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한자문화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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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황제국이 맞는지 학계에서 논란이 있으며, 이에 대한 내용은 고려/외왕내제 여부 문서에 있다.
(괄호는 외왕내제 왕조)




하위 문서
상세(한자문화권 · 유럽) · 참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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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호칭


황제
皇帝
파일:传国玺.png
중화제국 천자(天子)의 상징인 전국옥새

1. 개요
2. 중국
3. 한국
3.1. 고조선
3.2. 고구려, 백제, 신라
3.3. 발해
3.4. 고려
3.4.1. 천자국 제도의 사용
3.4.2. 원간섭기 이후 제후국으로의 격하
3.5. 조선
3.5.1. 황제국 예법의 사용
3.6. 대한제국
3.7. 현대
4. 일본
5. 베트남
6. 동아시아의 '황제'와 유사한 칭호들



1. 개요[편집]


파일:시황제.jpg
한자문화권 최초의 황제 시황제
한자문화권에서 사용된 황제의 개념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이다. 한자문화권의 황제는 유럽권과는 달리 제정일치가 이루어져 표면적으론 천자(天子)인 막강한 권한을 가졌고 단일 왕조가 국가를 지배하는 체제였다. 한자로는 皇帝이지만 발음은 다 달라서 한글로 표현하자면 중국에서는 '황디', 한국에서는 '황제', 베트남에서는 '호앙디'로 읽는다. 한편 일본에서는 이를 '코테이'라고 읽었지만 자국의 황제에 대해서는 덴노(천황)라는 호칭을 썼다.

칭제를 거의 해보지 못했던 '만년 제후국'의 경우는 '을 황제로 격상하면 백성들의 사기의 상승에 기여한다'는 떡밥도 발흥할 수 있다.


2. 중국[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역사 관련 정보/중국 역대 군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사실 원래 '황(皇)'과 '제(帝)'는 기원이 따로따로 노는 타이틀이었고, 이미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에도 진나라와 제나라는 서로의 군주를 동제(東帝), 서제(西帝)라고 그냥 왕보다 격을 높여 불렀던 적이 있었다. 이후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고 나서 제호(帝號)를 의논했는데 신하들은 역사상 가장 존귀한 임금으로 추앙받는 삼황에서 황자를 따와 기존의 제자 앞에 붙였고, 이로서 황제라는 호칭이 완성된다.

진시황이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 칭한 건 자신의 계승자들이 2대 황제, 3대 황제 하는 식으로 이어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세황제까지는 이어졌지만 진이 예상보다 일찍 붕괴돼버리는 바람에 그러한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고, 이후 한나라 시대부터 청나라 시대까지 무제광무제태종이니 하는 식으로 시호와 묘호로 칭한다.

참고로 진시황 사후 진 제국의 수도를 점령했던 항우는 황제라는 호칭 대신 - 명목상 서초 회왕의 신하였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 스스로를 초패왕(楚覇王)이라 칭하고, 회왕 웅심(熊心)은 의제(義帝)로 높였다. 황제는 "천하를 통치하는 자"이고 패왕은 "힘으로 지배하는 자"라고 보면 되겠다.[1]

중국의 황제 개념은 원칙상으로 '천하의 지배자'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일부 지역을 장악하고, 이를 유지할 능력만 있다면 개나 소나 황제를 칭하는 일이 잦았다. 물론 이렇게 지방의 자칭 황제가 되었다 전국 통일에는 실패한 자들은 후대의 역사서에서 지역명+왕(또는 주主) 혹은 본명으로 기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남북조시대처럼 남북이 각기 역사 기록을 남긴 경우 서로 상대방을 참칭 황제라 서술하기도 한다. 또한 정통성 논란이 발생하는 중국의 분열 시대는 특정 국가만 후대에 정통으로 평가되기 어려우므로 여러 국가의 군주가 다 황제로 인정받기도 한다.

하지만 중국의 일부 지역을 지배하는 수준을 넘어 주변국을 신하로 대하며 작위를 준 경우도 많다. 한국인들에게 황제란 거대한 국가를 통치하는 유일무이한 지배자라는 이미지가 있는 까닭은 옆나라 중국의 군주 때문이다. 한자문화권을 넘어 먼 지역까지 제국의 위상을 높인 중국 황제들도 여럿 존재하였다. 대표적으로 정화의 원정대를 파견하어 인도양 인접 각국에 명나라의 국력을 과시하고 위상을 떨친 영락제.

동아시아의 황제는 휘하에 , 공작 등을 둘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의 우위를 인정하나 독립되어 있는 조정을 구성하고 따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인 왕이 아니라 황제의 아들 중에서 후계자인 태자를 제외한 다른 아들들에게 주는 작위로서의 왕(주로 친왕(親王))도 존재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이 경우가 더 많았다. 주나라의 봉건제가 무너진 후 군국제를 거쳐 전면적인 중앙집권적 군현제가 실시되자 황제국의 영토 내에서 반(半)독립적인 통치권을 지닌 지방 왕(주로 번왕(藩王))들은 황제권에 심각하게 위협이 되기 때문에 나중에 거의 폐위되었다. 역사적으로도 반독립적인 지방 왕들은 반란을 여러 번 일으켰는데, 전한 시대에 옛 연나라 땅을 다스리는 번왕에 봉해진 노관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나 전한 중기의 오초칠국의 난, 서진팔왕의 난, 청나라 초기의 삼번의 난 등이 그 예이다. 따라서 중국 역사에서는 번왕보다 친왕이 더 많았다. 따라서 주나라 이후의 중국 역대 국가는 주나라의 경우처럼 제후와 제후국을 만들어 지방을 간접통치하는 것이 아니고 군현을 두고 태수, 주목, 자사, 절도사, 순무, 총독 등의 관료를 파견하는 직접통치를 하였다.

중국의 천자인 황제는 '천상'의 천제로부터 천명을 받아 '천하' 전체를 소유하는 존재이기에 모든 땅의 주인이자 인간 세상의 지배자였다. 왕공후백자남의 제후는 단지 황제의 땅 중 일부분을 대신 다스리는 자에 불과했다. 이것이 중화사상에 입각한 관념적인 천하관이었다. 그리고 중국은 내부의 제후들과의 관계에도 이러한 체계를 도입하였다. 그래서 중국은 자신들을 세상의 중심인 중국이라 인식했고 외국의 군주는 천자에게 봉국과 제후의 작위를 책봉받아 천자의 허락하에 신하로서 각 영토를 다스린다는 이론을 성립했다.

그래서 중국의 한족 국가들에게는 외국 이민족과의 동등한 외교관계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고 오로지 천자의 신하국이라는 개념만이 있었다.[2] 이는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고 대영제국을 비롯한 서구열강들과 동등한 외교관계를 성립하게 됨으로서 깨지게 된다.

황제가 내리는 명령은 칙(勅)이라고 부른다. 유교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서 황제와 왕은 엄격하게 구별되었기 때문에 쓰이는 한자부터 달랐다. 한국사에서는 구한말 고종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국이 된 후 대내외에 공식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 사극에서 흔히 나오는 어명보다 당연히 높다. 황제가 내리는 명령을 담은 칙서(勅書)를 신하가 성지(聖旨)로 전달하며, 칙명을 따라야 하는 제후와 신하는 황제가 실제로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받들었다.

중원 역사를 설명할 때 황제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황제라는 직위가 등장한 이후 환란이 와도 춘추전국시대처럼 뿔뿔이 흩어져서 살기 보다는 자신이 중원을 통일한 황제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서로 치고 박다가 결국 다시 하나의 국가로 모이곤 했다.

특이하게도 황제가 다른 나라 황제를 제후처럼 책봉하는 경우도 있긴 했다. 금나라남송 황제를 책봉했다(...). 금은 송나라를 완전히 정복하고 싶었지만 중국 전역을 완전히 차지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송나라 황제를 인정하되 자기네 황제가 책봉하는 방식을 썼던 것. 송나라로서는 굴욕적이지만 전쟁의 종결 및 휘종의 유해와 고종의 생모 위씨의 반환을 위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3] 금나라는 송나라 외에도 괴뢰국인 초(楚)나라[4]와 제(齊)나라[5]라는 허수아비 국가를 세워 각각 황제를 책봉했다.

한편 오호십육국 시대 이래로 중국으로 진입한 비(非)한족 군주들은 선우카간 같은 고유 칭호 말고도 천왕(天王) 같은 한자식 조어도 사용하였는데, 시대가 갈수록 황제(皇帝)로 칭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6] 남북조시대의 북조, 요나라, 금나라, 서하, 대리국, 원나라, 청나라 등이 비(非)한족 지배자의 황제국의 예.

주요 황제국들에게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국가들의 경우에는 황제의 칭호를 쓰고 군사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으나, 연호를 쓰면서도 주로 황제보다는 왕의 칭호를 사용하는 빈도가 더 많았으며, 원나라 이후에는 민란이나 종교와 연관된 반란들이 많았기에 황제의 칭호보다는 왕, 천왕, 원수 등을 자칭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청나라 대에는 주씨 성을 가진 사람들만 황제를 자처하거나 반청복명을 내세웠기에 그리 쓰이지 않았다.

기원전 221년에 등장한 황제 칭호는 1912년 청나라가 신해혁명으로 멸망하면서 소멸하였다. 1916년 중화민국의 총통 위안스카이중화제국 건국을 선포하면서 제위가 일시적으로 부활하였으나, 전국 각지의 반발로 곧 취소되었다. 1917년 7월에는 장훈복벽이 발생, 청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가 황제로 다시 복위하였으나, 이 쿠데타는 11일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멸망 후 청나라 소조정이라고 불리는 청나라 황실은 중화민국이 황실의 예우는 해주었으나 1924년 군벌 펑위샹에 의해 해체되어 명목상으로도 황제가 남지 않게 되었다. 이후 선통제가 일본에 협조하여 1932년 만주국 원수로 취임하고, 1934년에 만주국 황제가 되어 만주 지역이나마 제위가 다시 들어섰다. 하지만 1945년 일본 제국의 패망과 함께 만주국도 멸망하여 중국사에서 황제는 현재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는 제정을 폐지한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지만..[7]

그런가 하면 황제라는 칭호가 중국 역사 후기로 갈수록 하도 많이 쓰이다 보니, 청나라 때에는 자국의 황제를 가리켜 대황제(大皇帝)라고 극존칭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 예로 아편전쟁 당시 영국 상인들이 파는 아편을 모두 몰수하여 없애버린 강직한 관리인 임칙서는 영국 상인들한테 "우리 (청나라) 대황제께서 너희들한테 그동안 관용을 베푸시어 중국의 항구로 들어와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하시었는데, 어찌하여 너희는 너희 나라에서조차 불법으로 적용된 위험한 독약을 중국에 들여와서 파는가?"라고 항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3. 한국[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대한제국/황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고대 한국어 발음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조선 전기에는 황제를 한글로 '황뎨'로 표기했다. 조선 후기에는 구개음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ㄷ이 ㅈ로 바뀐다.

한국사 국가들은 중국의 조공-책봉 체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아 대외적으로 황제를 대놓고 자칭하는 군주는 드물었다. 예를 들어 광개토태왕비를 만들고, 태왕 호칭을 쓰고 연호를 사용했을 가능성까지 높은 장수왕에게 북위가 준 책봉호는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郞將)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高句麗王)이었다.


3.1. 고조선[편집]


고조선이 대외적으로 내세운 군주의 명칭은 중국의 공후백자남 중 "후(侯)"였다. 그러나 주왕의 권위가 어느 정도 섰던 춘추시대와는 달리 전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주나라 천자의 권위가 떨어졌고, 이때부터 중국 각지의 군웅들이 초왕, 오왕, 월왕, 연왕 등 왕을 칭하게 되었다. 의 역왕(易王)도 왕을 자칭하게 되었고, 그러자 연과 경쟁관계에 있던 인접국 고조선조선왕 1세도 주왕실을 받든다는 명분으로 왕을 자칭했다.

이 당시 중국에서 황제라는 개념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하상주 삼대의 중국에서는 '왕(王)'이 천자로서 가장 높은 군주의 직위였다. 더 높은 황제의 개념이 없었으므로 왕(王)은 격으로만 따지면 중국에서 가장 높은 칭호였던 왕과 동급이었다. 그래서 이때 고조선이 왕을 자칭한 것은 후대의 관점에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마치 황제에 오른 격이라 할 수 있다.

그 근거로 고조선도 고조선 내의 군주인 조선왕과 신하인 비왕을 뒀다. 왕중왕이었던 것이다.


3.2. 고구려, 백제, 신라[편집]


전국시대를 통일한 시황제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주나라의 권위가 하락하여 너도 나도 '왕(王)'을 칭해 가치가 떨어지자 왕보다 더 특별한 지위를 원했고 그래서 공후백자남 위에 황제라는 왕보다 더욱 높은 왕중왕의 개념이 생성된다. 이는 후대에도 이어져 중국과 주변 동아시아국가에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한동안은 중국의 주변 민족에서 왕중왕의 칭호로 황제가 아직은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각 민족들은 독자적인 천하관의 형성하여 중국식의 동아시아 조공-책봉 체제에서 통용되는 황제칭호와 달리 각 종족들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기능하는 고유의 칭호를 통해 왕을 초월한 위상을 표현하는 경향도 있었다. 5호 16국의 북방 유목민족에서 통용된 천왕, 일본에서 사용한 천황[8][9][10], 고구려의 태왕[11], 백제의 대왕[12]이 그 예이다. 하지만 중국의 영향력으로 인해 점점 한반도를 포험한 주변민족들에도 중화사상이 전파되기 시작한다. 삼국시대는 그 과도적인 시기였다.

삼국의 군주가 왕중왕으로서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 역사기록으로 확인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고구려는 황제 격의 태왕이라는 칭호가 있었고 비류국을 점령한 후 송양을 다물국왕으로 책봉하고 또, 부여 임금 대소왕의 동생에게 왕작을 하사하였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면 백제와 신라, 가야를 속국으로 거느림을 주장하며 제국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덕흥리 고분 무덤 묵서명에는 무덤의 주인인 유주자사 진이 고구려 군주의 후왕(侯王)에 임명되었다고 쓰여있다.

백제의 경우에는 대왕이라는 칭호가 단순히 왕의 경칭이 아니라 더욱 높은 위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매라왕, 벽중왕, 아착왕, 면중왕 등 왕작을 하사하였고 칠지도의 명문에는 일본국왕을 "후왕(侯王)"이라고 칭하여 일본국왕을 제후왕 취급했다는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탐라가 입조했다. 또한 백제 군주의 칭호 중에는 '황제'라는 용어가 있으며 의자왕 역시 황제를 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구당서에 따르면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은 태자(太子)로 나온다. 다만 왕(王)도 혼용된 형태인 왕태자(王太子)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는 무왕을 대왕 폐하(大王陛下)라 부른 것과 유사하다.흠정만주원류고 3권에는 '사서[13]에 따르면 백제는 여러 제후나 왕을 세워 그들의 공훈에 보답했다.'라고 적었다.

신라는 상대에 사용한 마립간의 의미가 왕중왕과 유사한데, 여기서 '간'은 당시 한반도의 가야, 진한 각국과 같은 여러 작은 나라의 임금을 말한다. 간 중의 간이라는 의미로 마립간이 사용된 것. 이후 이 작은 나라들을 초월한 상위의 존재로서 지증왕 때부터 중국에서 수입한 칭호인 왕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후 법흥왕부터 자체 연호를 제정하고 진흥왕태왕을 칭하며, 이때부터 황제의 격식에 해당하는 여러 칭호를 사용했는데 마운령비창녕 척경비의 금석문 기록에 제왕(帝王)이나 (朕) 같은 용어 사용이 발견되는 것이 그 예다. 문무왕은 귀순한 고구려 왕족을 '고려국왕' 내지는 '보덕국왕''으로 책봉해 작위를 내렸고 금마저를 봉지로 하사했으며, 탐라국이나 우산국 역시 입조시키고 속국으로 거느려 제후를 거느리는 제국의 형식을 갖추었다. 이외에 왕족에게 하사하는 명주군왕갈문왕의 지위도 있었다. 마지막 왕자였던 경순왕의 아들은 삼국사기 등의 사서에 세자가 아닌 태자로 나와서 현대에는 마의태자(麻衣太子)라 부른다.

한편 신라는 대일관계에서 '왕성국(王城國) 사건'이라는 일도 있었는데 이는 신라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를 왕성국으로 칭한 사건이다. 왕성국의 의미는 서경, 주례 등의 유교 경전에서 말한 세계관속의 개념으로 이에 따르면 '왕성(수도 궁성) - 왕기(수도지방) - 6복(지방) - 번국(외부 이민족의 제후국)의 순서로 상하관계의 체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쉽게 말해 여기서 신라가 왕성국이라면 일본은 번국이라는 뜻으로 스스로를 번국을 부리는 황제국으로 여겼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렇듯 삼국은 중국천자에게 입조하여 신하국으로서 조공·책봉 체제에 편입되기는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국내의 제후왕과 국외의 속국왕도 봉작하고 조공을 받는 이중적인 체제에 있었다.


3.3. 발해[편집]


발해의 군주는 대왕이나 황제, 가독부로 불리기도 하였고 황상이라 경칭하고 오등작의 작위가 있었고 왕부를 따로 설치한 것이 유물로써 확인되어 왕작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고왕의 태자 대무예계루군왕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왕중왕 체제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발해부흥운동의 시기에는 대발해고영창칭제건원 하였다. 한편 흥료국대연림연호를 세우거나 '태사(太師)'관직을 내리는 등[14] 천자국의 제도를 사용하였다.

물론 문왕대 일본과의 외교 문서에서 표현된 바로는 '고려국왕'이라고 기술하되 '천손'임을 자처하며 일본에 '조카의 나라'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자세한 것은 발해 문서 참조.


3.4. 고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려/외왕내제 여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4.1. 천자국 제도의 사용[편집]


고려는 천자국을 표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왕실 인물들의 명칭와 호칭을 천자국의 예법으로 하였다.
    • 군주를 부를 때 폐하, 황상, 금상, 성상, 주상(主上)[15]이라 했고 군주는 스스로를 칭할 때 이라 하였다.
    • 대비는 태후였고 부를 땐 폐하라고 하였다.
    • 제위를 이을 왕자는 세자가 아닌 태자로 삼았으며 태자에 대한 경칭이 '저하'가 아닌 '전하'였고 '태자부(太子府)'로 불리는 산하기관을 가지고 있었다.
    • 일반 왕자들에게는 삼공[16]의 직위를 부여하며 공, 후의 작위를 내리고 '제왕(諸王)'이라 통칭하였다. 산하기관은 '제왕부(諸王府)'였다. '영공 전하'라 불렀다.
    • 그리고 고려의 세자는 태자로 하기도 했지만 왕의 동생이 세제가 된 일도 있었는데 이때도 왕세제가 아닌 황태제(皇太弟)에 임명되었다.[17]

  • 제후제를 시행하여 고려의 군주 아래에 제후왕[18], '공후백자남'의 오등작을 왕족과 훈신들에게 책봉하였다. 황자들은 기본적으로 후(侯)가 초봉되었으며[19][20] 기타 황실종친들과 훈신등 유력한 신하들에게도 작위를 하사하고 훈신의 경우 '영공 저하'로 경칭하였다. 유교적 예법상으로는 천자는 지방의 대리통치를 봉한 '국(國)'의 우두머리에게 제후의 작위오등작을 내리고 제후는 제후국에 소속된 '가(家)'의 가신의 작위군(君)을 내린다.

  • 절일을 만들어 기념하였다. 절일은 황실 인물의 생일에 특별한 명칭을 붙여 'xx절' 식으로 명절과 같이 기념하는 것이다.
    • 성종 - 천춘절(千春節) > 천추절(千秋節)
    • 목종 - 장녕절(長寧節)
    • 덕종 - 인수절(仁壽節) > 응천절(應天節)
    • 정종 - 장령절(長齡節)
    • 문종 - 성평절(成平節)
    • 선종 - 천원절(天元節)
    • 숙종 - 대원절(大元節)
    • 예종 - 함녕절(咸寧節)
      • 왕태자 - 영정절(永貞節)
      • 명의태후(明懿太后)[21] - 지원절(至元節)
    • 인종 - 안정절(安貞節) > 경용절(慶龍節)
    • 의종 - 하청절(河淸節)
      • 공예태후[22] - 곤녕절(坤寧節)
    • 명종 - 건흥절(乾興節)
    • 신종 - 함성절(咸成節)
    • 희종 - 수기절(壽祺節) > 수성절(壽成節)[23]
    • 강종 - 광천절(光天節)
    • 고종 - 경운절(慶雲節)
    • 원종 - 함녕절(咸寧節)
    • 충렬왕 - 수원천성절(壽元天聖節) > 탄일(誕日)[24]

  • 천조(天朝)를 칭했다.
    • 고려 조정을 '천정(天庭)'이라 하였다.
    • 여진들이 고려에게 조공하였을 때는 '조천(朝天)'이라 하였다.[25] '조천'은 신하가 황제를 알현할 때 쓰는 표현으로 '하늘을 받든다.'는 뜻이다.
    • 왕위를 '구천지위(九天之位)', '천위(天位)'라 하였다.
    • 왕족의 결혼을 '천인(天姻)'이라 하였다.
    • 고려 국왕이 내리는 사면령은 '대사천하(大赦天下)'라 하였다[26]
    • 일리천 전투에서 '~천군(~天軍)'의 기록이 있다.
    • 만월대를 '천지(天墀)', '천구(天衢)', '천문(天門)'이라 불렀고 제2 정전을 '천덕전(天德殿)'이라 하였으며 명의태후의 관저를 '천화전(天和殿)'이라 하였다. 그외에도 '천성전(天成殿)'[27], '천부전(天敷殿)', '천수전(天壽殿)'같은 건물명이 있었고 '천우문(天祐門)', '승천문(承天門)', '통천문(通天門)', '좌우조천문(左右朝天門)', '천복문(天福門)', '천덕문(天德門)'같은 문 이름이 있었다.
    • 연경궁의 전문을 '천복전문(天福殿門)', 정전을 '천복전(天福殿)', '천성전(天成殿)'이라 하였다.
    • 수덕궁의 정전은 '천령전(天寧殿)'이라 하였다.
    • 구제궁의 정전은 '천흥전(天興殿)'이라 하였다.

  • 원구단을 세우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예법상 천자는 하늘과 산천에 제사 지내고 제후는 산천에만 제사지낸다. 이는 가장 대표적인 천자로서의 행위였다. 천자는 이름 그대로 하늘의 주인인 천제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늘의 뜻(천명)을 물어보고 하늘과 교류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인간 중에 오로지 천자만 가능했다. 그러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지 아닌지는 천자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 고유의 역법을 제정했다. 천자는 이름 그대로 하늘의 아들이었고 하늘은 역(歷, 자연의 주기적 현상)이라는 질서의 거룩한 투영이며 그 실현이었다. 그래서 오로지 천자만이 하늘과 교류할 수 있는 중화사상의 개념상 역법제정은 천자만의 고유한 특권이었다. 그리고 제후국은 중국의 천자가 만든 달력을 받아 사용해야 했고, 하늘을 보고 관장하는 것은 천자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본래 제후국에서는 만들 수 없었다.[28] 그러므로 고유의 역법을 만들었다는 것은 고려가 천자국으로서 행동했다는 증거이다. 기록상 나타나는 고려 고유의 역법은 다음과 같다.

  • 종묘를 조선시대처럼 제후국의 법도로 종묘라 부르지 않고 황제국의 예법으로 태묘라 하였다. 다만 처음 도입한 성종은 형식을 제후식의 5묘 9실제로 하긴 하였으나 의종 대에 완전한 천자국식으로 7묘 9실제로 바꿔 이름에 걸맞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29]

  • 묘호를 사용하였다.[30]

  • 사직의 제사명을 대사(大社)라 하였다.[31]

  • 개경을 '황성(皇城)' 또는 '황도(皇都)' 부르고 대도시 행정단위를 개경, 서경, 남경, 동경과 같은 '경(京)'이라 불렀다.[32]

  • 일본[33], 여진[34], 탐라를 제후국으로 부렸다.

  • 군주가 내리는 글을 조서(詔書)[35]라 하였고 명령을 칙명(勅命)[36]이라 하였다. 또한 신하가 군주에게 바치는 글을 전문이 아닌 표문(表文)[37]이라 하였다.

  •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한 적이 있다.[38] 태조는 독자적인 연호인 '천수(天授)', 광종은 '광덕(光德)', '준풍(峻豊)'을 사용했다.

  • 이성육부(二省六部)의 체계를 도입하였다. 성(省)과 부(部)는 천자국 예법이었다.[39]

  •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의 삼사 관직이 있었다.[40]

  • 군주의 주치의를 어의(御醫), 태의(太醫)라고 불렀다.[41][42]

  • 도성이었던 개경의 구조를 나성(외성), 황성(발어참성), 궁성 순의 3중 구조로 만들어 중국의 천자식 도성제를 따라 만들었다. 고려 말에는 내성도 만들어 무려 총 4중 구조였다. 제후국 양식을 따르던 조선과 비교해보면 조선은 수도를 단촐하게 한양도성 하나의 형태로만 만들고 궁궐 주변에 성벽도 올리지 않았다. 오로지 법궁인 경복궁의 경우 정문인 광화문에서 · 서십자각 까지의 한 면만 성벽이 있을 뿐이었고 그나마도 위에 올라가서 성벽 위를 돌아다닐 수도 없는 장벽의 형태인 데다가 나성, 황성, 궁성 이런 개념에 들어가는 것도 아닌 그냥 담의 개념일 뿐이다.

  • 만월대의 구조가 5개의 문을 통과해야 정전에 도착하는 형태 였다.(조선 같은 경우 제후국의 예로 3개의 문을 통과)

  • 고려의 군주는 황룡포, 통천관(通天冠)[43], 옥대를 사용하였다.[44]

  • 만세[45]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동문선 108권 '연경궁 정전 상량문'에는 '주상만세만세(主上萬歲萬歲)'라는 구절이있다.

  • 만승(萬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탈 승(乘)자는 수레를 의미하는데 주나라 천자는 전차 1만승(乘)과 6군을 거느린다고 했으며 제후는 전차 1천승과 3군을 거느린다고 한 것이 출전이다.

  • 팔관회에서 임금이 행차하는 길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황토를 깔았다.


한편 고려 중기에는 서경 천도 운동칭제건원[46]을 주장하던 묘청이 난을 일으켜 대위국[47]을 건국하고 '하늘이 열렸다.'는 뜻의 '천개(天開)'라는 연호를 삼고 군대를 '하늘이 내려준 충성스럽고 의로운 군대'라는 뜻의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으로 삼아 인종을 황제로 옹립하려 한 일이 있었다.


3.4.2. 원간섭기 이후 제후국으로의 격하[편집]


그러나 여몽전쟁의 결과로 원나라에 항복한 후로는 원나라 황제의 신하이자 부마로서 제후왕의 법식을 따르게 되었다.

원종 때까지만 해도 계속 기존 천자국 제도를 사용하려했다. 예를 들어 7묘 9실제 종묘에 짐, 폐하 등 천자식 예법을 그대로 썼으며 독자적 묘호와 시호를 받았다.[48] 하지만 충렬왕 때부터 다루가치의 반발로 인해 대다수 제도가 크게 격하된다.

다루가치가 따졌다: "선지(宣旨)라 칭하고, 짐(朕)이라 칭하고, 사(赦)라 칭하니 어찌 이리 참람할 수 있습니까?"

왕은 검의중찬 김방경, 좌승선 박항을 보내 해명했다: "참람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종(祖宗)이 오래토록 전해 왔으니 바꾸길 겁냈을 뿐이다."

그리하여 선지(宣旨)를 왕지(王旨)로, 짐(朕)을 고(孤)로, 사(赦)[49]

를 유(宥)[50]로, 주(奏)[51]를 정(呈)으로 바꾸었다.

- 고려사 충렬왕 세가 재위 2년 3월 중 발췌.

1276년을 기점으로 많은 왕실 예법이 격하된다. 대표적으로 선지(宣旨)가 왕지(王旨)로, 짐(朕)을 고(孤)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표문(表文)[52]은 전문(箋文)[53]으로, 태후(太后)는 대비(大妃)로, 왕후(王后)는 왕비(王妃)로 바뀌었다.

제사 제도 또한 바뀌었다. 천자의 종묘인 7묘 9실제 태묘는 제후의 5묘제 태묘로 바뀌었고 묘호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동안 올려진 묘호는 "X왕"으로 격하되어 원에 소개된다. 예를 들어 태조는 태왕(太王) 혹은 조왕(祖王)으로, 혜종은 혜왕(惠王)으로. 보통 원 간섭기에 쓰인 책들이 전왕들을 언급할 때 이런 식으로 쓰였다.

시호 또한 스스로 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원나라의 제후국가, 부마가 됐으니 시호는 원 천자의 시호를 받아야 했다. 시호를 고려에서 스스로 올리면 고려 왕이 원 황제의 제후라는걸 부정하는 것이 되니까. 충렬왕 때 시작해 충정왕까지 원의 시호만 받았고 고려 독자적으로 올린 시호는 없었다. 그래서 아들 충선왕이 따로 시호를 올렸다가 포기한다. 이는 반원 성향인 공민왕이 재위 6년에 독자적으로 시호를 올릴 때까지 이어진다.

관제 역시 격하되어 2성 6부제에서 1부 4사제로 바뀌었다. 충렬왕 때는 그나마 훈위, 오등작 봉작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말기에는 봉군제(封君制)가 시행되었다.

바뀌지 않은 것도 있는데, 원은 몽골 유목민족이다 보니 한족과 조금씩 다른 점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고려의 몇몇 제도는 격하를 피해 갔다.

의복은 그대로 이어졌다. 노랑색 곤룡포는 천자만이 입는 옷이지만, 원이 고려의 왕복 색깔은 그다지 신경쓰질 않아 몽골풍 옷을 입을 때를 제외하고 황포를 유지했다.

원구단 또한 살아남았다. 충숙왕 때까지 원구에서 기우제를 지낸게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원구단은 몰래몰래 살아남아 조선 태조 대까지 이어진다.

(생략)...신하들이 사사로히 왕을 성상(聖上), 황상(皇上)이라 했으며, 임금을 요(堯), 순(舜)으로, 나라를 한(漢), 당(唐)으로 표현했다.

왕은 스스로를 짐(朕), 여일인(予一人)[54]

이라 칭하고, 명령을 조(詔), 제(制)라하고, 유경내(宥境內)를 대사천하(大赦天下)[55]로 표현했으며, 관부 제도는 모두 천조(天朝)와 같게 했으니, 이들은 너무나도 참람하다....(생략)

- '동인지문사륙' 서문 중.


1388년 여말 우왕 치세에 만들어진 서적 동인지문사륙엔 고려가 충렬왕 대 관제 격하를 당하기 전의 모습이 나온다.

공민왕 때 원의 간섭에서 벗어남으로써 제도를 다시 복구하고 오히려 전보다 더해 12류 면류관을 사용하였으나[56] 얼마 안가 명나라에 칭신하게 되어서 다시 제후국이 되었으며[57] 공민왕 이후 고려는 얼마 안 가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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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조선[편집]


조선 왕조는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아 외왕내제를 완전히 행하지는 않았으나 황제국에서만 쓰는 묘호를 계속 사용하는 등 일부에서는 황제국의 예법들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후 고종 시절에 대한제국으로 국명을 바꾸면서 칭제건원을 함에 따라 완전한 황제국이 된다.


3.5.1. 황제국 예법의 사용[편집]


유교 예법상 제후국은 묘호를 올릴 수 없다. 천자의 칭호이니까. 시호도 스스로 올릴 수 없는데 이는 천자의 신하로서 천자가 주는 시호를 받아야하기 때문이다.[58] 하지만 조선은 두 가지 모두를 무시했다. 태조(太祖) 포함 태조의 4대조에게도 모두 천자의 묘호를 올리고, 독자적인 시호를 올렸다. 이후 광해군과 연산군처럼 반정으로 폐위된 군주들을 제외하고는 조선의 군주들은 묘호를 관행적으로 모두 다 받았다.

조선에서 신하는 왕을 황제에게만 쓸 수 있는 명칭인 주상, 금상, 성상 군상(君上) 등이라 불렀다.

주상(主上) - 조선에서 신하들이 조선 왕에게 주상 전하라고 호칭해서 주상이란 용어를 왕한테만 사용하는 용어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주상 또한 금상, 성상처럼 황제에게도 사용한 기록이 있다. 그 예로

제갈량이 탄식하며 말했다, “법효직이 살아 있었다면 능히 주상(主上)을 제지해 동쪽으로 가시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동쪽으로 가셨다 하더라도 필시 경위(傾危-형세가 위태로워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삼국지》 <촉지> -법정전-

소정방이 정지절에게 말하였다 군사를 출동시킨 것은 도적을 토벌하려고 한 것인데 지금 마침내 스스로 지키면서 앉아서 스스로 곤혹스럽게 지치고 있으니 만약에 도적을 만나면 반드시 패배할 것이며 나약하고 겁을 먹은 것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공로를 세웁니까? 또한 주상(당 고종)은 공을 대장으로 삼았는데, 어찌 다시금 군부를 파견하여서 그 호령을 오로지할 수가 있겠으며...

《자치통감》 <당기> 16 고종 현경 원년(656)

완안광이 '남조(南朝, 송나라)에서 그자(한탁주)를 쫓아내는게 가능하겠나?'라고 물었다.왕남이 답하기를 주상(主上)의 영단(英斷)으로 어찌 어렵겠습니까?'라고 하자, 완안광이 도리어 웃었으며 비로소 강화가 성립되었고 왕남이 돌아오면서 한탁주의 수급을 금나라로 보냈다

《송사기사본말》(宋史紀事本末) 83권

여진주(女眞主아골타)가 무리를 모아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하는 말이 비로소 너희들과 기병(起兵)하니 글단(契丹/거란,계단)이 잔인함이 오래 되어서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 지금 주상(主上/요 천조제)이 친정하니, 어찌 하겠는가? 사람이 죽음으로써 싸우지 않는다면, 능히 당해낼 수가 없다. 만약 나의 일족을 죽이지 못하겠다면, 너희들은 항복하고 영접하여, 전화위복(轉禍為福)하라

《요사》(遼史) 천조제(天祚帝) 천경(天慶) 5년 (1115년) 국역


지금 주상(主上/ 금 애종)이 채주(蔡州)에서 수위(受圍/포위를 받음)하니, 공창(鞏昌)으로 천도(遷都)를 의(擬/헤아림)하는 것이다.

《금사》 <곽하마(郭蝦蟆) 열전> 국역


왕년에 우리 주상(主上고종)께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부대부인(府大夫人)의 상에 복을 입을 때에, 은혜와 의리를 작량하여 재단해서 단연코 이를 기년복으로 결정하여 시행하였으니, 이것이 예(禮)요, 그 주장은 이천(伊川)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실천은 우리 주상에 이르러 시작된 것이니, 참으로 만세의 바꿀 수 없는 전범(典範)인 것이다

《수당집》 제4권 <왕석천(王錫闡)과 혜사기(惠士奇)의 절기설(絶朞說)을 논박함>


세상에 만약 제 환공(齊桓公)과 진 문공(晉文公) 같은 임금이 있다면 이와 같은 것들을 어찌 그냥 놓아두고 섬멸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주상(主上)의 위(位)가 아직 바뀌지 않았으며 인민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고, 각국 공사가 아직 돌아가지 않고, 조약을 맺은 문서가 다행히 폐하의 윤허와 참정의 인가(認可)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들의 믿는 것은 다만 역신들이 강제로 조인한 헛조약에 불과합니다. 마땅히 먼저 박제순 이하 다섯 역적의 머리를 베어서 나라 팔아넘긴 죄를 밝히고, 외부 장관(外部長官)을 갈아 세워 일본 공관(公館)에 조회(照會)하여 거짓 맹약의 문서를 없애 버리도록 하고, 또 각국 공관에도 급히 공문을 통해 모두 회합한 다음, 일본이 강국임을 믿고 약소국을 겁박한 죄를 성명(聲名)할 것입니다.

《면암선생문집》 부록 제3권 <연보>(年譜)


금상(今上) - '지금의 임금'이라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명나라 황제를 금상황제(今上皇帝)라고 칭하는 기록이 있다 21세기 일본에서도 천황을 지칭할 때는 금상(今上)을 쓴다.

성상(聖上) - 집권 중인 황제나 왕을 높여 부르는 존칭으로 정유재란 때 명나라의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손잡고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조선을 모함할 때 증거로 든 것 중 하나가 묘호의 사용과 왕에게 성상이란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또 태조·세조·열조(列祖)의 성상(聖上)을 참칭(僭稱)하여 감히 천조의 칭조(稱祖)·존상(尊上)과 같이하였으니, 저들이 2백년 간 공순(恭順)한 의리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선조실록》 104권, 선조 31년 9월 21일 계묘 3번째 기사 해당기사


이렇게 조선에서도 황제에게 사용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했고, 묘호도 사용하여 황제국을 미약하게나마 표방했다. 더불어 조선왕조실록에는 신하가 조선에 재위한 모든 임금에게 제왕이라 부른 사례가 적혀있다.

게다가 왕의 무덤을 묘(墓)나 원(園)이 아니라 능(陵)이라고 했다. 《조선왕조실록 사전》의 설명에 의하면 유교 예법에서는 천자(天子) 및 그 정실 배우자가 죽으면 묻히는 무덤을 능(陵)이라고 하였는데 왕의 무덤을 능이라고 했다.

왕의 죽음에 훙(薨)과 붕(崩), 승하(昇遐), 빈천(賓天), 안가(晏駕)를 혼용해서 사용하는데 붕(崩)과 승하(昇遐), 빈천(賓天), 안가(晏駕)는 천자의 죽음을 의미하고, 제후의 죽음은 훙(薨)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은 훙을 써야 맞지만 훙이 주로 쓰이긴 하나 붕과 안가, 빈천, 승하를 계속해서 사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선에서 왕의 명령서를 성지(聖旨)라고도 했는데, 성지는 황제의 명령서를 가리키는 말인데도 조선에서 성지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59]

허적이 아뢰기를 ‘전후의 성지(聖旨)가 간절하신데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했던 것은 진실로 만부득이한 점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종실록》 12권, 현종 7년 6월 21일 경오 3번째기사 해당기사


연호 같은 경우, 공식적으로는 중국의 연호를 썼지만, 의외로 '우리 전하 즉위 XX년', '금상전하 즉위 XX년' '상(上)[60]의 XX년' 식의 변칙 연호도 꽤 많이 보인다. 사실 이건 중국에서 한 무제 때 처음 연호를 제정하기 전에는 천자의 재위년 수를 적어서 연도를 표기했는데 조선의 관행은 이것과 유사하다.

또한 왕비의 경우, 황후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호칭인 중궁(中宮)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시호에는 생전에 쓰던 비(妃)가 아닌, 제후국에서 쓸 수 없는 후(后)를 붙여 왕후라는 시호를 사용했다.

조선에선 왕과 왕세자의 첩을 후궁이라고 하였는데 후궁이란 원래 황제국에서 사용하는 용어다. 《숙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숙종이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도록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었을 때, 청나라에서 왕비 책봉을 거부하였는데 그 이유가 제후국에서 후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이었다.

청나라 사람이 주문(奏文) 가운데서 ‘후궁(後宮)’ 두 글자는 제후(諸侯)는 쓰지 못한다고 하며, 또 ‘현(玄)’ 자(字)가 있는데 그것은 휘(諱)하는 바를 범하였다고[61]

매우 꾸짖으면서 속금(贖金)의 벌(罰)까지 있었습니다."

《숙종실록》 21권, 숙종 15년 12월 19일 신사 2번째기사 해당기사


조선에서는 왕세자에게 동궁(東宮) 춘궁(春宮), 춘저 (春邸), 이극(貳極), 원량 (元良) 저궁(儲宮), 저군(儲君), 저사(儲嗣) 저부(儲副) 저위(儲位)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는데 중국 왕조에서도 황태자에게 동궁 이하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동궁(東宮)이 9촌 5푼, 친왕(親王)이 9촌 2푼 5리, 세자는 9촌, 군왕(郡王)은 세자와 같으니라'는 내용이 있는 걸 보면 중국에서는 황태자에게만 동궁이란 호칭을 사용하였고, 세자에게는 동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약로는 말하기를, ‘삼가 《주례》를 상고하건대 공(公)은 환규(桓圭) 9촌(寸)이요, 후(候)는 신규(信圭), 백(伯)은 궁규(躬圭)인데 모두 7촌이며, 자남(子男)의 곡벽·포벽은 모두 경(經)이 5촌이며 명(明)나라의 규제(圭制)는 동궁(東宮)이 9촌 5푼, 친왕(親王)이 9촌 2푼 5리, 세자는 9촌, 군왕(郡王)은 세자와 같으니, 황태자(皇太子)에서부터 군왕에 이르기까지 모두 9촌의 규를 사용하였으나 특별히 분수(分數)의 구별이 있었던 것입니다.

《영조실록》 영조 26년 12월 19일 무자 1번째 기사해당기사


또 왕의 적녀를 공주로 봉하였다. 중국에서는 황제의 딸만을 공주로 봉하지, 친왕(親王)의 딸은 군주(郡主)로, 군왕(郡王)의 딸은 현주(縣主)로 봉한다. 따라서, 원래대로라면 이등체강의 원칙에 따라 친왕대우(황제-태자-친왕 순)인 조선 국왕의 적녀는 친왕(親王)의 딸인 군주(郡主)로 봉하는 것이 맞다.

조선에선 왕의 사위에게 의빈과 부마(駙馬)라는 용어를 혼용해서 사용하는데 사실 부마의 칭호는 황제의 사위를 뜻하는 용어다. 《세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맹사성이 "부마의 명칭은 제후국에서는 쓸 것이 아니온데, 단지 전조(前朝)의 구습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고치지 않은 것이오니, 의당 그 칭호는 고쳐야 할 것입니다."라고 한 기록이 존재한다.

《세종실록》 51권, 세종 13년 1월 12일 정축 3번째기사해당기사


봉작

신하들도 생전에는 군(君)이라는 제후국의 작위를 주었지만 죽고나서 시호를 내릴 때는 일괄적으로 공(公)의 작위를 내려 봉작제도 일부 시행했다. 애초에 태조 때 5등작 중 공(公), 후(侯), 백(伯)을 썼다가 태종 때 폐지하고 군(君) 칭호로 바꾼 것이다.

세종때 2품 이상의 고위 관리를 일컫는 영공(令公)이라는 말을 재상으로 변경했는데, 의례 영공이라고 칭하였다.

의복

왕의 곤룡포에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상징인 5조룡(五爪龍)을 사용하였다. 당장 중국의 제후왕 곤룡포에는 4조룡을 사용하였다.

황제의 곤룡포에 7조룡을 사용하고 왕의 곤룡포에 5조룡을 사용하는 것으로 아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경복궁 근정전에 있는 천장의 장식만 그러한 것이고, 대한제국 황제의 황룡포를 보면 명나라의 황제와 같은 5조룡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명나라의 역대 황제들의 초상화나 채용신의 고종 어진의 용보를 보면 모두 5조룡의 용보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사

조선 초기엔 제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태조 이성계환구단의 명칭을 원단으로 고치고, 명나라 몰래 천제(天祭)를 지내다가 세조 대에 이르러 다시 환구단으로 고치고 제사를 지내며 소격서를 설치해 도교식 천제도 지내다가 중종 시기에 전부 없어졌다. 하지만 제도만 없앴고 환구단(원구단)의 명칭을 남단으로 개칭하여 고종때 정식으로 환구단을 다시 세우기 전까지 계속 천제를 지냈다. 이 때문에 제후의 나라인 조선이 천자의 나라에서만 가능한 천제를 지낼수는 없다는 사대부의 공격을 계속 받았다. 용산에 원조 환구단 있었다? 아시아경제

기타

그리고 조선 주변의 작은 나라들이 조선에 조공을 바칠 때 조선의 임금을 가리켜 황제 폐하라 부르기도 했다. 사대의 논리에서 책봉을 받은 국가는 원칙상 제후국이므로 스스로 다른 세력들에게 황제국처럼 조공을 받고, 그들로부터 황제 폐하라고 불리며 독단적으로 책봉을 해주면 안된다. 하지만 조선은 일본의 여러 다이묘들과 막부의 쇼군들에게도 비롯 형식적이었다고 할지라도 조공을 받고, 책봉을 해주었으며 그들로부터 상국(上國), 금상황제(今上皇帝), 폐하(陛下)라고 불렸다. 실록1, 실록2, 실록3, 실록4, 실록5 그렇게 조선 초중기에 일본에서 남북조시대전국시대의 혼란기를 틈타 사실상의 중앙정부였던 무로마치 막부를 생까고 주변국을 향해 조공 무역을 하던 몇몇 다이묘들이 이렇게 하기도 했다.[62] 조선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명분상의 이유로 외왕내제를 하지 못하던 터라서 한동안은 주변국들이 이렇게해도 모른 체하거나, 주의를 주는 척만 했다.

명나라 멸망 이후 조선 후기에 주위의 민족을 외부로, 조선을 중앙으로 보는 소중화 사상이 강해지자 영조 때 황제 칭호를 쓰자는 상소도 있었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63]

고종 시기에 있던 갑오개혁, 을미개혁 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제후국 용어인 '전하'라는 호칭을 버리고 황제국 용어인 '폐하'도 사용하기 시작했다.[64] 다만 이 때는 아직 완전한 황제국을 표방한 건 아니라서 '대군주 폐하(大君主陛下)'라는 애매한 호칭을 사용했다. 이후 대한제국이 개창되면서 고종이 칭제건원하여 완전한 황제국 체제를 사용한다. 구체적으로 조선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공식적으로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완전히 청산하면서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조를 세운 1392년을 원년으로 삼아 '개국기원(開國紀元)' 연호를 도입, 1894년을 개국 503년이라 칭했다. 1896년부터는 태양력을 도입하여 '건양(建陽)'[65]이라는 연호를 선포하였고, 이듬해(1897) 대한제국을 선포하던 해에 '광무(光武)'로 개원(改元)하였다. 이후 순종이 즉위하면서 융희(隆熙)로 다시 개원하였다. 가끔 고종이나 순종을 연호를 따 '광무 황제'나 '융희 황제'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 외의 사례들로는 아래와 같은 사례들이 있다.

  • 초기 조선은 명과의 충돌이 심하였다. 태조 이성계의 제3차 요동정벌과 태종 시절의 여진족들의 지배권을 둘러싼 명과의 충돌까지, 이러한 모습은 조선이 사대와 국익이 충돌할 경우 국익의 관점을 더 우선시했음을 보여준다.[66][67]

  • 경복궁 근정전의 천장에 있는 금박 입힌 두 마리의 목조 용 조각의 발톱은 총 7개인데 당시 한자 문화권의 질서에서 왕세자의 용은 발가락이 3개, 왕(제후)과 황태자는 4개, 황제(천자)는 5개로 규정했다. 따라서 발톱이 7개인 용은 황제보다 높음을 뜻한다.

  • 조선의 26대 국왕 고종칭제건원을 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공식 변경한 뒤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칭제건원(稱帝建元)은 스스로 황제국임을 공표한 것이며 대한(大韓)이라는 국명 자체도 황제국들의 국명인 대명(大明), 대청(大淸) 같은 의미의 국명이었다. 일반적으로 한자 문화권에서는 국명이 고려, 조선 처럼 두 글자인 나라보다 , 처럼 한 글자인 나라가 더 상위라는 개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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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대한제국[편집]



구한말 개화기가 되자 서양세력이 동양에 들어오는 서세동점의 시기가 되어 기존의 가치관들이 크게 흔들리게 된다. 이때 청나라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통하여 조선이 자신들의 속방임을 근대적 조약으로 확인하려 했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실력을 키우며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 했던 일본 제국은 청나라와 조선을 두고 대결하게 되고 이것은 청일전쟁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청일전쟁 중 일본이 조선에서의 청나라의 영향력을 일소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크게 반영되어 이루어진 갑오개혁에서 홍범 14조(洪範十四條)를 발표하면서 '제1조'에서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끝낸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군주명을 동양적 사고방식 속의 천자에 종속된 제후왕에서 서양적 사고방식의 'King'의 개념에 해당하는 해당하는 대군주(大君主) 칭호로 바꾸고 공식적으로 사용하던 청나라 연호나 비공식적으로 사용하던 명나라숭정 연호를 대체하여 서구식 기년법으로 개국기원(開國紀元)을 만든다. 끝내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자 조선과 청나라는 국교가 단절되었고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청나라가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인정하여 병자호란 이후 근 200년 동안 이어졌던 종속관계가 끊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패전 이후에 청나라는 타격을 입고 쇠퇴일로를 걸어 동아시아 조공책봉관계가 완전히 와해되었고 전혀 과거와 같이 청나라의 천자 때문에 꺼릴 것이 없어진 환경 속에서 고종1897년대한제국을 건국하고 칭제건원하여 황제가 된다. [68]

그래서 친왕 작위들도 봉작되었는데 대중적으로 유명한 영친왕의 작위도 이때에 만들어진다. 또한 독자적인 연호도 만들어 광무를 선포하고 대한제국 멸망까지는 융희로 이어지며 단 한 차례도 단절되지 않는다. 또한 선왕들과 선왕비들을 황제와 황후로 추존한다.[69]

또한 태종이 "조금이라도 사대(事大)의 예(禮)를 잃어서는 안 되며, 마땅히 왕보다 높여 지성(至誠)으로 천자의 사신(天使)을 섬겨야 한다."는 유훈을 내리며 세운 사대의 상징과도 같았던 '은혜를 맞이 한다'는 의미의 영은문(迎恩門)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중국의 예속에서 벗어나 독립한다는 의미로 독립문을 세웠다. 또한 바로 옆에 있는 '중화를 흠모한다'는 의미의 사신 영빈관이었던 모화관(慕華館)을 폐지하고 독립협회사무실인 독립관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역시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중국풍 별관인 "남별궁"도 부수고 그 자리에는 500여 년 만에 다시 환구단을 지어 천자로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1899년 한청통상조약을 맺어 황제국인 대한제국과 황제국인 대청제국이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근대적 국교를 맺는다. 이는 역사상 최초로 중화사상에서 벗어나 중국 통일왕조와 한국이 국가 대 국가로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은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말만 자주적인 황제국이지 내실은 튼튼하지 않았다. 그래서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을 완전히 몰아낸 일본은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보호국으로 만들어 버렸고 이런 일본의 행보에 반항적이었던 고종을 폐위시켜 버려서 황태자였던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니 그 연호는 융희였다.

결국 몇년 뒤 대한제국한일합방조약으로 일본 제국에 합병되어 나라는 없어지고 황가는 보존 하지만 일 본제국의 황실 귀족제에 편입되어 황제는 이왕(李王)으로, 대한제국 황실궁가들 중 황실과 가까운 집안은 왕공족, 먼 집안은 조선귀족으로 격하되어[70] 일제 천황의 신하로서 존속하게 된다. 그리고 구 대한제국 황실이 이러한 일제의 방침에 일부 미온적인 반발은 있었으나 크게 반항하지 않고 대체로 순응적인 태도를 보이자 1919년 3.1 운동 이후 결집된 독립운동세력은 그러한 구 황실의 태도에 실망하게 되어 제국인 대한제국복벽이 아닌 공화국인 대한민국 성립을 결의하게 된다. 그 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국가원수대통령으로 하여 조선 왕실의 방계 후손인 이승만이 선출되었다. 한편 이승만은 비록 민주공화정체의 국가수반인 대통령이었으나 자신의 핏줄이 대한제국 황실의 모태가 되는 조선왕조 왕실의 후손인 양녕대군 17대손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 외교가에 Prince를 자처하고 다녔다.

3.7. 현대[편집]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원래 대한제국 황가였던 일본제국체제 내의 왕공족조선귀족은 1947년 GHQ 체제하에서 신적강하를 거쳐 평민으로 강등 당하였으며 1948년 한반도에서도 별다른 복벽 움직임도 없이 남북이 모두 자유민주주의인민민주주의 체제의 공화정체가 들어서서 신분제는 타파되고 구 대한제국 황실제정복고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들어선 후 이승만 정부구 대한제국 황가를 견제하기도 하였고 그 이후에는 별다른 복벽주의 세력도 없이 쭉 잊혀졌다가 21세기 들어 사회 일각에서 대한제국 황실 복원 움직임이 일어나 황녀인 이해원 여사가 여제로 옹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세는 매우 미약하여 국민적인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있으며 거의 퍼포먼스 수준의 사회적 반향만 일으켰을 뿐이다.

다만 2000년대 들어 만화 과 이를 기반으로 한 드라마 의 흥행 이후 대한제국 황실이 쭉 이어진다는 가정의 설정을 한 대체역사 소재의 창작물들이 한 장르로서 형성되기도 하였다.

한편 북한에서는 구체제의 봉건적인 요소와는 상극인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섰으나 후에 변형되어 주체사상이라는 비민주적인 일인 숭배 사회와 계급사회가 이루어 졌다.


4. 일본[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천황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일본 군주 칭호는 중국 기록에 왕(王)으로 처음 등장한다. 적어도 5세기 후반에는 자국의 군주를 오키미(大君, 大王, 治天下大王)[71]로 좀 더 높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여러 명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8세기 초의 율령제 시행과 함께 군주의 공식 칭호를 천황(天皇)[72]으로 고정하고 자국을 황제국으로 간주하였다. 천황이라는 칭호가 공식화된 것은 8세기이지만, 7세기에도 天皇이라는 명칭은 다른 명칭들과 혼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행위는 중국 주도의 책봉 체제를 이반하는 정치 행위였고 중국, 한국 등 주변국에서도 천황의 존재와 이런 상황은 알고 있었지만[73] 멀리 떨어진 섬나라 일본에 군사적 압력을 가하기 어려운 중국에서는 '오랑캐 놈들이 뭘 몰라서 그런다'는 식으로 넘어갔고, 조선도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리고 중국이나 한국은 일본과의 외교관계에서 쇼군을 국가 원수인 국왕(國王) 또는 대군(大君)으로 대했고, 일본을 중국과 대등한 황제국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다만 어찌됐든 이론상 천황을 황제에 끼워맞추면 쇼군이 왕의 위치가 된다. 무로마치 시대에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명나라로부터 일본국왕이라는 작위를 받은 일은 후대에 두고두고 상당한 비판의 대상이 되곤 했다. 에도 시대 중기부터 일본에서는 '조선과 비교하면 조선 왕과 쇼군이 동등하니 일본은 그 위에 천황이 있어 일본은 조선보다 높은 서열에 있고, 중국은 황제 아래 쇼군이 사대했으나 일본은 그 위의 천황이 있어 중국과 서열이 같다'는, 꼼수 같은 해석으로 발전하였다.

1867년 쇼군이 천황에게 권력을 반납하는 대정봉환이 발생하고 일본은 대외에 황제국임을 재천명하였다. 그리고 왕인 쇼군이 아닌 황제인 천황의 명의로 조선과 다시 국교를 맺어 일본이 우위에 서는 형태로 양국의 관계를 재정립하려고 하였으나 조선은[74] 참람하다 하여 국서를 거부했고, 조일 양국은 갈등을 빚게 되었다.[75]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은 국호에 제국을 붙이기 시작하였는데(대일본제국), 이는 서구의 전통을 수용한 것이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국호에 ~국(國)을 붙이는 경우는 있었고 자국을 드높일 목적으로 국호 앞에 대(大)자를 붙이는 정도였지만 ~제국, ~왕국 등의 정체(政體)를 표시하는 전통은 없었다. 일본이 국호까지 황제국임을 표명하기 시작한 후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도 황제국임을 강조하고 외교적으로 일본 및 서양 국가들과 대등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 국호에 제국을 붙여 외교 문서에 표기하였다. 그것이 바로 대청제국(大淸帝國), 대한제국(大韓帝國)이다. 패전 이후에도 일본은 여전히 명목상 황제국이지만 GHQ의 압력으로 대일본제국이라는 국호는 폐기했고, 1947년 신헌법에 따라 자국 국호를 '일본국'이라 하였다.

일본 역사에서 실권을 행사한 천황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중세 이후의 일본의 천황은 실제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권력자로서의 황제라기보다는 일본 고유 종교인 신토교주 혹은 일본을 상징하는 직책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강하다.

현재 세계의 재위 중인 군주 중 Emperor(황제)로 불리는 군주는 일본의 천황이 유일하다.

5. 베트남[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베트남의 군주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진나라 멸망 후 혼란을 틈타 조타광둥베트남 북부에 걸쳐 남월을 건국하였다. 조타는 처음 왕을 칭했으나 전한 여태후 정권과의 대립이 심화되자 기원전 181년 칭제하였다. 이것이 베트남 황제[76]의 시초이다. 하지만 문제가 즉위하자 전한에 신종하고 조공을 바치기로 하여 명목상 대외적으로는 제후국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베트남은 대내적으로 칭제건원하고, 대외적으로 칭왕하는 외왕내제 체제를 갖추는 전통이 생겨나게 된다(단, 남월의 군주들은 칭제만 했지 연호는 없었다.). 한국사의 군주들이 독자적 천하관을 갖고 황실 예법을 가져다 쓰면서도 국내에서 황제라고 대놓고 한 경우가 적다는 점과 비교해 보면 베트남 역대 황제국들이 좀 더 정석적인 외왕내제 체제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남월은 기원전 112년에 전한에 멸망하고 베트남 지역은 수백 년간 중국 역대 왕조의 직할령이 되어 한동안 황제는 사라졌다.

544년 이족(俚族) 출신의 리비(李賁, Lý Bí)가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베트남 북부에 만춘(萬春)을 건국하며 제위가 부활하였다. 리비는 자칭 남월제(南越帝)라 하고 연호를 천덕(天德)이라 하여 중국식으로 칭제와 건원을 함께 하였다. 하지만 602년 수나라에 멸망해 베트남의 제위는 또다시 사라지고 만다.[77]

당나라가 멸망한 후 10세기 전반부터 사실상 반독립 상태가 된 베트남은 968년 딘보린이 대구월(大瞿越)을 건국하면서 황제 체제가 부활하였다. 그 이후로는 잠깐씩 외세의 지배를 당하기는 했어도 제위가 수세기 이상 끊기는 일은 없었다. 대외적으로는 안남(安南)이라고 불리며 외왕내제를 했던 베트남에서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후에도 황제의 칭호와 연호는 명목상으로나마 유지되다가 1945년에 소멸하였다.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는 이후 공식적으로 황제 칭호는 사용하지 않고 남베트남의 국가원수로 1949~1955년 사이에 재임했다.


6. 동아시아의 '황제'와 유사한 칭호들[편집]


동아시아에서 왕중왕이 '황제'라는 용어로 통일되기 전에는 여러가지 용어들이 같은 역할을 했다. 일부는 후대에 가면서 사어가 되거나, 다른 의미로 사용되거나, 국제적인 위상에 따라 황제 아래의 격으로 편입되거나, 혹은 오늘까지 살아남거나, 후대에 고안되는 등 각기 다른 운명을 맞는다.

  • 대군주(大君主)
  • 대왕(大王)
  • 성황(聖皇)
  • 신성제왕(神聖帝王)
  • 제왕(帝王)
  • 천왕(天王)
  • 천자
  • 천황(天皇)
  • 태왕(太王)
  • 패왕(霸王 또는 覇王)[78]
  • 황왕(皇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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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7 02:27:31에 나무위키 황제/한자문화권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소설 초한지에서는 항우가 자신의 호칭을 어떻게 할까 고민할 때에 범증이 유방의 책사 장량을 위태롭게 하고자 장량에게 호칭을 어떻게 할지 물어보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를 눈치챈 장량은 항우에게 3황과 5제의 칭호를 설명(인의로 천하를 교화하고, 덕으로 통치하는 자)하였으나, 항우는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기에 다음의 것을 물었고, 춘추오패(왕에게 충성하며, 제후들을 통솔하여 이민족을 방비하고, 정의를 세우는 자)를 설명하자 마음에 들어하는 것으로 나온다. 나중에 범증은 '패' 라는 명칭은 천하를 경영할 만한 호칭이 아니라고 하였으나, 항우가 그냥 패와 왕을 합쳐서 사용하였다.[2] 무력으로 동등한 관계임을 인정받은 흉노금나라같은 예외는 있었다.[3]해릉왕의 남침 실패 이후에 이 군신관계는 숙질관계로 바뀐다.[4] 송나라 정통론자들은 가짜 초나라라는 뜻에서 위초(僞楚)라고 불렀다. 괴뢰 황제의 성을 따서 장초(張楚)라고도 한다. 수도는 현재의 난징인 금릉(金陵)이었다.[5] 송나라 정통론자들은 가짜 제나라라는 뜻에서 위제(僞齊)라고 불렀다. 괴뢰 황제의 성을 따서 유제(劉齊)라고도 한다. 수도는 현재의 한단(邯鄲)인 대명부(大名府)였다. 참고로 한단은 전국시대 조나라의 수도였다. 금나라가 북송을 멸망시켰지만 새로 점령한 장강 이북 지역의 한족들을 당장 직접 통치할 자신이 없어서 대신 북송의 신하였던 장방창(張邦昌)과 유예(劉豫)를 각각 괴뢰 황제로 책봉했던 것. 그런데 초나라 황제로 책봉된 장방창은 금나라의 요구를 거부하고 황제가 되지 않으려 했지만 금나라가 "변경(북송 옛 수도)이 피바다가 돼도 상관 없다 이거지?"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금나라 사신이 돌아갈 때까지만 억지로 황제 행세를 했다(...). 하지만 금나라 군대가 물러간 뒤 남송으로 도망쳐 버려 초나라 건국이 취소됐고, 유예는 어쨌든 제나라 황제로 버텼으나 남송에 털렸고 결국 금·남송 간 합의에 따라 폐위된다(...). 대신 유예는 금나라 황제에 의해 촉왕(蜀王)으로 새로 책봉되었다.[6] 한족이라고 해서 천왕이라고 칭한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태평천국의 군주가 그러하다.[7] 간혹 현대 중국이나 대만 국민정부의 독재자들이 황제로 비유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의 독재를 비꼬기 위한 비유일 뿐 실제로는 공화국의 지도자라는 점에서 군주국의 황제와는 차이가 있다. 특히 현대의 군주국들조차 군주의 공식 칭호가 국왕이지 황제라고 하지않는다.[8] 이 중에서 천황은 끝까지 살아남아 현대에도 있다.[9] 당고종이 자신을 천황에, 측천무후천후로 칭한 것을 근거로 천황이라는 칭호가 중국에서 들어왔다는 설이 있다.[10] 사실 천황이란 호칭 자체도 일본인들이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중국에서 쓰이고 있던 호칭이다. 중국 서한 왕조의 역사가 사마천이 쓴 문헌인 <사기.시황본기>에는 이사가 "옛날에 천황이 있고, 지황이 있고, 태황(泰皇)이 있는데, 태황이 가장 존귀하다"라고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이사가 언급한 천황은 당시에는 천황은 옥황상제, 또는 고대 중국의 제왕인 복희씨나 수인씨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11] 신라에도 도입된다.[12] 백제 대왕의 경우 단순히 왕의 경칭이 아니라 고구려 태왕처럼 황제의 격으로 해석되기도 한다.[13] 남제서[14] 황실의 '태자', '태후'나 신하의 벼슬인 '태사', '태위', 조상신의 위패를 모신 태묘 같이 '태(太)'자 들어가는 것들은 천자국의 법식들이다. 비교하자면 제후국의 유교적 예법에 충실했던 조선시대엔 태묘가 아닌 종묘라고 불렀다.[15] '上'이 들어가는 단어인 황상, 주상, 성상, 금상 등은 황제에게만 쓰는 글자이다. 그런데 조선에서 묘호를 계속 쓴 것처럼 뒤에다 제후왕의 용어인 '전하'를 붙여 '주상 전하'라는 이도 저도 아닌 호칭으로 쓰이긴 하였다. 고려는 공민왕 때 '주상 폐하'라고 썼다는 기록이 있다.[16] 사도(동음이의어), 사마, 사공[17] 무신정권의 복잡한 상황에서 최충헌 주도로 형인 명종 왕좌에서 쫓아내고 세자와 아들들이 아닌 동생 신종을 왕위에 올렸는데 그전에 황태제로 임명하였다. 조선 왕조와 비교하면 경종의 후임으로 동생 영조가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는 왕세제였다.[18] 낙랑왕[19] 단 왕자가 아닌 황자라면 친왕으로 봉하는 것이 옳을것이나 후작이나 공작에 봉했다. 다만 사서에 친왕의 용어가 나오는데 단지 단어가 나올 뿐 정식 시호로 친왕에 봉해진 황자는 없었다. 마치 고려의 왕이 칭제하지 않고 시호로 왕을 올리면서 황상이니 폐하니 한것과 같아보인다. 그러나 어쨋든 공작, 후작은 황제만이 임명 할 수 있는 제후의 칭호이고 조선시대 같은 군(君) 칭호가 아니므로 제후국이라면 이것도 할 수는 없는 것이다.[20] 태자는 황위를 이을것이므로 봉작을 하지 않았다.[21] 예종의 모후(母后) [22] 의종의 모후.[23] 고려사에서 언급은 안되지만 동문선에 실린 수기절일하전에 따르면 수기절은 왕태자 때의 절일로 보인다. 수기절일하전은 "수기절 날을 축하하며 올리는 전문"이란 뜻이다.[24] 탄일은 단순히 "태어나신 날"을 의미하며 수원천성절 이후 고려는 절일을 쓰지 않았다.[25] 윤언이 묘지명에는 "여진은 본래 아조(我朝) 사람의 자손이기에 신복(臣僕)이 되어 누차 조천(朝天)해왔고, 그 호적이 모두 아조(我朝)에 올라와 있는데 어떻게 거꾸로 우리가 신하가 될 수 있겠습니까?" 라는 구절이 있다.[26] 제후의 법식으로는 '유경내'(宥境內)라고 해야 한다.[27] 연경궁 정전과 이름이 같음[28] 그래서 조선의 칠정산이 완전히 독창적으로 만든 자체적인 역법체제도 아니고 그저 중국의 수시력대통력을 조선의 실정에 맞게 수정한 역법에 불과한데도 이 정도도 당시의 관념상 명나라에서 알면 경을 칠 일이었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으로 명나라군이 조선에 들어오자 선조는 조선이 칠정산을 사용하는 것을 들킬까 봐 염려했다. 그래서 "제후국에 두 가지 역서가 있으니 매우 떳떳하지 못한 일이다. 그저 대국을 보기에 부끄러울 따름이다."라며 칠정산을 금지시켜 버렸다. 또한 조선이 신식 역법인 시헌력을 배우려 할 때에도 제후는 하늘의 천명을 받은 천자가 발표하는 역서를 의심없이 그저 받아가서 사용해야만 하는 것이었으므로 조선인이 시헌력을 배우려는 것조차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대죄였다. 그래서 청나라 국립 천문대로 조선의 관상감에 해당하는 흠천감의 관원에게 뇌물을 주어가며 극비리에 시헌력의 내용을 배워가야만 했다.[29] 사실 중국의 경우도 건국 초기에는 7묘를 채우지 못하였다. 모든 제도란 항상 엄격한 구속력을 가지고 적용되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선입견을 가지고 일부 단편적 사례를 끄집어 와서 천자제후를 구별짓고 단정하는 것은 주의가 필요하겠다.[30] 다만 이건 천자국을 지향하지 않은 조선도 사용하긴 했다. 그래서 나중에 명나라에서 이것으로 시비를 걸자 고려 때부터 관용적으로 사용했던 것일 뿐이라고 둘러댔다. 어쨋든 원칙적으로 묘호는 천자에게만 붙인다.[31] 예법에 따르면 천자의 사직 제사명은 대사(大社) / 왕사(王社)이고 제후는 국사(國社) / 후사(候社), 제후 밑의 대부(大夫)급은 치사(置社)라고 한다.[32] 제후국 예법의 조선은 경(京)을 두지 못하고 '부(府)' 행정단위만 둘 수 있었는데(천자국은 府 쓸 수 있다.) 한성부, 평양부, 계림부같은 식이었다. 대한제국이 되면서 평양을 서경으로 하려는 논의가 있었지만 경술국치로 중단됐다.[33] 1080년경에 송나라의 곽약허가 지은 책인 도화견문지에 보면 '왜국은 일본국이다. 본래 이름인 왜를 부끄러워 했는데, 극동에 있어서 스스로 일본이라 부른다. 지금 고려에 신하로서 속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34] 다만 나중엔 관계가 역전되었다. 그래도 초창기에는 대금국 황제가 고려국 황제에게라는 문구가 공식 문서에 있을 만큼 고려를 우대하였다.[35] 제후국식으로는 교서(敎書)라고 해야 한다.[36] 제후국 법도로는 어명(御命)만 쓸 수 있엇다.[37] 제후국의 법도로는 '전문(箋文)'을 받아야 한다. 유명한 표문으로 출사표가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황제국의 법도를 따랐기 때문에 김부식삼국사기인종에게 바치면서 진삼국사기표라는 표문을 올렸다. 만약 원 간섭기나 조선시대였다면 '진삼국사기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38] 다만 고려사 오백 년 중 그 기간은 얼마 안 되고 대부분의 기간은 중국의 연호를 썼다.[39] 조선 같은 경우 제후국의 예로 성(省)은 없이 6조(六曹)를 사용하다가 대한제국이 되면서 부(部)를 두었다.[40] 대표적으로 유명한 서희가 태보로 재상직에 있었고 사후에는 태사로 추증 받았다.[41] 가장 역사에 족적을 많이 남긴 태의로는 최사전이 있다.[42] 조선에서도 태의를 썼다.[43] 제후국은 원유관을 착용했다. 그래서 구한말 고종원유관을 착용했다가 칭제한 이후 통천관을 착용했다.[44] 태조 왕건의 능인 현릉의 봉분 외곽에서 출토된 왕건의 금동상을 통해 통천관과 옥대의 사용을 알 수 있다.[45] 제후국의 법도로는 천세(千歲)라 해야 한다.[46] 고려의 군주는 '해동천자'를 자처하며 실질적으로 여러 제도를 황제의 그것으로 했으나 군주의 시호는 대왕이었다. 또한 불필요한 외교 마찰을 지양함으로써 대부분의 시기 독자적인 연호 대신 중국의 연호를 사용했다.[47] '대+한 글자 국호+국'은 천자국의 제도이다. 가령 대원국, 대명국, 대청국 등이 있다.[48] 다만 태자는 세자로 바뀐다. 당시 원종의 태자 충렬왕이 계속 원나라에 왔다갔다했기 때문에, 충렬왕이 태자라 불리는 걸 원이 문제삼았기 때문.[49] 천자가 천하에 온정을 베푸는 것을 사(赦)한다고 표현한다.[50] 제후가 자기 경역에 온정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51] 신하가 임금에게 아뢰는걸 주(奏)라고 한다. 제후가 천자에게 아뢰는 것도 주(奏)라하기 때문에 다루가치가 불평한 것이다.[52] 신하, 제후가 천자에게 올리는 문서. 대표적으로 출사표가 있다.[53] 신하가 제후에게 올리는 문서.[54] 주문왕의 자칭.[55] 이 대사천하란 표현은 고려사에서 최대한 과거의 표현을 직서하고자 한 세종대왕까지도 꺼렸다. 결국 뒤의 천하를 빼버려 직서의 한계를 드러냈다.[56] 전에는 9류 9장복을 사용했다.[57] 공민왕이란 시호도 명나라로부터 받은 거다.[58] 그래서 원 간섭기고려가 독자적 묘호도 시호도 없었던 것이다. 묘호는 고려 말까지 회복하지 못했고 시호는 경효대왕 때 회복한다.[59] 실제로 《고려사》 충렬왕 원년 10월의 기록을 보면 원나라 황제가 내린 조서에 고려는 이제 왕위 후계자는 태자가 아니라 세자라 하고 국왕의 명령을 예전에는 성지(聖旨)라 하였으나 이제는 선지(宣旨)라 하니 관직의 명칭도 우리 조정(원나라)과 같은 것은 고쳐야 한다라고 한 기록이 존재해 성지는 황제의 명령서만을 뜻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해당 기사[60] 임금을 뜻한다.[61] 강희제의 이름 현엽을 말한 것이다.[62] 이들은 무역 이익을 노리고 막부쇼군이나, 조정천황도 씹고선 중국천자에게도 칭신하던 자들이니, 이들에게 누가 황제국이고 하는 명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을 것이다.[63] 이상 모든 자료는 《조선왕조실록》 문서로.[64] 《고종실록》 1894년 12월 17일(기미) 1번째 기사[65] 글자 그대로 양력을 세웠다는 의미.[66] 이규철, <조선 태종대 대명의식과 여진 정벌(征伐)>, 《만주연구》17(2014)[67] 최용, <비대칭세력연합 이론을 통한 동아시아 외교사의 재해석: 신라-당, 고려-몽골(원), 조선-명 국제관계를 중심으로>, 《한국군사학논집》76-2(2020)[68] 예법에 따르면 천자국은 국호를 외자로 쓰고 제후국은 두 글자로 쓴다. 조선의 국호가 두 글자인 것과 천자국으로 칭제 이후 국호를 한 글자인 한으로 바꾼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천자국은 외자의 이름 앞에 큰대자를 붙이는데 그래서 대한이 되었고 서구식 영향을 받아 뒤에 제국이란 단어가 붙게 되었다.[69] 다만 이전의 한민족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대한제국 역시도 형식상 황제국으로서 좀 부족한 면이 있었는데, 황제란 휘하에 여러 군주를 부하로 두는 이른바 왕중왕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왕족, 다시 말해 대한제국의 황족들에게 기존의 '대군(大君)'·'군(君)' 등의 칭호를 고쳐 '친왕'·'군왕' 등의 왕작으로 격상했어야 했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과 친형만 친왕으로 책봉하고 나머지 황족들은 그대로 군으로 남아있어 어정쩡한 모습이 되었다. 또한 완전한 제국으로서 구색을 갖추려면 모든 귀족들 역시도 오등작의 작위를 책봉해야 했지만, 실제로는 거의 쓰지 않았다.[70] 합방 당시 황제였던 순종창덕궁 이왕으로, 태상황이었던 고종덕수궁 이태왕이 되고 친왕들도 공이 되고 공들은 조선귀족으로 한 단계식 강등 당했다.[71] 와카타케루 대왕(獲加多支鹵大王)이라는 명문이 유랴쿠 천황의 왕릉으로 비정되는 고분에서 발견[72] 고대에는 주로 훈독을 하여 스메라미코토(すめらみこと)로 발음했으며, 중세 이후로는 점차 한자 그 자체대로 음독하기 시작하여 덴와(てんわう), 덴오(てんおう)를 거쳐 현재는 덴노(てんのう)라고 발음하고 있다.[73] 예컨대 신숙주해동제국기를 저술하며 천황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였고 일본 황실의 내력에 대해서 기록했다.[74] 흥선대원군 집권기이다.[75] 이익성호사설에서 미래에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임을 어느 정도 예측하였다.[76] 현대의 표준 베트남어 발음으로는 호앙데(hoàng đế).[77] 베트남의 재독립 이전까지 칭제했던 인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당나라 시대인 722년에 마이툭로안(梅叔鸞, Mai Thúc Loan)이 거병하여 매흑제(梅黑帝)로 자처하였지만 신속히 진압당했다.[78] 황제와 패왕 둘 다, 자기 휘하의 직할지를 가지고 있으며 영지를 통치하는 제후를 거느리고 다스리는 군주(君主)이자 군주들 중 가장 높은 권위와 지위를 지니는 군주다. 사실상 개념이나 용례는 차이점 없이 완전히 동일하다. 실제로, 몇 안되게 패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던 항우도 재위 기간이 짧았을 뿐, 황제와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았다. 역사서 '사기'에서 항우를 당시 전중국의 지배자(황제)로 간주하고 황제의 일을 기록하는 '본기'에 적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