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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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명나라의 환관으로 군인이자 정화의 대원정으로 유명한 탐험가이다. 원래 영락제의 휘하에서 환관 겸 장수노릇을 했다. 서양에서는 정화에게 제독을 뜻하는 "admiral"이라는 직함을 자주 붙인다. 정화는 중국사뿐만 아니라 당대 기준으로 길이남는 대함대를 통한 대항해라는 업적을 남긴 전설적인 환관이다. 중국역사상 가장 칭송받는 환관 중 하나로, 민간신앙의 대상으로까지 격상된 독보적인 영웅이다.
2. 생애[편집]
본래 성씨는 마(馬)씨다. 정이라는 성씨는 정난의 변 이후 영락제에게서 하사받은 성이며, 삼보(三寶)라는 이름도 나중에 하사받은 이름이다. 삼보라는 것은 불교적 명칭이며, 이는 정화가 이슬람교를 믿었지만,[2] 다른 종교에도 관용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난 몽골 제국 다루가치에게서 이어진 후이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즉, 정화는 한족이 아니라 색목인이다. 성인 마(馬)는 무슬림에게 흔한 이름인 '무함마드'의 음차. 원나라가 중국을 통치하며 윈난에 파견한 다루가치 사이이드 아잘 샴숫딘 우마르(Sayyid Ajjal Shams al-Din Omar)의 후손이자 스스로도 원나라의 지방 관리였던 마합지(馬哈只)의 아들이었는데, 아버지의 합지(哈只)라는 이름은 메카 성지순례를 마친 사람에게 붙는 칭호인 '하지'의 음차이다. 쿤밍에는 아버지가 어린 정화에게 넓디넓은 세계를 보여주는 동상이 있다.
1368년 원나라는 한족이 주체가 된 명나라의 공세에 수도 베이징을 내주고 막북으로 쫓겨났지만, 윈난성은 아직 쿠빌라이의 손자인 양왕(몽골명 바자르오르미)이 영지로 다스리고 있었다. 주원장은 쓰촨성의 명하를 멸망시킨 후, 사자를 보내 계속 항복을 권고했으나, 양왕은 사자를 죽이는 등 투항을 완강히 거부했다. 머리 끝까지 화가 치민 주원장은 1381년 운남방면에 부우덕이 지휘하는 30만 대군을 투입하여 정벌을 명했다. 양왕은 이에 맞서 10만명을 동원했으며, 양측 모두 상당수 병사들이 회족이었다. 양왕의 군대는 패배하고, 양왕은 자결했으며, 원나라 잔당 고관들과 그 가족들은 자결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명나라 조정은 포로로 잡힌 양왕의 가족들을 당시 고려로 귀양보냈고, 이들은 제주도에 정착하게 된다.
양왕 가족에 대한 처분은 관대했지만, 완강한 저항에 분노한 명나라군은 포로중 성인남자는 모두 처형하고, 미성년자는 거세해 노비로 명나라 공신이나 황족에게 분배되었다.[3] 정화의 아버지인 마합지는 자결 또는 전사했고, 정화는 거세되어 훗날 영락제가 되는 연왕(燕王) 주체(朱棣)에게 분배되었다.
정화는 거세된 자답지 않게 기골이 장대했으며 (키가 9척, 허리둘레가 5척이었다고 한다), 연왕에 대해 충성심을 보였기 때문에, 이를 알아본 연왕은 그를 장수로 삼았다. 홍무제 주원장은 내시들을 경계하여 환관들을 교육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정화는 운좋게도 난징에서 멀어진 베이징에서 연왕과 함께 행동했기 때문에 문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명나라 내부사정 등으로 인해 이 당시 정화의 구체적 행적은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정화가 만약 홍무제 휘하에서 장수를 했다면 꽤 공을 세웠을 것이다. 연왕은 당시 명나라의 북방 방어를 맡고 있었으며, 막북에서 호시탐탐 중원 재탈환을 노리던 북원세력과 나하추를 여러번 격파했다. 명군의 압박을 받은 나하추는 결국 투항하고, 연왕의 세력권은 만주까지 확장되었다. 이로써 연왕은 명나라 최대군벌이 된다.
이렇게 세력을 키운 연왕은 정난의 변을 일으켜 건문제에 반란을 일으켰다. 정화는 연왕의 본거지인 연경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일설에 의하면 연왕의 반란을 진압하러 진군한 50만의 관군을 1399년 연경 근처 정촌패(鄭村貝)에서 8만의 병력으로 막아낸 전투를 그가 지휘했다고 한다. 4년간의 내전 끝에 연왕이 지휘한 반란군은 명나라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켰다. 연왕은 난징을 함락한 후, 영락제로 즉위했고, 정화는 공신이 되었다. 이 공적으로 그가 대승을 거둔 정촌패에서 따온 정(鄭)씨 성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와 함께 불교식 이름인 삼보(三寶 혹은 三保)라는 이름도 하사받았다.
3. 정화의 대원정[편집]
1405년 정화는 영락제의 명을 받들어 정화의 대원정으로 유명한 대항해의 총지휘관으로 출정하여 여러 차례 항해와 탐험을 하였으며, 1433년 4월, 7차 항해에서 돌아오는 중 배에서 병사했다.
4. 평가[편집]
정화는 단순 환관으로써 궁내에서 내시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장수 노릇을 하면서 영락제를 등극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이 공으로 명나라의 내시부라고 할 수 있는, 내궁감의 최고우두머리인 태감으로 승진하였다. 사실 이 정화의 활약은 영락제의 환관 중용과 더불어 명나라의 멸망원인의 하나가 되는 환관 세력이 성장하게 되는 단초가 되는데, 홍무제는 문맹만 환관으로 고용하고, 중책을 맡는 것을 엄금했지만, 정화의 활약 때문에 영락제 이래 명나라 황제들은 환관들을 중용하게 될 정도였다. 이후 명나라 조정에서 환관은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물론 정화는 나중에 명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는 부패한 환관들과는 무관했다. 영락제가 즉위하기 전 그는 연왕부의 환관이자 장수로써 활약했고 영락제가 즉위한 1402년 직후인 1405년에 정화의 대원정의 첫 항해를 떠난 이래 그는 이후 30년간 각각 2-3년간에 걸친 7차의 원양항해로 궁중암투에 끼어들 시간도 없었고, 육지에 있던 시간도 대부분을 항해 준비에 보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해외로 나간 덕분에 궁중정치에 엮여 해를 당하지 않고 평가가 떨어질 일이 없어 명나라를 넘어 중국사의 위대한 모험가로 호평받을 수 있었으니 매우 이득이 된 셈이다.
정화는 후세의 환관들에게 사기를 쓴 사마천과 종이를 발명한 채륜 못지않은 환관의 대영웅으로 존경받았다.[4] 그런데 정화는 조정에서 정치세력이 되는 환관들의 패거리를 만들지도 않았는데도, 명나라때 십상시 못지않게 사대부들과 치고받으며 권력을 농단하던 환관들은 정화를 일종의 비조로 보아 떠받들었다. 위에서 지적되었듯이 반환관파 사대부들인 명나라 동림당은 환관들이 자신들의 비조로 추앙하던 정화를 영 좋지 않게 보았을 것이다.
5. 대중매체에서의 정화[편집]
- 2009년에 중국에서 정화가 주인공인 <정화하서양>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고, '정화의 대항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방영되었다.
어린 마화는 거세되어 연왕부에 보내졌는데 똑똑하고 충성심이 높아서 영락제와 인효문황후에게 총애를 받는다. 요광효의 제자가 되었다. 연왕 주체를 위해 첩보목적으로 왕경홍같은 태감들을 포섭했다. 인질로 끌려간 고치와 고후를 구출했고, 연왕이 중과부적으로 생포될 위기에서 적장을 저격하기도 한다. 전쟁의 공으로 정씨 성을 하사받았다.
무슬림이라 메카에 가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중동까지의 장거리 항해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대항해에 부정적인 장군과 진조의같은 해적들의 방해속에서도 정화는 충성스럽게 임무를 수행했다. 호르무즈에서 흑인노예매매를 보고 격노했으며 유럽의 무기, 갑옷 퀄리티에 감탄하기도 했다. 스리랑카의 기습에 515명이 죽었지만 정화는 국익을 위해 전면전을 포기했으며 오히려 영락제를 설득하기도 했다.
영락제에게서 '짐은 중원을, 정화 너는 바다를 다스린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고 영락제가 친히 정화의 집에 행차하여 식사를 할 정도로 잘나가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영락제 승하 후 홍희제는 역모죄로 정화를 감금했고 정화의 수하 300명을 죽였다. 칼을 목에 차고 베이징으로 압송되는 굴욕도 겪었다. 20년간의 항해일지와 항해도도 모두 불태워졌다. 새로 즉위한 선덕제는 대신들 앞에서 허리굽혀 정화에게 인사를 했을 정도로 정화를 예우하였다.
극 전반에 걸쳐 송나라 때부터 남양군도를 떠돌던 중화의 자손이라고 하여 은근히 중화사상을 내비치나, 유럽인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유럽을 경계하는 내용 또한 비중 있게 나온다. 보통 사극에서 환관들은 간사하고 사적 욕심이나 부리는 탐욕스러운 간신 내지 암중흑막, 과묵한 조력자, 아예 제대로 된 인간도 아닌 걸어다니는 병풍이나 샌드백 수준으로 묘사되지만, 본작에서 정화나 정화와 비슷한 사연의 동기 환관들은 대부분 난리통에 가족을 걱정하는등 인간적인 면모가 강조되었다. 정화도 환관이라는 멸시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소임을 다하며 영락제의 '총애'를 넘어선 '신뢰'를 쌓아나간다.
정화 원정의 범위에 대해서도 오버하지 않고 선덕 연간의 마지막 7차 항해에서 남인도양의 남아프리카 인근까지 진출했으나 미처 대비하지 못한 얼어죽을 날씨 때문에 아굴라스곶을 돌지 못하고 정화가 죽기 이전 회항했다고 묘사되었다. 티무르와 영락제의 이뤄지지 않은 데스매치에 대한 떡밥도 묘사되어 티무르 제국이 명나라 서북 방면으로 침공하였으나 전쟁이 커지기 전에 정화의 함대가 인도양 북서부에서 무력시위를 벌이며 티무르 제국에게 본진털이의 위협을 강요했다는 설정이 추가되었다.
- 성상영의 《신공절학》에 단역으로 등장하는데, 이슬람계 미녀의 모습인 것으로 묘사된다(...).
- 2019년 중국 드라마 <대명풍화>에서 정화가 짧게 등장한다. 엄청난 CG를 동원해 수십척의 함선을 이끌고 아프리카까지 항해하는 대업적을 거뒀다고 표현하였다.#
- 2022년 중국 드라마 <산하월명>에 등장한다. 인효문황후가 친정에 돌아갈 때 수행하는 역할로 처음 등장한다. 등장횟수는 적지만 등장할 때마다 영리하고 충성스럽게 표현된다. 연왕에게 이경륭을 공략할 계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영락제 등극후 정난의 변의 공으로 정씨를 하사받았다. 건문제 수색의 임무와 해외사절의 임무를 맡게 된다.
- 로맨싱 사가 2에도 무장 상선단 중 1명으로 그의 이름을 딴 '테이와'(정화의 일본식 독음)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 징기스칸 4 시나리오 4에서는 재야 미등장 장수로 정치 84, 전투 87, 지모 78, 특기 상업, 외교, 기동, 돌격, 병과 적성 보병 B, 궁병 B, 기병 B, 수군 S로 준 먼치킨이다.
- 대항해시대2의 해킹 모드 중에는 정화가 등장하는 것도 있으며 '대항해시대2 정화편'으로 알려져 있다. 추가된 컨텐츠들을 보면 상당히 고퀄이다.
- 스타트렉 세계관의 드라마인 스타트렉: 피카드에서도 스타 플릿소속 탐험선인 USS Zheng He가 등장한다. 선장은 스타트렉 TNG 시리즈의 기함인 엔터프라이즈의 장 뤽 피카드 선장 휘하에서 부선장을 역임했던 윌리엄 T. 라이커이다.
6. 여담[편집]
- 서양권 웹에서는 Admrial Zheng He, Cheng Ho[5] 등으로 검색하면 글이 쏟아져 나온다.
- 중화민국군 해군에서는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라이센스판인 청궁급 호위함의 2번함에 정화의 이름을 붙여 기리고 있다. 인민해방군 해군도 사관후보생 훈련함 '정화'함이 있다. 해방군 쪽에서는 전통적으로 인명은 훈련함에 붙이고, 주력 전투함은 지명을 따와서 이름짓는 명명법이 있다.
- 하지만 정화의 이름을 딴 첫번째 현역 해군함은 중국이 아니라 미해군의 USS Cheng Ho 함으로 원래 1939년 홍콩에서 건조된 정크배였으나, 이후 미해군이 구입하여 태평양 전쟁 당시 하와이 근해의 순찰함으로 사용했다. 전쟁이 끝난 후 퇴역하여 민간선박으로 운용되다가 1990년 스크랩되었다고 한다.
- 환관이기 때문에 자식이 없었으나, 형 마문루의 자식을 양자로 삼았다고 한다.
7. 관련글[편집]
[1] 병음: Zhèng Hé (정허)[2] 정화의 해외 원정 관련한 기록이 요약된 명사의 외국전의 메카와 메디나 관련 기록을 보면#1#2 그가 무척 독실한 무슬림이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인도를 천축국이라고 높여 부른 것 비슷하게, 메카를 천방(天方), 천당(天堂)이라고 기록하였다.[3] 명나라는 소수민족의 반란에 이런식으로 처리했다. 명나라 정통제 시절 발생한 묘족의 반란에서도, 묘족 성인 남성은 처형하고, 사내아이들은 모조리 거세해버렸다. 훗날 청나라도 이를 따라하여 삼번의 난이나 야쿱 벡의 난에서 동일하게 주모자(오삼계, 야쿱 벡)의 자손들을 처리했다.[4] 사실 채륜과 달리 사마천은 궁형을 받아 고자가 되었을 뿐 궁에서 시종을 한 환관은 아니다.[5] 전자는 한어병음 표기, 후자는 웨이드-자일스 표기. 더 정확한 한어병음 표기는 Zhèng Hé이고 더 정확한 웨이드-자일스 표기는 Chêng⁴ Ho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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