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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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한자문화권 · 유럽) · 참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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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호칭


황제
Imperātor | Emperor
파일:로마 제국 깃발.svg
로마 제국 임페라토르권위를 상징하는 벡실룸(Vexillum)
명예의 상징 월계관과 군권의 상징 아퀼라 문양이 그려져 있다.


1. 개요
3. 역사
3.2.1. 조건: 로마 황제의 후계자
3.2.2. 서유럽의 우회적 조건: 교회의 인정
3.3.1. 서유럽의 경우: 신성 로마 제국의 선출 황제
3.4.1. 19세기: 나폴레옹의 등장과 그 이후
3.4.2. 20세기: 1차 세계대전과 제정의 몰락
3.4.3. 편법으로 황제가 되는 방법
3.4.4. 19~20세기 서양의 황제국 목록



1. 개요[편집]



유럽황제 개념에 대해 다루는 문서이다. 한자문화권의 황제 개념이 진나라로부터 시작됐듯이, 유럽의 황제 개념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 한자문화권 '황제'와의 차이[편집]


한자문화권의 황제유럽의 황제는 서로 대응하여 번역되긴 하지만 차이가 있다. 동아시아의 황제는 혈통종법제에 근거한 정통성을 강조하며, 그 혈통을 타고 내려오는 천명을 받아 천하를 통치하는 천자다.[1] 그러나 유럽의 황제는 정치적으로는 유럽 대부분을 지배했던 로마 황제[2](또는 그 후계자)이며, 종교적으로는[3] 교회의 수호자인 로마 제국의 권위를 획득한 군주를 의미한다.

동아시아의 황제는 그 시작부터 천하 제패를 스스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올려 보고하고, 천명을 받들어 나라를 다스리는 제사장과 같은 위치였다. 즉, 황제가 곧 종교의 주축이었으며 질서의 근원이었다. 그렇다고 황제가 그 자체로 신격화되지는 않았는데, 황제 개념의 등장 이전인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한 나라의 왕이 부덕하여 천명이 다른 필부에게 옮겨가는 개념'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황제=신'으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로마 황제도 국가 사제단 수장 폰티펙스 막시무스직을 겸임하며 종교적 권위를 지녔고, 기독교 공인 이후에는 교회의 수호자이자 대리인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폰티펙스 막시무스는 본래 로마 국왕이 임명하는 형식의 선출직이었으며, 동아시아처럼 제정일치 성격이 강하진 않았다. 또한 엄연히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이 별도로 존재하여 교회의 중심이 되지도 않았다. 근본적으로 로마 황제고대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전통과 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자리다. 로마 황제는 시민들의 대표자로써 민중에 의해 선택되어 우상화되는 최고 시민인 프린켑스(Princeps)[4]였다. 즉, 하늘에 의해 선택되어 천명을 받드는 존재로써 종교적으로 신성시되는 제사장에서 시작한 동아시아의 황제와 달리 로마 황제는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 선출되고 우상화되는 시민의 대표자로 시작했으며, 기독교의 수호자이자 교회의 대리인으로 여겨지던 것은 후대에 덧붙여진 개념이다.

동아시아의 법이 법가 항목에서 설명하듯 군주로부터 발하여 신민을 지배하는 지배 규율이었다면, 로마의 법구성원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대표자를 뽑아 정해놓은 사회 구성원들의 계약이었기 때문에 유럽의 황제는 민중을 대신해 법을 실행하는 민중의 대표자로써 법의 기반이나 원리 그 자체는 아니었기 때문에 동아시아와 같은 절대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다만, 근세 이후 왕권신수설이 등장하고 중앙권력이 강해지면서 독일어권카이저동유럽차르와 같이 전제군주에 가까운 성격을 띄는 사례도 등장하게 된다.

때문에 종법 질서에 따른 혈통이라는 기준이 존재한 중국과 달리, 유럽의 황제는 그 선출 기준이 '민중의 뜻', 또는 중세 이후에 추가된 '하느님의 뜻'이라는 주관적 조건이었으므로 이 '명분'에 따라 수 없이 찬탈이 일어나거나, 투표에 의해 선출되었다.

3. 역사[편집]



3.1. 고대 로마 제국[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임페라토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로마의 '황제'는 혼란한 공화정을 군사력으로 갈아엎으면서 등장한 존재이다. 공화정 말기의 로마는 전례없는 영토의 확장과 시민의 증가를 겪었지만, 정치 체제는 여전히 도시국가 시절의 수준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했다. 일례로 포룸 로마눔에 1만 명을 자기 사람들로 채울 수만 있다면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 전체의 정책을 입맛대로 결정할 수 있었다. 따라서 힘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세력을 동원하기 일쑤였고, 간에 유혈 사태가 일어나는 것도 일상다반사가 되어 시민들의 총의가 정상적으로 반영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화정의 혼란은 이윽고 공화정을 포기하려는 권력자의 등장을 불렀다. 그러나 그 카이사르조차도 로마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거머쥐었지만 모두를 제압하지는 못했고 결국에는 암살당하기에 이르렀다. 아우구스투스는 여기서 교훈을 얻었는지 원로원에게 종신 호민관 특권(Tribunicia Potestas)과 임기 제한없는 군단 지휘권(Imperium Maius) 두 가지를 얻어낸다.[5] 이 두 가지 특권은 아우구스투스 이후로 계속 상속되었으며, 그의 후임들은 광대한 직할령(이집트 등)에서 나오는 막대한 자금력과 군사력, 구 체제의 권위를 더해서 로마 제국 전체를 통치할 수 있었다. 이렇듯 법적으로는 여러 시민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초월적 지위를 누리는 특성을 고려해 아우구스투스의 제정을 원수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즉 로마 초기의 황제라는 것은 'IMPERATOR'라는 새로운 이름의 관직인 것이고, 그것 또한 완벽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공화정 시대부터 이미 만들어져 있던 기존 관직들의 권한을 약간 변형하고 조립해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즉, 그 당시의 로마인 누구도 새로운 이 직책을 동양의 황제처럼 하늘의 뜻을 받드는 고귀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로마 황제의 권한인 호민관 특권과 로마군 최고통수권이 합쳐져서 어떻게 강력한 황제권으로 둔갑하였는지 그 내막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공화정 시기부터 호민관이 가졌던 권한은 ①원로원 의결에 대한 거부권 ②민회를 통한 입법권(원로원 의결과 동등함) ③신체에 대한 불가침 특권이다. 각 권한이 부여된 취지를 살펴보면, ①은 원로원이 귀족에게만 유리하고 평민에게 불리한 이나 정책을 시행하는 것을 견제하고 ②는 평민의 입장을 반영한 법이나 정책을 제정하고 시행할 여지를 제공하며 ③은 힘을 가진 원로원 및 귀족 세력이 평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호민관을 함부로 해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부여된 것이었다.

  • 그렇다고는 하나 곰곰이 따져보면 매우 강력한 권한으로 다른 나라였으면 이미 전제군주였다. 발상을 전환해 본다면 ①을 통해서 현대로 치면 의회+내각(+법원) 정도에 해당하는 원로원의 결의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뒤집을 수 있고, ②를 통해 지지자들을 모아서 자신이 원하는 법을 뚝딱 만들어 버릴 수 있으며[6] 마지막으로 ③을 통해 자신의 신변에 대한 위협을 공적으로 처벌하고 제재할 수 있는 권한을 얻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이러한 권한을 평민들이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은 호민관의 권력보다 원로원의 권력이 압도적으로 큰 로마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이 정도 권한을 주어도 원로원은 호민관과 민회에 대해서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호민관은 단독으로 원로원 결의를 거부하거나 원로원 결의와 동등한 입법행위를 할 수 있으니 혼자서 30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 전체와 맞먹을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물론 평민집회의 지지를 얻어야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호민관 자체가 평민집회에서 선출되는 관직이라 호민관이 지지하는 정책은 평민집회를 쉽게 통과하므로 이는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그런데 그라쿠스 형제 이전의 호민관들은 대부분 호민관 임기를 마친 후 원로원 의원이 되어 정치경력을 이어갔다. 즉 로마인들의 정치 관념에서는 '호민관이 무사히 임기를 마치면 승진하여 원로원 의원이 되는 것', 말하자면 호민관보다 원로원 의원이 더 격이 높은 직급이었던 셈이다. 이는 현실 정치에서는 막대한 자금력과 군사력, 영향력을 가진 원로원이 비공식적으로 호민관 따위는 찍어누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그라쿠스 형제는 호민관으로써 원로원에서 주장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 것이 불보듯 뻔한 반귀족적 정책을 호민관의 권한을 통해 추진했다. 원로원은 자신들보다 격이 낮은 호민관이 반귀족적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정상적인 절차로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원로원은 자금력과 군사력으로 찍어누르고 원로원 최종 권고라는 새로운 수단까지 만들어내어 그라쿠스 형제의 계획을 무너뜨렸다.[7]
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종신 호민관이 되고 군단 지휘권까지 갖자, 원로원과 호민관의 권력관계는 완전히 뒤집어진다. 로마 제국의 기반인 로마 군단병에 대한 통수권을 가지게 되면 호민관은 원로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권한을 마음껏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전용하여 전제권력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이후 황제는 이런 강력한 권한을 가진 직책을 본인의 사적인 '재산'으로 인정받는데까지 성공하여 자손이나 원하는 이에게 상속/수여할 수 있는 권리마저 따낸다. 즉 로마 황제의 직위는 (신성하고 역사적으로 정통성있는) "공적인 군주의 자리"라기보다는 (상속 및 증여가 가능한) "사적인 재산"으로 여겨졌다는 것.[8] 이런 사고방식이 있었기 때문에 동양에서는 상상도 못할 디오클레티아누스4황제 제도 같은 것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본인이 가진 재산을 단지 분할증여한 것으로 본다면 신기할 것도 없다.

이렇게 출발한 로마 황제직은 권력은 강했지만 권위는 부족하였다. 고귀한 특권 계층이라기보단 '큰 권리를 가진 시민'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된 것이다. 외려 호민관의 피선거권은 평민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에 황제는 어떤 의미에서는 반(反) 귀족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혼란의 불씨는 처음부터 있었다. 그나마도 초대 황가인 아우구스투스 가문이 오래오래 제위를 계승하면서 혈통에 의한 권위를 쌓아갔다면 모르겠는데, 그마저 중간에 갈려나갔다.[9]

그 이후로 황제의 권위는 내내 불안정했다. 따라서 기회만 보이면 황제를 자칭하는 야심가들이 발호할 수밖에 없었고, 군인 황제 시대에 그 혼란은 절정에 달한다. 이유를 설명하자면, 로마의 황제는 자신의 개인적인 영토이집트에서 들어오는 재물을 바탕으로 사병 집단인 군단에 충성을 받는 인물이었고, 공식적인 지위가 평민들의 대표였기에 평민들의 지지를 얻고자 자신의 부를 바탕으로 여러가지 오락(콜로세움)과 음식을 제공하였다.[10]

사실 이 사항은 굉장히 복잡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사항인데, 로마 제국이라는 국가는 황제 개인의 재산으로써 방위하고 운영하는 경우가 많고, 여타 귀족들은 공직에 있을 때에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나설 뿐이었으며, 평민들은 로마가 팽창하면서 대다수가 빈민이 되었다. 그리고 상술되었듯이 근본적으로 시민의 지지를 통해 성립되는 위치였으므로 로마의 황제들은 평판에 굉장히 민감했고, 이를 고려하면서 정치를 해야하니 재정적 부담이 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거대한 제국이 황제 개인 재산만으로 운영될 수 있는 건 절대 아니다. 로마도 엄연히 세금이라는 행정시스템이 있고, 공화정 시대에 일어났던 성산 사건도 근본 원인은 평민의 세금과 권리였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황제 혼자만의 돈으로 운영될 수가 없다. 다만, 현대 국가들과 달리 상시 비상금을 모아두는 시스템은 아니다보니 급하면 황제의 자산으로 때울 때가 많은 건 사실이었다.

옥타비아누스카이사르의 군단을 상속받았고, 이집트라는 부유한 젖소를 획득함으로 사적인 체계를 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유한 젖소라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비용[11]을 모두 충당한다는 것이 사실 불가능하였다. 이를 그나마 채우던 것이 외정으로 적들을 약탈하는 것이였는데, 로마의 팽창이 한계에 도달하자 이것도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돈으로 산 충성은 돈으로 무너지기에 군대는 자신들을 보다 더 잘 대우할 사람을 황제로 옹립하게 되었다.

군인 황제 시대의 혼란을 누르고 로마 제국 전체에 자신의 권위를 확립한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를 넷으로 늘려 각각의 황제가 상대적으로 좁은 지역에서 보다 밀도 높은 권한을 행사하도록 하고, 대신 황제 간의 서열을 확고히 하여 기존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가 현직에 있을 때는 그 자신의 권위가 사두정치를 유지시켰고, 그가 은퇴한 이후에는 그의 후임인 갈레리우스가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갈레리우스마저 급사한 뒤에는 네 명의 황제는 동등한 위치가 되어 다시 혼란이 시작되었다. 사실 혼란한 제국을 평정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그가 지명한 후계자는 조정자로서 권한을 가졌지만, 각자가 군대를 가진 세력가들 사이에서 황제와 부제로 누구를 임명할 것인가는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설사 임명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비슷한 세력가들 사이에서 불만이 커지고, 종국에는 또다시 혼란이 올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결국 다른 황제들과 자칭 황제들을 격파하고 다시 정국을 안정시킨 콘스탄티누스 1세는 동방의 군주제를 로마에 맞게 벤치마킹하면서 안정화 작업을 펼쳤다. 황제의 자리에 그리스도교의 보호자라는 권한을 주면서 정통성을 부여했고, 덤으로 아예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동방의 요충지로 이사를 가버렸다.[12]

이후 그 후계자들이 다시 나라를 쪼개면서 동로마는 어떻게든 천 년을 더 버티게 되었지만 서로마는 그게 안 돼서 일찌감치 망했다. 이 이후에도 구 서로마 제국령의 황제는 근본적으로는 '힘있는 자 A' 그 이상으로 가지 못한다.

이러한 로마식 황제 제도는 이 후 다른 유럽 제국들의 군주 제도에도 영향을 크게 끼쳐서, 유럽의 군주 제도는 동아시아인이 보기에는 굉장히 이질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다. 때문에 유럽 문화 배경의 창작물이나 역사물을 볼때 동아시아인들은 꽤 미묘한 느낌을 받는다. 한 국가 안에서 XX왕조 XX왕조 하는 식의 여러 왕조가 있다든지[13], 왕실의 혈통이 끊기자 외국에 있는 왕실의 먼 친척을 모셔와 왕으로 삼는다든지.[14][15]

3.2. 중세[편집]


서로마 제국이 붕괴한 뒤에 생긴 유럽의 황제는 필요 요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로마 황제(혹은 그 후계자)라는 타이틀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폴레옹 시대 이전까지 서유럽에서는 신성 로마 황제가 서유럽 세계의 유일한 황제로 인정받았다.

단, 동로마 황제신성 로마 제국 수립 이전은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계속 황제로 인정받았다. 왜냐면 동로마 제국단절 없이 이어진 로마 제국 그 자체라서 신성 로마 제국보다도 강한 정통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성 로마 제국 또한 어느 정도의 정당성은 있었으나, 아예 고대 로마 제국에서 직접 이어지는 동로마 제국의 제위에 비하면 한 수 아래일 수밖에 없는 처지는 본인들이나 동로마측이나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랬기에 로마주교교황의 승인과 지지를 통한 권위의 보강이 필요했던 것이며,[16] 동로마 측은 이러지 않아도 되었기에 어디까지나 전체 기독교 세계 서열에선 2인자가 될 수밖에 없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에게 승인을 요청하지 않아도 되었다.

적어도 제위 문제에 한해서, 서방 교회(가톨릭 교회)와 동방 교회(정교회)의 분리보다는 옛 로마 세계의 서방에 종교계의 1인자인 교황이 있게 된 반면 동방에는 정치계의 1인자인 황제가 있게 되어 이러한 일이 빚어졌다고 보면 된다. 각각 로마의 뿌리는 같지만 지역과 종교가 분할되었기 때문에 로마도 둘, 교회도 둘이 공존했으나, 서방은 종교적 권위가 보다 높았던 반면 동방은 정치적 권위가 보다 높은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3.2.1. 조건: 로마 황제의 후계자[편집]


유럽에서 황제를 칭하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로마와 관련 있거나 로마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첫째로 로마가 아닌 국가를 계승하는 황제가 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유럽 세계의 실질적 전부를 지배한 사람은 로마 황제 말고는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권위에서 너무 차이가 났다. 둘째로 자신부터 시작하는 황제도 큰 의미가 없었다. 중세 내내 '로마 제국'과 어깨를 겨룰 정도의 국력을 갖춘 나라는 존재할 수조차 없었으므로 누가 인정을 해줄 이유도 없었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권위는 매우 떨어져 있고 주변의 어그로만 끌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중세 유럽을 지배한 기독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원칙적으로 전 그리스도교 세계에는 단 하나의 제국이 존재해야 했다[17]. 다니엘서로 대표되는 "4마리의 짐승" 예언에 의하면 지상에는 4개의 거대 제국이 차례로 존재하며 이는 신바빌로니아, 아케메네스 왕조, 알렉산드로스 제국, 로마 제국으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온 유럽 세계의 제국은 로마 제국이 마지막이어야 했고, 그 제국이 멸망하면 바로 찾아올 천년왕국을 준비하기 위해 로마 황제는 계속 유지될 필요가 있었다. 즉, 새로운 정통성의 황제가 나타나는 것은 교리상 용납 불가하므로 본인을 황제로 칭하고 싶은 자는 로마 제국과의 연관성을 입증해야만 했다.

중세 초기에는 동방에 잔존한 동로마 제국그리스도교 세계의 유일한 황제국이었고, 중세 초기까지만 해도 동로마 황제가 교황을 갖고 노는 일은 수두룩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서유럽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동로마 황제의 서방 영토에 대한 지배권은 형식뿐이었다. 그러던 중 800년 성탄 전야에 교황으로부터 프랑크 왕국의 국왕 카롤루스가 망한지 300년도 넘은 서로마 제국의 제위를 넘겨받으면서 상황이 급변하였다. 이 사건을 동로마 제국 측에서는 완전히 무시했으나, 이후 카롤루스 대제불가리아와의 전쟁으로 힘겨워하는 동로마 황제 미하일 1세로부터 811년 황제 자리를 승인받으면서 유럽의 황제 자리는 공적으로 이 되었다. 당시 서방의 황제는 단지 황제일 뿐이며, 로마 황제는 아니라는 조건을 달긴 했지만, 당대인들에게는 명실상부히 두 제국이 존재하게 된 것으로 여겨졌다.[18] 서유럽의 교황카롤루스 대제로마 황제로 추대한 것도 교황이 로마 제국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세력이었다는 증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서유럽에서는 프랑크 제국이 3분할되면서 황제 명칭이 잠시 유명무실해졌으나, 독일오토 1세가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고, 동로마 황제의 조카딸과 자기 아들 오토 2세를 결혼시키면서 다시 한번 정통성을 획득하였다. 그가 창립한 오토 왕조신성 로마 제국은 이후 잠시 대공위시대(황제가 없는 시대)를 맞이하기도 하였으나 1806년까지 계속하여 이어졌다.

프랑스의 경우, 카롤루스 대제의 혈통이 끊긴 이후 왕좌를 이어받은 카롤루스의 모계 후손인 위그 카페로부터 혈통이 이어지는 대혁명 이전의 왕들은 황제를 자칭하지 못했다. 발루아 왕조의 프랑수아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손에 넣으려고 혈안이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19] 하지만 손꼽히는 강한 국력을 가진 프랑스의 왕은 "오직 하느님에게서만 명령을 받는 왕"을 대신 모토로 삼으면서, 메로베우스 왕조의 시조인 클로비스 1세가 세례를 받았던 랭스에서 프랑스 왕의 대관식을 의무적으로 개최하는 등의 세레머니를 통해서 신성 로마 황제에 버금가는 독립적인 권위를 쌓으려고 노력했다.

동남유럽에서는 1018년 불가리아 제1제국이 멸망한뒤로 동로마 제국만이 존재하다가, 1185년 안드로니코스 1세의 폭정으로 약화되고 불가리아 제국의 영토였던 지역에서 세금 부담이 매우 커지자 결국 아센과 페터르의 난이 일어나면서 불가리아 제국의 황제위를 계승하는 불가리아 제2제국이 성립되었고, 유럽에서는 다시 신성로마제국, 동로마제국, 불가리아 제국의 3명의 황제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후 1346년 제2차팔레올로고스 내전이 일어나 동로마 제국이 매우 약해지자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세르비아 왕국이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절반을 차지하고 황제를 자칭하면서 4명의 황제가 존재하게 되었으나, 무능한 후계자였던 스테판 우로시 5세의 즉위 이후 세르비아 제국은 급격히 약화되며 1371년에 결국 분열되어 멸망한다.

이처럼 유럽에서 황제를 칭하려면 로마 황제로부터 정통성을 내려받거나 인정받았다는 최소한의 족보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나폴레옹 이전까지 수많은 유럽 국가의 왕들은 황제를 자칭할 수 없었다. 사실 10~11세기의 카스티야, 나바라이베리아 반도 국가들이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를 자칭한 사례가 있었으나 전혀 로마적 정통성이 없었기 때문에 외교적으로는 전혀 인정받지 못했고, 개중에는 스스로도 외교 문서 같은 데 쓰지 못하고 국내에서 몰래 몰래 쓰는 수준인 경우도 있었다.

3.2.2. 서유럽의 우회적 조건: 교회의 인정[편집]



위에서 보다시피 유럽에서의 황제는 무조건 로마와 어떻게든 연관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서유럽에서는 그것을 우회할 수 있는 예외적인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황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이 전통은 457년 레오 1세 이후 동로마 황제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에게서 제관을 받던 것을 시초로 볼 수 있으나, 서유럽만으로 본다면 그보다 300년 뒤인 800년에 카롤루스 대제대관식로마 교황이 거행했던 것에서 기원한다. 그 이전에는 교황에게 서로마 제위를 수여하는 관습이나 권한은 전혀 없었다. 사실 교황에겐 황제 즉위를 추인하거나 수여할 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아우구스투스 칭호 수여(후대에는 로마제정 성립, 혹은 아우구스투스의 황제 즉위로 일컬어지는)는 기원전 27년으로서 교황을 비롯한 총대주교 체제의 성립은 물론 예수 탄생보다도 더 이전이다. 즉 오리지널 로마에서는 국가/황제위교회/총대주교위보다도 먼저부터 존재해 왔었던 것이다.

카롤루스 대제가 교황에게서 서로마 황제위를 받기 전까지는 로마 제국 그 자체인 동로마 제국황제기독교 세계의 정치적 보호자였다. 소위 '서로마멸망' 이후 열린 5, 6, 7차 기독교 세계공의회 역시 당대의 동로마 황제가 소집한 것이었다. 그러나 교황은 동로마 황제의 부하 1로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이는 성화상 문제 등의 일을 촉매로 양측의 갈등으로 번져나가게 된다. 그러던 와중에 동로마 제국은 6~7세기 사이 내우외환의 위기를 겪게 되었는데 이때 랑고바르드족에게 밀려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동로마 세력권이 남부로 쪼그라들면서 동로마의 영향력에서 실질적으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러던 중 랑고바르드족을 몰아낸 프랑크족카롤루스 대제가 교황으로부터 서로마의 제관을 요청한 것. 이를 통해 교황은 '황제를 대관해주는' 세계 총대주교와 동등한 권위를 얻고, 카롤루스 대제로서도 '교황으로부터 제관을 받은' 권위를 손에 얻은 것이다.

이게 가능했던 건 몇 가지 이유가 있다.
  • 로마주교인 교황은 비록 5대 총대주교의 일원이라도 그 격과 권위가 다른 총대주교보다 높았다.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들이 비교적 정통성을 가진 직위인 것과는 다르게 예루살렘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는 뒤늦게 만들어진 자리였다.
    • 초기 기독교가 한참 성장하던 당시, 로마 제국의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교세가 급속히 확장되었다.[20] 따라서 로마 제국 내에서 대도시=거대 기독교 공동체의 본거지였던 것이며, 이 점에서 로마 제국의 3대 대도시였던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에 총대주교좌가 설치되었다.
    • 로마는 베드로좌로서 가장 앞선 주교좌였다. 알렉산드리아는 아프리카를 담당했으며, 이슬람에게 넘어가지 전까지도 기독교 세계에서 2인자로 공인되었다. 안티오키아는 시리아아시아를 담당하던 곳이었으나, 예루살렘이 총대주교좌가 되면서 권위가 약화되었다. 그러나 아리우스파가 안티오키아 교구에서 나왔음을 보면 오래되고 정통성을 가진 곳이었다.
    •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제국수도가 이전되면서 높아진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 이후 명색이 새로운 수도(새로운 로마)인데 총대주교가 없으면 격에 어울리지 않으니 총대주교좌를 설치한 것이다. 이슬람의 침입으로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이 넘어가게 된 이후에야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기독교 사회에서 2인자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 예루살렘 총대주교좌의 경우 자체적인 규모보다는 예수의 탄생지라는 상징성 때문에 총대주교가 부임한 곳이다.
  • 서로마 멸망 이후 국가혼란기에, 회사가 세워지고 없어지듯이, 없어지는데 교회는 그대로 있었다. 처음에는 별 힘도 권위도 없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직도 커지고 오랫동안 잘 버텨온 것에 대한 보상으로 강한 힘이 주어진 것이다.[21]

교황이 카롤루스를 서로마 황제 추대(?) 혹은 임명(?)한 사건이 결론적으로는 서로에게는 윈윈이었지만, 서로의 꿍꿍이는 달랐다.
  • 카롤루스는 본래 동로마 제국과 발을 걸쳐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당시 로마 황제로서의 정통성이 있다고 여겨지던 동로마 황제에게 "응, 너 황제 해라"고 인정받는 것은 황제로서의 정통성에 대한 아주 강력하고 일반적인 근거로 여겨졌다. 물론 동로마 역시 이런 황제라는 칭호의 이름값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다른 나라의 지도자가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에 대단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고, 어쩌다 인정해 주더라도 절대 '로마 황제'로 인정해 주지는 않고 '불가리아의 황제'나 '트라페준타의 황제', 정 뭐하면 로마 황제이긴 한데 로마인의(=로마라는 국가의) 황제는 아니고 로마 땅[22]의 황제로만 인정해주는 식으로 대단히 짜디짠 반응을 보여주긴 했지만, 어쨌건 카롤루스와 그의 제국이 보여준 위세를 생각하면 적당한 외교적 교섭+위력 과시 등을 통해 동로마로부터 '응, 너 서방의 황제 하셈' 하고 인정받을 수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높았던 것. 물론 그렇다고 동로마가 카롤루스를 선뜻 자신과 동등한 로마 황제로 인정해줬을 가능성은 절대 없다고 단언해도 좋을 정도로 낮지만... 불가리아 제1제국만 보더라도 그 위력이 카롤루스 제국을 뛰어넘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동로마에 군사적 위협(+경우에 따라서는 협력)과 영향력을 가한 끝에 (불가리아인의) 황제로 인정받았다는 사례[23] 등을 생각하면 동로마측의 자존심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약간의 융통성과 협상력만 발휘했다면 황제로 인정받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로마 제국은 이미 공동 황제 또는 복수 황제의 전통이 있는 나라였고, 동방과 서방의 황제가 공존하던 시절에도 한 쪽 황제위가 비면 다른 쪽 황제가 선임 황제로서 후임 황제를 임명한 전례는 여러 번 있었다. 이에 비해 '교황의 대관'은 카롤루스가 교황에게 대관받기 이전까지 단 한번도 전례가 없었고 당연히 법적 근거도 없었던 것이다. 카롤루스가 작정하고 새로운 전통을 확립할 목적이었으면 모를까, 전통에 따라 황제로서 정통성을 인정받으려는 목적이었다면 당연히 동로마의 인정이 훨씬 유용했다.
  • 카롤루스는 교황을 존경하기보다는 이용 대상으로 생각했다. 대관식도 교황의 작전으로 얼렁뚱땅 진행된 것으로, 카롤루스 입장에서는 내켜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관을 '받음 당하면서' 자신이 교황의 아랫사람처럼 보이면 어쩔까 우려했다.
  • 그러나 최종적으로 카롤루스는 동로마의 갑질(?)을 참고 견디고 숙여 인정받기보다는 차라리 교황을 통한 권위 인정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카롤루스의 시대에는 교황의 권한이 아직 강력하지 않았으므로, 카롤루스 입장에서 교황은 권위가 높다 하더라도 '여차하면 자기 권력으로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또한 카롤루스 이후의 신성 로마 황제들도 통제하기 어려운 봉건 제후들을 견제하기 위해 주교-영주를 임명하는 등 교회 조직에 힘을 실어준 이득 역시 적지 않게 보았다.

어쨌거나 교황의 계략으로 연출된 이 한 번의 '사건'은 그 뒤로 '관례'가 되었고, 카롤루스 대제 이후 서유럽 황제의 대관식은 교황이 집전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그런데 카롤루스 왕조의 직계 혈통이 단절된 후[24]로 교황의 대관식 유무가 황제의 권위에 매우 중요해지면서, 어느새 신성 로마 제국의 군주가 되었다고 해도 자동적으로 바로 황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이 자리잡혔다. 군주를 선출하는 것독일 제후의 권리지만, 그렇게 뽑힌 인물이 황제의 자격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권리는 교황에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교황에게 제관을 받기 전에는 격이 떨어져서 '로마인의 왕'이라고 칭해야 하며, 대립 황제와 같이 교황의 인정을 아예 받지 못하는(무효인 경우) 경우에는 격이 또 한 단계 더 떨어져서 '독일왕'이라고 했다.

이로써 교황의 권위는 수직상승하여 서유럽 열국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신성 로마 황제와 교황 간의 주교 서임권 다툼은 중세 유럽의 중요 사건인데, 고대 로마 제국 시절에는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주교황제를 중심으로 한 국가 조직의 한 구성원으로서 '해당 지역의 종교적 업무를 담당하는 관직'이라서 그 영역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주교를 임명하는 것이 당연시됐기 때문에 교회란 정치 권력보다 하위에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강대해진 교황권 덕분에 최전성기의 교황은 황제파문으로 굴복하게 만드는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카노사의 굴욕.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이 힘도 없어지기 시작했다.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가 왕인 것이 이 체제의 근본이었기 때문에 국가들의 틀이 잡히고 각자의 지역에서 안정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자 이젠 교회의 인정 따위는 필요가 없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카노사의 굴욕 이후 황제가 칼을 갈고 닦은 뒤 교황을 로마에서 쫓아버린 복수를 한 사건이 대표적.

그래도 교황제관을 씌워주는 일은 유지되었지만, 이미 실추되기 시작한 교황권은 아비뇽 유수로 치명적 타격을 입었으며,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가 로마를 점령, 파괴, 약탈한 '사코 디 로마' 사건 이후로 완벽히 무너져 더 이상 제관을 씌우는 관습은 폐지되었다. 더 이상 황권에 침을 바를 형편이 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종교개혁이 터지는 바람에 교황은 세속적인 영향력은 둘째치고 종교적으로도 위태롭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 교황이 '손수' 제관을 씌워준 사례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의 형식적인 인정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때까지도 여전히 이어졌다.

3.3. 근세[편집]



3.3.1. 서유럽의 경우: 신성 로마 제국의 선출 황제[편집]


1453년, 이미 국력이 쇠락할 대로 쇠락한 동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최후의 보루 콘스탄티노폴리스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함락되고 제국이 멸망함을 기점으로 중세에서 근세로 이행한다. 이때 서유럽기독교세계관에 변화가 생기면서 신성 로마 황제의 자격에도 변화가 생긴다. 15세기 막시밀리안 1세를 기점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더 이상 교황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직 선제후들의 선거로만 황제위에 올랐다.

막시밀리안 1세 이전의 황제는 선제후들의 선거에 의해 황제로 선출된 후에도 일단 로마인의 왕(독일왕) 직위에 머물렀다. 이후 교황의 대관식이 치러진 후에야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세 후기 교황과 황제의 대립이 이어지면서 교황은 대관식을 황제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빈번하게 사용하며 독일에서의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었다. 즉 교황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 황제로 선출되는 경우 그에게 대관식을 치러주지 않는 것이었다. 이럴 경우 선출된 황제는 황제가 되지 못하고 로마왕/독일왕 직위에 머물렀다. 실제로 루돌프 1세, 알브레히트 1세 등 많은 황제(독일왕)들이 황제 대관을 받지 못해 공식적으로는 왕에 그치고 말았다.

호엔슈타우펜 왕조프리드리히 2세가 죽은 후 강력한 황권을 꺼렸던 독일 제후들에 의해 대공위 시대가 발생하기도 했고, 대공위 시대 이후 황제들은 한동안 교황 대관을 받지 못했다. 다만 이때는 워낙 시대가 혼란했기 때문에 독일왕이 대관을 받으러 로마까지 가기도 힘들었고, 교황 역시 황제의 권위가 필요했기에 굳이 로마로 대관을 받지 않아도 황제라 칭할 수 있다고 원격 승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시기에 대관을 받지 않은 황제들은 영어 위키피디아에는 황제가 아닌 독일왕으로 분류가 되어 있다. 그러는 사이 교황의 위상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연이은 십자군 전쟁의 실패, 14세기 기근과 흑사병 등의 재난, 아비뇽 유수서방 교회 대분열 등을 거치며 교황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356년 카를 4세는 황제 선출 방식을 명문화한 금인칙서를 반포하면서 황제 선출과정에서 교황의 관여를 줄이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선제후들의 타협을 이끌어내기 위해 황제 권한을 양보했기 때문에 황권이 더욱 유명무실해지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말았다.

15세기에 황제로 선출된 합스부르크 가문막시밀리안 1세는 교황의 대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이에 대해 교황은 물론이고 어떠한 세속 군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막시밀리안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공식 직함을 Imperator Romanus Electus (erwählter Römischer Kaiser)로 바꾸었다. 이는 선출된 황제라는 뜻이다. 이 직함은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황제의 공식 직함이 되었다.[25]

막시밀리안 1세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선출 황제들은 로마로 가지 않고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황제 선출 이후 바로 마인츠 대주교[26]의 주관으로 대관식을 치렀다.[27]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 카를 5세가 마지막으로 교황의 대관을 받은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카를 5세의 교황 대관식도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카를 5세는 대관을 받아서 황제가 된 것이 아니라 황제가 된 다음 대관도 받은 것이었다. 그의 대관식은 제위에 오른지 11년 뒤에야 볼로냐에서 치러졌으며, 교황과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추진한 것이다. 예전만큼의 중요성은 없는 단순한 세레머니에 불과했다.

3.3.2. 동유럽의 경우: 제3의 로마[편집]




동로마 제국에서는 황제가 되기 위해선 세계 총대주교의 인정을 받는다면 황제를 칭할 수 있었다. 로마의 제정은 그 근본이 공화정의 연장이었던 만큼 황제의 정통성에는 제국민의 인정이 필요했고, 이는 교과서에서 전제군주화되었다고 설명하는 중세 동로마 시대에도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그 제국민의 인정에 교회의 인정도 하나의 요소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형식적인 것이고 상술했듯이 동로마 제국의 황위는 기독교 국교화 이전인 로마 공화정에서부터 내려온 정통성을 갖고 있었기에 2인자가 될 수 밖에 없던 세계 총대주교의 인정 없이도 황제가 될 수 있긴 했다.

동로마 제국이 신성 로마 제국보다 일찍 망한 뒤, 오스만 제국메흐메트 2세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한 이후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를 칭했다. 실제로 메흐메트 2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로 선출된 옌나디오스 스홀라리오스(Γεννάδιος Σχολάριος)는 메흐메트 2세를 로마 황제로 인정했다. 오스만 제국도 셀림 1세 이후로는 5개의 총대주교좌 중 로마를 제외한 4개를 보유하고 있으니[28] 어떤 의미에서는 나름대로 기독교의 보호자라고 할 만은 했다.

문제는 그들은 무슬림이라는 것이었고, 교황이교도를 황제로 인정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때부터 기독교 세계관에서 오스만 제국이 가지는 동로마 제국의 제위는 멸망한 것 취급을 받았으며, 거꾸로 나머지 4개 총대주교좌의 권위가 바닥을 치게 되었다.[29]

이렇게 정교회 세계에서 동로마 황제의 자리가 비게 되자 러시아이반 3세는 스스로 동로마 제국의 계승자이자 정교회 세계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칭제하게 된다. 그가 주장한 근거는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정교회의 중심지가 모스크바로 이동하였고, 이반 3세동로마 황제조카딸결혼했다는 것이었다. 신생 루스 차르국모스크바제3의 로마라 칭했다.(제2의 로마는 당연히 콘스탄티노폴리스) 그러나 당시 루스 차르국은 머나먼 서유럽에서 신경써야 할 만큼 강한 나라가 아니었고, 이 때 사용한 칭호 차르(Tsar)는 유럽링구아 프랑카라틴어로 된 칭호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시기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칭제를 한 것이 아니라 'Tsar라는 독특한 칭호를 사용한 것' 정도로 취급당하며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했으며, 황제로 인정해달라는 이반 3세의 편지도 단호히 거부하였다.

이로부터 약 200년이 지난 뒤, 표트르 1세대북방전쟁에서 스웨덴과 싸워 이긴 후 차르 대신 라틴어로 황제(Imperator)라고 선포한 뒤에야 비로소 서유럽에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때에도 신성 로마 황제 카를 6세는 황제는 오직 한 명 밖에 없다며 표트르의 칭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독일어권 국가의 왕족들과 통혼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러시아의 국력이 너무 강성해지자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을 비롯해서 서유럽 국가들도 러시아 차르를 대충 황제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가 유럽을 정복한 황제 나폴레옹침략을 격퇴하자 유럽에서 러시아의 황제위는 공고해졌고, 동로마 제국의 계승자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3.4. 근대[편집]



3.4.1. 19세기: 나폴레옹의 등장과 그 이후[편집]



카롤루스 대제 이후 천여년간 서유럽에서는 신성 로마 황제만이 유일한 황제였고, 서유럽 세계관에서 신성 로마 황제말고 또다른 황제란 존재할 수 없었다. 때문에 스페인, 프랑스, 영국 등도 제국을 칭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유구한 전통을 깨고 황제가 된 이가 나타났으니, 바로 나폴레옹이었다. 그는 1804년프랑스 상원[30] 의 요청[31]을 받아 요식적인 국민투표를 거쳐 프랑스 제국을 선포하고 초대 황제가 되었다. 나폴레옹 이전까지 서유럽에서 오직 신성 로마 황제만이 황제로 인정받았으나, 나폴레옹에 의해 왕권신수설의 논리가 무너지고 힘에 의해 스스로 황제를 자칭하는 사례가 나타나자 로마 제국의 계승과는 별개로 힘으로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편법으로 황제를 자처하는 식민 제국 국가들이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해 '황제 인플레' 현상이 나타났다.

국민들이 의회를 통해 황제로 임명해주는 나폴레옹의 방식은 방법론적으로 시민들이 원로원을 통해 황제로 인정하는 로마식과 더욱 유사하다. 이는 프랑스 혁명 이후 들어선 나폴레옹의 제정이 갖는 시대적 특수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로마임페라토르처럼 공화정 위에 올라탄 독재자에 가까웠고, 따라서 명목상 프랑스 혁명으로 대두된 혁명 정신과 공화국에 대한 신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라는 국가를 소유한 황제'의 의미가 되는 '프랑스 황제'가 아닌 프랑스인의 황제(Empereur des Français)라는 칭호를 썼고 프랑스의 정치체제를 '국가원수가 황제인 공화정'으로 포장했다. 로마도 황제(임페라토르)의 공식명칭은 로마인의 황제로 시민에게 선출된다는 공화정의 전통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나폴레옹의 방식은 로마와 유사하며, 이를 본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로마의 임페라토르가 명목상으론 군주가 아니지만 권력을 휘두르고 세습같이 할 건 다 했듯이 나폴레옹 역시 나폴레옹 2세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줄 때 국민투표같은 공화정 특유의 인정 절차를 싹다 무시하고 아들에게 제위를 세습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는 나폴레옹이 한참 몰락하던 시기라 정권을 이양받은 프랑스 임시 정권 인수위원회에 의해 무효화되었고 부르봉 왕조복고가 이루어졌다.

이미 15세기 신성 로마 황제가 선출황제로 전환하면서 황제에 대한 중세시대의 규칙이 무너졌다. 사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실력으로 인정받는 것이 됐다. 그래도 권위라는 것은 덕지덕지 붙이면 좋은 것이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나름 명목상 제위에 대한 조건을 충족하려고 했는데, 카롤루스 대제 - 위그 카페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 정통성이 이어진다는 '제3의 반열'이라는 사상을 급조해 로마의 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그리고 교회의 인정이라는 조건을 맞추기 위해 교황이 집전하는 대관식을 열었는데 본인이 로마로 가지 않고 교황파리로 직접 오게 했다. 또 교황이 대관식을 집전하기는 했는데, 제관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썼다. 또한 나폴레옹은 그의 아들 나폴레옹 2세로마왕에 책봉하고, 점령국을 제후국으로 삼으면서 최대한 신성 로마 제국과 비슷하게 구색을 갖추려고 노력했다. 황제의 명칭을 '프랑스인의 황제'라고 한 것도 신성 로마 황제가 겸직하던 '독일인의 왕(독일왕)/로마인의 왕(로마왕)' 제위와 같은 형식을 취하기 위해서였을 수 있다.

이렇게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자 신성 로마 황제인 프란츠 2세는 프랑스 제국에 꿀리지 않기 위해 1804년합스부르크 세습령들을 통합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하고 오스트리아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리하여 프란츠 2세는 두 개의 황제위를 가졌다. 나폴레옹이 라인란트를 점령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 선제후 회의가 와해될 위기에 처하자 후사를 도모한 것이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패배로 프란츠 2세는 신성 로마 제위를 내려놓았으며, 이로써 신성 로마 제국은 (원래도 허울뿐이었지만) 공식적으로 멸망한다. 그러나 프란츠 2세는 오스트리아 황제라는 명칭을 계속 유지하며, 외교적으로도 변함없이 황제 대우를 받았다. 나폴레옹 또한 오스트리아 황제를 인정하고 오히려 조제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하여 자신의 권위를 더욱 드높이려 하였다.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의 패배로 나폴레옹이 실각하면서 프랑스에서는 제정이 무너지고 다시 부르봉 왕조가 들어섰다. 예전으로 되돌린다는 상징성을 표현하기 위해 나폴레옹 이후 루이 18세샤를 10세는 다시 왕을 칭했고, 7월 혁명으로 즉위한 루이필리프 역시 왕을 칭했다.[32] 그러나 1848년 혁명 이후 들어선 공화국대통령이 된 나폴레옹 3세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제국을 재건했다.

1870년 보불전쟁에서 승리하여 프랑스 제국을 멸망시킨 호엔촐레른 가문프로이센 왕국오스트리아가 배제된 독일 제국을 세우고 황제를 자칭했다. 황제의 명분은 당연하게도 독일 땅에 세워졌던 신성 로마 제국을 계승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오스트리아를 제외하면 신성 로마 제국 시절 제후국들이 거의 그대로 독일 제국의 제후국이 되긴 했다. 게다가 프리드리히 1세 시절부터 나폴레옹 전쟁에 이르는 기간 동안 프로이센, 바이에른, 하노버 등 제후국들이 공국에서 왕국으로 승급되었기에, 1871년 시점에서 비록 오스트리아가 여러 왕국과 공국들을 데리고 빠져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제국은 예하에 여러 왕국들을 제후국으로 거느리며 프랑스러시아 이상으로 제국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독일 제국은 신성 로마 제국 때와 달리 제후들의 실권을 크게 제한했고, 황제의 권한이 강했다. 제후들은 여전히 자신의 영지에서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이러한 자치권은 황권에 의해 전면적으로 제한될 수 있었다.

동유럽에서는 러시아차르 역시 동로마 멸망 이후부터 황제를 칭하고 있다가 스웨덴, 나폴레옹을 상대로 승리하는 등 명성을 쌓으며 서유럽에서도 황제로 대접받았다. 이에 러시아독일, 오스트리아의 동맹을 3명의 황제가 만나 맺었다 하여 3제 동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3.4.2. 20세기: 1차 세계대전과 제정의 몰락[편집]



19세기 말 산업 혁명의 영향이 전 유럽에 파급되면서 사회의 복잡도는 전근대처럼 황실이 조율하기엔 부담스러울 정도로 커지게 되었고, 각지에서 근대적 민족주의 의식이 발흥하면서 여러 민족을 거느리는 제국은 이러한 민족주의의 저항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발전하는 미래에 대한 낙관이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제국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판국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국의 번영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라는 거물 정치인에 의해 조율된 만들어진 평화에 가까웠으며, 비스마르크가 퇴임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그동안 잠재되어있던 불만이 연달아 폭발하였고, 황제를 칭하던 나라들의 제정이 모두 몰락하게 된다.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패전국이 되어 완전히 공중분해되었으며, 동로마 제국을 정복했던 오스만 제국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러시아 제국은 아예 공산주의 혁명으로 나라가 뒤집혀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건국되는 지경에 이른다. 이로서 유럽에서 황제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훗날 아돌프 히틀러가 대부분의 유럽을 점령하고 제국을 건설했지만 히틀러는 나폴레옹처럼 황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자리에 오르지는 않았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권은 민주주의 체제가 보급되고, 동구권은 소련식 공산주의 체제가 주입되면서 유럽에서 제정은 완전히 설 자리를 잃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3.4.3. 편법으로 황제가 되는 방법[편집]


재미있는 것은 이때까지 보았듯이 유럽인들은 황위에 있어서 로마 황제(또는 그 후계자)로서의 정통성과 권위를 극히 중시했지만, 정작 유럽 밖의 황제들에 대해서는 '아 그런 게 있나보다' 하고 쿨하게 인정하고 넘어갔다는 점이다. 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한 제국은 로마 제국이 유일했으므로 '유럽 내의' 황제는 로마 황제 뿐이지만, '그 외의 땅'에 대해선 로마 황제가 아닌 다른 황제가 있을 수도 있다고 순순히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최대 수혜자가 러시아 차르인데, 차르가 정교회 세계의 황제라는 인식 덕분에 의외로 가톨릭이 중심이던 서유럽에서 별다른 이견없이 황제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 부분이 자신들이 세계의 유일한 제국이고 황제라 생각했던 중국과의 큰 차이점이다.

나폴레옹 이후 유럽의 열강들이 너도나도 황제를 칭하자, 영국에서도 황제 직위에 대해 갈망하는 이들이 있었다. 영국 총리 디즈레일리는 자신이 모시는 빅토리아 여왕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편법을 동원했다. 자신들이 멸망시킨 무굴 제국타이틀을 이용해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 황제의 칭호를 추가했던 것이다. 유럽인의 관념에서는 이것이 통하는 방법이기는 했다. 왜냐면 중세 유럽의 모든 국가와 칭호는 개인이 아닌 땅에 귀속되며 세습은 칭호와 국가 자체가 아닌 그 칭호와 국가를 가진 땅을 넘김으로써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황제 자체도 고대 로마의 세습 가능한 관직(또는 특권)에 가까운 것에서 출발한 것이고. 하지만 이런 시도는 영국 국내 여론에서조차 무의미한 허례허식으로 취급되어 조롱받았고, 빅토리아 여왕은 Empress라고 불리기보다는 여전히 Queen이라는 칭호를 썼다.[33] 사실 이 시도가 대단히 위험한 것이 자칫하면 대영제국에서 인도가 종주국으로 인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영국에서 (여)황제라는 표현을 꺼렸던 것.

이런 꼼수의 원조는 포르투갈브라질 제국이다. 인도 제국보다 50년 빠르다. 인도 제국은 형식적으로라도 원래 있던 무굴 제국으로부터 제국 타이틀을 얻었는데 브라질 제국은 그냥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조브라질 사람들이 제멋대로 선포한 거다. 물론 브라질 땅로마 제국이 힘을 미친 적이 없으니 빈 땅에 황위를 제수해버리는 것 자체도 유럽인의 관념에서는 틀린 것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나폴레옹 전쟁 때문에 국력이 쇠약해지는 바람에 결국 2개월만에 왕조 가문만 그대로고 나라와 군주는 따로 놀았다.

2차 대전 때로 가게 되면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이탈리아 왕국)가 에티오피아를 정복하고 에티오피아 황제 작위를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겸임하면서 이런 식으로 황제를 자칭한 적이 있었다. 다만 그 후 1943년 이탈리아가 추축국을 탈퇴하면서 에티오피아 황제 자칭은 폐지했고, 종전 이후에는 군주제 자체가 소멸해버렸다.

3.4.4. 19~20세기 서양의 황제국 목록[편집]



근대 유럽의 황제 가문




  • 서로마 제국 계승
    • 신성 로마 제국[34]: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35]
    • 프랑스 제국: 보나파르트 왕조
      • 프랑스 제1제국: 나폴레옹 1세, 나폴레옹 2세[36]
      • 프랑스 제2제국: 나폴레옹 3세
    • 오스트리아 제국[38]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 독일 제국: 호엔촐레른 왕조
  • 동로마 제국 계승
    • 오스만 제국[39]: 오스만 왕조
    • 러시아 제국: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40]
  • 기타[51]
    • 아이티 제국
      • 아이티 제1제국: 자크 1세(장 자크 데살린)[41]
      • 아이티 제2제국: 포스탱 1세(포스탱 엘리 술루크)[42]
    • 멕시코 제국
      • 멕시코 제1제국: 아구스틴 1세(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43]
      • 멕시코 제2제국[44]: 막시밀리아노 1세(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45]
    • 브라질 제국: 브라간사 왕조[46]
    • 영국령 인도 제국[47]: 하노버 왕조, 색스코버그고타 왕조[48], 윈저 왕조[49]
    • 이탈리아령 에티오피아 제국: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사보이아 왕조)[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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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럽의 경우에도 살리카법이 존재하여 많은 서유럽 왕국들이 혈통을 중시하긴 했으나, 이는 게르만족의 전통에서 기원한 것이며 황제 개념과는 별개였다. 그래서 중세 이후에 신성 로마 황제위를 전임 황제와 혈연 관계가 있는 사람이 세습하는 게 일반적이긴 했어도 형식적으로는 투표를 통해 선출했다.[2] 그리스어로는 바실레프스라고 했다.[3] 기독교 공인 이후 기준.[4] 로마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우상화가 진행되었다. 아우구스투스삼두정 시절부터 양아버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철저히 신격화하여 "신의 아들"(Divi Filius)이라는 호칭을 썼다.[5] 카이사르가 행정수반인 집정관 및 비상시 관직인 독재관으로써 정권을 획득하였지만 결국 실패하였기에, 옥타비아누스는 공식적인 공직에서 물러나는 대신에 비토권을 가진 호민관의 특권으로써 로마의 행정과 입법에 대한 권한을 장악하였고, 카이사르 사망 이후 유산으로 받은 군단에 대한 지휘권은 원로원의 인정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였지만, 대외적으로 보여주기식으로 반납하였다가 되돌려 받는 모습을 취하였다. 물론 카이사르에게서 받은 군단을 바탕으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와 싸우면서 원로원으로부터 군단의 확장을 허가받기는 했다. 그러나 카이사르 이전 시기부터 로마의 군대는 장군이나 재력가들에게 클리엔텔라 관계로 귀속된 사병과 같아졌기에 명목상에 불과한 것이다.[6] 현대와 같은 체계적인 국민투표 시스템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당시 상황에서, '민회를 통한 결의' 라는것은 공정한 대중의 의견수렴이 아니라 포룸을 지지자들로 채울 수만 있다면 자신의 주장을 '민회의 결의'로 포장하여 통과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로마 시민들이 한 도시에 모여있던 도시국가 시대와 달리 광대한 제국 전역에 시민권자들이 흩어져 있는 제국 시대에 들어서면서 명색이 황제인 자가 사람을 못 모을 리는 없으니 이런 민회의 의결이란 단순한 요식절차에 지나지 않게 된 것.[7] 물론 그라쿠스 형제도 바보는 아니었으므로 원로원이 여러 수단을 이용하여 자신들에게 반격해 올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로원의 행태가 그라쿠스 형제의 예상보다 좀 더 뻔뻔하고 파렴치했던 것이었다.[8] 이는 현대적 관점에서는 해괴한 해석이지만... 유럽의 경우 고대뿐 아니라 중세, 심지어 근대 무렵까지도 관직이나 영지도 그 사람의 '재산'으로 여겨 사고 팔거나 상속하는 것을 그리 이상한 일로 여기지 않았다.[9]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들이 굉장히 다양하고 독특한 이유로 줄줄히 사망해 나간 나비효과다. 아우구스투스 참조.[10] 빵과 서커스 문서 참고.[11] 군단 유지비와 빈민층 복지(콜로세움 운영비와 음식비 지출) 등이 있다. 어찌되었든 황제는 평민들의 대표로서 평민들의 지지를 받아야하는 존재였기에 불만이 생기는 것을 방지할 책임이 있었다.[12] 당시 동방지역은 서방지역보다 발전되고, 번화한 지역이었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동방에 군주제를 채용하면서, 오랜기간 쇠락하였지만 공화정의 향수가 남아 있던 로마를 버리고, 새로운 기반을 조성하였다.[13] 동아시아의 경우는 특정 왕조의 종말은 곧 국가의 교체로 보았다. 몇몇 예외는 있었으나, 왕조가 교체되면 국호까지 갈아버리는게 일반적이었다. 왕조의 단절을 국가의 멸망으로 보지 않는 견해는 비유럽권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으며, 중국과의 교류가 적었던 초기 신라만 하더라도 세 가문이 왕을 돌려먹는 게 현대 동아시아인의 관점으로는 꽤 이질적이다. 이마저도 박, 석, 김씨만이 혼인이 가능했고 왕의 후계자로 아들뿐만 아니라 사위 혹은 딸까지 포함되는 정도였다.[14] 이는 동아시아식 왕조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물론 조선 후기에 직계 후손이 없으면 방계 친척을 데려다 왕으로 삼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 당시 조선은 이미 세도정치로 왕권이 추락할 대로 추락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특수한 경우로 봐야 한다.[15] 일부일처제가 기본인 유럽식 군주와 달리, 동아시아식 군주는 많은 (후궁)을 거느리기에 혈통이 끊기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다. 물론 서양의 군주들 역시 개인적으로 정부를 두었고 정부의 자식도 있었지만, 정부는 첩과 달리 법적인 아내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정부의 소생은 모두 사생아로 취급되어 왕위 계승권이 없었다.[16] 로마 황제의 칭호 중 하나였던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사제)가 기독교 공인으로 인해 로마 황제의 칭호에서 제외된 후 로마 주교가 서로마 유민들에겐 폰티펙스 막시무스와 같은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17] 고대 말기에 로마 제국이 동서 로마로 분리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것이고, 로마 제국은 한 번도 갈라진 적은 없다. 단지 하나의 제국을 2명 이상의 황제가 다스린 것일 뿐.[18] 참고로 그 1세기 후인 919년, 동로마 제국과 경쟁 중이던 불가리아시메온 1세도 불가리아의 황제로 인정받으면서 유럽에는 공식적으로 3명의 황제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황제 직위가 평가절하될 듯 하였으나 불가리아 제국은 채 100년이 안 되어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에 복속되었다.[19] 사실 그 이전에 샤를 8세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에게 헐값으로 사들인 (동)로마 황제의 타이틀도 명목상 보유하고 있긴 했으나, 스페인도 안드레아스의 유언을 통해 동일한 타이틀을 확보한 상태였고, 따지고 보면 공식적인 타이틀 자체는 '임페라토르 콘스탄티노폴리타누스(Imperator Constantinopolitanus)', 즉 '로마 황제'가 아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였다. 더구나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완전히 정복된 터라 신성 로마 제위와는 달리 아무런 권한이 없는 명예직이었으며, 계승한 수단이나 경로도 좀 그렇고(...) 주권 국가의 지도자로서는 이탈리아로 도망친 그리스인들에게라면 모를까, 아무래도 누구 앞에 내놓기 영 민망한 껍데기에 불과했다.[20] 영어이교도를 뜻하는 pagan과 농부, 시골뜨기를 뜻하는 peasant가 모두 라틴어 paganus를 어원으로 하는 것이 이 때문.[21] 로마 황제폰티펙스 막시무스라는 최고 제사장의 직위를 가지고 있지만 제국이 밀라노 칙령테살로니카 칙령을 통해 기독교화 되면서 이 직위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포기한 직위의 위상이 서로마 유민 사이에선 교황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고 여겨지면서 얼떨결에 교황이 서로마 유민의 대표자가 되었다. 특히나 레오 1세의 사례와 같이 서로마 제국의 황혼기에 교황이 이민족과 직접 협상하여 로마를 지켜냈기 때문에 그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15세기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교황이 본격적으로 폰티펙스 막시무스라고 칭하게 되었다.[22] 지리적으로 로마라는 도시가 포함된 영역을 다스리는[23] 로마 황제로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건 로마의 바실레프스와 동등한 군주인 차르로 인정받은 것[24] 그러나 방계 혈통은 유럽의 여러 왕가와 제후 가문으로 이어진다. 부르봉 가문이라든지. 유럽에서 역사가 오래된 왕실들은 조상을 상고해보면 거의 다 카롤루스 방계 혈통과 연결된다. 즉, 카롤루스 대제의 후손들이라는 것이다. 애당초 그런 권위가 있어야 왕위의 정통성을 확보 가능하기도 하였고. 처음부터 카롤루스의 직계 후손이 시작한 왕조가 아니더라도 혼인을 통해 후손들은 카롤루스 왕조의 후손이 된다.[25] 다만 종교개혁 이후 독일에서도 독일어를 활발하게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독일어인 Römisch-deutscher Kaiser로 불렀다.[26] 마인츠 대주교는 7인의 선제후 가운데서도 가장 서열이 높았다.[27] 다만 막시밀리안 1세의 둘째 손자 페르디난트 1세까지 독일왕 대관식은 아헨에서 거행되었다. 정리하자면 막시밀리안 2세 전까지는 독일왕 대관식은 아헨에서 쾰른 대주교의 주관으로, 황제 대관식은 로마에서 교황의 주관으로 치러졌으나 막시밀리안 2세부터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마인츠 대주교의 주관으로 독일왕-황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28]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29] 물론 교황과 별개로 서유럽 국가들은 외교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군주를 황제로 인정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칼리프였기 때문이다. 이는 기독교적 세계관과는 무관한 것이므로 '다른 문화권의 황제들' 항목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30] 프랑스어에서 상원을 뜻하는 단어는 로마 원로원을 뜻하는 라틴어 단어인 '세나투스(Senatus)'에서 유래했다.[31] 물론 공식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실질적으론 나폴레옹 본인의 의사에 따른 것이다.[32] 다만 루이 18세와 샤를 10세가 프랑스라는 국가 자체를 소유했다는 의미를 가진 '프랑스의 왕'을 칭한 반면, 루이필리프는 프랑스 국민을 대표하는 왕이라는 의미를 가진 '프랑스인의 왕'을 칭했다는 차이는 있었다.[33] 빅토리아 여왕이 황제 칭호를 받게 된 데에는 왕족끼리의 혼인도 한 몫 했다. 여왕의 첫째딸프로이센으로 시집갔는데 프로이센이 독일 제국을 선포함으로써 어머니보다 높은 황후의 직책에 오르게 될 상황이었다. 외교적 수사에서 독일에게 꿀리고 싶지 않았던 정치인의 심리가 작용했다.[34] 1804년 프랑스 제1제국오스트리아 제국 수립 이후에도 존속했으나, 1806년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35] 부계를 통해 로렌 가문(로트링겐 가문)의 혈통을 물려받고, 모계를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혈통을 물려받았는데, 모계 쪽이 급이 더 높은 작위들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어서 그냥 합스부르크라고 불릴 때가 많다. 그렇다고 로트링겐 가문이 대귀족이 아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샤를마뉴의 방계 후손이며 로트링겐 가문의 분가인 기즈 가문은 위그노 전쟁을 기회삼아 프랑스 왕위를 노리기도 했다.[36] 나폴레옹 2세는 아버지로부터 양위받긴 했으나 정식으로 즉위하진 못했다.[37] 오스트리아 제국은 수도로 삼았지만, 신성 로마 제국은 법적으로 정해진 수도가 없었다.[38] 건국 직후에는 신성 로마 제국과 같은 황제를 모시는 동군연합이었고, 두 제국에 동시에 속하는 지역이 많았는데, 그 중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권[37]오스트리아도 있었다.[39] 로마 황제를 뜻하는 '카이세리 룸'을 칭하는 동시에 '왕들의 주인'을 뜻하는 페르시아어 칭호인 파디샤이슬람 세계 전체의 지배자를 뜻하는 칼리파 칭호까지 사용했다. 그 중에서 가장 널리 쓰인 칭호는 파디샤였고, 카이세리 룸은 자국의 기독교도 신민들 및 기독교 제후국들(왈라키아, 몰다비아 등)을 상대하거나 기독교 국가들 상대로 어그로를 끌 때(...) 사용했으며, 칼리파는 초기에는 외교 문서에서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18세기 말부터는 상당히 자주 사용되었다.[40] 로마노프 본가는 18세기옐리자베타 여제를 마지막으로 단절되었고,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 출신으로 모계를 통해 로마노프 혈통을 물려받은 표트르 3세가 승계했다. 이후 표트르 3세는 7년 전쟁흑우스러운 강화를 통해 종결시키는 병크를 터뜨려서 마누라(...)에 의해 축출당하긴 했지만, 그의 아들과 후손들은 제국이 망할 때까지 제위를 세습했다.[41]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황제를 자칭했다.[42] 원래 대통령이었지만,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가 되었다.[43] 장 자크 데살린처럼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황제를 자칭했다.[44] 프랑스괴뢰국[45]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46] 초대 황제 페드루 1세가 잠깐 포르투갈 국왕을 겸하기도 했지만, 금방 에게 포르투갈 왕위를 물려주었고, 브라질 제위는 아들에게 물려줘서 두 나라의 브라간사 왕조는 완전히 분리되었다.[47] 영국 정부가 동인도 회사를 통해 간접 지배하던 인도를 직할령으로 만든 후, 영국 국왕이 황제를 겸하는 제국을 선포했는데, 인도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하면서 해체되었다.[48] 원래 독일 북부의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을 다스리던 가문이었다.[49] 색스코버그고타와 같은 가문이지만, 1차 대전으로 인해 반독 감정이 강해지자 을 갈아엎었다.[50] 1936년 에티오피아 제국을 침공하여 점령함으로써, 에티오피아 제위찬탈하는데 성공했으나, 1941년 영국군에 패하여 토해냈고, 1943년 연합국항복하면서 공식적으로 포기했다.[51] 로마 제국 계승과 무관하게 황제를 칭한 나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