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언이
덤프버전 :
1. 개요[편집]
고려 중기의 문신, 정치가. 여진정벌과 동북 9성 개척으로 유명한 윤관의 6남이다. 김부식의 강력한 정적으로 흔히 김부식의 라이벌로는 묘청이나 정지상이 꼽히지만 사실 중앙 정치판에서 김부식과 대립한 인물은 윤언이로써 젊은 시절부터 말년까지 김부식과 거의 평생을 대립한 숙적 관계였다."여진은 본래 아조(我朝) 사람의 자손이기에 신복(臣僕)이 되어 누차 조천(朝天)해왔습니다. 그 호적이 모두 아조에 올라와 있는데 어떻게 거꾸로 우리가 신하가 될 수 있겠습니까?"
- 금나라의 칭신 요구에 반발하는 윤언이. 윤언이 묘지명에서 발췌.
묘청은 현대 민족주의서 '사대'와 '자주' 프레임으로 라이벌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지만 애당초 김부식과는 급수 자체가 상대가 안 되는 인물이었고 정지상과의 대립은 문학적인 라이벌로 조명되지만 주로 야사에 그 일화가 전하는 편이다.
2. 역임 관작[편집]
3. 생애[편집]
3.1. 초기 행적[편집]
윤관은 일곱 아들을 두었는데 당시 고려 지배층이 대부분 그랬듯이 두 명은 출가해 승려가 되었고 아들들 중 윤언이는 어려서부터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다. 윤언이는 벼슬길에 오른 후 여진 정벌 때도 아버지를 따라 종군했고 윤관이 여진족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빠졌을 때 아버지를 모시고 분전하여 척준경의 원군이 올 때까지 버텨내기도 했다.
윤언이는 여진 정벌이 끝난 후 승진 코스를 밟으며 승승장구했는데 인종, 정지상, 권적(權適) 등과 더불어 정치의 잘잘못을 논하기를 즐겼다고도 한다.
3.2. 김부식의 정적[편집]
신라 왕실의 후손이자 낙랑국 후작인 김부식을 위시한 개경파에 대항하여 윤관과 의천의 신법을 계승한 신법파(新法派)의 거두로서, 정지상과 함께 칭제건원을 주장한 서경파였으나 묘청처럼 급진적인 서경 천도를 내세우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당시 최고 실세였던 김부식과 척을 졌다는 것에 있었다. 예종 시절 예종은 개경 영통사에 대각국사 의천의 비문을 윤관으로 하여금 짓게 했는데 그 비문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영통사의 승려들이 예종에게 수정할 것을 건의했다.
예종은 당시 이미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당시에는 신참 관리였던 김부식에게 그 비문을 고치게 했다. 이는 윤관의 명예와 관련이 있던 일이었는데 당시 윤관은 최고위 재상에 있었고 김부식은 하급 관리였기 때문에 상급자인 윤관의 체면을 생각한다면 김부식이 이를 사양해야 했다. 이대로 하면 일개 하급 관리가 재상의 허물을 드러내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부식은 아무 거리낌없이 이를 받아들여 윤관의 비문을 수정해버리고 이에 윤언이는 아버지의 체면을 구겨버린 이 행동에 김부식에게 앙심을 품었다고 한다. 뒷날 국자감에 왕이 행차하여 김부식에게 <주역>을 강론하게 하고 윤언이로 하여금 김부식 강의의 검토관 역을 맡겼는데 윤언이는 주역에 정통했기 때문에 <고려사>에 김부식이 진땀을 흘렸다고 기록되었을 정도로 날카로운 질문과 반론을 통해 김부식을 어전에서 망신을 주었다.
1135년 묘청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김부식이 출정을 하고 윤언이가 막료로 참가하게 되는데 김부식이 이전에 그가 정지상 등과 어울려지냈던 사실을 상기시키며 반발한 탓에 결국 양주방어사로 좌천되고 말았다. 광주목사가 된 이후에는 어마어마하게 긴 사죄문 (고려사 윤언이 열전 참고)을 올리고 나서야 1140년 개경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 고려의 유명한 정치가들이 대개 그랬지만 문인이었음에도 무장으로서도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 윤언이의 무용담이 상당하다. 특히 화공이 특기였고 공성병기의 활용법을 잘 알고 있어서 서경성 공성전 때 화공과 공성병기를 적극 활용해서 서경성 성문을 불태우거나 건물에 타격을 입히는 등 막대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정적이자 당시 토벌군 총사령관 김부식의 견제로 인해 제대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토벌 중 김부식은 윤언이의 작전 제안을 번번이 거절하였고 이후 휘하 장수들의 찬성으로 결국 윤언이의 작전을 채택하게 되자 이번에는 작전 방향과 상관이 없는 곳으로 윤언이 부대를 옮겨버리기도 했는데 공을 세울 기회를 아예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윤언이가 끝내 중앙 정계로 복귀하면서 졸지에 정적을 마주하게 된 김부식은 수 차례 은퇴를 청했다고 하는데 이 때 인종의 명으로 편찬한 것이 바로 삼국사기. 문장이 매우 뛰어나 주역의 해설서인 <역해>를 지었으나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자호를 금강거사라 하였다.
윤언이 묘지명에 따르면 의종 1년, '선군별감(選軍別監)이 되어 여러 해 미결된 전민(田民)의 송사를 모두 처리하였고, 또 군대 20만 여명을 훈련시키니 사람들이 모두 복종하였다고 한다.
3.3. 최후[편집]
의종 2년, 외직 중군 병마판사(中軍 兵馬判事) 겸 동북면 행영병마판사(東北面 行營兵馬判事) 및 삼군훈련사(三軍訓鍊士)를 수여받고 계속 군부에 나아가 군사 훈련을 주도하던 중 1149년 9월 3일 출근하다 몸이 좋지 않아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와 대화를 나눈 뒤 죽었다고 한다.
반면 <고려사> 및 <보한집>에 기록된 윤언이의 마지막은 많이 다르다. 은퇴한 윤언이는 자기 고향인 영평현에 금강재(金剛齋)라는 집을 짓고 살았다. 불교에 심취해 한 고승과 친하게 지냈는데 작은 의자(포암)를 만들고 먼저 죽는 사람이 의자에 앉아 죽기로 약속했다.
어느 날 윤언이가 갑자기 고승을 찾아와 밥을 먹고는 말하기를 자신이 곧 죽을 것이니 미리 언질을 주려고 왔다고 했다. 이에 고승은 의자를 건네주었고 윤언이는 자신과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며 웃으며 사세구를 짓고 의자에 앉아 죽었다고 한다.
기록의 진실성이나 현실을 따지면 묘지명 기록이 더욱 실제일 가능성이 높지만 <고려사>에도 포암 설화가 실제 역사로 기록되어 있는걸 보면 윤언이의 최후가 어땠는지 알기 어렵지만 윤언이가 죽고 2년 뒤에 김부식도 세상을 뜬다.
4. 자손[편집]
이후 아들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고. 그 중 윤인첨은 문신임에도 불구하고 무신정권기에도 재상의 직책에 오르고 상장군까지 되어 중방에 참여하는 등 상당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는 윤관이 무신들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고, 윤언이는 무신들의 경멸 대상이었던 김부식과 척을 지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윤언이의 아들 윤인첨은 무신정권기에도 잘나갔다. 윤인첨은 후에 조부 윤관에 이어 가문에서 2번째로 배향공신에 오르는 영예를 안게 된다. 반면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은 정중부를 건드린 사건이 화근이 되어 무신정변 때 정중부의 손에 죽음을 맞았던 것도 대비가 되는 점이다.
그러나 윤언이의 5남 윤돈신(尹惇信)과 윤인첨의 맏아들 윤종악(尹宗諤)은 정중부의 난 당시에 죽는 등 집안에 화를 아주 면하지는 못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2 14:14:48에 나무위키 윤언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광양 김씨(光陽 金氏) 김약온의 딸[2] 윤언이 묘지명에 따르면 아버지 윤관의 묘지도 이 곳에 있었다고 한다.[3] 오늘날로 치면 부총리급. 고려 중서문하성 평장사 직위는 네가지가 있었는데, 각각 1등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2등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3등 문하시랑평장사, 4등 중서시랑평장사이다.[4] 고려사 및 윤언이 묘지명 기준.[5] 신흥사 공신당에 초상화가 올라간 삼한공신이다.[6] 파평 윤씨 족보엔 윤선지가 고조부라고 한다.[7] 파평 윤씨 족보엔 윤금강이 증조부라고 한다.[8] 정주 류씨(貞州 柳氏) 류홍의 딸 하원군군(河源郡君) 류씨의 남편. 파평 윤씨 족보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윤언식의 묘지명에 쓰인 기록을 바탕으로 윤언영이 처음 이름이고 나중에 윤언식으로 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9] 동인지문사륙(東人之文四六)에 수록된 윤관의 표문에서 등장하는 아들[출가] A B [10] 장흥 임씨(長興 任氏) 임원후의 부인[11] 광양 김씨(光陽 金氏) 김약온의 딸[12] 명종의 배향공신이다.[13] 직산 최씨(稷山 崔氏) 최홍재의 차남 전중소감(殿中少監) 최온(崔溫)의 딸과 혼인[14] 남평 문씨 문공유(文公裕)의 딸과 혼인했다. 문공유는 문공원과 형제다.[15] 조계종(曺溪宗) 중대사(重大師)의 승려. 효돈은 법명[16]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 김단(金端)의 딸과 혼인[17] 윤언이의 묘지명 기록에 의하면 칠남부터 사녀까지 모두 일찍 죽어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