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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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壽山
(? ~ 1376)
고려 말기의 인물. 수안군 출신으로 감찰시승을 지낸 이병의 손자이자 시랑 이인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병부상서 전승의 딸이다. 숙부 이인후는 문하좌시랑을 지냈고, 처가는 인천 채씨다. 본래 뿌리는 연안이었으나, 이수산이 수춘군에 봉해지면서 본래 수안 이씨와 계통이 다른 수안 이씨로 분관한 것으로 추정된다.[1] 이 곳을 참고하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충혜왕 때 밀직부사에 임명되어 추성익대좌명공신의 호를 받고 춘성군에 봉해졌으며, 1352년 조일신의 난 때 살해당할 뻔했지만 숨어서 죽음을 면했고 첨의평리, 찬성사, 행성낭중 등을 역임하다가 기철 등이 숙청되어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나자 수춘군으로 봉해지고 동북면 도순문사가 되어 여진을 평정했으며, 삼사우사, 판삼사사 등으로 승진해 추충보절익대좌리공신의 호를 받고 수춘부원군이 되었다가 몽고의 악관이 악관들을 데리고 음악을 연주하자 한족 여인을 불러 노래를 부르게 해 즐겼다가 그 소리가 공민왕에게도 들려 이삼사(이수산)는 늙었기에 여색에 대해 어떻게 하는 것은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1363년 최유(崔濡)가 원 혜종에게 참소하여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왕으로 추대하였고, 이듬해 1월 요양성의 원나라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침입하였다. 이에 경복흥(慶復興)이 서북면도원수가 되어 안주에 진을 치고 최영, 이성계 등과 함께 이를 격파하였다. 개선한 경복흥을 위해 공민왕이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 자리에서 이수산은 술에 취해 단판(檀板)[2] 을 내리치고 판으로 재상들을 치며 희롱하는 등 경솔하고 예의가 없었다. 1365년 신돈이 국정에 관여하면서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었다. 이후 수춘부원군에 봉해졌다.
1374년에 명나라에서 파견한 임밀, 채빈 등이 문묘를 배알하면서 모든 생도들이 읍을 하면서 채빈은 또다시 배알하는 것을 기다리기 위해 일부러 답하지 않았다가 모든 생도들이 학사로 돌아가자 채빈이 분노했는데, 이수산은 우리 나라에서 존경하는 사람에게 절을 올릴 때 감히 일시에 함께 읍하지 않는다면서 채빈을 진정시킨 후에 이수산이 몰래 사람을 시켜 생도들에게 다시 읍하도록 재촉했다.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경복흥, 이인임 등이 왕을 올리는 일에 결정하지 못하고 지체하자 이수산은 종실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인임의 주장대로 우왕이 왕이 되었으며, 1376년에 죽자 시호를 공량(恭良)이라 했다. 또한 공양왕이 그 충의를 표창하고 그 묘에 제사를 올리고 자손들을 등용하였다.
아들은 두 명이 있었는데 그 중 장남 이념(李恬)이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지밀직사사 등 요직을 지내다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이 되었다.
1. 개요[편집]
李壽山
(? ~ 1376)
고려 말기의 인물. 수안군 출신으로 감찰시승을 지낸 이병의 손자이자 시랑 이인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병부상서 전승의 딸이다. 숙부 이인후는 문하좌시랑을 지냈고, 처가는 인천 채씨다. 본래 뿌리는 연안이었으나, 이수산이 수춘군에 봉해지면서 본래 수안 이씨와 계통이 다른 수안 이씨로 분관한 것으로 추정된다.[1] 이 곳을 참고하면 자세히 알 수 있다.
2. 생애[편집]
충혜왕 때 밀직부사에 임명되어 추성익대좌명공신의 호를 받고 춘성군에 봉해졌으며, 1352년 조일신의 난 때 살해당할 뻔했지만 숨어서 죽음을 면했고 첨의평리, 찬성사, 행성낭중 등을 역임하다가 기철 등이 숙청되어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나자 수춘군으로 봉해지고 동북면 도순문사가 되어 여진을 평정했으며, 삼사우사, 판삼사사 등으로 승진해 추충보절익대좌리공신의 호를 받고 수춘부원군이 되었다가 몽고의 악관이 악관들을 데리고 음악을 연주하자 한족 여인을 불러 노래를 부르게 해 즐겼다가 그 소리가 공민왕에게도 들려 이삼사(이수산)는 늙었기에 여색에 대해 어떻게 하는 것은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1363년 최유(崔濡)가 원 혜종에게 참소하여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왕으로 추대하였고, 이듬해 1월 요양성의 원나라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침입하였다. 이에 경복흥(慶復興)이 서북면도원수가 되어 안주에 진을 치고 최영, 이성계 등과 함께 이를 격파하였다. 개선한 경복흥을 위해 공민왕이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 자리에서 이수산은 술에 취해 단판(檀板)[2] 을 내리치고 판으로 재상들을 치며 희롱하는 등 경솔하고 예의가 없었다. 1365년 신돈이 국정에 관여하면서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었다. 이후 수춘부원군에 봉해졌다.
1374년에 명나라에서 파견한 임밀, 채빈 등이 문묘를 배알하면서 모든 생도들이 읍을 하면서 채빈은 또다시 배알하는 것을 기다리기 위해 일부러 답하지 않았다가 모든 생도들이 학사로 돌아가자 채빈이 분노했는데, 이수산은 우리 나라에서 존경하는 사람에게 절을 올릴 때 감히 일시에 함께 읍하지 않는다면서 채빈을 진정시킨 후에 이수산이 몰래 사람을 시켜 생도들에게 다시 읍하도록 재촉했다.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경복흥, 이인임 등이 왕을 올리는 일에 결정하지 못하고 지체하자 이수산은 종실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인임의 주장대로 우왕이 왕이 되었으며, 1376년에 죽자 시호를 공량(恭良)이라 했다. 또한 공양왕이 그 충의를 표창하고 그 묘에 제사를 올리고 자손들을 등용하였다.
아들은 두 명이 있었는데 그 중 장남 이념(李恬)이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지밀직사사 등 요직을 지내다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이 되었다.
3. 대중매체[편집]
드라마 정도전(드라마)에서는 이종래가 연기했는데, 너무 젊게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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