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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 반도체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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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86년, 91년, 96년 세차례에 걸쳐서 미국과 일본정부가 체결한 통상협정이다. 미일 간의 반도체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하여 체결되었다.
2. 상세[편집]
일본은 1970년대 석유파동, 그로 인한 1980년대 정부 주도 조선산업 구조 조정 등을 겪으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속 가능한 경제개발과 산업에 대해 고민했다. 이 과정에서 향후 일본 경제를 이끌어 줄 첨단산업의 필요성을 발견, 메모리 반도체(특히 그 중에서도 DRAM) 개발 및 생산을 그 핵심으로 판단해 통상산업성(현 경제산업성)의 보호 아래 성장시켰다.
정부 주도 아래 일본 반도체 산업은 제조업체, 제조장치업체, 소재(웨이퍼)업체로 이어지는 수직 산업구조를 형성할 수가 있었다. 정부 정책 뿐만 아니라 일본 산업계의 폐쇄적인 계열 문화까지 더해져서 미국산 제조장치나 소재들이 일본 제조업체의 공정라인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어 규모의 경제와 산업파생 효과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당시 반도체 시장에서 경쟁하던 미국을 압도하는 투자와 연구가 가능했던 것은 당연하다. 그 결과 미국 인텔 등과 비교해 수율(웨이퍼 한 장에서 뽑아내는 칩 비율)도 높을 뿐 아니라 무려 10%나 저렴한 가격에 납품이 가능했다. 여기에 당시 저평가돼있던 일본 환율, 값싼 노동력도 유리한 수출환경 조성에 힘을 보탰다. 이렇게 일본 반도체 산업은 1980년대 초중반 세계시장을 거침없이 잠식해 나갔다.
1984년까지만 해도 미국은 모토로라, 인텔, 마이크론 등을 앞세워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을 주도하고 있었고, 레이건 행정부의 경제 성적도 좋았다. 그러나 1985년을 변곡점으로 상황이 대반전 됐다. 그 전까지 세계 반도체 시장을 각각 44% 점유율로 양분하던 미국과 일본 사이에 균형이 깨진 것이다. 제2의 진주만 공습에 비유될 정도의 일본산 반도체 수출이 미국 반도체 산업에 치명타를 입혔고, 심지어 미국산 전자기기의 일본산 메모리 사용도 급증했다. 같은 시기 빠른 기간에 우후죽순 늘어난 일본 업체들의 영향으로 세계적으로 반도체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이상 현상도 발생하면서 메모리 가격이 폭락했다. 이걸 견디지 못한 인텔 등 미국의 반도체 업체 대부분이 메모리 시장에서 철수한다. 반면 일본 기업들은 공격적인 덤핑공세로 더욱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게다가 미국 주력 반도체 기업의 제품 품질이 일본 하위권 기업 제품보다도 떨어지기 시작하자 미국의 고민은 깊어졌다.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도 일본 반도체 산업의 강세가 꺾이지 않자 미국 반도체 산업은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섰다. 그러나 이대로 자국이 일으켜 세운 메모리 산업에서 손을 뗄 수는 없었다. 결국, 미국은 일본에 대한 통상압박을 준비했다. 1985년 6월 14일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의 무역대표부(USTR) 청원3은 그 시작이었다. 미국 반도체 업계는 일본 시장 진입 장벽, 외국산 반도체 차별, 일본 정부의 보조금 지원, 정부 주도의 반도체 투자 및 생산설비 확대 등을 문제삼았다. 이로부터 정확히 열흘 뒤 다시 미국 마이크론이 일본 반도체 기업 히타치 제작소, 미쓰비시전기, 도시바, NEC 등 7곳을 덤핑 혐의로 USTR에 제소했다. 이어 9월까지 인텔, AMD, 내셔널세미컨덕터 등 미국 반도체 업체들의 일본 업체들을 대상으로 한 덤핑 관련 제소가 이어졌다. 미국의 대일본 통상압박의 정점은 상무부가 찍었다. 바로 직권조사를 통해서다. 직권조사란 기업들의 제소 없이도 상무부 직권으로 특정국 수출품의 덤핑 여부 등을 조사하고 이에 대해 높은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매우 강력한 무역제재수단으로써 그 대상이 되는 국가에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다. 당시 말콤 볼드리지 미 상무부 장관은 일본 반도체의 덤핑혐의에 대한 직권조사로 압박 강도를 한층 끌어올렸다.
이 쯤 되자 일본은 도저히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일본 정부의 로비 등 그 어떤 외교도 양국 간 무역역조 심화와 통상갈등 최고조로 한껏 예민해진 미국을 상대로는 통하지 않았다. 결국, 일본은 미국과의 협상테이블에 앉아 양자협정문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당시 10% 수준이던 일본 내 외국산 반도체 점유율[1] 을 1992년까지 20%로 높이고 반도체 덤핑수출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또 미국의 대일본 반도체 직접투자 금지도 철폐해야했다. 그리고, 협정 체결 이후에도 미국은 일본의 미준수를 거론하여 보복관세 부과압박, 일본 반도체 산업 감시 등 압박을 이어갔다.
실제로, 미일 반도체 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는 일본 정부가 반도체 국산화를 위해 미국 반도체 업계의 일본 투자를 의도적으로 방해를 하였다. 그러면서 정작 일본 기업들은 미국 내에 공장을 건설하고 위기에 빠진 미국 반도체 기업을 매수하려고 시도하는 이중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렇듯 일본은 자국의 산업 육성을 빌미로 대놓고 미국을 상대로 보호무역을 가한 것이다. 그래서, 미국이 부당하게 일본을 상대로 통상 압력을 가했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실상은 이런 이유로 경제논리에서 미국이 더 이상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있었다.
나루히토 덴노의 아내인 마사코 황후와 약간의 연관이 있다. 마사코는 결혼 이전 외교관으로 활동했는데, 1991년 협정 수립 과정에서 미일 양측이 회담할 때 통역으로 참여했다.
3. 영향[편집]
이 협정의 연장을 거쳐 1996년 협정 종결 당시 미국은 목표한 점유율을 이뤄냈지만, 일본 반도체는 이미 회생불능 상태였다. 이 때를 기점으로 하여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한일무역분쟁때 강점을 과시한 소재, 제조장치 (이른바 '소부장') 중심으로 산업이 재편되고 엘피다 메모리 같은 전방기업들은 파산했으며, 미일 반도체 기업들의 기술원조나 라이센스 발주로 연명하고 있던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술발전을 거듭해 메모리 반도체 업계의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만약 이 협정으로 미국이 일본에 철퇴를 내리지 않았더라면, 10개에 육박하던 일본의 DRAM 제조사들이 철수하지 않고 일본정부의 지원 하에 덤핑을 계속 해대는 통에 삼성이나 현대(지금의 SK하이닉스)는 지금만큼 잘 나가는 상황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한국과 함께 반도체 강국으로 급성장한 대만이 이 협정으로 누린 혜택은 거의 없는 수준이다. 일단 TSMC는 창업 당시에 일본이 아닌 네덜란드의 노포 메이커 필립스로부터 출자와 기술지원을 받았다. 거기에 일본 기업들이 전성기때도 그닥 잘하지 못했던 프로세서 쪽으로 특화되어 나가서 엔비디아같은 신흥 팹리스 기업들과 동반성장한거라... 대만은 메모리 쪽으로는 애초에 진입도 늦은데다가, 90년대 말에 일본 반도체 업체들이 대거 몰락하고 합병하는 과정에서 한국 기업들을 견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기술을 퍼다줬음에도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 협정의 영향이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일본에서도 나온 의견인데 우리나라에는 '일본 반도체 패전(敗戰)'이라는 저서로 반도체 업계인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이름이 알려져있는 전직 엘피다 기술자 유노가미 다카시(湯之上隆)가 대표적이다. 해당 저서에서 그는 미일 반도체 협정이 일본 반도체 몰락의 원인이라는 일본 내의 통설을 완전히 부정하며, "일본의 반도체 기업들이 몰락한 것은 한국 기업들에 비해 혁신이 늦어서 발생한 기술의 패배다." 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보다 작기는 하지만, 또 하나의 원인으로 든 것은 마케팅에서 일본 대기업들이 삼성전자에게 패배한 것이라고 주장을 하였다. 삼성전자는 외국 주재원들을 잘 활용해서 현지 수요를 잘 파악했는데, 일본 기업들은 이런 발로 뛰는 마케팅에 약했다고 생각을 한다. 결국, 어느 쪽이나 일본이 현실에 안주하다가 몰락했다는 것이다.
한 술 더떠서, 이 사람은 일본 반도체를 몰락시킨 대기업 경영자들이 한국과 대만에게 밀려버린 결과를 전혀 책임지지 않고 회피하려는 태도 때문에 의도적으로 미일 반도체 협정을 핑계로 삼고 있다고 지적을 하고 있다. 애초부터 일본이 반도체를 만들던 시절에도 한국과 대만이 주력 산업으로 반도체를 만들어왔던 것을 모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산업계와 재계의 전문가들 중에서는 여전히 "미일 반도체 협정이 일본 반도체 산업 몰락의 근본 원인이다." 라고 지적하는 의견이 상당하다. 그리고, 이렇게 책임을 회피하려는 주장을 하는 이유는,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제조 기술이 일본보다 날이 갈수록 혁신적으로 발전해왔다는 결과는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정신승리같은 정서도 깔려있다.
한편, 일본의 게이오대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는 이명찬 교수는 "일본은 미일 반도체 협정 때문에 경쟁력이 뒤쳐진 것이 아니라, 반도체 산업의 패러다임이 점점 변하기 시작한 것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한 결과다." 라고 반론을 제기하는 주장을 했다. 사실, 일본의 핑계보다 이명찬 교수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일본은 미일 반도체 협정 이후에도 반도체를 만들지 않고 포기를 했던 것도 아닌데다 한국과 대만이 일본의 반도체 산업을 방해한 적도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4. 관련 문헌[편집]
미일 반도체 협정과 삼성전자의 기회
일본 반도체 붕괴시킨 '미일 반도체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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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면에, 이 당시 미국 시장에서 일본산 반도체가 차지하던 비율은 50%가 넘었다.