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정(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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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光挺(?~1194)
1. 개요[편집]
고려의 장군으로 본래 사병 출신이었으나 1170년에 정중부 등이 주도한 무신정변에 꼽사리 낀 덕에 대장군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매우 탐욕스럽고[1] 무식했으며 인사 행정에서 많은 월권을 저지르는 등 횡포를 일삼았다.
2. 생애[편집]
이광정은 본래 병졸 출신이었다고 하는데 고려사 열전에는 정중부 항목에 부록 형식으로 이광정에 대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정중부 휘하의 병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170년에 정중부 등이 무신정변을 일으키자 그 때 꼽사리를 낀 덕분에 종3품 대장군까지 오르게 되었다.[2] 명종 초에는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가 되고 거듭 승진하여 원사(院使)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내시낭장(內侍郞將) 겸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 장보(莊甫)는 성품이 강직해 권세가에 아첨하지 않았는데 하루는 장보가 내시 장군(內侍將軍) 정존실(鄭存實)의 교만과 방자함을 꾸짖은 일이 있었다. 그러자 중방에서는 장보가 장관을 모욕했다고 탄핵해 거제현령으로 좌천시키려 했다. 이에 격분한 장보가 추밀원으로 찾아가 이광정과 부사(副使) 최충렬(崔忠烈)에게 "도대체 내게 무슨 죄가 있어서 바닷가로 내쫓으려 하느냐?"고 항의했다. 그러자 이광정은 크게 분노하여 즉시 장보를 먼 섬으로 유배보냈고 얼마 뒤 몰래 사람을 보내 장보를 물 속으로 밀어 넣어 죽였다고 한다.
정중부가 처형당한 해인 1179년에 이광정은 종2품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는데 그 때 그가 한 번은 어떤 일로 경시서령(京市署令) 왕총부(王寵夫)에게 청탁을 넣었는데 왕총부가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이광정이 전리(電吏)를 시켜 중서성(中書省)으로 오게 한 다음 큰소리로 꾸짖었으나 왕총부는 원칙을 내세우며 굴복하지 않았다. 이에 대노한 이광정이 욕설을 퍼붓고 뜰 아래로 끌어내려 관복을 벗기고 가두었다가 얼마 후에 석방시켰다.
어느 날 화성이 목성을 침범하자 이광정은 변란이 일어날 조짐이라고 여겨 두 번이나 해직을 간청했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태자태부(太子太傅)·판병부사(判兵部事)를 덧붙여 주었다. 이광정은 탐욕스럽고 무식했으며 인사 행정에서 많은 월권을 저질렀다. 뒤에 정2품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승진했다.
1183년에 총재(冢宰) 민영모가 나이 들어 은퇴하려 했으나 아직 70세가 되지 않아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이광정이 대신 그 직책을 맡으려고 먼저 해직을 청하는 글을 올렸으니 이는 민영모의 은퇴를 재촉하는 잔꾀였다. 얼마 후에 그는 민영모를 대신하여 수태부(守太傅) 겸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되었다.
1184년 8월, 태백(太白)이 상장성(上將星)과 집법성(執法星)을 침범하므로 또 거짓으로 표를 올려 사직했다가 조금 뒤 태백이 물러가자 다시 복직했다. 11월, 팔관회 행사 때 왕이 구정(毬庭)에서 풍악을 관람하였는데, 이광정이 축수의 술잔을 올리자 왕은, “경이 벌써 늙었으니 애석하도다!”라고 위로하니 이광정이 눈물을 닦으며 흐느껴 울었다. 이는 나이 때문에 체직될까 두려운 나머지 그렇게 한 것이므로 모든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3] 다음날 퇴직을 청하는 글을 올렸는데 전례상 퇴직 요청은 모두 그해 10월에 올리게 되어 있었지만 이광정은 작위에 미련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때가 되어서야 올린 것이다.
이후로도 10년을 더 살다가 1194년에 죽었다. 그리하여 이의방과 정중부, 경대승 등의 집권을 모두 지켜보고 이의민이 집권하는 중에 죽었으니 그야말로 가늘고 길게 버티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자가 바로 이 자라 할 것이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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