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츠라기 에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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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에 등장하는 캐릭터에 대한 내용은 카츠라기 에이스(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문서 참고하십시오.
부마 보이지 보이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28전 9승을 기록하고 1978년에 일본에 종마로 수입되었지만 2년만에 죽어 산구마가 적었고 중상 승마도 카츠라기 에이스 뿐이다. 보이지 보이의 모마 라이징 호프는 1958~1960년 일본 리딩 사이어에 오른 라이징 플레임의 전형제 동생이다.
모마 타니노 벤처는 현역 3전 1승을 거둔 번식암말로 타니노 관명의 소유인 컨트리 목장에서 4마리의 산구마를 낳았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어서 가족 경영의 소규모 목장을 경영하는 카타야마 센타로에게 350만엔에 판매되었는데 이 때 수태되었던 말이 카츠라기 에이스다. 카타야마 목장에서 타니노 벤처는 당대 최고액인 2억 6500만엔에 팔리고 미승리마로 끝난 모가미 슌(モガミショーウン, 1986년생 父 토쇼 보이)과 1993년 나카야마 암말 스테이크스(G3)를 우승한 래빗 볼 등을 낳았다.
카츠라기 에이스 열전 : 에이스 오브 재팬의 황혼[4]
데뷔 전에는 평범한 혈통과 볼품없는 마체 때문에 구매하려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지만, 클라임 카이저[5] 를 발굴했던 사토 덴지(佐藤伝二)가 재능을 알아보고 다시 경매에 내달라고 부탁하여 710만엔에 낙찰받았다. 이후 그의 중개로 마주 노데 초이치(野出長一)[6] 에게 인계된 후 초이치의 아들 노데 이치조(野出一三)에게 명의가 이전되어 경주마로 데뷔할 수 있게 되었다.
데뷔전에선 역시 마체 때문에 7번인기로 나섰으나, 8마신 차이로 압승하고 이어지는 대회에서도 2착-1착-3착을 하며 선전했다.
4세(현 3세) 첫 대회에서는 13착으로 최하위를 기록했지만, 다음 대회인 슌란상에서 우승하며 사츠키상에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불량마장 때문에 11착으로 추락하고 미스터 시비에게 우승을 내줬다.
다음에는 일본 더비를 대비하기 위해 도쿄에서 열리는 NHK배에 출전했고, 아웃코스를 극복하여 1착하면서 첫 중상 우승을 가져갔다. 그렇게 일본 더비에 3번 인기로 출주했지만, 6착으로 패배하면서 미스터 시비가 2관을 가져가는걸 막지 못했다. 이후에는 1400m에도 도전하지만 나중에 마일에서 G1 3승을 가져가는 니혼 필로 위너에게 밀려 2착을 하고 말았다.
여름 휴양에서 복귀 후 기수를 니시우라 카츠이치로 교체하여[7] 고베신문배 2착을 했고, 이어지는 교토신문배에서는 처음으로 미스터 시비를 꺾고 1착을 하면서 킷카상에 대한 기대를 모았다. 그렇게 2번 인기로 킷카상에 출주하지만 직선에서 뒤쳐지며 20착으로 참패를 당하고, 결국 미스터 시비가 삼관마에 등극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킷카상의 경험으로 장거리는 적성에 맞지 않다고 판단한 진영은 천황상 봄 대회를 거르고 타카라즈카 기념을 준비하기로 했다. 나루오 기념에서는 4착을 했지만 오사카배-케이한배에선 연승을 기록했고, 전년도 삼관마 미스터 시비는 부상으로 출전하지 않는 타카라즈카 기념에 1번 인기로 출전했다. 레이스 중반엔 2, 3번째에 있다가 직선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하면서 첫 G1 승리를 가져갔다.
타카마츠노미야배에서 5착 후 여름 휴양 후에 마이니치 왕관으로 복귀. 여기서 부상에서 복귀한 미스터 시비와 다시 맞붙고 머리 차이로 이겼다. 하지만 천황상 가을 대회에서는 5착을 하며 또다시 미스터 시비에게 우승을 내주고, 팬들에게 '전초전에서만 강하고 실전에선 맨날 시비에게 진다'고 비난을 받게 됐다.
결국 재팬 컵에 출전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미스터 시비와 새로운 삼관마인 심볼리 루돌프에게만 쏠렸다.[8] 하지만 니시우라는 이에 주눅들지 않고, 그동안의 패배를 경험삼아 카츠라기 에이스를 진정시키기 위해 멘코[9] 를 씌우고 도주전법으로 바꿨다. 사실 멘코를 씌우게 된 배경은 니시우라 기수가 도쿄 경마장에서의 15만 관중의 엄청난 함성으로 합을 맞추기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교사는 멘코와 같은 교정도구를 씌우는 것을 매우 싫어했으나 다행히 난동 피우지 않고 얌전히 멘코를 씌웠으며 또 조교사가 알아차린 것은 장안소에서 착용한 뒤. 그리고 하얀색 복면의 효과가 있었는지 카츠라기 에이스는 다른 말들이 서로 견제하느라 후방에 묶여있는 사이에 홀로 도주할 수 있었고, 직선에서 따라잡히는 듯 보였지만 다시 가속하면서 일본말 최초로 재팬 컵 우승을 달성하게 되었다. 경기가 끝나고 니시우라는 인터뷰에서 '한방 먹여줬다!'고 외쳤다. 하지만 팬들은 삼관마인 미스터 시비나 심볼리 루돌프가 우승하는 것을 바랐기 때문에 일본말이 이겼음에도 아수라장이 되었다고 한다.
마주인 노데는 재팬 컵을 우승한 시점에서 더 해봤자 종마 가치만 낮아진다고 판단하여 아리마 기념을 은퇴전으로 삼았다. 이번에도 도주를 선택했지만 이를 간파한 심볼리 루돌프의 견제에 막혀 2착을 했다.[10] 그래도 미스터 시비는 이김으로써 재팬 컵의 승리가 우연이 아님을 증명했고, 최우수 고마 수말 또한 가져가게 되었다.
[13]
은퇴 후 종마가 되었으나 종마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 자신과 같이 뛰었던 클래식 전선에 뛸 정도의 자마는 없었다. 중앙경마 중상마도 1991년 4세 암말 특별(동)(GII)을 우승한 야마닌 마린이 유일. 다른 자마들은 대부분 더트마 위주였다. 거의 지방 경마에서나 두각을 드러낸 정도.
외손자 중에선 1998년산 메지로 맥퀸 산구 타임 페어 레이디가 유일하게 중상을 제패했다. 2001년 플라워 컵(GIII) 우승.
2000년에 심장 발작으로 20세의 나이로 죽었다.
1. 개요[편집]
일본의 경주마. 일본 조교마 중 최초로 재팬 컵을 우승했다.이것으로 살아간다
그 놈들이 온다.
으르렁거리며 다가온다.
물론 이쪽도
무저항이 아니다.
힘을 다해서
살아남을 것이다.
자,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방식이다.
이봐, 잡아보라고
이것이 내 저력이다.
-JRA 명마의 초상
2. 혈통[편집]
부마 보이지 보이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28전 9승을 기록하고 1978년에 일본에 종마로 수입되었지만 2년만에 죽어 산구마가 적었고 중상 승마도 카츠라기 에이스 뿐이다. 보이지 보이의 모마 라이징 호프는 1958~1960년 일본 리딩 사이어에 오른 라이징 플레임의 전형제 동생이다.
모마 타니노 벤처는 현역 3전 1승을 거둔 번식암말로 타니노 관명의 소유인 컨트리 목장에서 4마리의 산구마를 낳았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어서 가족 경영의 소규모 목장을 경영하는 카타야마 센타로에게 350만엔에 판매되었는데 이 때 수태되었던 말이 카츠라기 에이스다. 카타야마 목장에서 타니노 벤처는 당대 최고액인 2억 6500만엔에 팔리고 미승리마로 끝난 모가미 슌(モガミショーウン, 1986년생 父 토쇼 보이)과 1993년 나카야마 암말 스테이크스(G3)를 우승한 래빗 볼 등을 낳았다.
3. 생애[편집]
카츠라기 에이스 열전 : 에이스 오브 재팬의 황혼[4]
3.1. ~1982년[편집]
데뷔 전에는 평범한 혈통과 볼품없는 마체 때문에 구매하려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지만, 클라임 카이저[5] 를 발굴했던 사토 덴지(佐藤伝二)가 재능을 알아보고 다시 경매에 내달라고 부탁하여 710만엔에 낙찰받았다. 이후 그의 중개로 마주 노데 초이치(野出長一)[6] 에게 인계된 후 초이치의 아들 노데 이치조(野出一三)에게 명의가 이전되어 경주마로 데뷔할 수 있게 되었다.
데뷔전에선 역시 마체 때문에 7번인기로 나섰으나, 8마신 차이로 압승하고 이어지는 대회에서도 2착-1착-3착을 하며 선전했다.
3.2. 1983년[편집]
4세(현 3세) 첫 대회에서는 13착으로 최하위를 기록했지만, 다음 대회인 슌란상에서 우승하며 사츠키상에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불량마장 때문에 11착으로 추락하고 미스터 시비에게 우승을 내줬다.
다음에는 일본 더비를 대비하기 위해 도쿄에서 열리는 NHK배에 출전했고, 아웃코스를 극복하여 1착하면서 첫 중상 우승을 가져갔다. 그렇게 일본 더비에 3번 인기로 출주했지만, 6착으로 패배하면서 미스터 시비가 2관을 가져가는걸 막지 못했다. 이후에는 1400m에도 도전하지만 나중에 마일에서 G1 3승을 가져가는 니혼 필로 위너에게 밀려 2착을 하고 말았다.
여름 휴양에서 복귀 후 기수를 니시우라 카츠이치로 교체하여[7] 고베신문배 2착을 했고, 이어지는 교토신문배에서는 처음으로 미스터 시비를 꺾고 1착을 하면서 킷카상에 대한 기대를 모았다. 그렇게 2번 인기로 킷카상에 출주하지만 직선에서 뒤쳐지며 20착으로 참패를 당하고, 결국 미스터 시비가 삼관마에 등극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3.3. 1984년[편집]
킷카상의 경험으로 장거리는 적성에 맞지 않다고 판단한 진영은 천황상 봄 대회를 거르고 타카라즈카 기념을 준비하기로 했다. 나루오 기념에서는 4착을 했지만 오사카배-케이한배에선 연승을 기록했고, 전년도 삼관마 미스터 시비는 부상으로 출전하지 않는 타카라즈카 기념에 1번 인기로 출전했다. 레이스 중반엔 2, 3번째에 있다가 직선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하면서 첫 G1 승리를 가져갔다.
타카마츠노미야배에서 5착 후 여름 휴양 후에 마이니치 왕관으로 복귀. 여기서 부상에서 복귀한 미스터 시비와 다시 맞붙고 머리 차이로 이겼다. 하지만 천황상 가을 대회에서는 5착을 하며 또다시 미스터 시비에게 우승을 내주고, 팬들에게 '전초전에서만 강하고 실전에선 맨날 시비에게 진다'고 비난을 받게 됐다.
결국 재팬 컵에 출전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미스터 시비와 새로운 삼관마인 심볼리 루돌프에게만 쏠렸다.[8] 하지만 니시우라는 이에 주눅들지 않고, 그동안의 패배를 경험삼아 카츠라기 에이스를 진정시키기 위해 멘코[9] 를 씌우고 도주전법으로 바꿨다. 사실 멘코를 씌우게 된 배경은 니시우라 기수가 도쿄 경마장에서의 15만 관중의 엄청난 함성으로 합을 맞추기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교사는 멘코와 같은 교정도구를 씌우는 것을 매우 싫어했으나 다행히 난동 피우지 않고 얌전히 멘코를 씌웠으며 또 조교사가 알아차린 것은 장안소에서 착용한 뒤. 그리고 하얀색 복면의 효과가 있었는지 카츠라기 에이스는 다른 말들이 서로 견제하느라 후방에 묶여있는 사이에 홀로 도주할 수 있었고, 직선에서 따라잡히는 듯 보였지만 다시 가속하면서 일본말 최초로 재팬 컵 우승을 달성하게 되었다. 경기가 끝나고 니시우라는 인터뷰에서 '한방 먹여줬다!'고 외쳤다. 하지만 팬들은 삼관마인 미스터 시비나 심볼리 루돌프가 우승하는 것을 바랐기 때문에 일본말이 이겼음에도 아수라장이 되었다고 한다.
마주인 노데는 재팬 컵을 우승한 시점에서 더 해봤자 종마 가치만 낮아진다고 판단하여 아리마 기념을 은퇴전으로 삼았다. 이번에도 도주를 선택했지만 이를 간파한 심볼리 루돌프의 견제에 막혀 2착을 했다.[10] 그래도 미스터 시비는 이김으로써 재팬 컵의 승리가 우연이 아님을 증명했고, 최우수 고마 수말 또한 가져가게 되었다.
3.4. 종마 생활[편집]
[1] 당시 기준 21세.[2] 현 JRA상 최우수 4세 이상 수말.[3] 중상마만 서술.[4] 출생부터 사망까지 카츠라기 에이스의 마생을 전체적으로 다루는 글.[5] TTG와 같은 세대인, 1976년 일본 더비 우승마.[6] 1990년의 타카라즈카 기념 우승마 오사이치 조지의 마주이기도 하다.[7] 기존에 기수를 맡았던 사키야마 히로키는 같은 해에 기수를 은퇴하고 조교사로 전향했다.[8] 당시 일본 경마는 아직 서양에 비하면 수준이 떨어졌기 때문에 재팬 컵은 전부 외국말들이 차지했었다. 그러나 전년도 재팬컵에서 쿄에이 프로미스가 일본말 중에선 처음으로 2착을 하면서 세계와의 격차가 좁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게다가 이해에는 작년엔 재팬컵을 회피했던 삼관마 미스터 시비와, 최초로 무패삼관을 하며 당시 최강의 기준이었던 신잔을 넘어설지 주목받고 있었던 심볼리 루돌프가 출전하면서 처음으로 일본말이 재팬 컵을 우승할 거라고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9] 말의 귀까지 덮는 복면.[10] 원래 루돌프 진영은 아리마 기념에 나갈 예정이 없었으나 재팬 컵에서 카츠라기 에이스에게 통한의 패배를 당하자 '이대로 카츠라기 에이스가 은퇴하면 앞으로 영원히 카츠라기 에이스>심볼리 루돌프라는 공식이 생겨버린다'며 카츠라기 에이스에게 설욕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출전을 결정했으며, 경기에서도 카츠라기 에이스를 집중 견제하는 전략을 펼쳤다.[11] 중앙경마 기준[12] 이후 순위 - 2002년 330위
은퇴 후 종마가 되었으나 종마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 자신과 같이 뛰었던 클래식 전선에 뛸 정도의 자마는 없었다. 중앙경마 중상마도 1991년 4세 암말 특별(동)(GII)을 우승한 야마닌 마린이 유일. 다른 자마들은 대부분 더트마 위주였다. 거의 지방 경마에서나 두각을 드러낸 정도.
외손자 중에선 1998년산 메지로 맥퀸 산구 타임 페어 레이디가 유일하게 중상을 제패했다. 2001년 플라워 컵(GIII) 우승.
2000년에 심장 발작으로 20세의 나이로 죽었다.
4. 여담[편집]
카츠라기 에이스
그 "재팬컵"을 추억합니다.
"재팬컵"의 감동을!!
다시 한 번, 그대와 미스터 시비의 대결을!!
- 마방 측 사람들은 미스터 시비를 최대의 라이벌로 여겨서 아리마 기념에서 심볼리 루돌프에 이어 2착을 했을 때도 시비는 앞섰다는 사실에 기뻐했으며, 죽은 후 묘비에도 재팬 컵에서 미스터 시비를 꺾은 사실을 적을 정도였다.
- 카츠라기 에이스가 1984 재팬 컵에서 우승을 할 때에 TV 중계를 보고 있었던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 2명이 도주로 포기를 모르는 근성으로 선두를 끝까지 지켜내는 모습에 많은 감동을 받았는지 자살을 할 생각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 본래 마주는 오사이치 조지의 마주였던 노데 초이치였으나 이후 노데 초이치가 아들인 노데 이치조한테 양도하면서 바뀌었다. 이는 카츠라기 에이스의 마생에 도움이 되었다. 아버지인 노데 초이치는 오구리 캡을 포함한 윗 세대들이 활약하는 와중에도 G1 타카라즈카 기념을 우승한 오사이치 조지가 종마로서 실적이 없자 결국 용도 변경해서 행방불명되게 만들었다. 노데 이치조는 자신의 아버지와 달리 화려한 업적을 쌓은 카츠라기 에이스에 대한 애정이 있었는지, 종마로서 실적이 없어도 말년을 끝까지 책임졌다.
5. 경주 성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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