가씨들도 많은 것 같았다. 나는 몰려든 사람들을 선별해 내는 일을 했다... 사람이 많아 손이 부족하였으나 젊은 여자들이 차 위로 올라와 많이 거들어주었다... 우리는 거기서 4시 가까이가지 헌혈을 받은 후 적십자병원에 들러 혈액을 내려주었다... 우리들이 그날 모은 혈액량은 4백 병 정도 되었다.
당시 헌혈활동을 도운 정무근의 증언[124]
도청 앞 광장 맞은편 상무관 강당에는 수많은 시신들이 무명천에 덮여 뉘어져 있었다. 아직 입관하지 못한 시신도 수십구였으며 무명천 위로 검붉은 피가 배어나왔다. 영령을 모시는 분향대가 입구에 설치되어 향이 피워졌고,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방부제가 뿌려졌다. 분향하려는 시민들이 늘어선 줄은 상무관 바깥 분수대까지 광장을 가로질러 길게 구불구불 이어졌다. 분향을 위해 상무관 문턱에 들어선 사람들은 눈앞에 가득한 희생자들의 숫자에 놀랐다. 분향 후 천천히 관 사이를 돌면서 시신들의 처참한 모습을 직접 확인하며 몸을 떨면서 오열을 삼켰다.
당시 희생자들의 시신을 안치했던 상무관의 풍경[125]
광주민중항쟁에 일어난 또 다른 특징은 질서와 화해, 그리고 수준 높은 민주의식과 참여의식이 유감없이 발현되었다는 점이다. 비록 초기에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을 보고 격분한 나머지 거리로 뛰쳐나와 민중으로 돌변한 시민들이지만 질서의식은 대단했다. 민중은 시민의 안녕과 재산을 보호하자고 호소했다... 이러한 질서의식은 초기뿐만 아니라 '시민공동체 자치시기'에 들어가서도 잘 지켜져 광주시내 700여 은행 및 금융기관이 한 군데도 피해를 입지 않고 1,500억 원의 현금이 고스란히 보전됐다는 사실, 3~4건의 강력사건이 있긴 했지만 오히려 경찰이 엄존하던 이전보다 훨씬 적게 발생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화해와 질서의식은 투철한 민주주의 정신으로 승화되면서 시민 모두를 공동운명체로 묶는 바탕이 되었고, 고통분담을 공유하는 협동정신으로 표출되었다... 각기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내놓는 미덕과 서로 양보하며 함께 인내하는 공동체적 정신이 아낌없이 발휘됐을 뿐,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5월 18일 광주>, 김영택, 역사공간, 2010, p700~701
공권력의 부재 상태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시민자치공동체로서 나름대로의 인간애와 질서를 실천하며 서로를 도왔다. 먼저 시민들은 18일부터 21일까지 이어진 치열한 충돌로 인해 어지러워진 거리를 자발적으로 청소했다. 22일 아침만 하더라도 부서지고 불에 탄 차량들과 바리케이드 잔해, 핏자국 등으로 거리가 얼룩져 있었는데, 시민들은 청소도구를 가지고 나와 쓸고 닦았다. 크레인을 가지고 와 전소된 차량들을 끌어냈고, 쓰레기들을 처리했다. 23일에도 새벽 6시부터 고등학생들을 비롯한 수백여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솔선수범하여 거리를 청소하였다. 그렇게 거리가 깨끗해지자 시장 주변에서는 아낙네들이 길가에 솥을 걸고 밥을 지었다. 그렇게 지은 밥은 거리를 돌아다니던 시민군들에게 무료로 제공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상점과 상가들이 조금씩 문을 열고 손님을 맞았다. 시장도 정상적으로 문을 열어 물건을 팔았는데, 비상상황에서 우려되는 매점매석 등의 행위가 일체 발생하지 않았다. 물론 광주가 봉쇄되어 원활한 물품 공급이 어려워 가격이 올라가기도 했지만, 시민들은 그럭저럭 버텨내었다.
시민들은 부족한 혈액을 보충하기 위해 헌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병원은 18일부터 이어진 계엄군의 폭력진압으로 인해 실려온 부상자들로 넘쳐났다. 병원은 이들을 치료하고 입원시킬 공간과 여력이 없어 애를 먹고 있었는데, 특히 부상자들이 피를 많이 흘려 혈액이 매우 부족했다. 이 소식이 들려오자 전남대학교병원, 광주기독병원, 적십자병원 등 광주 각지의 병원에 시민들이 모여들어 헌혈에 참여하였다. 노인들과 술집 아가씨들까지 헌혈을 요청할 정도로 시민들의 헌혈에 대한 동참은 대대적이었다. 병원들도 직접 구급차를 이끌고 가서 헌혈을 요청했는데, 그 때에도 주민들은 줄을 서서 헌혈을 했다.[126]
무엇보다 시민들이 목말라 한 것은 정보였다. 21일부터 광주 시내의 모든 신문이 발행을 중단했기 때문에 시민들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지를 잘 몰랐다. 그래서 윤상원을 필두로 한 들불야학의 구성원들과 학생들은 투사회보를 발행하여 시민들에게 사실을 알리려고 했다. 제작팀은 광주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수집한 후에 등사기로 일일이 제작하여 수백에서 수천여 장을 제작했다. 그리고는 광주 전역에 배포자들을 보내 시민들에게 소식지를 나눠주는 방식으로 뿌렸다. 투사회보에는 정확하지 않은 소식들도 있었지만, 정보의 부족함에 불편해하던 광주시민들에게는 소중한 대안언론이었다. 또한 5.18 초기에 중구난방이었던 전단지와 소식지들을 하나로 통합하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 투사회보는 들불야학 근처의 빈집에서 생산되다가 25일부터는 YWCA 건물 안에서 제작되었고, 21일부터 27일까지 총 10호가 만들어졌다.
시민군과 광주시민들의 치안에 대한 노력도 빛났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시민군은 각 지역마다 체계적으로 편성되어 효과적으로 방어와 경계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지역마다 지역방위대도 조직되어 백운동, 화정동, 동운동, 서방 삼거리, 산수동, 학운동 등에 배치되었다. 이렇게 시민군이 치안을 대신하니 비록 광주가 공권력이 부재하고 수천 정의 총기가 풀린 상황임에도 안전한 상태였다. 광주 시내의 은행이나 금은방, 보석점 등이 한 군데도 털린 곳이 없었으며, 강력사건도 경찰이 존재했을 때와 비교하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광주에서 일어난 시위와 여기에 참여한 광주시민들과 시민군들이 폭도가 아니라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였다. 시민들도 궐기대회에서 이 점을 언급하며 자랑스러워 할 정도였다.
시위 도중 희생된 시민들의 시신들은 처음에는 병원에 안치되었다가 도청 근처의 상무관[127] 으로 옮겨졌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사망하거나, 암매장되었다가 발굴된 시신들도 동일한 과정을 거쳤다. 도청에서 일하는 시민군과 광주시민들은 시신들을 씻기고, 새 옷을 입히고, 태극기가 덮힌 관 안에 넣었다. 그리고 시신이 더 이상 썩지 않도록 방부제 처리를 했으며, 분향소를 상무관 안에 마련하였다. 수많은 시민들이 죽은 이들을 보고 추모하고자 상무관으로 몰려왔다. 수습위 소속의 학생들은 신분증 검사를 통하여 한 명씩 상무관 안으로 들여보냈다. 상무관 안에는 많은 숫자의 관이 있었고, 관마다 유가족들이 달라붙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시신의 상태도 참혹하여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대부분의 시신은 계엄군에게 곤봉, 개머리판, 군홧발로 두드려 맞거나, 대검에 찔리거나, 총에 맞았기 때문에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시신들이 썩어가면서 더욱 더 충격적인 모습으로 변해갔다. [128] 그걸 본 유가족들은 통곡했고, 이를 추모하는 시민들도 가슴 아파 하였다.
23일 수습위원회에서는 8개 항의 요구조건을 다시 정했다. 무기 반납에 대한 이견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합의가 이루어졌고, 22일에 이은 계엄사와의 협상을 위해 대표로 조철현 신부, 명노근, 한완석, 장휴동, 김창길이 뽑혔다. 이 5명의 대표는 사태수습의 의의를 보이기 위해 회수된 무기 일부를 가지고 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엄군 측은 요지부동이었다. 대표 측은 계엄사가 다른 요구조건을 보장해준다면 적극적으로 무기 회수에 나서겠다고 했지만 계엄군 측은 "무조건적인 무기 반납"만 외칠 뿐이었다. 결국 5명 중 명노근을 제외한 4명은 계엄군이 석방하기로 한 34명의 시민들을 데리고 돌아갔고, 명노근은 홀로 남아 협상을 진행했으나 진척은 별로 없었다. 그 사이 수습위원회에서는 무기 반납을 두고 갈등이 발생하였다. 김창길을 비롯한 온건파는 무기 반납을 통한 사태수습을 주장했고, 김종배를 비롯한 강경파는 무기 반납은 시민의 피를 팔아먹는 행위라 말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는 무기를 반납하고 평화적으로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한편 녹두서점에는 윤상원과 들불야학 교사, 학생, 재야인사, 사회단체운동가 등을 주축으로 하여 '시민궐기대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22일에 있었던 궐기대회에서 시민들의 역량을 보았고, 수습위원회가 관변적으로 흘러갈 것을 우려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광주시민들을 단결시키고 이를 통해 계엄군 측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지도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23일 오후 3시 도청 앞 광장에서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129] 22일과는 달리 격식이 있던 이 대회에서는 애국가 제창, 묵념, 각개각층 주민들의 연설과 발언, 상황 및 정보 보고, 모금 등이 진행되어 15만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특히 시민들의 발언이 눈길을 끌었는데, 노동자 대표로는 YWCA신협 직원 김영철[130] 이, 농민대표로는 해남군 출신의 농민 윤기현[131] 이, 고등학생 대표로는 최치수[132] 가, 시민대표로는 소설가 홍희담[133] 이 각각 나와서 계엄군의 만행을 성토하고 시민들의 단결과 투쟁을 촉구하는 발언을 해서 박수를 받았다. 장례 준비를 위한 모금도 즉석에서 이루어졌는데 1백만 원이 넘는 돈이 30분 동안 모였다. 또 사회자인 전남대학교 학생 김태종이 "이 나라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를 흘리고 싸워서 쟁취하는 것입니다"라고 외치기도 했다. 대회가 끝난 뒤 시민들이 자리를 뜨지 않은 가운데 고등학생들이 <애국가>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친구의 시신을 들고 운구하기도 했다.[134]
수습위원회의 문서
전남대학연합대표자회의 시국선언문
광주 애국시민들에게 - 노동자 대표
민주 시민 여러분 - 시민 대표
4.2. 광주 봉쇄 작전과 민간인 학살[편집]
5·18의 경우 군부는 언론을 철저히 통제하였고 광주 밖에서는 아무도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군부는 관객석을 봉쇄하고 광주에만 제한된 폭력극장을 만들었고 관객이 없는 이상 비폭력은 아무런 전술적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이 관객의 부재는 공수부대의 폭력이 부당함을 호소하고자 하는 광주시민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군부의 언론통제는 광주시민들을 지원할 타 지역 국민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폭력적 대결 외에 비폭력의 선택의 여지를 없애버렸다. 시민들이 MBC를 3차례나 공격하고 결국은 불지르려 하고 KBS에도 방화하게 된 이유는 바로 관객의 배제에 따르는 수많은 덧없는 희생 그리고 목숨을 걸고 투쟁해야 하는 고뇌와 고독에 따른 좌절감의 표출이었다. 방송국에 방화한 것은 단순히 언론의 자유를 위해 군사독재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못된 방송국을 처벌한다는 추상적 이상을 실현한 것이 아니었다.
최정운 저. <오월의 사회과학>. p159
여기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른 곳에서는 모른다는 것이다. 서울의 풀브라이트 담당관인 마크 피터슨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 정말 무서운 일이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The Kwangju uprising : shadows over the regime in South Korea>, 리나 루이스, p165
21일 저녁에 철수한 공수부대는 곧바로 광주를 포위하였다. 군인들은 광주로 들어오는 고속도로와 지방도로 등 주요 진입로를 통제하였다. 3공수여단은 광주 동쪽의 남해안 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를,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은 광주 남쪽의 광주-화순 간 도로를, 20사단은 광주의 서쪽과 북쪽 부근의 광주-목포 간 도로를 차단했다. 이 외에도 국군통합병원, 505보안부대, 전투병과교육사령부, 송정리 군 비행장, 광주교도소 등의 중요 지역들도 삼엄한 경비가 이뤄졌다. 신군부는 광주에서의 시위가 더 이상 확산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광주가 외부와 접촉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계엄군은 각 도로를 봉쇄하고 주변의 산간지역이나 농촌지역까지 통제하며 지나가는 차량이나 시민들을 막아섰다. 이 때문에 시민들은 계엄군을 피해서 몰래 광주를 오가야 했다.
※ 효천역/광주교도소 부근 사망자 명단: 보기 / 접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계엄군은 봉쇄작전을 시민들에게 제대로 통보하지 않았다. 게다가 시민들을 제지하는 방식도 폭력적이었다. 계엄군은 21일 저녁부터 광주로 오가는 차량에 대해 사격을 실시했다. 이 때문에 21일 오후에 전남 여러 지역을 누비다가 돌아오는 시민군들이 피해를 입었다. 대표적인 피해를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광주 서구 백운동 효천역 부근에서는 20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효천역 부근에 있는 죽령산과 매봉산에 매복하여 통행하는 차량들에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이 일로 박재영(25), 왕태경(27)이 목숨을 잃었다. 3공수여단이 주둔하던 광주교도소에서도 무수한 희생이 발생했다. 21일에는 광주로부터 담양으로 돌아가려는 마을 주민 차에 총격이 가해져 임은택(35)과 고규석(37)[135] 이 살해당했다. 또한 교도소 부근을 지나가던 최열락(27)과 김병연(18)도 살해되어 광주교도소 부근에 암매장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전에 사라졌던 연행자와 실종자들도 주변에 암매장 당한 채로 발견되었다. 그들의 신원은 이명진(36), 이용충(35)[136] , 민병열(31), 서만오(24)으로 아마 광주교도소에 온 전후로 살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외에도 안병섭(22)과 서종덕(17)도 목숨을 잃었다.[137] 또한 최연소 부상자도 여기서 발생했다.[138]
※ 통합병원 확보작전 관련 사망자: 보기 / 접기
※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 사건 사망(추정)자 명단: 보기 / 접기
22일 오후 4~5시경에는 국군통합병원 부근의 20사단이 '국군통합병원을 확보해 폭도들의 접근을 막겠다'는 명분하에 주변 지역에 총을 난사했다. 이 때문에 민가에 살거나 길을 지나가던 민간인들이 총에 맞아 8명이 목숨을 잃었다.[139] 23일에는 11공수여단이 주둔하던 주남마을에서 미니버스를 향한 학살이 발생하였다. 주남마을은 광주-화순 간 도로와 너릿재 터널 쪽으로 이어진 도로가 있어서 그 방향으로 가는 차량들이 계엄군의 공격을 받아 왔었다. 이날 오전 9~10시에서 12인승 승합차가 공격을 받아 탑승자 11명 전원이 사망했다. 이를 모른 상태에서 이번에는 오후 2시경 시민군 몇 명과 여성 노동자, 여고생 등 총 18명을 태운 미니버스가 왔다. 이들이 주남마을로부터 650m 정도 떨어진 곳에 왔을 때 군인들이 제지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붙잡힐 것을 염려한 버스는 멈추지 않았고, 곧 군인들은 차량을 향해 무차별 난사를 감행했다. 시민군 몇 명이 대응사격을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승객들은 총과 손수건을 흔들며 항복 표시를 했지만 사격은 계속되었다. 결국 18명 중에 15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살아남은 3명 중에 부상자 2명[140] 이 계엄군에 의해 사살됨으로서 최종적으로 1명이 생존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홍금숙이었다.[141] 한편 총격의 와중에 지원동에 살던 선종철(43)이 거리의 사람들을 귀가시키다가 살해당하기도 했다.[142]
※ 계엄군 사망자 명단: 보기 / 접기
※ 송암동 민간인 학살 피해자 명단: 보기 / 접기
24일에는 계엄군 간 상호 오인 전투가 2차례나 발생했다.[143] 이날 새벽부터 광주비행장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하달받은 제11공수여단은 20사단에게 원래 주둔지인 주남마을을 인계한 후 이동하고 있었다. (#) 그런데 문제는 11공수여단의 차량 행렬은 그 길을 지나가는 도중에 대체 무슨 정신나간 생각을 한 것인지, 이들은 아무렇게나 묻지마로 눈에 보이는 곳 아무곳이나 총알을 마구 갈겨댔다.(#) 이 때문에 진월동 원제저수지에서 물놀이를 하던 중학생 방광범(13)과 효덕국민학교 부근에서 놀던 초등학생 전재수(10)가 총에 맞아 숨졌다. 13시 55분경에는 선두에 서서 이동하던 제11공수여단 63대대 병력을 보병학교 교도대가 시민군으로 오해하여 사격을 감행하며 일대 전투가 일어났다. 교도대는 무반동총과 수류탄까지 쏴가면서 공격했고, 11공수여단도 반격에 들어가 30분간 교전이 치뤄졌다. 전투는 11공수여단이 교도대가 있던 산의 매복지를 점령하며 끝났다. 이 일로 군인 10명이 사망했다.[144]
오인사격으로 군인들이 희생되자 분노한 계엄군은 그 보복으로 인근 마을의 주민들을 학살했다. 군인들은 송암동 남선연탄 공장 근처의 한 민가로 들어가 그 집에서만 3명의 청년을 총살했다. 이 일로 김승후(19), 권근립(25), 임병철(24)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또 총소리에 놀라 하수구에 숨어서 상황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박연옥(51)도 계엄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나오라는 말에도 공포에 질려 나오지 못하는 것을 계엄군이 무작정 하수구 안으로 총을 갈겼기 때문이었다. 이 외에도 수많은 마을 주민들이 총상을 입었으며, 주변 양계장에는 칠면조 250여 마리가 떼죽음을 당하는 등 상당한 피해가 발생하였다. 한편 같은 날 오전 9시 55분에는 호남고속도로에서 31사단 96연대 3대대 병력 31명에게 전교사 기갑학교 병력 120명이 공격을 가했다. 송암동에서처럼 똑같이 31사단 군인들을 시민군으로 오인했던 것이다. 이 일로 31사단 소속 군인 3명이 죽었고, 민간인 2명과 군인 10명이 부상을 입었다.
4.3. 시민군의 대응[편집]
4.3.1. 학동지역 교전[편집]
5월 21일 저녁 7시경, 학동에 배치된 시민군들은 주남마을로 철수하던 계엄군하고 교전, 3명을 사살하는데 성공했다
4.3.2. 화정동 국군통합병원 인근 교전[편집]
5월 22일, 국군통합병원 인근에서 제20기계화보병사단 소속 계엄군이 갑자기 뜬금없이 주변의 민간인들에게 무차별 묻지마 총기난사 학살을 시작했다. 그러자 시민군들이 응사하면서 군인 한명이 사망했다.
4.4. 수습이냐 저항이냐[편집]
(편의상 항쟁파는 '항', 수습위는 '수'로 한다)
수 : 어떠한 명분으로도 더 이상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
항 : 더 이상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는 동감이다. 그렇지만 지금 상태에서 무기를 반납하고 항복한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지겠는가.
수 : 일단 계엄군을 믿어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계엄군은 정부 당국과도 여러가지 사후처리 문제를 협의해본다고 했다.
항 : 계엄군을 모르고 하는 소리인가... 우리의 주장, 피 흘리며 죽어간 사람들이 외쳐댄 요구사항은 한가지도 관철되지 않았는데, 여기서 항복해버리자는 말인가? 이것은 투쟁과정에서 죽은 투사들을 매도해버리는 일이다...
해방광주의 투쟁노선을 두고 벌어진 격론 中[145]
해방광주의 향방을 두고서 수습위원회 내에서의 갈등은 깊어갔다. 무기 회수를 주장하는 온건파와 계엄군의 사과 및 재발방지를 주장하는 강경파 사이의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이런 의견 대립에 대하여 시민 대부분은 회수는 해야하나 무조건적인 반납은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수천여 정의 총기가 풀려 청소년들까지 무기를 들고 다니는 상황이 위험천만할 수 있다는 것에는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다만 무기를 반납하는데 있어서 제대로 된 협상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수습위 위원들을 통한 무기회수는 계속되었다. 22일에도 수백 정이 회수되었으며, 23일부터는 신부, 변호사, YWCA 회장 등을 포함한 일단의 수습위원[146] 들이 광주 곳곳을 돌아다니며 시민군을 만나 무기를 회수할 것을 요청했다. 기동순찰대도 광주 지역 내의 지역방위대들을 만나 무기를 반납해달라고 했다. 대다수는 어쩔 수 없이 무기를 반납하고 해산했지만, 거기에 반발하는 시민군도 많았다. 특히 계엄군 간의 대치 상태가 계속 되고 있던 지역에서는 무기 반납을 끝까지 거부하였다.[147] 어쨌든 25일까지 4,500여 정의 무기가 회수되었다. 그렇지만 무기 회수는 해방광주에 있어서 뜨거운 감자로 자리잡았다. 무기를 회수했으니 그러면 이제 어쩔 것인가?
사실 '무기 회수'는 '무기 반납'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채로 수습위가 급히 진행한 것이었다. 거기에다가 계엄군이 수습위와의 협상에 있어서 비협조적으로 굴며 무조건적인 무기 반납을 주장해왔다. 그렇기에 온건파와 강경파의 충돌은 더욱 첨예하게 진행될 수 밖에 없었다. 5월 24일 오후 1시 경 도청 상황실에서는 학생수습위원회가 열렸는데 학생수습위원회 부위원장이자 강경파인 김종배가 제시한 요구사항[148] 에 몇몇 수습위원들이 반발하였다. 여기서부터 학생수습위원회 내에서는 온건파 김창길과 강경파 김종배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김창길은 무조건 무기 반납 후 수습을 주장했고, 김종배는 납득할 수 있는 협상을 통한 수습을 주장했다. 둘의 갈등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론의 근본적 차이에서 기인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광주 내 재야 및 운동권과 관련된 윤상원과 정상용은 김종배와 접촉하여 힘을 모으고자 했다. 한편 21일 남동성당에서 모임을 해왔던 재야 인사들도 수습위의 활동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날 오후 2시 30분에는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도 23일처럼 재야, 운동권, 녹두서점, 들불야학 인사들의 영향력이 작용했으며, 시민들의 많은 호응을 얻었다. 궐기대회에 참여한 10만여 명의 시민들은 수습위의 태도가 미온적이고 투항적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자 수습위는 계엄사 측과의 협상내용을 인쇄하여 배포하거나 기기 설치를 방해하고 전기를 끊는 등, 궐기대회에 대해 곱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또한 계엄군이 파견한 정보요원들도 집요하게 궐기대회를 방해하려고 했다. 이에 분노한 청년들은 전투경찰이 쓰던 가스차의 마이크와 스피커를 이용해 수습위를 규탄하였다.[149] 여기에 시민들도 도움을 주면서 궐기대회는 무사히 치러졌다. 이 대회도 다양한 시민들이 참여하여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나누었다. 대회 도중에는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는데, 사회자가 "이 비는 원통하게 죽은 민주영령들이 눈을 감지 못하고 흘리는 눈물입니다"라고 말하자 시민들은 비를 맞으면서 대회를 재개하였다. 얼마 후 비가 그치자 분수대에 전두환이라 써진 허수아비를 데리고 와 화형에 처했다. 전두환 허수아비가 불에 활활 타자 도청 앞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열렬히 환호했다. 이 장면을 위르겐 힌츠페터를 비롯한 외신기자들이 취재 및 촬영을 하였다. 대회는 오후 6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대한민국 모든 지성인에게 고함 - 전남대학교 교수 일동
껍데기 정부와 계엄당국을 규탄한다
전국 민주시민에게 드리는 글
국민에게 드리는 글 - 광주시민일동
시국선언서 -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승리 - 윤공희 대주교
저녁에는 도청 상황실에서 열린 학생수습위원회에서 다시 무기 반납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김창길과 김종배는 팽팽하게 대립했고, 역시나 둘의 생각은 평행선을 달렸다.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이 무기를 반납하자는 기세를 보이자 시민군 중 하나였던 박남선[150] 은 분개하여 의자를 집어던지서까지 무기 반납에 반대하였다. 일부 온건파 학생들은 무기 반납을 거부하는 강경파를 보고 수상하다며 간첩 아니냐고 의심하기도 했다. 회의는 새벽 1시까지 이어졌고, 여기서 온건파 학생 몇 명이 수습위원회 대열에서 이탈하였다. 그리하여 학생수습위원회 기구는 일부 변화를 거쳤다.[151] 그러나 온건파와 강경파 간의 갈등이 완전히 봉합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김창길을 비롯한 온건파와 김종배를 비롯한 강경파가 각각 위원회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강경파가 모르는 사이 전남도청 아래에 위협용으로 보관 중이었던 TNT와 다이너마이트가 군 측에 의해 제거되었다.[152]
5월 25일이 되자 계엄군 측 정보요원들의 공작도 심해져갔다.[153] 가장 유명한 것이 아침 8시에 발생한 이른바 독침사건이다. 시민군 중 하나였던 장계범(23)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독침이다"라고 소리치곤 쓰러졌고, 옆에 있던 정향규(23)라는 사람은 그를 도우려고 상처에 입을 갖다댔다가 역시 쓰러졌다. 놀란 사람들이 둘을 전남대학교병원으로 이송하였다. 이 사건이 터지자 몇몇 사람들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간첩" 운운하며 대열에서 이탈하기도 하였다.[154] 하지만 사건의 진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풀렸다. 장계범은 자신이 방심한 사이 독침을 맞았다고 주장했지만, 얼마 치료도 받지 않고 병원에서 퇴원하여 종적을 감춘 것이다. 그의 진단서에는 의식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약물중독에 대한 이상증세 또한 없다고 적혀 있었다. 게다가 같이 실려온 정향규는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시민들에게 잡혀 취조를 받았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이 장계범과 짜서 이 사건을 일부러 조작했다고 자백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계엄군 측이 벌인 조작사건으로 결론내려졌다.[155]
계엄군이 광주시 곳곳에서 천인공노할 잔악한 행위를 수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행했기 때문에, 자기 아들딸들이 군인들의 몽둥이에 얻어맞고 구둣발에 채여 유혈이 낭자한 채 길바닥에 쓰러지고, 다 죽어 뻗어버린 채로 차에 실려가는 것을 본 시민들이 얼마나 격노하였겠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셨습니까... 광주 사태의 수습을 위해 지금이라도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사태 발단의 진실을 정부와 군이 인정을 하고, 겸손한 사죄의 표지를 하셔야 할 것이고, 군인들의 만행에 대한 명령 책임자를 엄중히 처단할 것을 약속하셔야 우선 급박한 현 사태의 수습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네 발로 기어다녀야 하며, 개, 돼지처럼 입을 그릇에 처박고 먹으며 살아가야 한다. 폭력과 살인을 일삼는 유신잔당들이 우리를 짐승처럼 치고 박고 개 잡듯이 끌고가며, 찌르고 쏘았기 때문이다. 두 발로 걸으며 인간답게 살려면 목숨을 걸고 민주화 투쟁에 투신해야 한다. 지난날의 침묵, 비굴했던 침묵의 대가를 지금 우리는 치르고 있는 것이다. 부마사건으로 숨진 사람들은 유신괴수의 죽음으로 피의 값을 받았다... 자유와 인권을 위해 죽어간 수많은 우리 시민들의 피의 값도 마땅히 보상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이제 우리는 결단의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비굴하게 짐승처럼 천한 목숨을 이어가든지, 아니면 인간다운 민주시민으로서 살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
오전 10시에는 재야인사, 운동권 학생들이 YWCA 2층 총무실에 모여서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여기서 윤상원과 정상용은 수습위원회의 태도를 비판하고 새로운 투쟁조직의 건설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무조건적인 무기 반납은 사태 수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싸움은 우리가 할테니 어른들은 우리들을 지원해 달라고 호소했다. 여기에 재야인사들의 의견은 양분되었다. 몇몇은 민주화를 위한 계속적 투쟁의 필요성을 느껴서 이들의 제안을 지지했으며, 몇몇은 지도부가 있다하더라도 계엄군의 압도적 화력 아래 분쇄되어 많은 희생이 생길 것을 염려해 반대한 것이다. 오후 2시, 천주교 광주대교구 남동성당에서 재야인사들이 다시 모였다. 재야인사들은 2시간 동안 수습위와 사태 수습의 향방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인 끝에 기존의 수습위원회에 참여하기로 했다. 이때의 수습위원회는 이종기, 명노근, 조철현 비오 신부만 남고 전부 이탈한 상태여서 재야인사들이 참여하자 보다 강경한 태도를 띠게 되었다. 새로 구성된 수습위는 곧바로 재야인사 중 천주교 광주대교구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가 제안한 4개 항[159] 을 토대로 「최규하 대통령 각하께 드리는 호소문」을 채택했다. 이들은 25일 밤 11시 경에 김성용을 대변인으로 하여 '광주사태수습대책위원회'의 이름으로 이 문건에 서명하였다.[160]
오후 3시에는 도청광장에서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참가인원은 5만여 명으로 저번에 비해서는 절반으로 줄었지만 여전히 열광적인 분위기였다. 시민들은 각 동별로 피켓을 들고 모여서 분수대를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궐기대회 도중에는 많은 성명서들이 발표되었는데, 특히 시민군의 이름으로 발표된 「우리는 왜 총을 들 수 밖에 없었는가?」는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이 어떻게 21일 무장봉기를 일으켰는지를 잘 설명해주었다. 또한 주최 측을 통해 피해상황이 중환자 520명, 경상자 2,170명, 사망자 70여 명으로 파악되어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그런가하면 미군 항공모함이 부산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이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161]
광주시민 여러분께 - 광주시민 일동
우리는 왜 총을 들 수 밖에 없었는가? - 시민군 일동
광주사태에 대한 우리의 견해 - 광주사태수습위원회
희생자 가족에게 드리는 글 - 전남,광주시민 일동
전국 종교인들에게 보내는 글 - 광주시민 일동
국민에게 드리는 글 - 광주 민주학생 일동
전국 민주학생에게 보내는 글 - 광주 민주학생 일동
이 날에도 온건파와 강경파의 갈등은 이어졌다. 새벽에 학생수습위원장 김창길은 온건파를 규합하여 일방적으로 무기 반납을 결정하였다. 여기에 김종배와 박남선은 크게 반발했다. 윤상원은 둘을 만나 서로의 힘을 합치기로 하였고, 학생수습위 내의 강경파 인사들과도 접촉하였다. 그리하여 오후 7시 경 윤상원을 비롯한 강경파는 도청 식산국장실에서 새로운 항쟁지도부를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그러자 온건파인 김창길은 "도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냐"며,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 작정이냐"면서 비난했다. 이에 강경파와 온건파 간의 언쟁이 벌어졌다. 김창길은 "무기를 놓고 당장 도청을 떠나자"고 말했고, 윤상원은 "여기서 죽으면 죽었지 총을 놓지는 못하겠다"면서 버텼다. 결국 김창길은 학생수습위원장 직을 내려놓고 도청을 빠져나갔고, 온건파 인사들도 대열을 이탈하였다. 결국 오후 10시 강경파를 중심으로 한 민주투쟁위원회(학생시민투쟁위원회)가 출범하였다.
민주투쟁위원회는 본격적인 항쟁지도부의 첫 출발이었다. 이들은 제일 먼저 수습활동으로 인하여 약해진 시민군과 외곽경비를 강화해야 했다. 그리하여 예비군 동원령을 내려서 외곽경비를 보충할 계획을 세웠다. 또한 도청 지하 무기고에 있는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해 계엄군과의 협상을 진척시켜 보자는 제안도 나왔다.[169] 다음은 시민의 합동장례식에 대한 안건이었는데, 5월 28일에 '도민장'으로 치르기로 하였다. 또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들을 검토하였다. 여기서는 시내버스 정상 운행, 공무원 및 경찰 비무장 근무, 상가 및 시장 정상 운영, 지역 언론 정상 가동, 동네별 피해상황 파악, 유류 사용 통제, 시민군 재편 등이 제안되었다. 한편 시민군에서는 대학생들을 일원으로 모으는 홍보활동을 했다. 여기에 70여 명의 청년들이 모여들었는데, 이들은 시민군과 수습위, 항쟁지도부를 돕거나 도청과 인근 지역을 방어하는 일을 맡았다. 이들은 YWCA에서 간단한 교육을 받고 투입되었다. 물론 일반 시민들 중에서도 시민군에 들어온 사람도 많았다.
계엄군과 정부 측에서는 구체적인 진압작전을 이날 확정하였다. 신군부 세력은 육군회관에서 회의를 열고 상무충정작전이라는 진압작전을 마련하고 시행 날짜는 5월 27일로 정했다. 또한 신군부는 1980년 5월 26일 광주시민들을 무력 진압하기 바로 전날에 계엄군 투입 결정을 미국에 미리 알리기도 하였다. 군부, 계엄군 투입 전날 미국에 "사전 발표는 저항 키울 수도"
이후 최규하 대통령이 광주를 방문하였다. 이는 신군부가 정한 진압작전을 국방부 장관 주영복과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보고를 하면서 광주에 내려가 볼 것을 종용했고, 전두환도 광주에 내려가라고 권했기 때문이다. 이를 최규하가 받아들이면서 오후 6시 경 군인들과 정부 인사를 대동하고 광주에 나타났다. 하지만 최규하는 광주에서 와서 광주시민들이나 수습위원들을 단 한 명도 만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상무대 전남북계엄분소를 방문하여 소준열 계엄분소장과 장형태 전남도지사를 만났을 뿐이었다.[170] 그리고 저녁에는 그가 광주에서 녹음한 담화문이 발표되었다. 물론 이 담화문에는 광주의 진실은커녕 군을 치하하고 진압의 피해를 최소화하라는 등의 훈시 정도 밖에 없었다.
한편 미국 국방부는 23일부터 국군 20사단 병력이동 승인을 발표했고, 국내외에서는 미국이 끌고 온 항공모함이 구설수에 올랐다. 그 항공모함은 미7함대 소속 코럴시호(USS Coral Sea)였다. 이 소식을 들은 광주시민들은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이 민주화운동을 하는 우리들을 도우려 왔다면서 기뻐했다. 하지만 이 배가 온 것은 민주화를 외치는 광주시민들을 도와주기 위함이 아니라 자국 국민들을 대피시키고 북한에게 경고를 하기 위함이었다.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사실상 방관자였던 미국의 태도는 80년대의 민주화운동 중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과 같은 일이 벌어지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관련 뉴스 영상
4.5. 최후의 저항, 항쟁의 완성[편집]
시간이 필요하다. 노력해서 수습한 것을 군이 약속을 깼으니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며칠을 참고 후퇴까지 한 군의 사기에 영향이 있다는 것이다. 군은 항상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타당한 말이다. 국군은 언제나 이겨야 한다. 그러나 적군에 이겨야 하는 것이지 나라의 주인인 국민, 80만 광주시민에게 이겨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군은 절대로 광주 시내에 진입해서는 안 된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민주학생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시위하고 있는 것을 총검으로 무차별하게 살상하고 울분을 참지 못한 전시민을 의거케 해놓고 지금 와서 오리발을 내밀다니...
김성용 신부의 일기 中
5월 26일 새벽 4시경, 계엄군이 화정동에서 농성동 방면으로 진출했다. 이 소식을 듣자 도청 내에서는 계엄군을 막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자, 홍남순 변호사, 이기홍 변호사,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 이성학 장로, 조철현 비오 신부 등 17명의 수습위원이 서로 모여 회의를 했다. 여기서 김성용 신부는 "우리가 먼저 탱크 앞에 가서 죽자"면서 수습위원들을 이끌고 계엄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시민들이 그 뒤를 따르면서 긴 행렬이 행진했는데, 훗날 사람들은 이를 두고 죽음의 행진이라 불렀다. 일행은 1시간 정도 행진하여 농성동에 다다랐고, 계엄군의 탱크와 대치하였다. 수습위원들은 군인들에게 군대를 후퇴시킬 것을 요청했고, 군인들이 후퇴하면서 위기는 일단 넘겼다. 수습위원들은 상무대 전교사로 가서 4시간 30분 동안 계엄군 측과 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계엄군 측은 몽니를 부리면서 "오늘 중으로 무기를 넘기고 해산하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미 계엄군은 진압작전을 다 세워놓은 뒤였기 때문에 무엇 하나 꿇릴 게 없었던 것이다. 결국 수습위원들은 빈 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173]
새벽에 계엄군이 몰려온 이 사태에 항쟁지도부는 오후의 궐기대회를 오전으로 옮겼다. 그리하여 오전 11시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갑작스러운 시간 변경에도 불구하고 3만여 명의 시민들이 도청광장 앞에 모여들었다. 시민들은 이 대회에서 계엄군의 진입이 군과 수습위 간의 협상을 위반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시민들은 국기에 대한 경례, 묵념, 상황 보고 등을 거쳐 대한민국 국군과 최규하 대통령을 향한 메세지를 발표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민주주의를 열망하고 시민들을 고취시키는 시 2편이 낭송되었다. 시민들은 시가 한 구절 낭송될 때마다 똑같이 따라하며 음미하였다. 또한 항쟁지도부의 주도로 「80만 민주시민의 결의」가 발표되었다. 여기서 항쟁지도부와 시민들은 '수습' 아닌 민주화를 말함으로써 항쟁의 목적이 민주주의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궐기대회는 오후 1시까지 이어졌고, 대회 후에는 시민들이 일제히 일어서 가두행진에 나섰다. 시민들은 스쿨버스를 앞세우고 금남로를 행진하여 광주공원, 전남대병원 등을 거쳐 다시 되돌아왔다.[174] 시민들은 '우리는 싸움을 포기할 수 없다', '무기 반납은 절대로 안 된다',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죽이자'는 구호를 외쳤다.
80만 민주시민의 결의
계엄군의 허위약속을 폭로한다 - 시민대책위원회
과도정부의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내는 글
광주 민주시민 여러분께
전국 언론인에게 보내는 글
대한민국 언론 지성인들에게 보내는 글
대한민국 국군에게 보내는 글
정부의 오도된 보도를 바로잡는다
민주화여! - 궐기대회 당시의 시
계엄군과 광주시민 - 궐기대회 당시의 시
광주시민은 통곡하고 있다
오후 2시 도청 내무국장실에서 항쟁지도부는 구용상 광주시장을 만나 9가지의 사항을 요구하였다. 그 요구조건은 '① 1일 백미 1가마씩 제공 ② 부식 및 연료 제공 ③ 관 40개 제공 ④ 구급차 1대 지원 ⑤ 생필품 보급 원활히 ⑥ 치안문제는 경찰이 책임지라 ⑦ 시내버스 운행 ⑧ 사망자 장례는 도민장으로 ⑨ 장례비 지원'으로 전날 항쟁지도부가 논의를 했던 것들이었다. 부지사실에서는 정시채 부지사, 유족 대표 등과 함께 5.18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 문제를 논의했다. 여기서는 장지는 망월동으로 하고, 날짜는 5월 28일로 잡았다. 한편 같은 시각인 2시 도청 식산국장실에서는 기동타격대가 조직되었다. 이 시민군 조직은 이전의 기동순찰대를 이어받는 것이었고, 기존의 기동순찰대원 대부분이 참여했다. 7조까지 조직된 이 기동타격대는 6개 조는 기동순찰대의 업무를 그대로 이행하였고, 나머지 한 조는 예비부대로 편성되었다. 이들은 낙오되거나 잠입한 군인들을 체포하여 군부대로 보내주었고[175] 순찰활동을 도맡았다. 약 40~70명 정도가 기동타격대원으로 활동했을 것을 추측된다.[176]
오후 3시에는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마지막으로 개최되었다. 이 궐기대회에서는 수습위원들의 절망적인 협상결과가 발표되면서 시민들은 계엄군의 진압이 임박했다는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많은 시민들이 올라와서 자신의 겪은 이야기들을 했다.[177] 어떤 이는 폭도들이 난동을 부린다는 언론 보도만 믿고 무서워 나오지 않았는데, 실제로 나와보니 보도와는 다르다면서 놀라워했다. 누군가는 8.15 광복부터 현재까지의 정치경제적 문제점에 대해 성토했다. 그런가하면 무등산 증심사에서 왔다는 한 스님은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승려가 살상이 불가피한 싸움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여 눈길을 끌었다. 이 대회에서는 오전에 있었던 대회에서 발표된 글들이 재차 발표되었으며, 보다 온건한 투로 4개 항목[178] 을 호소하기도 했다. 궐기대회가 끝날 즈음 항쟁지도부는 오늘밤 계엄군이 공격해올 가능성이 크다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궐기대회 이후 5천여 명의 시민들은 금남로를 거쳐 계엄군과의 대치지역까지 이동하여 행진하고는 도청으로 돌아왔다.
학생수습위원회가 항쟁파와 투항파로 나뉘어서 싸우고 있는거야. 정상용, 김종배는 이 참혹하게 죽은 시신을 놔두고 절대 도청을 나가지 않겠다고... 김창길은 5시 이후에는 나가겠다고... 그 꼴을 보니 속이 뒤집혀서 "비극 속에 비극을 보는 것 같다. 모두 힘을 합쳐 싸워도 모자라는 판에 이게 무슨 추태냐. 나는 이런 꼴을 못 보겠으니 내가 나가겠다"라고 호통을 쳤어. 김창길이는 끝내 도청을 나갔어... 정상용과 김종배가 "우리는 모두 죽고 단 한 사람이 남더라도 끝까지 여기 있겠습니다. 우리는 못 나갑니다. 우리와 함께 최후까지 일을 합시다"라고 울면서 말했어. 그 때가 7시쯤 되었을 때야.
의 증언 中
이 무렵 도청 앞에는 200~300여 명의 시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때 어떤 젊은이가 메가폰을 들고 "여러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죽어도 좋다는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돌아가십시오. 오늘밤 계엄군이 쳐들어오면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그리고 전멸할 것입니다"라고 외쳐댔다.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비장한 각오가 서려있었다. '광주'는 마지막 고비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5월 18일 광주>, 김영택, 역사공간, 2010, p519
그러나 이런 피 어린 애절한 호소와 저항은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결국 26일 오후 5시 도청 대변인실에선 처음이자 마지막 외신 기자회견이 열렸다. 대변인 윤상원은 10여 명의 외신기자들 앞에 섰다.[180] 통역은 미국선교사 집안의 인요한(John Linton)이 맡아주었다. 기자들 앞에서 윤상원은 항쟁지도부의 입장, 계엄군 측과의 협상결과 보고, 피해상황 등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와 국제적십자사에게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해달라고 부탁하였다. 3시간의 기자회견 동안 윤상원은 "우리는 오늘 여기서 패배하지만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라며 계엄군에 맞서 싸울 것임을 천명했다. 한 기자가 항복할 것이냐, 싸우다 죽을 것이냐고 묻자 윤상원은 "최후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답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볼티모어 선>의 블래들리 마틴 기자는 그에 대해 "죽음의 예감 속에서도 최후의 날까지 싸우리라는 다짐이 얼굴에 잘 나타나 있다"고 증언했다.[181]
한편 정시채 부지사는 오후 5시 경 항쟁지도부 인사들을 만나서 계엄군이 27일 들어올 것이라며 빠져나갈 것을 종용했다. 오후 6시 경에는 민주투쟁위원회의 마지막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항쟁지도부 인사들과 재야 인사들을 포함해서 옛 학생수습위원회의 온건파 인사들도 모였다. 온건파인 김창길은 빨리 무기를 반납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강경파인 정상용과 김종배 등은 여기에 반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그렇게 충돌하던 양측은 강경파 박남선이 권총을 빼들고 강경하게 나서며 무기 반납과 투항을 주장하는 사람은 없애버리겠다고 소리쳤다. 결국 김창길 등 온건파는 밤 9시 경에 도청을 빠져나갔다.[182] 한편 도청 부근에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던 200~300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은 시민군에 편입되었으며, YWCA에는 70여 명의 대학생이 남아 투쟁을 돕기로 하였다. 그 사이 학생과 수습위원 11명이 계엄군 측을 방문하여 진압을 늦춰달라고 요구했지만 군에서는 "무장을 해제하고 무기를 반납하라"면서 기한은 밤 12시까지라고 했다. 진압작전을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편 결전을 준비하며 시민군은 나이가 어린 학생들과 여성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부탁했다.[183]
진압작전을 앞둔 시민군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184] 도청에서는 상황실, 조사반, 민원실, 지하 무기고 등의 구역에서 각 항쟁지도부와 시민군 간부들과 대원들이 포진해 있었다. 시민군의 취사와 홍보를 담당하는 여성들도 그곳에 같이 머물고 있었다. YWCA에서는 70여 명의 시민군들이 윤상원의 지도 아래 훈련을 받았고, 광주 시내에서는 50여 명의 기동타격대원들이 거리를 순찰하였다. 이 외에도 YMCA, 전일빌딩,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계림국민학교 등의 지역에서 적게는 10명, 많게는 수십여 명의 시민군들이 포진해 있었다. 시민군들은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면서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하기도 했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오기도 했다.[185] 자정이 넘고 새벽이 되면서 시민군들은 계엄군을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드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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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계엄군은 27일 자정부터 계엄군은 광주 시내의 시외전화선을 차단하고 '상무충정작전'이란 명칭으로 진압 작전에 돌입했다. 이들은 5개 방향으로 광주로 접근하여 광주공원, 관광호텔, 전일빌딩 등을 점령하고 최종 목표지인 전남도청까지 완전히 장악한다는 작전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각 부대별로는 제3공수여단이 도청을, 제11공수여단이 관광호텔, 전일빌딩, YWCA를, 제7공수여단은 광주공원을 각각 작전지역으로 맡았다. 또 제20사단은 지원동→광주천→적십자병원→전남도청 남방, 지원동→전남대학교병원→전남도청 정문, 백운동→한일은행→전남도청 정문 등 3가지 경로로 들어오고, 제31사단은 화정동→양동→유동 삼거리→금남로→전남도청 정문 경로로 들어오기로 하였다. 이 작전을 위해 47개 대대 2만 317명이 광주로 들어왔고, 이 중 실제 전투에 참여할 숫자는 6,168명이었고 특수작전을 펼칠 병력은 317명이었다. 특공조들은 시민들의 반발을 피하고자 20사단 병력으로 위장하려고 녹색 군복을 입은 상태였다.[186]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장성들은 진압작전에 참여하는 계엄군들을 치하하며 진압작전을 독려하였다.[187] 5월 27일 진압작전 당시 계엄군의 동선
사랑하는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끝까지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새벽 2시 즈음 되어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지쳐서 잠든 시민군들은 모두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시민군들은 카빈 소총과 총알을 대원들에게 배급하였고[189] , 도청 내의 여성들을 피신시켰다. 도청에서는 건물은 물론이고 주변 지역 구석구석에 시민군들이 포진하였다. YWCA에서는 투사회보 제작팀, 들불야학 구성원, 고등학생 등이 있었는데 어린 학생들과 여성들을 대피시키고나니 30여 명이 남았다. 기동타격대는 1조와 3조가 도청 부근을, 2조가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을, 5조가 광주역 부근을, 6조가 도청 옆 상무관을, 7조가 도청 안 2층에 각각 배치되었다. YMCA에서는 예비군들로만 별도로 4개 분대가 구성되어 도청과 계림동 방면으로 출동하였다. 시민군은 당시 상황실장 박남선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행동했다. 3시 30분 즈음에 시민군들의 배치는 끝이 났고, 전체 340여 명 정도의 인원이었다. 한편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은 민원실 2층 강당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계엄군이 조금씩 밀려오는 듯 그 사이에도 총소리가 가끔씩 들려왔다.
새벽 3시 50분에는 홍보부에서 활동하던 박영순이 눈물을 흘리면서 마지막 방송을 하였다. 그녀는 도청 상황실 내의 방송실의 기기를 이용해 울먹이면서 방송을 했고, 방송은 도청 옥상의 스피커를 통해 광주 시내에 퍼져갔다.[190] 깨어있던 시민들은 그 방송을 들었고, 두려움에 밖으로 달려나오지는 못했으나 그 목소리를 잊지 못했다. 그러다 방송은 계엄군의 진압이 임박한 새벽 4시를 전후하여 기획위원 이양현이 전원을 내리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이 때에는 이제 계엄군들이 외곽지대는 물론이고 경고 방송을 하고 행진곡을 울리면서 광주 시내에 진입하여 각지의 시민군을 제압하며 전남도청을 옥죄고 있었다.
새벽 4시가 되자, 계엄군은 마침내 전남도청을 완전히 포위했다. 계엄군은 전남도청으로 난입하여 시민군들을 보이는 족족 공격하여 체포하거나 사살했다. 항쟁지도부와 시민군 간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은 도청 민원실에 있다가 계엄군의 총을 맞고 살해당했으며, 그와 함께 있던 김영철과 이양현은 체포되었다. 정해직, 윤강옥, 정상용, 박남선 등도 계엄군에게 붙잡혀 도청 밖으로 끌려나갔다. 수습위원으로는 유일하게 시민군과 함께 했던 이종기 변호사도 계엄군에게 포박당했다. 그렇게 도청 내의 각 구역은 하나씩 계엄군에게 점령당했고, 시민군들은 하나 둘 저항력을 잃어갔다. 마침내 5시 10분 계엄군은 도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전남도청에서의 진압작전은 성공적으로 종료되었으며 시민군 16명이 목숨을 잃고 200여 명이 체포되었다. 그에 반해 계엄군의 피해는 사망자 0명, 부상자 2명이 전부였다.
전일빌딩, YMCA, 관광호텔에서는 시민군이 얼마 없었기에 계엄군에 의해 쉽게 제압되었다. YWCA에서는 계엄군과 시민군 간 1시간 정도의 교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도청에서처럼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계엄군을 시민군이 이길 수 없었다. 결국 투사회보 제작을 담당하던 박용준이 피살당하고, 여러 명의 시민군들이 총에 맞아 심한 부상을 입었다. 광주공원에서는 10여 분 정도의 교전이 발생하여 시민군 1명이 사망하였다. 월산동 부근에서는 충돌로 인해 7공수여단 출신 군인 1명[191] 과 시민군 1명이 사망하였다. 계림국민학교에서는 10여 분 간의 교전으로 15명의 시민군이 체포되었고, 근처에 있던 광주고등학교 수위 양동선(45)이 여기에 말려들어 총을 맞고 사망했다.[192] 이렇게 시민군을 차례차례 제압한 계엄군은 새벽 5시경 "폭도들은 투항하라. 너희들은 포위됐다. 총을 버리고 투항하면 생명을 보장한다"라며 KBS를 통해 대대적으로 방송했다. 새벽 6시경이 되자 광주 시내는 계엄군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시민군의 저항이 완전히 분쇄된 것이다.
※ 5월 27일 진압작전 사망자 : 보기 / 접기
진압 직후에 광주의 상황은 처참했다. 거리와 건물에는 사망자와 부상자가 여기저기 방치된 채 있었고, 핏자국도 무수히 많았다. 계엄군들은 죽은 사람들을 끌어내어 한쪽에다가 모아놓았으며, 체포된 사람들에게는 무수한 구타를 가하며 줄을 세워 기합을 주었다. 그들은 시민군이 조금이라도 말을 듣지 않을 시에는 군홧발과 개머리판으로 마구 때렸고, 포박한 이들의 등에다가 '총기소지', '극렬', '실탄소지'라며 혐의를 빨간 펜으로 휘갈겼다. 시민군들은 그 상태에서 굴비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군용트럭을 타고 상무대 등으로 실려가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계엄군은 20사단에게 도청을 인계하였고, 아침 동안 광주 시내에 남은 일부 시민군마저 모조리 잡아들였다. 그리고 거리마다 통행을 막고 검문을 실시했다. 그런 와중에도 계엄군의 발포가 이어져 이금재(29)와 김명숙(15)이 목숨을 잃었다. 모든 진압작전을 끝낸 계엄군은 철수하였고, 기갑학교 소속의 장갑차와 탱크들이 광주 시내를 한 바퀴 돌면서 위력시위를 가하였다. 당시 영상[193] 8시 50분부터는 끊겼던 시외전화가 다시 이어졌고, 경찰이나 공무원 등은 직장으로 복귀하였다.
진압이 끝난 후 계엄군은 마치 전투에서 승리한 것처럼 '검은 베레모'를 승전가처럼 부르기도 했다.[194]
1980년 5월 27일 오후 9시에 KBS에서 방영한 KBS 뉴스 9 방송분으로, 군부의 언론통제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 단적으로 알수 있는 방송자료이며, 언론 매체들의 왜곡 보도는 6월 항쟁 이전까지 전방위적으로 진행되어 왔다.[195]
민주화 운동 완전 진압 일주일 후인 6월 3일 방송된 대한뉴스 방영분. 시위 기간 끊어졌던 광주와 다른 지역의 왕래가 재개된 가운데 피해를 최대한 감추고자 했던 당시 신군부의 통제 아래 복구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5. 사망자 수에 대한 추정[편집]
5.18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관을 구할 수 없었어. 학생들이 두꺼운 베니어 판을 구해다가 잘라서 그것으로 관을 만들고, 미처 수의를 못 만드니까 당목으로 둘둘 감아서 태극기 한 장씩을 덮어 갖고 묶고 한 것이 도청 마당으로 하나 가득이여. 나중에는 돈 나올 데가 없으니 관 살 돈도 없제, 당목 살 돈도 없제, 그래 교회에서 우선 30만 원을 얻어서 감당하게 했제.
-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대모로 알려진 광주YWCA 회장 조아라 여사의 증언[197]
5월 31일 계엄사령부는 민간인 1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 등 합계 17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민간인 127명, 군인 109명, 경찰 144명이 부상당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이 발표를 믿는 시민들은 아무도 없었다. 실제 수많은 증언이나 단편적 에피소드들만 분석해도 이 통계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수치인지 알 수 있다.
5.18 기간 중 오랫동안 집을 떠난 뒤로 실종 신고가 접수되지 않은 이들까지 합하면 최대 2000여 명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현재 확인할 길은 없다. 이렇게 5.18 당시 사망자 수가 제대로 집계되지 못한 이유는 당시 실시 20년이 채 안 된 주민등록제도 시행이 미흡해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않은 이들이 적지 않았고 신군부가 사상자 수를 은폐하기 위해 트럭에 싣고 암매장하거나 소각했기 때문이다.
광주에서 침례회 목사로 일한 아놀드 피터슨은 당시 광주 인구가 75만 명이고, 광주의 각 침례교회에 출석자 2천 명 중 사망자가 2명이었으며, 당시 국군에서 일한 친구가 5.18 희생자를 832명으로 확인했다고 들은 것을 근거로 사망자는 800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이후 신군부의 발표에서조차 사망자 수는 점차 늘어났으나 문제는 사망자 수가 아닌 학살 자체를 가벼이 보는 신군부의 태도였다. 당시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7월 22일 외신 기자회견에서 "광주 사태는 다른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마이애미 폭동' 수준이다"라고 밝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6. 5월운동: 진상규명운동과 명예회복[편집]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화발 소리가 우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팍과 머리를 짓이겨 놓으려고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 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 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공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김의기, 1980년 5월 30일
지금은 비록 어둡고 참담한 감옥에 우리의 몸이 갇혀 있으나, 자유의 종이 울리는 민주세상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진리와 정의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확신을 갖고 이 어려움을 이겨나갑시다.
군사재판에서 정상용의 최후진술 中
무자비한 진압 이후 항쟁은 폭동으로 매도됐고 관련자들의 고통도 시작됐다. 항쟁 진압 이틀째인 5월 29일 정부는 상무관에 안치되어 있던 시신들을 쓰레기차에 실린 채로 장례 절차도 없이 망월동 묘지에 매장했다. 유가족들은 '폭도'의 가족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야 했고, 구속자들과 부상자들에게는 무자비한 고문이 자행됐다.[198] 군경과 계엄당국은 미행, 감시, 납치, 격리, 감금, 체포, 협박, 회유 등 갖은 방법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방해하고 더 이상의 저항을 분쇄하려 들었다. 하지만 이런 탄압에도 남은 자들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5월 말부터 유족들은 '5.18광주의거유족회'를 결성하고 신군부의 탄압에 맞서며 모임을 열었다. 감시를 피하기 위해 모임 장소는 늘 바뀌기 마련이었지만 유족들은 군경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모임을 이어갔다. 그리하여 5.18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제가 1981년부터 망월동에서 열렸다.
항쟁 직후 5.18의 진실을 알리려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70년대부터 반유신운동을 벌였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은 5월 28일 성명을 발표하였고, 5월 30일에는 서강대학교 학생이었던 김의기가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하고는 종로5가 기독교 회관 6층에서 투신하여 목숨을 잃었다. 6월 9일에는 성남시의 노동자 김종태가 <광주 시민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라는 유인물을 뿌리다가 끝내 분신하여 사망했다. 이외에도 학생들과 일반시민들은 개인적 혹은 조직적으로 5.18에 대한 유인물을 뿌리고 다녔다. 개강 이후인 1980년 9월부터는 대학에서 유인물 중심의 저항이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한편 외국의 유학생들은 신군부를 규탄하고 5.18을 추모하는 내용의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광주에서는 종교계를 중심으로 진상규명 운동이 벌어졌고, 1980년 12월 19일 대학생들과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은 5.18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규탄하며 광주 미국문화원에 불을 질렀다. 그런가하면 시인 김준태는 전남매일신문에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시를 썼다가 검열당해 대폭 삭제되고 자신도 불이익을 겪어야 했다. 대학가에서는 5.18에 대한 항쟁측 기록물이 나돌았는데, 대표적인 팸플릿으로는 광주항쟁의 기록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광주백서>을 꼽을 수 있다. 이는 1980년 12월부터 조봉훈, 소준섭이 관련문헌 수집과 항쟁참가자들과의 인터뷰를 정리해 기록한 것으로 전국에 최초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광주학살의 진상을 알렸다. 그리고 어두운 골방에서 이 팸플릿을 읽은 학생들은 이제 몸을 일으켜 학살자 전두환 군부독재와의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이어 단행본으로는 황석영의 이름을 빌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돋보였다.[199]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넘어넘어'라는 약칭으로 불리며 대학생들 사이에 비밀리에 퍼져나갔다.
매우 적은 케이스이겠지만 당시 계엄군으로 투입된 경험을 가진 일부 고등학교 교련교사가 있었으며 그들이 학생들에게 증언한 당시 상황은 예상하다시피 극과 극으로 엇갈렸다. 그러나 김영삼 문민정부가 집권한 이후 비교적 솔직하게 당시 상황을 증언했던 양심있는 교련교사들이 극소수 나타나기도 했다.
한편 계엄당국은 재판 전에 구속자들에 대한 고문수사를 통하여 5.18이 북한과 연계되어 있고 김대중이 이 사건의 배후라는 것을 조작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구타, 성고문, 인격모독을 포함한 고문이 자행되어 많은 이들이 고생해야 했다.[200] 그러는 사이 1980년 10월 5.18 구속자들에 대한 군사재판이 시행됐다. 하지만 군사재판에서는 피고인의 변호사 접견, 진술조서 검토, 재판기일 발표 등 일반적인 재판이 요구하는 것들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또한 '404명'이나 기소된 대형재판임에도 교실 한 칸보다 약간 넓은 공간이 재판장의 전부일 정도로 환경이 열악해 한 줄에 20~30명씩 빽빽하게 앉아 있어야 했다. 또한 방청기회도 피고인당 1명으로 제한됐다. 재판 진행도 뒤죽박죽이어서 계엄당국이 제시한 대부분의 공소사실의 진위가 반박되었음에도 법정은 요지부동이었고, 심지어 없는 사실마저 조작하여 공소사실에 집어넣기까지 하였다.[201][202] 이런 재판에서 1심에서 사형 5명, 징역 5~20년 163명, 선고유예 또는 집행유예 80명이 선고됐다.
이러한 재판에 구속자, 변호인, 구속자 가족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항거했다. 우선 구속자들은 서슬퍼런 고문을 받았음에도 군사재판에서 시종일관 당당함을 보였고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도 힘을 모아 저항했다. 변호인들은 내란죄의 법리 상 문제를 꼬집어 5.18이 폭동이 아니라 "집권자의 독재를 거부한 시위"이자 "비조직 대중들의 저항운동"임을 역설했다. 또한 공소사실 내의 모순을 집어내어 수사관과 법관들을 쩔쩔매게 만들었다. 구속자 가족들은 감옥 밖에서 옥바라지와 석방운동에 나섰고 군경과 싸우면서 구속자들을 응원하였다. 곧 구속자 가족들을 중심으로 하여 '5.18구속자가족협의회'가 조직되었고 석방운동과 사형수 구명운동이 펼쳐졌다. 회원들은 여기저기에 탄원을 했으며, 국내외 유명인사들과 원로들을 방문하여 억울함을 호소했고, 심지어 전두환에게 탄원서를 보내기까지 했다. 또한 재판정에서 대대적인 항의[203] 를 벌이거나, 탄원서를 혈서로 쓰거나, 명동성당과 미국문화원에서 농성을 하거나, 전두환의 광주방문을 저지하는[204][205] 등 다양한 투쟁방식을 동원하였다. 이러한 투쟁을 통해 1982년 12월에는 5.18 구속자 전원이 석방될 수 있었다.
광주는 죽지 않았다. 그날의 함성도 그치지 않았다. 처참히 죽어간 아들의 관 위에 "아들아! 네가 못다 이룬 꿈이 언젠가는 이루어지리라 믿는다"라는 말로 뼈아픈 마음을, 분노를 삭여야 했던 아버지의 가슴 속에, 그리고 망월산 묘지에 누워 광주를 지켜 보는 부릅뜬 눈 속에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전두환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맨몸으로 민주주의의 방패가 되었던 광주민중은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우리는 80년 5월의 불꽃 속에서 투혼을 안고 태어난 광주의 아들 딸들이어야 한다. 5월은 민중이 바로 민주화 운동의 주체라는 사실을 피로 증거한 투쟁의 달이다.
「아, 5월이여! 광주여! 영원한 민주화의 불꽃이여!」, 민주화청년운동연합, 1984년 5월 19일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대학의 5 .18 시위마다 불려진 <임을 위한 행진곡>
유가족을 비롯한 5.18 관련자들의 진상규명 투쟁이 계속되자 두려운 정부당국은 갖은 탄압으로 대응했다. 먼저 유가족들에게는 1983년 망월동 묘지의 5.18 희생자 묘지의 이장을 강요하며 유족들 간의 갈등을 조장하였다. 또한 위로금을 지급해준다면서 일부 유족들에게는 지급 대상에서 제외해버리는 기만도 일삼았다. 부상자들에게는 제대로 된 치료와 관리를 시행하지 않았으며, 구속자에게는 형편없는 대우를 행했다. 이에 유가족들은 정부의 탄압에 맞서 망월동 묘지를 지키고자 이장을 반대하며 투쟁하였다. 부상자들은 '5.18광주의거부상자회'를 결성하여 치료대책을 요구하며 청와대 상경투쟁을 벌였다. 구속자들도 옥중투쟁을 이어나갔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박관현이었다. 박관현은 수배자로 살다가 1982년 체포되어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수감자들의 인권 향상을 외치며 단식투쟁을 하다가 1982년 10월 12일 끝내 사망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수감자들은 물론이고 대학생들과 종교계에서 항의 시위가 발생하기도 했다. 구속자 전원 석방 이후에는 구속자들에 의해 1984년 '5.18구속자협의회'를 발족시켜 진상규명운동이 벌어졌다.
대학가에서는 소위 5월투쟁이라는 5.18 관련 시위가 계속 발생했다. 1980년 5.17 쿠데타를 비롯한 학생조직에 대한 군사정권의 공격으로 학생운동은 타격을 입었지만 1983년 말의 학원자율화로 운동은 다시금 역량을 회복하였다. 부활한 총학생회 및 학생운동단체와 함께하면서 학생들의 시위는 더욱 거세져갔다. 특히 5월만 되면 학생들의 저항은 유독 격렬해져 각지 대학에서 선언물 발표와 데모가 줄을 이었다. 학생들은 5.18을 기념하는 추모제를 개최했고 행사가 끝나면 으레 교내시위는 물론이고 가두시위까지 감행하여 전투경찰과 충돌, 돌멩이과 화염병을 던지며 일대 접전에 나섰다. 또한 5.18 관련자들과의 연대도 시도하여 망월동에서의 5.18 추모제에 참석하는 활동도 했다. 그런가하면 대학생들의 자결투쟁도 발생하여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5.18에 대한 진상규명과 전두환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목숨을 잃었다.
미국의 5.18 책임을 묻는 활동도 진상규명운동의 또 다른 한 축이었다. 1981년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을 시발로 대학가와 운동권에서는 본격적으로 반미운동이 시작됐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과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이었다. 1982년 3월 18일, 부산에서는 문부식을 비롯한 일련의 대학생들이 오후 2시경 부산 미국문화원 건물에 불을 지르고 시내에 반미 성향의 유인물을 뿌렸다. 미국문화원에서의 화재는 1시간 만에 진압되었으나 동아대학교 학생 1명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있었다. 이 사건은 커다란 파장을 낳아 학생들은 물론이고 이들을 도와준 혐의로 신부도 구속되어 정권 대 천주교의 대결로 치닫기까지 하였다. 1985년 5월 23일에는 함운경, 신정훈 등 서울지역의 5개 대학교 학생 73명이 서울 미국문화원 건물을 점거하여 나흘 동안 농성을 벌였다. 학생들은 농성을 하는 동안 "광주사태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사과하라"는 전단을 창문에 붙이는 등 미국의 5.18 책임을 규탄하였다. 이 사건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외에도 강원대생 성조기 소각 사건, 대구 미국문화원 폭발 사건, 제2차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광주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부산 미국문화원 투석 사건 등 반미시위와 충돌은 80년대 내내 이어졌다.
5.18 진상규명운동은 이제 80년대 민주화운동에 있어서 하나의 주류가 되었다. 이제 5.18 관련자들과 민주화운동, 학생운동 간의 연대와 단결이 더욱 활발하게 펼쳐졌다. 5.18 관련자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려는 군경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고, 점차 전투적인 자세를 보였다. 대학생들과 재야도 공격적으로 나섰다. 1984년 11월에는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전청협)'가 조직되어 5.18 진상규명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요구했고, 1984년 12월에는 전청협을 비롯한 5.18 관련자 단체들과 종교청년단체들이 연합하여 '전남사회운동협의회(전사협)'을 조직하였다. 기성세대에서는 '광주5.18민중혁명희생자 위령탑건럽 및 기념사업 범국민운동추진위원회(5추위)'를 조직하여 보다 온건한 방식의 투쟁에 나섰다. 이후 민주화운동 단체들도 속속 조직되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만들어졌고, 1987년에는 6월 항쟁의 대표 단체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마침내 1987년 6월 대대적인 6월 항쟁이 전국에서 벌어졌고 6.29 선언을 통한 민주화가 이뤄지게 된다.
1980년 5월의 광주의 유해는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오늘의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민주정부입니다. 광주시민과 온 국민이 그날을 기념할 수 있도록 광주시에서 기념일을 먼저 제정하기를 희망합니다. 망월동 묘역은 민주성지로 가꾸어 나갈 수 있도록 묘역의 확장 등 필요한 지원을 다할 것입니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 및 부상자 중에서 아직까지 법률에 의하여 보상을 받지 못한 분들을 위하여 추가신고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당시 연행,구금되거나 유죄판결을 받아 사면복권된 분들에 대하여 전과기록을 완전히 말소하고 지원방안을 강구하는 등 그분들이 이나라의 민주화에 헌신한 만큼 떳떳하게 그 명예가 회복되도록 할 것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5.18 관련 담화 中
(주문) 피고인 전두환을 사형에, 피고인 노태우를 징역 22년 6월에... 각 처한다. 피고인 전두환으로부터 금 2천2백59억5천만원을, 피고인 노태우로부터 금 2천8백38억9천6백만원을 각 추징한다.
12.12 5.18 사건 1심 판결문 中
6월 항쟁을 통한 민주화는 5.18 진상규명에 있어서 호재였다. 비록 대한민국 제6공화국의 첫 대통령이 전두환의 절친이자 광주학살 책임자 중 하나인 노태우였지만,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어 대한민국 제5공화국에 대한 본격적인 청문회가 개최됐다. 5.18도 중요 의제 중 하나로 다뤄져서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되고 '광주청문회'가 1988년 중반부터 활동을 시작했다.[206] 광주청문회는 TV를 통해 전국으로 방송되었으며 많은 피해자들과 가해자들의 증언이 이를 통해 알려졌다. 이를 통해 국민들은 5.18 당시 발생했던 계엄군의 잔인한 진압과 가혹행위를 알게 되었고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5.18 당시 발생한 임산부와 어린이들의 사망과 주남마을 총격사건은 국민적인 공분을 사며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 청문회는 한계도 지니고 있었는데, 당장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주요 책임자들이 청문회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그나마 출석한 가해자들은 변명과 거짓말만 일삼았던 것이다.[207] 이에 5.18 관련단체들과 시민들은 분노하여 가해자들을 규탄하고 진정한 5.18 진상규명을 외쳤다.
민주화 이후 5.18 진상규명운동은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어야 했다. 청문회 전후로 5.18이 민주화운동이라고 명명되었으나 진정한 진상규명 및 보상과 책임자 처벌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5.18 피해자에 대한 보상으로 '광주사태 치유방안'을 발표하고는 보상 중심의 해결책을 제시한 바 있었지만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빠져 있었기에 5.18 관련자들과 시민들의 불만을 샀다.[208] 이제 5.18 진상규명운동은 책임자들에 대한 조직적인 투쟁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장 민주화 이후에도 대학생들은 매 5월마다 시위를 벌이며 학살책임자 처단을 요구했고, '체포결사대'까지 조직하면서 조직적인 체포작전을 펼치기까지 했다. 또한 5.18 피해자들과 시민단체들은 책임자들에 대한 활발한 고소 및 고발운동을 펼치며 수사를 촉구하였다. 그리하여 1994년 11월부터 검찰은 책임자들에 대한 수사에 들어갔지만 1995년 7월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리며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기괴한 논리로 수사를 종료해버렸다.
그러자 5.18 피해자는 물론이고 대학생과 일반시민단체들까지 가세하여 총공세에 나섰다. 광주에서는 '5.18 학살자 재판회부를 위한 광주전남공동대책위원회'가, 서울에서는 '5.18진상규명과 광주항쟁정신계승 국민위원회'가 각각 구성되어 활발한 진상규명운동을 벌였다. 또한 5.18 사진 전시회, 특별법 제정 서명운동, 삭발투쟁, 가두시위, 단식투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1995년 10월에는 8개 단체가 연합하여 '5.18학살자처벌 특별법제정 범국민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특별법 제정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1995년 12월 19일 마침내 국회에서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됐다. 그리고 이에 따라 5.18에 대한 수사와 재판도 시작되어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이 전격 구속됐다.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는 12개 쟁점과 34개 세부항목을 나눠서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상세하게 수사했다. 그리하여 5.18 당시의 상황과 사실관계가 더욱 실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었다. 수사본부는 1996년 2월 28일 수사를 종결하여 전두환을 포함한 16명을 기소하여 재판에 회부했다. 이전의 권력자들이 법정에 선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은 잘못을 참회하지 않는 후안무치한 모습들을 보였으며, 그들을 옹호하는 변호인단과 피의자측 방청객들의 치부도 가관이었다. 이에 5.18 피해자들과 관련단체들은 피의자들과 피의자측 방청객들에 맞서 법정투쟁을 벌였으며, 공무집행방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피의자들을 규탄하였다. 몇개월 간의 재판 후 1996년 8월 26일 1심 재판부는 전두환에게 사형, 노태우에게 징역 22년 6개월을 선고하였다. 1996년 12월 16일 항소심에서는 전두환은 무기징역, 노태우는 징역 17년으로 감형되었다가 1997년 4월 17일 최종상고심에서 피의자 전원에게 유죄가 선고되며 형이 확정됐다. 하지만 전두환과 노태우는 죄값을 다 치르지 않고 1997년 12월 22일 사면을 받고 멀쩡히 풀려나고야 만다.[209]
한편 5.18에 대한 수사와 재판에 이어서 명예회복 절차도 시행됐다. 1997년 5월 18일이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로 지정되었고, 1994년부터는 묘지 성역화 작업이 이루어져 망월동 구묘지 옆에 신묘역이 1997년 완공되었다. 5.18 당시 책임자들의 상훈이 전부 박탈되었고, 2002년에는 5.18 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5.18 피해자들이 5.18 민주유공자로 인정받았으며 신묘역 또한 국립 5.18 민주묘지로 승격되었다. 또한 1990년부터 2006년까지 5차에 걸쳐서 5.18 피해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보상이 이뤄졌다. 이로써 5.18 민주화운동은 ① 진상규명, ② 책임자 처벌, ③ 명예회복, ④ 피해보상, ⑤ 기념사업 등 5대 과제를 어느정도 완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몇몇 쟁점들이 남아 있기에 5월운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신군부의 두 수괴 중 전두환은 여전히 뻔뻔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노태우 측은 뒤늦게나마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2019년 8월 26일, 장남인 노재헌 씨가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참배를 하면서 방명록에 진심으로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께 사죄드리고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가슴깊이 새기겠다는 문구를 작성했다. 그리고는 노태우의 뜻이라고 밝혔다. #
또 그 이후 2020년 5월 18일 아들 노재헌 씨가 현재 중환자인 노태우 대신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40년만에 13대 대통령 노태우 5.18 민주영령을 추모합니다. 라는 리본이 달린 조화를 헌화하였다. 5.18 민주화운동 학살 책임자 중 한 명이 직접 제단에 헌화하고 사죄한 것은 이번이 '유일이자 처음'이다.
전두환은 결국 2021년 11월 23일, 참회 없이 노환으로 사망했다.
전두환이 사망한지 2년 여 후인 2023년 3월 30일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이 광주를 찾아 그 다음 날인 31일 5.18 민주화운동 유가족과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사과,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헌화 후 참배를 하면서 방명록에 "저라는 어둠을 밝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는 여기에 묻혀계신 모든 분들이십니다."라는 문구를 작성했다. 참고로 방명록에 작성한 글귀 중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는 발언은 할머니 이순자를 염두에 두며 쓴 거라고 한다. 전두환 일가 중 전우원이 처음으로 사과하고 처음으로 5.18 민주묘지를 찾아 참배한 것이다.
7. 연대표[편집]
7.1. 항쟁 이전[편집]
- 1979년
- 1980년
7.2. 항쟁 당시[편집]
- 5월 18일(일요일, 맑음)
- 5월 19일(월요일, 오후부터 비)
- 5월 20일(화요일, 오전에 약간의 비)
- 5월 21일(수요일, 맑음)
- 5월 22일(목요일, 맑음)
- 5월 23일(금요일, 맑고 한때 흐림)
- 5월 24일(토요일, 오후에 비)
- 5월 25일(일요일, 비)
- 5월 26일(월요일, 아침 한때 비)
- 5월 27일(화요일, 맑음)
7.3. 항쟁 이후[편집]
- 알림: 재판에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박탈당했으므로 전두환 및 노태우를 언급할 때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제외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사실에 입각해 작성해 주시기 바랍니다.
7.3.1. 1980년 – 1990년[편집]
7.3.2. 1991년 – 2000년[편집]
7.3.3. 2001년 – 2010년[편집]
7.3.4. 2011년 – 현재[편집]
8. 참고 자료[편집]
※ 항쟁 기간 사용된 구호/표어 : 보기 / 접기
※ 항쟁 기간 광주에서 불려진 노래 : 보기 / 접기 나를 버리고 가시는 시민 여러분
십리도 못가서 후회하게 됩니다
꽃같이 어여쁜 우리 형제들은
무자비한 계엄군에 끌려서
죽음으로 떠나가고 있습니다
<아리랑> 노가바
1. 이 땅의 민주를 수호코자 일어선 사람들
시민들은 단결하여 다같이 투쟁하자
피에 맺힌 민주사회 언제-오-려-나-
피에 맺힌 전두환놈 언제-오-려-나-
2. 부모형제를 지키고자 일어선 시민들
학생들과 시민들은 다같이 투쟁한다
피에 맺힌 전두환놈 언제-죽-이-나-
강철같이 단결하여 끝까지 투쟁하자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노가바
우리들은 정의파다 좋다 좋다
같이 죽고 같이 산다 좋다 좋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5.18 당시의 훌라송
※ 항쟁을 지도한 수습위의 비교 : 보기 / 접기
※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식순과 주요 활동 : 보기 / 접기
8.1. 단행본/논문집[편집]
- <광주백서>, 소준섭 외, 어젠다, 2018
- <5월 18일 광주>, 김영택, 역사공간, 2010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1~2, 5.18 기념재단, 한얼미디어, 2006
- <꽃만 봐도 서럽고 그리운 날들> 1~4, 5.18 기념재단, 한얼미디어, 2007~2008
- '''<오월의 문화정치>, 천유철, 오월의봄, 2016
- <그 때 그 자리 그 사람들>, 5.18 기념재단, 여유당, 2007
- <5.18 민주화운동과 언론투쟁>, 5.18 기념재단, 2014
- <5.18 10일 간의 야전병원>, 전남대학교병원, 2017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전면개정판)>,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창비, 2017
- <5.18 민중항쟁과 정치,역사,사회> 3, 5.18 기념재단, 2007
- <광주민중항쟁비망록>, 5.18광주민중항쟁유족회 편, 남풍, 1989
- <오월의 사회과학>, 최정운, 오월의봄, 2017
- <5.18 민중항쟁사>,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2001
- <한국민주화운동사> 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 <부서진 풍경>, 5.18 기념재단, 2000
- <광주, 여성>,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후마니타스, 2012
- <정사 5.18> 상, 사회평론, 1995
- <기억하는 자의 광주>, 이해찬 외, 돌베개, 2010
- <충정작전과 광주항쟁> 1~2, 김영진, 동광출판사, 1989
- <한국현대사산책 - 1980년대편> 1,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3
- <5.18 때 북한군이 광주에 왔다고?>, 안종철, 아시아문화커뮤니티, 2016
- <5.18 특파원 리포트>, 무등기자협회 편, 풀빛, 1997
- <5.18 민중항쟁>, 광주광역시/전라남도, 휴먼컬쳐아리랑, 2015
- <5.18 민중항쟁>, 김진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 <12.12 5.18 실록>, 대한민국재향군인회, 1997
8.2. 관련 자료/자료집[편집]
- 계엄군 측(제11공수여단, 제7공수여단, 제3공수여단, 20사단, 보안사령부, 505보안부대, 전투병과교육사령부 등) 작성 자료
- 행정기관 측(동구청, 전라남도청 등) 작성 자료
- 광주지방검찰청, 505보안부대의 사망자 검시 기록
-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풀빛, 1990
- <5.18 인류의 유산, 오월의 기록>, 5.18민주화운동기록관, 2017
- <5.18 위대한 유산/연대>, 5.18 기념재단, 201
-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1~61,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2013
- <5.18 관련 사건 조사결과>,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청, 1995
- <광주는 말한다>, 신복진, 눈빛, 2006
- <12.12 5.17 5.18 조사결과보고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2007
8.3. 다큐멘터리/영상[편집]
- 선을 넘는 녀석들 : 마스터-X- 3회 5.18 민주화운동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