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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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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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光植
(? ~ 1221)
1. 개요[편집]
고려의 인물. 시호는 대숙공(戴肅公).
2. 생애[편집]
전주 사람으로 음서를 통해 양온서령동정에 보임됐다. 외직에 나가 영암군판관을 지내며 지역을 다스림에 공적이 있었다. 개경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또 선유도감, 안렴사 등 지방에도 여러 번 파견됐다. 1212년부터 추밀원에서 관직을 지내며 좌승지, 지주사를 거쳐 1214년 추밀원부사로 승진했다. 1217년 봄 수사도 참지정사를 지냈고, 1218년 중서시랑평장사가 됐다. 1221년 6월 병을 앓아 사직을 청했고, 수태보 개부의동삼사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로 은퇴했다. 같은 해 8월 3일(음력) 양제리(楊堤里)의 사저에서 죽었다. 사후 시호를 받았고, 예에 따라 황봉산(凰鳳山) 북쪽 기슭에 장사됐다.
3. 평가[편집]
風儀瓌偉, 淸儉節欲, 沉重寡言.
풍채와 거동이 크고 훌륭했으며, 청빈하고 검소하며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진중했으며 말수가 적었다.
『고려사』 유광식 열전.
政尙淸嚴, 吏畏民懷.
다스림에 청렴하고 엄중함이 높았으니, 아전들은 경외하고 백성들은 따랐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전라도, 영암군, 명환.
4. 가족관계[편집]
4.1. 조상[편집]
- 증조부: 유신
- 조부: 유덕문
- 부: 유영재
- 모: 횡천군대부인 조씨
- 조부: 유덕문
유광식의 증조부 유신은 수사공 좌복야 참지정사를 역임했고 시호는 충신공(忠愼公)이다. 조부 유덕문은 형부원외랑을 지냈고 사후 상서우복야로 추증됐다. 아버지 유영재는 합문지후를 지냈고 마찬가지로 상서우복야로 추증됐다. 어머니 횡천군대부인 조씨는 합문지후 조시언(趙時彦)의 딸이다.
4.2. 자녀[편집]
- 처: 상당군부인 곽씨
- 딸
- 사위: 임씨
- 아들: 유유
- 아들: 유소
- 손자: 유능
유광식은 곽양선(郭陽宣)의 셋째 딸인 상당군부인 곽씨와 사이에서 여러 자녀를 뒀는데, 대부분이 요절했다. 장녀는 임씨와 결혼했다. 아들 유소(柳韶)는 평장사를 지냈다. 유소의 아들로 유광식의 손자인 유능(柳能)은 최의의 측근이었고, 새로 권력을 잡은 김준에게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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