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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薛景成
(1237 ~ 1313)
1. 개요[편집]
고려 말의 의사.
2. 생애[편집]
설경성은 계림 사람으로 설총의 후손을 자처했다. 그 조상은 대를 이어 의술을 전했는데, 설경성 역시 의술에 재능이 있었다. 설경성은 왕의 약을 담당하는 상약국에서 정9품의 의좌(醫佐)로 벼슬을 시작했다. 벼슬이 점점 높아져 군부사(병부)의 총랑(시랑)에 임명되더니, 갑자기 동지밀직사사로 임명돼 재추의 반열에 들고 지도첨의사사 벼슬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은퇴한 뒤에도 상약국에서 충렬왕을 치료했고, 그 명성은 날로 높아졌다.
원 세조가 병을 앓자 고려에 의사를 구했다. 1285년 3월 안평공주가 설경성을 불러와 노잣돈과 함께 옷 2벌을 하사했고, 설경성은 그 길로 원나라로 떠났다. 설경성의 처방이 효엄이 있자 황제는 크게 기뻐하면서 설경성에게 집과 곡식을 하사했고, 궁궐에 출입할 수 있는 특권을 내렸다. 한편 황제는 설경성에게 바둑을 두게 하고 그 앞에서 직관#현장 관람하기도 했다. 2년을 원나라에서 머무르던 설경성이 가족 생각이 나서 고려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황제는 가족들을 데리고 올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는데, 설경성의 처가 떠나기를 반대해 결국 다시 나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얼마 뒤 황제는 설경성을 다시 불렀고, 설경성은 중국을 오갔다. 세조 재위 중에 받은 하사품만 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고 전한다. 고려에서는 다시 설경성에게 관직을 더해, 삼사우사를 거쳐 밀직부사 등을 역임했다. 이후 즉위한 성종 역시 설경성을 자주 찾았기에 결국 가족은 고향에 두고 본인 혼자 원나라에서 살게 됐다.
원나라에서 고려에 보내는 사절단에 설경성이 보좌 역으로 끼기도 했는데, 마침 고려에서는 충선왕비 한국공주와 조비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에서 성공해 돌아온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설경성은 고려 권력자들과의 만남을 피했다. 설경성은 첨의찬성사 벼슬이 더해져 두 번째로 은퇴했고 1313년 음력 2월 5일에 죽었다.
3. 평가[편집]
설경성은 키가 크고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성품은 온후해, 비록 천자를 알현하고 국왕의 은총을 받았을지라도 자손을 위해 은택을 받으려는 것이 없었으며, 또한 재산을 늘리려고 하지 않았다. [1]
『고려사』 권35, 방기 열전.
4. 가족 관계[편집]
설경성의 아들 설문우는 과거에 급제해 성균관대사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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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景成身長美風儀, 性謹厚, 雖見知天子, 蒙幸國王, 未嘗爲子孫求恩澤, 亦不治産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